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80.아삽의 시, 영장으로 소산님에둣<증거, 곧 백합>에 맞춘 노래]-------
**주예수님내맘에오사286.
1.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2.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주의 능력을 나타내사 우리를 구원(예슈아)하러 오소서 3.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슈브) 주의 얼굴(파님)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야샤) 4.만군의(차바)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 5.주께서 그들에게 눈물의 양식을 먹이시며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6.우리를 우리 이웃에게 다툼 거리가 되게 하시니 우리 원수들이 서로 비웃나이다 7.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8.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9.주께서 그 앞서 가꾸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가득하며 10.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11.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12.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13.숲 속의 멧돼지들이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 14.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돌보소서 15.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16.그것이 불타고 베임을 당하며 주의 면책으로 말미암아 멸망하오니 17.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 18.그리하시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19.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 Oh, give ear, Shepherd of Israel, You who lead Joseph like a flock; You who are enthroned above the cherubim, shine forth! Before Ephraim and Benjamin and Manasseh, stir up Your power And come to save us! O God, restore us And cause Your face to shine upon us, and we will be saved. O LORD God of hosts, How long will You be angry with the prayer of Your people? You have fed them with the bread of tears, And You have made them to drink tears in large measure. You make us an object of contention to our neighbors, And our enemies laugh among themselves. O God of hosts, restore us And cause Your face to shine upon us, and we will be saved. You removed a vine from Egypt; You drove out the nations and planted it. You cleared the ground before it, And it took deep root and filled the land. The mountains were covered with its shadow, And the cedars of God with its boughs. It was sending out its branches to the sea And its shoots to the River. Why have You broken down its hedges, So that all who pass that way pick its fruit? A boar from the forest eats it away And whatever moves in the field feeds on it. O God of hosts, turn again now, we beseech You; Look down from heaven and see, and take care of this vine, Even the shoot which Your right hand has planted, And on the son whom You have strengthened for Yourself. It is burned with fire, it is cut down; They perish at the rebuke of Your countenance. Let Your hand be upon the man of Your right hand, Upon the son of man whom You made strong for Yourself. Then we shall not turn back from You; Revive us, and we will call upon Your name. O LORD God of hosts, restore us; Cause Your face to shine upon us, and we will be saved. ------------ God Implored to Rescue His People from Their Calamities. To the Chief Musician; set to [the tune of] “Lilies, a Testimony.” A Psalm of Asaph.80 1 Hear us O Shepherd of Israel, You who lead Joseph like a flock; You who sit enthroned above the cherubim [of the ark of the covenant], shine forth! 2 Before [a]Ephraim and Benjamin and Manasseh, stir up Your power And come to save us! 3 Restore us, O God; Cause Your face to shine on us [with favor and approval], and we will be saved. 4 O Lord God of hosts, How long will You be angry with the prayers of Your people? 5 You have fed them the bread of tears, And You have made them drink [bitter] tears in abundance. 6 You make us an object of contention to our neighbors, And our enemies laugh [at our suffering] among themselves. 7 Restore us, O God of hosts; And cause Your face to shine on us [with favor and approval], and we will be saved. 8 You uprooted a vine (Israel) from Egypt; You drove out the [Canaanite] nations and planted the vine [in Canaan]. 9 You cleared away the ground before it, And it took deep root and filled the land. 10 The mountains were covered with its shadow, And its branches were like the cedars of God. 11 Israel sent out its branches to the [Mediterranean] Sea, And its branches to the [Euphrates] River. 12 Why have You broken down its [b]walls and hedges, So that all who pass by pick its fruit? 13 A boar from the woods eats it away, And the insects of the field feed on it. 14 Turn again [in favor to us], O God of hosts; Look down from heaven and see, and take care of this vine, 15 Even the stock which Your right hand has planted, And [look down on] the son that You have reared and strengthened for Yourself. 16 It is burned with fire, it is cut down; They perish at the rebuke of Your [angry] appearance. 17 Let Your hand be upon the man of Your right hand, Upon the son of man whom You have made strong for Yourself. 18 Then we shall not turn back from You; Revive us and we will call on Your name. 19 Restore us, O Lord God of hosts; Cause Your face to shine on us [in favor and approval], and we shall be saved. ---Footnotes Psalm 80:2 It is believed that these three tribes represented all twelve tribes of Israel, Benjamin being incorporated into Judah, Manasseh inhabiting the country beyond the Jordan, and Ephraim the remainder of the land. It was natural for the Israelites to think of the three in one group, for they had camped together on the west side of the tabernacle during the years in the wilderness, and they were also the only descendants of Jacob’s wife Rachel. Psalm 80:12 I.e. dry-stone walls, built without mortar from loose stones in the fields. =========== 앞의 두 시편과 같이 [북왕국 이스라엘]열 지파가 황폐케 되고 포로 되었을 때 씌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당한 환난은 많았다. 그러나 많은 환난들이 그 신성한 역사에 모두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며, 그중 어떤 환난은 이 시편을 작성할 기회를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노래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가장 큰 환난으로부터 도우리라 확신함으로써 교회에 대한 참된 사랑과 그 유익에 대한 성실한 관심을 표현하며, 우리의 마음으로써 주께 노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시편 저자는 여기에서 어떻게 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1.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임재와 은총의 표적을 간청하고 있다(1-3). 2. 그는 그들이 당하고 있는 현재의 경책을 호소하고 있다(4-7). 3. 