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역개정]마20장 ===포도원의 품꾼들 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오전5-6시)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포도원주인은 일꾼을 찾아내고 부르시며 품삯을 약속하신다...실은 모든 인간은 누구나 품삯 받는 일꾼임) 2.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3. 또 제삼시(오전9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세상은 장터,포도원은 여호와의 교회..참생명사역 위해 보냄받은 자됨 인식 못한 이들은 목적상실한 바, 한번뿐인 삶을 허송하고 있음)) 4.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5. 제육시(정오)와 제구시(오후3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6. 제십일시(오후5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7.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8. 저물매(오후6시)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9.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지금 말씀하시는 분은 유일무이, 지고지선, 비교불가능한 사랑의 창조주, 아버지요, 초월적 주권자이심을 명심하라..그분은 주여호와이시니, 그의 뜻하신바, [계획-안배-직분주심-주권적 경륜 이루심], 그 섭리에 전적으로 순복하며 신뢰와 사랑으로 순종하며 주어진 삶, 최선이 되도록 그분께서 네삶을 이끄시게 하라...(분복-재능-수명-건강..부차적인 필요들에 대해서도 남과 비교하지 말며 안달하지 말라, 염려말라..떠나지도 버리지도 않고 날마다 필요를 채우시리라)..오로지 단한번뿐인 삶에 집중하여 네맘과 뜻과 정성기울여 최선다해 그분의 지도를 따르며 동행하라, 하나됨의 신비안에서 그분을 친밀히 알며-사랑하며-전존재를 다하여 합당하게 섬기라..결과 판단조차 오로지 주께 맡겨드리라..주님 얻고 그 가운데서 발견됨 이루도록 하라..주님이면 충분하다!!..오직 사랑의 주님을 참되게 알고 경외함, 충성다해 온맘으로 그분을 영화롭게 하라!!....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나는 왜?, 내게는 왜? ]라고 입 삐죽이며 불평말라, 그것은 그분 누림과 앎, 사랑함의 장애물일뿐이니..오직<이토록 사랑하시다니요,왜나를..whyMe..예정-부르심-택하심-영광>감사하라!! ===죽음과 부활을 세 번째로 이르시다 1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19.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한 어머니의 요구 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3.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맹인 두 사람을 고치시다 29.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30.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32.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3.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34.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 마태복음 20장 (개요) 우리는 본 장(章)에서 네 가지 사실을 살펴 볼 수 있다. Ⅰ. 포도원에 있는 일꾼에 대한 비유(1-16). Ⅱ. 그리스도의 임박한 고난에 대한 예고(17-19). Ⅲ. 두 제자의 어머니가 그들에 대하여 간구를 하였으나 책망을 받음(20-28). Ⅳ. 두 소경이 간청을 하였고, 그들의 눈이 보이게 됨(29-34). ===== 포도원에 있는 일군(마 20:1-16) 포도원에 있는 일군에 대한 이 비유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의도를 가지고 있다. Ⅰ. 우리들에게 "하늘 나라"(1절). dispensation─경륜, 즉 복음시대의 통치의 방법을 나타내 보여 주기 위함이다. 그 나라의 통치법들은 비유로 감싸여져 있지 않고 산상설교(8복..하나님나라 대헌장 이룸의 실제적 준수사항 =어떻게 지고지선의 진복영생복락 그 자체인 긍휼의 JC, 하나님을 얻고, 그분을 공급하며, 끝까지 살아냄 통해 이루는 바, 그 방법)에서와 같이 분명히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그 나라의 신비적인 개념들은 이곳 마20장과 마 13장에서와 같이 비유 가운데, 또, 성례식 가운데 전달되고 있다. (오직 주님의 긍휼 구함으로써, 살아생동하는 믿음으로 JC와 함께 죽고 새생명의 거듭남[중생=부활함]으로써 바뀐 바, 그리스도의 패러다임(여호와의 어떠하심)을 살기를 통해, 하나되사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으시며 JC를 빼어닮음으로 구원완성 이루실 그리스도의 영, 임마누엘HS을 따름으로써 인도따라 땅끝까지 전파하는 증인됨) 기독교의 의무는 그 개념보다 (아직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기에) 더 잘 알려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개념은 그 의무보다도 더 잘 설명되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성령안에서 참되고 생생하게 더 설득되어지고 그리스도께 한층 더 헌신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바로 비유가 의도하는 바이다. Ⅱ. 특별히 우리들에게 그가 앞장의 끝 부분에서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고 말씀하신 하늘 나라에 관한 것을 나타내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이 비유는 그 말씀과 연관되어 있다. 진리에는 모순되는 것처럼 보여지는 것이 있으므로 더욱 더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복음시대의 통치에 있어서 유대인을 거절하고 이방인을 부르신 것보다 더 큰 신비의 은혜가 없다. 사도는 그것에 대해 바로 그렇게 말하고 있다(엡 3:3-6). 즉 이방인들은 하나님나라의 동료 상속자들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상으로 유대인들을 자극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마도 이 비유의 목적은 유대인들이 먼저 포도원에로 불리움을 받아야 하며, 또한 그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부르심에 응하여야만 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한 것인 듯하다. 그러나 마침내 복음은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어야 하고 그들은 이것을 받아야만 하며 또한 유대인들과 동일한 특권과 권리가 있는 것으로 인정되어야만 한다. 