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100== 1.온 땅이여 여호와(야웨.YHWH)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루아) 2.기쁨으로(쉬므하..샤마흐) 여호와를 섬기며(아바드) 노래하면서(레나나)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보) 3.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엘로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야다*1) 그는 우리를 지으신(아사)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암)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4.감사함(토다)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보) 찬송함으로(테힐라)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야다*2)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바라크) 5.여호와는 선하시니(토브) 그의 인자하심(헤세드)이 영원하고(올람) 그의 성실하심(에무나)이 대대에 이르리로다(아드) Shout joyfully to the LORD, all the earth. Serve the LORD with gladness; Come before Him with joyful singing. Know that the LORD Himself is God; It is He who has made us, and not we ourselves; We are His people and the sheep of His pasture. Enter His gates with thanksgiving And His courts with praise Give thanks to Him, bless His name. For the LORD is good; His lovingkindness is everlasting And His faithfulness to all generations. ----------------------------- hwhy(3068, 예호와) 여호와, 야웨 예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나타내는 고유명사이며, '여호와, 야훼'로 음역한다. 우리가 "여호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명칭은 본래 히브리어 4자음 문자 '요드, 헤, 와우, 헤(YHWH)로 구성되어 있다. 이 신성 4문자(Tetragammaton)는 하나님의 인격적 이름으로 성경에서 창 2:4에 처음으로 나타나며, 구약성경을 일관해서 총 6,000여회(cf. BDB) 나타난다. 이 하나님의 이름은 한글 번역본의 개역에서 "여호와", 공동번역에서 "야훼", 영역본에 Jehovah 라고 음역하고 있지만 그 정확한 발음을 알 수가 없다. 중세 어느 때에 그 정확한 발음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신성 4문자에 대한 정확한 발음과 기원 및 의미는 상당한 논의의 주제가 되어왔다(Freedman. TDNT). 1. YHWH의 발음과 금기 (1) 마소라 본문에서 YHWH는 영속적 케레(qere perpetuum)의 명칭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구성하는 이 신성 4문자는 너무 거룩하므로, 유대인들은 관습적으로 그 이름을 발음하지 않았다. 사본 필사자들이 신성 4문자를 기록할 때는 매번 완전히 목욕을 하고 완전히 옷을 갈아 입었으며, 그 문자들을 기록하는데 사용한 붓을 부러뜨렸다. 감히 입으로 말하기가 황송한 그 이름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구약성경 시대 이후(B.C. 3세기 경부터), 회당에서 성경을 낭독할 때, 또는 읽는 자들이 성경에서 그 이름을 볼 때마다 명사 아도나이(adonay, 나의 주님)로 발음했다. 이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문자적으로, 헛되이, 경솔히) 일컫지 말라”는 계명과 관련된 것이다. 그 후에 마소라 학자들이 자음으로만 기록되어 있는 구약 본문에 모음을 삽입할 때 아도나이(adonay)를 나타내는 마소라 모음을 신성 4문자 YHWH의 모음으로 첨가했다(C. Brown, TDNT). 그렇다면 야호와(yahowah)로 발음 표기되어야 하는데 예호와(yehowah)로 발음 표기되어 있다. 이것은 첫 음절에 a 모음을 가지면 그들이 피해야 하는 바로 그 금기를 위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언어 구조상 가장 특색이 없는 e를 선택하여 예호와(yehowah)로 표기한 것이다. 이러한 기록은 신성 4문자의 첫 음절이 e 혹은 이와 유사한 모음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직접적 증거가 된다(C. H. Gordon, Vgaritic TextBook, Anor, 38, 1965; R. Kittel, "Yahweh", Schaff-Herzog). (2)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 예호와(yehowah)와 합성된 인명(人名)을 살펴보면 두 가지 어형을 가지고 있는데 요(yo-)와 예호(yeho-)이다. 예를 들면 '여호와께서 주신다'를 의미하는 yonatan(요나탄, 삼상13:3)과 yehonatan(예호나탄, 삼상18:1)입니다. 그리고 yehosua(예호수아: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칭호는 하나님의 이름을 포함하고 있는 아주 오래된 이름이다. 세칼(M. H. Segal)은 이 호칭이 일찍부터 존재했다는 것은 YHWH라는 명칭이 모세에게 계시되기 전에 이미 알려졌음을 나타내 주는 증거로 보았다. 보다 긴 어형이 보다 짧은 어형보다 더 이른 시대에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보다 긴 어형이 분명히 본래의 어형이다(G.J. Botterweck의TDOT). 그리고 야-(ya-)나 야호-(yaho-)로 부르지 않고 요-(yo-)나 예호(yeho-)라고 부른 것은 야-(ya-)나 야호-(yaho-)가 금기가 되기 때문에 피한 것이다. 어떤 인명의 끝 부분에서 신성 4문자는 역시 두 가지 어형 형태를 가지는데 '-yahu(-야후)와 -yah(야)'이다. 예를 들면‘나의 왕은 여호와이시다’를 의미하는 malkiyyahu(말키야후)와 malkiyyah/ya(말키야)이며, 여기서도 보다 긴 어형 야후가 우선이다. 야후나 야는 첫음절 이외에는 금기가 되지 않으므로 본래의 발음대로 표기한 것이다. 구약시대 말기(주전 5세기)의 엘레판틴 파피루스(Elephantine papri)의 더 짧은 이름 YHW는 -야후(shemayahu=셰마야후같은 이름에서 처럼)나 야호-(Jehozadek=예호체닥 같은 이름에서 처럼)로 읽어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야호(yho)라는 발음은 B. C. 1, 2세기 쿰란의 헬라어 단편들과 1세기의 영지주의 문서에서 발견된 헬라어형 iao(야오)에 의해 확증된다. 2. YHWH의 어원 및 의미와 보다 정확한 발음 (1) 어떤 학자들은 이 이름을 달에 대한 숭배와 관련된 감탄의 소리로 간주되고 있는 원시적인 어형 야(Yah)로부터 유래되었다고 본다(참조, G. R. Driver, ZAW, 46, 1928). 그래서 그 이름이‘오 그 분’을 의미하는 야후와(Ya -huwa)에서 유래되었다고 암시하는 학자들도 있다(참조, M. Buder, Moses, 「1946」1958. 49f,: S. Mowinckel, "The Name of the God of Moses"). 그러나 이러한 이론은 거부되었다. 그 이유는 그 이름을 감탄사의 소리로 간주하게 되면 신앙이 언제나 그 이름에 기초를 두어 왔다는 종교적 내용과 그 이름에 부수되는 계시적 가치를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참조, E. Jacob, Theology of Old Testament). (2) 보다 적절한 해석은“있다, 존재하다”를 의미하는 동사 haya(하야)와, 그리고 그 동의어 hawa(하와)와 관계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출애굽기 3:14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ehyeh aser ehyeh) 스스로 있는 자(ehyeh)가 나를 보내셨다 하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하나님 여호와( YHWH)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효니라”고 말씀하셨다. R. de Vaux는 에흐혜 아셰르 에흐혜라는 문구의 번역과 의미에 대해서 가장 좋은 번역문은 "I am He who Exists"(나는 존재하는 자[그]이다)라고 주장한다. NASB, NRSV는 "I AM WHO I AM"으로 번역했다. 이 문구는 그 의미에 있어서 초시간적(omnitemporal)이다. '나는 이미 존재하였고, 이제도 존재하고, 앞으로도 존재할 자, 곧 영원히 존재하는 자이다' 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 이름 에흐예(ehyeh)는 칼 미완료 1인칭 단수로“나는 있다”이다. 그러나 사람은 이 이름으로 하나님을 부르지 않는다. 야훼/여호와라는 이름은 사람이 그를 3인칭으로 말할 때 생긴다. 따라서 하야(haya)의 미완료 3인칭(히필형)은 야흐예 또는 야혜(yahyeh)이며, 그 동의어 하와(hawa)의 미완료 3인칭(히필형)은 야흐웨 또는 야훼(yahweh)이다. 여기서 발음상 두 경우에 유사하지만 야훼가 신성 4문자 와 더 근사하다. 혹자는 YHWH가 동사 하와(hawa)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모세 시대에 하와(hawa)가 발음되었던 소리와 비슷한 소리를 내는 어떤 기원이 불분명한 고대의 단어라고 제시하지만 우리는 출애굽기 3장 내용과 YHWH 를 연관시켜 연구해 본 바 hawa(하와)와 YHWH가 서로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N. Walker 등은‘있지도 않은 히필형(사역형)을 만들어 낸다고 비난하지만 W. F. Albright, D. N. Frcedman 등 여러 학자들은 히필형이 남서 셈어에서 알려 지지 않았다고 해도 그것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이었으리라고 시사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인 신성 4문자 YHWH는 하와(hawa)의 미완료 야흐웨(yahweh, 보통 야훼로 발음함)와 YHWH의 후기 표기인 헬라어 야웨(iaoue)나 야베(iabe)에서 볼 때, 원래의 발음이 YaHWeH였으리라고 생각된다. 데오도레토스(4세기)는 사마리아인들이 신성 4문자를 iabe(야베)로 발음했다고 말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3세기 초)는 iaoue(야웨)로 발음했다. YHWH의 셋째 문자인 와우(w)를 사마리아인들은 b(ㅂ)로 발음하고 클레멘트는 ou(우)로 발음한 것이다. (3) 남부 가나안 언어들(히브리어, 모압어)이 y는 i, w는 u, h는 e, a로 발음되었다고 본다면 YHWH는 iaue(야웨)로 발음될 수 있다(여러 가지 발음이 제시되고 있을지라도). 이 음역은 앞에서 살펴본 바, 후기 헬라어 표기인 iaoue(야웨), iabe(야베, b를 u로 발음할 때 iaue[야웨〕가 된다)와 일치하며, hawa(하와)의 미완료 3인칭 히필형 yahweh(야흐웨, 야훼)와도 일치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름YHWH의 발음은 야웨(yahweh)이라고 거의 확신할 수 있다. 3. YHWH의 번역들 (1)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하나님의 이름 YHWH는 마소라 본문에서 금기 때문에 예호와(yehowah)로 나타난다. 