작성일 : 2021.02.15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마21.고난주간시작/예루살렘입성_성전정화_열매없는무화과나무의귀결_JC권위의정당성_회개순종의아들_포도원농부의배은망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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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마21장     


http://www.newspower.co.kr/sub_read.html?uid=45568  고난주간 기간 그리스도의 행적과 예루살렘성 인근 지도

http://www.ayang.org/bbs/board.php?bo_table=nanoom_sub1&wr_id=75  헤롯성전 구조, 이방인의 뜰, 여인의 뜰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다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11.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다

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14.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16.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17.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무화과나무가 마르다

18.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19.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20.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예수의 권위를 두고 말하다

2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2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25.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26.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27.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28.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9.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30.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31.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포도원 농부 비유

33.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34.  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35.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36.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37.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39.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40.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4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45.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46.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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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장 (개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구원의 문을 돌리는 두 개의 주요한 돌쩌귀(hinges)이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 그는 후에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20, 28절). 

그러므로 그의 죽기까지 당하신 고난과 부활의 역사는 그에 대한 어떠한 이야기보다 더 특별하게 복음서 기자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본서를 기록한 기자도 이 사실에 대해 서둘러 기록하고 있다. 그 이유는 본 장이 고난 주간이라고 불리우는 사실을 기록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제자들에게 한 번 이상이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거기에서 인자가 배반당해야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올라가시는 도중에 많은 선행을 베푸셨으며, 이제 마침내 예루살렘에 도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들에 대해 살펴 볼 수 있다.

Ⅰ. 고난 주간의 첫날에 공적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심(1-11).

Ⅱ. 거기에서 나타내신 권위, 즉 성전을 깨끗케 하심과 각종 매매자들을 내쫓으신 데서 나타내신 권위(12-13).

Ⅲ. 열매 맺지 않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으로써 유대 교회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나타내심. 이에 대해 제자들과 담화하심(17-22).

Ⅳ. 요한의 세례에 호소하심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정당화하심(23-270.

Ⅴ. 두 아들에 대한 비유를 설명하심으로써 세리의 회개와 관련하여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불신앙과 완고함을 책망하심(29-32).

Ⅵ. 배은망덕한 농부들을 내어쫓는 포도원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심으로써 그 결실치 않음을 인하여 유대교회의 운명을 예언하심(3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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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입성(마 21:1-11)

네 사람의 복음서 기자들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기 5일 전에 "예루살렘으로 개선하신" 이 구절에 유의하고 있다. 

유월절은 그 달의 14일 째에 있었는데, 이 사건은 유월절 나흘전 그달의 10일째(=종려주일)에 있었다. 율법은 이 날에 유월절에 잡을 희생의 어린양을 골라(출 12:3) 이 예식을 위해 구별해 둘 것을 가르치고 있었다.[흠없는 희생의 어린양 선정/구별일] 

그러므로 이 날에 우리를 위해 희생 제물이 되셨던 우리의 유월절이신 그리스도는 공적으로 그 모습을 나타내셨던 것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그의 고난에 대한 전주곡이었다.

그는 잠시 동안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촌락의 베다니에 머물고 계셨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맞추어 행하신 바, 공적인 예루살렘입성 바로 그 전날밤 저녁 식사 때에 마리아는 "그의 발에 기름을 부었다"(요 12:3). 

그러나 보냄받은 하나님의 대사(ambassadors)로서의 공적 직무를 수행하시기 위해 주님은 그가 베다니에 도착한 후 바로 그 날이 차기까지 얼마 동안까지 자신의 공적인 예루살렘 입성을 미루셨다. 

우리 주 예수님은 많은 여행을 하셨으며 습관적으로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까지 수십 마일을 걸어서 여행을 하셨다. 이것은 그의 겸손과 수고를 의미하는 것이다. 

잠시 멈추고 묵상해보라, "그가 선행을 베풀면서 다닐" 때 그의 발걸음은 몹시 피로하였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도 큰 불편과 고통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자들이 자신의 안일과 위엄만을 몹시 갈망하고 있었음은 얼마나 사악한 일인가! 

이제 여기서 그는 그의 생애에서 단 한 번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다. 

그것도 마치 그가 스스로 자초한 즐거움인 것처럼 고난을 받아 죽으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바로 그 시점이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내용 별로 구분하여 살펴본다면,

Ⅰ. 이 예식을 위해 행해졌던 준비. 

그것은 매우 초라하고 평범한 것이었으며, 또한 "그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음을" 나타내 보여 주는 것과 같았다. 

여기에는 무장한 전령사가 마련되거나 그의 앞에서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는 일이 없었으며 위엄 있는 황금마차도 없었으며 더구나 화려한 제복도 없었다. 

이와 같은 것들은 성육신하신 바 그의 겸손하신 신분과 결코 어울리지 않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가 다시 재림하실 때에는 이보다 훨씬 더 능가하게 될 것이다. 재림 시에는 그의 엄위하신 모습이 그대로 보존될 것이며 나팔소리가 울려날 때 영광스러운 천사들이 그의 전령자와 수행인이 될 것이며 구름들은 그의 마차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공적으로 나타나시는 데 있어서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살펴 볼 수 있다.

1. 그 준비는 즉석에서 급작스럽게 된 것이었다. 

저 세상에서의 영광을 위해 또한 그와 함께 할 우리들의 영광을 위해 준비는 이미 세상의 기초가 세워지기 이전에 행하여졌다. 

왜냐하면 이 영광은 그의 마음이 쏠려있던 영광이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영광을 전혀 구하지 아니하였으며, 따라서 그가 비록 이러한 영광을 예견했을지라도 그것을 위해 미리 계획하지 않으시고 다음에 온 것을 취하셨던 것이다. 

그들은 벳바게로 왔는데, 이곳은 예루살렘의 교외였으며 (유대인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언제나 예루살렘의 일부로 간주되었고, 그 길은 감람산을 향해 길게 드문드문 흩어져 있었다.

