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가 6장.....[412.내영혼의그윽히깊은데서][436.나이제주님의새생명얻은몸] [438.내영혼이은총입어] ...하나님께로더가까이...내맘속에있는참된이평화는....주내소망은주더알기...주께가까이날이끄소서...주품에품으소서...거룩한곳에서게하소서..내아버지그품안에서..원하고바라고기도합니다..완전하신나의주...내게로부터눈을들어...따스한성령님
1. 여자들 가운데에서 어여쁜 자야 네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네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아갔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술람미의 고백적 증언 진술에 매혹된 예루살렘 여자들<어린 믿는이들>도 감동 받고 함께 추구하리라 다짐하고 있음. 2. ○[다른 이들에게 도움 요청 증언 중에 문득 그분의 임재와 발자취, 움직이심에 대해 새로이 깨닫게 되는 술람미!!]내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그분의 동산인>그녀 및 <그분의 향기로운 모든 꽃밭들인>다른 모든 믿는 이들의 영 안에 친히 계시면서 그분의 양떼를 먹이시면서 그분을 신뢰하는 순수한 이들<백합화둘>을 모으고 계심을 돌연히 깨닫게 됨...진실로 그분의 동산인 영 안에 사는 믿는 이마다 그들의 영은 온갖 아름답고 영적이고 신성하고 하늘에 속한 것들을 자라게 하는 동산이 되는 바, 그것들은 그분께 달콤한 것들이다 3. [이제, 돌연히 깨달은 바, 곧 2:16의 고백보다 감동과 깨달음은 한층 더 깊어지고 성숙-풍성한 생명의 믿음 가운데서 고백하고 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그 양 떼를 먹이는도다 4. ○내 사랑아 너는 디르사[=이스라엘의 왕궁이 있는 왕도의 다른 이름,,왕상14:17, 15:21, 16:23..왕이신 Q의 성소, 곧 Q의 거처를 상징하는 긍정적 의미로 언급하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 그 안에 있는Q의 거처인 성소를 지칭하는 단어] 같이 어여쁘고, 예루살렘 같이 곱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하구나....연인이신 구주께서 그녀를 이처럼 칭송하는 것은, 그녀가 하늘에 속한 성소와 하늘에 속한 예루살렘이 된 것이 그녀가 원수들을 이긴 것에 근거한 것임을 가리킴......오직 이기는 자가 되어야만 휘장 안에서 살 수 있기 때문.. ---구주의 이기는 연인이 Q과 하나되어 Q의 거처가 될 때, Q보시기에는 그녀는 디르사 만큼이나 아름답고 예루살렘 만큼이나 사랑스럽다. 그러나 원수에게는 마치 깃발 든 군대만큼이나 두려운데, 깃발은 싸울 준비 완료를 가리키며 또한 승리를 거두었음을표시하기도 한다....두려운 군대는 주님의 이기는 자들이 Q의 원수인 사탄을 두렵게 하며, 한편으로는 Q의 백성의 눈에도두렵게 되었음을의미한다. 이 군대는 Q의 백성이 타락했을 때 Q의 왕국을 위해 싸우며 주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이기는 이들이 되기 때문이다..(계2:7, 11, 17, 26, 3:5, 12, 21)..결국 이기는 이들은 단체적인 신부가 되어 구주와 결혼할 것이요(계19:7-9...어린양의 혼인잔치), 결혼식 후에 이 신부는 군대가 되어서 남편이신 구주를 따라 싸워 적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추종자들을 패배시킬 것이다.(계19:11-21)....그분은 그분을 추구하는 그녀를 칭송하시며, 그녀를 하늘 성소만큼이나 아름답고 하늘의 예루살렘 만큼이나 사랑스럽다고 말씀하고 계심. 이는 그분의 연인인 그녀가 부활 안에 있는 새 창조물로서 그리스도의 승천 안에 삶으로서 그리스도의 생명 풍성 안에서 성숙하여 그분께 동산(아4:12-5:1, 6:2)이 되었을 뿐 아니라 Q의 건축물(창2:8-12, 18-24, 고전3:9-12) 곧 Q의 성소와 그 보호처가 되었음을 가리키며, 더 나아가 그녀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한 후 삽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승천을 체험하면서 휘장 안에 있는 지성소 곧 하늘에 속한 내실 안에 지금 살고 있음을 가리킴.[[아가서, 생명과 건축 방면에서 추구-누림 체험의 내적 단계들]] ***그리스도께 동산이 되는 것은 구주의 생명 요소 안에서 이 생명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으로 성숙에 이르도록 성장하여 건축됨을 의미.(=그리스도의 몸의 건축과 연관됨..엡4:12-16).....Q의 건축물은 구약에서는 디르사와 예루살렘으로 예표되고 있으며,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유기적 인 몸, 곧 교회이다.....그리스도의 몸은 또한 그분의 아내(엡5:25-32)인데 궁극적으로 이 유기적인 몸의 건축은 지성소의 완결인 거룩한 성, 곧 영원 안에서 Q과 그분께서 구속하신 백성의 상호거처인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될 것(계21:2-3, 16, 22)..... ***비록 Q의 성소는 하늘들에 있지만, 그것은 우리의 육체를 표징하는 휘장(히9:1-5, 12, 24, 10:19-20)에 의해 두 부분 , 곧 바깥 부분인 성소와 Q께서 거하시는 곳인 지성소로 나뉜다.....그리스도와 관련하여 Q의 성소에 있는 휘장은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찢어졌으나(마27:51), 믿는 이들과 관련하여 그 휘장안 Q께서 그분을 추구하는 이들을 온전하게 하시어 그들이 지성소인 그분 안에 거함으로써(계21:22) Q과 하나되게 하시려 여전히 남아 있다....사도 바울은 구주 생명 안에서 성숙하여 구주의 승천 안에서 살았지만, 여전히 Q은 사탄의 전달자를 통하여 그의 육체에 가시가 있게 하심으로써 그가 너무 (스스로)높아지지 않도록 하셨다(고후12:7)......Q의 경륜에 따르면, 아무리 성숙하고 영적인 사람이 되었다고 할 지라도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는 한, 우리의 몸이 변형되기 전까지는(롬8:23, 빌3ㅣ21) 우리에게 여전히 육체 곧 휘장이 남아 있다. 따라서 우리가 Q의 창조물로서 그분의 부활을 체험한 후에도 우리의 육체를 처리하는 보다 분명한 십자가의 체험을 통하여 휘장 안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궁극적인 부름이 여전히 필요하다. 우리는 매일 십자가의 처리를 체험함으로써 휘장 통과하기를 배울 필요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휘장 안에 곧 지성소 안에 살게 될 것이다.===> ***지성소 안에 곧 완결되신 TUQ 그 안에 사는, 구주를 추구하는 모든 이들이 감추인 그리스도를, 지성소의 언약궤(히9:4) 안에 감추어져 있는 그분의 감추인 생명 공급(금 항아리 속의 만나로 표징됨..출16:32-34, 계2::17)과 부활 생명(싹 난 막대기로 표징됨..민17:1-11)과 내적인 생명의 법(언약의 돌판으로 표징됨..출25:16, 31:18, 신10:1-5, 렘31:33)으로 충만히 누리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이것이 이 책에 제시된 그리스도의 연인의 체험에서 가장 높은 단계이다...**그러나,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구주와 결혼한 바, 구주의 우주적 몸의 원칙따라 새예루살렘의 (연합한 하나됨 위해 자원함의 희생-손실 감수하는)지체됨에 대한 인식 안에 머무름까지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함 5. 네 눈이 [성령으로 인해 길들여진, 단일/순전함 + 통찰력 충만한(타인은 감지할 수 없는), 그 끌어들이는 매력으로 인해 너무 아름답고도 사랑스러워서 결코 눈을 뗄 수 없도록,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만드는 바]나를 놀라게 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절대 긍정보다 더 강한 강조적 의미의 반어적 표현임] 네 머리털은[=Q의 먹이심/양육 통해 갖추게 된 복종/순종의 아름다움]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고 6. 네 이는[=십자가로 처리 받고 정결케 하시는 그 영의 씻음으로 깨끗하게 된 바] 목욕하고 나오는 암양 떼 같으니 [두 배로 강화되고 균형-조화-질서 잡힌 바]쌍태를 가졌으며 [영적 열매/자녀/새끼는 입술에 머금은/보유한 바 말씀의 영적 능력의 상징]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구나 7. [구주의 구속과 그분의 권위에 합당한 언사는 진홍색 실과 같은 입술의 아름다움임..수2:21, 마27:28-29] 너울 속의[감추인 바] 네 뺨은[=속 생명의 어떠함 표현] 석류[=활력 충만/가득한 구속하는 생명 넘침] 한 쪽 같구나 8. [많은 다양한 믿는이들의 사랑을 받으시는 바]왕비가 육십 명이요 후궁이 팔십 명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9.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그분의 유일한 연인, 사랑/온전한 이, 어머니인 은혜로 거듭난 귀하고 귀한 이로 여기시는 바..갈4:26] 하나뿐이로구나 그는 그의 어머니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가 귀중하게 여기는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비와 후궁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10. ○[승천 안에서, 휘장 안에서의 삶을 통하여 구주의 십자가를 더 분명하게 체험함으로써 해-달, 곧 천체처럼 절대적으로 하늘에 속한 자가 되고 이기는 자로서 합당한 변화 이루었음을 의미...빌2:15, 마13:43, 계12:1, 5]아침 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한 여자가 누구인가....구주 연인의 이기는 단계들은, 첫단계는 구주께 매혹됨 통해 세상 유혹을 이김(아1:2-2:7)..둘째 단계는 구주 십자가와 하나됨으로써 구주로부터 그녀를 격리/분리시키는 자아를 이김(아2:8-3:5), 셋째 단계는 구주 부활과 구주 승천 안에 삶으로써 옛창조물(물질적 삶)을 이김(아3:6-5:1), 넷째 단계에서는 휘장 안에서 삶으로써 타고난, 옛사람을 이긴다.(아5:2-6:13) 11. ○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 내가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을 때에....구주께서 그러하심처럼, 술람미(=평화...**이는 신격에 있어서는 아니로되!!, 생명-본성-기능-표현에 있어서 구주을 닮음, 그분의 복사판/배필/그리스도의 재생산이 됨에 이르게 하는 바), 그녀 또한 (내주하시는) 그 영의 인도따라 연인으로서 마땅한 그녀 자신의 동산과 과수원을 돌보는 일에 관심 두고 있음..(([440. 어디든지 예수 나를 이끌면])) 12. 부지중에[(이제는 무의식 중에서도!!...그녀의 무의식의 영역조차도 점유하고 그 가운데 움직이시는)그 영을 따라, 그 이끄심따라 그녀의 전진하는 신속한/망설임 없는 발걸음은 구주를 빼어닮고 반영/반사하며 그분을 공급하는 통로됨과 그분께로, 그분의 이기는 군대요 배필 됨 그 안으로 나아가고 구비 되게 하는 바...고후3:18, 롬8:29] 내 마음이 나를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에 이르게 하였구나 13.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가 [구주 빼어닮음에 이르른!!...이제 우주적 부부의 하나됨, 곧 구주와 구주의 연인인 그녀는 부부로서 새 예루살렘을 나타냄..]너를 보게 하라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에서[=(승리를 자축하며 춤 추는, 넉넉히 이기며 정복함을 자축하는...롬8:37) 두 군대, 증거하는 두 진영의 확실한 증인 됨,..이는 이제 술람미가 홀로 있는 것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의 원칙을 따라 우주적 교회의 지체됨 그 원칙 안에 있음을 의미..,창32:1-10]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마하나임의 두 군대....이중/삼중적 의미> 신성(천사의 무리)과 인성(성도의 무리)의 조화-균형 이룸을 축하하는 잔치로서의 춤추는 무리들.., 또는 (육적 자아)옛 사람과 (성령 따르는, 영적 자아인)새 사람의 전쟁/대치상태였으나, 이제는 성령을 따라 육에서 영으로 전진해 나아감의 도상에서 이기는 소망 누리고 있음 ====== 아가 6장 [현대인의성경] 1. 예루살렘 여자들: 여자 중에 가장 아름다운 미인이여, 너의 사랑하는 님이 어디로 갔는가? 그가 어느 길로 갔는지 말해 다오. 우리가 너와 함께 찾아보겠다. 2. 여자: 내 사랑하는 님은 향나무가 자라는 자기 정원으로 내려가 동산에서 양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따는구나. 3. 님은 나의 사랑, 나는 님의 사랑, 그 님이 백합화 가운데서 자기 양떼를 먹인다네. 4. 남자: 나의 사랑하는 님이여, 그대는 디르사처럼 아름답고 예루살렘처럼 사랑스러우며 기를 높이 든 군대처럼 위엄이 있소이다. 5. 그대의 눈이 나를 사로잡고 있소. 눈길을 내게서 돌려 주시오. 그대의 머리털은 길르앗산에서 뛰어내려오는 염소떼 같으며 6. 그대의 이는 이제 막 목욕한 양의 털처럼 희고 하나도 빠진 것 없이 가지런하며 7. 베일에 가리어진 그대의 뺨은 포개 놓은 석류 같구려. 8. 