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분별하는가 === 릭 워렌 - 잠 14:12, 요일 4:1, 요 7:17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12).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요일 4:1).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7). 우리 주변에 수많은 소리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AM/FM 라디오, 휴대폰, 인터넷 전파 등 무수한 소리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파수를 맞추지 못한다면,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께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 하지만, 그 주파수를 맞추지 않으면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또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잘못된 채널로 주파수를 맞춘다면 다른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생각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사탄이나 자신으로부터 온 것인지 구별할 수 없습니다. 만약 개인의 소망이나 사탄의 생각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과 혼동한다면 결과는 치명적이 되고 말 것입니다. 잠언에서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저는 텍사스에 사는 한 여인이 어린 두 자녀를 돌로 쳐서 죽인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법정에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한 순간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지만, 또 한 순간은 사탄일 수도 있고 다른 한 순간은 우리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것을 분별하는 방법은 더욱 중요합니다. 요한일서 4장 1절은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6장을 읽어 보면,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빨리 돌변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한 순간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라며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각이라고 칭찬하십니다. 그러나 불과 몇 분 후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시겠다고 하자,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22)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즉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하고 꾸짖으십니다. 그것은 사단으로부터 온 생각인 것입니다. 불과 몇 분 사이에 서로 상반되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이런 일은 우리에게도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7장 17절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우리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어떤 착상을 시험해 보는 7가지 방법을 살펴볼 것입니다. 이를 모두 통과해야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하나라도 맞지 않다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닙니다. 1. 성경과 일치합니까? 이것이 우리에게 떠오르는 생각을 시험해 보는 첫 번째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이미 말씀해 놓으신 것과 모순이 되는 말씀을 결코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변함이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1장에서 예수님께서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33)고 말씀하십니다. 잠언 12장 19절은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되거니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한 번 참된 것이면, 지금까지도 참된 것이고 영원히 참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진리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4,000년, 2,000년, 1,000년, 50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변함없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것이 참되다면, 5,000년 후에도 참될 것입니다. 진리는 시험의 때를 견디기 때문입니다. 유행은 변합니다. 치료법도 변합니다. 시대 풍조나 대중적 견해도 변합니다. 과학조차 변합니다. 20년 전에 씌어진 과학책들은 이미 낡은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신 후 나중에 ‘마음이 바뀌었단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세금을 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세금으로 낼 돈을 조금 떼어내 저축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결혼한 배우자와 성관계를 가질 것을 말씀하셨다면, 우리가 원하는 다른 누군가와 성관계를 맺어도 괜찮다고 결코 말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바울은 신약 성경을 통해 성경과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이 바울 자신이라고 할지라도 그 말을 듣지 말라고 했습니다. 비록 천사가 나타나 “내가 새 계시를 가져왔어. 성경, 그건 너무 낡았어. 이제 성경에 이런저런 새 것을 추가해야 해”라고 말한다고 해도 무시하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8절은 “우리(including myself)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이비 종파들은 천사들이 와서 ‘성경으론 불충분해, 또 다른 책이 필요해’라고 말했다는 주장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틀렸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필요한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성경에 우리가 암송해야 할 개인적인 삶과 관계된 구절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착상이 떠올랐을 때, 성경과 일치하는지 아닌지 살펴봐야 합니다. 성경을 잘 모른다면 사탄의 온갖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수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많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2. 당신을 그리스도와 더욱 닮게 해줍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들을 측정해 볼 수 있는 기준이 되십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으뜸 되는 목적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닮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후서 10장 5절은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성품과 행동에서 예수님을 닮게 하려는 그분의 목적에 위배되는 생각이나 느낌을 주시지 않습니다. 