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17 - 화목제물-교통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 누림을 위한 화목이신 그리스도 ((레위기 3:1, 5-7, 12, 6:12, 7:37))
제물들에 관한 레위기의 모든 말씀은 작은 장막, 곧 회막 안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광야에서, 많은 일들로 분주한 수많은 백성들로부터 떠나서, 우주를 창조하셨던 바로 그 하나님이 작은 장막 안으로 들어오셨다.
TUQ이 그곳에서 말씀하신 모든 것이 영원을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놀라운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작은 회막은 점차적으로 새 예루살렘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함께 우리가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에 관한 이 말씀의 모든 방면은 새 예루살렘에서 성취될 것이다.
새 예루살렘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요제, 거제임을 분명히 깨닫게 될 것이다.
이 모든 제물들은 결국 새 예루살렘을 가져올 것이다.
레위기에서 제물들은 특별한 배열을 갖고 있다. 먼저 번제물이 있고 그 다음에 소제 그 다음에 화목 제물이 있다.
번제는 우리가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위해야 함을 의미하며, 소제물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매일의 음식임을 가리킨다.
우리가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먹음으로 인하여 살 때, 그 결과는 화목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해지며 서로서로 화목해진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만족시킬 때, 그분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서 화목이 되심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는 이 화목 안에 있으며, 이 화목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분에 의해서 그리고 그분을 통해 하나님을 향하여 절대적이 되고 하나님을 위하여 절대적이 되게 하는 분이다.
그리스도는 또한 우리가 매일 먹는 분이다. 그분은 우리의 매일의 음식이다. 이 그리스도가 지금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누리고 서로 누리는 화목이다.
그러므로 번제물과 소제물과 화목제물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서로 화목케 하는 우리의 화목이신 그리스도를 누리기 위한 기본 제물들이다.
이것이 이 세 제물들의 배열 순서의 의미이다.
그리스도 밖으로 나갈 때 우리는 화목을 갖지 못한다. 만일 우리에게 화목이 부족하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부족한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화목의 양은 우리가 얼마 만큼 그리스도를 갖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화목을 가지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누리는 정도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측정이다.
교회 생활 하는 사람들에게는 화목을 갖지 않을 이유가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화목을 가지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우리 자신 안에서 화목을 가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는 화목을 더 적게 갖게 될 것이다.
화목을 가지는 유일한 길은 매일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다.
아침에 우리는 우리의 번제물이신 그리스도를 취하고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그분을 드려야 한다.
그런 다음 우리는 우리의 매일의 음식이신 그분을 취해야 하며, 그것은 그 날의 특별한 필요를 충족시켜 줄 것이다.
우리는 오늘 그리스도를 누려야 하며 어제와 내일을 잊어버려야 한다. 어제는 지나갔으며, 우리는 내일에 있지 않다.
어제는 지나갔기 때문에 우리들 중의 어느 누구도 어제에 머물 수가 없다. 우리가 어제 실패했든 성공했든 어제는 지나갔다.
그리스도인들인 우리에게는 내일이 없으며 오직 오늘만이 있다. 내일로 괴로움 받지 말라. 오늘을 살라.
우리가 오늘 갖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그리스도를 갖는다. 그리스도가 오늘이다.
우리는 첫 번째 세 제물들의 배열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이제 화목 제물과 관련된 여러가지 문제들을 살펴 보자.
Ⅰ. 누가복음 15장 23절부터 24절까지에 있는 받아들이는 하나님과 돌아온 탕자 사이의 화목의 누림인 살진 송아지로 예시됨
화목 제물은 눅 15장 23절부터 24절까지에서 받아들이는 아버지 곧 하나님과 돌아온 탕자 곧 죄인 사이의 화목의 누림인 살진 송아지로 예시되어 있다.
탕자는 비참하게 돌아왔으나, 아버지는 사랑하였으며 즉시로 받아들이는 아버지가 되었다.
아버지는 탕자를 받아들인 후 그들의 누림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
이 살진 송아지는 우리를 받아들이시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누림을 위한 우리의 화목 제물이신 그리스도의 예시이다.
아버지와 돌아온 탕자는 화목 제물을 풍성하게 누렸다.
Ⅱ. 화목 제물과 번제물과 소제물의 관계
A. 화목 제물은 번제에서의 하나님의 만족에 기초함
화목 제물은 번제물의 하나님의 만족에 기초한다. 하나님과 우리가 오늘날 누리는 화목 제물은 그리스도께서 번제물이 되신 것에 기초한다.
이것은 레위기 3장 5절과 6장 2절에 제시되어 있다.
화목 제물에 대해 3장 5절은, 『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단 윗불 위에 있는 나무 위 번제물 위에 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드리는 향기로운 냄새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화목 제물이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지기 위한 기초(근거)가 번제물임을 본다.
기초인 번제물을 태움으로 하나님은 화목 제물을 받으신다.
B. 화목 제물은 소제에서의 하나님과 사람의 누림의 결과임
화목 제물은 소제에서의 하나님과 사람의 누림의 결과이다(7:37).
한면으로 화목 제물은 번제물에 근거하며, 또 한면으로 화목 제물은 소제의 누림의 결과이다. 이것은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체험의 문제이다.
실제적으로 그리스도를 화목으로 누리고자 한다면 우리는 먼저 그분을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우리의 번제물로 취해야 하며 그런 다음 소제인 그분을 먹어서 그분을 우리의 음식으로 누려야 한다. 그 즉시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목 제물이 될 것이다. 나는 우리모두가 이것을 체험했다고 믿는다.
제물들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레위기에 있는 그림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
이 그림들을 제시함에 있어서 레위기는 많은 전문적인 용어들을 사용한다.
우리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 전문적인 용어들을 알지 못한채 그리스도를 체험해 왔다. 이 용어들 중의 하나가 번제물이다.