그가 이 곳에 들어갔을 때 "두 제자를 보내어" 나귀를 가져오게 하였다(어떤 사람들은 이 제자가 베드로와 요한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제자를 보내어 나귀를 가져오라고 하신 것은 그에게 이를 살 만한 현금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2. 그 준비는 매우 초라하였다. 

그는 단지 나귀와 그 새끼를 위하여 두 제자를 파송 하였다(2절). 나귀들은 이 나라에서 여행을 하는 데 많이 사용되었다. 

말들은 단지 귀족들이 타거나 전쟁시에 사용되었다. 

그리스도는 그를 태우고 갈 그룹들을 불러모으실 수도 있으셨다(시 18:10). 그러나 비록 그를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야 (jah, 역주;여호와의 약칭)라는 이름으로써" 그는 "하늘에서 타고 다니신다"고 할지라도 비천의 신분을 지니신 현재는 그 뜻이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인 예수라는 이름으로써 "나귀를 타고 다니신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는 여기에서 심판자가 흰 나귀를(삿 5:10), 또한 그들의 아들들이 어린 나귀(삿 12:14)를 탔던 이스라엘의 관습을 안중에 두었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정복자로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심판자로서 이와 같이 입성하시려고 하셨다. 그는 "심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3. 그 나귀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빌려온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소유로 된 집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어떤 사람들은, 친구에게 신세를 지며 살아가는 여행자들이라 해도 흔히 그러하였듯이, 그는 최소한 자신을 태워다 줄 나귀는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다고 여기기도 한다.) 우리 때문에 그는 모든 점에서 가난하게 되셨다(고후 8:9). 

흔히 말하기를 "빌리면서 사는 사람은 슬퍼하면서 산다"고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이 점에서 진실로, 또한  다른 일에서도 그러했듯이 "슬픔의 사람"이었다. 즉 그는 누군가가 그에게 주었거 빌려온 것 이외에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것이라고는 하나도 가진 것이 없었다.

이 나귀를 빌려오도록 보냄을 받았던 제자들은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다. 

궁핍한 자들은 자신의 궁핍함을 인정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거나 또한 불의한 청지기가 말한 것처럼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눅 16:3)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한편, 누구든지 궁핍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구걸하거나 빌려감으로써 친구의 호의를 악용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 나귀를 빌리는 데 있어서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21) 그리스도의 전지성의 지식의 한 실례를 찾아 볼 수 있다. 

그 일은 전혀 우연한 일이었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어디서 매인 나귀와 그 새끼를 찾을 것인가를 말할 수 있으셨다. 

그의 전지성은 아무리 비천한 피조물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에까지 빠짐없이 미치고 있다. 즉 그것이 나귀나 그 새끼이든지 또는 그것들이 묶였는지 또는 풀렸는지를 온전히 아신다.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고전 9:9).... 물론!! 의심할 여지없이 그는 소들을 염려하신다. 그는 모든 피조물들을 아시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목적을 수행하게 하신다.

(2) 우리는 여기에서 사람의 영들을 지배하는 그의 능력의 한 실례를 찾아 볼 수 있다. 

가장 비천한 국민이나 또는 왕의 마음은 모두 "주님의 수중에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귀들을 자기에게 데려올 것을 명하심으로써 그것들을 사용할 권리가 있음을 확인하고 계시다. 

지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물론 모두 주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제자들이 이 임무를 수행할 때 직면하게 될 약간의 장해물을 이미 예견하고 계신다. 

그들은 이 나귀를 몰래(clam et secreto)가져 와서는 안 되며, 그 주인이 보는 앞에서 강제나 억지(vi et armis)로가 아니라 주인의 승낙을 얻어 가져와야만 한다. 

주님은 그들이 이렇게 함으로써 나귀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계시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우리에게 행하도록 명하신 것을 우리가 그대로 참되게 행할 때에 우리를 후원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공격당하게 될지 모르는 반대들에 대해 대답할 것을 갖추도록 해 주시며, 또한 그들을 잘 해낼 수 있게 해 주신다. 여기에 있는 대로,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그리스도는 나귀로 하여금 자신에게 봉사하도록 명하심으로써 그가 만물의 주인이 되심을 나타내 보여 주셨다. 

또한 주인으로 하여금 나귀를 아무런 담보물도 없이 자기에게로 보낼 마음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그가 "모든 육체를 가진 영들의 하나님"이 되심과 또한 사람의 마음을 굽히며 움직이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여 주고 계시다.

(3) 여기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주인의 승낙 없이는 비록 그것이 사소한 봉사를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한 동네나 두 동네 정도의 거리를 지나갈 때에 나귀를 사용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에서 공의와 정직의 한 실례를 찾아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후반절을 다음과 같이 읽음으로써 우리에게 또 다른 공의의 규칙을 제시하고 있다. 

즉, "너희는 주가 쓰시겠다고 한다고 말하라. 그리고 그(즉 주님)가 곧 그것들을 돌려보내실 것이며 또한 그것들을 다 쓰고 난 뒤에 즉시로 주인에게 안전하게 넘겨 줄 것임을 유의하라고 말하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는 우리가 빌린 것을 적당한 시기에 순조롭게 돌려주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악한 자는 빌리기는 하되 도로 갚지 않기" 때문이다. 빌린 물건들은 손상되지 않도록 잘 조심해야만 한다.

"아 슬프도소이다. 주님이시여, 왜냐하면 그것은 빌린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지 않도록 조심하라.

Ⅱ. 여기에서 성취된 예언(4, 5절). 

우리 주 예수님은 그가 행하시고 당하신 모든 일에 있어서,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는 구절에 매우 유의를 하셨다. 

예언자들이 그를 앞서 내다본 것처럼(그들의 모든 증거는 그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메시야에 대해 쓰여진 모든 일들이 틀림없이 그에게서 성취되도록 하기 위하여 선지자들을 바라보셨다. 