내게는 왕후가 60명이요, 후궁이 80명이며 그 밖에 수많은 시녀들이 있으나 9.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사랑은 하나뿐이구나. 그녀는 자기 어머니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외딸이다. 모든 여자들이 그녀를 보고 복받았다고 말하니 왕후와 후궁들도 그녀를 칭찬하는구나. 10. 새벽처럼 나타나며 달덩이처럼 아름답고 해같이 밝으며 기를 높이 든 군대처럼 위엄 있는 여자가 누구인가? 11. 여자: 내가 골짜기에 새로 돋아난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지 알아보려고 호도나무 숲으로 내려갔었지. 12. 나도 모르게 갑자기 사랑이 그리워 내 백성 가운데로 돌아가고 싶었다네. 13. 예루살렘 여자들: 돌아오라,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여, 우리가 너를 다시 볼 수 있도록 돌아오라, 돌아오라. 여자: 천사들이 춤추는 것을 보려는 듯 어째서 너희가 나를 보고자 하느냐? === Mutual Delight in Each Other (The Chorus) 1 “Where has your beloved gone, O most beautiful among women? Where is your beloved hiding himself, That we may seek him with you?” (The Shulammite Bride) 2 “My beloved has gone down to his garden, To the beds of balsam, To feed his flock in the gardens And gather lilies. 3 “I am my beloved’s and my beloved is mine, He who feeds his flock among the lilies.” (The Bridegroom) 4 “You are as beautiful as [a]Tirzah, my darling, As lovely as Jerusalem, As majestic as an army with banners! 5 “Turn your [flashing] eyes away from me, For they have confused and overcome me; Your hair is like [the shimmering black fleece of] a flock of [Arabian] goats That have descended from Mount Gilead. 6 “Your teeth are like a flock of ewes Which have come up from their washing, All of which bear twins, And not one among them has lost her young. 7 “Your temples are like a slice of the pomegranate Behind your veil. 8 “There are sixty queens and eighty [b]concubines, And maidens without number; 9 But my dove, my perfect one, stands alone [above them all]; She is her mother’s only daughter; She is the pure child of the one who bore her. The maidens saw her and called her blessed and happy, The queens and the concubines also, and they praised her, saying, 10 ‘Who is this that looks down like the dawn, Fair and beautiful as the full moon, Clear and pure as the sun, As majestic as an army with banners?’ 11 “I went down to the orchard of nut trees To see the flowers of the valley, To see whether the grapevine had budded And the pomegranates were in flower. 12 “Before I was aware [of what was happening], my desire had brought me Into the area of the princes of my people [the king’s retinue].” (The Chorus) 13 “Return, return, O Shulammite; Return, return, that we may gaze at you.” ==Footnotes Song of Solomon 6:4 A city in northern Israel known for its gardens and natural beauty. Song of Solomon 6:8 See note Gen 22:24. === 아가 6장 (개요) 본장의 나오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예루살렘의 여인들은 교회가 그리스도께 대해 들려 준 묘사에 감동하여 그를 찾는다(1). 2. 교회는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찾을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가르쳐 준다(2, 3). 3. 자기를 찾아다니던 자들에게 발견된 그리스도는 자기를 탐색하느라 매우 심하게 맞은 자기 신부의 아름다움을 아주 높이 칭찬하고(4-7) 이 여인을 모든 딴 사람들보다 우위에 놓으며(8, 9)그녀의 모든 이웃 사람들에게 그녀를 사랑하고 존경하도록 권장하고 있다(10). 마지막으로 그는 이 여인의 아름다움이 자기에게 아로새긴 감동과 그가 그로 인해 받는 큰 즐거움을 인정하고 있다(11-14). ====== 그리스도에 대한 탐문(아 6:1-3) 여기에 나타난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예루살렘 여자들의 그리스도께 대한 탐문(1절). 그들은 교회에 대한 그들의 높은 평가를 계속 견지하며 여전히 이 여인을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라고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진정한 거룩함은 진정으로 아름다운 까닭이다. 이제 그들은 그리스도께 대한 그들의 생각을 한층 고조시키고 있다.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그를 찾으리라." 만약 아가서를 영적으로 이해하지 않을 경우 이 말씀은 점잖치 못하고 용납할 수 없는 찬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사랑은 경쟁자에게 대해 질투를 하는 것이며 그 사랑의 대상을 독점하고자 하여 타인들이 자기가 사랑하는 자를 찾는 데에 가담하는 것을 원치 않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들은 타인들도 역시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결합되는 것을 바라는 법이다. 아니, 교회의 자녀가 그들의 어머니 되는 교회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대의 의무와 존경에 대한 본보기는 그리스도를 찾는 일에 이 여인(교회)과 합세하는 일이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이 여인이 그를 그토록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데에 궁금증을 느끼고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5:9)고 물었었는데, 이제는 마음이 변하여 그들도 직접 그를 사랑하고 있다. 1. 이 신부는 그를 그림 그리듯 묘사하였고 완전한 점을 보여 주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를 보진 못했을 망정 이 말을 믿기에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를 낮게 평가하는 자들은 그를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말씀과 성 령에 의하여 자신을 영혼에게 드러내실 때에는 그 빛에 의해 그에게 대한 사랑의 불길이 점화되어 타오르게 될 것이다. 2. 이 신부는 그에게 대한 자신의 사랑과 그 사랑 안에서 누리는 자신의 평안을 표현하였고 그것을 뽐내었다.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그녀의 가슴 속에서 타오르던 그 불길이 저들의 가슴에 불똥을 튀겨 불을 붙인 것이다. 죄 많은 욕정이 터져나올 때는 많은 사람들을 불결하게 오염시키지만 어떤 자의 경건한 열정은 "많은 사람을 격동"하게 하는 것이다(고후 9:2). 3. 이 신부는 자기의 사랑하는 자를 찾는 일에 그들의 조력을 요청하였으나(5:8)이제는 오히려 그들이 이 여인의 도움을 구하고 있다. 그들은 이 여인 위를 덮고 있던 구름이 흩어지기 시작하고 하늘이 맑게 개이기 시작함을 알아차렸으며 이 여인이 그들에게 자기의 사랑하는 자를 묘사해 주는 동안에 그의 안에서 얻는 그녀 자신의 위로를 다시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의기소침한 가운데 있는 크리스챤들은 딴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데에서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해 말하는 중에서도 스스로 은혜를 맛보게 되는 것이다. (1) 이제 그들은 그에 대해 묻는다. "너의 사랑하는 자는 어디로 갔는가? 그를 찾으려면 어느 길로 우리의 진로를 정해야 할 것인가?" 그리스도의 훌륭한 점들과 그에게서 받는 유리한 위로를 알게 되는 자들은 그를 찾기 위해 캐물어 보지 않을 수 없으며 그를 어디서 만날 수 있는지 알고 싶어하게 된다. (2) 그들은 그를 찾으러 나선 이 여인과 동행하여 이 여인에게 봉사할 것을 제의한다.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그리스도를 발견하고자 하는 자들은 그를 찾아야 하며 그것도 일찍이 찾아야 하고 부지런히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찾는 최선의 길은 그를 찾는 자들과 연합하여 모두 함께 찾는 것이다. 우리는 성도들과의 교제 속에서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하는 분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다. 그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는 "자기 아버지께로, 그리고 우리들의 아버지께"로 가신 것이다. 그는 우리가 그에게 지향할 수 있는 방법을 알도록 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셨다(요 20:17). 우리는 믿음으로써 그곳에 계신 그를 바라보아야 하며 기도로써 그곳에 계신 그를 찾아야 한다. 우리는 담대함으로 "지극히 거룩한 곳에 들어가야" 하며 거기서 "그를 찾는 존속"과 함께 참여해야 하고(시 24:6) "각처에서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과 같이 행동해야 한다(고전 1:2). 우리는 타인들과 함께 기도해야 하며 또 타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Ⅱ. 이 물음에 대한 신부의 대답(2, 3절). 이 여인은 전에 한 것 같은 호소는 더 이상 하고 있지 않다(5:6). 그 때에는 어디에서 그를 찾아야 할지 몰라서 "그는 가고 없네, 가고 없네" 하고 넋두리를 하였으며 그를 영원히 잃어버리는 게 아닌가 의심하였었다. 1. 그러나 이제 이 여인은 그가 어디에 있는지 매우 잘 알고 있다(2절). "나의 사랑하는 자는 성 중의 길거리나 군중 속에서나 그 소란한 중에서는 찾을 수 없다. 나는 그런 곳에서 그를 찾았으나 허사였다(그의 양친이 "그들의 친척과 친지들 속에서 그를 찾았으나 찾지 못했던 것 처럼."). 그는 은밀하고 한적한 장소인 자기 동산으로 내려 가셨다." 우리가 이 세상의 소요로부터 많이 물러나면 날수록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욱 더 많이 알게 된다. 그는 자기 제자들을 동산으로 보내셔서 자기 사랑의 고뇌에 대한 증인이 되게 하셨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잠긴 동산이요 세상의 개방된 공유지로부터 격리되어 있다. 그 곳은 "그의 동산"이다. 교회는 에덴 동산과 같이 그가 세운 그의 동산이며 그곳을 돌보시고 즐거워하신다. 비록 그는 위에 있는 낙원으로 올라가 계시지만 그래도 그는 땅 위의 자기 동산에 내려 오신다. 그의 동산은 낮은 데에 있지만 그는 그곳을 방문하기 위하여 자신을 낮추시는 데 그것은 놀라우신 낮추심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실제의 행동으로 땅 위의 사람과 함께 거하실 것인가?" 그리스도를 찾아 보려고 하는 자들은 "그의 동산" 곧 교회에서 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거기에 자기 이름을 기록"해 두고 "기념"하시는 까닭이다(출 20:24). 그들은 그가 세우신 규례 속에서 그를 시중하지 않으면 안 되며 그는 그의 말씀과 성례와 기도 속에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하실 것이다. 여기 이 신부의 말은 그리스도께서 5장 1절에 "내가 내 동산에 들어가서" 라고 하신 말씀을 상기시킨다. 이것은 마치 이 여인이 그가 자기 스스로 계신 곳을 내게 말씀해 주셨는 데도 그가 계시지 않는 곳에서 그를 찾으려고 안달을 내며 기진맥진하다니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여자냐!"