아침에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아들을 사랑합니다. 그분을 당신께 드리고 싶습니다.』라고 기도할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달콤하게 그리스도를 누리고 이 그리스도를 하나님께 드려 그분을 행복하게 한다. 이것이 번제물인 그리스도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 번제물인 그리스도를 드린 후 우리는, 『오 주여 당신은 저의 매일의 공급이십니다. 저는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소제, 곧 생명 공급이신 그리스도를 취하는 것이다. 소제는 생명 공급에 대한 전문적인 용어이다.
번제물이신 그리스도와 소제이신 그리스도를 취할 때 우리는 화목을 갖는다.
우리는 우리 안의 어떤 것이 기뻐하고 우리가 하나님께 합당하며 그분께 열납되었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 전에 당신은 문제가 있어서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했을 것이지만 이제 문제가 없어졌으며 당신은 평안하다.
이것이 화목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날마다 이러한 체험과 누림을 가질 수 있다.
Ⅲ. 여러 종류의 화목 제물
레위기에서 우리는 여러 종류의 화목 제물이 있는 것을 본다. 번제물의 크기가 여러 종류인 것과 마찬가지로 화목 제물도 여러 종류이다.
A. 화목 제물의 여러 종류는 그리스도 때문이 아니라 드리는 자의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이 여러 가지상태이기 때문임
화목 제물이 여러 종류인 것은 그리스도 때문이 아니라 드리는 자의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이 여러 가지 상태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우리는 큰 그리스도를 누린다.
어떤 일이 일어날 때, 아마도 우리의 가정 생활에 어떤 곤란이 일어날 때, 그것은 그리스도를 누리는 우리의 누림을 제한할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더 작아졌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누리는 상태가 협소해지고 작아졌음을 의미한다.
사탄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누림을 제한하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누리는 상태를 협소하게 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상황을 이기는 법을 배워야 하며, 방해하는 것들을 피하기 위해 우리의 「골방」(마 6:6)에서 기도하여 더 큰 그리스도를 누릴 수 있는 더 좋고 더 높은 상태가 되어야 한다.
B. 소떼에서, 수컷이나 암컷
1. 수컷
레위기 3장 1절은, 『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희생을 예물로 드리되 소로 드리려거든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없는 것으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라고 말한다.
수컷은 소의 수컷으로서 그리스도를 누리는 보다 강한 드리는 자를 의미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강하거나 약한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강하거나 약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강하다면 우리는 더 강한 그리스도를 누릴 것이며, 우리가 약하다면 더 약한 그리스도, 즉 그분 안에서 약한 그리스도가 아니라 우리의 약함으로 인해 우리의 체험 가운데서 더 약한 그리스도를 누릴 것이다.
우리가 약하거나 낙심할 때 우리는 강한 그리스도에 비해 더 약한 누림을 가질 것이다. 우리가 약하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의 체험 가운데서 약하시다.
2. 암컷
암컷은 소의 암컷이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더 약한 드리는 자를 의미한다. 사실상 떼의 모든 동물들은 강하다. 그리스도 자신은 강하시다.
우리가 강한 그리스도를 누리는가 아니면 약한 그리스도를 누리는가는 우리의 상태에 달려 있다.
우리의 상태가 강하다면, 우리는 강한 그리스도를 누릴 것이다. 만일 우리의 상태가 약하다면, 우리는 약한 그리스도를 누릴 것이다.
C. 양떼에서, 양이나 염소
1. 양
레위기 3장 6절과 7절은, 『만일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는 화목제의 희생이 양이면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드릴지며 만일 예물을 드리는 것이 어린 양이면 그것을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라고 말한다. 양은 어떤이가 완전하고 아름다우신 양이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우리 모두가 이와 같은 체험을 했으며 완전하고 아름다우신 그리스도를 누렸다고 믿는다.
2. 염소
12 절은, 『만일 예물이 염소면 그것을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라고 말한다.
여기서의 염소는 어떤이가 그분의 완전함과 아름다움이 그리 많지 않은 염소이신 그리스도를 누림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25장에 따르면, 양은 좋으나 염소는 좋지 않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때때로 양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때때로 염소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하는가? 만일 우리의 상태가 가련하다면, 우리는 그분의 완전함과 아름다움 안에서의 양이신 그리스도를 누리지 못하고 완전함과 아름다움이 없는 염소이신 그분을 누리게 될 것이다. 어떤 형제가 그의 아내와 다툰 후에 그리스도를 누리려고 애쓴다고 가정해 보라. 그럴 경우에 그의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은 가련한 것이 될 것이며 그는 양이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염소이신 그리스도를 누리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느낌 안에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상태에 따라 다름을 가리킨다. 물론 그리스도 자신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느낌 안에서 우리의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Ⅳ. 흠 없이
화목 제물은 흠이 없어야 한다(3:1, 6). 이것은 죄들과 범죄들이 없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의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는 온전하시다. 그분은 흠이 없으시다.
Ⅴ.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음
화목 제물을 드리는 자는 그의 손을 제물의 머리에 얹었다(3:2, 8, 13). 이것은 제물을 드리는 자와 제물이 연합됨을 의미한다.
「연합(union)」이라는 용어 대신에 우리는 「동일시(identification)」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합당하다.
손을 얹음으로, 제물을 드리는 자는 제물과 동일시 되었다.
이것에 관해,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치하신다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대치의 문제가 아니라 동일시의 문제이다. 그것은 연합보다 더 깊은 것이다. 그러므로 연합이라는 용어는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교통에 관한 진리를 완전히 전달하지 못한다. 우리와 그리스도의 교통은 동일시의 문제, 즉 우리가 그분이 되는 문제이며, 그분이 우리가 되는 문제이다. 우리와 그리스도는 하나이다. 우리는 그분이 되고 그분은 우리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치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바꾸어야 한다. 그리스도에 의해 대치되는 것은 우리가 완전히 없어짐을 의미한다.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대치의 문제가 아니라 그분과 하나 됨의 문제이다.