특별히 그에 대하여 쓰여진 이 말씀, 즉 메시야의 왕국에 대한 언대한 예언을 알리고 있는 스가랴서 9장 9절, 즉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라는 말씀은 성취되어야만 한다. 이제 여기에서 살펴 볼 것은,

1. 그리스도의 오심은 어떻게 예언되고 있는가? 

"시온 딸에게," 즉 교회, 거룩한 산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1)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왕이심, 즉 나라에 법에 의하여 우리들과 같은 우리의 형제들 중 하나이시다(신 17:15). 

그는 교회를 지배하시는 왕으로 임명을 받고 계신다(시 2:6). 그는 교회에 의해 왕으로 받아들여진다. 시온의 딸은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다(호 1:11).

(2) 교회의 왕이신 그리스도는 이 낮은 세상에 있는 그의 교회에 오셨다. 

그는 당신을 , 당신 안에서 , 당신을 위해 친히 통치하시기 위하여, 당신에게 오신다. 그는 "교회에 대해 모든 것을 지배하시는 머리이시다." 

"그가 시온에 오신 것은"(롬 11:26)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아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교회와 또한 교회의 관심사는 무엇보다도 구원자이기 때문이다.

(3) 교회의 왕이 오시기 전에 주의를 환기하도록 교회에 촉구되었다. 

즉 "시온 딸에게 이르라"고.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그리스도는 그의 오심을 참고 기다리도록 하실 것이며 또한 그의 백성으로 하여금 기대를 가지도록 하실 것이다.

"시온의 딸들에게 말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나가서 솔로몬 왕을 볼 수"있을 것이다(아 3:11).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주목(notices)은 "볼지어다"(역주:개역 성경에는 번역이 안되어 있음)라는 말로 예고되어 있다.

이 말은 주의와 찬미를 명할 때 쓴다. 즉 "볼지어다, 네 왕이 이르느니라." 

볼지어다, 그리고 그를 기이히 여기라. 볼지어다, 그리고 그를 환영하라. 여기에 참으로 찬미해야 할 왕의 거동(행차)이 있다. 

빌라도는 가야바와 마찬가지로 아무 영문도 모르면서 "보라, 너희 왕이로다'(요 19:14)라고 말하였다.

2. 그의 오심은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가? 

큰 왕이 오실 때에, 특별히 그의 나라를 소유하러 오실 때에 행차하심에 수반될 것으로 기대하는 바 위대하고 웅장한 그 어떤 것을 기대하게 된다. 

만유의 주이신 그 왕은 "높이 들린 보좌"(사 6:1)에 계신 것이 보여졌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성육신하신 왕에게서는 그런 것을 조금도 찾아 볼 수 없다. 

"볼지어다, 그가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를 탓도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광 중에 나타나실 때에 위엄으로서가 아니라 온유함으로 나타나신다.

(1) 그의 성격은 매우 온순하다. 

그는 분노함으로 복수를 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자비함으로 구원을 이루러 오신다. 

그는 시온을 인하여 큰 모욕과 경멸을 받는 데 있어서 온유하시며, 시온의 자기 자녀들의 어리석음과 불친절함을 참는 데 있어서 온유하시다. 

그는 쉽사리 접근할 수 있는 분이시며, 간구 할 수 있는 분이시다. 그는 선생으로서 온유하실 뿐만 아니라 통치자로서 온유하시다. 그는 사랑으로 통치하신다. 그의 통치는 유순하고 고상하며 또한 그 법칙은 그의 백성들의 피로 쓰여지지 않고 그자신의 피로 쓰여졌다. 그의 멍에는 쉬운 것이다.

(2) 이러한 증거로써 그의 외모는 매우 초라하고 나귀에 타고 계시다. 

나귀는 귀족을 태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봉사를 위한 피조물이며, 싸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짐을 지우기 위해 만들어진 피조물이다. 그 동작은 느리지만 확실하고 안전하고 꾸준하다. 

이 말씀에 대해 이미 오래 전에 예언되었고 또한 그것이 정확히 성취될 것으로 여겨지는 바, 이 말씀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중요한 요점, 그것은 곧 심령이 가난한 자, 가난한 마음으로 자기와 이웃의 죄에 대해 애통하는 비천하고 겸비해진 영의 소유자들조차도 그리스도께 누구나 손쉽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격려하기 위함이다. 

시온의 왕은 마음이 약한 탄원자가 감히 접근도 할 수 없는 바 의기양양한 말을 타시거나 또는 발걸음이 느린 탄원자가 보조를 맞출 수 없는 바 달리는 말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가장 보잘 것 없는 가난한 백성도 실망하지 않고 접근할 수 있는 천천히 걸으며 조용한 나귀를 타고 오시는 것이다. 

특히 "나귀 새끼"라는 언급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나귀와 함께 있는 그 새끼를 데려오도록 제자를 보내신 것은 성경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다.

Ⅲ. 세상적인 자만심이 없이 영적인 위세를 갖추신, 그 준비와 복합된 진행 그 자체를 살펴 볼 것은,

1. 그의 마차.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 대로하여"(6절), 그들은 나귀와 그 새끼를 데려 오려고 갔으며, 의심할 여지없이 그것들과 또한 그들에게 그것들을 기꺼이 빌려주려고 하는 주인을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의 명령은 결코 논란거리로 삼아서는 안되며, 오직 절대신뢰함으로 순종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 명령들을 신실하게 순종하는 자들은 결코 그 명령하신 바의 참된 성취를 놓치게 되거나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왔다." 