즉 그들은 유대인들, 심지어 그들 중에서 (그리스도를)믿었던 자들까지도 이유 없이 멸시하려고 했던 "[이방인]성도들과 함께 한 동료 시민"이 되어야만 하였다. 그러나 이 비유는 더욱 보편적으로 적용이 될 수 있으며 또한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1. 하나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빚진 자가 아니시다. [인간과 관계맺으심은 그분의 무궁한 사랑, 그것이 아니라면 설명불가하다, 스스로 무한 자족하신 전능자이시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실은 유한한 피조물인 바, (그분의 뜻 이룸에) 인간의 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시다] 이것은 우리의 성경 중에 있는 내용들이 이 비유의 목적으로 제시한 위대한 진리이다. 2. 나중에 시작하였고 종교적으로 주님나라에 대해 아무런 약속도 받지 못한 자들이, 종종 하나님의 축복하심따라, 주님나라에 더 일찍 들어가고 위대한 약속을 받은 자들보다 지식과 은혜와 유용성에 보다 더 훌륭하게 도달하게 되기도 한다. 구시는 아히마아스보다 더 일찍 출발하였지만 아히마아스는 "평야 길"을 택하였으므로 구시를 앞서고 있다.[시7편묵상--아래를 볼것] 요한은 빨리 달려서 "먼저 무덤"에 도착하였지만, 베드로는 더욱 더 용기를 가져 "먼저 그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비유가 제자들을 경고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들은 적당한 때에 열심히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에 대하여 자만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다. 그러나 그들이 열심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것을 바라보도록 하였으며 또한 앞으로 전진하고 참도록 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의 훌륭한 출발은 아무런 유익도 없게 될 것이다. "처음"인 것처럼 보여지던 자가 "나중"이 될 것이다. 종종 최근에야 그 생활을 회개한 자들이 앞지르게 될 때가 있다. 바울은 "만삭되어 태어나지 못한 자"와 같았으나 "사도들 중의 최고 된 자보다 뒤지지" 않았으며 그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자들을 능가하였다. 이 비유와 탕자의 비유 사이에는 유사한 점이 있는데, 방탕 생활에서 돌아왔을 때의 탕자는 방탕하지 않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아버지에게는 매우 소중한 자였다. "처음과 나중은 똑 같다."...이것이 진정한 의미이다!! 3. "보상"은 성도들에게 그들의 회심의 때를 따라서가 아닌, 은혜에 의해 이 세상에서 그것을 준비한 것을 따라서 주어지게 될 것이다. 즉 선임권(seniority)에 의해서가 아닌(창 43:33), "그리스도의 온전함의 장성한 분량의 척도에 의해 추가적 상급이" 주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 시대의 처음에 "중생하여" 그를 뒤따른 사도들에게 큰 영광을 약속하셨다(마 9:28). 그러나 지금 세상 끝에서도 동일하게 그에 대하여 충성된 자는 동일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며 "함께 그의 보좌에 앉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다(계 2:8-3:21). 나중에 드러날 것이지만,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은 자[=자기를 부인함의 자기십자가를 지고, 성령과 하나됨 통해 JC를 사는 자]들은 초대시대의 순교자들이나 고백자들(비록 그들이 <세상에서는>더욱 칭송을 받는다 할지라도)과 동일한 상급(=YHWH하나님, 그분의 모든 영광에 참여함)을 받게 될 것이요, 또한 (구태어 예를 들어 말해본다면)지금 충성된 사역자들은 초대 교부들과 동일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비유에서 두 가지 사실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즉 일군들과의 "계약"과 또한 그들과의 "계산"이다. (1) 여기에는 일군들(품군들)과 더불어 맺은 "계약"이 기록되어 있다(1-7절). 또한 그것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구별 될 수 있다. ① 누가 그들을 고용하였는가? "집주인"이다. 하나님은 위대한 집주인이며, "우리는 그의 소유이며 또한 그를 섬기는 자"이다. 집주인이신 그는 해야 할 일들을 가지고 계시며 또한 그 일을 행할 수 있는 종들을 거느리고 계신다. 그는 하늘과 땅에 큰 가족을 가지고 계시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름이 붙여지고(엡 3:15) 또한 그는 그것을 소유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일군들을 고용하신 것은 그가 그들이나 그들의 봉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 아니라("만일 우리가 의롭다면 그에게 무슨 일을 할 것인가?"), 마치 인자하고 관용스러운 집주인과 같이 가난한 사람을 동정하여 그들을 게으름과 가난에서 구출하며 또한 그들이 일한 대가를 받게 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로 하여금 일하도록 하려 하시기 때문이다. ② 그들은 어디에서 고용되었는가? 그들이 하나님께 봉사하도록 고용되기까지 "종일토록(6절) 놀면서(3절)있었던 시장"에서 고용되었다. 다음 사실에 유의하라. 첫째, 사람의 영혼은 어떤 봉사나 다른 일에 고용될 준비를 갖추고서 있다. 사람의 영혼은(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같이) 일하도록 창조되었으며, 또한 "불법의 종"이든지 "의의 종"이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롬 6:19). 마귀는 시험함으로써 (곧)"돼지를 먹이기"위해 그의 들판으로 "품꾼들을 고용하고 있다." (반면에)하나님은 그의 복음으로써 아름다운 일을 "실행하도록" 하기 위하여 "품꾼들을 포도원으로 고용하고" 있다. 우리는 선택을 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고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수 24:15). "오늘날 너희 섬길 자를 택하라." 둘째, 하나님을 봉사하는 일에 고용될 때까지 우리는 종일토록 놀면서 서 있다. 죄인의 상태는 사탄에게 (옛적부터 속임당하여, 타개어날 때무터 죄에게)고용된 상태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본래적 인생목적, 참생명일군의 섬김안에 있지 않기에] "게으름의 상태"라고 불리워질 수 있을 것이다. 죄인들은 일할 것이 없으며, 목적도 없으며, 그들에게 세상에서 하도록 맡겨진 일이 없으며, 잘 계산될 수 있는 것도 전혀 없다. 셋째, [복음 전파자를 통해 생명의 주께서 부르시는 바]복음적인 부르심은 "시장에서 놀면서 있는"자들에게 주어지고 있다. 시장은 "집합 장소"이며, 거기에서 "지혜가 부르짖고 있다"(마 1:20, 21). 