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성전=http://mission.bz/7538사도바울의 비유 (고린도전서 3:16-17)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앞장에서 우리는 집을 짓는 기초가 되는 터에 대한 이야기를 한바 있습니다. 거기에 이어 오늘 본문은 좀더 깊이 있는 말씀으로 우리가 곧 하나님의 성전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쌓아가고 있는 신앙의 인격, 다시 말하면 우리가 짓는 집은 보통 집이 아닌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이 표현은 사도 바울 특유의 비유입니다. 우리는 '성전'이라는 말을 대할 때이면 곧장 솔로몬의 성전을 연상하게됩니다. 다윗이 성전을 짓고자하여 하나님께 아뢰었으나 잦은 전쟁으로 많은 피를 흘렸다하여 그 아들 대에 가서 짓게 하심으로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7년간에 걸려 장엄하고 화려하게 지었던 그 영광스러운 성전을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생각하기 전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으니 그 첫째는 성전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생각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집은 사람의 집이 아닌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이 성전은 하나님의 설계에 의해서 지어졌다고 하는 생각입니다. 물론 다윗의 준비가 있었고 온 국민의 정성이 깃들였으며, 바벨론으로부터 백향목이 오는가 하면 목수들이 나무를 다듬는 등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가운데 솔로몬을 통하여 지어졌으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바는 이 성전은 하나님께서 설계를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성전의 길이와 높이, 폭은 물론 섬세한 부분에까지 써야할 자재들과 준비해야 하는 기명들을 일일이 지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이 성전이 다윗에 의해 뜻이 정해지고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가운데 솔로몬에 의해 완성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에 대한 경륜과 설계는 하나님께서 친히 하셨다는 것을 성경은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음 세 번째로 생각할 것은 이 성전은 하나님을 위한 집이라고 하는 생각입니다. 이 성전 안에서 되어지는 모든 일을 이 집을 하나님의 집이 되게 하는데 근본 목적이 있습니다. 집이란 하나의 기구입니다. 만약 그대로 세워 놓고 사용하지 않는 집이라면 그것은 집이라기 보다는 마치 하나의 비석과도 같은 것입니다. 집이란 그릇과도 같아서 반드시 어떤 목적을 위해 쓰여지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가르치는 바 하나님의 집은 오직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쓰여지는 집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넓은 의미로 말한다면, 온 우주가 모두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래서 시인도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이라."고 노래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특별히 성전이 하나님의 집입니다. 가끔 우리가 피곤할 때이면 하나님은 어디에나 게시는 분이시니 굳이 교회에 가서 예배드릴 것 없이 집에서, 더욱이 골방에서 기도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물론 모든 집이 다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성전을 짓도록 허락하신 목적은 이 집만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쓰여지게 하는데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성전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성전이란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고,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쓰여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정성을 다할 때에는 보수도 하면서 성전을 잘 보존해 나갑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 향한 믿음이 식어지게 되어 이럭저럭하다가 우상 숭배를 하는 등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집에 대해서 소홀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하나님의 집은 먼지가 끼이고 퇴락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 좋은 예로서는 요시야 왕이 퇴락한 성전을 수리한 일입니다. 그 때 요시야 왕은 대제사장 힐기야를 통해 오랜 세월 찾지도 않고 버려져 왔던 율법 책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성전 수리에 대한 보너스를 얻은 셈입니다. 이렇게 하여 율법 책을 대하게된 요시야 왕은 옷을 찢으며 지난날을 회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그 성전이 얼마나 깨끗하고 아름답게 보존 되느냐하는 것이 곧 그 성전 안에서 예배하는 사람들의 정성과 믿음을 나타내는 척도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실 예배당을 잘 짓고 못 짓고 하는 것이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예배당을 보살피는 정성입니다. 가끔 어떤 교회에 가보면 저 만큼 윗쪽에 유리창이 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자세히 보면 오래 전에 깨어진 것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어떤 때에는 전등을 쳐다보면 그 중 몇개가 쭉 나간 채 불이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만 불이 오지 않는다면 오늘 저녁에 나가서 미쳐 끼울 여가가 없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여러 개가 나간 채로 그냥 그러고 있으니 마음 아픈 일이란 말입니다. 그 교회 교인이라면 누구인들 그것을 쳐다보지 않았겠습니까? 쳐다보았더라면 어떤 마음으로든 바꾸어 끼웠어야 할 것이란 말입니다. 아무튼 그 교회를 출입하는 성도들의 믿음과 정성이 그 성전을 지켜나가는 일에도 잘 나타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말한 요시야 왕과는 달리 유다 왕 므낫세는 온갖 악행을 자행하는 중에 하나님의 성전을 아무렇게나 생각하며, 성전 뜰에 우상을 세우기까지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를 용서치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을 통하여 그토록 귀하게 지은 솔로몬 성전을 헐어버리고 마십니다. 이미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린 집! 하나님을 위해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위해 쓰여졌으니 그런 집이 성전의 이름으로 거기에 서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 성전을 깨끗이 헐어 버리신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교회는 상당히 크게 부흥이 되었어야할 역사적인 교회입니다. 그런데도 이 교회는 부흥이 잘 되지를 않는 가운데 안으로 계속 문제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영적으로 역사를 관찰하는 이들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란 10년 전 교회가 두 파로 나누어 싸울 때에 2층과 아래층에서 각각 따로 예배를 드리면서 2층에서 찬송을 하면 아래층에서는 기도를 하는가 하면 고함을 지르듯이 설교를 하는 등 아무튼 그런 식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싸웠다고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계속 그렇게 하다보니 사람도 사람이지만 얼마 후에는 예배당이 퇴락되어 폐허같이 되었다는 것이니, 이미 하나님의 영광은 그곳을 떠난 것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집은 쓸데없는 집이 된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헐어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성전의 존재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데만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2:22 말씀에 보면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계속해서 성전을 아름답게 지어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제 성전을 비유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본문 말씀의 의미를 살펴보면 첫째로, 너희는 성전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의 주제가 되는 말씀으로 믿는 자의 몸과 인격이 곧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입니다. 이를 위해 고린도전서 6:19 말씀을 한 곳 더 찾아보면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몸이라는 말은 반드시 육신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 것으로 해석을 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바의 요점은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나'라고 하는 몸이 나의 것이 아니라 성전이 되었고 성전의 주인은 하나님이시요 또한 성령이시란 말입니다. 