우리가 지금 일반적으로 공인하고 있는 70인역본도 이 이름을 유대인들의 읽기(케팁→케레)를 따라 '퀴리오스'로 번역했다. RSV와 다른 역본들도 이 이름이 본문에 나올 때는 언제나 주(LORD)라는 단어를 대문자로 기록함으로서 이 관계를 따르고 있다. 마찬가지로 라틴어 성경도 도미누스(Dominus:주 Lord)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현재 세계의 거의 모든 성경 번역본들(극소수를 제외하고)은 '주' 라는 말을 사용하며, 새번역 표준판도 '주' 라고 번역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야훼란 이름을 세계의 모든 성경에서 제외시키는 무서운 음모라고 할 수 있다. 70인역본에 대해 한마디 하고자 한다. 지금 보유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70인역본의 한 사본 단편들에는 헬라어 본문에 히브리어 문자로 쓰여진 신성 4문자 YHWH가 등장한다. 이 관습은 주후 1세기의 후기 유대인 구약성경 역자들에 의하여 실행되었다. 쿰란에서 발견된 70인역본의 한 사본에는 심지어 신성 4문자가 IAW로 번역되어 있다. 이러한 발견들은 70인역본의 번역자들이 신성 4문자(YHWH)를 '퀴리오스'로 번역했다고 하는 생각에 대해 의심을 갖게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70인역본의 본문에 있는 신성 4문자를 철저하게 퀴리오스로 대치시킨 것이 주로 기독교인 서기관들의 짓이라는 이론을 뒷받침해 준다(P. E. Kahle, H. Bietenhard).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70인역본으로 공인하고 있는 70인역본은 본래의 70인역본 을 변개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렇다면 이 70인역본을 따르는 것은 진정한 70인역본과 다른 길로 행하는 것이 된다. (2) 그리고 예호바(Jehovah)라는 어형은 마소라 본문의 표기에 근거하여 16세기에 통용되었으며, 갈라티누스(P. Galatinus)의 라틴어 역본에서는 iehoua(예호와)라는 어형으로 나온다(De Arcanis Cath, Veritatis, 1516, 11). 1530년에 틴데일(Tyndale)은 출애굽기 6:3을 번역할 때 Jehouah(예호와)를 사용했다. 그 후 Jehovah는 표준 철자가 되었다(C.Broun:DNTT). 따라서 미국표준역성경(ASV)과 신세계번역본(NWT)는 Jehovah, 한글 개역은“여호와”로 번역했으며, KJV는 일곱개의 구절, 즉 그 이름이 특별히 강조되거나(출 6:3; 시 83:18; 사 12:2; 26:4), 다른 요소와 결합된 구절(창 22:14; 출 17:15; 삿 6:24)에서 Jehovah로 번역했다. 그러나 "Jehovah"나 "여호와" 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YHWH라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바른 음역이라고 할 수 없으며, yahweh가 더 바른 음역이다. 예루살렘성경과 공동번역은 야훼로 번역했다. 4. YHWH의 이름의 중요성 이름은 신이든 사람이든 그 인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존재의 이름을 아는 자는 누구든지 그 이름에 관한 힘을 행사할 수 있다. 이름은 그 이름을 가진 자와 매우 밀접히 결합되어 그의 본성을 나타내는 하나의 능력이다. 이스라엘에 있어서는 다만 표상 명칭이나 특정인의 인격과 다른 사람의 인격과를 구분짓는 이상으로 그 인격의 전존재성과 본질성 그 자체와 동일시 하고자 했다. (1) 구약 종교에 있어서 신의 이름을 아는 것은 그와의 교제(혹은 상대)를 위해 특별히 중요한 것이다. 신을 영화롭게 하고 신의 도움을 확보하기 위해 사람은 신의 이름을 알아야 한다. 야곱은 그와 씨름한 강력한 존재에게(창 32:30), 또한 마노아는 신비한 신적 사자에게(삿 13:17이하), 그들의 이름을 알기 위해 물었다. 그러나 구약의 다른 곳에서 하나님은 친히 그 이름을 계시로 알리셨다(창 17:1; 출 3:14; 6:2). 하나님은 모세에게“나는 여호와(YHWH, 야훼)로다”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이름 중에 여호와의 이름이 가장 의의가 깊고 중요하다. 성경 계시의 가장 기본적이며 본질적인 특징 중의 하나는 하나님께도 이름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인격적인 이름을 가지셨고 그 이름에 의하여 그를 부를 수 있으며 또 불러야 한다. 지정된 전에서 여호와께 호소할 때 그는 가까이 오셔서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으며 그 약속을 지키신다.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출 20:24).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과 심지어 왕까지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한다(민 6:2427; 신 10:8; 삼하 6:18). (2) 신명기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여호와를 상대하며 그의 임재를 확보할 수 있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답을 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하늘에 거하시지만 그러나 그는 땅에 그의“이름”이 거할 장소를 선택하셨다(신 12:11; 14:23; 참조:삼하 7:13; 왕상 3:2; 5:17). 그의 이름이 성전에 거한다는 점에서 여호와의 임재, 그 자체가 보증된다(왕상 8:13이하). 여호와의 이름은 그 자신과 마찬가지로 주권성을 가진다. 그래서 시편 기자들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들이 그 이름으로 기쁨을 누리리라'(시5:11; 7:17; 9:2, 10; 18:49 등등)라고 찬양하고 있다. 이스라엘에 있어 하나님 예배는 바로 그대로 그 성호를 앙청하고 응답하는 행위로써 그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 앞에 그 이름의 실체이신 주권 앞에 완전한 헌신을 뜻하는 것이었다. 여호와의 이름은 그 자체의 능력있고 독립된 존재로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그의 이름이 여호와 그 자신과 여전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 이름 자체의 능력있는 힘을 통하여 경건한 자들은 여호와의 보호와 도움을 경험한다.(참조:잠 18:10; 말 1 :11; 시 54:6). (3) 여호와의 이름은 때때로 여호와에 대한“찬양”, 여호와의“영광”이란 의미로 사용된다(사 26:8; 55:13; 시 41:10)."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혹은“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출 15:3; 사 51:15; 렘 10:16; 암 4:13; 시 23:3)와 같은 표현상의 변화가 있어도 같은 방향을 가르치며, 세상에서, 그리고 이스라엘이 그 의미를 알리는 모든 국가 중에서의 여호와의 주권과 영광에 대한 그의 주장을 지적해 준다(사 12:4; 시 105:13). 진실로 종말에 여호와께서 세상에 계시됨으로서 온갖 우상 숭배가 사라지고 모든 무릎이 홀로 하나이신 그의 이름 앞에 꿇을 것이다'(슥 14:9; 사 45:23, G. Von Rad). (4) 여호와의 이름과 관련하여, 그의 이름으로 여호와께 요구하고 기원한다는 종교 의식을 통해 그에게 예배드린다는 것이다(참조:창 4:26; 12:8).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여호와의 권능이 관여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제사장이 백성을 축복할 때 복을 수여하는 것은 그것과 제사장의 축복 행위와 자유로이 연결시킨 하나님의 처분에 있는 것이다(민 6: 2426, 27; 참조:신 10:8; 삼하 6:18; 왕하 2:24).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은 마술의 수단이나 방편이 아니라 계시의 선물이다(Bietenhard). 이것은 야웨의 이름을 언급하거나 부르는 것에 야웨의 능력을 믿는 신앙을 함축한다는 사실을 인정치 않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베솀 야웨'즉 야웨의 이름을 언급함으로 맹세(삼상 20:42; 레 19:12), 저주(왕하 2:24), 혹은 축복할 때(삼하 6:18) 이렇게 발언한 그 이름은 야웨의 임재, 배려(attention)와 실제적 간섭(개입)을 보증한다. (5) 진실로 여호와의 이름은 그의 인격적 통치와 활동의 강력한 표현이기 때문에 여호와 자신을 말함에 있어서 그 이름이 대용될 수 있다(레 18:21; 시 7:17; 미 5:45). 여호와께서 인간과 접하시는 면이 바로 그의 이름이며, 이 이름으로 여호와께서는 자신을 계시하신다. 과거(출 3:6, 13, 15)와 현재(출 20:7)와 미래(겔 25:17; 34:50)를 통한 인간에 대한 그의 역사적 다루심은 그의 이름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10계명은 분명히 마술이나 주문 혹은 거짓 맹세에서 이 하나님의 이름을 오용하는 것을(맹세가 여호와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금하였다.(출 20:7). 왜냐하면 이미 언급한 바 여호와의 이름은 계시의 선물이며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창 17:1; 출 3:14; 6:2). 거짓 선지자들의 여호와께 대한 호소는 불법이다. 이는 그들이 여호와로부터 고하라는 임무나 말씀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신 18:20; 렘 14:14이하; 23:25; 29:9). 여호와의 이름은 이스라엘을 신용하여 그들에게 맡긴 것이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그 이름을 모른다(시 79:6). 이스라엘은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것은 예배의식, 희생제사, 기도, 축복과 저주 또한 거룩한 전쟁(Holy war, 시 29:8)에서 일어난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를 섬기되, 그 만을 섬기며 그의 계명에 복종함으로써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다. 따라서 다른 신의 예배 의식에 참예하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더럽힙을 뜻한다(레 19:21).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루살렘(렘 25:29), 성전(렘 7:10), 언약궤(삼하 6:2)를 일컬어 이것들을 성별, 여호와와 관련시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신성화의 유일한 기초이다(참조:F.F. Brace, DNTT; Bietenhard, TDNT). (6) 모세는 하나님께 백성들이 자기를 보낸 자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내가 무엇이라고 말하리까? 라고 물었다. 