Ⅵ. 회막 문에서 죽임
화목 제물은 회막 문에서 죽임 당했다(2, 8, 13절). 이것은 그리스도가 땅 위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죽임 당하셨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는 땅 위 여기에서 그리스도를 누릴 수 있다. 하늘에 올라가서 그리스도를 누리려고 기다리지 말라. 오늘 당신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누리라.
멀리 있는 물이 우리의 갈증을 해소시켜 줄 수 없다는 속담이 있다. 그리스도가 단지 하늘에만 계시다면 그분은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있는 바로 이곳, 땅 위에서 그리스도를 누리고 있다.
Ⅶ. 피를 단 사면에 뿌림
화목 제물의 피는 단 사면에 뿌려졌다(2, 8, 13절). 이것은 피가 제물을 드리는 자의 양심 안의 평강을 위한 것임을 가리킨다.
이 피는 하나님을 진정시키기 위해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제물을 드리는 자가 서 있는 단 주위에 뿌려졌다.
이것은 화목 제물의 피가 우리에게 화목과 확증을 준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화목제물의 피를 볼 때, 우리는 우리의 죄들이 씻어졌다는 확증을 갖는다. 제물의 피는 우리를 위해 뿌려졌으며, 이제 그것은 우리의 눈 앞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여 감사합니다. 나는 죄들을 사함 받았습니다. 나는 당신의 피를 봄으로 이것을 압니다. 이 피는 하나님이 나의 죄들을 사하셨다는 증거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Ⅷ. 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과 간에 덮인 꺼풀과 허리 근방의 모든 기름을 단 위에서 불사름
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과 간에 덮인 꺼풀과 허리 근방의 기름 전체는 번제단 위에서 불살라졌다(3-5, 9-11, 14-16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제물의 첫 번째 누리는 자, 즉 가장 좋은 부분을 첫 번째로 누리셔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목제물의 최상의 부분은 하나님의 분깃이다.
Ⅸ. 화제의 음식으로서
『제사장은 그것을 단 위에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식물이요 향기로운 냄새라』(16절).
이것은 화목 제물이 하나님의 만족과 누림을 위해 하나님께 드려지는 음식으로서 번제의 일종임을 의미한다(1:9, 13, 17절).
Ⅹ. 제물의 가슴과 우편 뒷다리는 제사장들을 위한 것임
제물의 가슴과 우편 뒷다리는 제사장들을 위한 것이다(7:30-34).
이것은 제사장들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믿는이들은 하나님과 함께 그리스도를 누릴 수 있으며 사랑하는 능력이며 서 있게 하는 힘이신 그분을 누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슴을 먹을 때, 그분의 사랑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
우리는 다른이들을 사랑하고 사랑 안에서 그들을 관심한다. 그리스도의 넙적다리를 먹을 때, 우리는 서 있을 수 있는 힘을 갖는다.
ⅩⅠ. 제물의 기름과 피는 제사장들이 먹을 수 없음
제물의 기름과 피는 제사장들이 먹어서는 안 되었다.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이는 너희 모든 처소에서 대대로 영원한 규례니라』(3:17).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최상의 부분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이며 우리의 구속을 위한 그분의 피는 하나님의 요구들을 만족케 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주 가운데 오직 예수의 피만이 그분의 믿는이들이 먹을 수 있는 것이다.
===========
메시지 18 - 속죄 제물-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위한 그리스도 (1) ((레위기 4:1-35, 요일 1:5-9, 골 1:12, 롬 5:12, 7:17, 20, 8:3, 요일 1:14, 고후 5:21, 요 3:14, 롬 6:6, 히 2:14, 4:15, 갈 5:19-21, 요 12:31)) ....내적 동기가 어떠한가!!...전적으로 Q께 순복함인가, Q에 대한 투쟁과 다툼인가 살펴보라.
지난 메시지들에서 우리는 다섯 가지 기본 제물들 중 처음 세 가지 제물들 곧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를 살펴보았다.
네 번째 기본 제물은 속죄 제물이며 다섯 번째는 속건 제물이다.
이번 메시지에서 우리는 속죄 제물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제물들의 배열의 순서
나는 다섯 가지 기본 제물들의 배열의 순서에 찬사를 보낸다. 이 순서는 사람의 생각에 따른 것이 아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속죄 제물을 먼저 둘 것이다. 우리는 죄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맨 먼저 우리의 죄를 처리하기를 원할 것이며, 그 다음에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를 취하려고 할 것이다.
신성한 순서는 이와는 다르다. 신성한 순서는 번제로 시작되는데, 이것은 우리가 해야할 초기의 단계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절대적으로 살아야 하는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번제를 이어 소제가 나오며, 소제는 우리가 우리의 생명 공급이신 그리스도를 취해야 하며 날마다 그분에 의해 살아야 함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번제와 소제이신 그리스도를 취함으로써 우리는 평안을 갖는다.
우리는 평안해졌지만 여전히 어떤 문제, 곧 안의 죄와 바깥의 죄들을 갖고 있으며 이것들은 분명히 처리되어야 할 것들이다.
레위기의 제물들의 순서는 요한 일서 1장의 순서와 일치한다.
5절은,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고 말한다.
6절은 만일 우리가 빛이신 그 하나님과 교통을 가진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우리는 거짓말하는 것이며 진리를 행치 않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7절은 이어서,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을 가지고 그분을 누릴 때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문제가 있으며, 이 문제는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됨을 가리킨다.
===죄와 죄들
신약은 「죄」라는 단수와 「죄들」이라는 복수를 둘 다 사용하여 죄의 문제를 다룬다.
