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상4:9-10]] 9.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카바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NASB]대상 4:9 Jabez was more honorable than his brothers, and his mother named him Jabez saying, ""Because I bore him with pain.'' [NRSV]대상 4:9 Jabez was honored more than his brothers; and his mother named him Jabez, saying, "Because I bore him in pain." [NKJV]대상 4:9 Now Jabez was more honorable than his brothers, and his mother called his name Jabez, saying, "Because I bore him in pain." [NIV]대상 4:9 Jabez was more honorable than his brothers. His mother had named him Jabez, saying, "I gave birth to him in pain." 10.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카라)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바라크) 나의 지역을(게불) 넓히시고(라바) 주의 손으로(야드) 나를(하야) 도우사(임) 나로 환난을(라) 벗어나(아사) 내게 근심이(아차브)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사알) 것을 허락하셨더라(보) [NASB]대상 4:10 Now Jabez called on the God of Israel, saying, ""Oh that You would bless me indeed and enlarge my border, and that Your hand might be with me, and that You would keep me from harm that it may not pain me!'' And God granted him what he requested. [RSV]대상 4:10 Jabez called on the God of Israel, saying, "Oh that thou wouldst bless me and enlarge my border, and that thy hand might be with me, and that thou wouldst keep me from harm so that it might not hurt me!" And God granted what he asked. [NRSV]대상 4:10 Jabez called on the God of Israel, saying, "Oh that you would bless me and enlarge my border, and that your hand might be with me, and that you would keep me from hurt and harm!" And God granted what he asked. [NKJV]대상 4:10 And Jabez called on the God of Israel saying, "Oh, that You would bless me indeed, and enlarge my territory, that Your hand would be with me, and that You would keep me from evil, that I may not cause pain!" So God granted him what he requested. [NIV]대상 4:10 Jabez cried out to the God of Israel, "Oh, that you would bless me and enlarge my territory! Let your hand be with me, and keep me from harm so that I will be free from pain." And God granted his request. =========== db'K;(3513, 카바드) 무겁다, 힘겹다, 짐이 되다, 존경하다, 영화롭다, 존귀하다 카바드 또는 카베드(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무겁다, 힘겹다, 짐(부담)이 되다, 영화롭다, 존귀하다, 견고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15회 나오며, 칼, 니팔, 피엘, 히필, 푸알, 히트파엘형으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의 기본의미는 '무겁다' be heavy, '중량 있다' be weighty이며, 이 단어의 의미는 거의 문자적 의미로 쓰이지 않고, 비유적 의미(예: "죄가 무거운")로 쓰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비유적 용법으로부터 사회적 유명인사 즉 영예롭고 인상적이며 존경할 만한 저명인사에 대한 개념의 단계에 쉽게 이른다. 이러한 후자(비유적인 의미)의 용법은 출현 횟수 중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카바드의 문자적 의미는 다음 구절에서만 사용된다. 삼상 4:18, "엘리가...비둔한 연고라", 삼하 14:26, "압살롬...그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카바드는 세가지 비유적 용법을 나타낸다. 첫번째의 용법은 대부분 바로와 관계하여 발견되며 일곱 구절에서 쓰인다(출 7:14, 출 8:15, H11, 출 8:28, H32, 출 9:7, 출 9:34, 출 10:1, 삼상 6:6). 그 상황 혹은 히브리 백성의 청원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 바로의 거부는 마음의 완악함 혹은 강퍅함으로 간주된다(참조: Gildlestone의 주장, SOT, pp. 66-67). 마찬가지로 귀(사 6:10, 사 59:1, 슥 7:11), 눈(창 48:10)은 둔하고 무디게 될 수 있다. 가혹함에 대한 비유로서 무거움은 노역(출 5:9 등), 멍에(왕상 12:10 등), 전쟁(삿 20:34 등)을 말해준다. 이러한 가혹한 재난은 3회에 걸쳐서 재앙으로 무섭게 내리치시는 하나님의 손으로 표현되고 있다(삼상 5:6, 삼상 5:11, 시 32:4). 이와 같은 방법으로 사람의 손은 다른 어떤 사람을 무겁게 누를 수 있다(삿 1:35, 욥 33:7). 또한 어떤 사람은 반드시 고의적인 것이 아닐지라도 다른 어떤 사람에게 짐이 될 수 있다(삼하 13:25, 대하 10:10, 대하 10:14, 대하 25:19, 느 5:15). 혹독한 속박이 비유적 의미, 즉 "무거운 멍에"에 의하여 표현된다는 사실(참조: 왕상 12:4, 대하 10:4, 대하 10:11)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인 "내 멍에는 쉽고"(마 11:30)라고 말씀하시도록 하였다. 가혹함에서 큼이란 의미가 되는 것은 단순한 단계이며, 여러 경우에서 함축적인 의미를 고려하여 완전히 명백하게 하는 것은 쉽지 않다. 예를 들면, 소돔과 고모라의 죄가 심히 중했다는 진술이 그것이다(창 18:20). 이러한 것은 죄가 컸다는 말인가, 아니면 죄가 심각했다는 말인가? 또한 사 24:20, 시 38:4, 욥 6:3 등도 그러하다. 어쨌든 죄는 그것을 지는 자로 하여금 무겁고 둔하게 하는 짐이라는 것이 분명하다(참조: 사 1:4, 잠 27:3). 합 2:6은 볼모 잡은 것으로 무겁게 짐진 자를 공격할 때 이러한 방법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참조: 나 3:15). 한 경우에 아브라함은 재물이 풍부한 자로 언급되며(창 13:2), 그 문맥은 그의 재물의 풍성함이 언급된다는 것을 명백하게 한다. 이것은 잇따른 용법에 대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두 번째의 주요한 부류는 이 단어의 비유적 용법의 확대이다. 이 경우에 이 단어의 개념은 가치 있거나 혹은 인상적이라는 의미에서 무게가 있다는 뜻이다. 일반적인 번역은 "영예로운, 존경 받는, 영광스러운, 영화로운" 등과 같다. 니팔형과 피엘형의 어간은 일반적으로 이러한 의미들을 지닌다. 개인의 평판은 이러한 용법의 핵심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고위층에 속하며 부유한 자는 자연적으로 사회에서 존경 받고 저명한 인사가 되었다(민 22:15 등). 이러한 지위와 부와 장수는 일반적으로 의로운 삶에 대한 정당한 보상으로 생각되었다(참조: 왕상 29:28 등). 사람이 이와 같은 위치에 이르게 되면 자연적으로 존경을 받게 되는 반면에, 또한 그러한 존경과 영광을 받을 만하다고 기대되는 것이 분명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책임과 권한을 지닌 위치에 있는 자는 존경 받을 만하였다(출 20:12, 말 1:6). 존경 혹은 영예를 표하는 것이, 어떤 사람이 존경, 관심, 순종을 받을만하다는 것을 말한다는 것으로 상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자신의 존경할만한 말을 뒷받침 못하는 생활은 지고한 형태의 위선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면서 행동으로는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는 죄를 거듭 거듭하여 저질렀다(사 29:13). 셋째 용법은 '크기, 숫자, 무게'에 대해 사용되었다(삼하 14:26, 시 8:24, 나 3:10). (참조: J. N. OSWALT; BDB). ---------------- d/bK;(3519, 카보드) 풍부, 다량, 다수, 부, 영예, 영광....하나님의 영광((성품-이름-능력의 모든 풍성-부요-충만))의 실제적 가견적 나타남/체현 카보드(명남, 여)는 카바드(db'K; , 3513)에서 유래했으며, '풍부, 다량, 다수, 부, 영예, 영광'을 의미한다.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40회 나온다. 카보드는 물건의 물리적으로 큰 무게나 '양'을 언급한다. 나 2:9에는 "...그 저축한 것이 무한하고 아름다운 것이 풍부함이니라(모든 종류의 바람직한 물건이 '대량' 있음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 22:24에서 엘리야김은 "그 아버지의 집의 모든 영광(모든 중한 것들)"을 건 벽에 단단하게 박힌 못에 비유한다. 이 의미는 호 9:11에도 나타나는데, 여기서 카보드는 '큰 무리' 혹은 '군중'을 의미한다: "에브라임의 영광이(군중이) 새 같이 날아가리니...". 이 단어는 단순히 '무거운'을 의미하지 않고 물건의 무거운 양을 나타낸다. 카보드는 종종 '부, 재물' wealth과 중요하고 긍정적인 '명성'(구체적인 의미로) 모두를 나타낸다. 라반의 아들들은 다음과 같이 불평한다: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인하여 이같이 '거부'가 되었다"(창 31:1 - 최초의 성경의 용례). 두 번째 의미는 창 45:13에 나온다. 