하나님은“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너희에게 보낸 이는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념할 나의 표호니라”고 대답하셨다(출 3 :13-15).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세겜에 모아 놓고 "이제 너희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여호와만 섬기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4-15). 신자에 있어서 여호와는 대대로 기억해야 할 소중하고도 큰 영원한 이름이다. 이 이름을 잊어버리다니 언어도단이다. 어떤 고대 역사에 의하면 의인 시몬(Simon)이 죽은 후에(B.C. 200년경) 제사장들은 축복 행위에서 여호와 이름을 언급하는 것을 중지했다고 한다(T. Sot 138). 성전 예배 의식에서 여호와의 이름은 여전히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축복할 때 사용되었다. 그러나 교육 행위에서 성경 인용시 여호와라는 단어가 '이름'이라는 '셈'으로 대치되었다. 그래서 신성 4문자 YHWH를 사용하기를 중단했으며, 따라서 그 발음마저 잊어버렸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세계의 거의 모든 성경 번역자들은 성경에서 여호와/야웨라는 이름을 없애버린 것이다. 대한성서공회서 번역한 표준 새번역도,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여호와란 이름을 모두 없앤 것이다. 역사의 하나님 여호와를 최고의 역사 기록에서 삭제해 버리는 이 무리들은 회개해야 할 것이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그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호와, 혹은 야웨라는 이름이 소중한 큰 이름임을 명심해야 한다."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 아멘 -.(참조: J. B. PAYNE; FREEDMAN; O'CONNOR; RINGGREN) ---------------- hj;m]ci(8057, 쉬므하) 기쁨, 즐거움, 유쾌함 쉬므하(명여)는 사마흐(jm'v; , 8055)에서 유래했으며, '기쁨, 즐거움, 유쾌함'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94회 나온다(창 31:27, 민 10:10, 삿 16:23, 삼상 18:6, 대하 20:27, 욥 20:5, 시 4:8, 시 100:2, 잠 10:28, 아 3:11, 사 9:2, 렘 15:16, 겔 35:15, 욜 1:16, 욘 4:6, 습 3:17, 슥 8:19 등). ---------------- jm'v;(8055, 사마흐) 기뻐하다, 즐거워하다 사마흐(동사)는 기본어근이며, '기뻐하다, 즐거워하다 rejoice, glad'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50회 이상 나오며, 칼, 피엘, 히필형으로 사용되었다. 사마흐는 마음(참조: 출 4:14, 시 19:8, 시 104:15, 시 105:3), 영혼(시 86:4)과의 관련성이 지적해 주듯 성질 전체로 기뻐하거나 즐거워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눈의 밝은 것(잠 15:30)이 마음을 기쁘게 하기도 한다. 사마흐는 여러 이유와 대상들이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을 묘사한다. 포도주(시 104:15, 삿 9:13, 전 10:19), 기름과 향(잠 27:9), 지혜로운 아들(잠 15:20, 잠 10:1, 잠 27:11), 친절한 말(잠 12:25), 사랑하는 자를 만남(출 4:14), 하나님의 율법(출 19:8), 의인의 증가(잠 29:2), 하나님의 절기(느 12:43). 그러나 기쁨의 이유로서 가장 빈도높게 열거되는 것은 여호와와 그의 구원이다(대하 20:27, 시 5:11, 시 9:2, 시 16:9, 시 32:11, 시 40:16, 시 63:11, 시 64:10, 시 86:4, 시 90:15, 시 92:4). 참으로 여호와께 대한 기쁨은 인간의 힘이다(느 8:10). 나아가서 이러한 구절들의 다수가 이 기쁨에 동참하도록 인간을 부르고 있다. 예컨대 이스라엘은 절기 때에 그리고 중앙의 성소에서 기뻐하라는 부탁을 받는다(신 12:7, 신 14:26, 신 16:11, 신 26:11, 신 27:7). 이스라엘의 기쁨은 그들의 회복과 함께 완성될 것이다(시 14:7, 시 126:2, 사 9:2, 사 25:9, 사 35:10, 사 51:3, 사 51:11, 사 65:14-19, 슥 2:10). 한편 때로는 악인이 의인의 고통을 보고 못된 마음으로 즐거워한다(시 35:15). 마지막으로 여러 주체들이 즐거워한다. 여호와(시 104:31), 시온(시 97:8), 겸손한 자(시 34:2), 왕(시 21:1), 하늘들(대상 16:31), 향나무(사 14:8), 애굽(시 105:38). 그러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적들에게 기뻐하지 말라고 말한다(호 9:1, 옵 1:12). 기뻐하는 경우들도 다양하다. 하나님을 대적할 때, 하나님을 떠났을 때,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이교들들이 이스라엘을 이길 때 기뻐한다(삿 16:23). 미련한 자는 자기의 어리석음 속에서 기쁨을 얻는다(잠 15:21). 그러나 그러한 기쁨은 결국 끝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의인들이 영원한 즐거움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사 51:11). 결혼식(렘 25:10)과 송별 잔치에는 즐거움이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창 31:27). 그러나 성일이나(민 10:10) 여러 종류의 거룩한 축일에(참조: 삼하 6:12, 스 3:12) 여호와 안에서 가지는 기쁨의 뜻으로 이 단어가 사용된 예가 가장 많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의 거룩한 공동체이므로 비종교적 축하 행사와 거룩한 축제를 엄밀하게 구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컨대 백성이 솔로몬의 대관식 날에 즐거워하며(왕상 1:40) 이스라엘이 승리한 것에 대해 기뻐한다(대하 20:27).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하면 그것이 심판을 초래할 것이다(신 28:47). 그리고 다윗은 레위인을 임명하여 성전에서 기쁨으로 노래하게 했다(대상 15:16). 하나님을 떠난 즐거움은 슬픔에 이르게 되며(잠 14:13) 만족을 주지 못한다(전 2:1 이하).(B. K. Waltke)(참조: BDB; TWOT). ---------------- hd;/T(8426, 토다) 감사, 감사 찬송, 감사제 토다(명여)는 야다(hd:y: , 3034)에서 유래했으며, '감사, 감사 찬송, 감사제, 고백'을 의미한다.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32회 나온다. 야다에서 파생된 이 동족 명사는 기본적으로 죄나 하나님의 특성 및 사역에 대한 '고백'이란 의미를 지닌다. 이 단어는 한결같이 이스라엘의 희생제사 제도에 대해 사용되었다. 사람들은 "감사제물"(혹은 찬양제물)을 가져올 수 있었다. 여기에서 그들은 희생제물을 드리면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혹은 찬양을 드리거나)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였다. 수반하는 고백이 죄에 관한 것이었을 때, 이 제물을 "화목제물"로 분류되었으며,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열납될 수 있도록 그렇게 드려졌다(참조: 레 7:12-15, 레 22:29). 이런 제물과 고백은 그의 의를 인간의 죄와 대조시키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으며(시 50:23), 인간이 그의 길을 올바르게 정립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희생 제사가 하나님에 대한 찬양(고백)을 수반할 때, 이 때는 특히 기쁨의 때였다(시 95:2, 렘 17:26, 렘 33:11). 하나님은 이런 찬양으로 찬미 받았다(시 69:30). 시 100편은 그 내용뿐만 아니라 표제에 시사되어 있듯이, 이런 유형의 경우에 사용된 전형적인 찬양 시편이다. 노래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위대성을 고백하기 위한 일반적인 방법이었던 것 같다(시 147:4). 또한 특정한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현재 상태에서 그들을 구원해주실 때, 그들이 성막(혹은 성전)에 와서 찬양과 고백의 희생 제물을 드리겠다고 서원했던 것 같다(시 56:12, 시 116:17, 참조: 욘 2:10의 요나와 대하 33:16의 므낫세). 희생 제사 없이 고백이 행해진 예들이 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망명자들은 찬양했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했다(느 12:31-40). 아간은 여호수아 앞에서 여호와께 자기 죄를 고백했다(수 7:19-21).(참조: R. H. Austel) ------------------ ['Wr(7321, 루아) 외치다, 소리지르다, 큰 소리로 부르다, 소리를 높이다 루아(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외치다, 소리지르다, 큰 소리로 부르다, 소리를 높이다'를 의미한다.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45회 나온다. 루아의 본래 의미는 외치거나 악기, 특히 뿔(민 10:7)이나 전통적인 수양의 뿔, "쇼파르(shofar)"(수 6:5 "양각 나팔")를 사용하여 '소리를 높이다' to raise a noise이다. 이 단어는 이스라엘의 성막 의식에서(삼상 4:5) 언약궤가 진영으로 들어올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외친 환호를 묘사하는 데에 사용된다. 나중에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즉 최초의 왕국에서 이 어근은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올 때 백성들이 외친 환호를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시편(시 45:7)에서 이 어근의 시적인 묘사와 후대에 왕의 즉위식 때 환호로 왕에게 영광을 돌린 것(삼상 10:24)은 몇몇 학자들에 의해 현대 사회에 있는 즉위식과 유사한 즉위식의 증거로 채택된다. 그러나 어근 루아를 이런식으로 해석하는 것을 지지해주는 증거는 없다. 사실상 온 땅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고무하는 구절들에서 이 단어의 용법(사 44:23)과 적에 대한 승리의 외침을 권하는 구절에서 사용된 이 어근의 용법(렘 50:15, 습 3:14)은 보다 밀접하게 관련된다. 욥 38:7에 나오는 찬양의 시가는 언약을 충실하게 따르는 자들을 가리키는 논의의 여지가 있는 표현인 "하나님의 아들들"이 발하는 기쁨의 외침을 묘사하는 데 이 어근을 사용한다. 어근 루아는 또한 불평과 고통의 외침에 대해서도 사용된다(사 15:4). 그러나 이 어근의 가장 흔한 용례는 전쟁 신호(민 10:7)와 전쟁의 외침(수 10:6)에 대해 사용된 경우이다. 이 마지막 용법의 확장으로 이 어근은 또한 경보의 외침(삼상 17:20)과 시 95편과 시 98편에서처럼 격려의 외침에 대해 사용된다. 