야고보서 3장 14절과 17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착상과 그렇지 않은 착상에 대해 좋은 대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먼저 1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만약 어떤 착상이 누군가에게 보복하려는 것이라면, 무엇을 사거나 행하는 것이 시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이런 생각이나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매우 강렬한 느낌을 주지만,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이기적인 야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욱 이기적으로 만드는 착상을 주시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더욱 잘 섬기게 하는 착상을 주십니다.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온 착상을 알 수 있는 목록표를 살펴보겠습니다. 17절 말씀을 읽어 봅시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따라서 이 말씀은 대조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착상을 받았을 때, 불결한 것이라면 결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너무 단순하게 여겨지는 시험법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만나는 많은 사람들이 성결치 못한 착상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스스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 목록을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화평을 추구합니까? 하나님께서 조화를 도모하는 착상을 주시지 충돌케 하는 착상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관용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받은 착상으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혼란스럽게 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것은 양순합니까? 이것은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말은 아닙니다. 쉽게 말하면 그것은 겸손합니까? 가르침을 잘 듣는 것입니까? 교만하지 않습니까? 정말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 들었다면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그에 대한 그들의 평가를 받음으로써, 그것을 시험해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거꾸로 우리는 언제나 오만하고 교만해서 다른 사람들의 말을 전혀 귀담아 듣지 않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까? 그들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모두 자신들의 생각입니다. 그것은 긍휼이 가득합니까? 저는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말하지만,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며 부정적인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았습니다. 목회자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듣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의 편견이나 분노에서 나온 소리들을 들었을 뿐입니다.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 듣는다면 긍휼이 가득할 것입니다. 또 편벽과 거짓이 없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속이거나 조종하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3. 교회의 가족들이 확증하는 것입니까? 잘 아시는 것처럼, 우리는 삶의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도와줄 다른 경건한 사람들의 지혜와 상담과 충고를 필요로 합니다. 삶의 해답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매번 올바른 결정을 내릴 줄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의 가족들을 필요로 합니다. 에베소서 3장 10절은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그분의 몸된 교회, 가족, 양떼, 모두에게 나눠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말로 무언가 말씀하셨다면, 다른 성숙한 성도들이 그것을 확증해 줄 것입니다. 그들이 확증해 주지 않는다면,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 의심해 볼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오랫동안 믿은 성도들에게, 우리가 받은 착상에 대해 질문해 봐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고 싶지 않은 저항감을 느낀다면, 마귀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개인뿐 아니라 몸된 교회에도 말씀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성경을 읽는 중에 어떤 구절에서 무언가 알게 되었는데 그때까지 아무도 그 사실을 알아챈 사람이 없었다면, 그 전에 아무도 한 적이 없는 해석을 했다면 틀린 것이 됩니다. 수없이 많은 경건하고 성숙한 성도들이 수천 년 동안 성경을 읽어왔기에, 그들이 알지 못한 새로운 것이 있다면 참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은 착상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시험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잠언 11장 9절에서 “의인은 그 지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해주는 친한 친구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 의인들의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성장하려고 노력하는 신실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충고가 우리의 시간, 돈, 정력을 구해 주며 실수, 실패, 위험, 당황으로부터 구해 줍니다. 저는 삶에서 다른 경건한 사람들이 “이 점을 생각해 봤나요?”라거나 “이 점을 충분히 고려해 봤나요?”라고 말해주었기 때문에 잘못된 결정에서 구원받은 적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다른 성도들을 필요로 하고, 소그룹 활동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랜 기간 목회를 해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삶에서 실패하는 두 가지 큰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첫째, 그들은 영적으로 성숙한 친구들을 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둘째, 그런 친구들을 두고 있다고 해도 친구들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일전에 말했지만, 소그룹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참으로 가엾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얇은 얼음판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꼴이기 때문입니다.