여기에서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나의 애굽에서의 '영화'와 당신들이 본 모든 것을 내 아버지께 고하라"고 말한다. 이 때, 이 단어는 만약 가족들이 애굽으로 온다면 그들을 부양할 수 있다는 보증과 요셉의 지위에 대한 보고 모두를 내포하고 있다. 나무, 숲, 삼림도 위압하는 속성, 풍부함, '장려함(영광)'을 지닌다. 하나님은 앗수르왕을 벌하시어 그의 삼림의 대부분을 소멸시키실 것이다: "그 삼림과 기름진 밭의 영광이 전부 소멸되리니...그 삼림에 남은 나무의 수가 희소하여 아이라도 능히 계산할 수 있으리라"(사 10:18-19). 시 85:9에서는 부요함 또는 풍성함의 개념이 두드러진다: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이에 영광(혹은 풍성함)이 우리 땅에 거하리이다". 이 의미는 시 85:12에 다시 나온다: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카보드는 또한 '영광, 즉 당당한 인물이나 지위를 강조하는 추상적인 의미를 지닌다. 비느하스의 아내는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었다: "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 시부와 남편이 죽었음을 인함이며"(대제사장들인 그들이 죽었다: 삼상 4:21). 사 17:3에서 카보드는 요새화된 도시, 주권(자치), 백성들을 포함하는 여러가지 사물들의 충만함이라는 보다 더 구체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이런 속성들 중에는 '영예', 존경, 지위가 있다. 사 5:13에서 '영예'의 개념이 카보드로 표현된다: "그 '귀한' 자는 주릴 것이요 무리는 목마를 것이며". 따라서 카보드와 그 병행어('무리')는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 즉 상류 계급과 평민을 나타낸다. 많은 구절에서 이 단어는 현실보다는 미래를 나타낸다: "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사 4:2). 이 단어가 '영예' 혹은 '중요함'이라는 의미로 사용될 때는 두 가지의 어감을 지닌다. 첫째로, 카보드는 자기가 살고 있는 영역 내에서의 개인의 지위를 강조할 수 있다(잠 11:16). 이 '영예'는 그릇된 행위나 태도로 인해 잃어버릴 수도 있으며(잠 26:1, 잠 26:8) 바른 행동으로 증명될 수도 있다(잠 20:3, 잠 25:2). 따라서 이 단어의 강조점은 개인들 사이의 관계에 주어진다. 둘째로 카보드의 많은 용례들 중에는, 왕가에 속하는 '영예'와 같은 '고귀(성)'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도 있다(왕상 3:13). 따라서 이 단어는 귀족이 누리는 존경 받는 지위와 사회적 구별에 대해 사용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단어가 하나님께 대하여 사용될 때는 하나님께 합당한 속성의 현현을 나타내며 그 속성으로 인하여 모든 인정을 받는다. ...((레9:6, 7)) *6.모세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니 여호와의 영광이 너희에게 나타나리라 *7.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제단에 나아가 네 속죄제와 네 번제를 드려서 너를 위하여,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또 백성의 예물을 드려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되 여호와의 명령대로 하라.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곧 하나님의 중요성과 가치와 의의를 인정하라고 아간에게 명했다(수 7:19). ....이 구절과 이와 유사한 구절들에서 '영광을 돌리다'라는 말은 어떤 것을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인간이 해야만 할 일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었다. ....다른 구절들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예배에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다(시 29:1)....어떤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즉 그런 구절들은, 찬미자들이 자연에서 그의 '영광'을 보고 예배에서 그것을 고백함으로써 자연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주권을 찬미한다는 것이다. 어떤 구절에서 이 단어는 역사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나타내며 특별히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킨다고 한다(사 40:5). 그러나 몇몇 구절들은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을 역사와 백성을 주관하신 과거의 증거들과 연관시킨다(출 16:7, 출 24:16).(참조: NEDOT; BDB). --------------- &r'B;(1288, 바라크) 무릎을 꿇다, 축복하다, 복을 주다, 찬양하다.송축하다.....이를 통해 베라카(복, 복의 근원/통로)가 됨 바라크(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무릎을 꿇다, 축복하다(복을 주다), 찬양하다'를 뜻하며, 다른 의미로는 주로 하나님에 대하여 '저주하다, 욕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왕상 21:10, 왕상 21:13, 욥 1:11, 욥 2:5). 기본적으로 바라크는 '유익한 능력을 부여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구약성경에서 '축복한다'는 것은 '성공, 번영, 생산, 장수 등을 위한 능력을 부여한다'를 의미한다. 이 의미는 부여하는 과정과 부여 받는 상태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진정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다. 또한 바라크의 의미를 보면 무릎을 꿇는 것과 축복이나 복을 받는 것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1) 무릎을 꿇는 것, 곧 기도하는 것은 축복을 받는 비결이다. 대하 6:13(참조: 왕상 8:14, 왕상 8:54)을 보면 솔로몬은 성전 봉헌에서 놋대 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하나님의 복은 백성들이 예배가 끝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갈 때 그들에게 내려졌다. 이렇게 하여 이 복은 그들의 일상 생활에 실현된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이삭의 신부를 구해오라는 주인의 부탁을 받고 메소포타미아 나홀의 성에 이르러 낙타를 그 성밖 우물 곁에 무릎을 꿇게 하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 종의 기도로 주인과 종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삭의 좋은 신부감을 얻는 복을 받은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 열심히 기도하자. (2) 무릎을 꿇는, 곧 여호와를 경배하는 것은 복을 받는 비결이다. 시 95:6이하에서 시인은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을 듣기를 원하노라"(빌 2:10, 빌 2:11)라고 말했다. 시인은 시 115:2이하에서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시며 무론 대소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할렐루야"라고 노래했다. (3) 신앙 공동체는 자기가 받은 복에 대하여 여호와를 찬양함으로서, 곧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라는 외침으로 응답했다. 시 28:6, 시 28:7에서 다윗은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노래했다. 여러분 바라크라는 말을 기억하라. 바라크 -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다. 바라크 -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것이다. 바라크 -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이다. 바라크 - 받는 복을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이다. (참조: H. -G. LINK; TBC). ----------------- lWbG](1366, 게불) 경계, 영역, 지역 등 게불(명남)은 가발(lb'G: , 1379)에서 유래했으며, '가장자리, 경계, 영역, 지역, 영토'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16회 나오며, 지리상의 경계나 그 지역 전체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몇 경우에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게불은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게불은 나침반의 4개의 주요 방위들 중 한쪽 경계를 나타낸다. 즉 "남편"(민 34:3, 수 15:2, 수 15:4), "북편"(민 34:7, 수 15:5), "동편"(민 34:10, 겔 45:7), "서편"(민 34:6, 수 15:4, 수 15:12). (b) 수역(水域)으로 이루어진 경계: 민 22:36, 아르논: 수 15:5, 바다. (c) 어떤 국가나 그 국가의 일부분에 속해있는 땅의 경계. 여기에서 이 단어는 애굽(왕상 4:21), 에돕(수 15:1), 모압(민 21:13), 암몬(민 21:24)의 경우에서처럼, '경계' border라는 의미를 취하는 것 같다. 이 명사는 창 47:21(애굽), 삿 11:18(모압), 삿 1:36(아모리)에서처럼 '영토' territory로 번역되기도 한다. 우리는 또한 "이스라엘의 (온) 게불에"라는 표현의 언급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삿 19:29, 삼상 11:3, 삼상 11:7, 특히 삼상 27:1). 이런 표현은 왕하 14:25을 제외하고는 항상 "이스라엘의 (모든) 영토에" in (all) territory of Israel로 번역된다. 이 어구는 "이스라엘의 땅(에레츠)이란 표현과 같은 뜻을 지닌다. (d) 게불은 각 개인이나 개인들의 집단들의 소유의 경계 혹은 가장 넓은 범위를 나타내기도 한다: "네 땅 전체"(신 19:3), "그 기업의 경계"(수 16:5), "제비 뽑은 땅의 경계"(수 18:11), "도피성 지경"(민 35:26). (e) 게불이 도시 이름과 함께 사용될 때는 언제나 이 단어는 '영토' territory로 번역된다. 