그리스도께서 타신 짐승은 그것이 아무리 비천하고 업신여길 만한 것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가장 훌륭한 [영적, 비가시적]장식으로 치장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겉보기에는] 예외없이 다음과 같이 꾸며졌으니, 곧 그들은 나귀등에 얹을 안장이 없었기에 제자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옷을 그 위에 대신 올려놓았으며, 그것말고는 더 나은 것이 없으므로 그것으로 안장을 삼아야만 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실용성을 넘어서는] 외부적인 설비(형편)에 민감하거나 호기심을 가지거나 그래야 어울리는 것인 양 가장하지 말아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것들에는 거룩한 무관심이나 무시가 기독자인 우리에게 오히려 더 잘 어울린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이 그것들에 있지 않으며 또한 우리가 "비천한 일에 만족하라"는 사도의 규칙(롬 12:16 , 난외주)를 배웠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니게 될 것이다. 

그 어떠한 것이라도 가난한 여행자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어떤 부주의, 즉 고상한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의 아름다움은 깃들어 있는 법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들이 가진 최상의 것으로 나귀를 장식하였으며, "주님이 쓰시려고 할" 때 자신들의 옷이 손상되는 것도 개의치 아니하였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우리는 자신의 입고 있는 옷을 소중히 여긴 나머지 그리스도의 봉사를 위해, 그의 가난하고 고통받는 지체들의 옷을 위하여 나누어 줄 수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내가 벗었을 때에 너희가 나에게 옷을 입혔다"(마 25:36).

2. 그의 수행원. 

여기에는 당당하거나 웅장한 것이 전혀 없었다. 시온의 왕은 시온에 오셨으며 또한 시온의 딸은 이미 오래 전에 그가 오신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으례 기대하는 형식대로 귀족들과 동행하지 않았고 또한 그 성의 통치자의 영접을 받지도 못하였다. 

그리스도는 자기에게 주어진 열쇠를 지니고 계시는 바, 그의 "심판의 보좌" 즉 "다윗 집의 보좌"로 인도함을 받는데 있어서 가능한 모든 편의를 마땅히 제공받았어야만 했지만, 그러나 여기에는 그런 대우가 전혀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많은 무리"를 수행원으로 거느렸다. 그들은 오직 일반 백성들, 즉 하층민(그들을 "오합지졸"이라고 부르는 편이 오히려 적합할 것이다) 뿐이었다. 그들이야말로 그리스도의 개선의 엄숙성을 오히려 더욱 빛나게 해 주었다. 정말로 그들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후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려는 의도로 그들을 함께 모였을 뿐이었고. 이 장면에서 우리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중의 그 누군가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무리에 참가했다는 것을 결코 찾아 볼 수 없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그리스도를 따른 자는 "능하거나 문벌 좋은 자"가 아니라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이다(고전 1:26, 28).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그리스도는 그를 따르는 자들의 훌륭함(magnificence)에 의해서 보다는 수다함(multitude)에 의해 영광을 받으신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들을 그들의 우선권이나 이름이나 또는 영예의 칭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영의 어떠함에 의해 그 사람됨의 가치를 평가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큰 무리에 관하여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 수 있다.

(1) 그들은 무엇을 하였는가? 

그들은 자기들의 최선을 다하여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려고 애썼다.

① "그들은 그 겉옷을 길에 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 위로 타고 가시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예후가 왕으로 선포되었을 때에도 그 부하들은 그에 대한 복종의 표시로 자신들의 옷을 그 아래에 폈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를 왕으로 삼는 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그 발 아래에 두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사랑으로 순복하는 마음의 표시로써 옷들을 펴고 찬송하며 경배드려야만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결코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는 "영혼더러 그가 지나가시도록 허리를 굽히라"고 말해야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이 옷들은 길을 장식하기 위해 땅 위가 아닌, 울타리나 벽에 펼쳐졌다고 한다. 마치 행렬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발코니에다 융단을 걸어놓는 것과 같이 말이다.)

이것은 한낮 초라한 위엄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는 그들의 선한 뜻을 받으셨다.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를 잘 영접할 수 있는가, 즉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 또는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잘 영접할 수 있는가를 노력하는 것에 대해 가르침을 받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존경하고 있는가를 나타낼 수 있을 것인가? 그를 어떻게 하면 영화롭게 하며 존귀케 할 것인가?

② "다른 이는 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폈다." 

이는 마치 그들이 초막절에 자유와 승리와 즐거움의 표시로 행하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절기의 신비는 특별히 복음 시대에 속한 것으로 언급되기 때문이다(슥 14:16).

(2) 그들은 무엇이라고 말하였는가?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는 동일한 보조를 맞추었다. 

그의 오심에 유의하고 있던 자들과 칭송을 하면서 그를 따르던 자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소리지르며 외쳤다(9절). 

그들이 초막절에 가지들을 가지고 다닐 때 그들은 곧잘 "호산나"를 불렀다. 이 때문에 그들은 가지를 묶은 단을 "호산나들"이라고 불렀다. 

"호산나"라는 말은 "우리가 간구하노니 이제 구원하소서"란 뜻을 가지고 있으며, 시편 10편 25, 26절에 언급되어 있다. 

이 곳에서 메시야는 비록 "건축자가 버리기는 했지만" "모통이의 머리돌"로써 예언되고 있다. 그리고 그의 모든 충성스러운 백성들은 그와 함께 개선하게 되며 또한 그의 모든 기업이 번창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그를 뒤따르게 된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란 말은 "다윗의 자손을 위하여 우리는 이 일을 합니다"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에게 부수된 호산나라는 말은 두 가지 일들을 나타내고 있다.

①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한 그들의 환영. 

"호산나"라는 말은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와 동일한 뜻을 나타내고 있다. 

이 다윗의 자손에 관하여는 미리 예언되어 있으니, 즉 "열방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시 72:17)이다. 

이것들이 여기에서 시작되었으며, 전 세대에 걸쳐 모든 참된 신자들은 이 사실에 동조하고 있으며 그를 복되다고 하였다. 그것은 신앙의 순수한 언어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주의 이름으로 오신다." 

