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5장...[430.주와같이길가는것....431.주안에기쁨있네] ===아담의 계보 1.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6.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 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9.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10. 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 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2.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13. 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 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15.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16. 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 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8.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19. 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 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5.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26.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7.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 28.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30. 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31. 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더라 32.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 ------------ Descendants of Adam.5. 1 This is the book (the written record, the history) of the generations of [the descendants of] Adam. When God created man, He made him in the likeness of God [not physical, but a spiritual personality and moral likeness]. 2 He created them male and female, and blessed them and named them [a]Mankind at the time they were created. 3 When Adam had lived a hundred and thirty years, he [b]became the father of a son in his own likeness, according to his image, and named him Seth. 4 After he became the father of Seth, Adam lived eight hundred years and had other sons and daughters. 5 So Adam lived nine hundred and thirty years in all, and he died. 6 When Seth was a hundred and five years old, he became the father of Enosh. 7 Seth lived eight hundred and seven years after the birth of Enosh, and he had other sons and daughters. 8 So Seth lived nine hundred and twelve years, and he died. 9 When Enosh was ninety years old, he became the father of Kenan. 10 Enosh lived eight hundred and fifteen years after the birth of Kenan and had other sons and daughters. 11 So Enosh lived nine hundred and five years, and he died. 12 When Kenan was seventy years old, he became the father of Mahalalel. 13 Kenan lived eight hundred and forty years after the birth of Mahalalel and had other sons and daughters. 14 So Kenan lived nine hundred and ten years, and he died. 15 When Mahalalel was sixty-five years old, he became the father of Jared. 16 Mahalalel lived eight hundred and thirty years after the birth of Jared and had other sons and daughters. 17 So Mahalalel lived eight hundred and ninety-five years, and he died. 18 When Jared was a hundred and sixty-two years old, he became the father of Enoch. 19 Jared lived eight hundred years after the birth of Enoch and had other sons and daughters. 20 So Jared lived nine hundred and sixty-two years, and he died. 21 When Enoch was sixty-five years old, he became the father of Methuselah. 22 Enoch walked [in habitual fellowship] with God three hundred years after the birth of Methuselah and had other sons and daughters. 23 So all the days of Enoch were three hundred and sixty-five years. 24 And [in reverent fear and obedience] Enoch walked with God; and he was not [found among men], because God took him [away to be home with Him]. 25 When Methuselah was a hundred and eighty-seven years old, he became the father of Lamech. 26 Methuselah lived seven hundred and eighty-two years after the birth of Lamech and had other sons and daughters. 27 So Methuselah lived nine hundred and sixty-nine years, and he died. 28 When Lamech was a hundred and eighty-two years old, he became the father of a son. 29 He named him Noah, saying, “This one shall bring us rest and comfort from our work and from the [dreadful] toil of our hands because of the ground which the Lord cursed.” 30 Lamech lived five hundred and ninety-five years after the birth of Noah and had other sons and daughters. 31 So all the days of Lamech were seven hundred and seventy-seven years, and he died. 32 After Noah was five hundred years old, he became the father of Shem, Ham, and Japheth. ===Footnotes Genesis 5:2 Lit Adam. Genesis 5:3 Lit begot, and so throughout chapter. ======== 아담(사람/티끌/먼지)-->셋(놓임..아벨 대신)-->에노스(사람, 인간)-->게난(창 제조자/소유자, 소유..<심판 의식>)-->마할랄렐(하나님께 찬양)-->야렛(하강, 가계/계보)-->에녹(선주자/선생/전수자, 개시/시작)-->므두셀라(<그가 죽는 날 홍수를>보내리라....투창의 사람)--->라멕(강한 자...<구원없는 인생무상 자각>)--->노아(누아흐,,안식하게 하다/안위하다/쉬다)--->야벳(넓은/열린, 광활/확장/개방...창10:21에 의하면 야벳이 육적 장자), 셈(유명한/인정받는...이름/명성...영적 장자), 함(덥다/검다, 정열적/육적..상대적으로 열대지방에 거주) ===== 창세기 5장 (개요) 본 장은 창조에서 대홍수에 이르기까지의 초기 세계에 관한 역사로서 현존하는 유일한 근거 있는 역사의 기록이다. 여기에는 (히브리어 원문에 있는 사실에 따르면) 족장의 나이에서 쉽사리 계산해 낼 수 있듯이, 노아를 낳기까지의 1,656년 간의 역사가 들어 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끝없는 족보”(딤전 1:4)라고 불렀던 그런 족보는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구약 율법 시대의 종말이었던 그리스도께서는 역시 구약성경 족보의 종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이 족보는 우리 구주의 계보에도 간단히 삽입되어 있으며(눅 3:36-38), 그리스도께서는 약속된 “여인의 씨”였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아담(1-5). 