즉 아스돗(삼상 5:6), 딥사(왕하 15:16), 가사(특히 왕하 18:8). (f) 비유적으로 게불은 "흑암의 처소"(욥 38:20), "악한 지경"(말 1:4), "하나님의 성소의 지경"(시 78:54)을 나타내는 데서 사용되었다. 고대 근동에서는,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국가적인 경계이든 개인적이고 사적인 경계이든 다른 사람의 경계를 매우 존중하였다. 그 경계들을 위반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을 위반하는 것이다. 그는 모든 백성들의 경계를 세우셨으며(신 32:8) 땅 전체의 경계들을 정하셨다(시 74:17, 시 104:9). 그는 모래를 바다의 경계로 두셨다(벧 5:22). 따라서 성경이 선인이 정한 이웃의 지계표(게불)를 움직이는 것을 금한다(신 19:14)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저주를" 받을 것이다(신 27:17). 물론 이 사람의 죄는 전통을 위반한 것이 아니라, 부동산 - 그것도 양도할 수 없는 부동산 - 을 도적질한 것이었다. 이 범법자에게 퍼부어진 성경상의 저주는 그야말로 족한 것이다(참조: 호 5:10, 욥 24:2-4, 잠 22:28, 잠 23:10). 이런 범죄에서, 가해자는 강자와 부유한 자들이며 피해자는 약자, 고아 그리고 과부들이다. 사해에서 발굴된 여러 두루마리로부터 우리는 쿰란 종파에서 달아난 자들이 "지계표를 이동한 자"로 알려져 있었음을 알았다. 우가릿 어근 gbl과 아랍어 동족어에 비춰볼 때, 히브리어 게불의 여러 용례들은 '산' mountain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즉 삼상 13:18, "스보임 골짜기가 내려다 보이는 산"(한글개역 - 지경 길) 그리고 시 75:54, "저희를 그 성소의 지경, 곧 그의 오른손이 취하신 산으로 인도하시고".(참조: V. P. Hamilton). ------------------- hb;r;(7235, 라바) 많다, 크다, 증가하다, 쏘다 1. 라바(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많다(많아지다), 크다(커지다), 증가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20회 나오며, 칼, 피엘, 히필형으로 사용되었다. 라바는 창 1:22에서 처음으로 나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여기서 모든 번역은 '증가하다, 번식하다'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그 이후의 구절에서 라바는 '증가하다'(창 7:17-18), '많다'(대상 23:17), '너무 많은'(창 43:34)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된다. 단 한번의 경우에 매우 많은 이란 의미들이 입증된다. 라바의 히필어간의 표준적이고 가장 보편적인 의미는 '증가하다, 번식하다'이다. 그러나 이 외에 다양하게 '많은 것을 구하다' ask much(창 34:12), '많이 모으다' gather much(출 16:18), '많이 산출하다' yield much(느 9:37), '더 많이 주다' give more(민 26:54), '쌓다' to heap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제시된 의미의 넓은 범위는 본래의 히브리어 어근의 범위를 보여준다. 라바는 일반적으로 양을 나타내는 문맥에 제한되어 나타나긴 하지만 비유적인 표현에서도 얼마간 사용된다. 이 어근은 다음과 같은 특별한 의미로도 사용된다. '오래 살다'(욥 29:18), 하나님을 거역하는 '말을 많이 하다'(욥 34:37), '많은 자녀들을 갖다'(대상 7:4). 2. 라바(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쏘다, 던지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회 나온다. 창 21:20,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 거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참조: W. WHITE; BDB). ----------------- ![i(5973, 임) ~와 함께, 곁에, 가운데, 말미암아 등 임(전치사)은 '~와 함께 with, 곁에 beside, ~로 말미암아 by, ~에 대하여 again, ~을 향하여 toward, ~가운데 among, ~사이에 between, ~중에서부터 from among, ~에도 불구하고 in spite of, ~외에 except'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000회 이상 나온다. 명사 임과 마찬가지로 전치사 임은 포함함, 함께 함, 동료의 개념을 표현한다(참조: UT19: no. 1863). 사람들은 함께될 수 있다. 서로 다투기도 한다(창 26:20). 사람들은 함께 상속할 수 있고 함께 나눌 수도 있다(창 21:10, 수 22:8). 사람들은 더불어 이야기할 수 있고, 더불어 기뻐할 수 있으며 서로에게 친절을 베풀 수도 있다. 강조점은 다음과 같다. ① 이 단어가 전하는 근본 개념은 친교, 교제, 고난, 번영 등의 공동경험의 개념이다. ② 이 용어는 사회적 지위, 신분 등과 관계 없는 공동의 분깃을 강조할 수 있다. ③ 다른 모든 전치사들과 마찬가지로 이 전치사도 분명한 신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모든 전치사가 여러가지 관계를 나타내지만 임은 특히 밀접한 관계를 강조한다. 이러한 유형의 관계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유지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어느 개인의 구원, 영생,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 섬김에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에트도 '~와 함께' with를 의미하지만 임이 관계의 개념을 더 잘 표현하며 두 단어 중에서 임이 더 흔히 사용된다. ---------- hy:h;(1961, 하야) ~이 일어나다, ~이 되다, ~이다 하야(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이 일어나다, 발생하다, ~이 되다, ~이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3,500여회 나온다. ---------------- [r'(7451, 라) 나쁜, 악한, 악, 악한 것 1. 라(형용사)는 라아([['r: , 7489)에서 유래했으며, '나쁜, 해로운 bad, 악한 evil'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아래서 취급하는 명사 라와 함께 약 666회 나온다. 형용사 라([r' , 7451)는 이 형용사와 관련된 명사들을 수식하여 그 명사의 특성이나 해로운 행동을 나타내 준다. 명사는 가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거나 유익한 역할을 할 수 없는 사물이나 사람의 자질 부족 혹은 열등한 자질을 나타낼 수 있다. 세속적인 의미에서 나쁜 품질에 대한 많은 실례가 있다. 첫째로 바로왕의 꿈에 나타난 보기 흉한 야윈 소(창 41:21, 창 41:27),마시기에 부적합한 물(왕하 2:19), 사는 자가 사기에 부적합하다고 말한 상품(잠 20:14) 등이 있다. 왕하 4:41에서는 솥의 음식물에 들어 있는 어떤 해독을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위험한 것이었으나 선지자가 곧 제거했다. 형용사 라([r' , 7451)는 사나운 짐승(레 26:6), 재앙을 가져오는 천사들(시 78:49), 기근(겔 5:16), 질병(신 7:15, 신 28:35, 신 28:59, 대하 21:19, 욥 2:7, 전 6:2)을 나타내기도 한다. 형용사 라([r' , 7451)는 사자의 말(출 33:4, 느 6:13)이나 기사(사 6:22)와 같이 재난을 가져오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사건들(전 2:17, 전 9:3)이나 시간들(날들)(창 47:9, 잠 15:15, 전 4:8)이 잘못되어 고통으로 가득찰 수도 있다. 이 형용사는 마음의 불쾌(삼상 29:7)나 마음의 슬픔(느 2:1-2, 잠 25:20)을 가리킬 수도 있다. 형용사 라([r' , 7451)은 보다 흔히 도덕적 결함, 즉 자신이나 타인을 해하는 도덕적 특성들, 혹은 좋지 않은 상태를 가리킨다. 이러한 부정적인 특성들에 대한 평가는 하나님이 하신다(잠 15:3). 이러한 하나님의 평가는 종종 "여호와의 보시기에"(in the sight of the Lord)라는 말로 표현된다. 이 표현은 대부분 역사서에 약 55회 나온다. 이 용어는 또한 약 7회 가량 토브(선한)와 대조되는 것으로 정의된다. 따라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악하다(약 11회). 특히 우상 숭배로 하나님을 진노케 할 경우 그러하다(왕하 17:11 등). 몇몇 실례에서 라는 그러한 사람들의 내적 상태를 나타내는 것 같다(창 6:5, 잠 26:23, 전 9:3, 렘 3:17, 렘 7:24). 전 9:3에서 사용된 이 단어의 보다 추상적인 어감을 주목하라. 부정적인 태도들, 즉 교만(욥 35:12), 노함(잠 15:10), 반항(느 9:35, 참조: 시 64:5, 겔 13:22)도 악한(ra') 것으로 열거된다. 다른 사람에 대한 난폭한 행위도 라를 평가한다(신 17:5, 삼상 2:23, 왕상 16:7, 겔 20:44, 겔 30:12). 하나님의 반응은 무관심하거나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적절한 이유에 근거하여 악한 특징을 지닌 사람에게 심판을 위협하시고 수행하신다(스 9:13, 욥 21:30, 잠 11:21).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 대해 보다 밝은 측면이 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악으로부터 돌이키도록 권고하시며(신 13:12, 왕하 17:13, 대하 7:14, 겔 33:11, 겔 36:31, 슥 1:4) 선지자들의 주된 임무는 이러한 권고를 선언하며 백성들을 하나님에게로 되돌아오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렘 23:22). 지혜자는 순종하는 사람은 라에서 자유할 것이라고 약속한다(전 8:5). 여기서도 역시 악한 일로부터 멀리하는 방법에 대한 충고가 제시되어 있다(시 141:4, 잠 4:14, 전 8:3).(G. H. Livingston) 2. 라(명남)는 라아([['r: , 7489)에서 유래했으며, '나쁨, 나쁜 것, 해로운 것 bad, 악, 해악, 악한 것 evil, 불행, 해, 고난, 재난, 참화 misery, injury, calamity'를 의미한다. 명사 라([r' , 7451)는 종종 도덕적 스펙트럼의 양극으로서 토브(선)와 대조적으로 제시된다. 