그는 거룩케 되시며, 중재자로서 세상에로 보내심을 받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를 인치셨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것은 "모두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는 마땅히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말해야만 한다. 우리는 그를 찬양해야만 하며 또한 그를 기쁘시게 해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 주의 이름으로 오신다는 사실이 언급된 것은 우리를 위로하는 데 격하고 강한 느낌과 감동을 불러일으키며 또한 그의 영과에 대해 즐거운 환호를 보내도록 만든다. 

우리는 그가 복되도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안에 있을 때 복을 받기 때문이다. 

우리는 축복을 가지고 우리를 만나주시는 그를 우리에게 주신 축복을 가지고 따를 수 있을 것이다.

②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해 잘되기를 바라는 그들의 소원. 

이것은 그들이 "호산나"라고 부른 사실에 암시되어 있다. 

번영과 성취가 그 왕국에 뒤따를 것과 또한 그 왕국이 승리하는 왕국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였다. "이제 그 왕국에 번영을 주시옵소서." 

만일 그들이 그 왕국을 일시적인 왕국으로 생각하고 그들의 마음으로 그 왕국에 대해 이와 같이 실행하려고 생각하였었다면, 그것은 그들의 큰 오해였으며, 그 오해는 단시일 내에 교정될 것이다. 어쨌든 그들의 선의(善意)는 받아들여졌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왕국이 번창하고 성공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저를 위해 항상 기도 드려야만"(시 72:15)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행복이 이 세상에 대한 그의 관심사에 수반될 것이며 또한 그가 비록 나귀를 타셨지만, 그는 "온유를 위하여 위엄 있게 타고 승전하실 수"(시 45:4)있을 것이다. 

우리가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덧붙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쳤다. 

최고의 번영이 그에게 함께 있도록 하라. 그의 이름이 모든 이름 위에 뛰어 나도록 하라. 그의 보좌가 모든 보좌 위에 있도록 하라. 숭고한 감정을 가지고 최고의 방법으로 그를 찬양하자. 그의 교회를 위한 우리의 기도가 가장 높은 하늘에까지 이르게 하자. 그래서 거기로부터 평화와 구원을 가져오도록 하자. 

시편 20편 6절을 보라.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 바 기름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며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락 하시리로다."

3. 여기에는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그에 대한 환영의 기사가 실려 있다(10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였다." 

사람마다 그에 대해 관심을 가졌는데, 어떤 사람은 그 광경을 보고 그 고상함에 호기심이 끌렸으며, 또 어떤 사람은 그 초라함에 조소를 던졌으며, 또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던" 사람은 기뻐하였을 것이다.  또한 바리새인적인 부름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시기와 분노로 소동을 피웠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나라가 가까이 이른 것에 대하여 사람들의 마음은 여러 갈래로 요동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이 소동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 이 성의 주민들은 무엇이라고 말하였는가? "이는 누구뇨?"

① 그들은 아마 그리스도에 대해 무지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었지만 "이스라엘은 그를 알지 못하였다." 

그는 그들 가운데서 많은 이적을 행하심으로써 자신을 구별하셨지만 "예루살렘의 딸들은 남의 사랑하는 자"로부터 그를 알지 못하였다(아 5:9). 

거룩하신 분이 거룩한 성에 알려지지 않으시다니! 가장 분명한 빛이 비치는 곳에, 가장 위대한 신앙 고백이 이루어지는 곳에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모르는 것이 존재하고 있다.

② 그러나 그들은 그에 관하여 알고자 하였다. 

이와 같이 환호를 받고 또한 그렇게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오신 그분은 과연 누구신가? 

우리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도록 요구하시는 "이 영광의 왕은 누구이신가"(시 24:8; 사 63:1).

(2) 그 무리들은 그들에게 어떻게 대답하였는가? "이는 예수라." 

그 무리들은 위대한 자들보다 그리스도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다.  

백성의 음성은 때로 일깨우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다. 그러면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① 그들이 그를 "선지자," 즉 "큰 선지자"라고 부른 것은 옳은 것이었다. 

지금까지 그는 가르치며 이적을 행하는 선지자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그를 왕으로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은 이 세 직분(왕, 선지자, 제사장) 중에서 맨 나중에 발견되어진다.

②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나사렛인"이라고 부른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이것은 어떤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 대하여 그릇된 편견을 확고히 가지도록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즉 그리스도에게 기꺼이 영광을 돌리며 또한 그에 대해 증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에 대해 오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오해는 그들이 확실한 정보를 알려고 노력만 한다면 교정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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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청결(마 21:12-17)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셨을 때 그는 왕으로 오셨지만 왕궁이나 궁궐로 올라가시지 않으시고 "성전으로" 들어가셨다. 

왜냐하면 그의 왕국은 영적이며 "이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거룩한 것들 안에서 통치하신다. 즉 하나님의 성전에서 권위를 나타내신다. 그러면 그는 거거에서 무엇을 하셨는가?

Ⅰ. 거기에서 그는 사고 파는 장사꾼들을 내어 쫓으셨다. 

올바른 것이 세워지기 전에 악습은 제거되어야만 하며, 하나님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혀져야만 한다. 

위대한 구속자는 경건치 못한 것을 돌이키시는 위대한 개혁자로 나타나고 계시다(롬 11:26).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1. 그는 무엇을 하셨는가(12절). 

"예수께서는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셨다." 

그는 전에 이와 같은 일을 한 번 하신 일이 있으며(요 2:14, 15), 그 일을 또 다시 행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성전에서 쫓겨난 매매자들은 계속적인 유의와 그것을 저지하려는 감시가 없거나 또는 그러한 것에 대한 숙청이 되풀이되지 않는다면 또 다시 성전으로 돌아와 거기에 자리를 잡을 것이다.

(1) 그 악습은 성전에서 물건을 사고 팔 때 돈을 바꾸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율법적인 일들이 시기를 놓치거나 장소가 적합치 않다면 결국 죄악스러운 일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사실이다. 