시장은 유희의 장소이며, 거기에서 "어린아이들이 놀고 있다"(마 11:16). 복음은 우리를 바로 그 허무한 데서부터 중요한 것에로 부르고 있다. 시장은 [진정한 영적 생명가치가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완전히 쪼그라들어서 기능을 잃어버린 바, 단지 육적,수동적 목숨유지에 관한]용무가 있는 장소이며, 시끄럽고 분주한 곳이다. 우리는 그 장소에서 물러나(벗어나) 돌이키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 "이 시장에서 어서 나오라." ③ 그들은 무슨 일을 하도록 고용되었는가? 그의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고용되었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자. 첫째, 교회는 하나님의 포도원 [=우리의 영혼]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포도원을 만드시고 포도를 심고 물주고 [산울로] 울타리를 둘렀다. 그 열매는 하나님께 합당한 바, 그의 존귀와 칭찬이 되도록 가꾸어져야만 한다. 둘째, 우리는 모두 이 포도원의 일군으로 부르심을 받고 있다. 종교의 사역은 [생명말씀을 따라, 생명열매산출 위해, 자기영혼의 ]가지를 자르고, 손질하고, 파고, 물주고, 울타리를 두르고 잡초를 제거하는 것이 포도원 일이다. 우리는 각각 [최선다해 잘 가꾸고 참생명열매 맺도록 ]지켜야 할 우리의 포도원, 즉 우리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것으로써 그를 위하여 보존되고 손질되어야만 한다.[거기에 소용되는 모든 도구-수단-방법-필요는 주께 요구하면 다 공급해 주시리라!!] 이 일에 있어서 우리는 게으르거나 빈둥거리는 자가 아니라, "(참된, 부지런하고 충성된) 일군"이 되어 일하며 또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야만"한다. 하나님은 일에는 사소한 다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게으른 자는 지옥으로 내려간다. 하늘로 올라가려는 자는 분주해야만 한다. ④ 그들의 임금은 얼마나 될 것인가? 그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약속하고 있다. 첫째,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있다(2절). 로마의 한 데나리온은 한화로 하루생계비(현재 약8만원)로서, 근로자가 하루의 생계를 꾸려갈 수 있는 돈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한 것의 보상이 "행위"나 "빚"으로 말미암지 않으며(아니 그것은 "값없는 은혜"로 말미암는다. 롬 4:4), 또한 우리들의 봉사와 하늘의 영광 사이에는 어떤 조화(와 상호인과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그러나, [(하나님은 원래 당신의 일을 이룸에 있어서 우리의 어떤 도움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으신 분으로서,) 피조된 우리의 영생복락을 위해 생명의 섬김 사역을 맡기시려, 창조함 받은 때부터 이 모든 각양 은혜를 예비하시고, 이제 JC십자가 대속을 믿는 자마다 새생명안으로 부르시어 구원하사 일하도록 하신 바, 새생명으로 중생한 자들마다 또한 보냄받은 이들이며, 이들의 섬김은 원래 마땅한 것이었기에] 우리가 모든 일을 행하였을 때(조차도) "우리는 무익한 종들"이 되는 것이다. 허나 이 비유는 우리들 앞에 보상이 놓여져 있으며, 또한 그것은 충분한 보상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둘째, "상담하게 줄 것을" 약속하고 있다(4-7절).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에게 한 봉사에 대해 전혀 모르는 체를 하지 않으실 것이며 또한 하나님을 위해 행한 것에 대한 상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유의하라.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 면류관은 "의로우신 재판장이 주실 의의 면류관"이다. ⑤ 그들은 얼마 동안 고용되고 있는가? "하루 동안"이다. 인생의 시간은 한 날이며, 그때에 우리는 세상에로 "우리를 보내신 자의 일들을 행해야만 한다." 그것은 짧은 시간이다. 보상은 영원하지만, 그 일은 단지 "하루" 동안뿐이다. 사람은 "품군 같이 그날을 마치게 된다"고 말해진다(욥 14:6). 우리가 일할 수 있는 시간이 매우 적으며, 또한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재촉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신속하고 부지런하게 우리의 일을 행하도록 재촉하고 있다. 우리의 날이 다 가버렸는데도 [[생명의 포도원일은 모든 것을 다 쏫아부어도 좋으리만큼 지고지상의 최고 가치 있는 일, 올인할만큼 가슴뛰는 일, 생명에 관한 일이다!!]]우리의 위대한 일이 다 행해지지 못하였을 때 우리는 영원히 버림을 당하게 된다. 우리가 단지 "하루" 동안만 일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일들의 어려움과 난관들을 극복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준다. "종이 간절하게 바라는 어둠"은 우리에게 휴식을 안겨다 줄 것이며, 또한 "우리의 일의 보상"을 가져다 줄 것이다(욥 7:2). 믿음을 굳게 잡고 잡시 동안만 참으라. ⑥ 일군들이 고용된 그 날의 몇몇 시간들에 대해 유의되고 있다. 사도들은 복음 시대의 "제 일시"와 "제 삼시"에 파송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시는 동안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사명을 받았으며 또한 그들의 임무는 유대인을 부르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에 약 "제 육시"와 "제 구시"에 그들은 동일한 심부름을 나가서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였으며, "처음에는 유대에 있는 자들"에게, 그 다음으로는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제 십일시"에 그들은 유대인들과 동일한 사역과 특권에 참예하도록 그들을 불렀으며 또한 그들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없다는 사실을 말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영혼이 그리스도에게로 개심한 이후 몇 년의 생명의 기간에 적용될 수 있으며 또한 대개 그렇게 적용한다. 보편적인 부르심은 포도원에 와서 일하는 데 차별이 없다. 우리가 부르심을 따라 [전존재로 반응하며] 나아올 때에 그 부르심은 효과적이 된다. 첫째, 어떤 사람은 그들이 매우 어릴 때에 포도원에 부르심을 받고 그곳에서 일하는 것을 착수하고 있다. 즉 아침 일찍이 포도원에로 보내심을 받았으며, 그들의 여유 있는 한 세월들은 은혜 받기에 지장이 없었으며 또한 그들의 창조자를 기억하는 데 알맞았다. 세례요한은 "모태로부터 정결함을 입었으며" 따라서 위대한 자이다(눅 1:15). 디모데는 "어릴 때부터" 이에 참여하였다. 