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하13장 [387.멀리멀리갔더니][527,어서돌아오오]..날마다숨쉬는순간마다..예수는주..자비로운주하나님날구속했으니..내진정사모하는..
---거듭난 참 믿는이로서 오늘 그대는 어떤 패러다임을 따라야 inHIM reality를 살 수 있는 것인가....많은 물 위에 앉은 음녀-거짓 그리스도/사탄의 회-벨리알(죄성 따름)의 음란, 그것인가, 아니면 갈2:20의 "나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친히 사시는, 그리스도의 교회-Q자녀/중생의 성도-그리스도인/JC의 제자(성령 따름)의 삶"인가??---***[큰 음녀의 패러다임인] 음란은 그리스도의 집 된 그대의 마음의 주인이신!! 순전-완전-온전하신 그리스도와 하나됨 흔들어 놓으려는 미혹-현혹-유혹하는 귀신의 영이기에!!(...음행/간음-이혼으로 파급되게 하는 바), 마음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문제를 그때마다 점검해야 한다..., 먼저 그의 생각자리에 참 생명 그리스도의 충만 넘침 상태에 틈 생김-JC이름으로 영적 전쟁-원수대적함-의 부재를 의미함이니, 이는 곧 하나님 말씀-보혈-성령의 결핍이자 보좌 앞 참예배의 결핍 경향으로 인한다....먼저 말씀을 생각자리에 넘치게 함==>말씀 그대로 하나님은 JC보내사 보혈!!을 오늘도 부어 정결케 하시며, 성령으로 충만케 하사 오늘 그리스도를 살게하고 계심을 참되게 절절이 인식하며 감사찬양 안에 거할 필요가 있다...계시록의 보좌 앞 예배에 참여하도록!!, 주님께 몰입하는 시간을 따로 갖도록 하라..이로 인해 살아 생동하며 움직이는 참 만족이신 생명샘 그리스도와 하늘보좌로 부터 부으시는 하나님 영광으로부터 모든 필요 공급--이것이면 나누어주고도 남을만큼!! 충분하고도 넘침 --늘 새롭고 기이한, 매력 넘치는 그분의 사랑과 그 열납하시는 기쁨 됨, 기이한 이끌림에 끝까지 이끌리는 반쪽으로서 평강 안에 동행함에로 나아가야 하고 원수를 대적하여!! 음란 귀신의 영, 그 근원머리인 사탄마귀, 그가 패한 십자가로, 불타는 지옥이 될 바 그가 나온 바 무저갱으로 쫓아버리고 찬양-감사함에로 들어가야 한다.
[계2:21..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레19:15-18...*15.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16.너는 네 백성 중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비방하지 말며 네 이웃의 피를 흘려 이익을 도모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17.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18.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살인 교사는 이중 죄악 [잠20:22..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
===암논과 다말....정해진 (윤리도덕적) 원칙에서 벗어나면 (그의 가솔일지라도 예외없이!!) 누구도 예외없이 처단했던 이광요의 인물됨이 그립다!!..이로 인해 드디어 다윗의 레임덕이 시작되고 있었다.. ......진정한 영성, 진정한 신앙은 "배려-온유-인내-절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먼저 대접함"에서 드러남 ......[다윗의 범한 바..강탈-.간음-살인] 죄의 마땅한 대가 지불 징구?!..오히려...거듭남 경험한 다윗은(영적 아비-어미마다 참으로 그러하다..악순환 고리 끊기를) 이제 마음을 주께 열어드려 하나 됨따라 주님 임재 안에서 늘 깨어 파수함 실행으로 대적의 궤계를 경계하며 가솔들의 마음사정을 돌아봄에로 확장시켜야 함, 또한 이로써 자녀들의 그 어떤 문제들조차도!! ((바로 부모 자신의 문제에서 유래되었기에!!..동일한 심령으로 회개-중보-중재할 책임 있는 제사장이기에!!))주 앞에 가지고 나아가 고함으로써 지혜을 알게 할 수 있다.. ....가정내에서, 참 믿음으로 거듭난 아버지는 모든 공급이신 Q의 권위-질서(10%..공의와 정의 ...훈계-치리 베풂) + 사랑(90%..경청/인자...상호간에 자녀들에게도 용서 구하고, 그들 사이에도 용서 실행하도록)의 대리인-기정 제사장 됨을 분명히 깨닫고 실행하여야, 그를 보며 따르는 자녀들 영혼의 균형 유지 가능함... .....(사람에 대한) 인격과 (Q에 대한) 영성의 성숙 정도는 주 임재 앞에서 통회/토설-중재/중보-동행-인내-양육의 교훈 수용/감수/익힘/실행과 자신과 자녀들에 대해 마땅한 적용 [오래참고 견뎌 버텨내며 보류함]으로 결정됨.. ..**내적 성장성숙 목표는 JC의 거룩하심+참 인성의 충만한 분량!!...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친히 이루시도록 주인되심과 머리되심, 모든 필요요 충족이심 붙들고, 나를 내려놓고-열어-비워-내어드림으로써 동행함에 의하며, **성숙이란 (하지말아야 하는 것을 하지않음을), **절제란, (주 임재 앞에서 머무르기!!...+ 사랑과 생명 관계를 존중-중시-준행하기에 여지/끝을 항상 남겨둠을) 의미 ..**"~가 어떻게 그럴수 있나" 한탄하며 탓함 아니라 묵묵히 주님 앞에서 잘못을 토설함의 참된 회개자가 이긴 경기가 된다!! @암논 -- 피해 의식(아버지 부재-독수공방 어머니 상처)만 주장하고 합당한 내적 회개는 전혀 없었음,//다말은 [겸비-애통의] 회개로 주님의 위로 안에 살게 됨 == [다윗 때리는] 주님의 인생 회초리 역할 완수......명심하라!!, 영문도 모르고 일방적으로 피해 입는/당한 사람마다!! 영적 측면에서는 참된 축복-안위 받은자 됨을 알아두어야 할지니..(곧 주님이 그렇게 여기심 인해 극적 반전 시야 열어주심) 그대는 분수령적인 회개를 통해 주께로 완전히 돌이켰고, 새롭게 함 받은 아내나 남편을 주심의 새롭게 하심과 위로로 안위하여 새로운 출발의 걸음으로 [나날이 일상가운데서 새생명 주님을 앙망하고 주목하며 그리스도로, 그리스도를 살며 그리스도를 공급함으로써 서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이르도록 그분은 성장성숙케 하심에로 열어드리고 있는가....주와 동행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새롭게 하심 입은 다윗일진대..늘 깨어 기도하며 그대 마음을 일심으로, 일편단심 주께로 향하라, 동시에 그대 남편과 아내에게 참되게 하나되어 주 앞에서 행하라...합당하게 교훈 베플며 새롭게 받는 바 하나님의 다루심을 그대 자신에게 적용하되, 자녀들을 주께 여쭈며 합당하게 양육-징계함 통해 오직 주님 영광의 그릇 삼아 사용하시게 하라...((이제는 더 이상 홉니-비느하스를 방임한 엘리가 되어서는 안된다))
["inHIM reality", 그 안에서 필레오-아가파오-스테르고-에라오]....[inHIM=inGOD=InJesus=InChist=inHisBeloved....reality = 참된 현실적 실제 삶 = 곧 inHIM reality란, "하나/일치" 이신 주님을 오늘, 지금, 현실에서 참되게 사는 삶]....거듭난 자신의 존재 질서 균형 그 우선순위를 영-->혼-->몸에 둠으로써, 주 예수 이름 부름으로 가능.. @@@ 필레오--사랑과 애정의 표현에 가장 널리 사용...관심-돌봄-환대-애착 .....그런데, 그리스도 신앙의 " 필레오+아가파오"는 찬연히 빛나는 영원한 영광의 주님의 어떠하심(믿음-사랑)이라, 존재하는 모든 것 위에 자리잡고 있다.. ((하나님-말씀-유밀무이한 진실과 참-영존하시는 지존자-창조주-주권자, 그분이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시고 대속하여 주심, 그 사실을 붙들어 믿는 참된 믿음 통한 상호 소유 됨의!!, 그 무엇, 누구보다도 중히 여기는, 참된 믿음 통해 거듭난 이들의 영생 주시는 분, 영생 JC에 대한 참 믿음 통한 헌신적 사랑이 바로 참된 필레오!!((세인들이 보기에는 미쳤다고 본다..그러나, 온전한 제정신으로 미친 것이요, [어둠과 타락 가운데 처해 있음에도 그 자체에 대해 무지무각-마취/마비-몽롱한 상태에 놓여 있는, 오도되고-오해-착각-착취-포로-학대 상태에 세상은 처해 있고 구주JC믿음 외에는 구원이 없다] 세상 그 자체는 결코 그 사랑-믿음의 열정[= 내주하시는, 하나이신 JC의 열정이다!!]을 끌 수 없다....당연히 죽음을 넘어서는 사랑이기에, 순교조차 두렵지 않음) -- 이를 통해 새로운 (주님의) 차원/영역으로 결속되고 맺은 특별한 친족-친구-JC와 제자간의 최우선적 언약적 사랑...곧, 선택하신 자들에 대한 언약적 사랑...JC와 나사로 :: 아버지는 제자들 안에 있는 필레오를 보시고 아가파오로 사랑하심..)) .....제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요13:1), 제자들 상호간의 사랑(요13:34), 아버지께 대한 예수의 사랑(요14:13)에는 오직 아가파오만 사용되고 있음. .....구원 조건이 되는 참 믿음의 말과 행실로써 구주 사랑함(고전 16:22) 통해서 은혜가 임함 .....[목회 사역 + (목숨 내어주기까지 일편단심으로 사랑함의) 특별한 순교]라는 특별한 사명의 위임이기에 베드로에게 (필레오를 포함한 아가파오 :::: 아가파오-->아가파오-->필레오[참믿음으로 하나 됨, 곧 순교에까지 이르는 생생한 삼 믿음-살아 생동하는-발휘하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산 믿음에 뿌리박은 아가페) 질문을 세번이나 반복하고 계셨다.. @@@스테르고 -(차별하거나 편애하지 않는) 내리사랑(부모-자식간, 친족애, 내리사랑/다정다감) @@@에라오 --주께서 창조하신 생명 있는 존재로서, [경건한 자손 얻도록, 허락하신 창조적 에로스는 ] 전 존재로 상호 사모하고 사랑함으로써 언약한, 유일무이한 짝된 이성의 배우자 간에 서로 배려하고 섬김으로써 자기 전존재(몸-마음-영혼)를 온전-순전-완전히 열어 내어주어 헌신함으로써 이루는, 열락-환희-환락-황홀의 사랑의 합일/하나 됨과 그 만족-전존재의 열납+사랑 받음- 누림이라 할 것이요. 이로써 새 생명 낳는 기쁨을 얻게 하셨다....(([사탄과 사탄체계인 세상에서 말하는 타락한 "에라오"개념을 배제할 수 있기를 바란다]...타락한 "에라오"는 하나님의 창조하신 축복으로서 주어진 "성과 그 합당한 누림"의 본 뜻과는 거리가 먼, 이기성과 야수성 = 짐승보다도 못한, 오로지 자신의 욕구분출만을 위해, 원하고 심지어 강제로 빼앗고 파괴하기까지에 이르도록, :: [이성-의지-판단력 상실 = 제정신을 잃어버리고 강탈 당함 허용에 이르도록, 점차적으로 세뇌 과정 거침]무아지경의 흥분/광란-관능적 환락(sensual ecstasy)-도취/중독/황홀 경험에로 유혹하는 바, 그 수단으로서의 매춘이나, 신전 혼인 빙자한 광신주의적, 색정적 에로티시즘(sensual eroticism..모든 -ism은 우상숭배임)-데모니즘(demonism..악마숭배주의) @@@[아가페, 아가파오] 3. 구약 및 70인역본의 용법. 구약성경에서 사랑을 뜻하는 중요한 히브리어 동사는 "아헤브"이며, 그 역어로서 아가파오가 주로 사용되었다. 이 동사에서 유래한 명사 아하바의 역어로는 아가페가 주로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에서 사랑은 [그의 존재 내부에서]그 사람을 강요하여 그가 좋게, 또는 올바르게 평가하거나 인정하는 사물이나 사람에게로 이끌어 가는 자발적인 힘이다. 사람은 이 사랑의 힘에 제어를 받아 자기 자신을 주거나 혹은 사랑의 원인이 되는 대상을 확고히 붙잡거나 혹은 즐거움을 주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사랑은 내적 인격에 심은 영혼의 불가해한 힘이다. 사람이 사랑의 대상을 올바로 인정하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한다(신 6:5). 