죄는 사탄에 의해 아담으로 말미암아 인류 안으로 들어온 내재하는 죄를 말한다(롬 5:12). 그것은 로마서의 둘째 부분, 곧 5장 12절부터 8장 13절까지에서 다루어진다(죄들이라고 언급되어 있는 7장 5절은 제외함). 죄들은 죄의 행위 곧 내재하는 죄의 열매를 말하며, 이것은 로마서의 첫째 부분인 1장 18절부터 5장 11절까지에서 다루어진다.
그러나 요한 일서 1장 7절의 「모든」이라는 형용사가 붙은 죄는 내주하는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거듭난 후에도 범죄하는 모든 단수의 죄를 말한다(10절).
이 죄는 우리의 정결케 된 양심을 더럽힘으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통 안에서 주 예수의 피로 이것을 깨끗케 해야 한다.
우리의 죄, 곧 우리의 본성 안에서 내주하는 죄(롬 7:17)는 우리의 속죄 제물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처리되었다(레 4, 사 53:10, 롬 8:3, 고후 5:21, 히 9:26).
우리의 죄들, 곧 우리의 허물들은 우리의 속건 제물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처리되었다(레 5, 사 53:11, 고전 15:3, 벧전 2:24, 히 9:28).
거듭난 후에도 우리는 요한 일서 1장 8절이 가리키는 바와 같이 여전히 우리의 속죄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취해야 한다.
요한 일서 1장 8절은,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것이요』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내주하는 죄, 곧 우리의 출생에 의해 물려받은(본성 안에서 내주하는) 죄를 말한다. 이것은 로마서 5장 12절에 언급되어 있는 죄이다.
우리가 구원받고 거듭난 후에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우리는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구원받고 거듭났으며 주님을 추구하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과 교통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우리 안에 거하는 죄를 갖고 있다. 이것은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부인한다면 진리가 우리 속에 없는 것이다. [이것의 합당한 설명은..이미!! 그러나 아직은 아니!!<죄성과 죄, 곧 사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승리로 인해, 결정적인 치명타를 맞아 다 죽게 되었고, 게다가 노쇠하고 단지 으르렁거릴 수만 있을 뿐, 죽어가고 있는 중이다>...이다]
요한 일서 1장 9절은 계속해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들을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들을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거듭나기 전의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거듭난 후에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여기서의 「죄들」은 우리의 죄의 행위를 말한다.
===요한 일서에 있는 순서의 그림
레위기 1장부터 5장까지에 있는 다섯 가지 제물들의 순서는 요한 일서 1장의 순서의 그림이다.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는 우리를 하나님과의 교통 안으로 이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번제이신 그리스도를 취하고 우리의 일상 생활의 공급으로서 그분을 취할 때, 우리는 거룩한 평강 안으로 들어가며 이 평강 가운데서 우리는 삼일 하나님과 교통을 누린다. 그러므로 우리가 첫 번째 (번제-소제-화목제)세 가지 제물들을 체험한 결과는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통이다.
빛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의 실패와 잘못과 다른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잘못된 태도를 본다.
마침내 우리는 우리가 바깥의 죄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육체 안에 거하는 죄를 깨닫게 된다.
심지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죄임을 깨닫는다. 우리는 우리가 죄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다.
우리는 선해지려고 하고 옳은 것을 행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상황은 정반대가 되고 우리는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을 배우게 된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7).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통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가 죄 있으며 속의 죄와 바깥의 죄들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속에 죄의 「어미」를 갖고 있으며 바깥에 이 죄의 어미의 「자식들」인 죄의 행위들을 갖고 있다.
갈라디아서 5장 19절부터 21절까지는 육체의 일을 말한다.
이 일에는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일이 포함된다. 교회 생활 안에서 우리가 분쟁과 시기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교회 생활 안에는 또한 당짓는 것이 있다. 즉 성도들은 어떤이들을 자기 편으로 취하려고 한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의 상황이었다.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고전 1:12).
우리가 교회 생활 안에서나 가정 생활 안에서 분쟁과 시기와 분리함과 당 짓는 것을 가진다면, 우리는 육체 안에서 살고 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통을 가진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이 육체의 일을 행한다면 우리는 어두움 속에서 행하는 것이며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 생활 안에서 분쟁과 시기와 분리함과 당 짓는 것을 가진다면, 이것은 우리의 교회 생활이 어두움 가운데 있음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 안에 있다고 말하면서 우리의 남편이나 아내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 잘못된 점이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만족케 하기 위해 우리의 번제이신 그리스도를 취하고 우리의 매일의 음식이 되도록 우리의 소제이신 그리스도를 취한다면, 우리는 빛 가운데 있을 것이며 빛 가운데서 행할 것이다. 그럴 때 거룩한 빛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의 실패와 부족함들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남편이나 아내를 대할 때 합당한 태도를 가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것을 깨닫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자백할 것이다.
우리가 어떤 형제들을 비판했거나 어떤 성도들을 우리 편으로 취했다면, 우리는 이것 또한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오, 우리 모두가 기꺼이 빛비춤 받고자 하고 빛을 받도록 주님을 앙망하기를 바란다. 우리가 주님을 누린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빛 가운데 있어야만 한다.
골로새서 1장 12절은 그리스도가 빛 가운데 있는 성도의 기업의 부분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어두움이나 비판이나 당들 가운데 있는 성도들의 분깃이 아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빛 가운데 있는가 아니면 어두움 가운데 있는가?
우리가 빛 가운데 있지 않고서는 성도들의 분깃이신 그리스도를 누릴 수 없다.
첫 번째 세 가지 제물들이신 그리스도를 누린 후 우리는 속죄 제물이신 그분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분을 누릴 때 우리 존재 깊은 속에서, 『주님, 제가 당신의 임재 안에 있음으로 인해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 나는 나의 매일의 공급으로서 당신을 취합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동시에 빛이 비추일 것이다. 빛은 우리가 우리의 배우자에게 한 말에 비추며, 혹은 우리가 어떤 형제를 비판한 말에 비출 것이다. 즉시로 우리는 자백하고 우리를 용서하시도록 주님께 구할 것이다.