오바댜는 "어릴 때부터 주님을 경외하였다." 이러한 여행을 가려고 하는 자들은 때를 맞추어 떠나야 할 필요가 있다. 둘째, 다른 사람들은 중간 시기에 구원을 받도록 인도되고 있다. "제 삼시, 제 육시 또는 제 구시 때에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라." 신적인 은혜의 능력은 그들이 바울과 같이 자신들의 쾌락과 세상적인 추구 가운데 처해 있을 때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의 회심에서 크게 확대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대들을 위한 일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께는 잘못하여 그르치는 시간이 전혀 없으시다. 그러나, (잊지말자!!) 누구든지 "모두가 훌륭한 시간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한 날의 시간이 우리에게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생애의 지나간 때는 우리가 죄를 짓도록 하는데 충분하기 때문이다. "너희도 역시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나님께서는 고용되기를 바라는 자들을 결코 되돌려 보내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아직도 일할 곳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셋째, 어떤 사람은 "일생을 거의 다 보내고 한 시간" 밖에 남아 있지 않은 "제 십일시"에 늙은 나이로 포도원에 고용되고 있다. 제십이 시에 고용되는 사람은 없다. 생명이 다 하였을 때 기호도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이 있는 동안 소망도 있다." 1. 늙은(오래된) 죄인들을 "위한" 소망이 있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성실하게 하나님께로 돌이킨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받아들여질 것이기 때문이다. 참된 회개는 너무 늦지는 않다. 또한, 2. 늙은(오래된) 죄인들에게도 참된 회개를 할 수 있는 소망이 있다. 전능하신 은혜가 행하기 어려운 일은 하나도 없다. 그것은 "구스인의 피부색과 표범의 얼룩무늬를 바꿀 수 있다." 즉 게으른 습관에 물든 사람들에게도 일을 시킬 수 있으시다. 니고데모는 "그가 늙었지만 다시 거듭날 수 있으며" 또한 "늙은 사람도 더러운 것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예상을 함으로써 그들이 늙을 때까지 자신들의 회개를 연기하도록 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이 사람들이 "제 십일시에 포도원으로 보냄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 누구도 그들을 고용하거나 또는 그들을 고용하겠다고 제의한 일이 없다. 이방인들은 "제 십일시"에 왔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이 전에 그들에게 전파되지 않았었기 때문이었다. 복음이 "제 삼시나 제 육시에"에 전해졌지만 이를 거절하고 반대한 자들은 제 십일시에 이 사람들이 말한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라는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그들은 어떤 사람이 그들을 제 구시나 제 십일시에 고용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을 실망케 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일깨우기 위하여 "지금은 ((회개하고 주께 돌이켜서 구원의 은혜를))받을 만한 때"임을 기억하게 하자. "만일 우리가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그것은 "오늘"이 되어야만 한다. (2) 여기에는 일군들과 계산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① 계산이 행해진 때는 언제였는가? "저물었을 때" 일반적으로 하는 것처럼 일군들은 불리워져 계산을 받았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저녁 시간은 계산하는 시간이다. 특별한 계산은 우리의 생애의 저녁에 행해지게 된다. 왜냐하면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충성된 일군들은 그들이 죽을 때 그들의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 때까지 연기가 되는데, 이는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인내로써 기다리도록 하기 위함이다. 허나 더 이상은 연기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의 규칙, 즉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진 후까지 끌지 말라"(신 24:15)를 준수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충성된 일군인 바울이 떠날 때 그는 즉각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 그 보상은 전적으로 부활의 아침까지 연기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세상의 저녁에 일반적인 계산이 행해지게 될 것이며, 그 때에 "각 사람은 육체에 행해진 일들을 따라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시간이 끝나고 이와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는 세상이 끝나게 될 때 보상하는 일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 때에 주인은 일군들을 부르고 그들에게 임금을 줄 것이다. 사역자들은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포도원으로 부르며, 사망은 그들의 데나리온을 받도록 포도원에서부터 그들을 불러내고 계시다. 포도원으로 부른 것이 효력이 있는 자들에게는 그 부르심이 즐거운 것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그들은 그들이 보상하기 위한 부르심을 받기까지는 보상을 받으러 오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의 휴식과 보상을 위한 하나님의 때를 인내함으로 기다려야만 한다. 즉 우리의 주님의 시간에 가야만 한다. "심판 날에 마지막 나팔이 일군들을 부를 것이다"(살전 4:16). 착하고 충성된 종은 말하기를, "그 때에 당신은 부를 것이요, 나는 응답하리라"고 할 것이다. 일군들을 부를 때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부르게 될 것이다. 제 십일시에 온 자들을 맨 나중에 놓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실망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맨 처음에 부르는 것이다. "심판 날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날 것"이지만 "세상 끝날(그 날의 제 십일시)이 올 때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끌어 올려지게 될 것이다." 