한편, 사랑과 미움은 생의 양극이다(전 3:8; 전 9:6). 사랑은 인간 상호간의 사랑, 하나님의 인간과의 사랑, 사물에 대한 사랑 등을 나타낸다. (a) 이 단어는 남녀의 사랑에 대해 사용되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하나님과 관계(신랑 그리스도 신부 교회), 그리고 남녀 부부의 성적 관계를 시사해 준다. 선지자 예레미야(렘 2:25)나 호세아(호 3:1; 호 4:18), 그리고 에스겔(겔 16:37)은 사랑의 성적(sexual) 측면을 매우 진하게 묘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것은 단순히 성욕 및 성행위를 의미. ..이 남녀의 사랑은 이성(sexes) 상호간의 생명력 넘치는 충동을 의미한다. -- 이 단어는 남녀의 연애나 열애(창 29:18이하; 창 34:3; 삿 16:4), 합법적인 부부의 행복한 사랑(창 24:67; 삼상 1:5)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창조의 기사는 성의 구별과 부부간의 사랑이 생을 풍요하게 하는 은사임을 설득력있게 이해시켜 준다(창 2:18이하). 그러나 이 사랑은 성적 사랑의 범위를 포함하지만 그것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오히려 헌신적 사랑과 생활의 충실함이 합쳐져 있다. 구약의 초기 기록에 의하면 이러한 사랑은 일부다처나 일처다부 사상과 부합하지 않는다. 구약성경은 충실(참조: 창 20:13; 삿 14:16; 삿 16:4-5; 겔 16:8; 겔 23:17; 호 3:1), 상호의존(참조: 창 24:67), 책임(참조: 삼하 13:1, 4, 15)과 같은 인간 사랑의 다른 측면을 제외하고 성적인 것에 집중하는 위험을 이해시켜 준다(The interpertreter's D.B).」 더 나아가서 아가서는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라고 열정적인 사랑의 강력한 힘을 찬양까지 한다. 이 노래는 성적(남녀) 사랑의 기이함과 적극적인 힘을 찬양하지만 그 찬양에는 그 사랑이 근거를 두고 있는 상호의존과 신앙심(헌신)을 강조하고 있다(참조: 아 2:16; 3:1-8; 7:10; 8:6-7). 아가서에서 사랑을 묘사할 때 거의 대부분 아헤브(아가파오)와 아하바(아가페)를 사용했다. 그러나 여자가 남자를 부른 칭호는 도드(히 1730: 사랑하는 자)를 사용했다. **cf>이러한 사랑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암논과 다말의 이야기는 성충동의 야수성, 즉 대상자와 성적 관계를 가지려는 무절제한 요구를 보여준다(삼하 13:1-22). 사랑은 성애 또는 성욕적인 영역에서 세상이 알지 못하는 근원, 곧 마귀로부터 기인한 원시적 힘인 미움을 부인함으로 맞서는 적극적인 능력이다. 이 이야기는 이 두가지 충동의 야수성도 투명하게 보여준다(삼하 13:1-22). ** (세상적)부부 생활은 상대에 대한 사랑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다. 삼손 신부의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치 아니하는도다"라는 히스테릭한 말에서(삿 14:16; 참조: 삿 16:15; 창 29:31, 33) 동일한 요소가 표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심지어 법까지도 사랑과 미움의 성욕적 증상에 관여하고 있다(신 21:15이하; 22:31이하; 24:1이하). (b) 이 단어는 부모와 자식, 가족간의 사랑에 대해 사용되었다.[그러나, 치우침의 편애가 되어서는 안된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사랑했으며(창 22:2), 리브가는 아들 야곱을 사랑했다(창 25:28). 야곱은 요셉과 베냐민을 사랑했다(창 37:3; 44:20). 잠언은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경계하느니라"고 했다(잠 13:24). 또한 이 단어는 며느리의 시어머니를 향한 사랑과 같은 가족간의 사랑을 표현한다(룻 4:15).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은 어느 곳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부모를 존중하고 존경하며 또 부모에게 복종해야 한다. 참고-창 47:29에 보면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인애(헤세드: 친절, 자비; 70인역본 )란 단어를 사용하여 자기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기를 요청했다. 이것이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족속이나 가족의 유대는 이스라엘에서 매우 강하였다. 그러므로 '근친' 관계의 중요한 요소인 사랑에 대하여 놀랄 일이 아니다. 그것은 룻 3:10에서 이성 곧 남녀 사랑과 관련되어 있다. 그곳에서 인애(헤세드: 친절, 자비; 70인역본 ejleo")는 남녀 사랑의 개시와 가까운 친족에 대한 충실, 이 둘을 포함하고 있다.」 성경은 가족적 사랑이 너무 선택적일 때((= 차별적인 편애))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삭은 에서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다(창 25:28). 그 결과로 야곱과 에서가 서로 반목하고 미워하게 되었다. 요셉에 대한 야곱의 편애로 인하여 다른 아들들이 요셉을 미워하고 시기하게 되었다(창 37:4). 배타적인 사랑은 증오가 들어올 수 있는 지점이 될 수 있다. 이는 사랑이 헌신적일 뿐만 아니라 책임을 다 해야 하기 때문이다. (c) 이 단어는 친구의 특별한 애착을 나타낸다. 다윗과 요나단 사이의 사랑은(삼상 18:1, 3; 20:17) 여인의 사랑보다 더 깊은 우정의 차원이었다-"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삼하 1:26). (d) 더 나아가 이 사랑은 사회적 공동 생활의 근본과 규범으로 나타난다-"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레 19:18). 이러한 면에서 사랑은 이웃을 위한, 그리고 이웃을 향한 헌신이며, 이웃을 형제로서 받아들이는 것이고 이웃이 당연히 받아야할 대우를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특히 외국인(레 19:34)과 가난한 자(레 25:35)와 고아의 권리와 관련된 사회적 법률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이웃 사랑은 단순한 친절이나 호의로 해석할 수 없다. 이것은 편협한 배타주의를 배제한다. --바로 가까운 곳에 있는 (도움 필요한 그) 사람은 누구나 이웃이요, 동시에(하나님은 천지에 충만하시기에, 그 자신을 주님의 영으로 행하는 거듭난-참 믿는이로 인식한다면) 땅끝까지 동시대 사람 하나하나가 이웃이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적(enemy)으로 생각되는 것같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도 의미한다. 그 이유로 신 22:1-4이 동포를 도울 의무를 부과하는 것인 반면, 출 23:4-5은 특별히 이 의무를 적대적인 사람에게 적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신22:1-4..네 형제의 소나 양이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그것들을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 돌릴 것이요 네 형제가 네게서 멀거나 또는 네가 그를 알지 못하거든 그 짐승을 네 집으로 끌고 가서 네 형제가 찾기까지 네게 두었다가 그에게 돌려 줄지니 나귀라도 그리하고 의복이라도 그리하고 형제가 잃어버린 어떤 것이든지 네가 얻거든 다 그리하고 못 본 체하지 말 것이며 네 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진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형제를 도와 그것들을 일으킬지니라] [출23:4, 5...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그것을 버려두지 말고 그것을 도와 그 짐을 부릴지니라] 이웃은 동료일 수도 있고 적일 수도 있으므로, 그는 사랑의 대상이지 법적 제한의 대상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의 개인은 법적 개인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형태에서 출 23:4이하의 요구와 아마도 한층 더 높은 수준인 잠 25:21에 있는 기본적 진술("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은 원수를 향한 성향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 않으나 한 특별한 방식의 행위의 의무를 지우는 것으로서, 원수에 대한 사랑을 실천적으로 가르치려고 한 것이다. 요셉은 그의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선으로 악을 갚는 그런 실례를 보여준다(창 50:19). 물론 구약성경에는 이러한 원수를 사랑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 시 109편과 잠 14:20 및 적대 국가들에게 향한 일반적인 태도는 이에 대한 예증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의해 부과된 윤리적인 요구의 고결함은 여전히 존재한다. ---[요13:34,35..“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눅6: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마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22:37-4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e) 이 단어는 구체적인 것이나 추상적인 것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기름(잠 21:17), 은과 풍부(전 5:10), 뇌물(사 1:23)을 사랑했다. 다른 사람들은 악(시 52:3-5), 사망(잠 8:3), 허사(시 4:2-3), 거짓 맹세(슥 8:17)를 사랑했다. 또 다른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시 119:47), 율법(시 119:97), 증거(시 119:119), 법(119:159), 그리고 그들은 선(암 5:15), 진실과 화평(슥 8:19), 구원(시 40:16-17)을 사랑했다. 4.신약성경에서 아가파오의 용법. 동사 아가파오는 신약성경에서 143회 나오며, 요한의 기록(요한복음에 37회, 요한1-3서에 31회, 요한계시록에 4회)에 가장 자주 나타난다. 1. 공관복음의 용법. (a) 예수님은 새로운 사랑을 요구하신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두 계명에 기초하고 있다(마 22:36-마 22:40; 병행구, 막 12:28-막 12:34). 이 두 명령은 신 6:5과 레 19:8을 결합시킨 것이다. >> 바로 이 첫째 부분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명령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의식적으로 그의 백성의 도덕적 전통의 입장을 취하신다. 