그리고, 내가 성전 된 것은 값으로 산 것이기 때문에 이 내 몸은 제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피 값으로 샀으니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예수 믿기 전에 가졌던 생각이나 행동을 계속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며, 오직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전이라는 생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이제 두 번째로 생각하는 것은 성전이라고 할 때에는 임마누엘의 의미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는 하늘 높은 보좌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서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렇게 초월해 계시면서도 우주에 충만한 분이신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서 성전에 계신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비하(겸비/강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를 낮추셔서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신다는 상징과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머무는 동안 그들은 천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열두지파가 하나님의 명하신 바에 따라 천막을 치고 살면서 행진을 한 것인데 그 한 가운데에는 넓게 터를 잡은 고급 천막, 즉 붉은 물을 들인 수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으로 덮개를 한 특별한 천막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천막은 천막인데 질이 다른 천막이 있었다는 것이며 그것이 곧 성막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양상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성전 건축에 관한 책들을 읽어보노라면 성전 건축에 관한 신학적인 의견 가운데 가장 중요한 발언은 성전건축의 가장 중요한 의미가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심을 실증해 주시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천막을 치고 살 때에는 내 집도 천막을 치라고 말씀하신 것이며,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하여 백향목으로 궁전을 짓고 좋은 재료로 집을 지을 때에는 내 집도 백향목과 좋은 것으로 지으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모양을 같은 것으로, 장소는 중앙에, 질은 최고급으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그 자료들을 보면 당시에 있어서는 제일 좋은 가죽과 금, 은으로 만들어지고 덮여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왜냐하면 하나님의 집이므로 그만큼 정성을 들여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성전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전을 출입하는 사람은 높은 보좌에 계신 분이 여기 이렇게 낮고 천한 우리와 함께, 그보다는 나와 함께 계신다는 감사의 마음으로 언제나 성전을 출입해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성경이 말씀하는 바에 의하면, 그 구조상으로 보아 완전한 성전이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세 가지의 중요한 또 다른 상징적 의미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하나가 성전의 뜰입니다. 사실 예루살렘 성전은 넓은 뜰뿐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자칫 우리 생각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얼마나 컸기에 수십만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한꺼번에 들어가서 예배를 들일 수 있었나 합니다 만은 그런 것이 아니라 성전 뜰에 그대로 서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좋은 의자에 앉아서도 춥다 덥다 하면서 말이 많습니다만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은 춥고 덥고 에 상관치 않고 뜰에 선 채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가끔 영화 같은 것을 통하여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큰 성당 같은 데서는 서서 미사를 드리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요즈음도 교황이 미사를 드릴 때에 보면 군중들이 바깥마당에 모두 서있는 장면을 볼 때가 있습니다. 이제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드린 장소가 성전의 뜰이라면, 그 뜰 자체도 성전인 것이며 또한 그렇게 부릅니다. 여기가 바로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소와 양을 파는 자들을 내어쫓았다고 하는 그 뜰인 것입니다. 다음 두 번째는 성소입니다. 이것은 건물 내부에 속한 것으로 휘장을 사이로 하여 지성소와 구분되어지는 다른 한 부분입니다. 이 성소에는 향단과 등대와 떡상이 있으며, 제사장들은 이곳을 출입하며 제사를 드리게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지성소입니다. 이 지성소는 성소에 비해 훨씬 작은 공간으로 법궤가 있으며, 그 법궤 안에는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돌비가 있고 그리고 선택의 상징이 되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있으며, 하나님께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리셨던 만나를 담은 항아리가 있다고 합니다. 이들 세 가지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들이기에 여기에서 그 설명을 다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한마디로 말한다면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그리고 말씀하시며, 선택하신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성소 안에는 이러한 상징적인 궤짝이 하나 놓여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반드시 기억할 것은 이러한 것을 가지고 성전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지성소 안에 있는 법궤 위의 속죄소를 향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구름이 덮여져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임재, 이 영광이 떠나면 이미 그것은 성전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비록 굉장한 규모로 성전을 지었다하더라도 하나님의 집이 진정 하나님의 집이 되는 것은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비춰질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러한 성전이 해야할 일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적으로 말해 제사를 드리는 일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말씀을 전하고 토론을 하기도 합니다 만은 가장 중요한 역할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렇다면 제사란 무엇인가 할 때 우리는 흔히 하나님 앞에 선물이나 뇌물을 드려서 하나님을 기뻐하시게 하자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합니다 만은 제사가 갖는 신학적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이사야서 1장에 보면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11) 시며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13)고까지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기 타는 냄새를 좋아하거나 즐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문제는 믿음과 정성을 드림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란 하나님 앞에 뇌물이나 선물을 드리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기억할 것은, 제사를 지은 죄에 대한 보상 행위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죄를 지었으니 이 양 한 마리를 잡아서 드리면, 그 죄가 보상이 되겠지 하는 생각을 하기가 쉽지만 사실은 그런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제사를 죄의 값을 치루어 하나님의 진노를 막으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근본적인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제 제사를 드리는 가장 중요한 의미가 무엇이냐고 할때 그것은 하나님의 자기 희생, 곧 형언불가능한 십자가 사랑의 계시에 대한 감사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의미를 분명하게 알고 제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양과 소를 잡아 바치는 일은 우상 앞에서도 행해지는 일들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를 자칫 잘못 생각하면 우상 앞에 드리는 것처럼 혼돈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의 제물은 신의 진노를 막기 위하여 제물을 드린다는 식의 우상 이야기가 절대로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을 용서하시기 위하여 얼마나 큰 희생을 치루시는가를 보여 주시는 행위입니다. 그러기에 이것은 곧 십자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란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죄인을 영접하시고 사랑하시기 위하여 치르시어야 했던 엄청난 희생 그 자체입니다. 제사란 바로 그 희생을 치르는 계시로 주어진 것입니다. 