때로는 샬롬(평화)이 라와 반대되는 것으로 말해진다. 이 명사는 또한 그의(하나님의) 보시기에 용납될 수 없는 상태나 행동을 정의된다(렘 52:2, 말 2:17, 참조: 느 9:28). 이 명사의 순전하게 세속적인 의미로 출발해 보건대, 라는 육체적 상해(렘 39:12), 혹은 고통의 때(암 6:3과 유명한 구절인 사 45:7 '나는 번영도 가져오고 재앙도 창조하나니', NIV;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한글개역)를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이 명사는 말로나(시 41:3, 시 73:8, 시 109:20), 행동으로나(미 2:1, 미 7:3), 부적절한 희생 제물을 드림으로(말 1:8) 다른 사람에 대한 비윤리적 혹은 비도덕적인 행동을 나타낸다. 명사 라([r' , 7451)는 2회 내적인 상태(시 7:9, 잠 12:21, '사악')을 나타내는 추상 명사로 사용된다. 그러나 하나님이나 인간을 향한 내적인 태도를 기술하는데 가장 많이 사용된다. 사람은 라를 궁리하거나, 바라거나, 사랑하거나, 즐거워할 수 있다(시 52:3, 잠 2:14, 잠 6:14, 잠 12:20). 혹은 사람은 라에 대해 냉담할 수도 있다(시 36:4, "악을 싫어하지', 참조: 잠 28:4).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기를 거부하는 것도 라일 수 있다(느 9:35). 이러한 거부는 악한 행위에 완전히 복종하는 결과를 가져온다(왕하 21:9, 대하 33:9, 잠 1:16, 사 59:7). 삶의 방식이 라([r' , 7451)로 특징 지워지는 사람은, 만일 그가 계속하여 라에 머물러 있다면 그 미래는 침울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적대하시며(사 31:2) 이런 사람들에게 형벌을 선언하셨다(미 1:12). 삶 그 자체도 이런 사람들에게 적대적이다(신 31:29, 욥 2:10, 욥 30:26, 시 54:5, 시 140:11-12, 잠 13:17, 잠 14:22, 전 8:9). 악한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그는 소생할 기회가 없다. 그러나 악인의 심판자가 되시는 하나님은 또한 악인에게 그 길을 바꾸라고 요구하는 분이시기도 하다. 그것은 인간 편에서의 철저한 행동이어야 한다(시 34:14, 시 37:27, 잠 3:7, 암 5:14-15, 슥 1:4). 이것은 신명기에서 약 10회 악을 "제거하는 것"("purge" RSV)으로 언급된 법률적 방법보다 훨씬 더 유익한 방법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라로부터 돌이킬 때 구원하는 사건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약속한다(욥 5:19, 시 121:7, 잠 19:23). 이 약속에 이러한 구원은 삶의 실제적인 경험이라는 확신이 수반되며(시 10:6, 시 23:4), 삶의 실제적 경험은 헌신과 결합될 수 있다(시 119:101, 렘 42:6). '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조언이 있다. 사람은 '라'를 멀리하라는 말을 듣는다(잠 6:24, 사 56:2, 렘 7:6). '라'를 멀리하는 것에는 '라'를 미워한 강한 태도가 포함될 수 있다(시 97:10, 잠 8:13, 암 5:15). 무엇보다도 우상으로 하나님을 진노케 하지 말라(렘 25:7).(G. H. Livingston) (참조: BDB; Gesenius; TWOT). ----------------- hc;[;(6213, 아사) 일하다, 행하다, 만들다, 형성하다, 이루다 아사(동사)는 기본 어근이며, '일하다, 행하다, 만들다, 형성하다, 이루다'를 뜻하며, 그 기본 의미는 '행하다, 만들다'이다. 이 단어는 많은 표현에서 항상 동일한 기본 개념을 지닌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630회 나오며, 칼형, 니팔형, 푸알형으로 사용되었다. (a) 아사는 창세기의 창조 기사에서 매우 자주 나타나며, 이는 중요하고도 매우 흥미롭다. 바라(ar:B: , 1254)는 칼형에서 (1) 관련된 대상의 개시, (2)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 (3) 창조된 대상의 완전한 새로움, (4) 무에서 창조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아사는 의미의 영역이 훨씬 넓으며, 어떤 특수한 어감을 거의 지니지 않은 채 대상의 형성을 주로 나타낸다. 아사는 자주 바라와 상호 교대로 사용되어 단순히 창조 과정에서 관련된 대상들을 조성하거나 만드는 행동을 나타내는 반면에 바라는 그 물체에 대한 창시를 강조한다(참조: 창 1:1). 창 1:7에서 하나님께서 '창공(궁창)이 있으라'고 명령하셨으면 창공은 만들어질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창공을 만드셨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것은 창공이 있으라는 명령이 창공이 실존하기에 불충분함으로 보충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진 이후 그것이 실현되기까지 하나님의 창조 능력이 계속적으로 발휘되었음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성령의 역사를 감지할 수 있다. 아사는 하나님께 사용되면 흔히 역사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활동을 강조한다. 이러한 문맥들은 구약성경 신학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 가운데 하나, 즉 하나님은 초월적이실 뿐만 아니라 역사 안에 내재하셔서 그의 주권적인 목적을 이루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모세는 애굽에서의 하나님의 크신 행사들을 회상하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을 백성들에게 상기시킬 수 있었다(신 29:1). 하나님께서 여러 민족들에게 행사신 일은 하나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심을 증거해 준다(수 23:3). 솔로몬은 봉헌 기도에서 하나님께서 "행동하실" 것을 간청한다(왕상 8:39). 아사는 종종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대해 사용되어(수 24:17, 시 98:1, 사 25:1) 구약성경이 하나님의 내재하심에 관하여 크게 강조함을 다시 증명한다. 아사는 구약성경의 그 밖의 곳에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여러 측면들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시 86:9, 시 95:5, 시 96:5). (b) 아사는 윤리적인 의무의 개념으로 종종 사용된다. 언약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행하라'는 명령을 자주 받는다(출 23:22, 레 19:37, 신 6:18, 등). 이 개념이 나타나는 무수한 문장은 하나님께 윤리적으로 응답하는 것의 중요성을 입증해 준다. 여기에서 응답은 단순한 정신적인 추상적 개념을 넘어선 것이며, 논증할 수 있는 행동에서 분명이 증거되는 순종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아사는 선악간에 행하는 것(창 3:14, 창 20:10, 왕하 12:3, 왕하 14:13, 왕하 8:18, 왕하 8:27, 신 16:12, 신 30:8, 민 15:39 등)에 대해 사용되었다. 아사는 죄, 잘못에 대해 사용될 때 '저지르다, 범하다'라는 의미를 지니며(호 6:9), '~에 대하여 행동하다'(슥 1:6), 그리고 충고를 따른다는 의미에서 '따르다'(삼하 17:23)를 뜻한다. (c) 아사는 어떤 것을 만들다(출 20:4, 신 9:12, 창 3:21), 전쟁하다(창 14:2, 수 11:8, 신 20:12, 신 20:20), 친절하게 대하다(삿 1:24), 신실함을 보여주다(창 32:10), 제물을 드리다(출 10:25), 어리석게 행동하다(신 22:21), 희생제물을 드리다(출 10:25), 유월절을 지키다(출 12:48), 복수하다(삿 11:3), 식물이 열매를 맺다(창 1:11), 음식을 준비하다(창 18:7 이하), 직무를 행하다(왕하 17:32), 화해하다(사 27:5), 제사장들을 세우다(왕상 12:31, 왕상 13:33), 사용하다(삼상 8:16), 보내다(전 6:12) 등을 의미하거나 그런 의미를 구성한다.(참조: T. E. Mccomiskey; BDB; KB). ----------------- bx'[;(6087, 아차브) 몹시 슬퍼하다, 마음이나 가슴 아파하다, (감정을) 상하게 하다 1. 아차브(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몹시 슬퍼하다, 마음이나 가슴 아파하다, (감정을) 상하게 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5회 나온다. 아차브는 감정적인 슬픔뿐만 아니라 육체적 고통과 관련된다. 육체적, 정신적 불안에 대해 사용되는 동사 아차브는 다양한 문맥에서 사용된다. (a) 칼형은 3회 발견된다. 선지자이자 역사가인 열왕기상의 기자는 아도니야에 대하여 그 부친이 어느 때고 그의 행동을 살펴서 "결코 그를 마음상하게 한 적이 없었다"(한글개역 "한번도 저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라고 비꼬아 칭찬한다(왕상 1:6). 이는 부모의 관심과 훈육이 결여된 부끄러운 일이다. 또 다른 구절에서 이스라엘은 "가슴(마음) 아파하는" 버림받은 아내로 묘사된다: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입어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소시에 아내 되었다가 버림을 입은 자에게 함같이 하실 것임이니라 네 하나님의 말씀이니라"(사 54:6). 대상 4:10에서 마음아파 하는 것을 묘사한다. (b) 니팔형은 7회 발견된다. 그 중 1회는 육체적인 고통에 대해 사용된다(전 10:9, 돌을 떠내는 자가 그 돌로 인하여 상처를 입는 어리석음에 대해 사용된다). 대개 정신적, 영적 고뇌는 이 동사의 니팔형으로 묘사되는데, 그 실례로 요셉을 알아봄으로 인한 요셉의 형제들의 비탄에 잠긴 격심한 고뇌(창 45:5), 다윗을 해하려는 사울의 어리석은 음모를 안 요나단의 번민(삼상 20:34, 참조: 삼상 20:3), 낭독되는 토라를 듣고 부족함을 깨달은 이스라엘 백성의 충격적인 비탄(느 8:10-11)이 있다. (c) 피엘형으로는 2회 나온다. 시 56:5은 다윗의 적들이 다윗의 일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을 나타낸다. "내 말을 곡해하며"는 '나의 일들을 성가시게 하며'라고 번역할 수 있다. 전자, 후자 모두 가능한 번역이다. 사 63:10에서는 이스라엘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다"라고 언급한다(참조: 엡 4:30, 여기에서 루페오는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사용되어 있다). 