그러나 그가 요구하는 사랑은 오로지 모든 다른 계명을 그 사랑에 이르게 하고 모든 의가 그 표준을 그 안에서 찾는다는 것을 뜻하는 사랑이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사랑은 의지와 행위[=일편단심, 일심으로 지향성 그대로 올곧게 행함]의 문제이다. 그러나 그가 듣는 이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무조건적인 태도로 하나님을 위해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결단하고 준비되어 있기를 요구하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가능성을 근본적인 양자택일에 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인의 노예처럼 그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참조: 눅 17:7). 그것은 충실히 유순하게 그의 명령을 듣는 것이며, 스스로를 그의 지배 아래 두는 것이며, 다른 그 무엇보다도 이 통치의 실현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참조: 마 6:33). 한편 그것은 그의 전 존재의 근거를 하나님에게 두며, 전적인 신뢰로 그에게 매달리며, 모든 관심과 책임을 그에게 위탁하며, 그의 손에 의해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지도 않고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는 모든 것은 미워하고 멸시하는 것이며, 다른 모든 인연과의 관계를 끊는것이며, 방해되는 모든 것을 잘라버리는 것이며(참조: 마 5:29이하), 오직 하나님과 묶는 것 이외의 모든 구속을 끊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세력, 즉 재물과 허영은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포기하거나 싸워야 하는 세력들이라고 특별히 언급하신다. 재물을 삶에 필요한만큼 충분히 공급하시는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고 탐하며 중히 여기고 부를 축적하려는 자는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는 믿음이 적은 불신자이다(마 6:24b; 마 6:30이하).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 대해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문자적으로 '사랑하는도다')"라고 화를 선언하신다(눅 11:43). 명성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양립할 수 없다. 또 하나 아직 이 사랑을 위협하는 세 번째 위험, 즉 박해에 대한 긴장이 있다. 제자직에는 고난이 수반된다. 아키바(Akiba) 같은 위대한 유대인 순교 신학자들처럼 예수님께서는 부득이 그의 제자들이 당할 폭행과 고통과 모욕과 수난이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충성에 대한 중대한 불 시험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아시고 말씀하신다(참조: 마 10:17이하; 마 5:10이하). 최후의 고통이 인간에게 다가올 때가 있다(참조: 마 5:29이하; 마 24:10이하; 마 24:12이하). 이 말씀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특성은 순수하고 단호하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강렬한 열정이며 모든 혼란과 권세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사랑하는 주님이 나타나실 때까지 굳게 인내하는 적은 무리들의 열정이다. 그리고 제자로서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된다(참조: 마 10:37이하; 마 25:31이하; 눅 6:22이하). 이와 같은 요구는 사랑이 직면해야 할 고난을 뜻한다. 사랑이란 고난을 통해서만 이 세상에서 이룰 수 있다. 사랑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이를 희생시키게 하였다면, 그의 제자들에게도 분명 이 사실이 적용될 것이다. (b) 다음에 예수님께서 이웃에 대한 사랑을 명령하신다: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9; 병행구 막 12:31). 이 둘째 부분인 이웃 사랑의 계명은 롬 13:9; 갈 5:14; 약 2:8에도 인용되어 있다. 문자적으로 '둘째는 그것과 같이 너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다'로 번역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예수님께서 명하신 근본적인 큰 요구이다. 그것은 인류 속에서 새로운 실재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서, 이 사랑 자체가 인간 상호간의 사랑의 기초이자 동기이다. 랍비 아키바(Akiba)는 이웃 사랑의 계명이 토라(Torah)의 기본 원리이며, 여타의 모든 것들이 이 속에 함축되어 있다고 하였다(참조: 마 22:36이하에 관한 SB I 900-8).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 이런 명령을 덧붙여서 실체화한 것은 신약성경의 특징이다. 예수님은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는 구약성경 및 유대인의 요구를 받아들이시지만 그러나 동포에 국한하는 이웃 사랑에 대한 제한을 단호하게 제거하신다. 그는 또한 이웃 사랑을 우리의 길에서 만나는 의지할 데 없는 사람에게 집중시킨다. 이웃 사랑에 대한 이해를 위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눅 10:29이하). 서기관은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고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가장 가까운 동포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외국인에게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의 체계적인 목록을 제시함으로써 답변하지 않으신다(Philo, supra, 40). 또한 모든 사람들이 형제들이라고 하는 가장 멀리 있는 자들에 대한 별난 사랑을 칭찬함으로 대답하지도 않으신다. 그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이가 누구인가?"라고 역으로 질문하심으로 노미코스(nomikov", 3544)의 질문에 대답하신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나를 중심에 두고 동심원을 그리는 이전의 그룹 짓기를 산산이 부수는 한편 유기적인 이웃의 개념을 내세우신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개념에 의해 당신이 중심에 있다는 새로운 그룹 짓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이 체제는 모든 사람과 장소에 도식적으로 적용되는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오직 절대적인 결합체로 구성된다. 그것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둘레에 겹겹이 형성된다. "마침"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가장 가까이에 서 있는 자는 누구든지 똑같이 그에 대하여 이웃의 의무를 지닌다. 세 사람은 똑같이 강도들을 만나 고통하는 사람 가까이에 있다. 그들 중 누가 이웃의 의무를 이행하는가? 이방의 사마리아인이다. 왜인가? 보고 불쌍히 여긴 것이다. 마음이 최종적인 결정을 한다. 마음이 타인의 고통을 알아내는 자가 그의 이웃의 의무를 이행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다른 두 사람은 주저하였으므로 그들의 이웃으로서의 의무를 위반한다. 그러나 이 불쌍히 여김의 도입이 이웃 사랑에 있어서 감정의 낭비를 내포하지 않는다. 요구되는 것은 최대한 감정에 흐르지 않고, 가장 비감상적으로 도움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사마리아인은 매우 침착하게 가까운 앞날을 대비하면서 그 순간이 요구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행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허비하지도 않고 그 의무와 타인의 죄에 대하여 쓸데없이 말하지 않는 자비를 베푼 것이다. 그는 해야만 하는 것과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이 이야기에 피할 수 없는 절박함을 부여한다. (c) 예수님은 의식적으로 유대의 전통과 대립하는 요구로서 '원수를 사랑하라' 말씀하신다. 마 5:43이하와 눅 6:32이하의 간결한 말씀에서 그 요구에 대한 3중의 결정을 볼 수 있다. 첫째로 그것은 새 시대의 새 요구이다("옛 사람에게 말한 바...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마 5:21; 마 5:43). 둘째로 그것은 칭찬(카라스)을 지적한다("삼", "더하는 것",마 5:46 이하). 셋째로 그것은 "죄인들"(세리들, 이방인들, 마 5:46 이하)과 날카롭게 구별되는 "듣는 자들"에 적용된다(눅 6:27).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원수에 대한 사랑은 이 세상과 세대의 자녀들에 관하여, 그 미래가 그들에게 속한 하나님의 새 백성의 자녀들의 태도이다. 그들은 되돌려 받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 사랑을 보여주어야 하며, 상환의 가능성이 거의 없는 곳에서 빌려주어야 하고, 제한없이 주어야 한다. 그들은 세상의 적의도 기꺼이 저항없이 희생적으로 감수해야 한다(눅 6:28). 참으로 그들은 그들을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해야 하며, 저주하는 자를 위해 축복해야 하고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눅 6:27 이하; 마 5:44). 이들 요구 중 몇몇에 대해서 랍비의 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 완전하고 단호한 강령과 비교해 볼 때 전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옛 백성, 유대인 공동체의 순교자의 정신조차도, 아직 들어보지 못한 이 순교의 의지에는 훨씬 못 미친다. 여기서 한 새로운 중재가, 순교자의 과업, 즉 하나님을 미워하고 그의 신실한 백성을 멸하는 적대적인 세상을 위한 중재가 이루어진다. 이상주의자들은 항상 있어 왔다. 그러나 여기에서 환상이나 감상적인 생각없이 이웃 사랑의 이상을 현실 속에 전하신 자가 말씀하신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해야하고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와 같이 흔들리지 않는 진지한 어조와 현실 감각을 가지고 이 불가능한 요구들에 대해 말씀하신다. 