어떤 때 보면은 남편의 외도로 인해 헤어져야할지 같이 살아야할지의 문제를 두고 의논을 해 오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이면 저는 먼저 남편이 집에 돌아오면 어떻게 영접하느냐고 물어 봅니다. 그러노라면 음식이고 옷이고 간에 모든 것을 정성껏 잘 대접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진정으로 사랑을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더러워서라고 하는 것인데, 그럴 때이면 제가 있다가 "이제는 더러워진 남편을 사랑하려면 당신이 더러워지는 아픔을 겪지 않고는 남편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해주고는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누구이든 죄인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가 죄인 되는 아픔과 희생을 치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흔히 보면 사랑은 한다고 하면서도 화해는 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러한 희생을 치루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더러워지는 것 같아서"라는 자기 결벽증에 빠져 있는 동안은 끝까지 저를 영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은 사랑을 하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사랑을 받는 사람도 그 사랑을 믿지 않으려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할 이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부득불 양을 잡아 드리는 제물을 통하여, 그리고 십자가를 통하여 내가 너를 사랑하기 위하여 이와 같이 생명이 죽는 희생을 지불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전은 바로 이러한 사랑의 희생이 계시되는 곳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성령이 우리 몸의 주인이 될 때 우리의 몸은 곧 성전이 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 가운데 인격적으로 계시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역사하십니다. 성령은 결코 마술적인 힘이 아니며 군주적인 폭력으로 역사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마치 다정한 사람이 곁에 앉아서 위로를 하며 유익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과 같은 인격적 관계로 우리 안에 함께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몸은 성령과 영이 만나는 장소가 되는 것이며, 이 때에 성령이 우리의 몸을 주관하게 되고 우리의 몸은 성령에 순종하게 될 때 성전으로서의 제 구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성령을 거역하게 되면 성령께서 떠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성령이 떠나면 그 집은 빈집이 됨과 동시에 예수님의 비유에서와 같이 마귀가 들어와 차지하게 됩니다. 그 결과 마귀의 집이 되고 나면 그 집은 마귀가 주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술 취한 사람을 향해 술도깨비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자기 정신이 아니기에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술이 사람을 지배하면서 도깨비놀음을 하고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이 우리의 인격을 지배하고 우리의 인격이 거기에 순종할 때,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이에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의 몸이 성전인 것을 전제하며 경고하기를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17)고 하였습니다. 다시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생각해 보면, 솔로몬 성전, 곧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힌 자를 하나님께서 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나 오늘이나 하나님의 집을 더럽힌 자를 용서하시기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죄목을 만들 때에도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마 26:61)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으로 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정상적인 과정은 아니었습니다만 은 아무튼 우리가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은 성전을 훼방하고 모독하는 것과 하나님을 훼방하고 모독하는 일과는 꼭 같은 죄로 다루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성전을 더럽히며 훼방한 사람은 끌어내어 돌로 쳐죽였던 것입니다. 이는 동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잘못 성전 가까이에 가서 오물이라도 배설했다면 그것 역시 돌로 쳐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전을 더럽히는 일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집을 소중히 여긴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축복하셨습니다. 그가 바로 다윗 왕입니다. 이를 위해 사무엘하 7장을 보면 다윗이 자원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짓겠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너를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는 등 여러 가지로 큰 축복을 내리셨습니다. 생각해 보면, 다윗처럼 하나님의 집을 사랑한 사람도 없는 것으로 보아집니다. 그리고 그만큼 그는 축복의 사람이기도 합니다.이제 오늘 본문 말씀의 결론을 보면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너희도 거룩하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성전인 우리의 몸은 언제나 거룩하고 깨끗하게 지켜져야 하는 것입니다. 거룩이란 말은 본래 구별이란 뜻의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편으로 구별하는 것이 됩니다. 저는 가끔 음식을 놓고 많이 먹기 대회를 하는 이들을 보면 참으로 미련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몸, 더욱이 성전이 되는 귀한 몸에 음식을 마구 집어넣어서야 되겠느냔 말입니다. 아무리 젊고 건강하다하더라도 몸을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술을 많이 먹는 사람의 간장을 보면 아예 간장을 뽑아서 술독에 담갔다가 꺼내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이고 보면 그것이 장차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성전을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몸을 깨끗이 하는 것도 신앙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일을 해야하는 소중한 그릇입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도 절제해야 하며, 자고 깨는 시간도 정해진 시간에 할 수 있어서 건강을 잘 지켜야 합니다. 가끔 저에게 "목사님 건강의 비결이 무엇입니까?"하고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비결은 오직 하나, 생활의 리듬(rhythm)입니다. 그저 먹는것 과식하지 않고 제때에 먹고, 자고 깨는 것 제시간에 해나가는 것이란 말입니다. 건강은 곧 일입니다. 건강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제하는 가운데 우리의 몸을 깨끗하고 건강하게 지킬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정신을 지켜야 합니다. 몸이 성전의 뜰이라면 정신은 성소입니다. 성소는 복잡하고 구질구질한 것들을 놓아두는 곳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정신이 잡스럽고 쓸데없는 일들을 생각함으로 복잡해지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어떤 사람은 좋지 않은 말을 들었다고 하여 물에 가서 귀를 씻었다고도 합니다 만은 어쨌든 우리는 마음을 깨끗하게 지켜야합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의 영을 깨끗하게 지켜야 합니다. 영은 지성소와도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이 영이 깨끗하지 못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서 3:10말씀에 보면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마땅히 찬송을 하고 전도를 해야할 입에서 악한 언어와 저주가 나왔다면, 그는 이미 성전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에 오늘 본문 말씀은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전제하에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게 지켜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출처/곽선희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아담의 갈비뼈로부터 창조된 하와 (Eve created from Adam's rib)==Russel Grigg