종종 내가 그분을 누릴 때, 주님은 내가 어떤 사람을 칭찬한 말에 관하여 나에게 빛 비추시어 나의 말이 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나의 육체, 곧 나의 천연적인 존재로부터 나왔음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을 칭찬한 말이나 그들의 장점을 말한 내 말을 주님께 자백해야만 했다. 선하든 악하든, 영 안에 있지 않은 모든 것은 한 근원-육체-에 속한 것이다.
다른 이들을 비판하는 것은 육체에 속한 것이며, 우리의 천연적인 존재로부터 나온 다른 이들을 칭찬하는 말도 육체에 속한 것이다.
우리가 영을 좇아 절대적으로 행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우리의 생각을 영에 두는 것(롬 8:6)만 이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다.
로마서 8장 4절에서 바울은 율법의 의로운 요구가 영을 좇아 행하는 자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바울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할 때 율법의 의로운 요구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하지 않는데, 이는 선한 일이 생명나무를 따른 것이 아니라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를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한 것을 하려고 애쓰는 대신에, 단지 영을 좇아 행해야 한다.
우리는 영 안에서 기름 부음을 갖지 못할 때에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영 안에서 행하는 것이며 육체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이것을 적용해 볼 필요가 있는 예를 들어본다...속칭, 세간에서 <일종의 대화기범으로 추천하는, 스스로를 긍정적이고 개방적으로 보이기 위해 취하는 바, 미소 짓고--먼저 인사하고--대화의 물꼬를 트고---칭찬하기>에 대해, 그 움직임의 근원적 에너지가 내주하시는 주님께로부터 넘쳐 흘러나옴으로 말미암는 자발적 표현인지, 더 나아가 절대적으로 주님을 위함인지를, 주 앞에서 다시 한번 곰곰이 점검해 보라..]
----육신과 십자가
주님의 회복을 미국으로 가져온 때로부터, 나는 네 가지 문제-그리스도와 그 영과 생명과 교회-로 고심하여 왔다. 이 문제들에 대한 나의 부담은 매우 무거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메시지에서, 나는 육신과 십자가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부담이 있다.
우리는 육신이 무엇이며 그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오늘날 주의 회복 안에서 우리에게는 육신과 십자가에 관한 말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누림은 누룩과 꿀로 가득찬 것이 될 수 있으며 또한 소금이 없는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교회들에게 소금, 곧 십자가를 말하고자 하는 부담이 있다.
육신과 십자가를 말하는 데 있어서, 나의 관심은 교리적인 것이 아닌 체험적인 것에 있다.
우리가 이 몸 안에서 사는 한 우리는 여전히 육신을 갖는다. 우리는 방심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우리는 침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낸 바 되었으나, 사탄은 장사지냈던 것을 소생시키려고 한다. 때문에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하며, 특히 아침에 일어날 때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전날 밤에 교통 가운데서 주님을 누린 후 평온히 잠이 들지만, 아침에 일어날 때 악한 육신은 우리를 따르도록 할 것이다.
육신이 장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여전히 우리의 아내나 남편에 관하여 혹은 어떤 형제들에 관하여 소극적인 생각이 들도록 우리를 유인하려고 할 것이다.
우리는 그런 생각들이 우리 육신의 마귀적인 부활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럴 때에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필요가 있다. 『주님, 저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저는 당신의 대적이 부추기는 이 사악한 육신으로 행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주님, 저는 당신을 누리고 싶습니다.』
그럴 때 아마도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계속해서 이렇게 기도할지 모른다. 『아버지, 나는 당신의 아들, 나의 사랑스러운 주님을 나의 번제로 취합니다. 나는 절대적으로 당신을 위할 수 없으나, 그분 안에서 그런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나는 그분을 당신께 드리는 나의 번제로 취합니다. 나는 또한 그분을 나의 매일의 제물로 취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화목제이신 그리스도의 누림 안으로 이끈다. 그런 다음 주님 앞에 있을 때, 우리는 빛 비춤 받고 드러날 것이며,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보게 될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속죄 제물이신 사랑스러우신 주 예수님이 필요하다. 이것이 번제, 소제, 화목제이신 바로 그 그리스도를 우리의 속죄 제물로 취하는 것이다.
이 순서는 교리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개인적이며, 종종 뼈아픈 체험에 따른 것이다.
우리는 TUQ과 함께 화목을 누리는 체험을 가질 때마다, 우리에게 속죄 제물이 필요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 자백하며, 『아버지, 나는 나에게 그렇게 죄가 많다는 것을 깨달은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나에게 죄가 있을 뿐 아니라 나는 죄 자체입니다. 죄가 나의 육체 안에 거하며 나는 죄의 총체(總體)입니다. 나는 나의 속죄 제물이 되시는 주 예수님이 너무나 필요합니다. 나의 속죄 제물이신 그분이 얼마나 나에게 귀한지요!』라고 말할 것이다.
육신으로부터 나온 모든 것이 죄이다. 우리가 다른이들을 비판하든지 칭찬하든지 둘 다 그 근원은 육신 안에 있으며 죄이다.
이 육신을 처리하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 소금이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 생활, 가정 생활, 교회 생활에 많은 소금이 필요하다. 오직 우리가 소금을 가질 때만이 「병균들」이 활동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오늘날 교회 생활은 「역병(제한)」, 곧 십자가의 체험으로 병균들을 죽이는 것이 필요하다. 이 죽이는 것은 주님의 긍휼이다. 즉 그것은 우리에게 주님의 자비로운 구원이다.
----죄와 육신과 사탄과 세상
신약에 따르면, 분리될 수 없는 네 가지가 있는데 곧 죄와 육신<죄의 몸>과 사탄과 세상이다. 이 네 가지는 하나이다.
----성경에 있는 육신의 세 가지 의미
성경에서 육신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육신은 사람 몸의 살을 의미한다(창 2:7).