어떤 곳에서는 합법적이고 수긍할 수 았거나 칭찬할 만한 좋은 것이라도 다른 날, 다른 장소에서는 "성전을 더럽히며 안식일을 모독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여기에 나와 있는 사고 파는 것과 돈을 바꾸는 것은 비록 세속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즉 영적인 편의성을 구실로 삼고 있었다. 

그들은 제사드림을 위한 짐승들을 팔았는데, 이는 다소 멀리 사는 사람들이 짐승보다는 돈을 쉽게 가져 올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편리를 위한 것이다. 

또한 그들은 성전세로서 반 세겔을 원하는 자들을 위해 돈을 바꾸어 주었는데, 반 세겔은 그들이 일년에 한 번씩 내는 인두세 또는 속전이나 반어음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이 일은 어찌보면 하나님의 집에서 행해지는 외적인 직무로 인정될 수 있었겠지만, 그로 인해 증가되는 탐욕때문에 그리스도는 그것을 허용하시려고 하지 않았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큰 부패와 악습은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 즉 세속적인 이익 얻음을  경건의 목적으로 삼으며 또한 경건을 세속적인 이익을 얻는 방법으로 이용하여 속이는 자들의 실행이 어느덧 교회 속으로 침투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딤전 6:5). "이러한 자에게서 물러서라."

(2) 이 악습을 제거하심. 그리스도는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셨다." 

그는 이전에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요 2:15) 내어쫓으셨다. 그러나 지금은 남들이 보는 앞에서 불쾌한 표정으로 명령을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행하셨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이 성전을 깨끗이 하시면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에 의해 조종을 받고 간교한 수법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자들에 의해 아무런 반대를 받지 않으신 것은 그가 행하신 이적들 중에서 그리 적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가 사람들의 영혼을 지배하는 권세를 가지셨으며 또한 그들 자신의 양심에 그가 그들에 대해 지배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한 실례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계셨을 때에 행하신 법적인 권위와 위압적인 권세의 유일한 행동이었다. 

그는 요한복음 2장에서 이 일을 시작하셨으며, 여기에서 그 일을 마치셨다. 

(*전설에 의하면, 이 때에 그의 얼굴은 빛났으며 빛의 광채가 그 눈에서 나와 이 시장에 있었던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그들로 하여금 그의 명령에 굴복케 하였다고 한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성경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즉 "심판 자리에 앉은 왕은 그 눈으로 모든 악을 흩어지게 하느니라"(잠 20:8)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둘러 엎으셨다." 그리스도는 그 돈을 자신이 취하시지 않고 흩으셨으며 그 돈이 있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인 땅으로 던지셨다. 

에스더 시대의 유대인들은 대적자 원수인 이방인들의  "재산에 손을 대지 아니하였다."(에 9:10).

2.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정당화하고 그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13절) "기록된 바"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교회를 개혁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눈을 성경에 두어야만 하며, 그것을 규칙으로 고수해야만 한다. 

우리는 자신들을 "기록된 바"라고 말하는 것으로 정당화시킬 수 있으며 그 이상 더 나아가서는 안 된다. 

기억하라, 제도를 개혁한다 함은 부패를 허용케 한 바, 그 어떤 규칙들이 그 본래적인 의도에 따라 바르게 고쳐지고 제자리로 환원되어질 때에 올바르게 되어진다.

(1) 그는 성경의 예언을 인용하여 성전이 어떻게 되어야 하며, 또 어떻게 계획되었는가를 나타내 보여 주고 있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13절). 

이 말씀은 이사야 56장 7절에서 인용된 것이다. 의식적인 제도는 모두 도덕적인 의무에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제사를 드리는 집은 기도하는 집이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봉사들의 요지이며 골자가 되기 때문이다. 

성전은 특별한 방법으로 기도의 집이 되도록 성화되었다. 

왜냐하면 성전은 그 예배의 장소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매개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집(성전) 안에서 또는 그 집을 향하여 드려진 기도는 응답함을 받는다는 특별한 약속을 가지고 있었다(대하 6:21). 

그것은 마치 그리스도의 모형과 흡사하였다. 

다니엘은 기도 가운데서 그 길을 보았으며 또한 이러한 의미에서 그 어떠한 특정한 집이나 장소만 기도의 집이 되거나 또는 기도처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우리의 성전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우리의 예배 모임으로 지정된 장소가 "기도처"(행 16:13)로 불리워질 수는 있을 것이다.

(2) 그는 성경적인 반증을 들어 그들이 어떻게 성전을 기만하였는가와 그 의도를 왜곡했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이 말씀은 예레미야 7장 11절 말씀, 즉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에서 인용된 것이다. 

거짓된 경건이 불의의 옷과 덮개가 되어질 때 "기도하는 집"은 그들이 숨거나 피난하는 "강도의 굴혈"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사정은 확실히 그러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그의 영광을 도적질하는 가장 나쁜 강도들이었기 때문이다(말 3:8). 

제사장들은 제단을 의지하여 풍성한 생활을 영위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백성들에게서 돈을 짜낼 수단과 방법을 궁리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여기에서 "강도"라고 부른 것은 그들이 자신들에게 속하지 않았던 것을 부당하게 거두어 들였기 때문이다.

Ⅱ. 성전에서 "그는 소경과 저는 자들을 고쳐 주셨다"(14절). 

그는 매매하는 자들을 성전에서 내어쫓으신 후에 소경과 저는 자들을 그리로 초대하셨다. 

왜냐하면 "그는 베고픈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지만 부한 자들은 거저 돌려보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성전에서 말씀으로 전파하셨으며 또한 그들이 드린 기도에 응답하여 영적으로 소경되고 절름발이가 된 자들을 고쳐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성전으로 오신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그가 성전을 모독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심으로써 그의 성전의 명예를 위해 열심을 보여 주신 것 같이 그를 겸손하게 찾는 자들에게는 긍휼을 보여 주고계시다. 