하나님은 왜 하와(Eve)를 아담의 갈비뼈(Adam's rib)로부터 만드셨을까? 결국, 하나님이 원하셨다면, 그분은 하와를 땅의 흙으로부터 쉽게 만들 수 있으셨다. 실제로, 하나님은 아담을 이런 방식(땅의 흙)으로 만드셨으며(창 2:7), 뿐만 아니라 '들의 모든 짐승' 및 '하늘의 모든 새'도 그런 방식으로 만드셨다(창 2:19). 그런데 왜 하나님은 하와를 다르게 만드셨을까? 아마도 그분은 아담과 하와의 역할에 관한 것뿐 아니라, '마지막 아담'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고전 15:45)의 역할에 관해서도 우리에게 알려주시길 원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좋지 않다”는 말의 첫 번째 언급 하나님이 하와를 창조하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 창조 이야기에 있어서, 독자들은 이 문장이 귀에 거슬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이전까지, 인류의 타락 이전에는 그랬으리라고 우리가 예상할 수 있듯이, 하나님은 그분의 창조물들을 돌아보실 때마다 '좋았더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첫 번째의 '좋지 않은' 일로써, 해결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위한 돕는 배필'로서 하와를 창조하셨다(창 2:18하). ‘돕는 배필’(히브리어 에쩨르)이라는 용어는 역할이나 신분이 낮은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기능에 관한 것이다. 그녀는 그의 상대편 혹은 그의 보족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 용어는 시편 33:20, 121:1~2에서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돕는다고 할 때 하나님께 사용되었다. 사실상 이 단어는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성경 이름 아짜리아의 어근이 된다. 하와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셨을 때 아담이 이렇게 말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창 2:23). =='한 몸'의 중요성 그러나 하와를 만들 때 꼭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었어야 했을까? 여기에 대해 캘빈은 이렇게 주석을 달았다: ”만약에 두 성(sex)이 서로 다른 원천으로부터 나왔다면, 그 둘은 서로 모욕을 했거나, 시기했거나 혹은 투쟁을 야기했을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아담의 몸 일부를 취한 이유는 그 자신의 한 부분을 보다 큰 자비심으로 끌어안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갈비뼈 중의 하나를 잃었지만, 그 대신에 훨씬 더 가치 있는 보상이 그에게 주어졌다. 그는 신실한 인생의 동반자를 얻은 것이다. 왜냐하면, 이전에 그는 불완전했었는데, 이제 그의 아내 안에서 완전하게 된 그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다.” 하와 역시 아담과 관계를 맺고 있어야 했다 - 만약에 그녀가 흙으로부터 창조되었다면, 전적으로 독립적인 창조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담의 한 부분으로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에, 독특한 방법으로 아담의 후손이 되었다. 하와가 아담의 후손인 것은 그녀의 구원 가능성을 위해서도 중대한 것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오실 메시야를 '친족-구속자'(사 59:20), 즉 그가 구속할 사람들과 혈연으로 연결된 사람이라고 썼다. 히브리서 2:11~18절은 예수님이 어떻게 해서 천사(혹은 성질상 외계인으로 가정되는 존재)를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사람의 형상을 입으셨는지를 설명해 준다. 예수님은 문자 그대로 우리의 친척이 되기 위해, 이 하나의 인간 가족의 한 부분이 되시기 위해 아담의 계보 안으로 들어오셨다(눅 3:23~38). 모든 사람들이 아담의 후손이 아니라면, 이 필수적인 친족-구속자 개념은 토대가 무너진다. 아니면 역으로 말해서, 오늘날 아담의 후손이 아닌 사람들이 있어서 아담을 통해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그들은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다. 두 가지 상황 모두 성경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책임 최초로 창조된 인간으로서 아담은 인류의 연합적(혹은 책임 있는) 머리였고, 지금도 그렇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을 향한 자기의 태도가 인간 역사의 과정을 결정한 사람이었다. 연대기적으로 아담 이후에 창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담으로부터 창조된 하와는 비록 그녀가 아담이 금지된 과일을 먹기 조금 전에 그것을 먹었지만(창 3:6), 성경에서 볼 때 하와에게는 이런 책임이 주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으로부터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은 아담이었으며(창 2:16~17), 아담은 하와가 그 과일을 먹었을 때 그녀와 함께 있었다(창 3:6). 그러나 명백하게, 그는 그녀가 그 경고를 (무심코)흘려버리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창 3:1~3). 죄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대항하여 그분과 무관하게 살려는 욕망이다. 신약에서는 하와가 (뱀에게) 속은 것이지, 아담은 (절대로) 속은 것이 아니라고 확언한다(딤전 2:14...하와를 계도할 책임이 아담에게 주어졌었다!!). 따라서 아담은 (고의적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기로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즉 마음속으로 이미 저질렀던 죄가 공공연하게 드러난 것이다(마 15:19). 신약성경은 고린도전서 15:21~22절에서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한데 대해 아담에게 책임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아담이 인류의 머리였던 것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가 구속받은 인류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롬 5:12-21, 엡 1:22-23; 5:23). ==그리스도 중심의 결혼에서 남편과 아내의 역할 결혼이라는 것이 하나님에 의해 설립된 한 가지 이유는 예수님이 교회를 사랑하신 것이 어떤 모습인지를 우리가 그려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일부일처 결혼은, 두 남자 혹은 두 여자 혹은 기타 다른 조합 사이의 ‘결혼’이 보여줄 수 없는 방식으로 이 목적을 잘 보여준다. 사실상, 예수님이 결혼에 대해 가르치실 때(마 19:3~6, 막 10:5~9), 예수님은 창조 기사를 실제의 역사로써 인용하셨다(창 1:27, 2:24). 더욱이 성경은 결혼 안에서 남편과 아내의 특별한 역할을 정하고 있다. 이에 대한 가장 긴 구절은 에베소서 5:22~33절이다. 남편들에게는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25~27절),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28~30절), 그리고 이것이 다른 모든 의무보다 앞선다(31~33절)고 말한다. 아내들에게는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22절)고 말한다. 이것은 갈라디아서 3:28절에서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는 바울의 주장과 모순되지 않는다. 다음을 주목하라: 결혼을 하면 우리는 마치 (은유적으로 말해서) 우리에게 부모가 없었던 것처럼 우리의 부모를 떠나야 한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에게 (문자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부모가 실제로 없었기 때문이다. 결혼에 있어서 우리는 최소한 이상적으로는 마치 (은유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한 몸’인 것처럼 서로에게 밀착해야 한다. 왜냐하면 (문자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하와가 실제로 아담의 몸에서 취해졌기 때문이다. ==상처를 통해 나온 신부 하나님이 아담의 옆구리에서 하와를 만드셨을 때, 창세기 2:21~23절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다고 말한다. 그래서 아담의 신부가 될 하와는 (문자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아담의 옆구리에 있는 상처를 통하여 태어났다. 마지막 아담이신(고전 15:45)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죽었을 때 옆구리를 창에 찔린 것은 예언을 성취시키신 것이다(요 19:34, 36~37; 슥 12:10). 이것은 그분의 죽으심 직후에 일어난 일이며, 그 죽음은 첫 번째 아담의 죄 때문에 필수적인 것이었다. 죄에 대한 희생으로, 하나님의 어린 양의 옆구리에 있는 그 상처로부터 흘러내린 것은 보배로운 피로서(벧전 1:19), 그것을 통하여 믿는 자들이 죄로부터 깨끗하게 된다. 이들 믿는 자들은 예수님의 신부가 될 교회의 구성원이 된다. 따라서 은유적으로 말해서, 예수님의 신부가 될 교회는 그분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린 상처에서 ‘태어난다.’ ==하늘에서 신랑 신부의 연합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죽음과 악의 멸망 이후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의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다(계 19:6~9). 복음이란 비록 첫 번째 남편인 ‘아담 안에서’ 우리 모두가 죄를 지었지만, ‘마지막 아담’이시며, 교회의 신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우리가 모두 구속 받는다는 것이며, 또한 그분을 통하여 우리가 '죄들의 용서함'을 받고, '의의 선물을 값없이' 받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다는 것이다(골 1:14; 롬 5:17; 요일 3:14).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세기 3:17~21...선악과 명령 : 하와를 만드시기전에, 피조물중 으뜸인 사람에게조차도 왕이요 머리되심 인정함으로서의 금지명령