번창했으나 이제는 쇠해 버린 포도와 포도원을 비교함으로써 교회의 현재의 황폐함을 예증하고 있다(8-16). 4.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긍휼을 마련해 주시고, 긍휼을 위해 그들을 마련해 두시기를 구하는 기도로써 끝내고 있다(17-19). ---이 시편은 전후의 여러 시편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공적인 유익에 관련되어 있는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어떤 세속적인 유익보다도 여기에 더 우리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JC보혈, 성령님...친히 하나되어 동행하시며 감동케 하심으로 인도하심, 말씀안에 계시하신 바 늘 새롭고 완전무결하신 하나님의 패러다임따라 믿는 이 한사람한사람마다 그 마음의 창의 왜곡됨을 교정하여 흠결없이 완전무결케 하사, 성령안에서 바르게 보고 들으며 판단하며 회개하게 하시며 하나님 뜻대로 바르게 중보하며 섬기며 다스리며 행하도록 이끄심.. ^^요셉의 인격과 신앙,..① 믿음의 사람(창 50:20; 수 24:32). ② 과실에 대해 민감(창 37:2), ③ 마음이 친절(창 40:7-8), ④ 성실성과 마음의 순수성(창 39:9, 11-12), ⑤ 겸손(창 41:16), ⑥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창 45:8), ⑦ 하나님의 신의 감동한 지혜를 소유(창 41:38-39), ⑧ 예언자적 기질(창 45:6; 출 13:19), ⑨ 감성이 풍부(창 43:30, 31), ⑩ 하나님의 도우심이 그와 함께 하심(창 39:2-3; 시 106:17-20), ⑪ 관용적인 사람(창 50:19-21). ------------------ 슬픈 호소(시 80:1-7) 시편 저자는 여기에서, 현재 이스라엘의 고통스러운 상태와 연관해, 교회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로써 문의하고 있다. Ⅰ. 그는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은총을 간청하고 있다(1-2절). 성소가 황폐해져 버릴 때는, 이 은총이 성소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요, 그것은 먼저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다음을 주목하자. 1. 그가 하나님께 아뢸 때,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목자로서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그는 이스라엘을 “주의 기르시는 양”이라 불렀는데(79:13), 그것은 양이 목자의 배려와 지휘 아래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이 주의 안내와 배려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위대하고 선하신 목자이므로 우리는 그에게 주어진 그의 양의 관리를 믿음으로 그에게 맡길 수 있다. 그는 “요셉을 양떼같이”, 가장 훌륭한 초장으로, 그리고 위험한 길을 피해서 “인도하신다.” 만일 요셉이 목자를 따르는 양처럼 순종하면서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의 잘못이다, 그는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어”, 거기에서 탄원을 받으시고 지시 내리실 준비를 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보좌는 그룹 사이에 있었다. 기도 속에서, 은혜의 보좌에 앉으신 자로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매우 위로가 되며,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저 위대한 화목제물의 덕택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보좌는 화해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2.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바라고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가 그들의 비참함과 기도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여주시며, 그가 그의 영광 속에서, 그의 백성에 대한 은총과 친절 속에서 빛을 발하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보이시고 그들에게 미소하시며, 그가 “주의 용력을 나타내시고”, 분발하시어 그것을 발휘하시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능력이 잠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주여, 그것을 깨우소서”라고 했다. 그의 사유는 큰 반대에 부딪쳤고, 그 원수들은 그것을 위압하려고 위협했다. “주여, 더욱더 주의 능력을 나타내시고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소서. 주의 백성들을 힘차게 그리고 즉시 도우소서. 주여, 이것을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행하소서.” 즉,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목전에서 행하시어, 그것을 보는 그들로 만족을 얻게 하소서” 하는 것이다. 이 세 지파들은 성막을 뒤따라 광야를 행군한 이스라엘 진영의 기병을 구성하고 있었으므로, 여기에 지적되어 있는 것 같다. 그들을 앞장서서 가던 하나님의 능력의 궤가 그들의 원수들을 혼비백산시켰다. Ⅱ.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불쾌하게 여기시는 것을 탄식하고 있다. 하나님은 노하셨다. 그리고 시편 저자는 그 어느 것보다 이것을 더 두려워했다(4절). 1. 그것은 큰 진노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노하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 그들의 기도에도 불구하고(그들은 기도로써 그들로부터 하나님의 노를 돌리기를 바랐다) 하나님께서 노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기도까지도(비록 그의 백성들이 한 기도였지만) 불쾌히 여기셨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의 죄와 그의 원수들의 기도에 노하신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그의 백성들의 기도에 대해 노하신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다. 그는 그들에게 (흔히 사랑으로) 응답하시기를 지연시키셨을 뿐만 아니라, 만일 그가 실제로 그의 백성들의 기도에 노하신다면, 그들이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단언할 수 있다(약 4:3). 그들은 기도하나, 기도 속에서 고투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목적이 옳지 않았거나, 그들 속에 머물러 있는 어떤 은밀한 죄가 있었다. 그들은 깨끗한 손을 들지 못했거나, 분노와 의심을 품고 손을 들었다. 그러나 이에 불쾌히 여기신다는 것은 단지 그들만의 느낌일지도 모른다. 즉, 하나님께서 실제로는 그러하시지 않았는데, 그들의 기도에 노하신 것같이 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처럼 그는 기도에 대한 그들의 인내와 끈기를 시험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가나안 여자를 시험하시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 그것은 오랫동안 지속된 노였다.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 우리는 계속 기도해 왔지만, 아직도 주의 노하심 아래 있습니다.” 그들이 오랫동안 하나님의 진노의 표적 아래 있었다는 것은 그들의 슬픔인 동시에 수치였다. (1) 그들의 슬픔(5절). “주께서 저희를 눈물 양식으로 먹이셨나이다.” 그들은 매일매일 눈물 속에서 음식을 먹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음식이 되었던” 식초였다(42:3). 그들은 눈물을 마셔야 했다. 이따금씩 그 쓴맛을 보는 정도가 아니라, 잔에 가득 담긴 것을 마셔야 했다. 보라, 지금 슬픔으로 날을 보내고 있지만, 기쁨 속에서 영생을 누릴 자들도 많다. (2) 그것은 그들의 수치였다(6절). 하나님은 그들에게 얼굴을 찌푸리심으로써 그들을 그 이웃에게 다툼거리가 되게 하셨다. 다투는 자들마다 그들을 공격했으며, 그들은 그들을 약탈하려는 자들의 손쉬운 먹이가 되었다. 그들이 놀라는 것과 궁지에 몰리는 것, 그리고 그들이 실망하는 것을 보고서 원수들은 비웃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불쾌하게 여기실 때, 우리는 그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과 그 원수들이 개가를 부르는 것을 보리라. Ⅲ. 시편 저자는 그들이 하나님께 용납되고 구원될 수 있도록 다시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소서”(3절).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취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7절). 이것이 이 노래의 취지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것을 19절에서 다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이 하나님과 그들의 의무에서 빗나갔다는 것과 그들이 죄의 길로 빠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어 그의 얼굴을 그들에게 숨기시고, 그들을 그 원수들의 손에 넘겨주신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옳은 목적을 위해 다시 시작하기를 원하고 있다. “주여, 우리를 회개와 감화의 방법으로써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러면 틀림없이 주께서는 긍휼과 구원의 방법으로써 우리에게로 돌이키실 것입니다.” 다음을 주목하자. 1.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만 구원이 나온다. “주의 얼굴빛을 비취사, 우리로 주의 사랑과 주의 얼굴빛을 얻게 하소서. 그러면 우리가 구원받을 것입니다.” 2.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서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얻을 수 없다. 우리는 세상과 육신을 떠나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러면 그가 그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실 것이다. 3. 그의 은혜에 의하지 아니하고서는 하나님께 전향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 행위로 하나님께 돌아가도록 하고 나서(호 5:4),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리라”(잠 1:23)는 그 은혜로운 약속을 탄원하면서, 그의 은혜를(“주께서 내게 돌이키시면 내가 돌아서게 되리이다”)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여기에 있는 기도는 민족적인 개심을 위한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는 민족적인 긍휼을 위해 기도해 잘못된 것이 고쳐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슬픔은 곧 해결될 것이다. 