"소경과 저는 자들"은 다윗의 궁전에 들어오지 못하게 되어 있으나(삼하 5:8) 하나님의 집에 들어오도록 허락되었다. 

왜냐하면 그의 성전의 존귀와 명예는 왕궁의 웅장함이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추측되는 것들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소경과 저는 자들은 그들에게서 떨어져 있어야만 하지만, 하나님의 성전에서는 사악한 자들과 모독하는 자들이 이로부터 떨어져 있어야만 한다. 

성전은 그것이 시장으로 화하게 될 때 욕되고 나쁜 것이 되지만, 그것이 병원으로 되어질 때 은혜스럽고 영예스러운 것이 되어진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선을 행하는 것이 거기에서 돈을 버는 것보다 더욱 영예스럽고 합당한 일이 된다. 

그리스도의 병고치심은 "이는 누구뇨?"라는 질문에 대한 참된 대답이었다. 그의 사역은 "호산나"보다 오히려 더욱 그에 대하여 잘 입증해 주었다. 

그가 성전에서 병고치신 것은 "나중 집의 영광이 처음 집의 영광보다 더 크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성취한 것이었다.

역시 그는 거기에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그를 따르며 환호하는 무리에 대하여 분을 내며 방해한 것에 대하여는 말없이 침묵을 지키셨다(15, 6절). 

여기에서 그를 영화롭게 하는데 맨 앞장을 섰던 자들은 나중에는 빌라도 앞에서는 그를 최악의 원수로 여기고 있음에 주의하라....진정, 갈대와 같았다.

1.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에 대하여 속으로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들이 참된 이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으며, 또한 사도행전 4장 16절과 5장 33절에 있는 것처럼 그들에 대하여 크게 노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사역은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만일 그들이 지각을 가졌었다면 그러한 이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만일 그들이 좋은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들에 대한 긍휼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를 반대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그를 시기하였으며 또한 적개심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2. 그들은 공공연하게 어린이들이 호산나라고 외치는 것에 불평을 토로하였다. 

그들은 어린이들이 호산나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 그에 합당치 않은 영광이 주어졌으며 그것은 겉치레(과시)와 같은 것으로 보인다고 생각하였다. 

교만한 자는 자신들 이외의 타인에게 영광이 돌려지는 것을 참지 못하며, 또한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칭송이 돌려지는 것을 몹시 불쾌하게 생각한다. 

이와 같이 사울은 다윗을 향해 여인들이 노래부르는 찬양에 대하여 시기하였다. "시기 앞에 설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 

그리스도가 최고의 영예를 받을 때 그의 원수들은 가장 불쾌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바로 지금 그리스도께서 소경과 저는 자들을 매매하는 자들보다 더 좋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스도는 지금 여기에서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 대항하여 어린아이들의 편을 들고 계신다.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1) 어린아이들은 아마도 성전에서 놀고 있었던 것 같다. 

통치자들이 성전을 "시장"으로 만들어 버린 것에 비하면 어린아이들이 그 곳을 놀이터로 삼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어린아이들 중의 대부분이 거기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기를 바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어린아이들을 때맞춰 하나님의 집으로 데려 오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늘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에게 경건의 모양을 유지하도록 가르침 받게 하라. 그리하면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경건의 능력에로 인도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양떼 중에서 특히 어린양들에 대하여 온유함을 가지고 계신다.

(2) 그들은 거기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들은 이 찬양을 어른들에게서 배웠다. 

어린아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듣는 대로 다른 사람들이 행하는 것을 보는 대로 말하고 행동한다. 그들은 쉽게 모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좋은 모범을 보이도록 유의해야만 한다. 나쁜 모범을 보여서는 안 된다. 

우리가 어린 사람들과 교제할 때는 매우 신중한 배려로 지도해야만 한다. 어린아이들은 그들과 함께 있는 자들에게서 저주하거나 맹세하거나 또는 기도하거나 칭찬하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유대인들은 때를 맞추어 그들의 어린아이들로 하여금 장막절에 가지를 가지고 호산나를 외치도록 가르쳤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러한 칭송을 그리스도에게 할 것을 가르치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호사나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칭송은 가나안어를 배워야만 하는 어린아이들의 입에 잘 어울린다는 사실이다.

(3) 우리 주 예수님은 그렇게 하는 것을 허락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을 매우 기뻐하셨으며, 또한 그 말씀을 성취한 성경 구절을 인용하셨거나(시 8:2) 적어도 그 말씀에 적용시키셨을 것이다. 

그 말씀은 즉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16절)이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이 말씀은 다윗이 블레셋의 살육자(골리앗)를 쳐부수고 돌아 왔을 때 그를 영예롭게 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환호하고 여인들이 노래한 것을 어린아이들이 합세한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따라서 다윗의 자손이 여기에서 호산나라고 인사를 받고 있는 것은 매우 합당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사탄, 즉 골리앗과 싸우려 들어가셨기 때문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① 그리스도는 어린 아기들의 봉사를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으셨으며, 그들에 대해 특별히 유의하셨다(어린 아기들에 대해 사랑을 지니셨다). 

또한 그들에 대해 매우 기쁘게 여기셨다. 만일 하나님께서 고작해서 희망을 걸 수 있는 어린 아기들에 의해 영광을 받을 수 있으셨다면, 하물며 성숙하게 자라나 여러 가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어린이들에 의해 더 많은 영광을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② 이런 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는 온전케 되었다. 

어린 아기들이 그의 찬미에 합세한 것은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에 대한 마음의 경향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찬미는 만일 그들이 이에 한몫 끼지 않았다면 결점이 있고 불안전한 것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어린아이들로 하여금 때를 맞추어 선을 행하며 그 부모들에게 그렇게 되도록 가르칠 것을 고취시키고 있다. 그렇게 한다면 그 누구의 수고도 결코 헛된 것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시편에 보면 이것은 "권능을 세우신다"는 말로 되어 있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즉 하나님께서는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으로써 "찬미를 온전케 하셨다." 