의복에 대한 성경 최초의 기록을 보면 인간의 범죄와 관련이 되었습니다. 맨 처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때나 또는 자연인으로서 세상에 태어날 때도 욥의 고백처럼 옷을 입지 않은 맨몸이었습니다(욥1:21). 세상에 태어날 때 맨몸으로 나온 아이가 몸을 씻고 나면 곧바로 옷을 입기 시작합니다. 배냇저고리입니다. 창세기 3장에는 최초 인간 아담의 범죄 사실과 그 후에 생겨난 두 가지 옷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담이 스스로 만든 옷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만들어 입혀주신 옷입니다. 창세기 3:7에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본문 21절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되어진 일련의 일들을 보아서 나무 잎의 치마는 범죄 한 인간이 벗은 것을 발견하고 스스로 만들어낸 인위적인 작품입니다. 그에 반해 하나님께서 지어 입히신 가죽옷은 형벌 아래 있는 인간에게 구속과 사죄의 상징이 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어 입히신 가죽옷의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Ⅰ.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그 아내 하와를 위하여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것은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범죄함으로 멸망하게 되는 그 불행을 측은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벗은 자의 수치. 단정한 옷이 그 사람의 인격과 품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옷을 벗은 상태는 스스로 사람의 가치를 포기한 것이며 이는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부지중에 옷이 벗어졌을 경우 어떻게든지 몸을 가리려는 것이 상식적인 행동입니다. 그러나 비정상적인 사람은 의도적으로 옷을 벗어버리거나 벗은 상태의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이 경우는 실성하여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거나(눅8:27), 성적으로 타락하여 음행을 즐기려는 의도적인 범죄 행위일수도 있습니다(민 25:1). 어떤 경우이든지 이와 같은 현상은 범죄의 결과로 빚어지는 불행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편지 가운데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라고 했습니다(계 3:18). 벗은 자의 수치심을 깨우쳐주고 그들에게 단정한 옷을 입게 하여 주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긍휼입니다. 계시록 16:15에 보면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수치를 덮어 주시는 것. 옛날 노아는 홍수가 지나간 다음 포도주를 먹고 취하여 벌거벗은 몸으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때 노아의 아들 중 함은 아버지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고 자기 형제들에게 가서 소문을 내었습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아비의 옷을 가지고 와서 뒷걸음을 치며 접근하여 그 몸을 덮어 주었습니다. 이일을 알고 난 노아는 함에게 저주를 하고 셈과 야벳에게는 축복을 했습니다(창9:25 - 27). 벌거벗은 모습을 소문내거나 비방하는 사람은 평소 저와 상관없는 사람이거나 미워하는 관계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상대가 가까운 가족이거나 사랑하는 사람일 경우 안타깝게 여기며 이를 보이지 않도록 덮어주고 감싸주게 됩니다. 이사야 1:18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더럽고 추한 죄의 모습도 하나님께서는 눈으로 덮어 주고 양털로 감싸버리듯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덮어 버리신다는 뜻입니다. ---징벌 중에 내린 사랑. 본문 말씀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범죄 하여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 내용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곧 뱀은 모든 짐승 중에 저주를 받아 배로 기어 다니며 흙을 먹게 될 것이고 여자는 해산의 고통을 당하며 남편을 섬길 것을 명했습니다. 그리고 아담에게는 종신토록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얻게 될 것과 결국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갈 것을 선언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이 처음 받은 낙원 에덴에서 쫓아내어 생명과 단절되는 징벌을 내렸습니다. 이와 같은 결정적인 시점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이는 범죄한 인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곧 자기 백성에게 죄를 다스리시며 징벌을 내리시되 긍휼을 베풀어 주셔서 그들에게 살길을 열어 놓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성경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독생자 예수를 세상에 보내 주신 최상의 선물로 나타났다고 했습니다(요 3:16). Ⅱ. 하나님의 희생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그 아내의 벌거벗은 모습을 가려주기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것은 기독교 복음의 특징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죄와 허물을 드러내고 멸망의 불행을 지니고 있는 그들에게 사죄와 구속의 언약이 되는 상징으로써 그 일을 하신 것입니다. ---피흘림의 의미. 옷을 만드는 데는 여러 가지 소재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목화나 삼과 모시와 같은 식물에서 길쌈을 하여 실을 뽑아 옷을 만들었습니다. 누에고치 또는 양털을 깎아 견직물과 모직물로 옷감을 만들었습니다. 문명의 발달과 함께 각종 화학 섬유까지 등장하여 다양한 재료들을 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유독 가죽으로 옷을 만들게 되면 반드시 피 흘림의 희생이 따릅니다. 가죽으로 만든 옷이 벌거벗은 인간의 죄와 허물을 덮어준다고 할 때 이는 피 흘림과 사죄의 도리를 말하는 성경진리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22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 모세의 율법에는 인간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리게 했습니다. 레위기 17:11에 보면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대신 죽음의 원리입니다. 아담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기 위해서는 가죽을 제공하는 짐승의 죽음이 전제되어야 했습니다. 곧 죄로 인해 죽어야 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죄 없는 또 하나의 생명이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와 같은 대신 죽음의 원리가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때도 어린양이 대신 죽었습니다(창 22:1-14). 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나올 때 어린양을 잡아서 피를 문설주에 발랐습니다. 그때 죽음의 사자가 애굽 전역을 휩쓸며 장자와 짐승의 초태생을 죽일 때 피가 묻어 있는 집은 넘어갔습니다(출 12:1-13). 이렇게 피를 흘린 유월절의 어린양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하여 죽어준 속죄의 양들입니다. 훗날 모세의 율법에는 범죄한 사람의 죄를 짐승에게 대신 지워 처리하게 하는 속죄의 원리를 제도화 시켰습니다. 레위기 16:21-22에 “아론은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찌니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무인지경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찌니라”고 했습니다. 아사셀 염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세례요한은 그가 요단강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있을 때 그곳에 오신 예수님을 향하여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하고 소리쳤습니다(요 1:29).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대신 지고 광야로 나가서 죽임을 당한 어린양처럼, 예수님께서는 죽음 아래 놓인 인류의 죄를 대신 맡아 주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 맡으시고 속죄의 죽음을 당하신 일을 그가 전하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으로 삼았습니다. 디모데전서 1:15에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3:23 -24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Ⅲ.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본문 21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발적인 행위인 동시에 아담으로서는 거저 받은 은혜입니다. 성경은 한결 같이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그리고 은혜를 강조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으로 확증되었습니다. 요한복음 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하고 하나님이 주셨다는 말에 강조점을 두었습니다. 이사야 9:6에도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라고 했습니다. 곧 하나님의 능동적인 행위에 대하여 인간은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관계였음을 말해줍니다. --- 인간의 노력으로 불가한 일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후 눈이 밝아진 아담과 하와는 첫눈에 자신들이 벗고 있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창3:7). 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가 어찌 의복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다만 우선 눈에 보이는 부분의 일부를 가려보자는 궁여지책에 불가했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 범죄하고 쫓겨나는 아담의 처지에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고작 저희들의 머리를 쓰고 고안해 낸 것이 나뭇잎의 치마였을 것입니다. 