그런데 시 95편, 시 98편에서 이 어근은 각기 관련된 문맥에서 2회 나온다. 이 특이한 단어는 넓게 분산된 위치에서 3회 밖에 나오지 않는다(출 32:17, 욥 36:33, 미 4:9, "이제 네가 어찌하여 부르짖느냐")(W. White)(참조: BDB; Gesenius; W. White). ----------------- db'[;(5647, 아바드) 일하다, 섬기다 아바드(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일하다 work, 봉사하다, 섬기다, 시중들다 serve'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390회 나온다. 아바드의 어원은 몇몇 셈어 어근의 개념을 공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하다' to do나 '만들다' make를 의미하는 옛 아람어 어근과 (하나님을) '예배하다' to worship, (하나님께) '순종하다' obey를 뜻하는 아랍어 어근, 그리고 '노예로 삼다' to enslave, reduce to servitude를 의미하는 이 단어의 강조형 어근이 있다. 이러한 봉사는 사물, 사람, 혹은 하나님에게 향한 것일 수 있다. 이 단어가 사물에 관하여 사용될 때는 그 노동이 미치는 사물을 가리키는 대격을 수반한다. 예: 밭을 '경작하다' to till(창 2:5과 그 밖의 곳에서 종종) 포도원을 '정돈하다' to dress, 세마포를 만드는 자(사 19:9) 혹은 성읍에서 역사하는 자(겔 48:18). 때때로 이 단어는 신 15:19의 (땅을) '갈다' to till (한글개역, "부리지")에서처럼 대격 없이 사용된다. 두번째로 이 단어는 예를 들어 야곱이 라반을 섬기는 경우와 같이(창 29:15, 창 30:26, 창 30:29) 사람 대격을 수반한다. 사람 대격을 수반하는 경우에 이 단어는 사람과 함께 전치사 '베'를 수반한다. 즉 사람은 "타인에 의해 일한다" 혹은 타인을 노예로 사용한다(출 1:14, 렘 22:13, 혹은 푸알 어간이 포로들이라는 말과 함께 사용됨, 사 14:3). 노예상태라는 것은 왕이나 통치자에게 '신하로서 섬기는' 것도 역시 포함한다(삿 9:28, 삼상 11:1). 이 동사의 히필 어간은 '아무개를 (노예로 삼아) 강제로 일하게 하다'(출 1:13)를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길 때 그것은 속박이 아니라 오히려 즐겁고 자유케 하는 경험이다(출 3:12, 출 4:23, 출 7:16, 출 7:26, 출 10:26, 시 22:31, 욥 21:15, 렘 2:20, 말 3:14). 매우 자주 성경은 이러한 섬김이 전혀 신이 아닌 다른 신들에게 주어졌다고 기록한다(신 7:16, 왕하 10:18, 왕하 10:19, 왕하 10:21-23 등). 동일한 개념이 레위 자손이 여호와를 섬기는 것에 대해 사용된다(민 3:7-8, 민 4:23, 민 4:30, 민 4:47, 민 8:11, 민 8:19 이하, 등). 흥미롭게도 70인역본은 제사장들만의 공적인 직무를 가리키는데 헬라어 라트류오를 사용한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롬 15:16을 제외하고는 신약의 사역(ministry)이나 그 기능들을 가리키는데 라트류오 어군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롬 15:16에서 이 어군은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바울의 수고를 언급한다. 그러나 다른 종교적인 문맥, 특히 구약의 의식(ritual)과 관련된 문맥에서는 라트류오 어군이 사용되었다(히 9:21, 히 10:11, 눅 1:23).(참조: W. L. KAISER; BDB). ------------- [[롬15:14-21]] 그리스도예수의 일꾼 = 사역자 = 복음의 제사장 직분 *14.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15.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 *16.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레이투르고스))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NASB]롬 15:16 to be a minister of Christ Jesus to the Gentiles, ministering as a priest the gospel of God, so that my offering of the Gentiles may become acceptable, sanctified by the Holy Spirit. [NRSV]롬 15:16 to be a minister of Christ Jesus to the Gentiles in the priestly service of the gospel of God, so that the offering of the Gentiles may be acceptable, sanctified by the Holy Spirit. [NKJV]롬 15:16 that I might be a minister of Jesus Christ to the Gentiles, ministering the gospel of God, that the offering of the Gentiles might be acceptable, sanctified by the Holy Spirit. [NIV]롬 15:16 to be a minister of Christ Jesus to the Gentiles with the priestly duty of proclaiming the gospel of God, so that the Gentiles might become an offering acceptable to God, sanctified by the Holy Spirit. *17.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18.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19.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20.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21.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 leitourgov"(3011, 레이투르고스) 공적 일군, 사역자, 일군, 하인.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레이투르고스(Polyb. 이래)는 라오스(laov", 2992: 백성)와 에르곤(e[rgon, 2041: 일하다)에서 유래했으며, '파피루스'와 명문에서 '예배의 직무자, 사역하는 (자), 일군'이란 의미로 나타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레이투르고스는 70인역본에서 약 14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샤라트(섬기다, 봉사하다, 성직을 수행하다)의 피엘형을 번역한다. 레이투르고스는 사 61:6에서만 제의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 상관의 일군이나 종(노예가 아님)을 의미한다(수 1:1; 삼하 13:18; 왕상 10:5; 왕하 4:43; 집회서 10:2; 마카베오삼서 5:5 등).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레이투르고스는 신약성경에서 5회 나오며, 바울 서신에만 사용되었다. (a) 히 8:2에서 레이투르고스는 제의적/제사장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레이투르고스로서 하늘의 진정한 성소에서 대제사장의 직무를 행하신다. 롬 15:16에서 역시 제의적인 용법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자기가 이방인들에게 대하여 그리스도의 레이투르고스, 즉 제사장이 되었으며 그리고 "복음의 제사장 직무(히에루르군타)"라는 자기의 행위를 통하여 회심한 이방인들의 희생 제물로서 하나님께 드려진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자신이 편지 보낸 것을 정당시하고 있다. 이로써 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자기의 완전한 헌신과 의뢰를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복음의 관점에서 희생 제사와 제사장 직무의 성격, 그 직무와 열매를 재규정한다. (b) 나머지 구절들에서는 레이투르고스가 제의적 의미없이 사용되었다. ① 빌 2:25에서 레이투르고스는 '돕는 자나 돕는 사역자'를 나타낸다: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의 궁핍할 때 그를 도운 레이투르고스였다. 그리하여 교회는 형편 때문에 도움을 줄 수 없었으나 그가 바울에게 그러한 섬기는 도움(레이투르기아)을 제공했던 것이다. ② 히 1:7에서 천사가 (하나님에 의해 통제된 가운데 섬기는) 하나님의 사역자이다: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시 104:4을 인용하고 있는 후자의 구절에서 천사들을 단순히 사역자들이라고 부르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불변성과 대조를 이룬다(히 1:8 이하). 왜냐하면 그들의 형태와 기능이 하나님에 의해 통제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존재 의미는 그들의 '섬김'에 있다(히 1:14). ③ 롬 13:6에서 공의를 행한다는 점에서 관원들을 하나님의 종으로 묘사: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④ 히 1:7과 롬 13:6에서 종교적인 색체를 띄고 있다면 그것은 봉사가 (하나님 앞에서)하나님께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⑤ 클레멘트일서는 구약성경의 제사장들(41. 2), 선지자들(8, 1), 천사들(36, 3)에 대해 이 용어를 사용한다. (참조: H.Strathmann; K.Hess).