이 히필형은 시 78:40에서만 발견되며 반역, 시험, 도발(격동, provocation)을 나타내는 용어들과 병행되어 사용된다. 여기서 슬프게 하거나 마음 아프게 하는 것을 나타낸다. (d) 히트파엘형은 2회 사용된다. 그 중 1회는 디나가 강간당한 것을 안 그녀의 형제들의 반응을 묘사하고(RSV, "사람들이 분개했다", 한글개역 "사람 사람이 근심하고", 창 34:7). 또 다른 한 용례는 대홍수에 대한 잘 알려진 냉랭한 서언에서 사용된다. 즉 인간의 사악함과 계속적으로 악한 생각뿐임을 보신 여호와의 그 마음에 근심(슬퍼) 하심을 기술한다(창 6:6). 2. 아차브(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만들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회 나온다. (a) 피엘형에서 욥 10:8은 주의 손이 나를 만드셨다고 한다. (b) 히필형에서 렘 44:19은 과자로 그녀의 형상을 만들어 그녀에게 전제를 부었다고 한다.(참조: BDB; TWOT; IHEOT). --------------- la'v;(7592, 샤알) 묻다, 구하다, 요구하다, 간청하다 샤알(동사)은 기본 어근이며, '묻다, 구하다, 요구(요청)하다 ask, 구걸하다, 간청하다 beg'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70회 이상 나오며, 칼(거의 대부분), 니팔, 히필형으로 사용되었다. 샤알은 누구에게 무엇을 '구하다, 묻다' to ask를 의미하며, 이 때 그 요청이란 어떤 물질적 사물에 대한 청구(출 3:22), 어떤 정보에 대한 물음(창 32:17), 혹은 타인의 죽음을 요구하는 것(욥 31:30), 상위자가 하위자에게 행하는 요구(욥 38:3), 나아가서는 탄원자의 간구에 대해 사용되었다. 샤알은 일시적인 사용을 위해 어떤 호의를 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이웃에게 빌어온 것이 그 임자가 함께 있지 아니할 때에 상하거나 죽으면 반드시 배상하려니와"(출 22:14). 혹은 의미가 약화되어 '추구하다, 바라다'를 의미하기도 한다: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전 2:10). 샤알은 '빌다 borrow'라는 의미를 나타낸다(출 3:22, 출 11:2, 출 12:35). 그러나 이 단어는 보통 반환의 의미를 함축하지 않으며 이 문맥에서도 함유하지 않았다. KJV는 borrow(빌다)로 번역하지만 RSV, NASB 그리고 NIV 등은 'ask'(구하다)를 사용한다. 샤알은 남녀들이 하나님께 인도해 주시기를 구하거나 또는 구하지 않는 것과 관련하여, 여호와께 문의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었던 다윗은 여러 차례, "여호와께 물었다"(삼상 23:2, 삼상 30:8, 삼하 2:1, 삼하 5:19, 삼하 5:23, 대상 14:10, 대상 14:14 등). 그러나 수 9:14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여호와의 입에 묻지(자문을 구하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사 30:1-2에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패역한 자식들이여...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으니"라고 읽는다. 이와 동일한 의미에서 샤알은 죄악적으로 이방신들에게 자문을 구한다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예컨대 겔 21:21은 "바벨론 왕이... 우상에게 묻고 희생의 간을 살펴서"라고 말한다. 샤알은 '어떤 것을 간청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것 또한 하나님께로 향할 때가 많다. 예컨대 시 122:6은 우리에게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고 권면한다. 그리고 사 7:11은 선지자가 "너는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라"고 하면서 악한 아하스에게 도전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나님께 요청하였던 사물들로서 구약성경에 언급된 항목들 가운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분별력, 생명, 왕, 불임자를 위한 아이, 비, 그리고 사 58:2의 "의로운 판단". 따라서 남자나 여자가 하나님께 인도해 주시기를 구할 뿐만 아니라 이들이 기도를 통하여 그리고 어떤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 삶에 필요한 것과 생의 문제점들을 간구하고 있음을 우리는 또한 구약성경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는 것이다.(참조: BDB; R. L. Harris). ---------------- a/B(935, 보) 들어오(가)다, 가다, 오다 보(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들어오(가)다, 가다, 오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560회 나오며, 칼형, 히필형, 호팔형으로 사용되었다. 보(a/B , 935)는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공간상의 움직임을 나타낸다. '들어가다'라는 의미는 창 7:7에 나오는데, 여기에는 노아와 그의 가족이 방주로 "들어갔다"고 언급되어 있다. 이 동사의 사역형 어간은 '들어가게 하다', 혹은 '데리고 들어오다(창 6:19, 한글개역 - "이끌어 들여")', 혹은 '이끌어 오다, 가져오다'(창 2:19, 이 단어의 최초의 용례)를 의미한다. 이 동사는 창 10:19의 '네가 소돔까지 갈 때'(KJV; "소돔을 지나" - 한글개역) 어구에서 더욱 독립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 동사는 '오다'라는 의미와 '돌아오다'라는 의미 둘 다로 사용될 수 있다.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은 가나안 땅으로 "왔다"(한글개역 - 땅에 "들어 갔다", 창 12:5). 한편 신 28:6에는 하나님께서 (아침에 일하러) '나가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는' 경건한 자들을 축복하셨다고 언급되어 있다. 때때로 이 단어는 해가 '지는 것'을 나타낸다(창 15:13). 이 단어는 '조상에게 돌아간다'(창 15:15)는 의미에서 죽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른 특수한 용례는 '아내에게 들어가는 것' 혹은 '동거'(창 6:4)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또한 시간의 흐름에 대해 사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선지자들은 '다가오는' 심판의 날에 대해 말한다(삼상 2:31). 마지막으로 이 동사는 거짓 선지자가 그 말대로 이적과 같은 그런 사건을 '이루는' 것에 대해 사용되기도 하였다(신 13:2). 하나님이 '오신다'는 말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로, 하나님은 천사(삿 6:11)나 다른 육신을 입은 존재(참조, 창 18:14)를 통해 '오신다', 그는 꿈(창 20:3)이나 다른 실제적인 현현(출 20:20)을 통하여 인간에서 '나타나시어' 말씀하신다. 예를 들어 출애굽 동안에 하나님은 백성들 앞에 가는 구름과 불 속에서 '나타나셨다'(출 19:9).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자들이 그에게 합당하게 예배 드리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리고 언제든지 그들에게 '오신다'고 약속하신다(출 20:24). 블레셋인들은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에 들어왔을 때 하나님께서 그곳에 '오셨다'고 느꼈다(삼상 4:7). 공식적인 예배와 관련된 용법은 시 24:7에 나온다. 여기에는 영광의 왕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시온의 문이 열리리라고 언급되어 있다. 또한 여호와께서 겔 43:2에 묘사되어 있는 새 성전으로 '돌아 오실'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오심'에 대한 일단의 예언적 묘사가 있다. 이 주제는 하나님께서 전쟁에서 자기 백성들을 도우시려고 '오심'에 대한 찬송(참조, 신 33:2)에서 기원한 것 같다. 시편(예: 시 50:3)과 예언서(예: 사 30:27)에는 여호와께서 심판과 축복으로 '오신다'고 언급되어 있다 - 고대 근동 신화에서 차용한 시적인 어투이다(참조, 겔 1:4). 보(a/B , 935)는 또한 메시야의 '오심'을 언급하는데 사용된다. 슥 9:9에는 메시야 왕께서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고 묘사되어 있다. 어떤 구절은 특별히 어려운 문제를 제기하는데, 실로가 오시기까지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예언하는 창 49:10이 그러하다. 또 다른 난해한 구절은 겔 21:27이다: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르면 그에게 주리라". 동사 보를 사용한 매우 유명한 예언은 인자의 '도래'에 관한 것이다(단 7:13). 끝으로 마지막 날의 '도래'(암 8:2)와 여호와의 날의 '도래'(사 13:6)가 있다(넬슨의 구약해설). 보(a/B , 935)는 공동체와 함께 기도하고 희생제사를 드리려고 성소에 오는 사람에 대해 사용되었다(신 12:5, 신 31:11, 삼하 7:18, 사 30:29, 렘 7:2, 렘 7:10, 시 5:7, H8, 시 42:2, H3). 제사장들이 이 거룩한 영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특별한 규정을 이행해야 했는데 반해(출 28:29이하, 출 29:30 등), 그곳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은 의로운 행동을 나타내야 한다(시 15편, 시 24편). 이방인들도 기도하러 올 수 있었으나(왕상 8:41), 환관은 제의 공동체에서 제외되었다(신 23:1, H2). 백성들이 성소에 올 때, 그들은 제사장들에게도 갔다(신 17:9). 그들은 또한 여호와께 물으러 선지자에게 갔다(예: 왕상 14:3, 왕상 14:5, 왕하 4:42, 겔 14:4, 겔 14:7).(참조: E. A. Martens). ================ 유다의 아들들(대상 4:1-10) 에스라가 여기에서 유다 족속의 명부에 특별하게 관심을 표명한 이유는, 의심할 바 없이 다른 족속들보다 가나안에 오래 잔존했었고, 기간이 경과함에 따라 이것이 기록된 당시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 지파가 부족 지파인 시므온, 베냐민, 그리고 레위와 더불어 유다 왕국을 세웠으나, 다른 족속들의 대다수는 앗수르아에 남아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본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야베스이다. 