그것이 최초의 문명이고 기술이었다고 할 수 있으나 그것은 매우 불완전하고 무가치한 것입니다. 얼마 못 가서 망가져 버리고 벌거벗은 모습은 그대로 수치를 드러낼 것입니다. --- 이것이 인간 능력의 한계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지어 입히신 가죽옷은 완전한 것이며 영구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게 될 수 없으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의롭게 된다고 했습니다(롬 3:20 - 22). ---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져 있습니다(요 1;12-13). 구약의 경우 아브라함의 자손들로서 선택된 백성으로 불립니다. 한편 신약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또는 은혜 안에 있는 자라고 합니다(롬8:1,2). “그리스도 예수 안에”라는 말은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뜻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27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말은 육체의 소욕을 좇는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바 되고 성령과 함께 새사람으로 다시 살아났다는 뜻을 지닙니다. 로마서 6:6-7에는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 성도의 경건한 삶을 뜻합니다. 죄와 죽음에서 사유함을 받고 하늘나라의 영생을 소망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속죄의 은혜에 감격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되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자기를 항상 죽이며 살아야 됩니다. 갈라디아서 2: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은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이요 거룩을 지향하는 경건한 삶을 살아야 됩니다. 로마서 13:12-14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성경안의 성가대(헤만, 아삽, 에단)===에단(또는 여두둔 ..인내함....므라리) 아삽(모으심...게르손) 헤만(신실함...고핫)
하나님은 누구의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고 어떠한 자들이 성가대(찬양대)원이 되어야 하고 어떻게 찬양해야 할까요? 역대상 6장 찬송하는 일을 맡은 자의 이름이 나옵니다.---헤만(33장), 아삽(39), 에단(44) 이들은 다윗이 오벧에돔의 집에서 언약궤를 가져올 때에 함께 참여한 사람들입니다.(대상15:17)에단의 이름은 역대상 16장에서 빠지고 대신 여두둔의 이름이 나타나는데 많은 성서학자들은 에단과 여두둔이 동일 인물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1) 헤만-겸손한 음악가(영성, 모든 찬양대원, 피아노반주자) 헤만은 요엘의 아들이요 요엘은 사무엘의 아들입니다.(대상6:33). 즉 헤만은 다윗을 왕으로 세운 사무엘의 손자입니다. 이스라엘의 초기 왕조시대에 사무엘의 위치는 절대적…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선지자로, 초대왕과 둘째왕에게 기름을 부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전통있는 집안에서 태어난 헤만은 어쩌면 다윗의 행적에 손가락질하며 비난할 수있었을 것입니다. 내 할아버지가 세운 자 즉 내 할아버지보다 인간적으로 못한 자…라는 인간적인 생각을 할 수 있었지만 다윗왕의 임명을 겸손히 받아들입니다. “네가 나를 정치적, 행정적위치에 앉히지 않고 겨우 노래하는 자에 앉히다니..”하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역대상 16장에 이르면 다윗이 아삽과 그의 자손에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는 듯 보입니다.(7절)헤만과 여두둔은 42절에 잠깐 언급되어 다윗의 관심이 헤만에게서 아삽에게로 옮겨진 듯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 후부터는 세 음악가의 이름 중 아삽의 이름이 가장 먼저 등장합니다. ex)아삽-헤만-여두둔(대상 25:1) 아삽 여두둔 헤만(대상 25:6) 아삽 헤만 여두문(대하35:15) 그러나 헤만의 이름은 없어지지 않고 계속 등장합니다. (겸손한 음악가!!!) 처음에 아삽은 헤만의 우편에서(대상 6:39) 에단은 좌편에서(대상 6:44) 찬양하던 자들이었지만 아삽이 선두위치에 서게 되는 것에 대하여 헤만은 전혀 불만을 품지 않고 또한 자기본연의 책무인 찬양자의 위치를 이탈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끝까지 함께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헤만은 하나님의 전에서 찬양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권위에 순종할 줄 알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적인 관계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중요시한 분..그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해도 성전의 한 구석에서 하나님을 찬양만 할 수 있다면 진정으로 감사했을 것입니다. 헤만은 겸손한 하나님의 찬양자였습니다. 2) 아삽-솔직한 음악가(영성, 성가찬양대장) 아삽은 처음에는 헤만의 오른쪽에서 직무를 수행하도록 임명받음. 그러나 점차 아삽의 위치는 찬송업무를 도맡아 하던 모든 레위인들의 우두머리가 됩니다. 그의 위치가 왜 그렇게 중요하게 되었는지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편에 나와있는 12편(시50편, 73-83편)의 아삽의 시를 통해 그가 단순한 음악가만은 아닌 하나님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영적인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성가대장)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니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니라“(시73:1-3) 아삽은 솔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속은 그렇지 않으면서 겉으로는 다른 말을 하는 위선자가 아니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오는 진정한 고민을 하나님께 털어놓을 줄 아는 선지자 하박국과 같은 자였습니다. 자신의 실수를 감추고 완벽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허물과 약점을 남에게 내보일 수 있는 영적인 투명성의 자질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투명성은 영적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자질이었습니다. 아삽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과 원망-왜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신데 정직한 사람이 모든 것이 잘 되어야 할 텐데 나쁜 사람들이 더욱 잘 되고 착한 사람들은 못사는 것을 보았을 때 아삽은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함… 아삽은 거의 실족할 뻔 하였다고 합니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 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게 깨달았나이다(시73:16-17)” 아삽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제 머리 속으로 생각하고 고민만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소에서 해답을 찾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심의 생각이 그의 마음속에서 생겨나기도 했지만 그래서 실족할 뻔하기도 했지만 그는 성소를 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소를 찾습니다. 성소를 가까이 하고 어느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과 가까이 하길 원하는 자는 결국 하나님 가까이에 있게 됩니다. 다윗은 “아삽과 그 형제를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머물러 항상 그 궤앞에서 섬기게”합니다.(대상16:37) 3. 여두둔-뛰어난 음악가(지휘자) 에단과 여두둔은 동일인물 시39, 62,77편 ‘영장으로 여두둔의 법칙을 의지하여 한 노래’라는 표제가 붙어 있는데 ‘에단의 손의 지휘에 의하여 부른 노래’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여두둔은 모든 지휘자의 조상이 되는 셈입니다. 다윗이나 아삽도 뛰어난 음악가임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법칙, 아삽의 법칙에 의하여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음악가로서 독보적인 존재였습니다. 그 당시의 시편 찬송은 모두 새롭게 작곡되어 불리어진 것이 아닙니다. 친숙한 대중적인 멜로디에 의해서 불리워짐.. 예를 들어 시편 57, 58, 59, 75의 찬송은 유대인들이 포도를 따면서 부르는 75편의 ‘복이 담뿍 들었다 터뜨리지말아아(엘다스헷)라는 민요곡족에 맞춘 것이며 56편은 ’떡갈나무위의 비둘기(요낫 엘렘르호김)의 민요에 맞추어 69편은 ‘백합화(소산님lilies)라는 곡족에 맟주어 찬양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찬송가 가운데 338장“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라는 챨스 웨슬리가 붙인 가사에 “오래전에”라는 스코틀랜드의 민요에 맞추어 부른 것… 546장 ‘하늘가는 밝은 길이’도 영국 민요 엔니 로리‘에 맞추어 부른 것입니다. 시편이 세속적인 선율에 맞추어 노래한다는 것을 여두둔같은 천재적인 음악가는 원치 않음..‘여두둔의 법칙에 의지하여’부르는 찬송이라면 아마 여두둔이 스스로 작곡하여 부른 찬송이었을 것입니다. 선율이 자연 발생적인 것으로만 생각했던 시대에 새로운 선율을 작곡하여 하나의 법칙을 만들 정도라면 여두둔은 아삽이나 헤만보다도 음악적으로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아삽-헤만-여두둔의 공통점 1. 전문적인 찬양자 (공교히Skillfully 찬양) 그들에겐 찬양하는 일이 맡겨졌습니다. 