둘째, 창세기 6장 3절에서 육신은 타락한 인류를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바울이,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라고 말한 로마서 3장 20절의 의미이다.
세째, 육신은 타락한 몸을 의미한다(롬 7:18).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창조하셨으나, 몸이 타락한 후에 그것은 육신이 되었다. 영 안에서 사는 영적인 사람과 혼 안에서 사는 천연적인 사람은 대비되며, 육체 혹은 육신에 속한 사람은 육신의 욕심 안에서 산다(고전 3:1, 3, 2:14).
----말씀이 육신이 됨
요한복음 1장 14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말한다.
여기서의 「육신」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요한복음 전체의 문맥에 따르면, 1장 14절의 육신은 타락한 사람, 죄인을 말한다.
말씀이신 하나님이 타락한 사람, 곧 죄인이 되셨으나 단지 모양에 있어서만 그러하다. 바울은 이것을 로마서 8장 3절에서 분명히 말한다.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이것은 요한복음 1장 14절에 있는 육신이 죄의 육신임을 증명한다.
성육신의 의미는 하나님이 죄인의 모양이 되셨다는 것이다. 라일리(Ryrie) 박사는 그의 주석에서 이 구절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분이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셨으며 그분 자신을 성육신 안에서 죄의 인성과 연합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놋뱀의 예표(요 3:14, 민 21:4-9)는 그리스도가 죄의 육신을 가진 것이 아니라 죄의 육신의 모양을 가졌음을 가리킨다.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을 향하여 죄를 범했을 때, 뱀에게 물려 죽게 되었다. 하나님의 눈에서 보실 때 사실상, 그들은 죽은 자들이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들이 받을 하나님의 심판 대신에, 놋뱀을 들어 놋뱀을 바라봄으로 그들이 구원을 받고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놋뱀이 그들의 구주였다. 이것은 예표이다.
요한복음 3장 14절에서 주 예수님은 이 예표를 그분 자신에게 적용하셨으며, 그분이 육신 안에 계실 때, 바울의 말을 빌린다면, 그분이 죄의 육신의 모양으로 계셨을 때, 그 모양이 놋뱀의 형태임을 보여주셨다. 그분은 독이 없는 뱀의 형태를 지니셨다. 그리스도는 죄의 육신의 모양이 되셨으나 육신의 죄는 없으셨다(고후 5:21, 히 4:15).
놋뱀은 우리의 구주이신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하나님의 어린 양과 놋뱀과 밀알
요한복음에는 세 가지 표상이 죽음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기술하는 데 사용된다. 즉 하나님의 어린양(1:29)과 놋뱀(3:14)과 밀알(12:24)이다.
이 표상들은 우리의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세 방면으로 기술한다.
죄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 그분은 어린양이시다. 사탄, 곧 옛뱀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그분은 놋뱀, 곧 죄의 육신의 모양 안에 계신 분이다.
우리를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로 산출하는 신성한 생명을 해방하는 데 있어서, 그분은 밀알이시다. 그분은 어린양-구주이시며, 뱀-구주이시며, 밀알-구주이시다.
우리는 우리의 구주이신 그분을 세 방면으로-우리의 죄를 처리하는 것과 옛 뱀을 멸하는 것과 우리를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로 산출하는 것-갖는다.
나는 아담, 곧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사람이 잘 생겼으리라고 믿는다.
그와는 반대로 주 예수님은 용모의 아름다움이나 고움이 없으셨으며 외적으로 흠모할 만한 것이 없으셨다(사 53:2).
그분은 모든 종류의 슬픔을 겪었던 한 사람이셨다(사 53:3). 우리의 주님은 타락한 사람의 모양이 되셨다.
그러나 주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 계셨을 때 하나님은 그 모양을 실제로 여기셨다.
----육신 안의 죄와, 옛 사람, 사탄, 세상이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처리됨
신약은 그리스도가 육신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 육신 안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분은 죽으실 때 단지 하나님의 정죄받는 육신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셨다.
로마서 8장 3절은,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라고 말한다. 주 예수님이 육신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하나님은 육신 안의 죄를 정죄하셨다. 죄는 단지 어떤 문제가 아니라 한 인격이며, 이 인격은 정죄 받아야만 한다. 십자가 위의 주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육신 안의 죄를 정죄하셨다.
이것은 육신의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육신 안의 죄가 정죄 받았음을 의미한다.
로마서 6장 6절은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의 옛사람은 육신 안에 있다.
그리스도께서 육신 안에서 못 박히셨기 때문에 육신 안에 있는 우리 옛 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있었다.
우리 옛 사람은 육신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가 정죄 받고 우리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뿐 아니라 사탄 마귀도 멸하여졌다(히 2:1`4).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세상이 심판 받았으며, 세상의 통치자, 임금이 쫓겨났다(요 12:31).
그러므로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네 가지, 곧 육신 안의 죄와 옛 사람과 사탄과 세상이 처리되었다.
이것은 육신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소극적인 것들이 처리되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의 속죄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취할 때마다 이것을 깨달아야 한다.
속죄 제물은 육신 안의 죄가 정죄 받았고, 우리의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사탄이 멸하여졌으며 세상<=사탄 체계>이 정죄 받았고 세상의 임금<=마귀>이 쫓겨난 것을 의미한다.
우리 모두는 그런 속죄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취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가 번제, 소제, 화목제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삼일 하나님과의 교통 안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우리의 속죄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적용해야 한다.
=======
메시지 19 - 속죄 제물-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위한 그리스도 (2) (( 레위기 4:1-7, 13-18, 22-25, 27-30, 32-34))
이번 메시지에서 우리는 속죄 제물에 관련된 여러가지 문제들을 살펴 볼 것이다.
Ⅰ. 속죄 제물의 의미
A. <계명중 하나를> 그릇 범한 죄를 위하여
레위기 4장은 여러 번 그릇 범한 죄에 관해 말한다(1-2, 13, 22, 27절).