야베스가 누구의 아들인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고 그가 얼마나 살았는지도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8절에서 언급되었듯이 아하헬 족속들 중의 하나를 이룬 자였다. Ⅰ. 야베스의 이름에 대한 이유. 그의 어머니가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9절)는 이유로, 그 이름을 그에게 주었다. 모든 아들은 수고로이 태어난다(왜냐하면 여인에게는 “수고로이 자녀를 낳으리라”고 선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자녀는 다른 자녀들보다 훨씬 더 어렵게 난다. 보통 출산의 수고는 “아들이 난 기쁨”때문에 후에는 잊어버린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수고가 너무나 특별한 것이어서, 그 아이가 할례 받을 때까지도 기억된 것 같으며, 그 기억이 그가 살아 있는 동안은 계속 남아 있었던 것같이 보인다. 아마 이 어머니는 라헬이 고통 중에 죽어가면서 그녀의 아들을 베노니라고 부른 것과 같이, 그를 야베스라고 불렀을 것이다. 혹은 그 어미가 건강을 회복했다고 할지라도, 이름은 그렇게 붙였을 것이다. 1. 그렇게 붙인 이유는, 그것이 그녀에게 계속 기억에 남아 그런 수고를 겪으면서도, 그 고통 중에서도 자기를 붙들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고통의 날에 겪었던 일들에 대한 생각을 항상 소유하여 떨림으로 그 기쁨을 배우기 위하여, 우리의 고통을 종종 회상하는 것은 유용한 일이 될 수 있다. 2. 또한 그 어머니가 그를 낳아서 보내 준 이 세상이 얼마나 큰 눈물의 골짜기이며, 그가 “고통의 날은 많고 기쁨의 날은 적다”는 것을 예상하고 기억케 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이름이 내포하고 있는 그 고통의 의미가 그의 영혼을 진지하게 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렇게 큰 고통 중에 그를 낳아준 어머니를 사랑하고 존귀케 하고 그녀를 평안하게 하기 위하여 모든 일에 수고할 수 있도록 각성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기의 양친께 보답하는 것은 자녀의 경건한 의무이다(딤전 5:4). Ⅱ. 야베스의 성품의 탁월함. “그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였다”고 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형제들보다 더 합당한 자가 되었고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그들보다 위엄이 있었다. 형제들도 모두 아름답게 행했으나 그는 그보다도 뛰어났다. 이제 그의 어머니가 그로 인하여 겪은 수고는 충분히 보상되었다. 그녀의 모든 아들 중에서 그 아들은 그녀에게 가장 귀한 값을 치뤘고, 그녀는 그를 통해서 가장 행복했으며, 고통에 비례하여 그만큼 기쁨도 컸다(시 90:15). 우리는 그가 그 형제보다 존귀했다는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그가 재산을 크게 일으켰는지, 보다 훌륭한 행정 장관이었는지, 혹은 전쟁에서 눈에 띄게 공로를 세웠기 때문인지 그것은 모른다. 우리는 그의 학식과 신앙 때문에 그런 칭호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가 될 것이다. 이런 것들이 무엇보다도 한 개인에게 명예를 주기 때문이다. 야베스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탁월했다. 1. 학식에 있어서, 우리는 “서기관들의 족속이 야베스에 살았다”는 것을 안다(2:55). 야베스란 도성은 아마 그의 이름을 딴 것일 것이다. 유대인들은 야베스가 유명한 율법박사요, 그 후에 많은 제자를 남겼다고 말한다. 여기에서는 그에 대하여 이렇게 돌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에스라가 이것을 기록할 때는 그의 이름이 잘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2. 신앙에 있어서도 뛰어났다. 우리는 여기서 그가 기도의 사람이었음을 안다. 신앙에 대한 그의 열심이 그를 참으로 존귀케 했다. 그리고 기도로 인해 그의 존귀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을 더했다. 참으로 위대해지는 길은 참으로선하고 많이 기도하는 것이다.\ Ⅲ. 그가 한 기도는 솔로몬이 지혜를 얻기 위해 한 기도와 같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행했으며, 하나님의 축복과 가호 아래 머물러 있었다. 따라서 그는 영달을 누렸다. 아마도 이런 것들이 그의 매일의 기도를 차지한 제목들이었을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홀로 기도하고, 또 다니엘과 같이 그의 가족과 함께 기도하는 것이 그의 상례였다. 혹자는 그것은 그가 원수들과 싸우거나 위협을 받았을 특별한 경우에 했다고 생각한다. 이제 다음의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그는 누구에게 기도했나? 이방인들의 어떤 신들에게 기도하지 않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는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이요, 그만이 기도를 들을 수 있으며, 그만이 기도에 응답하실 수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 그에게만 기도하는 자에게 향할 수 있는 눈이 있다. 그분은 그의 백성과 계약을 맺으신 하나님이요, 야곱이 씨름하여 승리하고 거기서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얻은 하나님이다. 2. 그의 기도의 성질은 어떤 것이었나? (1) (KJV의) 난외주에서와 같이 그 기도는 경건한 서약이었다―“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시오면” 이라고 했다. 이 의미는 불완전하나, 야곱의 서약에서 쉽게 그 뜻이 충분해질 수 있다.―그리하면 “주께서는 나의 하나님이 되리이다”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약속을 표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신의 힘으로 약속하기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며, 그 자신은 완전히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쓰실 수 있도록 백지를 드리고 있는 셈이다. “여호와여, 만일 주께서 나에게 복을 주시고 지키실진대, 주께서 나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대로 행하소서. 나는 영원히 주의 명령과 처분에 맡겨져 있나이다.” (2) 본문에 따르면, 그 기도는 가장 열렬하고 열정적인 욕망을 가진 말이다. “오, 나에게 축복하소서”(KJV). 3. 그의 기도의 제목은 무엇인가? 그는 네 가지를 위하여 기도했다. (1) 하나님이 참으로 그를 축복하도록 바라는 기도였다. “주께서 나에게 복에 복을 더하소서. 즉 나에게 거듭거듭 그리고 풍성한 축복을 하소서.” 아마도 그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창 22:17)을 바랐을 것이다. 즉 “축복으로 내가 너를 축복하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그 축복을 나에게도 내리게 하소서” 한 것이다. 영적인 축복이 최선의 축복이다. 그런 것으로 축복받은 자들이 참으로 축복받은 자들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실제적인 것들이요 현실적인 결과를 낳는다. 우리는 단지 축복을 원할 뿐이고, 하나님만이 그것을 주실 수 있다. 하나님이 축복하신 자들은 참으로 축복받은 자들이다. (2) 그의 지경(地境)을 넓히도록 기도했다. 그는 작업이나 전쟁으로 말미암아, 자기 할당으로 돌아온 것을 증가하여 번창케 하기 위해 기도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크게 하시고, 그 자신 안에서와 우리의 하늘의 가나안에서 우리의 몫이 크게 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3) 하나님의 손이 자기와 함께하시도록 기도했다. 유다의 족속을 위한 모세의 기도는, 유다 자신의 “손이 스스로를 위해 만족하게 하소서”(개역: 싸우게 하소서)라는 것이었다(신 33:7). 그러나 야베스는 만일 “하나님의 손”이 자기와 함께하지 아니하면, 즉 그의 능력의 임재가 없으면 그런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를 이끄시고 우리를 보호하시며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모든 일을 하게 하시는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손은 참으로 우리에게 만족한 손이요 충만한 손이다. (4) 그는 악에서, 즉 죄의 악에서, 고난의 악에서, 또 이것들이 그를 상치 아니하고 괴롭히지 아니하며 자기 자신을 참으로 “슬픔의 인간”이 되지 않도록 그의 모든 원수의 책략에서 보호해 달라고 기도했다. 본래 그의 이름에는 하나의 암시가 있다. 즉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여,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뜻이다. 4. 그의 기도의 성취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그가 구한 것을 허락하셨다.” 그에게 특별한 번영을 주셨고, 그의 기업에 성공을 주셨으며, 그의 연구에, 그의 세속적인 직무에, 가나안 족속들과의 싸움에 성공을 주셨다. 그래서 그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가 되었다. 