항상 형제 사랑과 보다 좋은 세계에 대한 열광주의자들이 있어 왔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아시며 그러므로 오로지 사랑에 근거를 둔 세계 안에서 사는 삶을 요구하신다. 그는 냉철한 현실성과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하신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미움과 원수에 대한 유대인의 견해를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레 19:18에 대하여, 동족의 자손들에 대해 분노와 복수의 감정 같은 것은 금지되나 다른 백성들에 대해서는 금지되지 않는다고 해석하여, 시 139:19-22과 시 140:9-11과 같은 구절을 그들의 원수들을 미워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예수님은 사랑을 이웃에게 제한한 레 19:18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원수까지도 이웃 사랑의 대상에 포함시킨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의 원수들을 이전의 미움과는 대조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계명을 더 이상 확장시키지는 않았으며, 사랑에 관한 율법을 복음의 가르침 아래에 두었다. 이 복음의 가르침은 눅 10:29-눅 10:37에서 분명히 설명된다. '곤경에 처해 있는 자는 누구든지 항상 나의 이웃이다'는 진술은 '나의 이웃은 나에게 자비를 베푼 자이다'는 진술에 부속하고 뒤따른다(참조: 눅 10:37). 바르트는 그의 중요한 신학적 해설에서 내가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어리석은 짓임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전의 원수였던 사마리아인은 나에 대한 그의 자비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나의 이웃이 되었으며 따라서 나로 사랑으로 행하도록 도전(요구)하였기 때문이다(눅 10:37). 다른 말로 하면 사랑 받아본 경험이 도전을 앞서며, 복음이 명령을 앞선다. 그 이유는 예수님 자신이 이 비유의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를 보고 불쌍히 여기는 사마리아 사람의 모습을 통하여 예수님의 모습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 자비로운 구속(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d) 예수님께서 새로운 상황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사랑에 대한 그의 요구는 당연한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새로운 사건인 하나님의 자비를 선포하신다. 그는 죄사함을 가져오시고,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 속에서 새롭고 넘치는 사랑이 흘러 나온다. 이러한 사랑은 모든 생명과 활동에 충만하여 그들을 지도한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새로운 관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서로간의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하였다(눅 6:36이하). 이것은 자비의 관계요 화해의 관계이다. 2) 바울 서신의 용법. (a)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로 말미암아 창조되는 새로운 상황을 분명히 깨닫고 묘사한다. 이제 바로 동트는 새 시대에 대한 로마서의 주요한 논제는 하나님을 향한 선택된 자들의 사랑으로 시작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나아가고 마침내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아가페, 롬 8:39)에 대한 확신으로 끝맺는 하나의 찬양에서 절정에 달한다(롬 8:28; 롬 8:31이하). 이 확신은 세 가지 사실에 근거한다. 첫째,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보내시고 이 사랑의 행위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롬 8:27), 곧 아들께서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 십자가 위에서 성취되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사도를 부르시고 계속해서 그가 택하신 자들을 부르신다. 그의 사랑의 의지가 그들에게 향한다. 셋째, 하나님의 아가페를 우리의 마음에 널리 흐르게 하시며, 그리하여 그 사랑을 결정적으로 경험하게 되고 우리의 삶 속에서 현실된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활동을 하나님의 활동과 구분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었던 죄를 용서하시는 일을 하신 것과 같이,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과 동일한 것으로 여긴다(롬 8:37; 살후 2:16).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행위 속에서 계시되고 실행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아가페)을 확증하셨"다(롬 5:8).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건이 된다. 바울은 이런 변화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준동사형(verbal forms)으로 말하고, 항상 부정과거형으로 말한다(롬 8:37; 살후 2:16; 갈 2:20; 엡 2:4; 엡 5:2). 하나님의 사랑은 선택을 의미한다. 바울은 사랑함과 미워함, 택함과 거절함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대해 언급하는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고(롬 9:13; 롬 9:25), 형식상의 병행절에서 아가페토이(사랑하심을 입은 자들)와 클레토이(부르심을 받는 자들)(롬 1:7) 또는 에클렉토이(택하신 자들)와 에가페메노이(사랑하신 자들)까지도 사용한다(롬 1:7; 골 1:12). 선택적인 사랑의 개념에 미리 예정하심(pre-temporal ordination)과 그리스도 사건의 표적(sign)에서 현재적(temporal) 부르심에 대한 두 가지 근본적인 사상이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13; 엡 1:4이하[아가페]). 하나님께서 그의 크레스토테스(crhstovth", 5544: 선하심)와 아포토미아(ajpotomiva, 663: 엄위)에서 이제 죄인들의 무리로부터 구별된 선택받은 공동체는 하나님과의 영속적인 친교에서 사랑과 평화를 누린다. 그 가운데에서 하나님은 살아있는 능력으로 일하고 계신다(롬 8:35; 고후 13:11이하). 사랑은 우리를 포로로 사로잡는다(고후 5:14).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다"(롬 5:5). 이 새롭고 살아있는 능력의 실체는 이들 바울의 말보다 더 설득력있게 표현될 수 없다. 바울 서신의 하나님의 아가페(ajgavph, 26)의 개념의 의미는 명백하다. 그것은 인간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와 이 세상의 구원을 지향하는 것(orientation)이다. 사랑의 행위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목적하시는 것이다. 아브라함 시대부터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백성을 미리 아셨다. 그는 아들을 보내시고 최종적으로 성령을 보내심으로 이 백성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이 성령은 갈라디아서의 위대한 마지막 부분(갈 5:2-갈 6:10)에 사랑의 성령으로 묘사된다(갈 5:22). 서신은 이렇게 역사의 행로를 남긴다. (b)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의 목적은 새로운 인간이다. 그러나 이 목적은 인간과 인간의 사랑의 행위 없이는 성취되지 않는다. 모든 하나님의 행위는 창조이든지 구원이든지 간에 인간의 행위의 가능성과 필연성 둘 다를 전제로 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의지를 배제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긴급한 부르심은 자유에로 부르심이다. 이 기본적인 법, 곧 예수님이 사건에서 가장 분명히 볼 수 있고, 바울에 의하면 모든 곳에서 하나님 행위와 인간의 행위 사이의 관계를 결정하는 이 기본적인 법은(참조: 빌 2:12이하), 하나님 사랑과 인간의 사랑 사이의 관계에 관하여 사도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첫 번째로 말씀하신다. 그가 관계를 세우신다. 이것은 롬 8장에 단호하게 주장되어 있다. 결단, 선택과 부르심은 확고하다. 그로부터 아가페라 불리는 모든 것이 생겨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사랑은 부름 받는 자에 쏟아 부어진 하늘로부터의 사랑에 대한 응답일 뿐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근본적인 사랑의 행위, 그 자체와 같이 결단의 행위이다.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백성과 맺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물리치는 언약이 성취된다(롬 8:28; 참조: 롬 8:37). 바울은 고전 8:3에 똑같은 근본적인 관계를 재치있게 공식화시킨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바 되었느니라". 우리는 오직 그의 앞에서의 우리의 수동성의 크기만큼 하나님을 향하여 능동적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첫째로 어떤 참된 의미에서 우리를 의지가 있고 행동하는 인간이되게 하는 생명을 창조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을 사람에게 불러 일으키신다. 그러나 피스티스는 단지 작용을 시작하며, 진정한 실현은 디 아가페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갈 5:6).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하신 자들에게 프뉴마를 부으신다(롬 5:5; 살전 2:13). 다시 한번, 인간은 수동적이다. 그러나 프뉴마는 사랑 안에서 행하는 최상의 활동을 위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자유는 사랑 안에서 그 자체를 억제하고 완성시킨다. 프뉴마가 그것에 의해 자유롭게 되는 아가페에 선행한다는 것은 갈 5:22에 고전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또 "성령의 사랑"(롬 15:30)과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골 1:8) 같은 결합에서 그리고 고전 4:21에 보다 세련되게 표현되어 있다. 