헤만-아삽-여두둔에게 찬양하는 일이 맡겨졌다는 사실은 하나님 찬양에 책임과 질적인 향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찬양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임을 알고 헤만과 아삽과 여두둔을 세워 찬송하는 일을 맡기고 그 반열대로 직무를 행하게 하였습니다. 마음이 섭섭하다고 찬양을 쉬지 못합니다. 친구에게 억울한 소리를 들었다고 찬양을 그칠 수 없습니다. 내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다고 하나님께 드리는 찬미를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찬송은 우리의 상황에 관계없이 꾸준히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또 찬송하는 자가 있으니 곧 레위족장이라 저희가 골방에 거하여 주야로 자기 직분에 골몰하므로 다른 일은 하지 아니하였더라”(대상9:33) 이스라엘 음악은 가나안 원주민들이나 이집트, 앗수르, 바벨론등의 제국들에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골방에서 주야로 찬송을 연구하던 아삽, 헤만, 여두둔의 전통에 의하여 이스라엘의 음악은 질적으로 향상하게 되었고 노래 잘하는 민족으로 소문나게 되었습니다. 2 선택된 찬양자 아삽, 헤만, 여두둔은 레위의 자손들.. 레위는 야곱과 레아사이에서 태어난 3째아들로 게르손,고핫,므라리 3아들을 낳습니다. 아삽은 게르손의 후손이요. 헤만은 고핫자손이며, 에단은 므라리의 후손입니다. 이스라엘민족들에게 있어서 레위인들은 특별한 위치를 지니고 있습니다.그 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역사하신 방법을 알 수 있습니다.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많은 민족들 가운데서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십니다.(출19:4-6)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을 택하신 이유는 제사장 나라로 만드시기 위함..이스라엘 민족이 제사장 나라로 선택되었지만 실제 제사장직을 수행하던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12지파중 레위인들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레위인들을 제사장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고핫자손중 아론의 후손만을 제사장이라고 부르고 그 중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의 후손을 대제사장이라고 부릅니다. 레위인, 제자장, 대제사장들을 이스라엘의 제사장 계급이라고 부릅니다. 율법을 완전하고 순수하게 보존하며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게 합니다. 아삽, 헤만, 여두둔은 일생을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다른 계획이나 꿈을 가질 수 없습니다. 남들처럼 돈을 마음껏 번다든가 원하는 직업을 가질 수도 없고 내가 원하는 장소에서 살 수도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답답하고 지루한 일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과 제일 가까이 지낼 수 있는 특권이 그들에게 주어져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택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선택에는 나의 반응과 책임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나를 구속하시고 제한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알야야 합니다.(독수리 두 날개) 아삽, 헤만, 여두둔의 후손들도 자신들이 하나님께 찬양을 위해 선택되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바벨론 사람들이 레위인들에게 찬양을 요구했을 때 그들은 수금을 나무에 걸어두고 슬피 울었습니다.(시137:1) 3. 말씀을 받드는 찬양자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은 선견자였습니다. “이는 다 헤만의 아들들이니 나팔을 부는 자며 헤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드는 왕의 선견자라“(대상 25:5) “히스기야 왕이 귀인들로 더불어 레위 사람을 명하여 다윗과 선견자 아삽의 시로 여호와를 찬송하게 하매 저희가 즐거움으로 찬송하고 몸을 굽혀 경배하니라”(대하29:30) “아삽의 자손 노래하는 자들은 다윗과 아삽과 헤만과 왕의 선견자 여두둔의 명한대로 자기 처소에 있고..“(대하35:15) “옛적 이스라엘에 사람이 하나님께 가서 물으려 하면 말하기를 선견자에게로 가자 하였으니 지금 선지자라 하는 자를 옛적에는 선견자라 일컫었더라‘(삼상9:9) 다시말해 아삽, 헤만, 여두둔은 전문적인 음악가였던 동시에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드는 사람입니다. 나의 생각이나 나의 감정을 나타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선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음악인으로서 뜨거운 마음과 선지자로서의 냉철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Head Heart Hand)-요4:23 “신령과 진정(말씀) 백성들가운데 문제를 가지고 오면 상담자의 역할도 했습니다. 국가의 통수권자인 왕의 상담또한 맡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침입하자 급해진 사울왕이 죽은 사무엘을 불러 물어보는 것과 같이 왕들은 선견자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에게 나라의 문제에 대하여 물어보았을 것입니다. 그들의 모든 이야기는 국적에 깊이 반영되었을 뿐 아니라 음악가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말씀을 받드는 왕의 선견자 역할을 한 것입니다. 성경의 찬양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음악적인 기술만을 갖춘 딴따라가 아닙니다. 음악은 하나님이 말씀을 최대한 돕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서음악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일이 최대의 목표이기에 성서음악의 비중은 진과 선에 있고 일반종교음악은 진과 선의 기초가 없으므로 미에 그 가치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과 선의 바탕이 없는 미의 방향은 항상 위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그의 백성인 우리에게 맡겨진 최고의 임무요 특권인 것입니다. 사단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자녀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보다 음악의 아름다움과 분위기에 취하도록 합니다. 음악자체는 부드러운 포도주와 같은 것.. 하나님을 찬양하는 음악은 하나님말씀의 분명한 선포가 있어야 합니다.
***제1년 1월15일 첫번째 유월절을 애굽에서 지키고 출애굽, 호렙산 도달(2개월 걸렸음.. 11개월19일 머무름).... 호렙산에서 두번째 유월절 지키고 행군준비하여 제2년 2/20일 발행, 가데스바네아까지 11일 노정...... (제2년 2월30일 가데스바네아 도달하여 첫번째 둔진) ...40일간 [아다림(=정탐)길 통해] 가나안 정탐//보고(4월중순)//1차 호르마 전투//6월중하순경?? 가데스바네아를 떠남[세렛시내 도달하기까지 38년 걸렸다...??]...홍해길로 광야에 들어가라는 명령따라 가데스바네아 남서방향 광야의 대부분과 세일산지까지를 두루 이동/다시 명령따라 신광야 가데스바네아로 이동하여 진침(제40년1월 가데스바네아 제2차 둔진) :::: 미리암 사망....제40년 5월1일 아론 호르산에서 사망/1개월 애도기간(6월1일에 흐르산을 떠남)....이어서 .제2차 호르마전투----세렛시내 도달 6월 중하순경??---제40년 11월1일 모압평지에서 모세의 신명기 설교시점으로 볼 때 세렛시내 건넌이후 5개월이 채 되기전 요단동편 점령 완료.....제41년 1월11일경 요단강 도하, 할례 실시 1월14일 세번째 유월절을 길갈에서 지킴(첫째~세째 유월절까지 기간이 40년) 15일 만나 끊김
요단동편점령 https://qtshare.wordpress.com/category/qtshare/%EC%8B%A0%EB%AA%85%EA%B8%B0/page/11/ http://m.blog.daum.net/kwan1958/13739447?categoryId=551928 출애굽여정 참고지도 http://m.blog.daum.net/kwan1958/13739447?np_nil_a=1&categoryId=551928 지도로 보는 성서이야기
#신명기 2장 1~37절 -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보낸 일 [본문]신명기 2장 1~37절 이스라엘 민족은 출애굽하여 호렙산을 거쳐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하였습니다. ((가데스바네아에 도달하여 진친 기록은 총2회) 출애굽하여 2개월만에 도달한 시내산(11개월19일간 머무름)을 거쳐서 ‘가데스 바네아’까지는 만13개월이 소요되었습니다(민33:3, 민10:11)..((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그곳을 떠나서광야길로 회정하여 광야와 세일산지를 두루 돌아다니다가 다시 가데스바네아에 도착한 후(40년째 첫째달..두번째로 진쳤음. 민 20:1) 거기에서 에돔왕에게 왕의 대로를 내어달라 요청하나 거절당하고 홍해길을 택하여 에시온게벨 근처의 세일산지 남방에서 돌이켜서 에돔지역을 우회한 후 모압평지를 향해서 사막길과 광야길로 진행하여 세렛시내를 건너게 됨)). 신명기 1장 2절을 보면 호렙 산에서 ‘가데스 바네아’까지는 열 하룻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와 비교해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까지 거리는 더 짧습니다. 짧게는 1주일 길게는 2주일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또한, ‘가데스 바네아’에서 세렛 시내까지에 이르는 거리는 약 130km정도인데 1주일이면 족히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하지만 ‘가데스 바네아’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계기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1:40의 표현대로 방향을 돌려 광야로 다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앞두고 방향을 광야로 돌리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탐군의 보고를 들은 후 행하였던 불신 반응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원성을 들으시고 노하셨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들을 말씀하셨는데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아이들과 선악을 분변하지 못하던 자녀 등입니다. 