먼저라는 선임권(seniority)에 의해 먼저 주어지지 않게 될 것이며 각 사람은 "마지막 날에 그 자신의 신분대로 서게 될" 것이다. ② 어떻게 계산되었는가? 거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첫째, 보편적인 지불(9, 10절). "그들은 각각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선행을 꾸준히 계속하며 영광과 명예와 썩지 아니할 것을 찾는 자는 그들의 일의 가치대로 주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대로 틀림없이 "영원하신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롬 2:7). 하늘에서 영광의 정도는 있을 것이지만,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 완전한 행복이 될 것이다. 동서로부터 오기 때문에 늦어진 자들, 즉 "큰 길가와 사거리 길에서 온' 자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동일한 잔치에 "앉게 될 것이다"(마 8:11). 하늘에서 모든 그릇은 비록 그 그릇들이 똑같이 크거나 기능이 일정하지 않다고 할지라도 아구에까지 가득 채워지게 될 것이다. 장차 그 즐거움이 분배될 때에는 마치 만나를 모으던 때와 같이 많이 모은 자는 더욱 지나치게 모으지 않고 작게 모은 자는 부족 되게 가지지 않게 될 것이다(출 16:18). 그리스도께서 이적적으로 먹이신 자들은 비록 크기는 달랐지만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들이 모두 먹고 배가 불렀다." 하루 일 중에서 열 시간을 일하지 않은 자에게도 하루 종일의 임금이 주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보상을 '빚"으로가 아닌, "은혜'와 "절대 주권"으로써 분배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가장 훌륭한 일군이나 또한 즉각 시작한 자들도 그들의 시간에 공백기가 많이 있고 또한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채워지지 못하므로 그들은 실제로 포도원에서 12시간 중에서 한 시간을 가까스로 일한 것으로 언급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은혜 아래에 있고 율법 아래 있지 않기" 때문에 신실하게 행해진 일들이 비록 결함이 있다고 할지라도 받아들여질 뿐만 아니라 값없는 은혜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눅 17:7, 8 과 13:37 비교) 둘째, 균등하게 분배한 것에 불만을 토로한 자들에 대한 특별한 변명. 이 상황은 비유를 꾸미는 데 기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목적은 분명히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다. 여기에 보면, 1. 불만을 토로함(11, 12절). "그들은 선한 집주인을 원망하였다." 하늘에서는 어떤 불평이나 원망이 없으며 또한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은 범죄요 불행이며, 하늘에는 그 두 가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 세상에서 바라고 기대하는 동안 하늘과 하늘에 속한 일들에 관하여 불평과 원망이 있을 수 있으며 또한 종종 있다. 이것은 이방인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도록 인정된 사실을 보고 자극이 되어 일어난 질투심을 나타내고 있다. 탕자 비유에 나오는 맏아들과 같이 그들을 그의 동생을 받아들인 사실에 대해 비난을 했으며 또한 그에 대한 그의 아버지의 관용에 대해 원망하였다. 이 일군들이 그들의 주인과 다투고 시비를 한 것은 그들이 충분히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자신들과 "동등하게" 취급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탕자의 큰형이 했던 것처럼 그들의 선한 봉사에 대하여 자만하였다. "우리는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디었나이다." 그것이 내세운 변명이었다. 죄인들은 "불 가운데서 수고한다"(합 2:13)고 말해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들은 더욱 극심하게 태양 가운데서 수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풀무 불 속에서가 아니라 단지 그 날의 더위 가운데서 수고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으며" 또한 그것도 서늘한 때에 하였다. 그렇지만 "당신은 그들을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기억하라. (하나님의 은혜로)새로 불리움을 받은 이방인들은 메시야의 왕국을 기대하면서 구약 교회의 포도원에서 의식적인 율법의 멍에 아래 오랫동안 수고한 유대인들과 똑같이 그 왕국의 특권을 가지고 있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우리는 자칫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적게 가지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은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고 다른 사람은 적게 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우리는 자칫하면 다른 사람의 공적들을 과소평가하고 우리 자신의 공적을 과대평가하기 쉽다.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암시를 하신 것은 아마도 베드로에게 하신 것처럼 보여지는데, 그는 이렇게 하심으로써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버린" 사실에 대해 자만하지 않도록 하셨다. 즉 그와 나머지 제자들이 이와 같이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디었으므로 마땅히 천국을 차지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도록 하였다. 하나님을 위하여 보통 사람들보다 더 많이 일하고 고통을 당한 자가 그것을 [*그런의미에서 특별히 조심할 것인바, 자기나름대로 내가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졌노라 말하는 자조차 그 흔적을 자신의 공적으로 여겨 스스로 자화자찬하며]생각함으로써 자신이 [자긍심을 가짐으로써]높아지는 것을 저지하거나 또는 그것으로 인한 공적을 기대하지 않으려고 하는 짓은 실로 [상식적으로는]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주앞에 자신이 어떠함을 잊어버리는 자는 진정 불행하다!! 비천-겸비함만이 오직 은혜를 은혜되게 하며 한량없이 풍성하신 말할 수 없는 은혜에 대한 감사를 극대화 한다!!] 