프뉴마와 자유의 관계에 대해서는 롬 8:2에, 자유의 한계와 목적으로서의 아가페에 대해서는 갈 5:13에 나타나 있다. 사랑을 위해 해방됨으로 율법이 성취되고 초월되고 극복되며, 어떤 후퇴와 방해도 허용하지 않는 새로운 질서가 시작된다. 사랑의 한 가지 중요한 목적은 부름받은 자가 그의 이웃에 대한 봉사로서 그의 삶을 사랑과 자유에 두는 것이다: "13 ...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갈 5:13-갈 5:14).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이하),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살전 3:12). 바울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명령에 집중하여 예수님과 같은 방법으로 그 명령을 확립한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관심은 형제 사랑에 집중되어 있다: (참조: 갈 6:10).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동포를 돕기 위해 준비되어 있음을 의미하던 이웃 사랑은 이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는 함께 시민된 자들을 위한 봉사를 의미한다. 그것은 형제간의 복지를 행위의 지배 원리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살전 4:9; 골 1:4; 몬 1:5; 엡 4:2; 엡 6:23; 골 3:19; 엡 5:25). 아가페토스와 아델포스는 서로 바꾸어 사용할 수 있는 용어가 된다(살전 2:8; 몬 1:16). 형제 사랑을 요구하는 우주적이고 역사적인 카이로스에 의해 형제 사랑이 결정적으로 한정된다(참조: 갈 6:10; 롬 13:11). 형제 사랑은 십자가와 텔로스 사이에서 이 결단의 시기에서 유일하게 적절하고 전진적인 태도이다. 그것은 십자가의 표적 아래 선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으심으로 인해 존재하게 된 공동체 안에서(빌 2:1이하; 골 3:14이하; 엡 5:2; 참조: 고전 8:11) 봉사와 희생, 용서와 이해(consideration), 도움과 동정, 그리고 쓰러진 자를 세우고 낙담한 자를 회복시키기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롬 12:9; 고전 13:4 이하; 참조: 갈 5:25 이하). 사도 자신의 최상의 가능한 목표는 교회의 선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아직 남은 고난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참조: 고후 6:3; 골 1:24 이하). 그러나 이것은 또한 바울에게 있어서 기본 원칙인 하나님과 인간의 행위 간의 근본적인 관계에 따라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행위에 대한 봉사로서 인간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행위가 결합한다. 사랑은 세우는 일을 한다(고전 8:1). 사랑은 장래의 일을 세운다. 아가페(ajgavph, 26)는 텔로스(tevlo", 5056)의 표적 아래에 있다. 이것은 고전 13장의 위대한 진리이다. 이런 이유로 사랑은("제일 좋은 길", 곧 다른 모든 것을 능가하는 하늘의 선물이며, 사랑은 믿음, 소망, 사랑이 이루는 삼각 구조의 중심에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둘 보다 위대하다. 믿음과 소망은 이 불완전한 세계(aeon)의 한계나 사건들을 견딘다. 사랑으로 인해 장래 세대의 능력은 이미 현재의 세계의 형태 속으로 침입한다. 예수님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에게 있어서도 아가페는 이 죽음의 세계(aeon) 가운데서 미래가 가지는 유일한 생명의 힘이다. 3. 야고보서의 용법. (a) 약 1:12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b) 약 2:5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얻는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의 나라로 부르실만큼 선하다고 여기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자는 나의 형제들이며 그들이 비록 누추한 옷을 입고 온다할지라도 뒷자리에 앉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c) 약 2:8에서 사랑, 곧 이웃 사랑은 새 왕국의 최고의 '법'이다: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그러므로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범법자가 된다(참조: 약 2:9). 4. 베드로의 용법. (a) 벧전 1:8에서 성도는 예수님을 보지 못했으나 사랑한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b) 벧전 1:22에서 진리로 영혼을 깨끗하게 하면 참으로 형제를 사랑할 수 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베드로는 벧전 2:17에서 "형제를 사랑하라"고 권고한다. (c) 벧전 3:10에서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악을 떠나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d) 벧후 2:15에서 발람은 불의 삯을 사랑하다가 망했다: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5. 요한의 용법. 바울에게 있어서 아가페는 미래의 원리(principle)이며, 요한에게 있어서 사랑은 현재의 우주적 위기에서 세워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세계의 원리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일 3:16; 요일 4:9 이하). 이 기본적인 사상에서 요한과 바울(롬 8:32)은 일치한다. 그러나 요한이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 대한 사랑에 대해 항상 이야기하는 방식에는 다른 점이 있다(요 3:35; 요 10:17). 모든 사랑은 예수님께 집중된다. 그는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의 중재자이시다. 대조적으로 요한은 아버지에 대한 아들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거의 말한 적이 없다(요 14:31). 그는 아버지께서 그에게 그의 "친구들"로 주신 자들에 대한 아들의 사랑을 더욱 강하게 강조한다. 아들을 통해 아버지의 사랑이 인간의 세상에 이른다(요 17:23 이하; 요 14:21 이하; 요일 4:19; 요 11:5; 요 13:23). 이 사랑은 그의 죽음에 의해 성취되고 공표되었다. 아들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그의 목적을 이루신다(요 13:1; 요 15:13). 요한복음의 아가페는 매우 명백히 겸손한 사랑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한 단계 한 단계 이 세상으로 내려오는 천국의 실체이다. 그렇지만 이 천국의 실체는 계시와 도덕적 행위에 의한 승리를 성취한다. 따라서 요한은 바울이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명백하게 설명한 것을 이해하고 있다. 빛과 생명의 세계는 이 세상에서 사랑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요한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모두의 삶에서 아가페의 적극적인 특성을 강조할 수 있고 또 강조해야만 한다. 요한이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요 5:42; 요 8:42; 요 14:28)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고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는 형제에 대한 사랑에 의해 가리워 지도록 한 것은(요 13:34 이하; 요 14:15 이하; 요 21:15 이하; 요일 4:20) 극히 일부분이다. 형제 사랑, 아버지와 아들과 아들의 백성의 서클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공동체를 구성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공동체의 삶을 위한 궁극적인 실체이며 그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은 그 생활의 법이다(요 15:9 이하; 요일 2:10; 요일 3:10; 요일 4:11 이하). 요일 3:14에는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않는 자는 사상에 거하느니라"고 한다. 요일 3:14; 요일 2:15 이하; 요 3:19에도 그렇다. 아가판은 어떤 목적어에 의해 한정되지 않은 채로 있으며, 단지 이 절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다. 눅 7:47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는 단독으로 사용된 아가폰의 독립적인 배치는 요한일서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요일 3:18; 요일 4:7 이하; 요일 4:19). 이 사랑은 생생한 활동이며, 존재의 방식이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현실화이다. 사랑의 법이 모든 세부적인 요구들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고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고상한 일관성으로 독자들 앞에 제시된다는 사실이 이것과 조화된다. 단지 때때로 사랑에 대한 요구는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와 같은 표현에 의해 정확하게 정의된다(요일 3:18; 요이 1:1). 요한의 서신에서는 보다 일반적으로 훈계가, 여기에서 선택의 사상과는 전혀 관계가 없지만 형제의 관계에 대해서는 매우 단순하게 적용되는 아가페테와 아가페토이라는 절박한 부르심에 의해 중단된다(요삼 1:5; 요일 4:7). 요한계시록에서 형제 사랑에 대한 요구(계 2:19)는 이 분열과 고통에서, 심지어 죽음에 이르기까지라도 하나님께 굳게 매달리라는 열정적인 부르심에 의해 완전히 가리워 진다. 여기에서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이해는 전적으로 그 시대의 필요에 의해서 새로운 생명에 닥친 수난에 대한 신학 사상에 의해 결정된다. 요한계시록의 시작 부분에 충성된 증인 "우리를 사랑하신 자"(토 아가폰티 헤마스)에 드리는 찬양이 나오고(계 1:5) 사랑하는 도시의 마지막 때의 상황의 변화(계 3:9; 계 20:9)와 하나님의 적들에 대한 위협과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는 책망(계 2:4)과 함께 죽기까지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계 12:1) 피스티스(믿음)와 아가페(사랑)를 지킨 자들의 영광이 뒤따른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지는 때가 왔다(마 24:12). 