-------------- hn:n:r](7445, 레나나) 울리는 고함소리, 외침 레나나(명여)는 라난(@n"r: , 7442)에서 유래했으며, '울리는 고함소리 ringing cry, 외침 shout'(기쁨에 대하여)을 의미한다.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4회 나온다. 욥 3:7, "그 밤이 적막하였었더라면, 그 가운데서 즐거운 소리가 일어나지 말았었더라면". 욥 20:5, "악인의 이기는 자랑도 잠시요 사곡한 자의 즐거움도 잠간이니라". 시 63:5,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내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시 100:2,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찌어다".(참조: BDB; HELOT). ------------------ a/B(935, 보) 들어오(가)다, 가다, 오다 보(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들어오(가)다, 가다, 오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560회 나오며, 칼형, 히필형, 호팔형으로 사용되었다. 보(a/B , 935)는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공간상의 움직임을 나타낸다. '들어가다'라는 의미는 창 7:7에 나오는데, 여기에는 노아와 그의 가족이 방주로 "들어갔다"고 언급되어 있다. 이 동사의 사역형 어간은 '들어가게 하다', 혹은 '데리고 들어오다(창 6:19, 한글개역 - "이끌어 들여")', 혹은 '이끌어 오다, 가져오다'(창 2:19, 이 단어의 최초의 용례)를 의미한다. 이 동사는 창 10:19의 '네가 소돔까지 갈 때'(KJV; "소돔을 지나" - 한글개역) 어구에서 더욱 독립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 동사는 '오다'라는 의미와 '돌아오다'라는 의미 둘 다로 사용될 수 있다.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은 가나안 땅으로 "왔다"(한글개역 - 땅에 "들어 갔다", 창 12:5). 한편 신 28:6에는 하나님께서 (아침에 일하러) '나가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는' 경건한 자들을 축복하셨다고 언급되어 있다. 때때로 이 단어는 해가 '지는 것'을 나타낸다(창 15:13). 이 단어는 '조상에게 돌아간다'(창 15:15)는 의미에서 죽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른 특수한 용례는 '아내에게 들어가는 것' 혹은 '동거'(창 6:4)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또한 시간의 흐름에 대해 사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선지자들은 '다가오는' 심판의 날에 대해 말한다(삼상 2:31). 마지막으로 이 동사는 거짓 선지자가 그 말대로 이적과 같은 그런 사건을 '이루는' 것에 대해 사용되기도 하였다(신 13:2). 하나님이 '오신다'는 말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로, 하나님은 천사(삿 6:11)나 다른 육신을 입은 존재(참조, 창 18:14)를 통해 '오신다', 그는 꿈(창 20:3)이나 다른 실제적인 현현(출 20:20)을 통하여 인간에서 '나타나시어' 말씀하신다. 예를 들어 출애굽 동안에 하나님은 백성들 앞에 가는 구름과 불 속에서 '나타나셨다'(출 19:9).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자들이 그에게 합당하게 예배 드리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리고 언제든지 그들에게 '오신다'고 약속하신다(출 20:24). 블레셋인들은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에 들어왔을 때 하나님께서 그곳에 '오셨다'고 느꼈다(삼상 4:7). 공식적인 예배와 관련된 용법은 시 24:7에 나온다. 여기에는 영광의 왕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시온의 문이 열리리라고 언급되어 있다. 또한 여호와께서 겔 43:2에 묘사되어 있는 새 성전으로 '돌아 오실'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오심'에 대한 일단의 예언적 묘사가 있다. 이 주제는 하나님께서 전쟁에서 자기 백성들을 도우시려고 '오심'에 대한 찬송(참조, 신 33:2)에서 기원한 것 같다. 시편(예: 시 50:3)과 예언서(예: 사 30:27)에는 여호와께서 심판과 축복으로 '오신다'고 언급되어 있다 - 고대 근동 신화에서 차용한 시적인 어투이다(참조, 겔 1:4). 보(a/B , 935)는 또한 메시야의 '오심'을 언급하는데 사용된다. 슥 9:9에는 메시야 왕께서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고 묘사되어 있다. 어떤 구절은 특별히 어려운 문제를 제기하는데, 실로가 오시기까지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예언하는 창 49:10이 그러하다. 또 다른 난해한 구절은 겔 21:27이다: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르면 그에게 주리라". 동사 보를 사용한 매우 유명한 예언은 인자의 '도래'에 관한 것이다(단 7:13). 끝으로 마지막 날의 '도래'(암 8:2)와 여호와의 날의 '도래'(사 13:6)가 있다(넬슨의 구약해설). 보(a/B , 935)는 공동체와 함께 기도하고 희생제사를 드리려고 성소에 오는 사람에 대해 사용되었다(신 12:5, 신 31:11, 삼하 7:18, 사 30:29, 렘 7:2, 렘 7:10, 시 5:7, H8, 시 42:2, H3). 제사장들이 이 거룩한 영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특별한 규정을 이행해야 했는데 반해(출 28:29이하, 출 29:30 등), 그곳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은 의로운 행동을 나타내야 한다(시 15편, 시 24편). 이방인들도 기도하러 올 수 있었으나(왕상 8:41), 환관은 제의 공동체에서 제외되었다(신 23:1, H2). 백성들이 성소에 올 때, 그들은 제사장들에게도 갔다(신 17:9). 그들은 또한 여호와께 물으러 선지자에게 갔다(예: 왕상 14:3, 왕상 14:5, 왕하 4:42, 겔 14:4, 겔 14:7).(참조: E. A. Martens). --------------- !yhiOla>(430, 엘로힘) 하나님, 신들 엘로힘(명남)은 엘로아흐(H'/la> , 433: 하나님)의 복수형이며, '하나님, 신, 신들'을 의미한다. 엘로힘의 어원에 대해서 어떤 학자들은 엘(laE , 410: 하나님, 신. 강한 자)의 추정 어근인 어근 울(lWa: 강하다)에서 유래되었다고 하고, 다른 학자들은 엘로아흐(H'/la> , 433: 하나님, 신)의 추정 어근인 알라(hla: 두려워하다)에서, 또 다른 학자들은 엘과 엘로힘은 모두 엘로아흐에서 파생되었다고 주장한다. 보다 적절한 견해는 엘로힘이 엘로아흐(와 함께 알라)에서 유래하여 히브리 성경에서 독특하게 발전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600회 이상 나온다. 엘로힘은 복수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구약성경에서 복수의 의미로 사용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심지어 단일 이방신을 가리키는데도 복수형 엘로힘이 사용되었다(예: 삿 11:24; 왕상 11:5; 왕하 1:2). 일반적으로 엘로힘이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될 때 복수 어미는 일반적으로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것이며, 진정한 복수를 의도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명사 엘로힘이 항상 단수 동사, 그리고 단수 형용사나 대명사와 함께 사용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입증된다. 본 절에서 바라 역시 3인 단수 완료형이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이 복수형은 완전을 나타내는 형태로 이해했다. 즉 하나님은 실제로, 그리고 그 단어의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이시라고 이해한 것이다. 그리고 이 복수형이 사용된 이유의 또 하나는 성경 자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창 1장에서 한 분이신 하나님의 단일성을 나타내면서도 위격의 복수성(삼위일체)을 허용해 줄 수 있는 용어의 필요성을 찾아보게 된다(창1:2, 창 1:26). 엘로힘이란 어형이 히브리어에서만 나올 뿐, 다른 셈어에서는 나오지 않으며, 심지어 성경 아람어에서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엘로힘이 삼위일체되신 유일무이하신 하나님이심을 지칭하는 이스라엘의 독특한 신명임을 확증해 준다. 참 하나님으로서의 엘로힘은 인간에게 계시된 모든 신적 활동의 주체이자, 인간에게 받는 모든 참된 존경과 경외의 대상의 역할을 하신다. 이 한분의 신 외에는 어떤 신도 있을 수 없다(사 41:4; 사 42:8; 사 43:10 이하). 이방신은 신이 아니다(레 2:11). 그는 우주의 전능한 창조주(사 45:18), 우주를 지배하는 주권자(창 24:3, 창 24:9; 신 4:39; 신 10:17), 심판자 하나님(시50:6; 시 58:11; 시 75:7), 구원자 하나님(시 18:46; 신 8:15; 렘 20:24등), 위엄과 영광의 하나님(사 30:18; 사 65:16; 렘 10:10; 삼상 6:20)등으로 나타난다. 엘로힘은 또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출 3:6등)이 되시는 것처럼 또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친교를 나타내는 칭호도 발견하게 된다. 즉 "가까운데 하나님"(렘 23:23), "너희 의뢰하는 네 하나님"(왕하 19:10), "징계하시는 하나님"(신 8:5),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창 48:15), "내 의의 하나님"(시 4:1),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시 59:17 [H18]),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시 43:2) 그리고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시 116:5). 엘로힘이 나오는 3, 4개 구절이 문제가 된다. 시 8:5에서 엘로힘을 개역, 현대인, KJV는 "천사", NIV는 "하늘의 존재들(heavenly Beings), 공동(하느님), 표준새, NASB, RSV 등은 "하나님"으로 번역했다. 출 21:6에서 엘로힘을 개역, 현대인, KJV, NIV, LB는 "재판관들", GNB는 "예배 처소", 표준새, 공동,(N)RSV는 "하나님"으로 번역했다. 출 22:28에서도 RSV는 '하나님'으로, KJV는 '신들' 혹은 난외주로 '재판관들'로 번역했다. 이상 3개 구절에서 엘로힘은 그 문자적 의미대로 "하나님"으로 번역해야 한다. 끝으로 엘로힘은 신상(창 35:2; 출 20:23; 신 7:25), 신들(출 23:13; 출 23:24, 출 23:32, 출 23:33 등)에 대해 사용되었지만 이 경우 이스라엘의 엘로힘과는 다른 저속한 개념으로 사용되었다.(참조: J. B. Smick; BDB; TBC). --------------- [d'y:(3045, 야다*1) 알다, 이해하다 야다(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알다 know, 이해하다 understand'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944회 나오며, 모든 어간에서 사물이나 사람 또는 상황등을 감각 기관으로 얻은 약간씩 차이 나는 여러 가지 지식을 나타낸다. 이미 알려진 것은 감각으로 나타나야 하며 그 자체는 그렇게 알려지게 되어있다. 그래서 우리는 듣는 것(듣다)과 보는 것(보다)에 관한 동사가 아는 것에 관한 동사와 병행되어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예: 출 16:6 이하, 신 33:9, 삼상 14:38, 사 41:20). 야다는 인간(창 18:19, 신 34:10)과 그의 길(사 48:8, 시 1:6, 시 37:18)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에 사용되었으며, 여기에서 지식은 심지어 탄생 이전에 시작된다(렘 1:5). 하나님은 또한 들새도 아신다(시 50:11). 야다는 또한 인간의 지식과 짐승의 지식에도 사용되었다(시 1:3). 야다는 구약성경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야다는 '알아채다, 인지하다, 경험하다, 관찰하다'를 의미한다(예: 창 3:7, 창 41:31, 삿 16:20, 전 8:5, 사 47:8, 호 5:3). (b) 야다는 '구별하다' distinguish를 의미한다. '선악을 아는 것'(창 3:5, 창 3:22)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이다. 