바울은 [결코!!]이러한 생각을 가지지 않으려고 하였으며 또한 그가 "사도 중의 으뜸"이기는 하였지만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며 "지극히 작은 성도들보다 더 못한" 자임을 인정하였다. 2. 그 불만은 일축되고 말았다. 집주인은 이 악의에 찬 추측에 대한 응답으로서 세 가지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1) 불평하는 자는 주인이 그에게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고 불평할 아무런 이유도 가지고 있지 않다(13, 14절). 여기에서 주인은 자신의 공의를 주장하고 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주인은 그를 "친구"라고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따질 때는 부드러운 말과 확고한 논거를 사용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보다 못한 자가 불평을 하고 성을 낸다면 우리는 이로 말미암아 감정을 돋구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침착하게 그들에게 말해야만 한다. ① 하나님이 잘못을 저지를 수 없으시다는 것은 너무도 확고한 진리이다. 이것은 왕들 중의 왕이 가지고 있는 특권이다.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사도 바울은 그러한 생각에 대해 펄쩍 뛰고 있다.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롬 3:5, 6). 그의 말씀이 우리의 모든 불평을 잠잠케 하실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슨 일을 하시든지 또는 우리들에게서 물러가신다고 할지라도 그는 우리에게 잘못한 것이 없으시다. ②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기를 거절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준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베푸신 호의이며 우리들에게 불의한 것은 아니다. 또한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대한 자비이며 우리에게 대한 불의는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흠으로 잡아서는 안 된다. 은혜를 가진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무궁한 자비에서 나온] 값없는 은혜이므로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것처럼] 자랑하는 것은 영원히 배제되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도 [주권적 결정으로서] 값없는 은혜이므로 불평하는 것 자체가 영원히 배제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입은 닫히게 되고 모든 육체는 하나님 앞에서 잠잠케 될 것이다." 그가 잘못한 것이 없음을 불평하는 자에게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그는 그에게 계약한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않았느냐? 만일 네가 계약한 조항을 실천하였다면 잘못했다고 외칠 이유가 없다. 너는 우리가 계약한 것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빚진 자가 아니시지만 그는 은혜스럽게 그 자신의 약속에 의해 [스스로] 빚진 자가 되기를 기뻐하신다. 이를 인하여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에게 동의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가 종종 하나님께 동의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라는 사실이다. 첫째, 세상에 속한 속인(俗人)들은 이 세상에서의 그들의 데나리온에 대해 동의를 하였다. 그들은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았으며(시 17:14), 이러한 일들을 행함으로써 "자신들의 상급"(마 6:2, 5)과 "자신들의 위로"(눅 6:24), "자신들의 좋은 것들"(눅 16:25)을 받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것들로 말미암아 영적이고도 영원한 축복에서부터 버림을 받고 잘리움을 당할 것이다. 이 점에 대해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무 잘못도 없으시다. 그들은 그들이 택한 것을 가지고 있으며, 한 데나리온에 동의를 하였다. "이와 같이 그들이 택한 것이 그들의 몫이 될 것이다." 그것이 그들에 대한 결론적인 말이다. 둘째, 순종하는 성도들은 저 제상에서의 그들의 데나리온데 대해 하나님에게 동의를 하였으며 또한 그들은 그들이 그렇게 동의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너는 그것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는 데 동의하지 않았느냐? 너희는 그렇게 하였다. 너는 가서 세상에 동의하려고 하느냐? 너는 하늘나라를 네 몫으로 네 전부로 취하며 또한 그곳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전혀 취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동의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이제]너는 피조물 가운데 있는 행복을 찾으려고 하며 그것으로부터 하나님 안에 있는 네 행복의 부족한 것을 메꾸려고 생각하는가? 그러므로 주인은, 1. 그를 그의 계약에 잡아 메고 있다(14절).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만일 우리가 그것을 빚이나 절대 소유권에 의해 우리의 것이 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면, 그것은 무서운 말이 될 것이다. 즉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것으로 부를 수 있는 것만을 가진 채로 버림을 받는다면 우리는 완전히 버림을 받은 자가 된다. 만일 최고의 피조물이 자기 소유인 것만을 가지고 가야만 한다면 그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가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의 값없으신 은혜"에 의해 우리의 것이 된 것으로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우리들에게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할 것"을 가르쳐 줄 것이다. 우리가 더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불평하기보다는 우리가 가진 것을 취하며, 또한 감사하도록 하자.