6. 사도 시대 이후의 용법. 초기의 신조는 몇가지 새로운 이상의 고취와 아울러 이 시대에 전수된다. 클레멘트일서 49-50은 지고의 사랑, 그리고 이 사랑이 공동체와 세상에 대해 가지는 실질적인 의의에 대해 계속적인 인식을 예증해준다. 아가페와 아가폰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기초적인 용어가 되었다. 에가페메노스(**)와 아가페토스(**)는 예수님에 대해 즐겨 사용되는 용어인데 때때로 휘오스(**)나 파이스(**)와 연결되어서 사용되기도 하고 때때로 독립적인 명칭, 사랑하는 아들(Only-Beloved)로 사용되기도 한다(벧후 1:17; Herms, 5, 2, 6; M. Pol., 14, 1; Dg., 8, 11; Barn., 3, 6 등).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하나님께 사랑받고 선택받은 자들이며, 그의 선하신 기쁨이 그들에게 머무는 자들이다. 다시 말해 아가페와 아가판은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의 경건을 요약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세상에 대한 경멸과 미움을 요구한다. 이러한 긴장 상태는 여기 유대교에서 경건과 하나님의 사랑의 최후의 표현으로 고귀하게 평가되는 순교를 초래할 수도 있다. 또 다른 형태로 하나님과 이 세상의 현상간의 긴장, 하늘의 사랑과 세상적 사랑 간의 긴장은 금욕주의로 이끌 수도 있다. 아가판은 훈련받은 또 때때로 절제하는 삶을 나타내는 용어, 또는 실제로 금욕의 훈련을 나타내는 용어가 된다. 순결한 아가페는 에로틱한 사랑보다 강하다. 그러나 아가페와 그 파생어들의 가장 일반적인 사용은 형제 사랑을 의미한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 관한, 율법의 의미와 성취에 관한, 그리고 원수의 사랑에 관한 옛 말들은 크게 존중되고 적용된다. 사랑에 대한 모든 경우에 형제들은 중요하다.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지치지 않고 봉사로 융화로 선으로 악을 이김으로 형제애적 친교의 의지를 강화시키기 위해 힘써야 한다(벧전 4:7 이하; ICI, 49이하; Barn, 1, 6). 아가페토스는 유행하는 인사말의 형식이다. 아가페는 식탁에서의 친교가 발전된 형제들의 애찬에 대한 전문적인 용어가 되었고 사회적인 의미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참조: E. Stauffer; Walter Bauer; J. H. Thayer). ----------
1. 그 후에(다윗의 범죄-회개 후) 이 일이 있으니라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아름다운(=야페..칼로스) 누이가 있으니 이름은 다말이라(매력 넘치는 절세미녀 다말,,친오빠인 미남 압살롬은 특히 멋진 모발이 자랑거리) 다윗의 다른 아들 암논(::장남인데..차별적 편애..암시)이 그를 사랑하나([아헤브]를 쓰고있음) ......다윗의 범죄-회개 후에 일어난 일이다!!...그러므로!!, 부부가 먼저 회개하고 하나되어 주님 임재로 사는자들 되었다면, 이제는 바로 그렇게 가정의 참 회복 위해 더 주님의 다스리심 영역을 확장시켜야만 하는 책임을 가졌기에!!, 이제 깨어 있는 마음으로 먼저 가족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찾아가 살펴 돌아보며 주께로 돌이키게 하는 제사장 역할을 해야 한다!!.. 동일한 죄악의 되풀이를 막아야 한다!! = 미리 막을 수는 없다 해도!! 다윗의 죄에 대한 징계 집행시마다 [주님 보시기에!!, 흐믓한] 진정한 참 회복에로 변환이 가능함을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세상적 분석은 이렇다 ..관능/성 중독...중독은 친밀한 관계 시도와 동일한 에너지...한편, 관음 중독도 동일...부친부재-.모친애착/보호방어 경향은 여성 편향 친밀감-중독으로 연결/부인과의 서먹케됨의 관계로 변질 가능함..이렇게 설명하려 한다..범죄인 주변에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동일 성향의 사람이 있다...그런데, 이는 다람쥐 쳇바퀴돌기적 설명이다]...((그러나, 이 설명 전개는 부활하신 주 JC의 성령과 합한 거듭난 믿는이에게 있어서는 결코 진리가 아님에 주의하라....다만 주님만 아신다...오직 드러난 진실을!!..정직하게 직면하고 JC이름으로!! 사탄-마귀의 궤계와 구주예수의 십자가 대속으로 주어진 참자유와 거듭남, JC이름의 권세를 주장하고, 거짓 패러다임(가스라이팅)을 대적하여 끊어내어 뒤로 던져버리고 주님이 친히 그대 마음의 주인으로 사시도록 해 드려야 한다) ......[아헤브]를 쓰고있음....그러나, 상호 존귀히 여기며 존중함의 사랑 아닌 오직 일방적 단회적 음욕/육욕 처리감 취급 :: 연애(야수성-일시적)<=>연연( ::지속성).......[창34:3..그 마음이 깊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연연하며 그 소녀를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말로 위로하고] ......@야페 = 깨끗한-아름다움-아리따운...(헬)칼로스 :: 아름다움, 좋은...(야파)곱고-맑고-깨끗하고-아리땁다 ::: 사라(심히 아리따움)-라헬(곱고 아리따움)-아비가일(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운)-다말(아름다운)-아비삭(심히 아리따운)-그리스도의 교회(아름다운) 요셉-압살롬-다윗 ......야페는 미학적으로, '외모의 아름다움'을 가리킨다. .... 사라에 대해 언급하는 창 12:14이 그렇다: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의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라헬의 경우에(창 29:17),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문자적으로 '모습이 아름답고 보기에 아름다웠다'. ...아 7:6, 삼하 13:1(다말에 대해), 왕상 1:3, 왕상 1:4(수넴여자 아비삭에 대해)에서도 ...암 8:13에서 아름다운 처녀에 대해 그 외의 ,젊은 남자들을 . ...창 39:6이 그러하다: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야페는 압살롬(삼하 14:25), 다윗(삼상 17:42), 사랑하는 자(아 1:16)의 아름다움을 묘사. 겔 31:3에서는 앗수르 사람의 아름다움을 묘사한다: "볼찌어다 앗수르 사람은 가지가 아름답고 그늘은 삼림의 그늘 같으며 키가 높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 레바논 백향목이었느니라". .......@@아헤브 ...사랑하다, 연연하다, 연모/애모/사모하다, 연애하다, 2. 그는 처녀이므로 어찌할 수 없는 줄을 알고 암논이 그의 누이 다말 때문에(왕의 자녀들은 모든 움직임은 왕에게 허락받아야 했다) 울화로 말미암아 병이[=울화/상사병이] 되니라 ---기억하고 명심하라...욕정/음욕/정욕-음란/색정/우상숭배에 휘둘림은 어리석음의 정수, 진정한 지혜의 참 사랑은 욕정(음욕/정욕)에 결코 휘둘리지 않는 법 ......일상에 지장 줄 정도로 울화-상사병 생긴 사랑, 일방적 짝사랑이란, 세상이 표현하고 있는것처럼 낭만적이거나 로맨틱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병든 사랑, 비정상적 사랑 그자체"를 의미하는바,파괴적 독성 가진 질병이다, 많은 경우에서 (간교한 마귀의 궤계가 틈 타고 들어오게 된다!!) 그 대상에게 [스토킹-일방 폭행-심지어 강간-살해에 이르기까지] 피해를 끼치기에 아예 과감히!! 정리해야 하는 것이다.. 3. 암논에게 요나답(여호와가 촉구/권고하다...한번도 암논의 [진정한]친구였던 적 없었다!!,,오직 권력 근처에서 자기 입지만 노리며 행하는 정보통이었다)이라 하는 친구가 있으니 그는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이요 심히 간교한[하캄..간교-교활한/(지혜-총명-현명-슬기)] 자라 ---[요15:13..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일3:16..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잠17:17..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 ---다윗-요나단과의 관계와 암논-요나답 관계는 정반대의 간악함-멸절로 이끄는 ((욕망 실현 부추기는, 꾀를 내어 제시하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꼬리 빼는)) 악한 관계였다!! 4. 그가 암논에게 이르되 왕자여 당신은 어찌하여 나날이 이렇게 파리하여 가느냐 내게 말해 주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암논이 말하되 내가 아우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사랑함이니라 하니라 --- 유유상종?!, 오로지 먼저 주께 전말-심정마다 아뢰라!!.. 속내 털어놓고 말할 대상인지 신중하게 살펴 분별해야 한다..((악한 친구, 등 치는 자가 많다)) 5. 요나답이 그에게 이르되 침상에 누워 병든 체하다가 네 아버지가 너를 보러 오거든 너는 그에게 말하기를 원하건대 내 누이 다말이 와서 내게 떡을 먹이되 내가 보는 데에서 떡을 차려 그의 손으로 먹여 주게 하옵소서 하라 하니 6. 암논이 곧 누워 병든 체하다가 왕이 와서 그를 볼 때에 암논이 왕께 아뢰되 원하건대 내 누이 다말이 와서 내가 보는 데에서 과자 두어 개를 만들어 그의 손으로 내게 먹여 주게 하옵소서 하니 ----다윗은 암논의 상태와 거기 이르게 된 그 자초지종, 연유와 근원에 대해 하나도 묻지 않고 있고, 암논이 요구하는대로 전혀 이상하게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냥 들어주고 있다...(이건!! 사랑이 아니었다..바쁜 아비는 나쁜 아비!!, 그대로였다!!) 7. ○다윗이 사람을 그의 집으로 보내 다말에게 이르되 이제 네 오라버니 암논의 집으로 가서 그를 위하여 음식을 차리라 한지라 8. 다말이 그 오라버니 암논의 집에 이르매 그가 누웠더라 다말이 밀가루를 가지고 반죽하여 그가 보는 데서 과자를 만들고 그 과자를 굽고 9. 그 냄비를 가져다가 그 앞에 쏟아 놓아도 암논이 먹기를 거절하고 암논이 이르되 모든 사람을 내게서 나가게 하라 하니 다 그를 떠나 나가니라 10. 암논이 다말에게 이르되 음식물을 가지고 침실로 들어오라 내가 네 손에서 먹으리라 하니 다말이 자기가 만든 과자를 가지고 침실에 들어가 그의 오라버니 암논에게 이르러 11. 그에게 먹이려고 가까이 가지고 갈 때에 암논이 그를 붙잡고 그에게 이르되 나의 누이야 와서 나와 동침하자 하는지라 12. 그가 그에게 대답하되 아니라 내 오라버니여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마땅히 행하지 못할 것이니 이 어리석은 일을 행하지 말라 13. 내가 이 수치를 지니고 어디로 가겠느냐 너도 이스라엘에서 어리석은 자 중의 하나가 되리라 이제 청하건대 왕께 말하라 그가 나를 네게 주기를 거절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되 14. 암논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고 다말보다 힘이 세므로 억지로 그와 동침하니라(= 강간 발생 :: 함정--틈/자리를 내어주지말라..