2. 셋(6-8). 3. 에노스(9-11).4. 게난(12-14). 5. 마할랄렐(15-17).6. 야렛(18-20). 7. 에녹(21-24).8. 므두셀라(25-27). 9. 라멕과 그 아들 노아(28-32).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이니, 그 모두가 동등하게 유익이 되지는 않는다 해도 역시 유익한 것이다. ====== 족보 (1)(창 5:1-5) 본 장의 첫 구절인 “아담 자손의 계보”가 장 전체의 제목이요 요지이다. 아담의 자손의 전체가 아니라 단지 그 땅의 “그루터기인 거룩한 씨”(사 6:13)와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신”(롬 9:5) 자들만의 명단이나 목록이다. 즉 약속의 보호 아래 있던 첫째 아담의 후손들이요, 둘째 아담의 조상이 되는 사람들의 이름과 나이와 죽음을 기록한 것이다. 이 족보는 아담에게서 직접 시작된다. Ⅰ. 아담의 창조(1, 2절). 여기에는 인간의 창조 이전의 형편이 전체적으로 되풀이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가 종종 들어서 잘 익히고 알아 두어야 할 일이다. 다음과 같은 것을 살펴보자. 1.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인간 자신의 창조주가 아니므로 그 자신의 주인이 아니다. 인간의 조물주께서 인간의 거동의 지휘자요 그 행동의 중심이 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그 날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영원에서 난 것이 아니라 어제(과거의 어느 한 날) 태어난 것이다. 그는 제일 처음 태어난 것도 아니다. 창조물 중에서도 나이 어린 존재다. 3.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따라 의롭고 거룩하게, 틀림없이 행복하게 지으셨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본성은 이 낮은 세상의 어떤 피조물보다도 더욱 하나님의 본성과 닮았다. 4.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2절). 이는 그들 자신을 보존하고 번성하기 위함은 물론 서로의 위로가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이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손으로 친히 지음 받았으며, 둘 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 그러므로 남성과 여성 사이에는 어떤 이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큰 거리와 불공평이란 없다. 5.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축복하셨다는 사실이다. 어버이들은 흔히 그 자녀들을 축복한다.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도 그의 자녀들을 축복하셨다. 그러나 이 땅 위의 어버이들은 단지 축복을 간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축복을 내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특권이다. 저들의 축복은 번성에 대한 축복이었으나 다른 축복들이 배제된 것은 아니다. 6.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다”는 사실이다. 사람(Adam)이란 흙 곧 붉은 흙을 나타내는 말이다. (1)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 이름을 주셨다. 아담은 직접 다른 피조물에게 이름을 주었으나, 자기 자신의 이름만은 택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가 스스로 어떤 영광스럽고 화려한 칭호를 붙이고 뽐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자신의 근본을 끊임없이 기억하게 하고 “자기를 떠낸 반석과 자기를 떠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름을 주셨다(사 51:1). 이와 같은 존재는 티끌과도 유사한 것이니 조금도 자랑할 바가 없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는 이 이름을 남자와 여자에게 함께 주셨다. 당초에는 본성적으로 하나였고 그 후에는 결혼으로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결합의 징표로써 동일한 이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자도 남자와 같이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다(고전 15:4). Ⅱ. 그 아들 셋의 출생(3절). 그는 아담의 나이 130세에 태어났다. 아마도 아벨의 피살이 이보다 조금 앞서 있었을 것이다. 셋의 출생 이전에 아담은 가인과 아벨 이외에 많은 아들과 딸을 두었으나 그들에 대한 별다른 언급이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조상들에게만 영예를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셋에게서 가장 주목할 점은, 아담이 “자기 모양, 곧 [타락한 죄인으로서]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이것을 아담이 깨달았다!!...곧 태어난 아들 셋 역시 구속이 반드시!! 필요한 자임을 인식했다!!]는 사실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 그러나, 타락한 후에는 자기의 형상을 따라 자기처럼 죄 많고 불결하고 연약하고 유혹에 빠지기 쉽고 죽어야 할 비참한 운명을 지닌 아들을 낳았다. 자기 자신처럼 영육으로 된 사람일 뿐만 아니라, 또한 자기처럼 죄에 휩싸여 가증스럽고, 타락하여 부정한 죄인을 낳았던 것이다. 하나님이 직접 계획하여 지은 사람조차도 죄악 중에 출생했으며, “죄 중에 잉태되었다”고 자백한다(시 51:5). 이것은 아담 자신이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형상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스스로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아담은 그것을(지음받은 바 하나님의 형상을) 자기 자손에게까지 물려줄 수 없었다. 은혜는 피를 따라 계승되지 않지만, 타락은 그러하다는 것을 주목하라. 즉 죄인은 죄인을 낳지만 성도가 반드시 성도를 낳지는 못하는 법이다. Ⅲ. 그의 나이와 죽음. “네가 흙으로 돌아가리라”고 하는 선고를 따라 아담은 결국 930세까지 살다가 죽었다. 비록 그가 금단의 열매를 먹은 바로 그 날에 죽지는 아니하였다 해도, 바로 그 날부터 죽어야 하는 운명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그 때부터 그는 죽기 시작했다. 그 이후의 모든 그의 생애는 집행 유예를 받고 권리를 박탈당한 생애였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황폐되어 가고 죽어가고 있는 생애였다. 즉 그는 선고를 받은 범죄자와 같았으니, 서서히 점차적으로 죽는 것이었다. --------- 족보 (2)(창 5:6-20) 여기서는 성령께서 대홍수 이전의 5명의 족장, 즉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및 야렛에 관한 기록을 남기는 것을 합당하게 생각하셨음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그들은 당시 경건하고 신중한 면에서는 유명했지만, 이들에 대한 것은 특별히 살펴볼 만한 것이 별로 없다.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을 살펴볼 수 있다. Ⅰ. 그들의 세대가 얼마나 광범하고도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는가이다. 어떤 이는 이 일은 보다 간략히 언급하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책에는, 모든 인간의 책이 그러하듯 부질없고 쓸데없는 말이 전혀 없는 것이다. 이처럼 평이하게 기록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1.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이 그런 아들을 낳았을 때 나이가 얼마였으며, 그 후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되면 극히 간단한 산수로도 그들이 결국 얼마의 나이를 향수했던가를 알게 될 것이다. 성령께서는 그런 수의 총계를 기록하셨으니, 이는 그같이 셈하는 능력조차 없는 사람들까지도 위함이었던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이름 속에서 취하는 즐거움을 보이시기 위함이었다. 가인의 계보에 대해서는 간결히 계수한 것을 볼 수 있었다(4:18). 그러나 이 거룩한 “씨”에 관한 기사는 숫자로만이 아니라 자세하고 충분한 말로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서 산 자들이 언제 죽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하신 것이다. “의인을 기념할 때는 칭찬하거니와 악인의 이름은 썩으리라”(잠 10:7). Ⅱ. 셋의 생애는 수명(날수)으로 계수되어 있다. 셋의 수명(“모든 날”)도 그러했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듯이, 인간의 수명이 아무리 길다고 해도 역시 그것은 짧고 이 세상에 사는 인간들의 세월은 빨리 회전함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들의 수명이 날수로 계수된 것이었다면, 우리는 분명코 시간으로 계수됨이 마땅하다. 