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우리는 가르침과 위로의 말씀을 이용할 필요가 있을 때면 왕왕 그 말씀을 멀리 하다가, 복되신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그 말씀을 기억하도록 해 주시면 비로소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하여 그토록 간과하였던가 하고 이상히 여기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동산으로 들어오시겠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그를 찾으려면 그리로 가야만 한다. "꽃밭"과 더 큰 동산 안의 작은 "동산"은 개체 교회를 말하며 "땅에 있는 하나님의 회당"(시 74:8)을 가리킨다. "향기"와 "백합화"는 주께서 심으시고 그의 눈에 즐거운 개개의 신자들을 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교회에 내려 오시는 것은 다음 두 가지를 위하심이다. (1) "동산 가운데에서 먹이시기 위하여," 즉 자기 양떼를 먹이시려고. 그는 딴 목자들처럼 야외에서 먹이시는 게 아니라 그의 동산에서 먹이신다. 따라서 그들은 매우 훌륭한 사육을 받게 된다. 그는 오셔서 자기 친구들을 먹이시며 대접해 주신다. 너는 거기에 가면 그를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진수성찬을 차려놓은 그의 식탁과 그 식탁에 진심으로 초대해 주시는 그의 환대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잡수시기 위해서도 오신다. 즉 자기 백성안에 나타내신 자기 은총의 산물을 즐기러 오신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이들에게서 즐거움을 받으시는 때문이다." 그는 많은 동산들을 소유하고 계신다. 즉 그에게는 상이한 크기와 각기 다른 형태의 교회가 많이 있다. 그러나 그 교회들이 그의 것인 한 그는 모든 교회를 먹이시며 그들 중에 나타나시고 그들을 아주 기꺼워하신다. (2) "백합화를 꺾기 위하여." 그는 즐거이 이 백합화를 관상하며 또 그것으로 단장하기를 즐기신다. 그는 백합화를 하나씩 하나씩 따서 자기 한테로 모은다. 저 큰 날에는 그들에 대한 전반적 추수가 있을 것이다. 그 날에는 그가 자기 천사들을 보내셔서 자기의 모든 백합화를 모으시고 그는 영원히 영광과 찬미를 받으실 것이다. 2. 이 여인은 그의 안에서 얻을 자기 자신의 이익을 크게 확신하고 있다(3절).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이 관계는 상호적 관계이고 매듭으로 묶어져 있어서 절대로 풀리지 않는 관계이다. "그는 백합화 가운데서(그 양떼를)먹이시며" 그와 갖는 나의 교제는 그이 안에서 얻는 "내 이익에 대한 확실한 표징이다." 이 여인은 앞에서도 이런 말을 했었다(2:16). (1) 그러나 여기에서 이 여인이 되풀이하는 것은 자기가 자나깨나 이 말씀을 붙들고 놓지 않겠다는 결의를 나타내 보이는 동시에 그의 안에서 얻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즐거움과 만족을 보이려는 데에 있다. 이 여인은 자기가 선택한 것을 너무나 좋아하며 바꿀 수가 없었다. 하나님과 갖는 우리의 교제는 그와 맺은 우리의 언약을 빈번히 새롭게 하고 그 언약을 기뻐함으로써 매우 잘 유지되고 계속된다. (2) 이 여인이 이 말씀을 반복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은 그녀가 자기의 사랑하는 자에게 불친절한 행동을 했던 때문이었고 또 그녀의 그런 행동 때문에 그는 정당하게 그녀에게 물러 나셨으므로 계약을 새로이 맺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 새로운 계약은 신자들의 실수와 그리스도의 찡그리심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와 신자들간에 굳게 맺어진 채 계속되어 간다(시 89:30-35). "나는 나의 의무를 행함에 있어 부주의하고 부족하였지마는 그래도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의 것입니다." 이것은 언약 안에서 저지른 모든 허물을 우리를 언약 밖으로 내동댕이 치질 않는 때문이다. "그가 내게서 그의 얼굴을 숨기시고 그의 위로를 내게 거부하신 것은 지당합니다. 그러나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나의 것입니다." 견책과 징벌은 언약의 사랑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언약의 사랑에서 유출되기 때문에 이같은 고백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3)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충분한 확신을 갖지 못하는 때에도 우리는 그에게 충실히 집착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나는 내가 줄곧 인식해 오는 위로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리스도께 속하였다는 이 사실에 집착하렵니다." (4) 이 여인은 전에도 같은 말을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 순서를 뒤바꾸어 자기 안에서 얻는 그의 연고권을 먼저 주장하고 있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그에게 전적으로 바쳐진 것이며 봉헌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에게서와 그의 은혜 안에서 누리는 자신의 이익을 말하고 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행복합니다. 그의 안에 있으면 나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에게 속하였다는 것을 우리 자신의 마음이 우리에게 증언할 수만 있다면 그가 우리에게 속한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전혀 없다. 그리스도께서 계약을 깨뜨리는 적은 없기 때문이다. (5) 전에 처럼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자기 양떼를) 먹이신다"는 것은 이제 그녀의 위안이 되었다. 그가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우리가 우리 솥의 밥을 먹고 사는 자들과 함께 사귀듯 그가 자기의 백성들과 자유로이 교제하신다는 사실은 그녀의 위안이 되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은 그가 물러가셨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와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나는 내 얼굴의 건강이 되시며 내 하나님이 되신 그를 찬양하리로다." -----------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아 6:4-10) 이제 우리는 자기 신부에게로 은혜로이 돌아오신 그리스도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스스로 멀리하셨던 신부에게로 돌아 오셔서 그녀와 담소하고자 하시며(왜냐하면 그는 이 여인에게 말을 걸고 있고 그녀로 하여금 "기쁘고도 반가운 말을 듣게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여인에게 은총을 입히고자 하시는 것이다. 그가 이 여인의 모든 불친절을 용서하시고 다 잊어버리셨음은 그가 이 여인에게 매우 다정하게 또 매우 경의를 표시하면서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Ⅰ. 그는 이 여인을 참으로 사랑스럽다고 선언한다(4절). "오! 내 사랑아! 너의 어여쁨은 디르사 같구나." 디르사는 므낫세 지파의 한 도시로서 그 이름은 "즐겁다" "기뻐 받을 만하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그 성읍이 매우 행복한 상황에 있었음과 그 물건은 매우 아름답고 고른 수준에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너의 고움은 예루살렘 같구나." 예루살렘은 "조밀한 성읍"으로서(시 122:3) 솔로몬이 건축하고 미화시킨 도성이며 "온땅의 기쁨"이 되는 도시였다. 이 세상에 그러한 도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 세상의 명예(세상이 그렇게 생각하든 않든 간에)가 되었다. 그것은 거룩한 성이었다. 또 바로 그 점이 그 성의 아름다움 중 가장 뛰어난 아름다움이었다. 교회가 이 예루살렘에 비유되는 것은 적절하다. 교회는 예루살렘으로 표현되었고 상징되었던 것이다. 복음 교회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갈 4:26)이요, "하늘 나라의 예루살렘"이다(히 12:22). 하나님께서는 그 안에 "그의 지성소"를 두고 계시며 특별하신 모습으로 임재하신다. 그는 그곳에서 발해지는 찬미의 예물을 받으신다. 그곳은 그의 영원한 안식처이다. 따라서 그것은 "예루살렘과 같이 곱고," 그러므로 "그 엄위함이 기치를 벌인 군대 같다." 적절히 행사되는 교회의 책망은 인간의 양심에 두려움의 일격을 먹인다. 말씀(교회의 병기가 되는)은 모든 "생각들을 쳐부순다"(고후 10:5). 그래서 불신자조차 거룩한 율례의 장엄함에 의해 판단되고 심판을 받게 된다(고전 14:24, 25). 성도들은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요 15:4). 아니, 그들은 야곱같이, "하나님과 더불어 힘을 가지며, 겨루어 이긴다"(창 32:28). Ⅱ. 그는 이 여인과 사랑에 빠진 자신을 인정하고 있다(5절). 그가 비록 잠시 동안 조그마한 분노로 자기 얼굴을 가리셨었으나 이제는 "영원한 자비"의 매우 놀랄 만한 사례들로써 이 여인을 거두어 들이신다(사 54:8). "네 눈을 내게로 돌이키라"(그렇게 해석하는 이도 있다). "믿음과 사랑의 눈을 돌이켜 나를 향하라. 이는 저들이 나를 높이 쳐들음이라. 나를 쳐다보고 위로를 받으라."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의 눈을 우리에게로 돌이키시도록 그를 부를 때 그는 우리의 복종의 눈을 자기에게로 돌이키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우리가 읽는 본문은 사랑의 표현치고는 이상하다. "네 눈을 돌이켜 나를 보지 말 것은 내가 그 광채를 견딜 수 없음이라. 네 눈이 나를 아주 압도하였으니 지나간 모든 것은 간과할 수밖에 없구나."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이스라엘을 위해 중재하였을 때 그에게 "나대로 하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굴복할 수밖에 없노라"(출 32:10)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정열적인 연인의 표현을 차용하시고 즐거워하심은 오직 긍휼이 많으신 구세주의 자애로우심과, 그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자들과 그의 은혜의 역사하심 속에서 그가 얻으시는 즐거움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Ⅲ. 그는 그가 이전에 이 여인의 아름다운(4:1-3) 머리털, 이, 뺨(5-7)에 대해 표현했던 묘사를 부분적이긴 하지만 거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반복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딴 말로나 다른 비유로써 묘사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 여인의 불친절한 행위와 그가 이 여인에게서 따나갔었던 일 뒤에도, 자기는 이 여인에게 대해 이전과 조금도 다름없는 평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비록 그가 이 여인을 완전히 차 내던져 버리진 않았으나 이 여인이 그의 진의를 오해할까봐, 즉 그가 그녀를 알고 지내는 동안 더욱 더 그녀를 나쁘게 생각하는 줄로 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는 자기가 했던 말을 이제 또 다시 이 여인에게 말해 주고 있다. "많은 것을 용서받은 자들은 더욱 많이 사랑할 것이며" 따라서 더욱 많은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사랑하는 자를 나도 사랑하노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는 자기 백성이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진심으로 회개하고 자기들이 의무를 복귀하면 그들을 즐거워하시며 그들이 마치 완전에 도달한 자들인 양 그들을 칭찬하신다. Ⅳ. 그는 이 여인을 모든 경쟁자들보다 우위에 놓고 딴 여인들의 모든 아름다움과 완전함이 이 여인에게서 합류하며 이 여인을 중심으로 모이는 것을 보게 된다(8, 9). "왕후가 육십이다(이것은 있을 수 있다). 이들은 에스더처럼 아름다움에 의하여 제왕의 신분과 위엄에까지 이르게 된 자들이다. 비빈이 팔십이다. 제왕들은 이 비빈들을 더욱 매력적인 존재로 생각하여 왕후들보다 더욱 총애하였다. 그리고 이들에게 시중을 드는 궁녀들, 즉 시녀들은 무수하다. 궁중에 무도회가 열릴 때는 이 시녀들이 휘황찬란하게 등장하는데 그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눈을 어지럽게 한다. 그러나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오직 하나뿐이니 곧 거룩한 자이다." 1. 이 여인은 그 모두를 능가한다. 