진정 서로 사랑한다면 끝까지 [밀당의 인내로]상호 순결 지켜주라-첫날밤이 축복의 시간 되게 하라) 15. ○그리하고 암논이 그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전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한지라 암논이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 하니 16. 다말이 그에게 이르되 옳지 아니하다 나를 쫓아보내는 이 큰 악은 아까 내게 행한 그 악보다 더하다 하되 암논이 그를 듣지 아니하고 17. 그가 부리는 종을 불러 이르되 이 계집을 내게서 이제 내보내고 곧 문빗장을 지르라 하니 ..***죄 많은 자마다 화를 쉽게 잘내는 법(무의식 기제!!)....암논 스스로 [남 탓 하며 책임전가 하여 뒤집어 씌우는...보디발의 아내처럼 행동하고 있다] 비열-저질-저급한 망나니. 짐승만도 못한 자 입증.., :: ((평생 책임지고 돌봐야 함 :: 신명기 율법 -- 정면 거역..[신22:28, 29....*28.만일 남자가 약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만나 그를 붙들고 동침하는 중에 그 두 사람이 발견되면 *29.그 동침한 남자는 그 처녀의 아버지에게 은 오십 세겔을 주고 그 처녀를 아내로 삼을 것이라 그가 그 처녀를 욕보였은즉 평생에 그를 버리지 못하리라] 18. 암논의 하인이 그를 끌어내고 곧 문빗장을 지르니라 다말이 채색옷을 입었으니 출가하지 아니한 공주는 이런 옷으로 단장하는 법이라 19. 다말이 재를 자기의 머리에 덮어쓰고 그의 채색옷을 찢고 손을 머리 위에 얹고 가서 크게 울부짖으니라 (인과응보?!) .......사무엘하 13:1-19, 본문에 대한 오늘날 교회들의 해석은 대부분!! “10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11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12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삼하 12:10-12)라는 이 말씀과 연결하여 이해하려고 한다. 즉 다윗이 범죄한 일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건에 한정지어서만 해석하고 그냥 끝내버림은 이 성경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될 수 없다. "인과응보-나비효과"라는 세상적 시각과 사고방식을 따라 분석-적용함에 지나지 않음이기때문이요, 그 무엇보다도 [구약시대에서도 그리하셨고, 지금 성육신하여 오셔서 모든 죄 대속하시는 죽음 거쳐 부활 승천하시고 보좌에 앉으셨으며, 오순절날 하늘로부터 그분의 영을 부어주심으로써 열려진 은혜의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신약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기에 더욱 깨어 있어 분별해야 하는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내주하시는 그리스도, 곧 은혜-진리-사랑-기쁨-평강의 [부활생명의] 성령의 이끄심-인도하심 따라 행하며 열린 하늘로부터 끊임없이 거듭난 믿는이-그리스도의 참제자-증인으로 살아가도록 영원히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 예수, 회개하는 자에게 당신을 온전히 열어 부어주시며 아낌없이 공급하여 주시는 분,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그분의 선하심-인자하심-진실하심의 역동성에 대한 무지의 소치일 뿐이다 (좋은 일이 있는 것과 좋지 않은 일이 있는 것의 모든 원인이 내가 어떤 신앙생활을 하느냐에 달려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다보면...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는 인간 편에 원인이 전혀 없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근거하기 때문이다....하나님은 인간에게 명령하시고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할 때에 진노하시고 심판하시고 형벌을 내리시는 것이 아니다. 불순종과 화의 관계, 명령과 형벌의 관계가 오해되고 있기에 하나님이 오해받고 기독교가 왜곡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화가 임하는 것은 맞지만 그 원인이 우리의 행동에 달린 문제는 아니다. 복이 되고 화가 되는 것은 우리의 행동에 근거된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옳으신 분 하나님, 말씀하시는 하나님, 하나님 말씀에 당연하게 연결되어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옳은 것이고 진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 자체가 이미 복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하나님이 기분 나빠서 재앙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에 옳지 않은 원리를 따르는 행동에 당연히 화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무엘하 12장의 말씀을 근거로 다윗이 범죄한 것에 대한 보응을 받는다는 식으로 본문을 너무 좁게 해석하려 해서는 안 된다. 주님의 말씀을 풀어놓아드림이 어떨까?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성경이 왜 이런 내용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을까? 단순히, 암논처럼 살지 말라고 교훈하기 위해서일까? 우선 단순하게 본문에 대해서 말하자면 13장 이하에 기록된 일련의 사건들은 다윗이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가지 않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들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즉 죄를 좇고 죄 아래 있는 현상들이 어떤가를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윗 왕에게는 여러 아내를 통해 낳은 자식들이 많이 있었다. 그 중에 암논은 자기 이복 누이동생 다말을 짝사랑하게 되었다. 그 정도가 심해지자 암논의 친구이며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인 요나답이 다말을 쉽게 강간하도록 방법을 제시했다. 암논은 [간교하고도 악한!!] 친구의 도움을 받아 다말을 강간할 계획을 세웠고 그것은 그대로 실행하였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암논은 다말을 겁탈한 후에 그 자리에서부터 증오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 일을 통해 드러난 것은 암논은 다말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 욕정에 사로잡혀 그것은 해결하고자 하는 욕심만 가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암논은 처음부터 다말을 사모한 것이 아니었고 다말을 아내로 받아들일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암논의 행동은 우발적 행동이 아니라 평상시에 죄를 의도하고 있었고 죄를 지을 기회만 엿보고 있었고 기어코 죄를 범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암논의 죄를 지적하는 것은 다말이 한 말 속에서 암시되고 있는데 “내 오라버니여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마땅히 행하지 못할 것이니 이 어리석은 일을 행하지 말라 내가 이 수치를 지니고 어디로 가겠느냐 너도 이스라엘에서 어리석은 자 중의 하나가 되리라”(12-13절)라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 중에서 어리석은 자가 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어리석다는 말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는 자라는 의미이다(시 14:1, 53:1). 이스라엘이란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나라로 하나님과 관계된 나라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는 자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결국 암논의 행위는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것이었다. 암논의 행동은 단순히 간음죄, 강간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 측면에서 볼 때 여호와 하나님을 멸시한 죄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단순히 다윗의 간음죄, 암논의 강간죄를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그 모습이 바로 이스라엘 중에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언약의 왕이라는 다윗뿐만 아니라 다윗 가문의 자식들에게까지 말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면 왕을 세우게 될 때에 이스라엘의 왕이 될 자는 말을 많이 두어서는 안 되고 또한 아내를 많이 두지 말고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라고 하셨다.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고 하신 것은 이스라엘은 언약의 나라이기 때문에 나라의 안정과 왕권의 강화가 인위적인 방법에 의해 유지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라를 세우시고 하나님께서 왕을 선택하시며 하나님께서 나라를 유지하신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뜻이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시고 왕으로 세우신 것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나라로 세우신 것은 당시 애굽이나 블레셋 등 이미 여러 나라들이 있는데 또 다른 하나의 나라를 세우신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었기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의 언약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고 중재하는 나라로 세우신 것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이다(출 19:6).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에 세워진 왕은 세상의 원리와 법칙을 따르는 자가 아니라 철저히 언약의 말씀을 따르고 그 언약을 보여 주는 왕이어야 된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 스스로 그러한 삶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다윗의 가정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현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다윗 왕의 가정이 그러한데 이스라엘 나라 전체가 과연 언약의 나라다운 모습을 나타낼 수 있겠는가? 