아니, 오히려 우리는 “우리에게 우리의 날을 계수함을 가르치소서”(시 90:12)라는 기도를 반복해야 하리라. Ⅲ. 에녹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 하고 죽었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의 날수를 계산하는 것은 저들의 수명이 다하여 끝났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 계속해서 죽었더라고 반복되어 있는 것은, 죽음이란 만인에게 예외 없이 주어진 것임을 보이기 위함이다. 특히 우리가 우리 자신의 수양을 위하며 타인의 죽음을 관찰하고 스스로 단련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기도 하다. 건장한 자들도 죽었다. 훌륭하고 부유한 자들도 죽었다. 현명하고 지각 있는 사람들도 죽고 말았다. 선한 사람들이요 매우 유익한 사람들이라 해도 역시 죽고 마는 것이다. Ⅳ. 특히 주목할 것은 이들 모두가 매우 장수했다는 사실이다. 그중 어느 누구도 거의 800년의 주기(週期)를 보지 아니하고 죽은 자 없으며, 어떤 사람들은 그보다 더 오래 살았다. 불멸하는 영혼으로서는 대단히 오랜 세월 동안 진흙 집에 유폐되었던 것이다. 흔히 그렇듯 이 생이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짐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들은 염증을 일으키고 말았을 것이며, 복음 속에 밝히 나타나 있듯이 저 생이 그렇게 분명히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조급하고 안달이 나서 저 생으로 빨리 가고자 했을 것이다. 경건하고 믿음 깊은 조상에게 있어서, 장수는 하나의 축복이었으며 그들을 복되게 했던 것이다. 1. 이 세상의 첫 시대에 살았던 자들의 장수에 대해서는 어떤 자연적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후세의 상황에 비해 당시의 땅은 보다 더 풍성하게 열매 맺었고 그 소산은 보다 더 건강에 좋았고 공기도 보다 더 위생적이었으며 천체의 감응력도 홍수 전에는 보다 더 후박했을 것이라는 것은 있음직한 일이다. 비록 인간이 낙원에서 쫓겨났으나, 땅 그 자체는 황폐화된 지금과 비교하면 그 때는 낙원과 같은 동산이었을 것이다. 어떤 이는 피조물에 대한 그들의 많은 지식과 그 피조물을 음식과 약품으로 이용할 수 있는 지식, 그리고 그들 자신의 절제와 극기심이 장수에 크게 기여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무절제하여(눅 17:27) 오늘날 흔히 무절제한 자들처럼 단명했으나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2. 그것은 주로 하나님의 권능과 섭리로 말미암은 것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상에 사람을 보다 더 신속히 채우시고 하나님과 신앙에 대한 지식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보존할 수 있게 하기 위해 그들의 수명을 늘리신 것이다. 그 때는 성문화된 글이 없어서 전승이 지식을 전달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노아를 제외하면 여기에 있는 다른 족장들은 모두 아담이 죽기 전에 출생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담에게서 창조와 낙원, 타락과 약속, 그리고 경건한 예배와 신앙생활에 관한 하나님의 계율들을 충분하고도 만족스럽게 이어받았을 것이다. 어떤 실수가 있을 때에는 그것을 교정하기 위해 아담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이며 아담이 죽은 후에는 므두셀라와 그 이외에 그와 교제하던 사람들을 의지했을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하나님의 교회 안에 그의 뜻에 관한 지식과 그를 예배하는 순수성이 보존된다. -------- 에녹에 관한 기사(창 5:21-24) 이 기사는 몇 세대에 관한 계속된 기록이기는 하지만 별로 특기할 것도 변화도 없이 이름과 나이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마침내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며 주의를 기울여야 할 이름이 나온다. 그는 아담으로부터 7대째인 에녹이다. 나머지 사람들도 덕망 있는 생애를 보냈지만, 에녹은 이들보다 뛰어났고 족장 시대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이었다. 그에 관한 기사는 얼마 되지 않지만, 그래도 이 얼마 안 되는 것으로도 그의 이름을 훌륭하게 하기에 족하다. 자기의 이름을 붙인 도성을 갖고 있던 다른 에녹의 이름보다도 훨씬 위대한 사람이었다. 그에 관해 두 가지 사실을 살필 수 있다. Ⅰ. 이 세상에서의 그의 영광스러운 친교. 이에 대해서는 두 번이나 기록되어 있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22절).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24절).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그의 신앙과 그의 교제의 범위 및 취지는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였더라” 했으니, 다음을 의미한다. (1) 참된 믿음. 하나님과 동행함 이외에 경건이란 무엇이겠는가? 불경하고 세속적인 자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지내는 자요 오히려 하나님과 반대의 길을 걷는다. 그러나 경건한 자들은 하나님과 동행한다. 이는 하나님과의 화해를 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두 사람이 의합하지 못하고야 동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암 3:3). 뿐만 아니라 이는 경건하고 의롭고 근실한 생활의 온갖 요소와 모범이 내포되어 있기도 하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언제나 우리 앞에 하나님을 세우는 일이며, 언제나 그의 감찰하에 있는 자답게 행동하는 일이다. 그것은 의식(儀式)이나 계율로써 하나님과 교통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행동의 규율로 삼고 그의 영광을 모든 행동의 목표로 삼는 것이다. 그것은 만사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어느 모로나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끊임없이 염려하고 노력하는 일을 뜻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그의 계획하신 바에 부합하고, 그의 동역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본받는 자”가 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엡 5:1). (2) 뛰어나게 훌륭한 신앙. 그는 이 세상에 대해서는 온전히 죽은 자였으며 모든 선한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하나님의 뒤를 따랐을 뿐만 아니라, 이미 하늘나라에 가 있듯이 하나님과 동행했던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들보다도 뛰어났고, 악한 시대 중에서는 물론 선한 시대 속에서도 뛰어난 사람이었다. (3) 다른 사람들에게 신앙을 북돋아 주는 활동.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이라고 부른다(삼상 2:30, 35; 슥 3:7 참조). 에녹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음에 틀림없으며 노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말할 수 있으니, 의의 전도자였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언했다. 유다서 1장 14절에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제 성령께서는 에녹에게 “살았노라”라고 말씀하시는 대신에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노라”라고 말씀하시니, 이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선한 사람의 삶이기 때문인 것이다. 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에녹의 생애의 기업이었으며, 끊임없는 염려와 수고였다. 남들은 자기 자신과 이 세상을 향해 살아가는 동안, 그는 하나님을 향해서 살았던 것이다. ② 그것은 그의 생애의 기쁨이요 양식이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일이 그에게는 삶 그 자체보다도 훨씬 더 좋은 일이었던 것이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빌 1:21). 2. 신앙이 들게 된 때. “에녹이 65세까지 살다가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21절) 하나님과 동행하였다”(22절)고 했으나, 그 때가 되기까지는 그의 신앙심이 분명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당초에는 그도 남들과 같이 살았다. 위대한 성도들도 점차적으로 훌륭한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3. 그의 신앙의 지속성. 그는 이 세상에 존속하는 날 동안 계속하여 “300년 간을” 하나님과 동행했다. 위선자들은 항상 기도하지 않지만 원칙을 따라 행동하고, 신앙을 선택하는 참된 성도들은 끝까지 참고 견디면서 평생을 하나님과 함께하기를 소망하는 자답게 생존하는 동안 계속 하나님과 동행한다(시 104:33). Ⅱ. 