온 세계를 다 돌아다니면서 스스로 현명하며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무리를 살펴 보아라. 나라, 궁정, 국회, 추밀원, 그 밖에 너희가 가치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그 어떤 단체에 가보더라도 그리스도의 교회와 짝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들의 명예와 아름다움도 교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이스라엘이여! 너와 같은 자가 누구이뇨"(신 33:29; 4:6, 7). "무수한 시녀들"처럼 그 재능으로나 솜씨, 언어, 행동거지의 아름다움으로 뛰어난 사람들도 있으나 거룩한 아름다움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녀는 단 한 가지 아름다움만 갖고 있으니 그것은 곧 그녀가 비둘기라는 것, 더렵혀지지 않은 순결한 비둘기로서 나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 점이 그녀로 하여금 그토록 많은 왕후나 시녀를 능가하게 만든다." 2. 이 여인은 그 모두를 다 포괄한다. "딴 왕들은 많은 왕후와 비빈들과 시녀를 거느리면서 그들과의 교제를 즐기지만 내게는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가 그들을 대신하고 있다. 다른 여러 임금들이 그들의 왕후, 비빈, 시녀들에게서 얻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나는 단 하나뿐인 그에게서 얻고 있다." 혹은 "비록 많은 개체 교회들이 있어서 어떤 교회는 더 큰 위엄을 보이는가 하면 어떤 교회는 덜 엄숙하고 어떤 교회는 더 오래 서 있는가 하면 어떤 교회는 더 짧게 서 있기도 하고, 또 많은 개개 신자들 중에는 서로가 다른 은사와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더러는 보다 저명한 자들이 있는 반면에 덜 유명한 자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부가 하나의 공통된 교회(catholic church)를 구성하고 있으며 그들 모두가 전체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그것은 바로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이다." 그리스도는 단일화된 교회의 구심점이요 중심이다. 널리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을 그에 의하여 거둬 들여지며(요 11:52) 그에게서 합류되고(엡 1:10) 전부가 다 그의 비둘기들이다. Ⅴ. 그는 이 여인이 자기에게서 뿐만 아니라 이 여인을 알고 이 여인과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자들에게서도 얼마나 존중을 받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다음과 같은 사실은 이 여인의 칭송에 보탬이 된다. 1. 이 여인은 그 어머니가 애지중지하는 딸이었다. 이 여인은 어릴 적부터 부모의 각별한 애정을 받을 만한 점이 있었다. 솔로몬 자신도 "그의 어머니가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잠 4:3)이었다고 하는데 이 여인도 그와 같이 "그 어머니의 외딸"이었다. 마치 이 여인 혼자만 있었던 것처럼 귀염을 받았고 설사 그 외에 많은 자녀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 여인은 "그 낳은 자가 귀중히 여기는(가려 뽑은)자" 였다. 즉 교회는 이 세상이 여지껏 배출해 낸 그 어떤 인간의 집단보다 더 훌륭하며 귀중한 선택 사회이다. 그리스도께서 판단하시기로는 이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모든 영광도 교회와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교회는 "온 땅의 뛰어난 자들"과 "정금에 비유할 수 있는, 시온의 귀한 아들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이웃 사람들보다 월등히 뛰어난다." 2. 이 여인은 자기를 아는 모든 자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녀보다 연소한 "딸들"(우리 성경에는 "여자들"로 번역)이 그녀를 찬미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연적으로서 질투함직도 한 "왕후와 비빈들"까지도 그녀를 칭찬하였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여인을 복되다"고 하였으며, 이 여인의 행복을 빌어 주었고 "칭찬하였으며," 이 여인에 대해 좋게 이야기하였다. "예루살렘 여자들"(딸들)은 이 여인을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여자"라고 불렀다. 모든 사람이 이 여인에게 최고 미인의 칭호를 붙이는 데에 이의가 없었으며 모든 곡식단은 이 여인의 단에게 절을 하였던 것이다. (1) 사물에 대해 정확한 감각을 가지는 자들이라면(사람들이 무어라고 말하든지 간에) 경건한 사람들이야 말로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을 양심상 확신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찬사를 던질 것이며 그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자들은 더욱 많을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이 자기 교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며 어떤 평을 하는지를 주지하신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에게 명예를 돌려 드리는 자들은 아주 기쁘게 여기시며, 반면에 자기 교회와 백성들을 멸시하는 자들은 나쁘게 생각하신다. 특히 교회가 의심을 받고 있을 때 "그의 소자 중 하나라도 실족케 하는"자는 그의 노여움을 입는다. Ⅵ. 그는 이 여인에게 들려 준 찬사를 끄집어 내서 자기 자신의 말로 삼고 있다(10절)."아침 빛같이 뚜렷한 이 여자는 누구인가?" 이 말씀은 이 세계의 교회에 적용할 수도 있고 심령 속의 은혜에도 적용할 수 있다. 1. 그들은 모든 가시적 사물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처럼 사랑스럽다. 크리스챤은 세상의 빛이며 또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메시야의 약속이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고 "새벽빛(여명)이 높은 데서부터" 이 흑암 세상을 찾아 오자 구약의 족장 교회는 "아침 빛 같이 뚜렷하게 되었다." 유대 교회는 "달같이 아름다왔다." 의식 율법은 불완전한 빛이었다. 그것은 반사에 의해서 빛을 비췄을 따름이다. 그것은 달과 같이 변하고 있었고 낮을 이루지 못하였다. 아직까지 의로운 태양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기독 교회는 "해처럼 뚜렷하여" "흑암 중에 앉아있던 자들에게" 큰 "빛"을 비추고 있다. 혹은 우리는 이 말씀을 은혜의 나라 즉 복음 왕국에 비할 수 있다. (1) "복음 나라가 떠오르매 그것은 캄캄한 밤이 지난 뒤의 아침처럼 보인다." 그것은 드러나는 것이며(욥 38:12, 13), 매우 받아들일 만하고 밝은 아침처럼 즐겁게 "보인다." 그러나 시작할 때는 그것이 매우 작아서 처음에는 거의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이다. (2) 복음의 나라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지만 "달 같이 아름답다." 달은 태양에서 빌려온 빛으로 빛나며 차고 기우는 것이 있고 월식이 있으며 또한 어두운 점도 있다. 만월이 된다해도 달은 밤으로만 다스린다. (3) 그러나 그 나라가 영광의 나라로 완전하게 될 때는 "해처럼 밝을" 것이며, "교회는 해로 옷입을"것이고 "의로운 태양"이신 그리스도로 옷 입을 것이다(계 12:1).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그 때에 "힘차게 돋는 해 같이" 될 것이다(삿 5:31; 마 13:43). 그들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영광 중에서 빛날 것이며 완전한 것이 그 때에야 올 것이다. 그 때에는 어두움도 없을 것이요 점도 없을 것이다(사 30:26). 2. 교회와 신도의 아름다움은 사랑스럽기만 한 게 아니라 "기치를 벌인 군대 같이 엄위롭다." 이 세상에 있는 교회는 "군대 같고" 광야에 세웠던 이스라엘의 군영 같다. 교회는 교전 중인 상태에 있다. 교회는 원수들의 한 가운데에 있으며 그들과의 항구적인 투쟁에 기여하고 있다. 신도들은 이런 군대의 병사들이다. 그 군대에는 "기치"가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기호(사 11:12)이며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군대의 기(아 2:4)이다. 그 군대는 정렬되어 있으며 질서를 지키고 규율있게 행동한다. 그 군대는 그 대적들에게는 광야의 이스라엘이 그 주변 민족에게 공포감을 안겨 주었던 것과 같이 두려운 존재다(출 15:14). 발람이 지파를 따라 기치를 세우고 군기를 나부끼면서 포진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보았을 때 그는 "야곱이여! 네 장막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라는 말을 하였던 것이다(민 24:5). 교회가 자신의 순수성을 보존할 때는 자기의 명예와 승리도 안전하게 보장된다. 교회가 "달같이 아름답고" "해처럼 밝을" 때는 그것은 참으로 크고 두려운 존재인 것이다. -----------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의 화해(아 6:11-14) 그리스도는 이제 자기 신부에게로 돌아 오셨고 불화는 완전히 해소되었다. 이 여인들 간의 반목은 이제 사랑을 새롭게 만들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거리감에 대해서와 화해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Ⅰ. 그가 자기의 신부된 교회로부터 물러가시는 때에도 그는 자기 동산으로서의 교회로부터 자기 눈을 떼신 적은 없었고 그 교회를 돌보셨다(11절). "나는 골짜기의 푸른 초목(혹은 열매)을 보려고, 즉 나의 소유가 되는 그들을 보려고 만족과 염려로써 호도 동산(혹은 육두구 동산)으로 내려갔노라." 그가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도 그는 동산 밖으로 멀리 나간 게 아니라, 낮고 어두운 골짜기에 있는 동산의 나무 사이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 때에 그는 "포도나무가 어떻게 순이라도 났는가"를 살피고 있었으니 이는 그가 포도나무의 발육을 촉진시키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해 주고자 함이었고, 사람이 열매 많이 열리는 정원을 즐거워하듯 주렁주렁 달린 포도나무를 통해 기쁨을 얻기 위함이었다. 그는 또한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를 알려고 갔다. 그리스도께서는 영혼 속에서 역사하는 은혜의 선한 작업이 맨 처음 어떻게 시작하는지 관찰하시며, 독실한 애정과 경건한 성향이 영혼 속에서 이른 시기에 봉오리를 맺는지를 살피시고 우리가 봄에 피는 꽃을 보고 즐거워하듯 그것을 아주 기뻐하신다. Ⅱ.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것으로 오래 만족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자기에게 대한 이 여인의 애도와 자기를 향한 사모 때문에 초췌해진 이 여인에게 감동되었던 것인지, 자기의 신부된 교회에게로 돌아가고픈 강렬하고도 항거할 수 없는 충동이 별안간 자기의 흉중에서 소용돌이침을 느끼게 되었다(12절). "부지 중에 내 마음이 나로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 이르게 하였구나. 나는 더 이상 멀리서 있을 수가 없었다. 후회하는 마음이 불현 듯 일어나서 나는 내 사랑, 내 비둘기의 품으로 당장 돌아가려고 작정하였노라." 요셉도 자기 형들의 이전 비정함에 대해 징벌하고 그들의 현재 성질을 시험하고자 하여 잠시 동안은 형제들에게 남인 듯 시치미 뗄 수가 있었다. 그러나 급기야는 더 이상 자신을 억제할 수가 없어 혹은 "의도적으로" 눈물을 흘리고 울음을 터뜨리면서 " 내가 요셉이요" 하고 말하였던 것이다(창 45:1, 3). 그리고 이제 이 신부는 다윗처럼(시 31:22)깨달음을 얻는다. 비록 이 여인이 "경겁 중에 말하기를" "내가 당신의 목전에서 끊어졌나이다" 하였으나 그가 즉각 "이 여인의 간구하는 소리를 듣고" 아름다움과 빠른 속력으로 유명한 ammi nadib, "즉 내 귀한 백성의 수레처럼" 되었다는 사실을 이 여인은 깨닫게 되었다. "내 마음이 나로 나의 즐거워하는 백성의 수레 가운데 이르게 하였구나(이렇게 해석하는 자도 있다). 그 수레는 저들이 나를 데려오기 위하여, 보낸 수레로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수레요 저희 소원과 기도와 기대의 수레이며 불말이 끄는 불병거와 같은 것이다." 1. 그리스도의 백성은 기꺼이 행하는 백성이며 또한 기꺼이 행하려는 백성이 되어야만 한다. 2. 그리스도께서 물러가시는 듯이 보이는 때에라도 저들이 계속하여 그를 찾으러 계속 그를 동경한다면 그는 적당한 때에 은혜로이 돌아오실 것이다. 