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불충분한 자신의 지혜와 판단만으로 삶을 헤쳐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잠언 11장 14절은 “모사가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인생에서 실수를 줄이고 싶다면 이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먼저 저는 “모사가 많으면”이란 구절을 설명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한 조언자를 찾아갔다가 그의 조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마음에 드는 대답을 들을 때가지 계속 다른 조언자를 찾아다니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목회자로 있는 동안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들의 질문에 저는 성경 말씀으로 대답해 줍니다. 그러나 그들은 만족하지 않고 다른 교회로 갑니다. 그 교회 목회자도 똑같이 성경 말씀에서 가르치는 바를 알려줍니다. 그러면 그들은 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교회로 갑니다. 이 교회 저 교회로 계속 떠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진리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답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 당신을 조성하신 것과 일치합니까?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우리가 어떤 기여를 하기 원하시는지에 대해 계획하시고 그에 맞게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것은 능력, 마음, 열정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 필요한 모든 요소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위해 우리를 조성하시고 설계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은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방법에 일치하는 착상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빚어진 형태(shape)는 우리의 목적을 그대로 드러내 줄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6절은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누가 음악에 소질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음악에서 은사를 발휘하도록 인도하시는 착상을 주실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빚으신 형태와 반대되는 착상을 받는다면, 그것을 무시해도 좋습니다. 우리는 항상 자신에게 맞지 않는 무엇인가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것과 모순이 되도록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5. 우리의 책임과 관련된 것입니까? 만약 어떤 것이 우리의 책임이 아니라면, 그에 대해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이것은 정말 훌륭한 진단법이 됩니다. 한 번은 대화 중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어떻게 죽게 될 것인지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요한을 바라보며 ‘이 친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물어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요한복음 21장 22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가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다른 말로 우리의 일에나 좀더 힘쓰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거나 그들의 일에 안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의 삶에 관계된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남편이나 아내에게, 남자 친구나 여자 친구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 위해 하나님께 귀 기울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누군가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가정하는 것은 너무나 주제넘은 일입니다. 대체로 우리는 자신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조차 모를 때가 많이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4절은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자신의 책임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시기를…’이라는 말이 남용되고 요용돼 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삶에 너무 많은 피해를 주면서 문제를 일으켜 왔습니다. 간혹 ‘하나님께서 내게 당신의 은밀한 죄를 말하라고 하셨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본인이 알고 있는 것이라면, 도대체 다른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 필요가 있을까요?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과의 직통 회선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책임만 살피면 됩니다. 간혹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항상 우리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태에서 말씀하십니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른 누군가에 대해 말씀하신다면, 그것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에게 말씀하신 사실을 확증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일은 목회자인 저에게 자주 일어납니다. 매우 드물게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께 귀 기울이지 않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걱정하면서 들은 것들을 크게 말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아주 많이 참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먼저 말씀하실 기회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우리 생애에 그리 자주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6. 정죄하기보다 죄를 깨닫게 합니까? 저는 다음 두 가지의 차이점을 설명하고 싶습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정죄와 죄책감을 하나님의 음성인 것으로 생각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귀의 음성입니다. 죄를 깨닫게 하는 것(conviction)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러나 정죄(condemnation)는 마귀로부터 옵니다.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은 정상 상태에서 벗어난 것을 바로 잡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정죄는 우리를 의기소침하게 만들고 비참함과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죄를 깨닫게 하는 것 뒤에 있는 동기는 우리로 하여금 보다 바람직해지도록 도와주려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정죄 뒤에 있는 동기는 우리의 존재를 증오하며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려는 사탄의 계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서 죄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 매우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정죄는 총체적입니다. ‘그땐 네가 교만했어, 너무 조급했구나, 과장했구나’라는 것은 죄를 깨닫게 합니다. 