그러니 이스라엘에게 제대로 된 언약의 나라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다윗의 가문이 자식들의 일로 인하여 위기에 처하고 있다는 것은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윗이 무시하고 있었기에 생긴 당연한 결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결코 다윗의 가정, 다윗의 가문을 [죄악된 그 상태로]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다. 다윗의 집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분명히 언약을 하셨기 때문이다(삼하 7:4-17). 그러므로 사무엘하 7장 이후의 모든 말씀들은(물론 그 이전에도 마찬가지이지만) 다윗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모든 자들이(비록 다윗의 아들들일지라도) 하나님을 멸시하고 말씀을 거부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어떻게 이루어가고 계시는가에 대한 기록이다. 비록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는 모습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분명히 그리고 반드시 이루어가고 계셨다. 오히려 다윗이 언약대로 제대로 살지 못했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주권적으로 임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로 이 땅에 다윗의 후손으로 영원한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이스라엘이 선하게 살았고 말씀대로 행한 덕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신 언약 덕분이고 그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신 덕분이다. [하늘에 속한, 영에 속한 존재로되] 우리는 [무심코!!] 세상에서 자기 욕망-충동을 따라 어리석은 자로 살고 싶어 하고 또한 그렇게 사는 것이 즐겁다고 생각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제시하는 것은 십자가의 길이다. 십자가의 길만이 하나님이 원하신 언약을 이루신 구원의 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길을 단순히 제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보내신 성령께서 우리를 강력하게 십자가의 길로 이끌어가고 계신다. 그것이 느껴지는가? 단순히 느낌만 아니라 그것이 말씀 안에서 확인되는가? 그렇다면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 우리에게 어렵고 힘든 고난의 연속일지라도 즐거움으로 받아들이기로 하자! [17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7-18)] 20. ○그의 오라버니 압살롬이 그에게 이르되 네 오라버니 암논이 너와 함께 있었느냐 그러나 그는 네 오라버니이니 누이야 지금은 잠잠히 있고(분을 당연히 내야 함..다음날까지 지속말라..용서하라) 이것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라 하니라 이에 다말이 그의 오라버니 압살롬의 집에 있어 처량하게 지내니라 ......[엡4:25...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성폭행 당한) 수치 공개 open 표현 솔직+회개 표시 ::: [가난하고 애통한 마음 얻음 통해, 주께 맡겨드리며 주로 사는] 진정한 이해 통한 (영생길로 접어든, 영생JC맛봄) 사랑 21. 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 ......[레20:17...누구든지 그의 자매 곧 그의 아버지의 딸이나 그의 어머니의 딸을 데려다가 그 여자의 하체를 보고 여자는 그 남자의 하체를 보면 부끄러운 일이라 그들의 민족 앞에서 그들이 끊어질지니 그가 자기의 자매의 하체를 범하였은즉 그가 그의 죄를 담당하리라] ::::: (다윗은)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낳은 첫 아이를 치셨을 그 때 그 회개의 자리로, 그 태도로 금식하며 다시 돌아와서!! 주님의 긍휼을 구했어야 했다!! -- 그리고 압살롬과 다말에게 사과하고 용서 구하며 위로하고!!, 암논에게도 그동안 부실했음을 고백하고서 죄는 사하되, 눈물 머금고 합당한 징계에 착수했어야 했었다!! ((최소!! 왕위 계승권 박탈 및 체포 평생 별궁 구금까지라도!!)) .......(분노호르몬은 15초면 하강시작-->15분 정도 폭발적 반응 지속..그 다음 진정됨!!) ......분노할 수 있지만,[자기도 전에 그런 잘못 범했었기에] 잠자코 내버려두는 사랑??(= 직무유기 상태 :: 공과 사 구분해서 처리해야 함!! 방치하지 말라, 진정으로 사과-용서 구하고 화해하라 = 말하고!! 주께 여쭘으로써, 엄격하고도 공정하게 처리해야 했었음) ...**성도가 죄 범하면 세상 꾸짖기 힘들어짐!!** 22. 압살롬은 암논이 그의 누이 다말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그를 미워하여 암논에 대하여 잘잘못을 압살롬이 말하지 아니하니라 .....(사랑하기에?) 대신 복수해 주려는, 빗나간 사랑(때만 기다리면서 이를 갈고 있음). : + 잠자코 있는 아비 다윗을 향한 말없는 항의의 분노는 ==>장차 반역 모의로 나타남.. ===>믿는이마다 모두 예외없이 1만달란트 탕감 받은자임을 믿고-깨닫고-자각하고!!(주께 여쭈라--->공과 사를 구분하고 잘 분별해서 용서하기를 시작하라!!) 100 데나리온 빚진 자를 [참 마음으로!!] 주님 앞에 데려다가 주님 마음따라 먼저 용서 베풀기 시작하고 잊어버리라..서로 마주칠 기회를 결코 허용하지 말라..그리할 때, 진정한 주님의 진리 통한 자유의 영적 흐름 인해 춤추게 될 것!! ..((비운의 여인, 다말...김윤희)).. 여성들에게 가장 심각하고 정신적인 상처가 되는 사건이 있다면 그것은 시대에 관계없이 ‘강간’이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한 여성의 육체를 망가뜨리는 것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정신과 영혼까지도 파괴하는 무서운 범죄로 규정짓기도 했다. 그렇다! 강간이란 이렇듯 한 여성의 꿈과 미래를 모조리 파괴해 버리는, 그 어떤 범죄보다도 잔인하고 치사한 유형의 범죄인 것이다. 경건하고 점잖은 기독교인들이라면 이런 단어조차도 입에 담기를 거부하겠지만, 성경에는 이런 사건들을 서슴없이 기록하고 있다. 그것도 여기에서는 우리가 존경하는 인물의 가정 안에서 일어난 치부를 자세히 드러내고 있다. 간음, 강간, 근친상간, 살인이라는 끔찍한 일련의 사건들이 한 가정 안에서 모조리 일어났는데, 그 속에서 비운의 운명을 당한 사람이 다름아닌 다말이라는 여인이다. ---다말은 누구인가?(삼하 13:1∼22) 구약성경에 다말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세 명이 나오는데, 그 중에 하나는 창세기 38장에 나오는 유다의 며느리요, 두 번째는 압살롬의 딸로 그 이름이 다말이다(삼하 14:27). 마지막으로 본문에 나오는 다말로서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아름다운 누이가 있으니 이름은 다말이라.”(삼하 13:1)고 되어 있다.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은 저자가 다말을 소개함에 있어 단순히 ‘다윗의 딸’이라고 해도 되는 것을 ‘압살롬의 누이’라고 한 점이다. 사실 본문은 압살롬 스토리의 일부(삼하 13∼19장)로 등장하며, 실제적으로 압살롬 스토리의 서론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본문은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삼하 13:1)고 시작함으로 앞의 어떤 사건을 전제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다윗과 밧세바’의 사건으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신 재화(災禍, 삼하 12:11∼12)가 어떤 식으로 전개되어 이루어지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실제로 후에 압살롬은 다윗의 왕권에 도전하여 반란을 일으킬 뿐 아니라 다윗의 후궁들과 온 이스라엘 무리의 앞에서 동침함으로 본문 말씀의 성취를 보여 주고 있다(삼하 16:20∼22). 그리고 다말의 사건은 다윗의 범죄로 인하여 그 가문에 일어난 ‘재화’의 시작을 알리는 제 2탄의 사건의 역할을 하고 있다(제 1탄은 밧세바가 낳은 아들을 하나님께서 데려 가심으로 이미 시작되었다, 삼하 12:13∼15, 18). 다말 사건에 등장하는 또 다른 인물은 암논으로, 그는 “다윗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다. 사무엘하 3장 2절에 따르면 그는 다윗의 맏아들로 아히노암의 아들이다. 압살롬과 다말은 마아가의 아들과 딸로서(삼하 3:3) 암논과는 이복형제 지간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암논이 다윗의 맏아들이라는 사실은 그 다음의 왕위계승자로서의 강력한 후보임을 시사하고 있어 다윗의 셋째 아들인 압살롬과의 관계가 더욱 주목되는 바이다. 사건의 발단은 암논이 다말을 연애하나 “저는 처녀이므로 어찌할 수 없는 줄을 알고 암논이 그 누이 다말을 인하여 심화로 병이 되니라.”(삼하 13:2)는 것에서 시작된다. ‘연애한다’는 단어는 ‘사랑한다’라는 단어로써 야곱이 라헬을 ‘사랑한다’(창 29:18)는 표현에서도 사용된 일반적인 단어이며 부정적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다. 다말이 처녀라는 사실은 본문을 통틀어서 두 번 나오는데, 한 번은 여기에서 나오고, 또 한 번은 18절에 ‘출가하지 아니한’이라는 단어가 원어로 보면 ‘처녀’라는 단어이다. 암논의 태도가 다말이 처녀였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 180도 달라진 것을 보여 주면서, 그녀의 처녀라는 사실이 암논에게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어찌 할 수 없는”이라는 단어는 뜻이 애매하게 사용되고 있다. ‘무엇을 어찌한다는 말인가’라는 의문을 남긴 채 진행되다가 나중에 가서야 암논의 진정한 의도가 파악되도록 유도하고 있다(삼하 13:14). 이것을 통하여 암논의 사랑의 종류와 질이 어떤 것이었는지도 잘 보여준다. ‘누이’라는 단어는 본문 속에서 여덟 번이 사용되고 ‘오라비’라는 단어는 아홉 번이 사용되는데, 이것은 이들 모두가 가족관계 속에서 일어난 일이며, 그렇기 때문에 기본 도덕적인 인륜을 넘어선 사건이며, 그렇기에 다윗 집안의 ‘재화’라는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고민하는 암논에게 도움을 줄 친구가 나타났는데 요나답이라는 자이다. 그는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