민족의 성결함은 민족의 행복을 보장해 줄 것이다. --------------------- 버림받은 포도나무(시 80:8-19) 시편 저자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위한 그의 청원을 제시하고 있으며, 그 청원에 대한 긍휼과 은혜를 하나님께 부탁하면서, 그것을 은혜의 보좌로 가져가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교회는 여기에서 포도나무와(8, 14절) 포도원(15절)으로서 상징되어 있다. 이 포도나무의 뿌리는 그리스도이시다(롬 11:18). 그 가지는 신도들이다(요 15:5). 교회는 포도나무처럼 연약하고 받침대가 필요하며, 보기 흉하게도 예기치 않은 가지가 밖으로 뻗어나오나, 널리 퍼져 과실을 맺으며, 그 과실은 매우 훌륭하다. 우리는 이 세상의 광야에 이러한 포도나무를 심으셨고, 그것을 오늘날까지 보존해 오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할 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이제 여기에서 다음을 살펴보자. Ⅰ. 구약 교회의 포도나무는 처음에 어떻게 심어졌는가? 그것은 지고한 손에 의해 “애굽에서 꺼내온” 것이다. 그것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열방이” 가나안에서 “쫓겨났다.” 그 하나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일곱 민족이 쫓겨났다. “주께서 그 앞서 쓸어버리시어”(어떤 사람은 9절을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일을 명료케 하셨다. 열방은 멸망의 빗자루로써 티끌처럼 쓸림을 당했다. 하나님은 포도나무를 위한 자리를 만드시고, 그것을 심으신 후에, 그것으로 하여금 교회와 국가의 행복한 통치제도에 의해 뿌리를 깊이 박게 했다. 그것은 매우 견고했으므로, 비록 그 주위에 있는 이웃들이 해하려고 자주 시도했을지라도 꺾어버릴 수 없었다. Ⅱ. 그 포도나무는 어떻게 퍼지고 번성했는가? 1. 가나안 땅에는 사람들이 가득 찼다. 처음에는 그곳에 사람이 가득 찰 정도로 그 수효가 많지 않았다(출 23:29). 그러나 솔로몬 시대에는 이미 “유다와 이스라엘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았다.” 그 땅은 그들로 가득 찼으나, 매우 비옥했으므로 부족함이 없었다(10절). 가나안의 산들은 그들로 덮였고, 그 가지들은 포도나무 가지처럼 길게 뻗쳐 있을지라도, 포도나무 가지처럼 연약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훌륭한 백향목의 가지처럼 튼튼했다. 이스라엘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뿐 아니라, 강한 용사들도 있었다. 2. 그들의 정복과 지배권은 이웃나라까지 미쳤다(11절).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었으니” 서쪽 큰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이르렀으니 남쪽의 애굽 강, 북쪽의 다메섹 강, 또 동쪽의 유브라데 강까지(창 15:18) 미쳤다. 느부갓네살의 광대함은 무성한 나무로 표현되어 있다(단 4:20-21). 그러나 이 포도나무에 대해서는, “그늘과 그 가지로”, 그리고 그 “넝쿨”로 인해 칭송을 하거나 그 열매로 인해 칭송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열매 못 맺는 포도나무였기” 때문이다(호 10:1). 하나님은 포도를 기대해 오셨으나, 들포도를 보셨다(사 5:21).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 나무는 소용없는, 가치없는 나무다(겔 15:2, 6). Ⅲ. 그것은 어떻게 훼손되고 파멸당했는가? “주여, 주께서 이 포도나무를 위해 큰 일들을 행하셨는데, 왜 그것이 다시 아주 멸망되어야 합니까? 만일 그것이 하나님께서 심으신 나무가 아니라면, 뿌리째 뽑히는 것을 보아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친히 존재케 하신 것을 다시 버리시겠습니까?”(12절)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헐으셨나이까?”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방법이 이처럼 변한 데에는 좋은 이유가 있었다. 이 귀한 포도나무는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되어(렘 2:21), 그 위대하신 주인을 비방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가 “그 울타리를 걷어”버리시는 것은(사 5:5)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포도나무에 대한 하나님의 옛 은총은 오히려 탄원의 제목이 되고 있으며,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전적으로 쫓아내시지는 않으리라는 믿음에 대한 격려로서 활용되고 있다. 다음을 주목하자. 1. 이스라엘에 대한 이방 민족들의 악의와 적개심. 하나님께서 “담을 헐으사” 그것을 버리시자마자, 멸할 기회를 노리던 원수들의 무리가 즉시 공격해 왔다. 길을 지나가던 자들은 그것을 꺾었다. “수풀의 돼지와 들짐승들”이 그것을 파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13절). 2. 그러나 이 잔인한 원수들도 또한 속박되어 있음을 보자.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담을 헐으시기” 전까지는, 그들이 이 포도나무의 잎 하나라도 딸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욥을 산울로” 계속 “두르시는” 한, 마귀가 그를 해할 수 없었다(욥 1:10). 사람들이 자기를 하나님의 은총 안에 두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가를 보라. 그때에, 그들은 어떤 들짐승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욥 5:23). 우리가 하나님을 격노케 해 그를 물러가시게 한다면, “우리의 방패가 우리를 떠나므로”, 우리는 멸망한다. 이스라엘의 비탄스러운 상태가 여기 묘사되어 있다(16절). “그것이 소화되고 작벌을 당하나이다.” 그 백성들은 저주에 가까이 있으며, 결국은 불살라지는 가시와 덤불처럼 취급받을 뿐, 더이상 포도나무처럼 보호받으며 소중히 여겨지지 않는다. 그들은 들짐승과 산돼지의 분노로 인해서가 아니라, “주의 면책을 인하여” 망한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두려워했던 점이며, 또 그들의 모든 재앙을 초래한 원인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미소 아래 있는가 또는 찌푸림 아래 있는가에 따라, 우리의 일이 잘되거나 못된다. Ⅳ. 이에 대해 그들이 하나님께 요청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1. 하나님께 그 포도나무를 도와달라는 것이었다(14-15절). 하나님께서 은혜롭게 그 형편을 인지하시고, 그가 합당케 여기시는 대로 포도나무를 위해 일을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이키소서. 왜냐하면 주께서는 우리로부터 떠나가신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물러가신 그 하늘에서 굽어보소서. 하늘에서, 그 전망대에서 굽어보소서. 그곳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행해지는 모든 잘못을 보셨고, 권능의 자리에서 주님은 효과적인 위로를 보내실 수 있었습니다. 주께서는 하늘에 심판의 보좌를 두셨고, 우리는 그곳에 호소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주님은 참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 더 나은 나라를 예비해 두셨습니다. 주여, 그곳에서 이 포도나무를 은혜롭게 굽어보시고, 은혜롭게 영접하소서. 우리의 비참한 상태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리고 주의 긍휼의 이 특별한 열매를 위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주께 의탁합니다. 그 포도원 아니, 오히려 그 뿌리를 보기만 하소서. 주의 오른손으로 그것을 심으셨으므로 주의 찬송을 부르게 하기 위해(사 43:21), 그 열매로써 주님이 영광받으시기 위해, 주의 오른손이 주를 위해 힘있게 하신 그 가지를 보호하시리라는 것을 우리는 기대하고 있습니다. 주여, 그것은 주에 의해, 주를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겸손한 확신과 함께 주께, 그리고 주의 돌보심에 맡겨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사는 완전하시다.” 우리가 히브리어에서 “가지”로 읽는 말은 “아들”(Ben)이다. 주께서는 아들을 위해 가지로 그 계획 속에서 강하게 만드셨다. 그 가지는 이스라엘의 혈통(“나의 종 순”, 슥 3:8)에서 나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나올 때까지 전반적으로 이스라엘, 특히 다윗의 집은 보존되어야 했으며, 존속되어야 했다. “그는 참 포도나무이시다”(요 15:1; 사 11:1). “그것을 상하지 말라. 거기 복이 있느니라”(사 65:8). 2. 하나님께서 포도원지기를 도와달라는 요청이었다(17-18절). “주의 우편에 있는 자, 이제(누구든지간에) 그 앞에서 들락들락해야 할 다윗 집의 그 왕 위에 주의 손을 얹으소서. 주의 손을 그 위에 얹으시어 그를 보호하고 덮어주실 뿐만 아니라, 그를 시인하시고 힘있게 하시며, 그를 성공하게 하소서.” 우리는 이러한 구절을 읽을 수 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손이 나의 위에 있으므로 내가 힘을 얻었노라”(스 7:28). 그들의 왕은 그의 베냐민, “주의 우편에 계신 아들”처럼 하나님께 귀한 그 나라의 대표자였으므로, 그들을 그들 자신과 그들의 원수들로부터 방어해 주시고, 그들을 올바른 길로 지도해 주시면서, 그들의 형편을 주관하시며, 하나님 우편에서 그들에게 많은 유익을 행사하시는 도구였으므로, 그리고 이스라엘의 큰 목자 아래 있는 종속 목자였으므로 “하나님의 우편에 있는 자”라 불리고 있다. 권세를 지닌 방백들은 그들이 “사람”(단어 그대로), 곧 “아담의 아들들”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만일 그들이 강하다면, 그들을 강하게 만드신 것은 하나님이며,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위해 그들을 그렇게 만드셨다는 것을(왜냐하면 그들은 사람들 가운데 있는 그의 나라의 유익을 돕는 일꾼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성실하게 이것을 행한다면, “그들 위에 주의 손을 얹으시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통치자들을 지지하신다면, 우리도 그를 지지하리라는 이 약속을 덧붙이면서, 그것이 그렇게 되도록 믿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그러하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리이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원해 주는 그 명분을 결코 버리지 아니하겠습니다” 하는 약속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안내자가 되시게 하고, 우리는 그를 따르도록 하자. 