좋고 흉한 것을 구별하는 것은 필요하다(삼상 19:36). 어린 아이는 왼손과 오른손을 구별하지 못하며(욘 4:11) 또 선과 악도 구별하지 못한다(사 7:15). 후자의 구절의 문맥과 사 8:4에 나오는 이와 비슷한 언명은 이 언급이, 어린 아이는 유익한 것과 해로운 것을 구별할 줄 모른다는 것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시사해 주는 것 같다. 좋고 흉한 것, 좌우와 같은 것에 대해 관찰하는 것은 결국 그것들을 구별하는 것이 된다. (c) 야다는 '배워서 알다' know by learning라는 의미를 지닌다(잠 30:3). (d) 이 분사는 사냥(창 25:27), 학문(사 29:11-13), 애곡(암 5:16), 바다를 항해하는 일(대하 8:18),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는 일(삼상 16:16)에 능함을 묘사하는 어구에 나온다. (e) 야다는 어떤 사람을 '아는 것'을 표현한다. 어떤 사람을 아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창 29:5, 출 1:8, 삼하 3:25). 푸알 분사형은 '친척'(왕하 10:11 등)과 '아는 사람'(욥 19:14, 룻 2:1 등)을 지칭한다. (f) 야다는 '관계하다, 관심을 가지다'(시 1:6, 시 37:18, 시 119:79), '~와 관계를 맺고 싶다'(예: 신 33:9). 신학적인 문맥에서 자주 이 단어가 적절한 지식을 얻지 못해서 결국 관심의 결여를 초래하고 마는 것에 대한 문제로 나온다(예: 렘 8:7, 시 95:10). (g) 야다는 '성적 관계를 가지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를 알았다"고 하는 유명한 완곡 어법과 그 병행구들(창 4:1, 창 19:8, 민 31:17, 민 31:35, 삿 11:39, 삿 21:11, 왕상 1:4, 삼상 1:19)에서 남녀 쌍방의 성적인 관계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남색(창 19:5, 삿 19:22)이나 강간(삿 19:25)과 같은 성적 도착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h) 야다는 '다른 사람과 인격적이며 친숙한 관계를 맺다'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름으로, 대면하여 모세를 아신다(출 33:17, 신 34:10).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이나(렘 1:5) 어떤 민족을(암 3:2) 아실 때 하나님께서 그를 선정하시거나 선택하신다(참조: 민 16:5 70인역본). 선택으로 이해되는 이 지식은 은혜롭고 자애로운 것이지만 이것은 인격적인 응답을 요구한다. (i) 야다는 일반적인 문제에 대한 지식 외에도, 다른 신들을 아는 것이든(신 13:3, 신 13:7, 신 13:14) 여호와를 아는 것이든(삼상 2:12, 삼상 3:7) 간에,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렘 10:25) 선지자들에 의하면,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렘 4:22). 애굽의 재앙은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애굽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 보내졌다(출 10:2 등). 그는 그가 하나님이심을 이스라엘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사 60:16) 그들을 파멸시키시고(겔 6:7) 회복시키실 것이다. 특히 선지자 에스겔은 위협할 때,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는 어구를 사용한다(겔 6:7, 겔 6:10, 겔 6:13, 겔 6:14, 겔 7:4, 겔 7:9, 겔 7:27 등). (j) 요약하면 희랍인들이 초연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또한 사물의 형이상학적 본질에 사변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반해, 구약성경은 지식을 끊임없이 인격적인 만남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구약성경이 하나님과 창조에 관해서 언급한 것을 보고서, 우리가 이 언급들을 존재론적 추론으로 여겨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계시에 응답하는 믿음의 선포로 간주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역사적 과거와 약속된 미래 즉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존재하고 있는 이 지상의 영역 속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 속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를 찾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예배와 행동 가운데서 하나님의 목적과 요구를 식별할 수 있었던 것이다.(참조: E. D. Schmitz; Bultmann). ------------------ hd:y:(3034, 야다*2) 던지다, 쏘다, 감사하다, 찬양하다, 고백하다 야다(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던지다, 내던지다 throw, cast'를 의미한다. 좋은 것을 던져 줄 수도 있고, 나쁘거나 불필요한 것을 던져 버릴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44회 나오며, 칼형에서 '쏘다'(화살, 렘 50:14), 피엘형에서 '던지다'(애 3:53), 히필형에서 '감사하다, 찬양하다, 고백하다', 히트파엘형에서 '고백하다, 감사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야다의 기본적인 의미는 '죄, 하나님의 품성과 역사, 혹은 인간의 특성을 시인하다 혹은 고백하다'이다. 이 동사와 그 동의어 할랄의 기본적인 차이는 후자의 용어가 '갈채하다, 자랑하다', 혹은 어떤 대상을 '기뻐하다'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야다는 좋든 나쁘든 어떤 사실에 대한 '인정'과 '선언'을 강조한다. 70인역본은 일반적으로 야다를 엑소몰로게오로 번역한다. 동사는 세 가지의 기본적인 방법으로 사용된다. 첫째, 이 단어는 개인적으로든 국가적으로든 죄의 시인 혹은 고백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기본적인 개념은 시 32:5에 묘사되어 있는 다윗의 개인적인 고백에서 분명하게 관찰되었다. 여기에서 시적인 병행구는 고백이 죄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께 알리는 것이었음을 설명해 준다. 죄에 대한 고백이 하나님께 행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은 중요하다. 국가적인 고백의 개략은 속죄일 의식에서 발견된다. 이때 대제사장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죄를 고백하면서, 자기의 손을 염소의 머리 위에 두어 상징적으로 민족의 죄를 염소에게 전가 시켰다(레 16:21). 힛파엘형은 이 동사가 국가적인 죄의 고백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될 때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이 어간은 또한 이스라엘 죄의 대 고백이 다니엘(단 9:4, 단 9:20), 에스라(스 10:1), 느헤미야(느 1:6), 그리고 바벨론 포로기 동안과 그 이후의 이스라엘 백성(느 9:2-3)들에 의해 행해졌을 때에도 사용되었다. 국가적인 죄의 고백은 일반적으로 공적인 것이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 앞에서 우리의 죄를 시인하여(참조: 요일 1:9), 자기와의 본래의 관계를 유지하기를 매우 원하신다. 둘째, 야다는 하나님의 속성과 그의 일에 대한 인간의 공적인 선포나 선언(고백)을 나타내기 위해 주로 사용되었다. 이 개념은 찬양의 의미의 핵심에 있다. 찬양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그리고 그가 무엇을 행하는가에 대한 고백이거나 선언이다. 이 용어는 영역본들에서 가장 자주 '감사하다' thank로 번역되지만, 베스터만(Westermann)에 의하면, 이 번역이 실제적으로 적당한 번역은 아니라고 한다. 즉 구약성경에서 ...아직까지 '감사하다' thank만을 의미하는 동사는 없었다. 일반적으로 '감사하다' thank로 번역되는 호다는 구약성경에서 사람들 사이의 감사에 대한 표현을 뜻하는 말로는 단 한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처음부터 이 호다는 하나님과 인간에게 똑같이 사용될 수 있는 우리의 언어 '감사하다' thank와 일치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인간들 사이에 일어나는 어떤 것으로서의 우리의 '감사하다'가 가장 분명하게 발견되는 구약성경의 구절들에서 사용된 동사는 베레크이다. 이 동사는 '찬양하다' praise의 기본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축복하다' bless를 의미한다. 이런 사실에 비춰볼 때, 구약성경은 감사하는 것에 대한 독립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시는 찬양에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찬양의 한 방식이다(Westermann, Claus, The Praise of God in the Psalms, Richmond; John Knox Press, 1965, pp. 26-27). 이 용어의 가장 좋은 역어는 '고백' confession이다. 왜냐하면 시편(참조: 시 89:5, H6, 시 105장, 시 106장, 시 145장)과 그 외의 곳(참조: 대상 29:13)에서 충분히 볼 수 있듯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속성과 일을 고백하거나 선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야다는 '찬양하다' praise를 뜻하는 주요 단어들 중의 하나이다. 이 단어는 히브리인들의 시에서 언제나 할랄(찬양하다) ,자마르(악기로 찬양하다) 룸(높이다), 자카르(기억하다), 카밧(찬양하다), 그리고 나갓(선언하다)과 같은 찬양 용어들과 병행되어 나온다. 감사는 찬양 뒤에 온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의 속성과 일을 선언할 때, 이런 것들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찬양은 대개 감사로 이어진다. [베스터만은 한 주요 요지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렇지만 그의 말이 모든 세부적인 것들에 다 필요한지는 의심스러울 것이다. 만약 때로 감사가 찬양에 포함된다면, 특히 이 어근의 기본적인 의미가 BDB가 시사한 바처럼, '인정하다' acknowledge일 때, 어떤 행동이나 일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야다가 사용되는 실례들이 감사하다라는 우리의 개념과 동일시될 수 있을 것이다(R. L. H)]. 찬양은 일반적으로 여호와나 그의 이름을 그 대상으로 취한다(시 97:12, 시 99:3, 시 136:1-3, 시 136:26).