하나님은 언제나 기도에 경청할 준비가 되어 계시다. "하나님은 귀먹지 않으신다." ============== [[창12:1-3]]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바라크) 네 이름을 창대하게(가달) 하리니 너는 복이(베라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베라카)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칼랄)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바라크)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 tyIB'(1004, 바이트) 집, 가정 house 바이트(명남)는 기본어이며, '집, 가정 house'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050회 나오며 '집' house, 혹은 '건물' building, '가정' home, '가족' household, '땅' land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 명사는 아람어 성서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다른 셈어에 동족어를 가지고 있다. (a) 바이트는 어떤 종류의 재료로 만든 고정된, 세워진 구조물을 나타낸다. 이것은 '영구적인 거처'로서, 대개 장막과 구별된다(삼하 16:21, 참조: 삼하 16:22). 이 단어는 방 한 개의 거처에도 적용될 수 있다: "가로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창 19:2). 바이트는 또한 일시적인 '장막'(booth)이나 초가(but)와는 구별된다: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house)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booths)을 지은고로..."(창 33:17). 시 132:3에서 이 단어는 '생활 거처'를 뜻하며 '장막' tent(직역하면 '내 집의 천막')과 직접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다: "내가 실로 나의 거하는 장막에 들어가지 아니하며 내 침상에 오르지 아니하며"(시 132:3). 이와 비슷한 용법이 대상 9:23에 나온다(직역하며 '천막 집' the tent house): "저희와 그 자손이 그 반열을 좇아 여호와의 전 곧 성막문을 지켰는데". (b) 바이트는 많은 구절들에서(특히 이 단어가 '하나님'이란 말과 결합되어 사용될 때) 예배의 장소, 혹은 '성소'를 나타낸다: "너희 토지에서 처음 익은 열매의 첫 것을 가져다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찌니라..."(출 23:19). 다른 구절에서 이 명사는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을 의미한다: "또 전의 벽 곧 성소와 지성소의 벽에 돌아가며 다락들을 건축하되..."(왕상 6:5). 때로 이 단어는 비록 상세하게 정의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런 의미를 지닌다(참조: 겔 41:7). (c) 바이트는 방이나 가옥의 부속물을 의미한다: "전국 각 도에 관리를 명령하여 아리따운 처녀를 다 도성 수산으로 모아 후궁(harem, 직역하면 '여인들의 집')으로 들여..."(에 2:3). 이와 관련하여 바이트는 건물의 내부 혹은 바깥쪽에 반대되는 어떤 다른 구조물을 나타내기도 한다: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창 6:14, 성경의 처음 용례). (d) 바이트는 종종 어떤 것이나 사람이 거하거나 안식하는 장소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지하세계(음부[sheol])는 '집'으로 불리운다: "내 소망이 음부에 내 집을 삼음에 있어서 침상을 흑암에 베풀고"(욥 17:13). '영원한 집'은 무덤이다: "...이는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전 12:5). '집'은 느 2:3에서처럼 '무덤'과 함께 사용될 때 '장소'를 의미할 수도 있다: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열조의 묘실있는 성읍이 어찌하여 황무하고". (e) 바이트는 삿 3:20에서 용기(NASB, '상자' box)를 의미한다. 왕상 18:32의 '두 종자의 집' house of two seeds(한글개역 -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 만한 도랑")은 곡식 종자를 담는 용기를 가리킨다: "제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 단으로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만한 도랑(직역하면, ~의 집들)을 만들고". '널판들의 띠' house of bars는 받침대를 의미한다: "그 널판들은 금으로 싸고 그 널판들의 장소(places, 직역하면, 집들 houses)들을 위하여(한글개역 - "널판들의 띠를 꿸) 금고리를 만들고..."(출 26:29). 이와 유사한 것으로 잠 8:2에 나오는 두 길의 교차로, 즉 '두 길의 장소' places('집' house, 한글개역 - "사거리")를 참조하라. 스텝지대(steppe)가 '짐승들의 집'으로 칭해진다: "...내가 들로 그 집을, 짠 땅으로 그 사는 처소(짐승들의 집)를 삼았느니라"(욥 39:6). (f) 바이트는 가끔 한 집에 사는 사람들, 즉 '가족' household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창 7:1). 수 7:14에서 이 단어는 '가족' family을 의미한다: "...여호와께 뽑힌 지파는 그 족속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족속은 그 가족대로(직역하면, 집 혹은 단일한 거처에 사는 사람들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며"(수 7:14). 이 명사는 이와 유사한 의미에서 '자손'을 의미한다: "레위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었더니"(출 2:1). 이 단어는 '확대 가족', 심지어 주어진 지역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 "유다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을 삼았더라"(삼하 2:4). 그러나 창 50:4에서 바이트는 '왕궁' 또는 왕궁에 있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곡하는 기한이 지나매 요셉이 바로의 궁(house)에 말하여...". '왕궁'과 '자손'이란 개념이 삼상 20:16에서는 결합되어 있다: "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삼상 20:16). (g) 바이트는 몇몇 구절들에서 '영토' 또는 '나라'를 뜻한다: "나팔을 네 입에 댈찌어다 대적이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호 8:1, 호 9:15, 슥 9:8). (참조: NEDO; BDB). -------------- ha;r;(7200, 라아) 보다, 바라보다, 조사하다 라아(동사)는 기본 어근이며, '보다, 바라보다, 조사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300회 이상 나온다(창 1:4, 창 1:12, 창 16:13, 창 17:1, 창 19:28, 창 21:16 등). ----------------- &l'y:(3212, 얄라크) 가다, 오다, 걷다 얄라크(동사)는 기본어근이며, '가다 go, 오다 come, 걷다 walk'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050회 나온다. 얄라크는 보통 사람들의 일반적인 '움직임'을 나타낸다. 따라서 이 단어는 다양한 문맥에서 여러가지 의미(수 17:7도 포함)로 사용될 수 있다. 특히 다음과 같은 용법들, 즉 명령적인 외침의 용법(창 37:13, 창 37:20, 창 19:32, 창 31:44), 다른 동사의 역할을 확대시키는 부정사로서의 용법(창 8:3, 창 8:5, GKC, 113u를 보라), 다른 동사의 역할을 구체화시키는 한정사로서의 용법(창 27:14, 창 50:18, 왕하 3:7, 사 2:3)에 주목해야 한다. 여러 종류의 '가는 행위'에 대한 구체적 적용은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뱀의 '기어다님' creeping(창 3:14), 여우의 '노님' prowling(애 5:18), 배의 '항해' sailing(창 7:18), 물의 '흐름' flowing(창 2:14), 나팔 소리의 '커져감' llaying(출 19:19), 사람의 '걸어감' walking(출 14:29) 등이다. 다른 특별한 용법에서, 이 동사는 어떤 것의 끝을 의미하는데, 예를 들면, 비(아 2:11), 이슬(호 6:4), 바람(시 78:39), 슬픔(욥 16:6), 인간의 생명(창 15:2, 수 23:14) 등의 '끝'을 의미한다. 이 동사는 가상적인 신(시 115:7)에 대해 사용되기도 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적용되기도 한다. 비록 신현현에 대한 기사에서는 일반적으로 다른 동사들이 사용되지만(Frank Schnutenhaus, "Das Kommen und Erschinen im Alten Testament", ZAW 76:1-12), 신현현의 문맥에서 분명하게 얄라크가 사용된 경우가 적어도 한번은 있다(창 18:33). 아마도 창 3:8도 역시 신현현의 문맥일 수 있지만 그 분사는 '여호와 하나님'보다는 콜(qol: 음성)에 연결되는 것 같으며, 이 때 그 번역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그 날 바람결에 동산 전역에 퍼져 가던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 신인동형론적으로 이해할 때, 하나님은 구름 위를 걸으시거나(시 104:3) 하늘에서 걸으신다(욥 22:14). 보다 더 흔하고 더욱 중요한 것으로서, 얄라크는 심판이나 축복(삼하 7:23, 시 80:2), 특히 광야 방황 동안에(예: 출 33:14, 출 13:21) 그의 백성에게 오시는 여호와께 사용된다. 후자의 문맥과 관련하여 새로운 출애굽(사 45:2)을 기억하라. 광야에서 백성들이 하나님의 궤를 뒤따랐듯이 그들은 의식에서 그 뒤를 따른다(드물게 얄라크로 표현됨. 참조, 수 3:6, 민 10:32-36). -------------- hk;r;B](1293, 베라카) 축복, 복을 주는 것 베라카(명여)는 바라크(&r'B; , 1288)에서 유래했으며, '축복, 복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70회 나온다. (a) 베라카는 '축복, 복 주심 blessing'에 대해 사용되었다. ① 부모의 축복(창 27:12-41, 창 49:28), 모세의 축복(신 33:1). ② 하나님의 복 주심(출 32:29, 레 25:21, 신 11:26, 신 11:27, 신 11:29, 신 23:6(= 느 13:2), 신 28:2, 신 28:8, 신 30:1, 신 30:19, 수 8:34, 삼하 7:29, 시 3:8, 시 21:3, 시 133:3, 사 44:3, 스 34:26, 스 44:30, 욜 2:14, 말 3:10, 창 39:5, 신 12:15, 신 16:17, 신 33:23, 시 129:8, 잠 10:22, 시 24:5, 창 28:4). ③ 사람의 축복(시 109:17, 잠 10:6, 잠 11:25, 잠 28:20). ④ 가난한 자의 축복(욥 29:13, "망하게 된 자도 나를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과부의 마음이 나로 인하여 기뻐 노래하였었느니라"). (b) 베라카는 복의 근원 즉 복을 주는 한 복에 대해 사용되었다. 