여기에 또한 다음과 같은 기도를 우리는 덧붙일 수 있다. “우리를 소생케 하소서. 우리에게 생명을 넣으시고, 사라져가는 우리의 이득을 회복시키며, 우리의 낙심한 심령을 소생시키소서. 그리하면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헛되지 않음을 발견했으므로, 우리는 모든 경우에 계속 그러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소생시키지 않는다면, 옳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영혼에 생기를 넣으시는 분과 우리 기도에 활기를 불어넣으시는 분은 곧 하나님이시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많은 해설가들은, 이것을 메시야, 곧 다윗의 아들이 교회의 보호자며 구세주이시고 포도원지기라는 사실에 적용시키고 있다. (1) 그는 하나님 우편에 있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은 “그의 오른손으로” 그에게 “맹세하셨고”(갈대아 해설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그를 그의 우편으로 들어올리셨다. 그리고 그는 정말 여호와의 오른손, 그 팔이시다. 왜냐하면 모든 권세가 그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2) 그는 하나님께서 “주를 위하여”, 그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사람들 가운데 있는 그의 나라의 세력을 발전시키기 위해, “힘있게 하신” 그 인자이시다. (3) 하나님의 손은 그를 지원하시고, 그로 하여금 견디어내게 하시기 위해, 그를 보호하시고 그의 힘을 복돋우시어 “여호와의 선한 기쁨이 그 손에서 번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의 전 사업을 통해 함께한다. (4) 신자들의 확고함과 견고함은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쌓아둔 그 은혜와 힘에서 전적으로 기인하고 있다(68:28). 그 안에서 우리의 힘이 발견되며, 그 힘에 의해 우리는 끝까지 견디어낼 수 있게 된다. “주의 손이 그의 위에 함께하소서. 강대하신 그분 위에 우리의 도움이 있나이다. 그가 우리를 끝까지 구원하게 하옵소서. 그러시면 우리는 안전할 것이옵니다. 그러하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다.” Ⅴ. 이 시편은 앞에서 두 번씩이나 올려진 것과 똑같은 탄원으로써 결론을 맺고 있다. 그러나 헛된 반복이 아니다(19절). “우리를 돌이키소서.” 하나님께 대한 호칭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3절). “하나님이여”(7절), “만군의 하나님이여”(19절),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가 하나님께 그 은혜를 구하러 나아갈 때, 곧 우리에 대한 그의 선한 뜻과 우리 안에 있는 그의 선한 역사를 구하러 나아갈 때, 우리는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간곡하게 기도를 계속하고, 더욱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 bWv(7725, 슈브) (되) 돌아가(오)다, 회복하다, 고침받다 =회개하고 돌이키는 행함 통해 회복 이룸 슈브(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되)돌아 가(오)다, 회복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000회 이상 나오며, 칼, 폴렐, 푸알, 히필, 호팔, 풀랄형으로 사용되었으며,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칼형과 히필형에 국한한다. 성경에는 회개의 과정에 있어서의, 인간의 책임을 묘사해 주는 관용구들이 풍부하다: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라"(수 24:23),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여호와께 속하라"(렘 4:4), "네 마음의 악을 씻어버리라"(렘 4:14),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호 10:12) 등등. 그러나 인간의 회개 행위에 관한 이러한 모든 표현은 이 한 동사 슈브에 포괄되며 슈브로 요약된다. 이 동사는 본질적으로 회개의 두 가지 필수 조건들을 다른 어느 동사보다도 더 잘 결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 필수 조건이란 악에서 돌아서는 것과 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칼 어간에서 슈브는 10가지 상이한 의미를 지니며 이 의미들도 각각 다시 나뉘고 그 중 몇몇 용례는 의미를 정확히 지적하기 어렵다고 한다(Hollacay). 이 중 두 세 가지는 특별히 고찰해 볼만하다. 우선 첫째로, 물리적 동작이나 운동의 뜻을 함축하고 있는 슈브의 기본 의미 '(되)돌아오다'는 270회 이상 출현한다. 하나님이 주어일 경우가 몇 번 있다: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사라)로 돌아오리라"(창 18:14). 그러나, 인간이 주체인 경우가 가장 많다: "내가(아브라함) 아이(이삭)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창 22:5). 히필 어간에서는 '되돌리다, 다시 가져가(오)다'라는 의미로 87회 등장한다. 둘째로, 종종(120회 이상) 슈브는 [[동일한 행위를 다시 하다]]란 뜻으로 일종의 조동사 구실을 하여 둘째 동사의 행위를 되풀이하는 기능을 갖는다: "그리고 이삭이 그 우물들을 '다시' 팠다"(창 26:18). 셋째로 슈브의 칼형이 지니는 중요한 용법이 또 하나 있는데 이것은 신학적으로 극히 중대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언약을 신뢰함 그 안에서 모든 죄악과 허물들에서 떠나 주께로 믿어 들어감]], 곧 언약의 공동체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회개의 의미에서), 또는 악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죄를 버리고 부인한다는 의미)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는 것(배교한다는 의미)을 다루고 있는 구절들에서 출현한다. 이러한 문맥에서 슈브의 칼형이 129회 사용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 대 인간의 관계를 논할 때 슈브의 히필형은 11회 밖에 사용되지 않는다. "너희는 마음을 '돌이켜'(칼명령형) 우상을 '떠나고'(히필)"(겔 14:6). 모든 어간을 고찰하고 난 후 홀러데이(Holladay)는 언약의 문맥에 슈브의 용례가 총 164회 등장한다고 결론짓는다.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들의 대다수 곧 113회가 고전적/문학적 선지서들에서 발견되며 예레미야가 그 선두를 달린다(48회). 예레미야와는 대조적으로 이사야의 첫 39장에는 슈브의 언약적 용법이 단지 6회 밖에 발견되지 않는다(만일 우리가 사 30:15을 "너희가 [하나님께로]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고 읽지 않고 '여전히 앉아 yashab 즉 외국과의 동맹을 끊고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고 읽는다면 5회 밖에 되지 않음). 나머지 뒷 부분의 27장에서는 단 4회가 발견된다: 사 44:22, 사 55:7, 사 57:17, 사 59:20. 이처럼 우리는 이 두 예언서가 정경에서 서로 등을 돌리고 있는 흥미로운 현상에 접하게 된다. 즉 첫째 것은 이 주제에 관해 사실상 침묵하고 있으며, 둘째 책은 소리가 꽤 크게 울린다는 사실이다. 이사야의 용례 결핍 현상은 아마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패망케 하시고 포로로 잡히게 하심 결단에 관한한]]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는 식의, 이 선지자의 어투 때문일 것이다. 매우 통렬하게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말한다: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염려컨대 그들이 다시 돌아와서(슈브)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 6:10). 즉, 돌아올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하고 말았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완악성을 미리 내다보시고 이를 자기의 계획 속에 혼입시켰다. 그러므로 선지자 이사야는 좌절할 필요가 없었다(마 13:13 이하).... 수많은 구절에서 슈브가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다" to return from exile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칼형: 물론 에스라와 느헤미야에서 나오며(스 2:1, 느 7:6), 그리고 특히 사 10:22, 렘 22:10, 슥 10:9. 히필형: 특히 왕상 8:34, 렘 12:15. 포로 생활에서의 귀환 개념과 언약에로의 복귀 개념 사이의 관련성은 명백하다. 포로생활로부터의 귀환은, 어느 형태의 죄이든 그 죄에서 돌아서는 것 만큼의 갱생이었다. 하나님의 그 어느 쪽의 돌아옴이든 허락한다는 것은 그의 언약적 신실성을 확증해 주는 것이다. 확실히 구약성경에는 회개의 교리에 대한 체계적 설명이 없다. 이것은 그 어느 것보다 더 잘 예증된다(시 51). 그러나 백성들에게 '~에로' 또는 '~으로부터' '돌아서라'는 요구가 주어진다는 사실은, 죄가 근절할 수 없는 오점이 아니라 돌아섬으로써 즉 하나님이 부여하시는 능력에 의해 죄인이 자기 운명의 방향을 수정할 수 있음을 뜻한다. 회개를 이해하는데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즉 하나님의 자비의 임의로운 주권적 행동과, 인간이 통회와 슬픔을 초월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의식적 결단을 하는 것이 그것이다. 후자에는 모든 죄의 거부와 자기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전체적인 뜻을 긍정하는 행위가 포함되어 있다. (참조: V. P. Hamilton; BDB). ----------------- !ynIP;(6440, 파님) 얼굴 face 파님(명남)은 파나(hn:P; , 6437)에서 유래했으며, '얼굴 face'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100회 이상 나온다. (a) 이 독특한 단어 파님은 항상 복수형으로 등장하는데 아마 얼굴이 수많은 부분들의 결합체라는 사실에서 연유한 듯하다. 파님은 ① 사람의 얼굴(창 31:2), "그의 외모"(창 4:5), 한 인간 전체를 뜻하는 대용어(신 7:10)로 사용되었다. ② 관찰자에게로 향해진 면, 예를 들어 '지면'(창 2:6), ③ 이 단어는 관계를 표현하기 위하여 여러 전치사들과 함께 사용된다. 예를 들면, ~의 면전에서 before the face of, ~앞에서 before, ~속으로 into, ~의 정면에서 in front of, ~의 반대편에 opposite 등이다.(참조: E. Tiedtke) 사람의 얼굴은 그 사람을 식별하게 해주고 그 사람의 마음 가짐과 감정을 반영해 준다. 따라서 파님은 자아 또는 자아 감정의 대용어가 될 수 있다. 성경에서 얼굴은(신체의 여타 부분들과 함께) 사람의 생리 기능을 담당하는 외적 기관으로 묘사될 뿐만 아니라 어떤 형태의 행동 방식과 관계되는 것으로 기술되었으며 따라서 어떤 인격성에 의해 특정 지어진다. 