보다 좋은 세상으로 영광스럽게 옮겨짐.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24절). 그는 남들처럼 살지 않았고 남들처럼 죽지도 않았다. 히브리서 11장 5절에 설명되어 있듯이,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더라.”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그가 옮겨져 간 때. (1) 그의 생애 중의 어느 시기였을까? 그것은 단지 365년간을 살았을 때이니, 당시 사람들의 수명과 비교하면 이는 그의 생애 중반기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홍수 이전의 족장들치고 그 나이의 곱절쯤 더 오래 살지 않은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처럼 속히 데려가셨단 말인가? 이는 분명히 이제 세상이 점점 타락하여 그에게는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거나, 또는 그가 아주 뛰어난 인물이라서 세상에 대해 매우 권태로움을 느껴 조속히 떠나기를 원했기 때문이거나, 또는 그는 다 이루어 이 세상을 빨리 떠나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자기가 가장 사랑하시는 자를 데려가시사 이 세상에서 그들이 잃은 시간을 하늘나라에서 찾게 하시며, 그들에게 말할 수 없는 유익이 되게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겠다. (2) 이 세상의 어느 시기였을까? 그것은 57년 전에 죽은 아담과 69년 후 태어나게 된 노아를 제외한, 이 장에서 언급된 모든 족장들이 살아 있을 때였다. 그 두 사람은 그 믿음에 대해 다른 현저한 확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 모두가 에녹이 옮겨간 것에 대한 증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미래 상태에 관한 그들의 믿음과 소망에 대한 격려이기도 했던 것이다. 2. 그의 옮겨짐을 표현한 방법.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심으로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했다. (1) 그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었다. 이것은 그가 생존했던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존재에 관해 말하는 것이다. 70인역에서는 그가 “발견되지 아니하였더라”고 되어 있다. 엘리야를 찾고 있던 예언자들의 생도들처럼(왕하 2:17) 친구들이 에녹을 찾았으나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어떤 이가 생각하듯이, 그의 적들이 그 경건한 믿음에 격분하여 그를 죽이려고 찾아 헤매었으나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에는 경건치 못한 많은 죄인들이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나쁜 말과 혹독한 행동을 일삼았으니(유 1:25), 하나님께서는 에녹을 그들에게서 보호하사 하늘 아래 두지 않으시고 하늘나라에 숨기셨다는 것을 그의 예언을 통해 알 수 있다. (2) 그 후에 하나님이 엘리야를 데려가셨듯이, 천사들을 시켜서 에녹의 몸과 영혼을 하늘나라의 당신께로 데려가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살아서 맞게 될 성도들과 같이 그는 변화되었던 것이다. 선한 자가 죽으면 언제나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고 불러 주어서 받아들이신다. 바울 사도가 에녹에 관해 더한 말씀은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라고 했다(히 11:5). 이것이 그가 얻은 선한 평판이었다. 다음과 같은 것을 명심하자. 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②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큼 그와 동행할 수는 없으나 오직 믿음으로써는 가능한 것이다. ③ 믿음으로 그와 동행하여 그를 기쁘시게 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친히 영광을 주신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인정해 주시고, 심판의 날에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서 그들을 위해 증거해 주실 것이다. 하늘로 옮겨지기 전에 이런 확증을 갖지 못한 자는 그 후에 그것을 얻게 될 것이다. ④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거룩한 친교를 가지는 자들은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참된 행복임을 알게 될 것이다. 에녹이 옮겨진 것은 미래상태의 실재를 믿는 신앙에 증거가 될 뿐 아니라, 미래의 상태 속에서는 몸도 그렇게 영광되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준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한다고 하는 것은 그와 동행하는 모든 자들의 소망에 용기를 주는 일이다. 훌륭한 믿음은 빛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다. ----------- 므두셀라에 관한 기사(창 5:25-27) Ⅰ. 어떤 이는 그의 아버지 에녹이 예언자였으므로 그의 이름에는 예언적인 뜻이 있다고 생각한다. 므두셀라의 뜻은 “그가 죽는다”, “가시가 있다”, 또는 “내뿜다”를 의미한다. 곧 므두셀라가 죽던 바로 그 해에 있었던 대홍수를 뜻하는 것이다. 만일 그의 이름에 진정 그런 뜻이 있다면, 그렇게 설명될 수도 있다. 그것은 그 심판이 오기 훨씬 이전에 부주의한 세상에 대한 분명한 경고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여기서 살필 수 있는 것은, 지금껏 가장 장수한 사람인 므두셀라의 이름이 죽음을 뜻하는 말을 지니고 있고, 비록 서서히 다가오는 것이지만 분명히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상기케 했다는 사실이다. Ⅱ. 그의 나이. 지금까지 보아 온 사람들 중에서도 이 땅 위에서 가장 오래 산 그는, 969년을 살기는 했지만 역시 죽었다. 가장 장수하는 자라도 종국에는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노소를 막론하고 어느 누구도 그 같은 전쟁에서 헤어날 길이 없으니, 이는 그것이 바로 모든 인간의 종말이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장수로 생명에 도전할 수 없으며, 죽음의 속박에 항변할 수가 없는 것이다. 므두셀라는 홍수가 있기 전에 죽었다고 하는 것이 공통적인 견해인데, 유대 저작자들은 창세기 7장 10절을 참조하여 “7일 전”이라고 하고, 또한 다가올 악을 피하여 그를 데려가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이 장에 언급된 모든 족장들은 거룩하고도 선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나는 굳이 이와 상반되는 어떤 추론을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사실 그리스도의 족보 속에 기록되어 있는 유대의 모든 역대 왕들이 대부분 드러나게 거룩하거나 선한 자들은 아니었음에 비해서, 이들의 이름이 그리스도의 조상들 중에 기록되어 있다는 그 사실 자체 때문에 이들이 경건하거나 선하다고는 보지 않는다. 므두셀라의 경건과 선함이 의심스럽다면, 아마 그도 홍수 때 익사했을 것이다. 그는 홍수가 난 바로 그해에 죽은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 노아에 관한 기사(창 5:28-32) 여기에서 노아에 관한 기사를 처음으로 대하게 된다. 그에 관한 기사는 다음 장에서 많이 보게 될 것이다. Ⅰ. 그의 이름과 그 이름이 주어진 이유. 노아는 “휴식”이라는 뜻이다.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셨으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했으니, 이 이름은 그의 자손들에 대한 일상적인 축복 이상의 것을 바라면서 그의 부모가 지어 준 이름이다. 1. 인간의 삶의 처참한 상황에 대한 (노아의 아비)라멕의 불평이 있다. 죄가 들어오고 죄로 인해 저주가 임함으로써 우리의 상태는 매우 비참하게 되었다. 우리는 전생애를 노동으로 소비한다. 우리의 시간은 계속되는 수고로 가득 차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땅을 저주하셨으므로 염려와 고생을 해야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라멕은 마치 이 생의 일에 피로하고 염증을 느끼는 것처럼 말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훌륭하게 이용할 수 있었던 그 많은 사고력과 귀중한 시간이 어쩔 수 없이 육신을 지탱하기 위해 소비되는 것을 라멕은 안타깝게 여겼다. 2. 이 아들의 출생이 위안을 주리라는 소망. “이 아들이 우리를 위안하리라” 했으니, 이는 일반적으로 자녀들에 대해 지니는 어버이들의 소망과 기대뿐만 아니라(즉 그들이 장성한 후에는 때로, 그렇지 않은 때도 있기는 하지만, 그 어버이에 대해서는 위안이 되고 어버이가 하는 일을 돕기도 하는 것이다), 그는 후손들에게 지극히 유용한 사람이 되리라는 예언이 이미 있었음이 거의 틀림없다. 그리하여 그는 약속의 씨로 이해되고 단정되었다. 