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들보다 다른 사람에게 어떤 점에 있어서 더 잘 대우를 해 준다면 우리가 무익한 종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데나리온을 줄 때 우리가 받을 것보다 더 잘 대우를 해 주시는 데도 불구하고 그의 처사에 불평을 해서는 안 된다(불평할 이유가 없다). 2. 주인은 그에게 그가 시기하였던 자들이 그와 똑같이 품삯을 받게 될 것임을 이야기하고 계시다. "나는 나중 온 이 사람에게는 너와 같이 주리라. 나는 그렇게 하기로 작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하나님께서 그의 은사들을 나누어주실 때, 그의 목적이 변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우리의 불평을 잠잠케 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면 우리는 그것을 반대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한 마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누가 그를 (재결정하시도록)돌릴 수 있겠는가?" (1) 그는 주인과 더불어 논쟁할 필요가 [실지로, 전혀]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준 것은 절대적으로 그 자신의 뜻이었기 때문이다(15절). 주인은 앞서 그의 공의를 주장했던 것처럼 여기에서는 자신의 주권을 강조하였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자. [2] 하나님은 모든 선한 것의 소유자이시다. 그것에 대한 그의 소유권은 절대적이고 주권적이며 무제한적이다. ② 그러므로 그는 기쁘신 뜻대로 그의 축복을 주실 수도 있고 거두실 수도 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며, 따라서 "우리 뜻대로 그것을 하려는 것은 합당치 아니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지신 것은 그 자신의 것이다. 또한 이것은 그를 다음과 같은 일에서 정당화시킬 것이다. 첫째, 그의 섭리의 모든 처리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것과 또한 우리가 잘못 낭비할 가능성이 있는 것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버리실 때 우리는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그 자신의 것에 대하여 행하셨다"고 말함으로써 우리의 불만을 누그러뜨려야만 한다. [그는 그러실 권리가 있으시다.] 보라, 모든 것은 본래 창조주께 귀속되는 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그가 준 것이었다. 의존되어 있는 피조물인 우리는 우리의 통치자인 하나님에게 논쟁을 하려 해서는 안 된다. 둘째, 하나님의 은혜의 모든 섭리 가운데서 그는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은혜의 수단들과 은혜의 성령을 주시기도 하시고 거두시기도 하신다. 하나님의 모든 뜻에는 계획이 있으며 또한 임의적으로 행해진 것처럼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도 마침내는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현명하게 행해진 것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물을 통치하시는 주님이시며 또한 "그의 뜻대로 자신의 것을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은 모든 불평하는 자와 반대자들을 충분히 잠잠케 할 수 있다. 우리는 마치 토기장이의 손에 있는 진흙과 같이 그의 손안에 있다. 우리는 그에게 따지거나 그와 더불어 논쟁을 해서는 안 된다. (2) 그는 그의 동료를 시기하거나 또한 비난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또한 그 동료가 보다 일찍이 포도원에 오지 않았다고 불평할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일찍 부름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주인이 동료에게 하루 종일의 품삯을 준 데 대하여 불평할 자격이 없다. 그때에 그는 하루의 대부분을 빈둥거리면서 보내었을 수도 있다.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여기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① 시기(envy) 의 본질. 그것은 약한 눈이다. 눈은 종종 이 죄의 출입구가 된다. "사울은 다윗이 크게 행함을 보고 그를 주목하였다"(삼상 18:9, 15). 다른 사람의 선에(은혜로 선대받음에) 대하여 불쾌감을 가지며 또한 그들이 해를 입기를 바라는 것은 악한 눈이다. 누가 그 보다 더 큰 악을 가질 수 있겠는가? 악한 눈은 우리들에게 대한 곤고이며, 하나님께 대한 분노이며, 우리의 이웃에 대한 악의이다. 그 속에는 즐거움이나 유익이나 영광이 있지 않다. "그것은 오직 유일한 악"이다. ② 그것의 악화. "그것은 내가 선하기 때문이다." 시기란 그 정체가 무엇인가..그것은 선이시며 선을 행하시며 선행을 기뻐하시는 하나님께 전혀 합당치 못한 죄이다. 아니, 그 죄는 하나님께 대한 반대요 거역이다. 그 죄는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불만이며 그가 행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에 대한 불쾌감이다. 그 죄는 동시에 두 개의 큰 계명을 직접적으로 범하는 죄이다. 즉 우리가 그 뜻을 따라야만 하는 하나님에게 대한 사랑과 또한 그 부요를 즐거워해야 할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을 동시에 범하는 죄이다. 이와 같이 사람의 사악성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빙자하여 더 극심한 죄악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기에는 이 비유를 말하게 된 구절(마 19:30)을 인용하면서 이 비유에 대한 적용이 기록되어 있다(16절).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복음의 왕국이 처음 세워진 지금 거듭나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또한 이 유대인 개종자들도 다른 사람보다 먼저 출발을 하는 것처럼 보여졌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자만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여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시다. 1. 그들은 신앙 고백에 있어서 그들의 계승자들에게 뒤떨어질 수 있으며 또한 그들이 비록 신앙 고백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 있다고 할지라도 지식과 은혜와 거룩함에 있어서 그들보다 오히려 뒤떨어진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방교회, 아직도 "시장에서 놀며" 서 있는 이방세계는 유대인 가운데서 찾아 볼 수 있는 사람들보다도 오히려 더 저명하고 유용한 기독자들을 배출하게 될 것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더 탁월하게 될 것이다(사 54:1). 