얼굴이 상대방의 감정, 기분, 성격을 묘하게도 밝혀주는 것으로 생각되었다는 사실은 극히 당연하다......"굳은" 얼굴은 반항(렘 5:3), 뻔뻔스러움(잠 7:13), 무자비함(신 28:50)의 표시이다. "빛나는" 얼굴은 기쁨의 증거이다(욥 29:24). "부끄러워하는" 얼굴은 패배, 좌절, 굴욕을 가리킨다(삼하 19:5). "불꽃같은" 얼굴은 공포에 질린 얼굴이다(사 13:8). "나쁜" 얼굴은 근심 걱정으로 찌든 얼굴이다(창 40:7). "낙담한" 얼굴은 매우 강렬한 분노와 불쾌감에서 연유한다(창 4:5). 누군가의 얼굴을 "부드럽게" 만든다는 것은 그를 달래거나 또는 그의 호의를 구한다는 뜻이다(하나님께 대해, 왕상 13:6, 왕하 13:4). KJV는 이 마지막 문구를 "~가 여호와께 구했다/탄원했다" X sought/entreated the Lord라고 의역하였다(한글개역: "여호와께 간구하매").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은 문자적으로 "~가 여호와의 얼굴을 부드럽게 만들었다"로 된다. 마찬가지로 이 관용구는 사람에 대해서도 사용된다(잠 19:6). "얼굴을 숨기다"라는 문구는 혐오감을 나타낸다는 의미이며(사 53:3) "얼굴을 돌리다"라는 것은 거부한다는 뜻이다(시 132:10). 역으로 타인의 "얼굴을 들어 올리다"는 호의, 존중, 수락을 나타내 보인다는 뜻이거나(삼상 25:35, 한글개역, "청을 허락하노라") 또는 편파성 편애를 드러낸다는 뜻이다(레 19:15, 한글개역, "편을 들지", "두호하지"). 얼굴을 숙인다는 빈번한 표현은 공손하게 인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파님은 동물의 얼굴들에 해당하는 말로 역시 때때로 사용되었다(겔 1:10).(V. P. Hamilton) (b) 파님은 특히 하나님의 얼굴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① 위에서 언급한 인간의 얼굴에 관한 관용구들과 문구들의 대부분이 하나님께도 적용되었다. 하나님의 얼굴은 은혜와 신의의 표시로서 "환히 빛난다"(시 4:6). 그의 얼굴이 분노로 "침울해진다"(렘 3:12). 하나님은 그의 얼굴을 "숨기기도" 하신다(시 13:1). 하나님이 얼굴을 드시거나 그의 얼굴을 이스라엘에 비추시면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평강(즉,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이 그의 얼굴을 감추거나 돌리실 때 은혜를 거두어가심을 시사한다(참조: 시 13:2, 시 104:29). 하나님과의 교제의 행운을 가져오거나 하나님의 진노 하에 머무름을 가져오거나 하는 하나님의 작용과 반작용은, 그러한 신인 동형론적 묘사로 표현되고 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은 가장 예외적 가능성으로 언급되어 있다(창 32:30,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 창 16:13, 출 24:9 이하, 신 4:12, 삿 6:22 이하도 역시 참조하라).(참조: E. Tiedtke) "하나님의 얼굴을 뵙다"라는 구절이 5회 발견되는데 아마 종교 예배를 위해 성소를 찾아간다는 뜻의 전문 용어일 것이다. 다섯 구절은 출 23:15, 출 34:20, 신 31:11, 시 42:2, 사 1:12이다. 이 보기들의 각 경우에서 동사 라아('보다' to see)는 니팔형으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나타나다" to appear로 번역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다는 개념을 "앞에 나타나다" appearing before라는 개념으로 유화시킨 것이다. 한 용례에서(삼상 1:22) 니팔형이 자음 본문에 의해 명시되어 있다. 여기를 니팔 부정사형 레라오트 파나이(하나님 "앞에 나타나다" to appear before God)로 생각할 수 있으며 또 그것이 당연하기도 하지만 칼 부정사형인 리로트 파나이의 가능성은 출 33:20에 비추어 볼 때 상상할 수 없다. 이에 대한 몇몇 예외가 있는데 예를 들면 야곱(창 32:30)과 모세(출 33:11)의 경우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면하여" face to face 보았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을 보거나 또는 그 음성을 듣기만해도 그는 죽게 된다(출 19:21).....하나님 얼굴을 보는 경험이 얼마나 위험스러운지 항상 강조하고 있다. 죄많은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을 본다면 그는 죽어야 하는 것이다(출 33:20, 참조: 사 6:5). 이러한 이유로 모세(출 3:6)와 엘리야(왕상 19:13) 그리고 스랍조차도(사 6:2) 하나님 면전에서 그들의 얼굴을 가렸다. 하나님을 본 후에도 살아있는 사람은 놀람과 감사(창 32:30, 신 5:24), 두려움(삿 6:22, 삿 6:23, 삿 13:22, 사 6:5)으로 압도당하게 된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출현하셨으며 그만이 아버지를 보았다(요 1:18, 요 6:46, 요일 4:12).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통로가 되는 말씀일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기도 하다.(참조: V. P. Hamilton) 출 33장에서 세가지 세가지 다른 전승들 - 여호와는 인도자로 한 천사를 보내신다. 성막을 통한 여호와와의 유대 - 여호와의 얼굴(파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신다 - 는 시내산으로부터 떠난 후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다는 기본적 사상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전승의 셋째번 것에서 파님(출 33:14 이하)은 여호와의 이스라엘에게 현현으로 특이하게 인성화된 것 같다. 이것은 해석상에 다양한 시도를 낳았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나의 파님"을 "나 자신"으로, 즉 여호와의 인격적 임재에 대한 강조적 표현으로 이해한다. 또 혹자들은 이 구절이 제사장은 제사 때에 가면을 사용했다는 그네들의 주장을 정당화시켜 준다고 말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성소에서 제사를 드릴 때에 여호와의 얼굴이 임재하셨음, 즉 하나님의 얼굴이 인간을 향하셨음을 의미한다고 이 구절을 해석한다. 이 구절에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해석이 제시될 수 없다. ② 하나님의 얼굴이 성전과 관련하여 언급되어 질 때, 이 용어는 제사와 관련된 것이다. 성경의 범위를 넘어선 이 단어의 용법이 여기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스라엘 주변의 열방은 신의 얼굴을 성전 우상의 얼굴로 만들어 이를 보고 예배하였다. 이스라엘의 예배에서 사용되어진 우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 용어는 예배자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였다고 했을 때 비유적 의미로만 사용될 수 있었다(시 24:6, 시 42:2[마소라 42:3], 슥 8:21[마소라와 70인역본], 말 1:9[마소라]).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임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보심을 의미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서 특히 그것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것은 기도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감을 의미한다. 끝으로 제사를 아주 떠나서는 이 단어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간구하는 일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시편 기자는 시 105:4에서 "계속적으로" 이렇게 할 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촉구하고 있다. 진설병(출 25:30)의 문자적 의미는 "얼굴의 떡"("임재의 떡" RSV)인 것이다. 이런 떡덩이들이 이교도 제사에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들의 제사에서는 이 떡들이 신의 음식 역할을 했던 것이다(참조: 렘 7:18). 이스라엘이 이 관습을 이어받았을 때 떡 Bread(아토스)은 하나님의 얼굴 앞에 음식으로가 아닌 예물로 유향과 함께 특별히 마련된 식탁 위에 놓여졌다. 좀 더 자세히 알기 위하여 출 35:13, 출 39:3, 민 4:11, 삼상 21:6, 왕상 7:48, 대상 9:32, 대상 23:29, 대상 28:16, 대하 2:4, 대하 4:19, 대하 13:11, 대하 29:18, 느 10:33, 마 12:4, 막 2:26, 눅 6:4, 히 9:2, 요세푸스의 저서(Ant., 3, 6, 6; 3, 10, 7)를 보라. ③ 랍비 유대주의에서 사람의 최고의 소망은, 죽음에 임한 시각에와 메시야의 날 후에 다가올 세상에서, 혹은 어떤이의 의견에 따르면, 메시야의 시절 동안에라도, 셰키나의 얼굴 또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빛의 반사를 받아 의인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날 것이지만(단 12:3) 불신앙인들은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형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자카이의 아들 요난(R. Johanan b. Zakkai)이 죽음의 침상에서 두려워 한 것을 대조해 보라(SBI 208; ML 478). (참조: E. Tiedtke).