본문인 신명기 2장 14절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2세대들에게 출애굽 1세대의 불신행위를 알도록 하셨습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영 중에서 다 멸망하였나니(신2:14)” 앞서 말한대로 ‘가데스 바네아’에서 세렛 시내까지 거리로는 약 130km정도인데 1주일이면 족히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불신으로 ‘7일 길’이 ‘38년 길’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은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 복을 누릴 수 없음을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불신은 조급한 마음에서 왔습니다. 인내하며 기다리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짧은 고생과 기다림을 이기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목적지까지 가는데 더 긴 시간을 허비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38년의 광야생활 동안에 출애굽 1세대의 장정, 즉 군인들은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단순히 전사나 자연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15절 “여호와께서 손으로 그들을 치사 진영 중에서 멸하신 고로 마침내는 다 멸망되었느니라” 원망과 불신이 가득 찬 이스라엘 성인들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죽고 말았습니다. 아론도 죽었고 미리암도 죽었고 심지어 모세조차도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죽었습니다. 원망과 불신이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됩니다. 이 땅에서 우리 인간은 언젠가는 죽겠지만 자신의 죽음이 어떤 죽음이 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죽음을 맞이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출애굽 2세대들이 ‘가데스 바네아’를 떠나면서 본격적으로 가나안 입성을 위한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전쟁의 경험이 있는 1세대 장정들이 다 죽고 전쟁의 경험이 없는 2세대들만 남았는데 문제는 ‘다른 족속과 분쟁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쟁 경험이 많은 군사들이 있다고 해서 전쟁에 승리를 보장해 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신뢰하느냐가 관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2세들에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칼과 경험을 믿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차원에서 위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25절 “오늘부터 내가 천하 만민이 너를 무서워하며 너를 두려워하게 하리니 그들이 네 명성을 듣고 떨며 너로 말미암아 근심하리라 하셨느니라”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2세대들에게 용기를 주시면서 그들의 여정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의 진행 경로는 사해 우측을 따라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지도를 생각해 보면 북쪽에 갈릴리 호수가 있고 남쪽에는 사해가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와 사해 사이를 잇는 강이 있는데 이 강이 요단강입니다. 이스라엘 출애굽 2세대들은 ‘가데스 바네아’를 떠나 북동방향으로 세렛 시내 방향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세렛 시내는 사해바다 하단 오른쪽에 위치한 강이었습니다. 이 세렛 시내가 에돔과 모압을 구분하는 국경선이었습니다. 남쪽은 에돔이고 세렛 시내 북쪽은 모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출애굽 2세대들은 사해의 오른쪽 편을 거슬러 올라가 요단강까지 가게 됩니다. 가는 길이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크게는 중요한 세 족속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에돔족속, 모압족속, 그리고 암몬족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 족속들과의 마찰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 족속들이 이스라엘과 형제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에돔 족속은 이스라엘의 옛 이름인 야곱의 형, 에서의 후손들입니다. 모압과 암몬족속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북상하면서 이들과의 분쟁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5절에 “그들과 다투지 말라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세일 산을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9절에는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을 괴롭히지 말라 그와 싸우지도 말라 그 땅을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19절에는 “암몬 족속에게 가까이 이르거든 그들을 괴롭히지 말고 그들과 다투지도 말라 암몬 족속의 땅은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롯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이끄시지만 아브라함의 후손, 이삭의 후손, 나아가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복받고 잘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중요한 점은 하나님께서 이미 주셨던 땅, 즉 약속하신 것은 끝까지 지키시는 분이심을 보게 됩니다. 에서와 롯에게 각각 하셨던 약속이 이스라엘의 대이동으로 변경되거나 파기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세 족속들과 화평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인간은 일가, 친척, 형제끼리도 이해관계로 얽매이면 싸우며 이익을 쟁취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본적으로 서로 화해하며 화평하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은 끊임없는 분쟁의 삶 속에 살아갑니다. 부부가 사랑하여 결혼하여 자식을 낳지만 그 자식들끼리 항상 평화만 있습니까? 오히려 분쟁과 다툼이 더 많이 있지 않나요? 부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여 갈등하며 살아갈 때가 더 많이 있지 않습니까? 갈등으로 인간의 죄성이 증폭되면 분쟁과 다툼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서로 이해하고 베풀고 양보하기를 원하십니다. 양보하며 화평하기를 원하지만 상대가 이를 거부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합니까? 인내하며 때를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문제를 내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대처해야 합니다. 그 방법이 어떤 것인지를 몰라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대적자를 처리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신명기 2장 후반부를 보면 세 족속과 달리, 헤스본 왕 시혼과는 전쟁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시혼 왕과 평화를 원하며 통행을 허락받기 위해 사자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헤스본 왕 시혼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쟁을 하게 되는데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됩니다. 헤스본 왕 시혼의 통행불허는 하나님의 섭리에서 기인되었습니다. 30절에 “헤스본 왕 시혼이 우리가 통과하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네 손에 넘기시려고 그의 성품을 완강하게 하셨고 그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신명기 2장에 나타난 이스라엘이 사해 우측지역을 북상하면서 만났던 세 족속과 헤스본 사람들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주권자이심을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때론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였고 때론 불가피한 전쟁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중요한 점은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변개치 않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에서와 롯에게 이미 주었던 땅을 빼앗아 이스라엘에게 주지 않으셨고 또한 이스라엘의 불신과 원망이 있었지만 그들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언약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개인의 인생에 개입하셔서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는 오직 신실하신 하나님만 바라보며 내 인생의 길을 하나님께 맡기고 갈 때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을 이끌어 가심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의 발걸음 속에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