위대한 일들이 약하고 가망 없는 수단(도구)에 의해 행하여질 때 하나님은 이로 말미암아 많은 영광을 받으신다. 왜냐하면 그의 권능은 연약함 가운데서 완전해지며" 또한 어린 아기들과 젖먹이들의 연약성은 신적인 능력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시편에 이어지고 있는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라"는 구절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매우 합당한 말씀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 말씀을 그들에게 적용시키지 않으시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에 게 적용시키도록 내버려두셨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는 이렇게 하심으로써 그들을 잠잠케 하시고 나서 그들을 떠나셨다(17절). 

그는 현명하게 "그들을 떠나셨는데," 이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때가 이르기 전에 그를 붙잡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는 당연히 그들을 떠나셔야만 했다.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신 그 은혜를 망각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찬미하는 것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음으로써 우리는 그를 우리에게서 내어쫓고 있는 것은 나닌지 돌아보자..

그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떠나셨으며," 물러가 조용하게 유할 수 있는 "베다니로 가셨다." 베다니로 가신 그가 조용히 "잠자기"를 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조용히 "기도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으로부터 2마일도 되지 않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가 여기까지 걸어서 오신 것은, 그가 타신 것이 다만 "성경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음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그는 백성들의 호산나 찬미에 의해 높이 들리우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것들을 잊어버리시고 곧 그의 초라하고 괴로운 여행길로 돌이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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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무화과나무(마 21:18-22)

Ⅰ. 그리스도는 "이른 아침에 예루살렘으로 돌아 오셨다"(18절).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가 하룻밤을 성에서 나가신 것은 거기에 있던 그의 친구들 중의 그 누구도 고관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를 환대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따로 할 일이 있었으므로 돌아오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는 우리의 원수들이 사악하거나 불친절하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의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이 성에서 "결박과 환난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이러한 것들이 그를 요동케 할 수 없었다." 그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갈 때"(행 20:22) 그리스도의 영을 뒤따랐다.

Ⅱ. "성으로 들어올 때 그는 시장하셨다." 

그는 사람이셨으며 본성의 연약성에 순종하셨다. 그는 활동적인 사람이었으며 또한 자신의 일에 열중하였기 때문에 음식을 잊어버릴 정도였으며 마침내는 시장하시게 되었다. 왜냐하면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그 자신까지도 삼켰으며" 또한 정녕 그의 "음식과 음료수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난한 사람이었으며, 당장 먹을 수 있는 예비 양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즐겁게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따뜻한 어떤 음식을 먹어야만 할 때에도 덜 익은 생무화과라도 기꺼이 잡수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시장하심으로써 무화과나무를 보고 열매를 찾았으나 볼 수 없게 되자 저주하셨고, 그 자리에서 매마르게 하는 이 이적을 행할 수 있게 되었으며 또한 이를 통해 우리에게 자신의 공의와 능력의 본보기를 보여 주실 수 있으셨으니, 이 둘은 교훈적인 것이다.

1. 그의 "공의"를 보라(19절).

그는 열매를 기대하면서 그 무화과나무로 가셨다. 왜냐하면 그 나무는 잎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 열매도 발견하지 못했을 때 그 나무에 대해 영구적으로 메마를 것을 선고하셨다. 

이 이적은 다른 이적들과 마찬가지로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의 그리스도의 모든 이적들은 좋게 만들기 위하여 행해졌으며 또한 그의 은혜와 축복의 능력을 입증하였다(돼지떼에게도 마귀를 보내신 것은 단지 허락에 불과하였다). 

그가 행하신 모든 것은 그의 친구들의 유익이나 위로를 위한 것이었으며 그의 원수들의 두려움이나 형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드디어 "모든 심판이 그에게 위임되었다는" 사실과 또한 "그가 구원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파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하여 그는 자신이 진노와 저주의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한 실례로 보여 주려 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 중 어떤 남자나 여자에게 임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진노의 날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노나 저주는 다만 무생물인 나무위에 임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 실례로 나타내 보여지고 있다. "와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마 24:32). 그 의도는 "무화과나무의 비유"와 동일하기 때문이다(눅 13:6).

(1) 이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일반적으로 외식자들의 상태를 나타낸다. 

이 사실은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주고 있다.

① 무화과나무의 열매는 잎을 가진 과실수인 무화과나무에게서 당연히 기대될 수 있는 바. 믿는 이. 곧 기독신앙자들에게는 경건의 능력이라 랄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신앙 고백을 하는 자들로부터 경건의 능력을 찾으시며, 경건을 가장하는 자들로부터 그 호의를 찾으시며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언덕에 심기워진 포도원으로부터 포도를 당연히 찾으신다. 그는 목마르게 그것들을 찾으시며, 그의 영혼은 "처음 익은 열매를 바라신다."

② 그리스도께서 훌륭한 신앙 고백자들로부터 기대하신 것이 종종 무너져버리고 실망케 되는 일이 있다. 

그리스도는 신앙의 열매를 찾으려고 많은 사람들에게 오시지만 결국 잎들만 무성한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한함을 발견하게 되심을 나타내준다

이는  그리스도를 믿되, 열매 맺게 하는 생명능력이 한량없는 하나님의 모든 생명말씀을 단순-순전하게 붙들고 그 안의 성령과 참생명을 따라 거듭난(중생한) 자, 곧 영적 참자아의 마땅한 삶의 패러다임으로 살아감이 아니라 여전히 (실은 길가나 돌밭같은 마음상태로 말씀을 피상적으로 듣기에)악한 육적 판단에 따라 제한함으로써 스스로 속고 있기 때문이며, 그 결과 경건의 그 능력을 부인해 버림으로 인해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 영적 측면에서 무위도식 상태가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살았다고 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산 것이 아닐 때가 많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그 능력은 부인해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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