아마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빨리 돌아오셔서 그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동시에 즐겁게 해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를 부르러 보낸 수레는 빈 수레로 돌아오는 법이 없는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은혜로운 보답은 전부가 다 그리스도께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그의 백성의 수레에 태우는 주최자는 그들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의 마음이다. 그는 자신이 은혜롭고자 원하시기 때문에 은혜로우시며 자기의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기를 바라시는 까닭에 그들을 사랑하신다. 그것은 저희들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Ⅲ. 이 여인에게로 돌아온 그는 이 여인이 실망 중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로 돌아올 것을 친절히 권유한다. 이 여인은 이런 거리감이 생기기 전에 받던 만큼 많은 위로를 얻기는 어렵다고 절망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녀는 자기 사랑이 돌아오는 위로를 받아야 한다(13절).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보자. 1. 교회는 "술람미 여자"로 지칭되고 있다. 이 술람미 여인은 상징적인 신랑, 즉 "솔로몬"을 암시해 준다. 이 여인은 그와의 관계와 그와의 연합을 표시하기 위해서 이러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마찬가지로 신자들도 "그리스도"란 이름에서 유래된 "크리스챤"이란 이름으로 불리운다). 아니면 이 "술람미"란 말은 "수넴" 여인이 "수남미"라고 불리우듯 이 여인의 출생지요 거주지이던 "살렘"을 나타내는 말일 것이다. 천국은 성도들이 태어나서 그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살렘이다. 그리스도께 속하고 하늘 나라에 속하는 자들은 "술람미 여인"으로 불리워야 할 것이다. 2. 이 여인은 돌아오도록 초대를 받고 있다. 더욱이 그 초대는 극히 간곡되게 강조되어 "돌아오고 돌아오라"를 두 번이나 반복한다. "돌아오고 돌아오라, 네가 잃어버리고 몰수당했던 평안을 회복하라. 네가 이전에 누리던 마음의 평정과 쾌활함으로 되돌아오라." 선량한 크리스챤이라 하더라도 그 위안을 교란당하고 나면 때로 진정하기 어려울 때가 있으며 그들의 평안으로 되돌아 오도록 간곡한 타이름을 받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반역하는 죄인들에게 "너는 돌이키라. 너는 돌이키라. 어찌하여 네가 죽으려느냐?" 하면서 몇번이고 부를 필요가 있듯이 동요를 일으키고 있는 성도들에게도 "너는 돌이키라. 너는 돌이키라. 어째서 네가 약해지려느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느냐?"고 재삼 재사 외칠 필요가 있다. 3. 이 여인이 돌아오고 난 뒤 그녀의 얼굴을 보여달라고 요구된다.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 더 이상 상주처럼 얼굴을 가리우고 다니지 말라." 하나님과 화해한 자들은 "흠없는 저희 얼굴을 들어라"(욥 22:26). 그들은 그의 은혜로운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의 유쾌함과 겸손한 신뢰를 기뻐하시며, 그들이 명랑한 표정을 짓기를 원하신다.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 나뿐만 아니라 거룩한 천사들도 너를 보게 하라. 거룩한 천사들은 죄인의 회개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위로도 즐거워한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여인들도 너를 보게 하라." 그리스도와 신도들은 교회의 아름다움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4. 이 여인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 짤막하게 설명되고 있다(우리 성경과 다른 표현으로 되어 있다). "너희가 술람미 여자 한테서 무엇을 보려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그것은 마치 두 개 군단의 사귐과 같다"란 대답이 나오고 있다. (1)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을 이 여인의 자기 자신에 대한 설명으로 생각한다. 이 여인은 자신의 출현을 부끄러워하며 자기의 모습을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녀의 생각으로는 자기가 모양도 없고 맵시도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여인은 어떻게 말하는가! "너희가 술람미 여인에게서 무엇을 보려느냐? 너희가 볼 만한 가치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너희가 볼 수 있는 것은 실제로 전투중인 두 개의 군대 같은 것밖에 없다. 그같은 전장에서는 유혈과 살육밖에는 볼 수 없다." 이 여인은 파수군들에게 맞아 상처를 입고 그 얼굴에 부상당한 흔적을 남긴 채 돌아와 마치 전쟁이라도 한 듯이 보였었다. 이 여인은 "내가 거무스럼하다고 해서 흘겨보지 말아라"고 말했었는데(아 1:6), 여기서는 "내가 피투성이이므로 나를 쳐다보지 말아라"고 말하는 것이다. 혹은 이 말씀은 신도의 영혼 속에서 은혜와 부패케하는 것 사이에 일어나는 항구적 투쟁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들은 영혼 속에서 "두개의 군대처럼" 끊임없이 투쟁하며 소강 상태를 이루고 있어서 이 여인이 얼굴을 보이기를 부끄러워하도록 만든다. (2) 또 딴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이 여인의 애인이 이 여인에 대해 하는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너희가 술람미 여인에게서 무엇을 볼 것인지 말해 주리라. 너희는 두 개 대군 혹은 같은 군대의 두 부대가 대오를 벌이고 있는 것과 같은 고귀한 장면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기치를 든 군대같을 뿐만 아니라 앞서 말한 것의 두 배나 되는 장엄한 두 개의 군대같기도 하다. 이 여인은 마하나임 즉 야곱이 보았던 두 군대(창 32:1, 2)같으니, 한 군대는 성도의 무리이요 또 한 군대는 성도들에게 역사하는 천사의 무리이다. 곧 전투하는 교회요, 승리하는 교회가 곧 이 여인의 모습이다." "두 군대"를 보라. 교회는 이 두 가지에서 다 아름답게 나타난다. -------- ##신부[술람미 여인]에 대한 교회의 반응 2 가지 (아 6:13 상.-하) 13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 (아 6:13 상) 13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의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 (아 6:13 하) A. 첫번째 반응은 존경과 칭찬이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아 6:1 에서 신부와 함께 주님을 찾고자 했다. 여기서, 그들은 신부에게 배우려는 절박한 소원을 표현하기 위해 “돌아오라”라는 외침을 네번이나 반복한다. 그들은 아 6:11-12 에 나오는 것처럼, 골짜기의 동산에서 열심히 수고하고 있는 신부가 자신들에게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다. ---에베소 장로들은 다른 ‘포도원’으로 떠나는 바울을 보내며 함께 울었다. 37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 (행 20:37-38) ---신부는 ‘술람미’ 여인으로 불린다. 그것은 그녀가 이스라엘 수넴 지방이란 곳에서 자라났기 때문이다. 신부가 술람미 여인으로 불리는 구절은 아가서에서 이곳에 딱 한 번 나온다. 솔로몬과 수넴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는데, 둘다 ‘평화’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과 신부는 같은 이름을 소유한 것이다. B. 두 번째 반응은, 야유와 비방이다. [결과적으로는 주님 뜻 이루심, 곧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방향인, 옳은 방향, 진정한 화해와 평강, 일치 안으로 이끄시겠지만....((이 과정이 필요하기에, 주님은 반드시 겪게 하실 것이나, 두려워 하거나 자의적으로 대적함으로써 교회의 하나됨을 깨뜨리지 말고> 다만 주님 앙망함으로써 인도하심 따른다면 그냥 극복될 것임을 말씀하고 계시는 듯 하다!!)) ....아 5:7 에서 신부를 치고 상처 주며, 질투하고 시기하는 ‘행순자’[=교회 내에서 스스로 권위를 주장하는 리더]들로 부터 오는 야유로 볼 수 있는 반응이다. 여기서 [일견 보기에는] 그들은 신부를 존경하는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비꼬는 투로 도전의 말을 던지고 있는 것처럼 보여진다, “술람미 여인에게 뭐 특별한 게 있어?,” “왜 기다리는데?” 이들은 신부에게 ‘영적 조언’을 받고자 하는 예루살렘 여자들의 갈망을 무력화시키려 한다. ...영적 의미와 교훈 면에서 마하나임의(양쪽 진영의) 춤추는 것’의 의미를 좀 더 살펴보자., *1))신부에 대한 예루살렘 여자들과 행순하는 자들 사이의 대립을 뜻한다. KJV역은 이것을 “두 군대의 춤”으로 번역했으며, NAS 역은 두 진영의 춤”으로, NIV역은 “마하나임의 진영”으로 번역했다. 히브리어로 마하나임은 “두 진영, 두 군대,” 또는, 도시 이름으로도 번역이 가능하다. 마하나임은 야곱과 에서의 쟁쟁한 대립이 벌어졌던 도시로 유명하기 때문에, 어떤 번역을 사용하든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마하나임은 야곱과 에서의 대립이 있던 도시로 유명하다. (창 32:1-2)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천사)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창 32 장에서, 에서는 장자권을 도둑질한 야곱을 죽이기 위해 그를 쫓아간다. 마하나임에서, 야곱은 그의 백성들을 두 진영으로 나눠, 만약 에서가 한 쪽 진영을 발견하면 그 진영만 충돌을 감당할 수 있도록 대처하였었다. 이 엄청난 대립가운데, 야곱은 마하나임에서 ‘도움’의 천사를 만나게 된다.((여기에서!!, 야곱은 겉보기와 다르게, 오직 영을 따라 행할 때라야 하나님의 <궁극적으로!!> 형통케 하심을 누리게 될 수 있으리라는 것을 감지했던 것 아닐까!!)) .....보라, ‘두 진영’은 다윗을 공격하는 사울에게도 볼 수 있었다. .....또한. 사도 바울의 사역에서는, 그가 세상을 뒤집어 놓았을 때,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자들[세상적 이득, 곧 재물 취득이거나, 또는 종교적 지위나 세상의 인정/명예 등의 유지레 골몰한 바 하나님의 진리를 배척함으로써]을 직면하면서 ‘분열’의 결과를 낳게 되었다. (행 17:6....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세상을 뒤집어 놓은)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여기서 ‘춤추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지체) 안에 있는 ‘두 진영(사람들)’ 사이의 대립을 뜻한다. 또한, 이것은 ‘영적 전투의 춤’으로 두 영계(거룩한 것과 악한 것) 사이의 전투를 의미 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몸안에는 언제나 양극단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뜨거운 열정으로 주님을 좇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 그래서, ‘전심(마음을 다하는 것)’이 대부분 분열을 일으키는 핵심 이슈가 되곤 한다. ....예수님은 미숙한 자와 성숙한 자 사이에 분열을 가져오신 것이 아니라, 진실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사이에 분열을 가져 오셨다(마 10:34-36...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다만, 믿음의 눈을 들어 주 바라기를 통해 끝까지 인내하며 묵묵히 성령 안에서 견딤의 행보로 나아갈 때, 주님은 ‘세상적 가치따라 비진리와 타협’하는 교회를 정화하시고 나서, 주님의 순결한 신부 교회를 하나됨 안으로 연합하실 것이다. === 6장: 신랑의 사모함 ##1-7절, 서로에게 속함 [1절]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이켰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예루살렘 여자들은 신부에게 그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지, 어디로 돌이켰는지 그와 함께 그를 찾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주께서 계신 곳으로 가서 그를 만나기를 원하며 그와 교제하기를 원하며 그의 사랑과 은혜를 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2절] 나의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 신부는 신랑이 어디 있는지 알았고 그들에게 그의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 동산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다고 말한다. ‘자기 동산’은 교회를 가리킬 것이다. 