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만이 하나님을 찬양하였다(사 38:18-19, 시 6:5, H6, 시 30:9, H10, 시 88:10, H11). 찬양의 수창자(首唱者)에는 의로운 개인들(시 140:13, H14), 이스라엘 백성(시 106:47), 열방들(시 45:17, H18), 지상의 모든 왕들(시 138:4), 하늘들(시 89:5, H6), 사람의 노(시 76:10, H 11)와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위대한 속성과 그의 기적적인 역사들을 고백했다. 여호와에 대한 찬양은 공적인 것으로, 열방들 사이에서(삼하 22:50),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 회합에서(시 35:18) 발견되었다. 개인이나 백성이 와서 여호와를 찬양할 때, 그들은 종종 악기를 수반하여(대하 5:13, 시 33:2, 시 43:4), 말이나 노래로써, 구두로 찬양하였다(시 109:30, 시 28:7). 이런 찬양은 일반적으로, 다윗이 엄격하게 여호와의 인격에 대한 찬양과 고백으로 경축하는 임무를 맡긴 그런 레위인들(대상 16:4)의 지시하에 성막(혹은 성전)에서 행해졌다(시 100:4, 시 122:4). 이것은 매일 아침과 저녁에 성막에서 수행되어야 했던 예배의 주요 측면이었다(대상 23:30). 이 찬양은 여호와의 옳은 길(여호와의 의)에 따라(시 7:17, H18)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시 119:7) 전심으로 행해져야 했다(시 86:12, 시 111:1). 이런 찬양은 계속적으로 - 영원히 - 행해져야 했다(시 30:12, H13). 셋째, 야다는 또한 어떤 사람에 관한 어떤 진실을 고백하는, 즉 사람에 대한 사람의 칭찬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되었다(시 49:18, H19). '찬양' praise을 의미하는 "유다"라는 이름은 이 어근에서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유다의 형제들이 그를 찬양(혹은 고백)하였기 때문이다(창 29:35).(참조: R. H. Alexander; BDB). ---------------- hc;[;(6213, 아사) 일하다, 행하다, 만들다, 형성하다, 이루다 아사(동사)는 기본 어근이며, '일하다, 행하다, 만들다, 형성하다, 이루다'를 뜻하며, 그 기본 의미는 '행하다, 만들다'이다. 이 단어는 많은 표현에서 항상 동일한 기본 개념을 지닌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630회 나오며, 칼형, 니팔형, 푸알형으로 사용되었다. (a) 아사는 창세기의 창조 기사에서 매우 자주 나타나며, 이는 중요하고도 매우 흥미롭다. 바라(ar:B: , 1254)는 칼형에서 (1) 관련된 대상의 개시, (2)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 (3) 창조된 대상의 완전한 새로움, (4) 무에서 창조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아사는 의미의 영역이 훨씬 넓으며, 어떤 특수한 어감을 거의 지니지 않은 채 대상의 형성을 주로 나타낸다. 아사는 자주 바라와 상호 교대로 사용되어 단순히 창조 과정에서 관련된 대상들을 조성하거나 만드는 행동을 나타내는 반면에 바라는 그 물체에 대한 창시를 강조한다(참조: 창 1:1). 창 1:7에서 하나님께서 '창공(궁창)이 있으라'고 명령하셨으면 창공은 만들어질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창공을 만드셨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것은 창공이 있으라는 명령이 창공이 실존하기에 불충분함으로 보충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진 이후 그것이 실현되기까지 하나님의 창조 능력이 계속적으로 발휘되었음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성령의 역사를 감지할 수 있다. 아사는 하나님께 사용되면 흔히 역사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활동을 강조한다. 이러한 문맥들은 구약성경 신학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 가운데 하나, 즉 하나님은 초월적이실 뿐만 아니라 역사 안에 내재하셔서 그의 주권적인 목적을 이루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모세는 애굽에서의 하나님의 크신 행사들을 회상하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을 백성들에게 상기시킬 수 있었다(신 29:1). 하나님께서 여러 민족들에게 행사신 일은 하나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심을 증거해 준다(수 23:3). 솔로몬은 봉헌 기도에서 하나님께서 "행동하실" 것을 간청한다(왕상 8:39). 아사는 종종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대해 사용되어(수 24:17, 시 98:1, 사 25:1) 구약성경이 하나님의 내재하심에 관하여 크게 강조함을 다시 증명한다. 아사는 구약성경의 그 밖의 곳에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여러 측면들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시 86:9, 시 95:5, 시 96:5). (b) 아사는 윤리적인 의무의 개념으로 종종 사용된다. 언약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행하라'는 명령을 자주 받는다(출 23:22, 레 19:37, 신 6:18, 등). 이 개념이 나타나는 무수한 문장은 하나님께 윤리적으로 응답하는 것의 중요성을 입증해 준다. 여기에서 응답은 단순한 정신적인 추상적 개념을 넘어선 것이며, 논증할 수 있는 행동에서 분명이 증거되는 순종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아사는 선악간에 행하는 것(창 3:14, 창 20:10, 왕하 12:3, 왕하 14:13, 왕하 8:18, 왕하 8:27, 신 16:12, 신 30:8, 민 15:39 등)에 대해 사용되었다. 아사는 죄, 잘못에 대해 사용될 때 '저지르다, 범하다'라는 의미를 지니며(호 6:9), '~에 대하여 행동하다'(슥 1:6), 그리고 충고를 따른다는 의미에서 '따르다'(삼하 17:23)를 뜻한다. (c) 아사는 어떤 것을 만들다(출 20:4, 신 9:12, 창 3:21), 전쟁하다(창 14:2, 수 11:8, 신 20:12, 신 20:20), 친절하게 대하다(삿 1:24), 신실함을 보여주다(창 32:10), 제물을 드리다(출 10:25), 어리석게 행동하다(신 22:21), 희생제물을 드리다(출 10:25), 유월절을 지키다(출 12:48), 복수하다(삿 11:3), 식물이 열매를 맺다(창 1:11), 음식을 준비하다(창 18:7 이하), 직무를 행하다(왕하 17:32), 화해하다(사 27:5), 제사장들을 세우다(왕상 12:31, 왕상 13:33), 사용하다(삼상 8:16), 보내다(전 6:12) 등을 의미하거나 그런 의미를 구성한다. (참조: T. E. Mccomiskey; BDB; KB). ---------------  영광, 찬미, 찬양, 찬양의 노래 테힐라(명여)는 할랄(ll'h; , 1984)에서 유래했으며, '영광, 찬미, 찬양, 찬양의 노래, 찬양할만한 행위'를 의미한다.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57회 나온다. (a) 테힐라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의 질이나 속성 등을 의미하며, '영광'(glory)이나 '칭찬할만함'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는 네 찬송이시요 네 하나님이시라 네가 목도한 바 이같이 크고 두려운 일을 너를 위하여 행하셨느니라"(신 10:21).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의해 높임을 받고 복된 상태로 존속할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사 62:7, 참조: 렘 13:11). (b) 테힐라는 몇몇 경우에 하나님을 공개적으로 찬양하거나 그의 '영광'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말 혹은 노래를 의미한다. "대 회중에 나의 찬송은 주께로서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시 22:25). 시 22:22에서는 보다 명백히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고 한다. (c) '테힐라'는 하나님을 높이거나 찬양하는 '노래'(쉬르)를 지칭하는 전문 음악 용어이다. '다윗의 찬양시'(시 145편의 히브리어 표제어의 의미). 느 11:17은 아마도 성가 지휘자나 그러한 '찬양곡'을 지휘하는 자에 관하여 언급한 것같다. "미가의 아들 맛다냐니 저는 기도할 때에 감사하는 말씀을 인도하는 어른이 되었고..."(느 11:17). (d) 테힐라는 '칭찬 받을 만한 행위'나 그 행위자가 '찬송과 영광을 받기에 합당한 행위'를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는 성경에 처음 언급된 출 15:11에서 나타난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테힐라와 관련된 명사로서 '마할랄'과 '힐룰림'이 있다. 전자는 1회(잠 27:21) 언급되며, '찬양'의 정도나 그것의 결핍을 의미한다. 후자는 2회 언급되며, 제 사년(the fourth year)의 추수시에 볼 수 있었더 '축제적인 축하'를 의미한다.(레 19:24, RSV, 삼 9:27 NASB).(참조: NEDOT). --------------- &r'B;(1288, 바라크) 무릎을 꿇다, 축복하다, 복을 주다, 찬양하다 바라크(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무릎을 꿇다, 축복하다(복을 주다), 찬양하다'를 뜻하며, 다른 의미로는 주로 하나님에 대하여 '저주하다, 욕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왕상 21:10, 왕상 21:13, 욥 1:11, 욥 2:5). 기본적으로 바라크는 '유익한 능력을 부여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구약성경에서 '축복한다'는 것은 '성공, 번영, 생산, 장수 등을 위한 능력을 부여한다'를 의미한다. 이 의미는 부여하는 과정과 부여 받는 상태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진정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다. 또한 바라크의 의미를 보면 무릎을 꿇는 것과 축복이나 복을 받는 것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1) 무릎을 꿇는 것, 곧 기도하는 것은 축복을 받는 비결이다. 대하 6:13(참조: 왕상 8:14, 왕상 8:54)을 보면 솔로몬은 성전 봉헌에서 놋대 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하나님의 복은 백성들이 예배가 끝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갈 때 그들에게 내려졌다. 