그릇 범한 죄는 잘못, 실수, 혹은 간과(看過)를 말한다. 즉 그것은 고의적으로 짓지 않은 죄를 의미한다.
우리는 죄를 지으려는 의도가 없음에도 부지 중에 죄를 짓는다.
레위기 4장의 그릇 범한 죄는 우리의 타락한 본성 안에 있는 죄, 곧 내재하는 죄를 의미한다.
아담에게서 받은 죄가 우리 육신 안에 거한다. 많은 때 우리는 부지 중에 죄를 짓는다.
이 죄들은 내재하는 죄에서 나온 것이다.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죄가 왔으며 인류 안으로 들어왔다(롬 5:12).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는 죄라 불리우는 어떤 것이 있다.
로마서 7장에서 죄는 인격화 되었는데, 이는 그 죄가 우리 안에 거할 수 있으며(17절), 우리를 죽일 수 있으며(11절), 우리 안에서 많은 일을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는 살아 있는 한 인격이다.
우리는 죄가 사탄 자신이라고 말하는 구절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죄가 사탄의 본성임을 가리킨다. 죄는 사탄의 본성므로, 죄는 사탄 자신이다.
죄는 아담이 타락할 때에 인류에게 들어왔다. 이것은 아담의 타락이 죄, 곧 사탄의 본성, 심지어 사탄 자신인 죄가 우리 존재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문을 열어놓았음을 뜻한다.
로마서 7장은 죄가 우리 육신 안에 거한다고 분명히 말한다(17, 20, 23절).
우리는 종종 선한 일, 예를 들면 우리의 부모를 공경하거나 우리의 형제를 존중하려고 하나 결과는 그와는 정반대이다.
우리는 부지 중에 죄를 지었으며, 우리가 하려는 의도가 없었던 어떤 것을 행한다.
바울은 이것을 체험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 7:20下).
로마서 7장에서 우리는 두 인격을 본다. 한 인격은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고, 첫 번째 사람 안에 있는 또 다른 인격은 죄를 짓는다.
이것은 바울이 두 인격 곧 다소의 사울인 그 자신의 생명과 죄라고 불리우는 어떤 것의 생명으로 살았음을 가리킨다.
이 두 인격이 함께 살았지만, 자발적인 것은 아니었다. 때때로 그들은 좋은 친구였으나, 종종 그들은 서로 싸웠다.
로마서 7장은 우리가 구원받기 전뿐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의 체험을 묘사한 그림이다.
당신은 당신 안에서 계속되고 있는 전쟁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적이 있는가?
한면으로 우리는 『나는 교회를 사랑한다.』라고 말할 것이며 또 한면으로는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이 『나는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나는 모든 성도들을 사랑한다. 그들 모두는 사랑스럽고 귀하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할 수 없는 어떤 장로가 있을 수 있다.
우리 안에 싸움이 있다. 우리는 거룩해지기를 열망하나 그 결과는 거룩하지 않은 것이다. 하루 종일 우리는 무지의 죄들을 짓는다.
우리는 여러 해 동안 그리스도인이었으나, 여전히 우리 안에는 계속해서 싸우는 전쟁이 있다.
우리는 완전해 지고자 하지만, 무지의 죄들인 많은 것들을 행한다. 따라서 우리 안에 거하는 죄로 인해 우리가 무지의 죄들을 짓기 때문에 우리는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다.
우리의 육체에서 나온 모든 것은 죄이다. 하나님의 눈에서 보실 때, 심지어 우리의 육신에서 나온 사랑도 죄이다.
나쁜 것만 죄가 아니라 선한 것조차도 육체에서 나온 것은 죄이다. 그것은 산출이나 결과가 아닌 근원이다.
이것이 갈라디아서 5장 24절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말한 이유이다.
사람의 관점에 따르면, 육신은 나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선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선하든 나쁘든, 또는 그 중간이든 우리가 육신인 한 우리는 죄이다.
육신은 완전히 죄와 하나이며(롬8:3), 죄는 완전히 사탄과 하나이다. 사실상 죄는 사탄이다. 더 나아가서 사탄은 세상과 하나이며, 세상은 세상의 임금과 하나이다(요 12:31).
이 다섯가지, 곧 육신과 죄와 사탄과 세상과 세상의 임금(권세 혹은 권력)은 하나이다.
오늘날의 세상은 육신과 죄와 사탄과 세상의 임금과 연관된다.
여기서의 「임금」은 권세나 권력을 함축한다. 세상은 사실상 권력을 잡기 위한 분투이다. 모든 사람과 모든 나라가 권력을 잡기 위해 분투한다.
예를 들어 어떤 교수는 자신이 사회를 돕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사회에 유익한 어떤 것을 발명하려고 한다고 말할지 모른다.
사실상 그는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권력을 잡기 위해 분투한다. 이 권력을 잡기 위한 분투는 육신과 죄와 사탄과 세상과 세상의 임금의 결과이며 산출이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에서 26절까지는 육신과 그 영과의 싸움을 말한다.
이 부분에 포함되는 26절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고 말한다.
이 구절에는 헛된 영광을 위한 분투가 있다. 이것은 교회 생활에서도 헛된 영광을 위한 분투가 있을 수 있음을 가리킨다.
이것은 바울이 여기서 교회들, 곧 고대 로마제국의 지방이었던 갈라디아의 교회들에게 썼다는 사실에 의해 증명된다(갈1:2).
우리 모두는 헛된 영광을 구한다. 이것이 우리의 상황이 아니었다면 바울은 이 말을 우리에게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5장 16절부터 26절까지에 언급된 것들이 갈라디아의 교회들 가운데 있었으며 오늘날 우리들 가운데는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절들을 그 교회들에게만 적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런 구절들을 읽을 때 우리 자신을 포함시켜야 한다.