주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기 위해, 옛 시대에 교회가 이전 교회보다 더 풍성하고 번창하였다는 사실을 누가 아는가? 초대시대의 기독교가 우리가 살고 있는 타락과 찾아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거룩한 종교의 순수성과 능력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일군들"이 교회의 "날"의 "제 십일 시에," 즉 빌라델비아 시대(역주: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연대별로 적용한 것)에 포도원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그 때에 성령의 역사가 지금까지의 어떤 시대보다 더 충만하였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2. 그들은 마지막 때에 위선자로 발견되지 않을까 두려워할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적용되고 있다(마 12:14). 그것은 그 때에도 진리였지만 지금에도 역시 참된 진리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반적인 부르심으로 청함을 받지만 구원적인 선택으로 택함을 입지 못하는 것이다. 영원 전부터 택함 받은 모든 자는 "때가 차매" 유효하게 부르심을 받고 있으며(롬 8:30), 따라서 우리의 효과적인 소명을 확신함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택하심을 굳게(벧후 1:10)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외적인 소명을 위한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르심을 받고 있지만"거절하고 있다(잠 1:24). 아니, 그들은 하나님에게로 부르심을 입었지만 그에게서 떠나가 버리는 것이다(호 11:2, 7). 이것을 보면 그들이 [실상은]선택받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택하심을 입은 자는 [반드시] 얻을 것이기"(롬 11:7)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단지 "부르심"만을 얻은 많은 기독자들에 비하면 "택하심을 받은" 기독자는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적인 부르심의 모래 위에가 아닌, 영원한 선택의 반석 위에 하늘나라에 대한 우리의 소망을 세워야만 한다. 우리는 허울만의 기독자로 보여지거나 실제적으로 기독자가 되기에 부족한 자가 될까봐 두려워해야만 한다. 아니, 우리가 흠이 있는 기독자로 발견되거나 그로 말미암아 "미치지 못하는" 부족한 기독자가 될까봐 두려워해야만 한다. -----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예고하심(마 20:17-19) 여기에 있는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고난에 대하여 그의 제자들에게 세 번째로 예고하신 것들이다. 그는 지금 유월절을 지키고, 또한 위대한 유월절이신 자신을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셨다. 이 두 가지는 예루살렘에서 행해져야만 한다. 즉 거기에서 "유월절은 지켜야만 하며"(신 12:5), 또한 거기에서 선지자는 죽임을 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이러한 송사에 있어서 재판관이었던 산헤드린 대 공의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눅 13:33).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Ⅰ. 이 예언의 은밀성. "그는 열 두 제자를 따로 데리셨다." 이것은 그들에게 "어두운 데서" 말씀되었지만 후에 "빛 가운데서 말할 수"(마 10:27)있었던 일들 중의 하나였다. 주님께서는 친구와 같은 그들과 은밀한 교제를 가졌으며 특히 여기에서도 그러하였다. 그것은 매우 힘든 말씀이었으며 만일 어떤 사람이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다면 그들도 할 수 있었다 . 그들은 장차 그와 함께 즉각적으로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이므로 미리 경고를 받아 미리 무장할 수 있도록 그들이 이 일에 대하여 반드시 알아야만 하였다. 그 일이 대중들에게 말해지는 것은 시기상조였다. 1. 왜냐하면 그에게 냉담하였던 자들이 말을 듣고 그에게서 등을 돌리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거치는 장애물은 그를 따르는 자들로 하여금 놀라게 하며 더 이상 그를 따르게 하지 않을 것이다. 2. 왜냐하면 그에게 대해 뜨거운 열정을 가진 자는 이를 듣고 그를 방어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할 것이며 또한 그것은 "민요를 일으키게 될"(마 26:5)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이 일을 미리 말씀하셨더라면 그러한 민요가 일어난 것은 그의 책임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방법들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그의 나라의 순수성과 완전히 불일치가 되며, 또한 그는 그의 고난을 방해하려고 하는 그 어떤 일도 결코 용인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 대화는 회당이나 집에서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여행하는 "길 도중"에서 있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길을 가거나 여행할 때 "아름답고 교훈적"인 대화를 가질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신 16:7 참조). Ⅱ. 예언 그 자체(18, 19절).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그 말씀은 그가 이전에 한두 번 말씀하셨던 것에 대한 반복에 불과하다(마 16:21; 17:22, 23). 이것은 그가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고민거리가 무엇이며 또한 그의 마음이 그의 고난의 사역에 놓여져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그를 불안케 하지는 않았다. 그때에 그는 그것을 피하시려고 하고 또한 그것을 피하실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은 그를 기대와 소망으로 부풀게 하였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이 세상과 무덤 사이에서 직면하게 될 우리의 죽음과 고난에 대하여 종종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유익하다. 이와 같이 하여 그것들과 더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