이렇게 하여 이 복은 그들의 일상 생활에 실현된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이삭의 신부를 구해오라는 주인의 부탁을 받고 메소포타미아 나홀의 성에 이르러 낙타를 그 성밖 우물 곁에 무릎을 꿇게 하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 종의 기도로 주인과 종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삭의 좋은 신부감을 얻는 복을 받은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 열심히 기도하자. (2) 무릎을 꿇는, 곧 여호와를 경배하는 것은 복을 받는 비결이다. 시 95:6이하에서 시인은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을 듣기를 원하노라"(빌 2:10, 빌 2:11)라고 말했다. 시인은 시 115:2이하에서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시며 무론 대소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할렐루야"라고 노래했다. (3) 신앙 공동체는 자기가 받은 복에 대하여 여호와를 찬양함으로서, 곧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라는 외침으로 응답했다. 시 28:6, 시 28:7에서 다윗은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노래했다. 여러분 바라크라는 말을 기억하라. 바라크 -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다. 바라크 -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것이다. 바라크 -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이다. 바라크 - 받는 복을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이다. (참조: H. -G. LINK; TBC). ----------------- b/f(2896, 토브) 좋은, 선한, 즐거운, 선, 이익, 번영, 복지 토브(형용사)는 토브(b/f , 2895)에서 유래했으며, 형용사로는 '좋은, 선한, 즐거운, 유쾌한', 명사로는 '좋은 것, 선, 이익, 번영, 복지'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560여회 나온다. '선한'은 실제적인 혹은 경제적인 이익을 언급하는 것으로 잘 나온다. 좋은 열매(창 2:9)와 바로의 꿈에 나타난 이삭(창 41:5, 창 41:36)은 먹기에 좋은 것이었다. 요셉의 노예상태가 "좋은" 것은 양식과 민족의 생존 같은 실재적인 이익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선하지 못한" 모세의 재판에는 실제의 행정적인 불이익도 포함되었다: "모세의 장인이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하는 것이 선하지 못하도다"(출 18:17). 토브로 전달된 다른 실제적인 선은 아합에게 거부한 승리의 약속(대하 18:7); 환대와 우정(창 26:29); 유익한 충고(삼하 17:7, 삼하 17:14); 일반적인 경제번영(왕상 10:7); 농업 번영(호 10:1, ASV); 그리고 하나님의 의지(암 9:4) 등이다. 그러나 국가의 풍기를 문란케한(느 5:9) 강포한 삶(잠 16:29)과 행동은 "선하지 못하다"고 일컬어 진다. 노동의 "선"은 일에서 얻은 실제적인 이득을 가리키는 것 같다: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전 3:13, 참조: RSV '기쁨' pleasure). "선"은 여러 가지 광범위한 추상적인 관점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선한 이름은 명성이나 평판의 관점에서 볼 때, 후손보다 더 낫다: "내가 내 집에서, 내 성안에서 자녀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며 영영한 이름을 주어 끊치지 않게 할 것이며"(사 56:5). 다윗이 제후인 아기스에게 충성한 것은 "선한 것"으로 묘사된다: "아기스가 다윗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내 목전에 하나님의 사자 같이 선한 것을 내가 아나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은 말하기를 그가 우리와 함께 전장에 올라가지 못하리라 하니"(삼상 29:9, RSV '흠이 없는' blameless). 엘리후는 진리나 타당성과 관련 지어볼 때 무엇이 선한 것인지를 결정하라고 동료들에게 요구했다: "우리가 스스로 옳은 것은 택하고 무엇이 선한가 우리끼리 알아 보자"(욥 34:4).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있어, 노를 더디 내는 것은 이상적인 용사의 폭력적인 힘보다 더 바람직하였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 마찬가지로,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아이는 고집 센 왕보다 "더 나았다"(전 4:13). 이 단어는 심미적이거나 감각적인 선함도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비친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이나 매력(창 6:2), 리브가의 아리따움(창 24:16), 그리고 밧세바의 아름다움(삼하 11:2)을 묘사한다. 이 단어가 사람을 묘사할 때, 영어의 관용구는 '잘생긴' handsome이란 말을 사용한다(삼상 16:12). 감각적인 기쁨이나 좋은 것은 "단"이라고 묘사하는 데에서(렘 6:20), 그리고 다메섹의 물이 요단의 흙탕물보다 더 "낫다"는 나아만의 판단(왕하 5:12)에서 나타난다. 다른 것보다 더 나은 것으로서의 한 포도를 묘사하는 데에는 감각적인 매력도 포함되어 있다: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이제 행한 일이 너희의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삿 8:2). '선한'은 자주 '행복한' happy을 나타낸다. 이것은 왕이 결혼하는 때를 묘사한다: "내 마음에서 좋은 말이 넘쳐 왕에 대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필객의 붓과 같도다"(시 45:1). 행복한 축제일은 "좋은 날"로 묘사되기도 한다: "왕의 조명이 이르는 각 도, 각 읍에서 유다인이 즐기고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고 그 날로 경절을 삼으니 본토 백성이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유다인 되는 자가 많더라"(에 8:17, RSV '휴일' holiday; 참조: 삼상 25:8). "좋은 마음"은 행복을 나타낸다(대하 7:10, 잠 15:15). 행복은 술에 의해 야기되기도 하는 것 같다(전 9:7). 토브를 포함하는 관용어로는 선호나 뜻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는 "[어떤 사람의] 눈에 선한"이란 용법이 있다. 이런 용법의 예들로는 도망친 노예가 어떤 곳을 거처로 택함(신 23:16, RSV "그를 기쁘게 하는 곳), 그리고 슬로브핫의 딸들이 남편으로 택함(민 36:6)이 있다. 하나님의 뜻은 이런 식으로 표현될 것이다(삼상 3:18). 이것은 타락하고 죄에 가득찬 욕망을 묘사한다(창 19:8, 삿 19:24). 이런 경우에, 이 관용어는 도덕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토브는 우수한 질이나 상재적인 가치에 대한 개념도 포함한다. 이런 식으로 이 단어는 하윌라의 "정"금(창 2:12)과 고급 향유(아 1:3, RSV "바르는 기름" anointing oils)를 묘사한다. 우수한 장인은 모세가 "준수하다" (즉 고귀하다)고 묘사되는 경우(출 2:2)처럼, 인간의 성품의 특성이나 고귀성과 마찬가지로 이런 식으로 지칭된다(사 41:7). 토브의 중요한 용법은 도덕적인 선을 가리킨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시 34:14, H15)라는 명령은 분명히 "선"을 도덕적인 악과 대조 시킨다. 하나님께서 다루기 어려운 자기 백성을 가르치실 "선한 길"은 도덕적인 삶을 가리킨다(왕상 8:36). '선한'과 '옳은'을 뜻하는 야샤르는 종종 도덕적인 선을 뜻하는 유사한 말로 나온다(대하 14:1, 대하 31:20). 토브는 하나님에 대해 사용되었다. 어떤 용법들에는 앞에서 논의된 둘 이상의 의미의 영역들이 뒤섞여 있다. 옛 언약의 "좋은 땅"은 실제적이며, 경제적이며 미학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신 1:25, 수 23:13). 마찬가지로, "선한 분"으로서의 하나님 개념도 "선한"이란 단어의 모든 가능한 의미들을 충분히 함축하고 있다. 하나님은 선하시며(시 106:1, 대상 16:34), 좋으신 주님이시다(시 52:9). 구약성경에서 선의 개념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신앙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하나님의 개념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적인 것으로서의 선의 개념은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선은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은사이며, 그렇기 때문에 선은 인간의 힘의 통제권 밖에 존재한다(창 3:5).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단지 '선'이 아니라 선하신 성품을 가지신 분이시라는 사상이 철두철미하게 전제되어 있다. 이러한 인식이 구약성경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과 개인의 관계가 성숙해지는 과정에서 더욱 발전하였다. 하나님만이 오로지 선하신 분이시다라는 사실은 구약성경에서 그가 선택한 백성을 구원하신 것, 율법을 주신 것(신 30:15, 잠 28:10), 그리고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출 18:9, 신 10:29이하)과 같은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명백해졌다. 이스라엘인들은 하나님의 창조 활동(창 l:1-8)에서건, 그의 말씀에서건(사 39:8), 그의 영에서건(시 l43:10), 심지어 그가 반대자들에게 말하기 위해 나타나셨을 때 조차도(창 50:20) 그에게서 유래되는 모든 것은 선하다라는 사실을 알고부터 하나님을 오로지 선하신 분으로 찬양하는 새로운 계기로 발전하였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한 그의 사역에서 선(참조: 출 l8:9)을 행하시는 바 그 목적은 구원이며, 율법을 통해 인간에게 방향을 제시해 주는데 있다. 선은 이미 행해져 왔으며, 또한 준비되어 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약속했던 선은 메시야적, 종말론적 구원에서 실제로 성취될 것이다(레 32:39 - 42; 사 52:7). 한편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통하여 선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선을 행하는 자는 선하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도움,없이 가능할 것인가는 논쟁이 되고 있다. 전도자는 하나님의 도움,없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전 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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