---------------------- ab;x;(6635, 차바) 전쟁, 군대, 무리 차바(명남)는 차바(ab;x; , 6633)에서 유래했으며, '전쟁, 군대, 무리'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480회 이상 나온다. 차바는 싸움, 예를 들면 이스라엘과 미디안의 전쟁 등과 관련을 맺고 있다. 이 단어는 또한 직무를 수행한다는 의미에서도 넓게 사용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네 번의 용례가 회막 안에서의 레위인들의 직무와 관련되어 있다(민 4:23, 민 8:24). 의심할 여지 없이 여호와를 섬기는 일은 온전한 헌신과 신중한 조직을 포함하였다. 하나님은 회막 안쪽에 거주하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이시므로 회막과 관련된 일은 영적 전쟁으로 간주될 수 있다. 출 38:8과 삼상 2:22의 분사형은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을 가리킨다. 차바는 군복무기간을 의미할 수도 있다고 돔(Dhorme)은 말하였다. 욥 7:1과 욥 14:14의 용법이 그러하다. 첫 구절에서 인간의 지상의 존재가 고된 군 복무에 비유된다. 인간은 계속하여 일하고 고난을 참아야 하며 자기 역량 이상의 운명에 복종해야 한다. 뒷 구절에서는 인간이 스올에서 거주하는 기간을, 구속되고 엄격한 군복무의 관점에서 묘사하였다. 차바는 host(s)로 번역된 경우 군대(들)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조직을 갖춘 모든 군대(삿 4:2), 하늘의 거주자(왕상 22:19), 천체들(신 4:19) 등을 의미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의 여행 중 각 지파 단위대로, 군대로 계수되었다(민 1:52). 그들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체험했기 때문에 일치단결하여 스스로를 하나의 공동체로 조직하기 위해 노력했다. 군주 정치 하에서는 전쟁 준비가 잘 갖추어진 강력한 군대를 지니고 있었다(예: 대하 26:11-15). 이스라엘이 무장을 하였지만 그들의 승리는, 여호와께서 군대의 사령관으로서 그들을 위해 싸운다는 사실에 달려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싸울 때 하늘의 모든 군대가 동원되었다. 여호와의 군대 장관(sar)이라는 한 천사가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서 여리고 전투에 임할 전략을 그에게 전해 주었다. 존재하는 모든 군대의 우두머리이신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군대와 함께 싸우러 가지 않으면 그들의 노력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시 44:9, 참조: 잠 21:31). 태양과 달을 비롯한 천체들이 천군이라 불린다(창 2:1). 이것들을 가리킬 경우 이 단어는 항상 단수형으로 사용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입기운으로 천군을 창조하셨으며(시 33:6) 그들의 존재를 보존하신다(사 40:26). 그리하여 그것들은 완전한 순종 하에 하나님을 섬기며 그에게 경배드린다(느 9:6, 사 45:12).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그의 사역자들로서 나타난다(시 103:21). 이스라엘에게는 결코 그들을 경배하지 말라는 권고가 주어진다(신 4:19).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피조물들을 경배하는 경향을 소유하고 있다(왕하 17:16). 이러한 면에 있어서 이스라엘을 곁길로 흐르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사형에 처해지게 되어 있었다(신 17:2-7). 불행하게도 북 이스라엘과 유다 모두 여러 시대에 걸쳐 이 유혹에 굴복하고 말았다(예: 왕하 17:16 이하, 왕하 21:3, 왕하 23:5). 그러므로 결국 두 나라는 대적들에 의해 유린되었다. 그러나 장차 이 천군의 존재가 종식될 날이 있다(사 34:4). 만군의 여호와라는 문구는 하나님에 대한 특별 칭호이다. 여호와와 엘로힘이 체바오트와 함께 결합되어 약 285회 등장한다(Mandelkern에 의하면). 그리고 이사야(62회), 예레미야(77회), 학개(14회), 스가랴(53회), 말라기(24회) 등에서 가장 많이 나타났다. 이것이 모세 5경에는 부재한다. 체바오트는 여호와를 뒤따르는 경우가 대략 261회로서 가장 많으며 알로헤를 뒤따를 때가 18회, 엘로힘 뒤에 놓이는 경우가 6회이다. 종종 등장하는 하나님의 칭호의 조립어들은 다음과 같다. '여호와 체바오트 엘로헤 이스라엘(37회), 여호와 엘로헤 체바오트(13회), 여호와 엘로힘 체바오트(4회), 아도나이(5회 추가됨) 여호와 체바오트(20회), 아도나이 여호와 엘로헤 핫체바오트(암 3:13), 여호와 체바오트 엘로헤헴(2회). 강조하기 위해, 상기와 같은 하나님의 호칭들에 때로는 "그의 이름"이라는 문구가 추가된다(예: 암 4:13, 사 47:4, 사 54:5). 어느 관용어구가 기타 다른 것의 원형이 되는지 확고하게 결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 단어로 형성된 관용 어구에서는 엘로헤가 만군과 결합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여호와를 그 구성형으로 보기는 좀 어렵다. 어떤 이들은 오트를 추상 복수 의미로 볼 것을 제의했다(참조: GK 124d, e). 그렇다면 체바오트는 여호와와 동격 명사가 되는 셈이다. 즉 가장 강한 전사 여호와 또는 전능의 왕 여호와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러므로 여호와 체바오트는 하나의 전문 용어가 되어버린 것이다. 70인역본은 체바오트를 사바오드(특히 삼상과 이사야에서, 참조: 롬 9:29, 약 5:4)와 판토크 라토르('전능자')로 번역함으로써 이러한 가능성을 지지해 준다. 한편 70인역본은 몇 차례에 걸쳐 퀴리오스[호] 데오스) 톤 뒤나메온('만군[능력들]의 주')이라고도 번역하였는데 이 점은, '만군'이 여호와 뒤에 놓이는 속격이라는 해석을 또한 뒷받침해 준다(그러나 참조: GK 125h). 이러한 하나님의 이름은 삼상 1:3에서 최초로 출현한다. 기원은 사사시대 말기인 듯하며, 언약궤가 있었던, 성소 실로 근방인 것 같다. 궤 자체는 여호와의 지배권을 상징했다. 왜냐하면 그는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분으로 선포되었기 때문이다(삼상 4:4, 참조: 시 99:1). 이 이름은 확실히 여호와가 이스라엘 군대의 진정한 우두머리임을 확증해 준다. 이스라엘 군대 그 이상의 의미가 이 명칭 속에 내포되어 있다는 점이 다윗의 진술로 보아 명백하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삼상 17:45). 즉 이러한 표현은 하늘과 우주와 지상의 온갖 세력과 군대를 총망라하는 그의 보편적 통치권을 증언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국제 관계를 가진 한 국가로서 부상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신학을 표출하는 언어도 보조를 맞출 필요가 있었다. 여호와가 여러 민족들의 전쟁 주도 신들 가운데 한 전쟁 신이 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그가 최고의 하나님임을 밝힌다는 것은 중요하였다. 특히 세 대륙의 교차 지점에 위치하여 세계 열강들의 군대와 끊임없이 맞닥뜨렸던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여호와가 이러한 강력한 제국들의 왕도 되신다는 점을 강조한다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결과적으로 여호와는 능히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그러한 군대가 일으킨 어떤 위기라도 극복할 수 있었다. 선지자들은 왕정 시대에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즉 하나님께서 이들 강한 군대들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거역하는 이스라엘을 징계하였다는 점이다. 그 까닭에 여호와가 참으로 그 나라들의 왕이시며 그가 그들을 심판하실 것을 필수적으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역으로 만일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고자 하지 않으면 여호와는 그러한 군대들을 동원하여 이스라엘을 칠 수 있었고 그들을 포로로 잡혀가게 할 수도 있었다(참조: 사 10:5-34). 나아가서 바벨론의 침략의 위협을 받고 있을 때, 백성들은 일월성신 숭배에 미혹되어 있었는데, 선지자들이 볼 때, 여호와께 순종하는 그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이러한 별들을 숭배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사실을, 이 이름이 백성들에게 분명히 전달해 주었던 것이다(사 47장 참조). 여호와 체바오트라는 칭호의 본질적 의미를 총망라해 볼 때 그것은 가장 고귀한 이름이다. 사 6:5과 시 84:3이 보여 주듯이 칭호는 여호와의 왕권과 명확하게 관련되어 있다. 축제일에 개선 행렬이 성전 뜰로 들어가기 전 합창이 울려 퍼졌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시 24:9 이하). 여기의 본문은 만군의 여호와가 영광스런 왕의 개념을 지니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여호와는 세계의 왕이시다(참조: 슥 14:16). 그리고 땅에 있는 모든 왕국들을 지배하신다(사 37:16). 이 하나님은 만유의 근원이다(렘 10:16). 그의 통치권은 그가 가시적으로 그 주권을 나타내 보일 어떤 예를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마지막 날 열국들은 시온산에 대항하여 전쟁을 행할 것이나 결국은 그들의 상상이 그들의 성공을 섣불리 앞섰다는 사실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때 여호와께서 자연적 세력의 도움을 받는 큰 군대를 전쟁 속으로 이끌고 들어갈 것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대적이 굴복할 것이다(사 13:4, 사 24:21 이하, 사 29:5-8, 사 31:4 이하, 사 34:1-12). 그 때 여호와께서 시온산으로부터 우주적 통치권을 가시적으로 현현시킬 것이다. 그의 모든 권위와 주권이 영원토록 서게 될 것이다. 이 칭호가 군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전 우주에 대한 여호와의 통치권을 직접적으로 가리켜 주기도 한다. 그는 계속하여 통치하시지만 때로는 자기 자신의 승리를 확보하고 자기 백성의 구원을 향해 역사의 방향을 돌릴 목적으로 직접 개입하신다. 암 4:13에서는 이 용어가 그가 산과 바람을 창조했다는 사실과, 그리고 자연을 어거하는 그의 권능과 관련되어 있다(참조: 암 5:8 이하, 암 9:5 이하). 그는 모든 세력을 지배하는 주인이시며 그분만이 평화를 보장하신다. 그에게 기도가 드려지기도 한다(예: 시 80:19). 이 칭호에서는 여호와의 통치가 장엄하고 찬란하다는 사실에 특별한 관심이 주어진다(참조: 시 84:1, 사 28:5 이하). (J. E. Hartley) ----------------- [v'y:(3467, 야샤) 구원하다, 구출하다, 구조하다 야샤(동사)는 기본어근이며, '구원하다, 구출하다, 구조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00회 나오며, 니팔형과 히필형으로만 사용되었다. 야샤와 그 파생어들은 약 350회 나온다. 아랍어 어근의 의미는 '넓게 만들다'나 '충분하게 하다'이다. 이 어근은 '제한되다'나 '고통을 야기시키다'를 의미하는 차라르(좁은 narrow)와 대조된다. 넓은 것은 고통으로부터의 자유와 자기 자신의 목표물을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고통에서 벗어나서 안전을 얻기 위해서는 구출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구출은 압제 당하는 사람들의 편 이외의 어떤 곳에서부터 행해져야 한다. 구약성경에서, 국가적인 것이든 개인적인 것이든, 고통의 종류에는 원수들, 전염병이나 기근 같은 자연 재해들도 포함되어 있다. 구원을 가져오시는 분은 "구세주"로 알려졌다. 그렇지만 이 말은 신학적 의미와는 무관하게, 일상생활에서 사용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모세는 우물에서, 르우엘의 딸들이 목동들에 의해 쫓겨나는 것에서부터 구해주었다(출 2:17). 그러나 일반적으로 구약성경에서 이 말은 종교적인 의미를 강하게 지닌다. 왜냐하면 구원을 행하신 이는 여호와이셨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그는 "우리 구원의 하나님"으로 알려졌다(시 68:19이하, H20이하). 비록 구원이 인간 대리자를 통해서 행해지기도 했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대리자에게 권한을 주셨다는, 오직 그 이유 때문이었다. 신약성경에서 구원의 개념은 주로 죄의 용서, 죄의 권능으로부터의 구원, 그리고 사탄의 패배를 의미한다. 비록 구약성경이 이런 방향으로 향하기 시작하긴 했지만 구원에 관한 대부분의 언급들은 여호와께서 실재적인 원수와 실재적인 재해로부터 구출해주신다는 것에 대한 것이다. (a) 구원의 종류: 여러 번, 다른 나라들의 압제를 당한 이스라엘은 자유를 얻고 계속 유지해 나가기 위해 싸우러 나가야 했다. 