즉 메시아가 그에게서 나오리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그의 오심을 기대하는 믿음은 우리가 받아 마땅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그리고 흔히 불평을 삼고 있는 현세에서의 수고와 괴로움에 대한 가장 좋고 확실한 위안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것인가? 하늘은 우리의 것인가? 이 아들이 우리를 안위하리라.” Ⅱ. 그의 자녀 셈과 함과 야벳. 노아가 500세 되었을 때 (맏이를) 낳았던 것이다. 창세기 10장 21절을 보면(우리 성경과는 다름-역주) 야벳이 장자임이 분명한데, 셈이 먼저 기록된 것은 창세기 9장 26절에 나타난 대로 계약이 그에게 상속되었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하나님은 “셈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불리고 있다. 아마 그에게 장자권도 부여되었을 것이다. 또한 그로부터 머리인 그리스도와 몸인 교회가 계승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는 셈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이름”이란 뜻이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가진 자가 그에게서 태어날 때까지, 그 자손들 위에 하나님의 이름이 언제나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셈을 맨앞에 세움으로써 만물 중에 현저하게 드러나야 하는 그리스도를 사실상 맨앞에 세우게 되는 것이다. === ========== 5장: 아담의 자손들 [1-2절] 아담 자손의 계보14)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15) [3-5절] 아담이 130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16)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이 셋을 낳은 후 800년을 지내며 자녀17)를 낳았으며 그가 930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6-20절] 셋은 105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807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912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에노스는 90세에 게난을 낳았고 게난을 낳은 후 815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905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게난은 70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마할랄렐을 낳은 후 840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910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마할랄렐은 65세에 야렛을 낳았고 야렛을 낳은 후 830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895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야렛은 162세에 에녹을 낳았고 에녹을 낳은 후 800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962세를향수하고 죽었더라. < 14) ‘자손의 계보’라는 원어(톨레도스 )는 창세기에 10번 나오는데, ‘대략’(2:4; 36:1, 9), ‘계보’(5:1), ‘사적’(6:9), ‘후예’(10:1; 11:10, 27; 25:12), ‘약전’(37:1) 등으로 번역되었다. 15) 본장과 창세기 11장과 28장, 출애굽기 12:40, 열왕기상 6:1 등을 참고하면, 하나님께서 천지만물과 사람을 창조하신 연대는 대략 주전 약 4115년이 된다. J. B. 페인(Payne)은 창세기 11:32의 해석의 차이로 창조 연대를 주전 약 4175년으로 본다. 16) ‘낳다’는 원어(얄라드 의 히필형)는 ‘낳게 한다’는 뜻으로 ‘아버지가 된다’는 의미이다. 칼형은 주로 여자가 아이를 낳는다는 뜻으로 사용되지만, 남자에게도 22회나 사용되었고 히필형은 170회 이상 사용되었다. 17) 원문은 ‘아들들과 딸들’이라고 되어 있음 .> [21-24절]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365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5-31절] 므두셀라는 187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을 낳은 후 782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969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라멕은 182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 )(‘안식’이라는 뜻)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라멕이 노아를 낳은 후 595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777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32절] 노아가 500세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 창세기 5장은 아담의 자손들에 대해 증거하는데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아담의 자손들은 오랫동안 살았고 많은 자녀들을 출산하였다. 아담 후 10대 중에서 여섯 명은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 전까지 900세 이상 장수했다. 아담은 930세를 살았다. 아담의 8대손 므두셀라는 969세로 가장 오래 살았다. 아담의 10대손 노아까지도 950세를 살았다(창 9:29).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의 본래의 몸은 건강하였고 환경도 좋았던 것 같다. 그러나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 후 사람의 수명은 600세로 또한 점차 200세 이하까지로 급격히 줄어들었다(창 11:10-26). 노아의 아들 셈의 수명은 600세이었고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205세를 살았다. 홍수 심판 때 지구 대기권에 큰 변화가 일어났던 것 같고 그 변화로 인해 사람의 몸이 빨리 노쇠해지기 시작하였음이 분명하다. 홍수 심판 전에, 사람들은 오래 살면서 아들들과 딸들을 출산하였다. 아담은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 자녀들은 부모의 외모와 기질을 이어받아 출생하였다. 아담의 자손들의 오랜 수명과 다산(多産)으로 인해 땅에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노아와 같이 500세가 되기까지 자녀를 얻지 못한 자도 있었다. 노아는 500세가 되기까지 자녀가 없었고 500세가 된 후에야 세 아들을 낳았다. 그들이 세쌍둥이였는지 아니면 몇 년 간격으로 얻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성경은 자녀가 하나님의 기업과 상급임을 말한다(시 127:3).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사람이 원해도 자녀를 가질 수 없다(출 23:26; 호 9:11).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녀를 허락하지 않으신 일은 노아에게 영적으로 큰 유익이 되었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경건하게 훈련시키고 크게 쓰시려는 사람들에게 자녀 없는 고통을 주셨다. (주 앙망하며 기다리라!!) 아브라함 당시에는 보통 30세 전후에 결혼하였는데(창 11:11-24), 아브라함은 결혼한 지 약 70년 동안 자녀가 없었다. 이삭도 결혼한 지 20년이 되도록 자녀를 얻지 못했다(창25:21, 26). 후에, 한나도 여러 해 동안 자녀가 없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한나는 장차 하나님의 사람이 될 사무엘을 낳았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유익하게 섭리하신다(롬 8:28). 둘째로, 아담의 자손들은 땅 위에서 오랫동안 살았지만 마침내 다 죽었다. 창세기 5장의 중요한 한 특징은 ‘죽었더라’는 말의 반복이다(5, 8, 11, 14, 17, 20, 27, 31절; 총 8번 나옴). 아담부터 노아의 아버지 라멕까지 에녹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들에게 다 ‘죽었더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에녹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담의 자손들이 다 죽었다. 노아의 아버지 라멕은 홍수 심판이 시작되기 5년 전에 죽었고 노아의 조부 므두셀라는 홍수 심판이 있기 직전이든지 혹은 홍수 심판 때에 죽었다. 노아의 많은 형제들과 사촌들도 홍수 심판 때에 다 죽었다. 홍수 때 살아남은 자는 노아의 가족 여덟 식구뿐이었다. 사람들이 죽은 것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경고하신 말씀대로 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경고하셨었다(창 2:16-17). 또 아담이 범죄한 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선언하셨었다(창 3:19). 하와에게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고 말한 뱀의 말 곧 마귀의 말은 거짓말이었다는 것이 확실히 증명되었다. 사람의 죽음은 죄 때문에 왔다. 