그는 참된 성도들 안에, 또 그들의 모임인 교회 안에 계신다. 마태복음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향기로운 꽃밭’은 참 성도들을 통해 성령의 열매들이 맺히는 곳을 말할 것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이 선한 열매를 많이 맺기를 원하셨고 (요 15:8) 성령께서 오신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다(갈 :22-23). 주께서는 ‘동산들’(원문)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시며 백합화를 꺾으신다. 그는 양들을 푸른 풀밭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이시다(시 23:1-2). 또 그는 죄인들을 구원하여 참 성도를 만드시고 그들에게서 선한 열매들 즉 변화된 인격과 행위의 열매들을 거두신다. [3절]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떼를 먹이는구나. 2:16에서 신부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라고 말했다. 그때는 ‘내’가 중심이었던 것 같으나, 지금은 ‘그’가 중심인 것 같다. 신부는 자신이 그의 사랑하는 자 곧 신랑에게 속하였다고 먼저 말한다. 사랑하는 신랑과 신부는 서로에게 소속된다. 그런 종류의 소속과 소유는 완전한 연합을 나타낸다. 사랑은 완전한 연합으로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는 사랑으로 연합되었다. 주께서는 우리를 피로 사셨고(행 20:28; 계 5:9),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고 핏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고전 6:19-20). 신약교회의 구성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롬 1:6). 이제 우리 주 예수께서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우리는 그의 몸이 되었다(엡 1:22-23). 우리는 견고한 믿음과 순종으로써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을 우리 속에 모시고 살아야 한다(요 15:4-5). 또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기 때문에, 초대교회의 성도들처럼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어야 할 것이다(롬 14:7-8). 주께서는 백합화들 가운데서, 즉 선한 인격과 행위의 열매를 맺는 참 성도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 가운데서 의의 말씀으로 교훈하시며 그들을 양육하신다. 만일 그들이 악을 행하면 주께서는 그들을 멀리하실 것이다(시 5:4).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고 악을 떠난 요셉을 결코 떠나지 않으시고 그와 동행하시고 그를 형통케 하셨듯이 오늘날도 그를 의지하고 의와 선을 행하는 의인들과 함께하신다. [4절] 내 사랑아, 너의 어여쁨이 디르사 같고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 같고 엄위함이 기치를 벌인 군대 같구나. 신랑은 신부의 아름다움을 증거한다. 디르사는 후에 이스라엘의 수도가 될 정도로(왕상 15:33; 16:8, 23) 아름다운 도시이었고,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과 이스라엘 왕의 궁궐이 있었던 도시이다. 시편48:2는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산이 그러하도다”라고 말한다. 구원 얻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아름다운 까닭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 받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성령께서 그들 속에 계셔서 선하고 아름다운 행실의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신랑은 신부의 엄위함도 증거한다. 그는 신부가 전쟁터에서 기를 높이 들고 전진하는 군대 같다고 묘사한다. 주의 교회는 과연 군대와 같다. 교회가 높이 들고 전진하는 깃발은 예수 그리스도의 깃발이다. 옛날부터 성도들은 마귀와 죄와 세상과 싸워왔다. 에베소서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교회의 목사들과 일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들이다. 성경은 에바브로디도나 아킵보를 바울 일행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된 자들이라고 부른다(빌 2:25; 몬 2).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하기를,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딤후 2:3-4). [5-7절] 네 눈이 나를 놀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네 머리털은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길르앗 산에서 내려오는] 염소떼 같고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암양떼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고 너울 속의 너의 뺨(라카 )[관자놀이, temples]은 석류 한쪽 같구나. 5-7절의 말씀은 4:1-5의 말씀과 비슷하다. 신랑은 신부에게 “네 눈이 나를 놀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고 말한다. 신부의 아름답고 엄위하기까지 한 모습에 압도되기 때문에, 신랑은 그에게 그의 눈으로 나를 보지 말라고 말한 것일 것이다. 아가 4:9에서 신랑은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라고 말했었다. ‘눈’은 회중의 인도자를 상징하기도 하고 회중의 마음의 의향을 나타내기도 한다. 주께서는 참된 종들과 성도들을 너무 기뻐하신다.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염소떼 혹은 길르앗 산에서 내려오는 염소떼 같은 ‘머리털’은 신부의 가지런하고 단정한 긴 머리털을 묘사한 듯 하다. 그것은 교회의 거룩함과 순종함을 상징하는 것 같다. 목욕장에서 나온 암양떼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같은 ‘이’는 교회의 목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조리 있게 잘 가르치고 회중은 그 말씀을 잘 받고 그것을 묵상하는 모습을 상징한 것 같다. 석류 한쪽 같은 너울 속의 ‘뺨’은 겸손함과 하나님을 경외함 가운데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얼굴을 붉히며 애통하는 회중의 모습을 상징할 것이다. 이것은 다 참된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5장에서 말한 대로 신부가 게을러 더디 응답함으로 신랑을 놓쳤으나 신랑은 여전히 신부를 이처럼 사랑스럽게 여긴다. 우리는 여러 면에서 부족한 자들이지만, 주 예수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우리를 영광스러운 영생으로 인도하신다(요 6:39; 10:28; 13:1).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교회는 향기로운 꽃밭 같고 하나님 앞에서 디르사와 예루살렘같이 곱고 아름다운 교회이다. 주께서는 피흘려 사신 성도들의 교회를 변함 없이 사랑하시고 예쁘게 보신다. 둘째로, 주님과 우리는 영적으로 신비적으로 연합되어 있다. 우리는 주 안에 속하였고 주께서는 우리에게 속하셨다. 사랑하는 자들은 서로 에게 속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 몸의 지체들이다. 셋째로, 교회는 기를 든 엄위한 군대 같은 교회가 되어야 한다. 신앙생활은 전쟁이다. 우리는 마귀와의 전쟁에서 씩씩하게 싸워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아름다운 동산, 향기로운 꽃밭같이 참된 믿음과 회개,거룩과 말씀 순종으로 성도의 아름다운 모습을 늘 간직해야 한다. ##8-14절, 신랑의 사모함 [8-9절] 왕후가 60이요 비빈(妃嬪)[빈첩]이 80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는 그 어미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의 귀중히 여기는(바르 )[순결한](NASB)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 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후[들]와 비빈[빈첩]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솔로몬 왕은 왕후가 700명이요 빈첩이 300명이었지만(왕상 11:3), 아가서를 쓸 당시에는 왕후가 60명이요 빈첩이 80명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13절에 그 여자를 ‘술람미 여자’라고 부른다. 그에게는 술람미 여자가 가장 사랑하는 여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많은 나라들 중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특별히 사랑하셨다. 그는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 중에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택하셨고 구속하셨고 거룩한 교회를 만드시기로 뜻하셨다. 에베소서 1:4,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사랑하는 신부는 그 어머니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의 순결한 자라고 묘사된다. 교회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거룩한 자들의 모임이다. 요한계시록 14:4-5는 땅에서 구원 얻은 14만 4천명으로 상징된 자들에 대해,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救贖)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고 증거하였다. [10절] 아침빛같이 뚜렷하고 달같이 아름답고 해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같이 엄위한 여자가 누구인가? 신부는 아침빛 같다고 표현된다. 아침빛은 밤이 지나고 새벽이 될 때 동녘에서 밝아오는 빛이다. 교회는 아침빛과 같다.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악이 가득한 어두움의 세상이지만, 구원은 어두움의 세상에 비취는 빛과 같다. 교회는 빛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다. 주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마 5:14).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말했다(엡 5:8). 신부는 또 달같이 아름답다고 표현된다. 밤에 하늘에 떠 있는 달은 아름답다. 교회는 어두운 세상에 달과 같다. 물론 달은 일시적으로 그 일부가 가리워지다가 다시 회복되곤 한다. 교회는 세상에서 부족과 연약이 있지만 천국에서 그 영광을 완전히 드러낼 것이다. 신부는 또 해같이 맑다고 표현된다. ‘맑다’는 원어(바르 )는 9절에서도 나온 말로서 ‘순결하다’는 뜻이다. 해는 달과 달리 빛이 충만하여 사람이 직접 쳐다볼 수 없을 정도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흠과 점이 없고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교회이다(엡 5:27). 지금은 법적으로만 그러하고 실제적으로는 부족과 연약이 없지 않지만, 장차 천국에서는 완전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신부는 또 기치를 벌인 군대같이 엄위하다고 표현된다. 이것은 4절에도 나온 표현이다. 지상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이다. 교회는 끊임없이 죄와 마귀와 세상과 싸운다.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않고 귀가 가려워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는 어려운 시대가 왔으나, 우리는 고난을 각오하며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딤후 4:3-5; 계 2:10). [11-12절] 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 내가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을 때에 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로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 이르게 하였구나. 