우리가 요한복음 3장 16절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갈라디아서 5장 16절부터 26절까지에 있는 말씀도 우리에게 적용해야 한다.
속죄 제물은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단지 죄 자체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신과 사탄과 우리 육신 안에 있는 악한 자와 세상과 권력을 잡기 위한 분투도 다룬다.
성경에 따르면, 죄는 이 네 가지와 연관된다.
사탄은 세상의 임금이다. 사탄은 심지어 그런 임금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이사야 14장은 그가 하나님과 가까왔으나 만족하지 못했음을 계시한다. 그는 하나님보다 높아지기를 원했으며, 적어도 그분과 동등해지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성경이 죄를 정죄할 때, 그것은 사탄과 또한 육신과 세상과 권력을 잡기 위한 분투를 정죄한다.
땅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권력을 잡기 위한 분투이다.
사람들이 주는 모든 좋은 연설과 강연과 설명들은 단지 권력을 잡기 위한 분투를 가리는 구실이다.
B. 자신의 아들을 죄의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고 죄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육신 안의 죄를 정죄하심
속죄 제물은 또한 자신의 아들을 죄의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고 죄에 관하여,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육신 안의 죄를 정죄하셨음을 의미한다(롬 8:3).
그리스도는 육신이 되셨다. 즉 그분은 죄의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다(요 1:14).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해 죄를 삼으셨다(고후 5:21).
십자가 위에 계시는 동안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해서 뱀의 모양으로 심판받으셨다(요 3:14). 하나님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육신 안의 죄를 정죄하셨다.
Ⅱ. 속죄 제물의 효능
속죄 제물의 효능은 단지 죄를 처리하는 사실만이 아니다. 그 결과는 훨씬 더 크다.
속죄 제물에서, 타락한 사람, 옛사람은 그리스도의 육신 안에 포함되어 처리되며(롬 6:6), 타락한 사람의 본성 안에 있는 죄는 정죄 받으며(롬 8:3), 죄 자체인 사탄은 멸하여지며(히 2:14), 세상은 심판 받고, 세상의 임금은 쫓겨났다(요 12:31). 이것이 속죄 제물의 효능에 관한 거룩한 말씀 안에 있는 계시이다.
만일 우리가 이 계시를 본다면, 우리는 우리의 속죄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취하는 것이 단지 우리의 죄를 자백하는 죄를 처리하는 문제가 아님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의 속죄 제물로서 그리스도를 취하는 것은 또한 우리의 옛 사람과 사탄과 세상과 권력을 잡기 위한 분투가 처리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들이 속죄 제물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우리의 속죄제물로 취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 타락한 사람과 타락한 사람의 본성 안에 있는 죄와 사탄과 세상과 권력을 잡기 위한 분투와 연관되는 문제이다.
Ⅲ. 속죄 제물로 드려지는 여러가지 가축들
레위기 4장에는 속죄 제물로 드려지는 여러가지 가축들이 있다.
A. 수송아지, 수염소, 암염소, 어린양
속죄 제물은 수송아지와 수염소와 암염소와 어린양이 될 수 있다(레 4:3, 14, 23, 28, 32).
이것은 속죄 제물이신 그리스도가 여러 사람들에 의해 여러가지 다른 정도로 체험되어 질 수 있는 분임을 의미한다. 속죄 제물이신 그분 자신 안에서 그리스도는 크기가 다르지 않다.
그분은 항상 같다. 그러나 우리가 속죄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깨닫고, 나타내고, 적용하는 것은 정도가 다를 수 있다.
우리의 속죄 제물이신 그리스도의 크기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속죄 제물로 취하는 정도에 달려 있다.
우리는 우리의 속죄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더 높게 혹은 더 낮게 취할 수 있다.
한 형제는 자신의 죄를 처리하기 위해 속죄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취하지만, 죄가 육신을 함축한다는 것은 깨닫지 못할 수 있다.
두 번째 형제는 속죄 제물이 육신을 함축한다는 것은 깨닫지만, 그것이 또한 사탄을 처리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할 수 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죄가 거하는 한, 육신과 사탄과 세상과 권력을 잡기 위한 분투가 또한 나타난다는 것을 본다면, 우리는 큰 수소이신 그리스도를 드릴 수 있다.
B. 흠이 없음
레위기 4장은 속죄 제물이 흠이 없음을 말한다(3, 23, 28, 32절).
이것은 그리스도가 죄가 없음을 상징한다(고후 5:21, 히 4:15).
Ⅳ.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음
레위기 4장은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 것(안수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4, 15, 24, 29, 33절).
이것은 제물과 제물을 드리는 자와의 연합을 상징한다.
Ⅴ. 여호와 앞에서 제물을 잡음
속죄 제물은 여호와 앞에서 잡혔다(4, 15, 24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속죄 제물로서 하나님 앞에서 죽임당하셨으며, 그분이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으셨음(사 53:10上)을 상징한다.
Ⅵ. 속죄 제물의 피
속죄 제물의 피는 네가지 다른 효능이 있다.
A. 어떤 피는 장막 안으로 가져가 지성소 장 앞에 일곱 번 뿌림
속죄 제물의 어떤 피는 회막 안으로 가져가 지성소 장 앞에 일곱 번 뿌려졌다(레 4:5-6, 16-17).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구속을 위해 하늘에 있는 지성소 안으로 가져가졌음을 상징한다(히 9:12).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상황을 지성소 안에서 하나님으로 덮는다.
B. 어떤 피는 분향단의 뿔에 바름
어떤 피는 분향단의 뿔에 발라졌다(레 4:7, 18上).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의 구속이 우리가 기도 안에서 하나님을 접촉케 하는 효능이 됨을 상징한다(히 10:19).
이것이 우리가 피를 힘입고 기도해야 하는 까닭이며, 우리는 피를 힘입은 우리 기도 안에서 하나님을 접촉케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