이 전쟁들에서, 이 민족은 도움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로 돌아섰다. 그들은 전쟁의 결과가 여호와께 속한다고 믿었다(삼상 17:47). 그래서 그들은 감히 승리의 결과를 확신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구원 행위의 초점은 애굽의 속박에서 이스라엘이 구원 받는 것이었다(출 14:30). 그리하여 그들은 여호와의 구원을 받은 백성으로 알려지게 되었다(신 33:29). 이런 구원 행위는 미래 세대들에게 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들에게도 여호와의 주권을 나타내주는 증거가 되었다(참조: 시 106:8, 삼상 4:6이하). 후에 이스라엘인들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것을 기대했을 때, 모세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너희와 함께 행하시며 너희를 위하여 너희 대적을 치고 너희를 구원하시는 자"라고 말했다(신 20:4).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 약속을 성취하셨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소유하도록 백성들을 인도하였다. 후에 이스라엘이 주변 국가들 중의 한 국가에 의해 압제 당했을 때, 하나님은 사사를 통해서 그들을 구출하셨다(삿 2:16). 일반적인 형태는 하나님께서 사사에게 자기의 영을 부여하여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쳐부수게 하는 것이었다. 후에, 왕정 하에서 이스라엘은 여호와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도움을 받은 의로운 왕에 의해 원수들을 쳐부쉈다(삼상 9:16, 시 20:6, H7). 진실한 믿음을 가진 지도자는 요나단의 말,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삼상 14:6)라는 정신으로 감히 전진해 나갔다. 하나님에게서 오는 구원은 왕의 영광이었으며 백성들에 대한 그의 권세를 확고하게 세워주었다(시 21:5, H6). 이 민족의 힘이 강해지고 명성을 떨칠 때, 왕과 백성들이, 구원은 강한 군사들에 의해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시 44:1-8, H2-9). 비록 하나님께서 구원을 행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인간 대리자를 사용하시긴 하지만, 장애물 정복은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 자신의 특별한 도우심이 있어야 할만큼 매우 극적인 것이었다(참조: 잠 21:31). 여기에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면서도 그의 백성들의 특성을 세우는, 하나님의 행동과 인간의 반응 사이의 창조적인 긴장이 있다. 때로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이 일을 행하시므로, 모든 사람들은 여호와의 강한 행동을 기다리고 바라보는 일을 해야 한다(대하 20:17, 참조: 호 1:7).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라고 하는 이런 역사적인 형태를 세움으로써, 하나님의 영으로 기름부음 받은 왕의 역할을 성취하실 미래의 구세주 개념이 생겨났다(참조: 렘 23:5이하). 구원은 공격적일 뿐만 아니라, 방어적이기도 하다. 적대적인 것이 다가올 때, 사람들은 안전한 피난처로 물러서기도 한다. 하나님은 자주 그의 백성들을 위한 이런 피난처로 간주되곤 한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시 62:7, H8). 구원을 경험한 사람은 내적 근심으로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 그가 적대 세력을 견뎌내야 할 것은 사실이나 하나님은 그의 대적들이 그를 파멸시키지 못할 것을 보증하실 것이다. 구원의 보호적 성격은 다른 개념들로 나타난다. 즉 "구원의 방패"(시 18:35, H36), "구원의 투구"(사 59:17, 엡 6:17), "구원의 옷"(사 61:10). 이처럼 구원은 단순히 전장에서의 순간적인 승리가 아니다. 이것은 또한 수많은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생명을 유지시키는데 필요한 안전과 방위 수단이기도 하다. 구약성경이 마지막 때의 하나님의 도성을 기대할 때, 구약성경은 그 도성의 벽이 '구원'이라고 불리워질 것으로 예상한다(사 60:18). 이 도시는 오직 의인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며, 이 도시는 구원을 수반하는 모든 안전을 제공해준다(사 26:1). (b) 영적인 의미: "구원하다"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주시고 개인의 성품을 변화시키심으로써 구원하신다는 점에서, 신학적인 의미를 발전시켰다. 예를 들면, "내가 그들을 그 범죄한 모든 처소에서 구원하여"(겔 37:23). 다윗은 이점을 깨닫고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시 51:14, H16, 참조: 시 79:9)라고 기도하였다. 렘 17:14에서 "구원하다" save는 "치유하다" heal와 병행된다. 즉 구원은 정서적이며 신체적인 안녕을 가져오는 역동적인 힘이 된다. (c) 구원과 의: 여호와의 모든 구원 행위는 의에 의거하고 있으며, 이것은 "의"와 "구원"이 종종 병행되어 나오곤 한다는 사실에 나타나있다(예: 사 51:8). 비록 모든 구원 행위에 심판이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심판을 받는 사람들은 죄인이며 따라서 이런 재판을 받아 마땅하다(참조: 시 76:8, H9이하). 다른 한편,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시며, 그리고 인간의 원초적인 불순종으로부터의 구원의 수단을 인간에게 제공해주심으로써, 자기 자신의 형상으로 만든 피조물인 인간에게 신실하시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구세주를 통하여, 구원자로서의 그의 책임을 이행하신다. 이리하여 여호와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으로 알려진다(사 45:21). (d) 계시된 하나님의 특성: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은 그의 우주적인 통치를 드러낸다(참조: 사 33:22). 그의 왕국이 온 세상 위에 펼쳐질 것이므로 그는 그가 원하는 누구에게든지 구원을 가져다 주신다. 더구나 구원행위는 종종 바다와 해룡으로 의인화되곤 하는 악의 권세의 목적을 파괴한다(시 74:12이하). 따라서 모든 승리는 그의 모든 백성들을 위한 마지막 구원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에게 그를 예배할 근거를 마련해준다. 즉 구원해줄 수 있는 신만이 예배를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 따라서 자주 대두되는 우상숭배에 대한 논쟁은 다른 신들에게 그들의 압제 받는 추종자들을 구원해보라고 도전하는 것이다(사 46:7, 삿 6:31). 그들이 응수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 신들이 헛되며 여호와 외에는 구세주가 없다고 고백하게 만든다는 점을 입증해준다(사 43:11, 호 13:4). 확실한 것은 구원행동이 단순한 역사와 우연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호와는 구원행동을 하시기 전에 그가 행하려고 했던 것을 계시하신다(사 43:12). 뿐만 아니라, 그는 그 일을 행하셨다는 점에서 볼 때, 자기의 말에 신실하시다. 나중에 이 행동은 해석되고 선포되었다. 게다가 구원 행동은 각 세대들이 여호와와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것이며, 그 행위에 대한 선포는 이 관계를 수립하고 계속 유지시키도록 신앙을 불러일으킨다(참조: 사 52:7). 더구나 구원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신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된다. 구원은 그의 사랑에서부터 흘러나온다(참조: 신 7:7 이하). 신실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어려울 때, 구원을 받기 위해 그에게로 돌아선다(시 6:4, H5, 시 109:26). 이처럼 구원은 행동으로 표시된 하나님의 사랑이다. 구원은 또한 그의 백성 사이에 계시는, 그리고 그의 지도자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임재에 대한 증거이기도 하다. 일을 위임 받은 많은 사람들은 특별한 방식으로 그의 임재를 약속 받았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렘 1:8, 렘 1:19, 참조: 마 28:20)고 약속하셨다. 예레미야는 후에 감옥에 갇혔으며 여러 번 그의 생명이 위협을 받았으나 그의 적대자들은 결코 그를 파멸시키지 못했다. 모세도 이 약속으로 인하여 성공하였다(출 3:12). 이처럼 그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임재하심으로써, 그들은 적과 고통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e) 백성들의 준비와 반응: 회개와 믿음: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기 위해 스스로 준비해야 한다. 고통 중에 있을 때, 인간은 기도로 하나님을 구해야 한다(예: 삿 3:9, 시 69:1, H2). 즉 그는 자기의 위급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심정으로 낮아져야 한다(참조: 욥 22:29, 시 34:18, H19).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에는 죄를 내버리는 것이 포함된다. 왜냐하면 죄는 하나님께서 곤궁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주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이다(사 59:1 이하). 인간이 일단 진심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섰다면, 그는 구원을 기다림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그의 확신을 표현해야 한다(사 30:15). 하나님은 행동하실 시기를 선택하신다. 인간은 소망 가운데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은 자기가 구원을 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때를 선택할 것이므로, 백성들이 믿음으로 어려운 상황을 견뎌내 주기를 바라신다. 사람들이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그는 적극적으로 의를 추구하며 사랑을 표현하신다(사 56:1, 호 10:12, 호 12:6). 찬양의 노래. 실제적이든, 예기적이든,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인간의 즉각적인 반응은 찬양의 노래에 있다. 홍해 구원에 바로 뒤이어 바다의 노래가 작곡되어 불리워졌다(출 15:1-8). 장차 오실 메시야에 의한 구원에 관한 이사야의 기술 다음에는 사 12장에 노래가 나오며, 세편의 종의 노래는 노래하는 것으로 끝난다. 사 42:10이하, 사 49:13이하, 사 54:1이하. 