죄의 형벌이 죽음이라는 것은 성경의 진리이다. 사도 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했고(롬 6:23), 또한 사람을 통해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를 통해 사망이 왔다고 했고(롬 5:12), 또 말하기를,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다고 하였다(고전15:21). 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죽었고 죽고 있고 또 죽을 것이다. 셋째로, 그러나 에녹은 예외적으로 죽지 않고 하나님께로 올라갔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고 그는 세상에서 365세를 살았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다(21-24절). 아담의 자손들 가운데 오직 에녹에게만 ‘죽었더라’는 말이 빠져 있다. 그는 죽지 않고 하나님께로 올리워 갔다. 히브리서는 말하기를,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고 했다(히 11:5). 그가 죽지 않고 하나님께로 갔다는 말은 그의 승천을 가리킨다. 그는 후에 엘리야가 승천하였듯이(왕하 2:11), 또 우리 주 예수께서 승천하셨듯이(행1:9-11), 그는 하나님께서 계신 곳, 천국으로 올라갔다. 에녹의 승천은 세상 너머에 하나님께서 계신 영광의 천국이 있음을 증거한다. 에녹은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그는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본문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두 번이나 말한다. 한마디로, 에녹은 경건한 사람이었다. 대략적으로 말해, 에녹은 아담 후 622년에 출생하여 987년까지 365년간 살았다. 에녹은 아담과 308년 동안 같이 살았고 셋이나 에노스와는 평생 같이 살았다. 경건했던 그는 그들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고 확신했을 것이다. 경건함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생활, 즉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활로 나타난다. 또 사람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 물론 그는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어긴 모든 죄를 버리고 그의 뜻과 계명에 즐거이 순종해야 한다. 성경은 경건한 삶을 가르친다. 시편 1:1-3은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고 말한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복된 삶이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훈련]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미쁘다 이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모욕을 당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고 했다(딤전 4:7-10). 다른 이들의 900년 가까이의 일생에 비하면, 에녹은 365년의 짧은 생을 살았지만, 본장에 나오는 아담의 자손들 중에서 가장 복된 삶을 살았다. 말씀과 기도의 삶, 그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께서 세상에서 사셨던 삶이요 그가 친히 우리에게 가르치셨던 복된 삶이다. 본장의 내용에서 얻는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자녀 출산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임을 알자.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신 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다(창 1:28). 시편 127편은 말하기를,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고 하였다(시 127:3-5). 부모가 자녀들을 많이 낳아 잘 기른다면 참으로 복되다. 디모데전서 5:10은 나이든 여성 들의 선한 행실의 한 증거로 자녀를 양육한 것을 꼽았다. 우리는 자녀 출산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임을 알고 그 일을 귀히 여기고 사모하자. 둘째로, 우리는 영생의 세계를 믿고 소망하자.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올리웠다. 인간에게는 죽음 너머의 세계가 있다. 에녹이 올라간 세계가 있다. 하나님께서 계신 세계가 있다. 선지자 엘리야가 올리운 곳이 있다. 주 예수께서 올리우신 곳이 있다. 온전케 된 의인들의 영들이 있는 곳이 있다(히 12:23). 하나님께서 계신 영광의 천국이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4:1-3). 그는 제자들에게 천국의 존재를 증거하셨고 그 천국을 기다리게 하셨다. 사도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에 대해 증거하였다(계 21:1-2). 우리는 영원한 천국을 확신하고 소망하자. 셋째로, 우리는 에녹의 경건을 본받자.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사도 바울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교훈했다(딤전 4:8). 경건은 훈련이 필요하고 훈련할 가치가 있는 일이다. 우리는 에녹처럼 경건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께서 계신 영광의 천국에 다 들어가자. === === 아담(사람/티끌/먼지)-->셋(놓임..아벨 대신)-->에노스(사람, 인간)-->게난(창 제조자/소유자, 소유)-->마할랄렐(하나님께 찬양)-->야렛(하강, 가계/계보)-->에녹(선주자/선생/전수자, 개시/시작)-->므두셀라(<그가 죽는 날 홍수를>보내리라....투창의 사람)--->라멕(강한 자)--->노아(누아흐,,안식하게 하다/안위하다/쉬다)--->야벳(넓은/열린, 광활/확장/개방...창10:21에 의하면 야벳이 육적 장자), 셈(유명한/인정받는...이름/명성...영적 장자), 함(덥다/검다, 정열적/육적..상대적으로 열대지방에 거주) ------[육적 장자, 영적 장자]---------- 노아는 500세쯤에 셈과 함과 야벳 세 아들들을 낳았다. 물론 창5:32에 노아의 아들의 이름이 셈 함 야벳의 순서대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셈이 장남이고 함이 차남 야벳이 막내였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셈 함 야벳은 낳은 순서가 아닌 것 같다. 실제로 육적 장남은 야벳이다. 창10:21에 보면 Unto Shem also, the father of all the children of Eber, the brother of Japheth the elder, even to him were children born(kjv). Sons were also born to Shem, whose older brother was Japheth; Shem was the ancestor of all the sons of Eber(niv).야벳을 셈의 형이라고 했다. 그러면 왜 개역성경에서는 창10:21에서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고 했을까? 그것은 잘못 번역한 것이다. 또한 함에 대해서도 창9:24 And Noah awoke from his wine, and knew what his younger son had done unto him(kjv). When Noah awoke from his wine and found out what his youngest son had done to him(niv),에서 보면 막내아들( younger son 또는 youngest son )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에 나타난 기록을 정리해보면 야벳이 맏이고 둘째가 셈이거나 함이다. ..태어난 순서대로 기록한다면 야벳 셈 함 혹은 야벳 함 셈이라고 해야 옳다....그런데 성경은 셈 함 야벳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왜 야벳을 맨 마지막으로 기록했을까?.... 창세기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금 이 시대에 분별할 수 있는 마지막때의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그 보다 먼저 노아가 과연 세명의 아들밖에 없었을까 하는 것이다. 노아는 500세가 되서야 아들들을 낳기 시작했는데 그러면 그전에는 자식을 낳지 않았을까? 아니면 낳았는데 죽었을까? ... 노아에 관한 성경의 기록은 한 가족이 온전히 구원받는 하나님의 섭리가 핵심을 이루고 있다. 왜 한 가족일까? 인류의 타락은 한 가족의 불순종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들이 범죄한 것이 아니라 아담의 가족중 한 사람인 하와로부터 범죄가 비롯되었다. 한 가족이 온전하지 못함으로 온 인류가 죄악에 빠지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 것은 종족을 완전히 몰살하시려는 계획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가 실패한 가족구원을 노아를 통해 다시 재창조하고자 하시는 섭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노아의 가족들이 구원받은 후에 하나님은 다시금 창조시에 아담과 하와에게 내리셨던 복을 재차 명하신다.....