본절은 신랑의 말로 생각된다. 2) 골짜기는 평지가 아니고 낮은 곳<2) Matthew Poole, 박윤선, NASB, NIV 등이 그렇게 본다. 그러나 ASV나 Jamieson-Fausset-Brown 주석 등은 신부의 말로 본다.>이다. 그것은 평안하지 않은 곳 즉 고난으로 인해 겸비해진 환경을가리키는 것 같다. 그러나 낮은 곳에는 흔히 물이 넉넉하듯이 고난중에 겸비해진 심령에는 선한 인격의 순이 나고 꽃이 피기 시작한다. 푸른 초목이나 포도나무 순이나 석류나무 꽃 등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여러 상태를 묘사하는 것 같다. 아직 초보적인 상태에서부터 상당히 성장한 상태까지,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상태는 다양하다. 신랑은 자신이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다고 말한다. 호도는 겉에는 딱딱하고 볼품 없는 껍데기를 가지고 있지만, 그 알맹이는 고소하고 맛이 좋고 향기도 있다. 성도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볼품 없는 존재일지라도 그 속에는 하나님의 귀한 은혜가 있고 그의 인품과 내면적 덕성은 맛과 향을 가진다. 진실한 성도들은 다 그러하다. 12절은 다시 번역하면, “부지중에 내 영혼은 나를 암미나딥(혹은 나의 존귀한 백성)의 수레들처럼 되게 하였구나”이다(KJV). 암미나딥은 아마도 잘 알려진 수레 운전자이었던 것 같다. 이것은 주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들에게로 신속히 달려오심을 묘사하는 것 같다. 우리가 주를 멀리하고 죄 가운데 머물면 주께서 얼마 동안 얼굴을 감추시지만,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주를 앙망하고 의지하고 사모하면 주께서는 잘 달리는 수레들처럼 신속히 우리에게 찾아오실 것이다. [13절]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 친구들은 신부를 향한 신랑의 간절한 마음을 말한다. ‘돌아오라’는 말이 네 번이나 반복되어 있다. 술람미 여자라는 히브리어는 솔로몬의 아내라는 뜻을 가진 말인 것 같다. 마치 길이 엇갈린 두 사람처럼 신랑과 신부는 지금 서로 길이 엇갈려 있다. 신부가 신랑을 찾았을 때 그를 만날 수 없었는데, 지금은 반대로 신랑이 신부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빠진 신자들에게 적절하다.주께서는 그들에게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며 간절히 기다리신다. [14절]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의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 마하나임( )은 ‘두 군대’라는 뜻인데, 옛날 야곱이 하란에서 돌아오다가 천사들을 만났던 곳을 마하나임이라고 부른 데서 기원한 말이다(창 32:2). 그때 그가 마하나임, 즉 ‘두 군대’라고 표현한 것은 하늘의 천사들과 땅의 자기 가족들을 두고 표현한 것 같다. 본문은 술람미 여자의 아름다운 모습을 마하나임의 춤추는 것에 비교하고 있다. 술람미 여자는 교회를 상징하고, 교회는 마하나임에 비교할 수 있다. 교회는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의 두 무리이기도 하지만, 땅 위의 성도들과 천상의 성도들의 두 무리이기도 하다. 신앙의 선진들은 땅 위의 성도들을 ‘싸우는 교회’라고 불렀고 하늘에 있는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히 12:23)을 ‘승리한 교회’라고 불렀다. 교회의 모습은 마하나임의 춤추는 것과 같다. 춤은 전쟁에 승리했거나 매우 기쁠 때 추는 것이다. 천상의 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지상의 교회도 대장 되신 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마귀와 죄와 사망과의 싸움에서 항상 이기며 그로 인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며 춤춘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주 예수께서 의롭다고 하신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되었으므로 실제적으로도 거룩하고 완전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죄들을 버리고 의와 선을 행함으로 교회의 거룩함과 아름다움을 지키고 하나님께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 둘째로, 사랑의 주께서는 우리를 보시기 위해 우리에게 달려오신다. 지금 우리의 신앙인격은 어느 정도에 와 있는가? 포도나무나 석류나무의 순인가, 꽃인가, 열매인가? 우리는 영적 성장에 힘써야 한다. 셋째로, 주 예수께서는 죄 가운데 빠진 자들에게 돌아오라고 부르신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불경건과 의심, 온갖 죄악들과 불결의 죄를 다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와 주 안에 순종하며 항상 기뻐해야 한다 === === [[영적 생활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기반입니다. (딤전 3:15)]] 주님의 이름을 부름 (1) === 성경적 근거 앞으로 몇 주 동안 성경에 나오는 간단하지만 놀라운 실행인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대해 교통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관한 근거, 정의, 역사, 목적, 실행 등을 함께 볼 것입니다. 수 천년동안 사람은 하나님을 알든지 모르든지 간에 이 전지전능한 분에게 이끌리기 위해, 대화하기 위해, 합당한 관계를 갖기 위해, 시험 당할 때든지, 기쁠 때 또는 슬플 때에도, 그들 존재의 깊은 곳으로부터 그분을 향해 부르짖었습니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큰 어려움이나 재난에서 도움을 받거나 구출되기 위해 그분께 부르짖었습니다. 어떤 동기에서든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는 것은 보편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이 세상의 모든 문화에서 관찰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강한 부르짖음이 보편적이게 된 이유는 이것이 사람의 가장 깊은 부분인 영에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실행은 성경에 기록된 가장 초기 세대의 인류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을 부르는 것에 관한 첫 번째 성경적 기록은 인류의 제 3세대가 출현한 창세기 3장에서 일찍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셋에게서도 아들이 태어났는데, 셋은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고 하였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다(창 4:26).” 히브리어로 에노스란 이름은 아주 의미가 깊습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부서지기 쉬운”, “죽을 운명”입니다. 셋은 그의 인생 경험을 통해 인간의 선천적인 약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아들을 인간이 약하고 부서지기 쉽고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에노스’로 이름지었습니다.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어떤 심각한 문제가 없는 한, 자기 자신을 아주 강하고 유능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할 때 우리 인생의 약함은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그러한 때에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성경은 주님의 이름을 부른 하나님의 백성들에 관한 명확하고 자세한 기록을 보여줍니다. 아래 차트는 구약과 신약에서 주님의 이름을 불렀던 사례를 정리한 것입니다. ------ 주님의 이름을 부름(2) - 주님의 이름 부르기의 정의와 중요성 === 주님을 부르는 것은 그의 신성한 인격의 풍성한 임재를 누리는 것임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의 신성한 인격의 풍성한 임재를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접촉하고, 그분과 지속적인 교통 아래 있는 것의 열쇠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주님께 자신을 열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분은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는 그분을 신선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분의 임재에 대한 우리의 체험은 우리가 크게 그분의 이름을 부를 때 새로워지고 강화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그분에게 기도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기도의 한 방면이지만, 부르는 것은 단지 기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단적인 예로, 예레미야 29장 12절에서 우리는 이 둘의 차이를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 비록 기도는 들리지 않더라도, 부름은 반드시 들려야 함 히브리어와 헬라어에서 “부르다”라는 단어[카라]의 의미는 “부르다, 외치다, 큰 소리를 내다, 울부짖다, 도움을 위해 누군가를 부르다, 자극하다”입니다. 다른 말로하자면, 사람의 이름을 크게 말함으로 그를 부르는 것입니다. 기도는 조용히 할 지 모르나, 부르는 것은 들릴 수 있게 크게 해야 합니다. 히브리어 “qara" 는 보통 “부르다”로 번역하는데, 레위기 13:45, “나병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는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와 같이 “큰 소리로 외치다”로 또한 번역할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율법에 따르면 문둥병자는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말함으로 사람들이 그에게 접근하는 것을 경고해야 했습니다. 그러한 외침은 명백하게 침묵적이거나 심지어 조용해서는 않되고 오히려 강조적이고 꽤 소리가 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이름을 부르며!” 이사야 또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우리의 그분의 대한 외침이라고 말합니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이름을 부르며 그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 이름이 높다 하라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온 세계에 알게 할지어다 시온의 거민아 소리를 높여 부르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니라 할 것이니라” (12:2-6). 이러한 일련의 구절들에서 이사야는 감사하고, 노래하고, 특별히 ‘부르며 외치라’고 말합니다. 이 모든 유사한 말들과 뒤따른 것들은 4절에 언급된 부르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2절에서 그는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이시고 힘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편에서는 구원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을 수 있습니까? 