노래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는 기쁨을 나타내준다. 기쁨은 자주 하나님의 승리에 대한 인간의 내적 반응으로 언급되곤 한다(예: 시 13:5, H6). 더구나 여호와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해야 한다고 느낀다: "내가 주의 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시 40:10, H11).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은 생을 의미와 기쁨으로 가득채운다. (e) 미래의 구원: 이스라엘이 포로지에서 돌아온다는 사실은 구원의 언어로 예기되었다. 여호와는 "내가 너를 원방에서 구원하리라"(렘 30:10, 슥 8:7)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백성들을 자기의 양떼로 생각하시므로, 그는 "내가 내 양떼를 구원하여 그들로 다시는 노략거리가 되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선언한다(겔 34:22). 여호와 외에는 구원이 없으므로, 그는 초대를 확장하여, "땅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사 45:22, 참조: 시 67:2, H3)고 말씀하신다. 선지자들은 구원이 만방에 효력을 미쳐 영원히 지속될 날을 고대한다. 이사야는 이 구원이 고통 당하는 종을 통해서 올 것으로 예상한다. 이 종이 고난을 참는데 까지 순종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내가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구원을 베풀어서 땅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 49:6)고 약속하신다. 바꿔 말하면, 구약성경에서의 구원 행동들은 모든 백성들을 구원의 가능한 축복아래에 포함시킬 마지막 구원 행동을 위해 이룩된 것이다(사 52:10). (참조: J. E. HARTLEY; BDB). ----------- h[;Wvy](3444, 예슈아) 구원, 구출 예슈아(명여)는 야샤([v'y: , 3467: 구원하다, 해방시키다)에서 유래했으며, '구원, 구조 salvation, 구출 deliverance'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78회 나온다. (a) '복리, 번영'(욥 30:15). (b) '구조, 도움'(삼하 10:11, 대상 19:12). (c) 하나님에 의한 '구원'(창 49:18, 사 33:2, 사 52:7, 사 52:10, 사 59:11, 욜 2:10, 시 53:6 등). (d) '승리'(삼상 14:45, 대하 20:17, 사 26:18, 출 15:2, 합 3:8, 시 20:5, 시 44:4 등). (참조: BDB; Gesenius). =========== 제80편 아삽의 시, 영장으로 소산님에둣에 맞춘 노래 1.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 시78:67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시81:5 하나님이 애굽 땅을 치러 나가시던 때에 요셉의 족속 중에 이를 증거로 세우셨도다 거기서 내가 알지 못하던 말씀을 들었나니 시95:7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 시77:20 주의 백성을 무리 양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 시99:1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요동할 것이로다 출25: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삼상4:4 이에 백성이 실로에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 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 있었더라 삼하6:2 일어나서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름하는 것이라 시50:2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발하셨도다 ------------- 2.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주의 능력을 나타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 민2:18 서편에는 에브라임의 군대의 진 기가 있을 것이라 에브라임 자손의 족장은 암미훗의 아들 엘리사마요 시35:23 나의 하나님 나의 주여, 떨치고 깨셔서 나를 공판하시며 나의 송사를 다스리소서 시118:14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요 또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 시118:21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 3.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 시80:19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시60:1 (다윗이 교훈하기 위하여 지은 믹담. 영장으로 수산에둣에 맞춘 노래. 다윗이 아람 나하라임과 아람소바와 싸우는 중에 요압이 돌아와 에돔을 염곡에서 쳐서 일만 이천인을 죽인 때에)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부시키소서 시85:4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분노를 그치소서 애5:21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 가겠사오니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민6:25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시4:6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 4.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 --------- 시59:5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일어나 열방을 벌하소서 무릇 간사한 악인을 긍휼히 여기지 마소서 셀라 시74:10 하나님이여, 대적이 언제까지 훼방하겠으며 원수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능욕하리이까 시79:5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진노가 불붙듯 하시리이까 ---------- 5. 주께서 그들에게 눈물의 양식을 먹이시며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 시42:3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시102:9 나는 재를 량식 같이 먹으며 나의 마심에는 눈물을 섞었사오니 왕상22:27 말하기를 왕의 말씀이 이 놈을 옥에 가두고 내가 평안히 돌아올때 까지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로 먹이라 하라 사30:20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 6. 우리를 우리 이웃에게 다툼 거리가 되게 하시니 우리 원수들이 서로 비웃나이다 --------- 시44:13 주께서 우리로 이웃에게 욕을 당케 하시니 둘러 있는 자가 조소하고 조롱하나이다 --------- 7.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8.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 사5:1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사27:2 그 날에 너희는 아름다운 포도원을 두고 노래를 부를지어다 렘2:21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 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 렘12:10 많은 목자가 내 포도원을 훼파하며 내 분깃을 유린하여 나의 락토로 황무지를 만들었도다 겔17:6 그것이 자라며 퍼져서 높지 아니한 포도나무 곧 굵은 가지와 가는 가지가 난 포도나무가 되어 그 가지는 독수리를 향하였고 그 뿌리는 독수리의 아래 있었더라 마21:33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막12:1 예수께서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즙 짜는 구유 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눅20:9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요15: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시44:2 주께서 주의 손으로 열방을 쫓으시고 열조를 심으시며 주께서 민족들은 괴롭게 하시고 열조는 번성케 하셨나이다 ----------- 9. 주께서 그 앞서 가꾸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가득하며 --------- 수24:12 내가 왕벌을 너희 앞에 보내어 그 아모리 사람의 두 왕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게 하였나니 너희 칼로나 너희 활로나 이같이 한 것이 아니며 ---------- 10.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11.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 시72:8 저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리니 ------------- 12.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 시89:40 저의 모든 울타리를 파괴하시며 그 보장을 훼파하셨으므로 사5:5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 것을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케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 13. 숲 속의 멧돼지들이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 ---------- 렘5:6 그러므로 수풀에서 나오는 사자가 그들을 죽이며 사막의 이리가 그들을 멸하며 표범이 성읍들을 엿보온즉 그리로 나오는 자마다 찢기오리니 이는 그들의 허물이 많고 패역이 심함이니이다 ---------- 14.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돌보소서 -------- 사63:15 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시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주의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와 긍휼이 내게 그쳤나이다 ---------- 15.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 창49:22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출4: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호11:1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 ---------- 16. 그것이 불타고 베임을 당하며 주의 면책으로 말미암아 멸망하오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