창9:1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물론 태초의 명령인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복은 빠졌는데 그 이유는 그 때는 죄가 없는 상태였고 노아홍수 후에는 죄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 아닐까. 죄된 인간은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가 없다. 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복이 성도들에게 임하게 된다. 어쨋든 하나님은 가족의 실패를 다시 회복하셔서 온전한 가족을 통해 세상을 세우시려 함이었다. 하나님의 바램대로 노아는 온전한 가족구원을 이루어 한 가족 아내와 세 아들들과 세 자부들이 온전한 믿음으로 구원의 방주에 들어가 대홍수로부터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노아는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하나님은 그 후로부터 구원의 가장 작은 단위를 가족으로 삼으셨다. 아브라함과사라와 이삭 /가나안의 기근으로부터 야곱의 그의 가족70인의 구원/ 한 가족구원으로부터 시작된 한 민족 이스라엘의 구원 / 마리아와 요셉과 예수그리스도의 온전한 영적조합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그리고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바울의 가족구원적 선포를 볼 수 있다. 어느 나라든 초대교회는 가정교회 형태로 시작이 되었다 어떤 연고로든지 노아는 500세가 되어 아들 셋을 낳기 전에는 자식을 낳지 않았든지 결혼을 매우 늦게 했다고 볼수 있다. 하나님은 이미 노아가 태어날 때부터 가족 구원을 완벽하게 이룰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셨고 영적 능력을 주셨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박한 말세지말 그 타락한 시대에 아들들을 순결하고 온전하게 키우며 타락하지 않은 여자들을 아내와 며느리로 들일 수 있었을까?...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더 절실히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아니고서는 결코 이 세상의 유행과 잘못된 습성을 이겨낼수 없다는 것이다. 한 순간의 실수가 인생의 방향을 바꾸고 망칠수도 있는 것인 사람의 일이다. 그런데 노아가 500년간 자기 자신을 세속에 물들지 않게 잘 지키며 100년동안 아내와 아들들을 죄악에 터럽혀져서 타락하지 않도록 지킬수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노아의 아내와 며느리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마리아를 특별히 숨겨두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거룩한 자손을 위해 특별히 준비해두신 자들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노아의 시대와 같은 때를 사는 우리는 노아가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필사적으로 죽을 힘을 다해 의지했는가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러면 왜 셈 함 야벳인가? 셈( שם ׁname)은 이름이라는 뜻으로 구원론 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셈의 계열을 통해 오시기 때문에 노아의 아들들 중에 첫번째로 언급한 것이리라. ..유다지파도 그리스도의 혈통이기에 나중에 장자 지파가 된 경우와 같다. 함( חם hot)은 지역적으로 열대지방에 사는 족속이 되었는데 그의 이름같이 매우 정열적이고 육체적이므로 아버지 노아의 벌거벗음을 숨겨주지 않고 드러냄으로 노아에게 저주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함의 후손들은 바벨론의 시조가 되었고 애굽과 가나안의 조상이 되었지만 후에 <마침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된다( 사11:11-16 ) ...예수님 시대에도 실제로 가나안지역인 두로와 시돈에서 복음을 전파하셨고 가나안여인이 예수님에게 찾아와서 귀신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하기도 했다. 야벳은 장남임에도 왜 맨 마지막에 기록되었을까? 야벳은 "열린/광활한, 확장(opened, expansion)을 의미한다. 야벳의 후손들은 지금의 유럽 알프스 지중해 연안에 자리잡은 바닷가에 사는 족속들로서 한 때 해적들이었고 매우 약삭빠르고 계산에 빠르며 진취적이어서 부를 축적하여 세상의 부와 권세를 주름잡는 족속들이 되었다. 그래서 노아도 야벳에 대해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시고 함을 종으로 부릴 것이며(실제로 유럽사람들이 흑인을 노예로 매매를 시작했다) 셈의 장막에서 거하게 하실 것이라고 했다. ...야벳은 셈의 장막에서 창대하게 되는데 이것은 기독교를 통해 부와 권세를 누릴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야벳은 기독교를 이용하여 부를 누리면서 결국은 기독교를 져버리고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적 역할을 할 것인데 그 단서는 야벳의 후손중에 에스겔38 과 계20:8에 나오는 곡과 마곡 로스 메섹 두발이 되어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대항하여 최후의 전쟁을 일으키는 적그리스도의 군대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셈족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섬기며 천국 백성이 되는 자들의 상징이며, 함은 한때 타락했으나 하나님의 징계로 회개하고 돌아와 예수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들의 상징이고, 야벳은 한때 그리스도의 복음이 왕성하여 기독교의 이름으로 큰 부와 명성을 누렸지만 교만하여 결국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의 무리가 되어 영원히 하나님에게 버림받을 자들의 상징이 된다. 그래서 노아의 아들들의 이름의 순서가 셈 함 야벳으로 쓴 것이라고 생각한다. ==== [요1: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영접하다, 취하다 take, 받다 receive....lambavnw(2983, 람바노)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람바노는 '취하다'라는 기본적인 의미로부터 다음과 같은 의리를 지닌다. (a) 이 단어는 능동적인 의미로 ① '자신에게로 취하다, 받다, 수집하다' ② '붙잡다'를 의미한다. (b) 이 단어는 또한 보다 수동적으로 '얻다, 획득하다'를 의미한다. (c) 중간태로는 '어떤 물건이나 사람을 붙들거나 잡다'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람바노는 70인역본에서 주로 히브리어 라카흐의 역어로, 그리고 나사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람바노는 70인역본에서 '취하다'는 의미에서 '검을 들다'(창 34:25), '아내로 삼다'(창 4:19)를 나타내며, '받다'는 의미에서 뇌물의 취하다(삼하 8:3), '직책이나 상을 받다'(시 109:8; 잠 11:21)를 나타낸다. 람바노는 '생명을 취하다'(죽이다)(Bar. 2:17), '인구조사를 하다'(민 3:40), '(노래를) 시작하다'(시 80:2), '죄의식을 가지다'(레 16:22; 참조: 겔 14:10; 겔 18:19이하)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람바노는 신약성경에서 258회 나오며, 마태복음에 53회, 요한복음에 46회 요한계시록에 23회, 바울서신에 34회 사용되었다. (a) 람바노의 (a)의 의미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막 10:38), 증거를 받아들이는 것(요 3:11), 예수님께서 보내신 자들(요 13:20)이나 예수님 자신을 영접하는 것(요 1:12),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아내는 것(히 7:8) 등과 같은 문맥 안에서 나타난다. (b) 람바노의 (b)의 의미는 신학적 구절들에서 현저히 나타난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한 것을 담당하시고(마 8:17), 하나님은 찬양을 받으시며(계 5:12), 예수님도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없다(참조: 고전 4:7; 벧후 1:17). 믿는 자는 하나님의 성령을 받으며(요 7:39; 행 10:47) 성령의 은사들을 받는다(벧전 4:10). 그들은 믿음으로 성령을 받으며(갈 3:2), 선물로서 받는다(참조: 롬 1:5). 신자들은 참으로 지상의 것들까지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으며(딤전 4:4), 그들이 받을 수 있도록 구하라는 요청을 받기도 한다(요 16:24). 내세에는 썪지 아니할 생명의 면류관이 있는데, 신자들은 이것도 또한 받을 것이다(고전 9:25). 받는 것은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지만(고전 4:7), 복음을 받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 자신께로부터 받는 것이다(갈 1:12). (참조: G. Delling; Walter Bauer; J. H. Thayer). ------------ @@취하다 take....jq'l;(3947, 라카흐) 라카흐(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취하다 take'를 의미하며, '취하다, 손에 넣다, 얻다(받다), 가져오다, 붙잡다, 운반하다, 아내로 삼다, 움켜쥐다, 구입하다'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000회 나오며, 칼, 니팔, 푸알, 호팔, 히트파엘형으로 사용되었다. 