우리가 막연하게 ‘무능력해, 잘 하는 게 없어’라고 느낀다면 그것은 정죄하는 일이 됩니다. 또 죄를 깨닫게 해 주는 느낌은 아주 짧게 남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받아들이고 ‘하나님, 변화되도록 도와주세요’라고 고백한다면 그 느낌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정죄가 주는 느낌은 몇 주, 몇 달, 몇 해 동안 계속됩니다. 죄를 고백하고도 그 느낌이 지속된다면 사탄이 준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절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존재 가치를 결코 공격하시지 않습니다. ‘넌, 가망이 없어! 가치가 없어! 쓰레기 같구나! 사랑받을 자격도 없구나’라는 음성을 듣는다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용서받기 위해 단 한 번 기도하면 됩니다. 계속 남아 있는 죄책감으로 인해 오늘도 내일도 다음 날도 고백한다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것을 믿지 않는 꼴이 됩니다. 인간의 법정 체계와 하나님의 법정 체계는 다릅니다. 인간의 법정에선 먼저 유죄를 선언한 다음에 형벌을 선고합니다. 유죄 선언과 형벌 선고의 두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정은 세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먼저 잘못한 것에 대해 유죄를 선언 받습니다. 다음으로 유죄를 선언 받은 자는 그것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죄인의 형벌을 모두 가져가 버리십니다. 마지막으로 그런 사람은 용서함을 받고 자유의 몸이 되어 법정을 나서게 됩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저는 인간의 법정보다 하나님의 법정을 더욱 좋아합니다. 우리는 얼마 동안 죄책감을 느껴야 합니까? 아마 1나노(nano) 초 정도일 것입니다. 하나님께 잘못을 빌고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할 때까지입니다. 죄책감을 많이 느낄수록 더 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책감이 아닌 감사의 마음으로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우리 자신과 그 잘못에 대해 주목하기보다 예수님과 십자가를 주목하길 원하십니다. 그러면 감사가 넘칠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저지르기 전에 사탄은 ‘별 거 아냐, 모두 다 그러는 걸’하면서 범죄 사실을 축소시켜 버립니다. 그러나 죄를 저지르고 나면 전략을 완전히 바꿔서 ‘넌, 죄가 엄청나서 하나님께 결코 복을 받을 수 없어. 넌, 크리스천도 아니야. 인간 쓰레기에 불과해’하면서 죄책감을 극대화시킵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방식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정죄함도 없음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7. 그에 대해 하나님의 평화를 느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떤 착상을 받고 압박감을 느끼거나 압도함을 느끼고 혹 혼란함을 느낀다면,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의심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평화를 느끼고 알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33절은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압박감 속에서 살아가길 원치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날마다 그분의 평화를 누리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압박감을 느껴도 되는 유일한 때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아직 못하고 있을 때뿐입니다. 압박감의 또 다른 말은 ‘염려’입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은 염려가 결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염려는 삶에 압박감만 줍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착상의 분명한 표시 가운데 하나는 우리로 하여금 갑자기 평화를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휘몰아치는 삶의 곤경 한가운데서도 말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대한 연재를 마감하면서, 처음에 말씀을 드렸던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이상으로 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겨야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줘야 합니다. 이 세 가지는 크리스천 삶의 세 부분입니다. 세 가지를 모두 행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듣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이미 들은 것을 실천에 옮기거나 전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첫째 되는 진리를 행하고 전하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둘째 되는 진리를 가르쳐 주실 리 없습니다. 제 생각에 아마 우리는 하나님께 귀 기울이는 데 가장 강하고, 들은 것을 전하는 데 가장 약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크리스천들에게 문제는 하나님께 귀 기울이는 일만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들은 것을 실천에 옮기고 전하는 것도 잘하는 사람에게 계속해 말씀하시길 원하십니다. 누군가 제게 와서 ‘목사님, 저는 하나님의 음성을 종종 들었는데, 정말 확실한 거였어요. 그런데 이제 더 이상 듣지 못해요”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회선이 다소 정지된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죄로 막아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구하면 알려주실 겁니다. 그래서 그 죄를 제거하면 다시 채널이 개통되고 그분의 음성을 훨씬 더 잘 듣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도 제게 말씀하신 적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성경은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요 8:47)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번도 하나님으로부터 무언가 들어본 적이 없다면 ‘정말 구원받았는가? 내가 죽으면 정말 천국에 갈 것인가?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가?’하고 자문해 보십시오. 당장 하나라도 쉽게 대답할 수 없다면, 저를 따라 기도하셔도 됩니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씀해 보십시오. ‘하나님, 당신의 음성을 듣기 원합니다. 저의 삶에서 원하시는 것,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알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실천하며, 전하길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제게 더 많은 것을 말씀하시길 원합니다. 하나님께 귀 기울이면서 일곱 가지 시험법을 사용하도록 도와주십시오.’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 당신의 삶을 한 번도 열어본 적이 없다면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님, 제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저의 삶을 엽니다. 제게 오셔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저의 삶을 변화시켜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