이 단락은 많은 방법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하나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이름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그의 구원을 찬송함으로 부르짖고 그분에게 외침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12장 4절에서 감사하고 이름을 부르는 것이 한조를 이루고 6절에서 찬송하고 부르는 것이 한조를 이루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러한 동격의 구조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그분께 부르며 외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 이러한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명백히 소리를 내는 것이지 조용히 하는 것이 아님 더 나아가서, 로마서 10장 9-10절에서는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으신 자 가운데서 살리는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며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절들은 두 개의 현저한 결과를 산출하는 두 가지 행동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믿는 것은 마음의 기능으로 의에 이르고, 시인하는 것은 입의 기능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명백히 소리를 내는 것이지 조용히 하는 것이 아닙니다. -------- 주님의 이름을 부름(3) - 구약과 신약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의 역사 구약에는 주님의 이름을 부른 많은 사람들에 대한 다양한 기록들이 있습니다. 아래 열거 된 것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실행을 진지하게 한 사람들 중 일부를 예로 제시한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 중 요엘과 스바냐는 주님의 이름을 부를 것을 예언했습니다.) 사울은 더 많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더 결박하려고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중에 주님을 만나고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그 때 주님은 아나니아라고 하는 작은 성도를 보내어 사울을 방문하게 하고 그분의 말씀을 전달하게 하셨습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한 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러니 이제 무얼 주저하십니까?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침례를 받고 그대의 죄들을 씻어버리십시오.”(행22:16). 사울이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그도 같은 표시를 지니게 되었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을 핍박했던 사울이 이제 그들의 형제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가 진실로 회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강한 증거였습니다.신약의 믿는이들은 지속적으로 주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오순절날 하나님께서는 그 영을 부어 주시고,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의 이름을 부름으로 그 영을 영접했습니다(행 2:17, 21).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그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말하기를 “주 예수님, 나의 영을 받아주십시오”(행 7:59) 라고 했습니다. 사울은 대제사장으로부터 “그 길에 속한 사람”(행9:2), 바꿔 말하면,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14절)을 결박할 권세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병렬어구는 모든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이 습관적으로 주님의 이름을 불렀음을 가리킵니다. 믿는이들이 주님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에 사울은 그들을 찾아서 결박하기가 쉬었습니다. 이제 사울이 사도 바울이 된 후에, 그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문제를 강조했습니다. 그가 로마서를 쓸 때 그는 믿는이들에게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 분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이 되시고, 그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하시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말함으로 그들을 확신시켰습니다(롬 10:12-13). 로마서 10장 12절에서 바울은 주님이 그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하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주님의 풍성을 누리는 아주 간단하고 놀라운 길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길은 바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 13절에서 바울은 요엘의 말을 인용하여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계속해서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각처에서 그들과 우리의 것이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이들에게”(고전1:2)라고 기록하여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디모데후서에서 “주님을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사람들과 함께”(딤후2:22) 영적인 것들을 추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실행은 성경에 명확한 근거가 있고, 역사적으로도 초대 교회 성도들이 지속적으로 주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아주 분명합니다. 구약전체에서뿐 아니라 초대 교회에서도 성도들은 신실하게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의 모든 풍성을 누렸습니다. ====== 기도로 말씀 읽기 (1) === 기도로 말씀 읽기 개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기도가 하나님과의 교통 가운데 그분께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기도로 읽는’ 성경적 실행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기도로 말씀 읽기는 성경 말씀을 하나님에 대한 기도와 찬미, 간구의 내용으로 삼는 것입니다. 기도로 말씀 읽기는 고정된 방법이나 의식(儀式), 형식이 아니라, 주님께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드리는 진정한 기도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기도가 병행해야만 한다고 가르칠 뿐만 아니라(엡 6:17-18; 요 15:7), 구약과 신약 속에서 많은 예를 통해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도했음을 보여줍니다. 말씀으로 기도할 때에 우리의 기도는 훨씬 풍부해지고 높여집니다. 또한 기도로 말씀을 읽는 것은 영과 생명인 성경의 본질을 만지는 것이며, 이럴 때 우리는 풍성한 계시와 신성한 생명의 공급을 얻게 됩니다. 믿는 이들이 성경 말씀을 기도로 대할 때, 생명의 풍성한 공급을 받을 수 있으며, 생명 안에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벧전 2:2). 우리는 역대 교회사에서 주님을 사랑한 많은 이들이 기도로 말씀을 읽는 성경적 실행에 대해 남긴 체험적인 간증을 읽어봄으로써, 기도로 말씀을 읽는 것이 성경적이고 경건한 실행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으로 앞서간 믿는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기도로 읽음으로써 양육되고 빛을 보고 강건케 되었음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 성경의 본질에 대한 관점 성경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우리가 성경을 연구하는 법을 결정하고 안내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물질적인 차원만 아니라 내적 본질이 있음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의 본질은 가르침이나 예언이나 도덕이 아닙니다. 성경의 본질은 신성한 호흡(딤후3:16), 신령한 젖(벧전2:2), 생명의 떡(마4:4), 영과 생명(요6:63), 그리스도-하나님 자신(요1:1)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기도로 읽을 때 우리는 본질을 만지며 말씀을 우리의 양식과 음료와 호흡으로 받습니다. 사람은 외적으로 물질적인 몸을 가지고 있지만 내적으로 영과 혼이 있습니다. 사람으로서 우리의 인격은 단지 겉부분인 몸으로만 된 것이 아니라 영과 혼인 내적 부분도 있습니다. 성경도 이와 같습니다. 성경은 표면적으로 흑백 문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호흡해 내신 것이기 때문에 내재적으로 그 안에 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혼의 기관인 생각만 사용한다면, 우리는 성경의 내재적인 본질을 만지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우리의 눈으로 문자를 읽고, 생각으로 그것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영을 사용하여 성경의 내재적인 본질을 만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올 때, 우리는 우리의 온 존재를 사용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눈을 사용하여 말씀을 읽고 입을 사용하여 말씀을 말해내야 합니다. 또한 혼의 주된 부분인 생각을 사용해 우리가 읽은 것을 이해합니다. 우리는 성경 사전이나, 강해서 등을 참고하여 읽은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각하는 기관을 주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생각을 사용해야 합니다. 성경을 연구할 때 우리는 또한 감정을 사용하여 말씀을 사랑하고, 의지를 사용하여 말씀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취해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사용하는 것은 혼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는 가장 중요한 비결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의 영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을 사용하고 훈련하는 좋은 길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기도로 가져갈 때, 우리는 영 안에서 말씀의 본질을 만질 수 있고, 빛과 생명의 충만한 공급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 말씀에서 성경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관해 말씀하고 있는 구절들을 하나씩 볼 것입니다. === 성경의 본질―신성한 호흡 디모데후서 3장 16절은 하나님 말씀의 본질을 명백히 계시합니다. 미국 표준역성경(NASV)은 이 구절의 전반부를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감동에 의한 것이다”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의 감동에 의한 것”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Theopneustos로 Theos(하나님)와 pnein(“호흡하다"의 동사형)라는 단어로 구성된 복합어입니다(Wuest 2:150). 웨스트(Wuest)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호흡으로 된 것이다.”라고 해석한 것처럼 이 단어의 문자적 의미는‘하나님의 호흡하심’입니다. 성경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 그분 자신의 호흡으로 내쉬어 진 것입니다. === 성경의 본질―영적인 음료와 신령한 젖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의 호흡일 뿐만 아니라 신령한 젖이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말하기를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함이라”(2:2)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히브리서 5장 1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젖에 비유하였습니다. “때가 오래됨으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