라카흐는 복수하는 것(사 47:3) 혹은 치욕을 받는 것을 묘사한다(겔 36:30). 하나님께서는 이 단어가 샤마('듣다')에 병행하여 사용되는 시 6:10에서 기도를 받아들이신다(참조: 욥 4:12). 유사한 병행 의미가 라카흐('강탈하다')와 가나브('도적질하다') 사이에 존재한다(욥 4:12, 렘 23:30-31, 삿 17:2). 수동태 어간(푸알형과 니팔형)에서 '빼앗기다, 취해가져 가지다'(삼상 4:11) 혹은 '이끌리다'(창 2:15)라는 용법은 이러한 '취함'이 빼앗긴 자의 뜻에 거스린다는 것을 암시한다. ---라카흐의 일반 의미 뿐만 아니라 많은 연장된 용법들이 있는데, 그 중에는 신학적 의미를 가진 것들이 있다. 이 단어의 '취하다'라는 의미의 측면은 어떤 문맥에서 '선택하다'와 혹은 '소환하다'라는 의미로 연장된다. 신 4:34에 의하며, 하나님께서는 열방 중에서 이스라엘을 취하셨다(선택하셨다)(참조: 신 4:30, 왕상 11:37, 수 3:12, 수 4:2). 욥 41:4에서 악어는 하나님과 결속하는 언약을 한 영구한 종으로 '취해졌다'(선택되었다). ---'소환하다'는 그와 같은 문맥 중 몇 가지에서 매우 적절하게 조화한다. BDB(pp. 543, 546)는 민 23:11, 삿 11:5, 삼하 16:11에서 라카흐를 '소환하다'로 간주한다. '취하다' 혹은 '가져가다'가 또한 뜻이 통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어의론에 유의해야 하나, 이것은 이 단어의 많은 뉘앙스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이러한 유형에 있어서 흥미로우나 난해한 용법은 시 75:2에서 나타난다. 이 번역은 상당히 다르다. KJV는 이 성구를 '내가 그 회중을 받아들일 때', RV는 '내가 정한 때를 발견할 때', RSV는 '내가 지정하다', NASB는 '내가 선택하다'로 번역한다. 여기에서 다후드(M. Dahood)는 '소환하다'로 해석하여 '내가 회중을 소환할 것이다, 내가 공평으로 재판하리라'로 번역한다(Paslms, Ⅱ, in AB, p. 209). 예레미야는 2회에 걸쳐 라카흐를 말의 '거론' 혹은 '사용'으로 쓴다. 렘 23:31에서 그는 주님께서 마치 자신들에게 영감을 준 것 같이 혀를 '놀리는'(RSV, NASB) 거짓 선지자들에 대하여 말한다. 렘 29:22에서 포로는 어떤 거짓 선지자들의 죽음에 근거한 저줏거리를 사용한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불덩이는 출 9:24과 겔 1:4에서 어근 라카흐의 재귀적 용법으로 묘사된다. 불덩이가 그 자체를 움켜쥐거나 안는다는 해석은 전혀 만족스럽지 못하다. ---아마 신학적으로 라카흐의 가장 흥미로운 용법은 육체로 승천하는 것을 묘사하는 두 가지의 분명한 문맥 주변에 집중되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 에녹을 '데려가실' 때 에녹의 사라짐(창 5:24)과 회오리바람 속에서 엘리야의 승천(왕하 2:3, 왕하 2:10-11)을 언급한다. 이러한 육체적 승천의 견지에서 비추어 볼 때 다른 유사한 용례가 있는지를 의문시하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 아니다. 엘리야는 그 몸이 승천하였는데, 그는 적의 손에 죽는 것을 언급하는데 라카흐를 사용하였다: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왕상 19:10, 왕상 19:14, 참조: 잠 24:11). 이 의미와 완전히 상반된 의미가, 하나님이 주체가 되며 죽음 혹은 고통으로부터의 구출이 고려되고 있는 것을 나타내는 다른 여러 구절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시 18:16은 다음과 같이 언급된다: "저가 위에서 보내사 나를 취하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 내셨도다". 그러나 단순히 인간의 생명을 구하는 것 이상의 것이 시편 기자의 마음에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는 최소한 세 문맥이 있다. 시 49편은 사악한 자의 종말과 의인의 종말 사이에 완전히 대조적인 면을 나타낸다. 사악한 자는 "저로 영존하는"(시 49:9), 즉 어떤 영원한 희망도 없이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12, 시 49:20). 그러나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승리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라카흐: 데려가다, 잡아 채다) 이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로다"(시 49:15). 만일 시편 기자가 자신도 역시 짐승들과 같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당시의 몇 년 동안에 죽음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에 관해 논의하였다면, 이 시편은 아무런 요점도 없을 것이다. 시 73:23-25은 또한 사악한 자들을 의인들과 대조하며, 이 생명을 초월하는 믿음은 다시 한번 라카흐라는 단어에 집중된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취하시리니)"(시 73:24). (W. C. Kaiser). (참조: BDB; TWOT). ====== [창5: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가다, 오다, 걷다...&l'h;(1980, 할라크) 할라크(동사)는 기본어근이며, '가다, 오다, 걷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500회 나오며, 다양한 문맥에서 그 문맥에 따라 '가다, 오다, 걷다, 떠나다, 나아가다, 계속하다, 지나가다, 행하다, 생활하다, 여행하다, (물이) 흐르다, 추방하다, 파괴시키다, 돌아다니다, 함께 가다, 교제하다' 등 여러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할라크는 특히 다음과 같은 용법들, 즉 명령적인 외침의 용법(창 37:13, 창 37:20, 창 19:32, 창 31:44), 다른 동사의 역할을 확대시키는 부정사로서의 용법(창 8:3, 창 8:5), 다른 동사의 역할을 구체화시키는 한정사로서의 용법(창 27:14, 창 50:18, 왕하 3:7, 사 2:3)에 주목해야 한다. (b) 여러 종류의 '가는 행위'에 대한 구체적 적용은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뱀의 '기어 다님' creeping(창 3:14), 여우의 '노님' prowling(애 5:18), 배의 '항해' sailing(창 7:18), 물의 '흐름' flowing(창 2:14), 나팔 소리의 '커져 감' laying(출 19:19), 사람의 '걸어감' walking(출 14:29) 등이다. 다른 특별한 용법에서, 이 동사는 어떤 것의 끝을 의미하는데, 예를 들면, 비(아 2:11), 이슬(호 6:4), 바람(시 78:39), 슬픔(욥 16:6), 인간의 생명(창 15:2, 수 23:14) 등의 '끝'을 의미한다. (c) 이 단어는 가상적인 신(시 115:7)에 대해 사용되기도 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적용되기도 한다. 비록 신현현에 대한 기사에서는 일반적으로 다른 동사들이 사용되지만 신현현의 문맥에서 분명하게 할라크가 사용된 경우가 적어도 한번은 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창 18:33). 아마도 창 3:8도 역시 신현현의 문맥일 수 있지만 그 분사는 '여호와 하나님' 보다는 콜(음성)에 연결되는 것 같으며, 이때 그 번역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그날 바람결에 동산 전역에 퍼져 가던(going)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 신인동형론적으로 이해할 때, 하나님은 구름 위를 걸으시거나(시 104:3) 하늘에서 걸으신다(욥 22:14). 보다 더 흔하고 더욱 중요한 것으로서, 할라크는 심판이나 축복(삼하 7:23, 시 80:2), 특히 광야 방황 동안에(예. 출 33:14, 출 13:21) 그의 백성에게 오시는 여호와께 사용된다. 후자의 문맥과 관련하여 새로운 출애굽(사 45:2)을 기억하라. 광야에서 백성들이 하나님의 궤를 뒤따랐듯이 그들은 의식에서 그 뒤를 따른다(드물게 할라크로 표현됨; 참조: 수 3:6, 민 10:32-36). (d) 배교는 그들이 다른 신이나 거짓 신을 '좇는다'(출 32:1, 렘 5:23)거나, 자기 자신의 악한 꾀(렘 7:24, 시 1:1)나 악한 마음(렘 11:8)을 추구하거나 어둠 속에 행하는 것으로(사 9:2 [H1]) 표현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한다(레 26:24). 진실로 경건한 자들은 그들이 행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른다(즉,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 왕상 3:14, 시 119:1 이하). 이 개념은 할라크 만으로도 나타낼 수 있다(체다코트, 사 33:15 등과 같이 단어 아하레와 함께 쓸 필요가 없다). 히트파엘형은 이와 관련하여 동작의 연속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다.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산 사람들의 좋은 예로는 에녹, 노아, 아브라함 등이 있다(창 5:22, 창 6:9, 창 17:1). (참조: L. J. Coppes;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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