아브라함(창 12:2), 이스라엘(사 19:21, 겔 34:26, 슥 8:13), 의인의 씨(시 37:26), 왕(시 21:6), 의인의 기념(잠 10:7), 새로운 포도즙(시 65:8)은 세계나 인류 사회에 한 복이 되는 것이다. (c) 베라카는 '복, 번영'에 대해 사용되었다. 정직한 자의 축원이나 번영(잠 11:11), 이른 비의 은택(시 84:6), 하늘의 복, 원천의 복, 태의 복(창 49:25), 아비의 복(번영)(창 49:26), 너의 복(번영)(말 2:2). (d) 베라카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에 대해 사용되었다. '축복'이 하나님께 돌려질 때, 그것은 찬양과 감사의 표현이었다: "너희 무리는 마땅히 일어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찌어다 주여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송축하올 것은 주의 이름이 존귀하여 모든 송축이나 찬양에서 뛰어남이니이다"(느 9:5). (e) 베라카는 '선물, 선사'에 대해 사용되었다(창 33:11, 수 15:19, 삿 1:15, 삼상 25:27, 삼상 30:26, 왕하 5:15). 잠 11:25에서 베라카는 '활수한 사람'에 대해 사용되었다: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f) 베라카는 '평화 협정'에 대해 사용되었다: 왕하 18:21(= 사 36:16): "이제 네가 저 상한 갈대 지팡이 애굽을 의뢰하도다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그 손에 찔려 들어갈찌라 애굽 왕 바로는 무릇 의뢰하는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참조: BDB; TWOT). -------------------- ld'G:(1431, 가달) 성장하다, 크게되다, 커지다, 강해지다, 찬양하다 가달(동사)은 기본어근이며, '자라다, 성장하다, 커지다, 크게(또는 중요하게)되다, 조장(장려)하다, 증진시키다, 강하게 만들다, 찬양하다, 큰일을 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16회 나온다. 가달은 인간의 삶의 성장해 가는 과정과 나이나 크기의 증가를 의미한다: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의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대연을 배설하였더라"(창 21:8). 또한 가달은 어느 동물(삼하 12:3)이나 식물(사 44:14)들이 성장하는 것과 동물의 뿔이 자라는 것(단 8:9), 그리고 다른 자라는 것들을 묘사한다. 가달이 강의형으로 사용될 때는 이러한 성장시키는 행위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사 1:2). 이 강의형 어간은 허락을 암시하기도 한다(민 6:5). 가달은 '창대하거나 부유한 상태'를 나타낼 수 있다. 아브라함의 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에게 크게 복을 주어 창성케(great)하시되..."(창 24:35). 여기에서 이 단어는 한 과정의 종결을 나타내고 있다. 이 동사가 강의형 어간으로 쓰일 경우에는, 어떤 사실을 공표한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창 12:2). 가달은 때때로 '크다, 위대하다, 자신의 위대함을 입증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민 14:17). 모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참으로 크신 분이심을 나타내보이시되 하나님의 백성들을 멸망시키지 말 것을 기도하고 있다. 그러한 행동(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것)은 구경꾼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는 그가 약속하신 것을 성취하실 수 없었다는 결론을 내리게끔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팔레스틴으로 인도하신다면, 이것은 열방 앞에 여호와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와 동일한 의미가 삼하 7:22에서 나타나는데, 그러나 여기에는 '광대한, 위대하다고 찬양받는'이라는 의미가 부가되어 있다. 가달의 또 다른 강조점은 '위대하다, 강하다, 중요하다, 귀중하다'이다. 이 단어가 왕에게 적용될 때 이런 의미가 나타난다. 바로가 요셉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greater, [너보다 강하고 영예로움은])이 보좌 뿐이니라"(창 41:40). 메시야는 땅끝까지 강성해질 것이다(미 5:4). 이 단어의 '귀중하다'라는 의미는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는 삼하 26:24에서 나타난다. 이 구절에서 두번째 사용된 것은 이 동사의 강조형 어간이다. 만약 이 대목을 '내 생명을 귀중히 여기소서'로 번역하면 그 의미가 분명히 나타날 것이다. 가달이 재귀형으로 사용될 경우에는 '자기 자신을 크게하다'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나라의 눈에 내 존재함과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나를 알게 하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겔 38:23)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문맥상으로, 하나님께서 심판을 내리실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이러한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다" 혹은 자신의 강함과 위대함을 나타내 보이신다. 이와 달리 위대함이나 능력에 대한 거짓 진술은 헛된 자랑이다. 그래서 가달은 '자랑하다'를 의미할 수도 있다(사 10:15). 가달의 사역형은 '심히 자랑하다'를 의미한다: "너희가 참으로 나를 향하여 자긍하며 내게 수치될 행위가 있다고 증명하려면 하려니와..."(욥 19:5). 욥 7:17에서는 이 동사가 강의형으로 사용되어 위대함에 대한 존중을 나타낸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주시고..."(참조: 시 8:4). 즉 지극히 미미한 존재인 인간을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중히 여기시는가? (참조: BDB; KB; Scott). ------------- ll'q;(7043, 칼랄) 하찮다, 시시하다, 보잘 것 없다, 가볍다, 빠르다 칼랄(동사)은 기본어근이며, '하찮다, 시시하다, 보잘 것 없다, 가볍다, 빠르다, 날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30회 나오며, 칼, 니팔, 피엘, 푸알, 히필, 필렐, 히트팔펠형으로 사용되었다. 이 어근의 기본의미는 규정, 속도(여기에서는 재빠르다는 뜻), 또는 상황에 있어서 '보잘 것 없음, 가벼움' slightness이라는 특성을 나타낸다. 후기 용례에서 이 단어가 묘사하는 상태는 응당 받아야 할 그 이하의 상태, 또는 어떤 대상을 향한 하나님의 바람 이하의 상태이다. 그러므로 이 어근은 어떤 낮은 위치를 의도할 때, 전문적으로 저주할 때 사용된다(특히 강의형 어간들로). 이 어근은 130회 등장한다. 개개인에 적용되는 주요 의미 '가볍다 또는 보잘 것 없다' to be light or slight가 사라에 대한 하갈의 평가에서 사용되었다(창 16:4-5). 사라가 지위에 있어서 낮추어진 것은 아니다. 임신하지 못하는 여인으로서 기능과 위신의 측면에서 '낮추어' 졌다. 그러므로 하갈의 태도는 '급소를 찌른 것이었다'. 이와 유사한 용법이, 다윗이 미갈에게 자기 자신을 더욱 낮출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나타난다(삼하 6:22, 니팔형). 이 개념은 강의형 어간들을 예외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또한 느헤미야(느 13:25)는 저주의 말을 발설하고 공적으로 그들에게 모욕을 줌으로써 그 저주가 그 대상들(이방 여인들을 취한 자들)에게 임하게 하였다. 시편 기자(시 109:28)는 자기에 대한 대적들의 저주를 하나님의 축복과 대조시키면서 그들이 자기를 향해 갈망하는 그 운명이 오히려 그들에게 임하게 즉 그들이 수치를 당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참조: 시 62:4, H5). 이교도들은 인간이 신들(하나님)을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골리앗이 다윗을 저주했으며(삼상 17:43)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초빙 받았다(민 22:6). 그러나 근거 없는 저주는 아무런 효과도 가져오지 못한다(잠 26:2). 오직 하나님의 저주의 말만이 유효하다(시 37:22).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다. "너를 저주하는(칼랄) 자"(저주의 말을 발설하다)를 "내가 그를 저주하리라"(그를 그 상태에 놓을 것이다). 하나님의 선지자를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을 공격하는 행위이며 이로써 자기 머리에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한다. 예컨대 엘리사를 모욕하고 그로부터 저주를 받은(칼랄) 소년들의 경우가 그러하다(왕하 2:24). 느 13:1-3도 보면 모압과 암몬의 자손이 예배에서 제외된다고 하였다(일종의 영적 죽음). 근거 없는 저주의 말을 발하는 것은 피조물의 구조를 어지럽히고자 하는(또는 전도 시키고자 하는) 의도 내지는 그와 같은 행위이며 실질적 가해를 기도하는 것으로서 심령 감응 마술에 의한 행위와 같은 것이다. 이런 행위를 자녀들(또는 종들)이 부모들(또는 주인들, 삶의 부여자들, 출 21:17이하)을 상대로 하지 못하도록 금하고 있다. 그러한 행위는 하나님 그 자체에 대한 공격이며 사망의 형벌을 받게 되어 있다(레 20:9). 부모를 저주하고서도 자신의 윤리적 순결을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극심한 반역이다(잠 30:11, 참조: 겔 22:7). 분노나 좌절감을 표현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함으로 그로부터 영광을 빼앗는 일은 최대의 범죄이다(레 24:11-23).(참조: L. J. COPPES;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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