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8.10.02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거룩한(영적)독서의 단계와 관상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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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의 단계**관련단어들--awaken(일깨움-각성arouse,wake up, 깨달음-깨우침-자각open eyes), being aware of(알아차림, 감지함,인지함, 직각-직감-직관적 앎intuition)enlighten(명백히 가르침, 계몽-조명-지식이나 정보를 줌), teach(가르침)-record(기록)-remember(기억), meditation묵상 (lectio, meditate, oratio), contemplatio관상

1 . 읽기(Lectio) : 말씀을 수차례 귀에 들리도록 낭독함-천천히 맛보고 음미하며 낭독함으로써 마음을 열고 온존재를 기울여 읽고 경청하여 들음(10분)
-  거룩한 독서의 첫째 단계는 독서 혹은 읽기이다. 재료나 방법에 있어, 이것은 통독이나 단순한 정독과 달리 평범한 독서가 아니다. 그 재료는 하나님 말씀 또는 성경이며, 독서 방법은 좀 더 정확하게는 들음이나 귀 기울임으로, 영감 받은 말씀에 마음의 귀를 기울여 말씀하시는 분을 만나고, 믿음으로 직접 보며 경청하는 것이다.(=로고스가 레마 되게 함)
  오늘날 우리는 성경를 영감 받은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는 의미에 관하여 예전보다 좀 더 폭넓게 이해하고 있다. 한때 그 구절은 성경 저자들이 직접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썼다.  일종의 신성한 받아쓰기- 는 제한된 의미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약속하신 대로 성부께서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 안에 살도록 보내주신 성령은 성경 말씀을 살아 있게 하는 같은 성령이시다. 말씀과 내 안에 현존하시는 이 성령께 대한 나의 활발한 믿음이, 성경을 읽고 들을 때, 말씀하시는 분의 살아 있는 실재를 성경 안에 불어 넣어주고 또한  그 안에서 숨쉬게 한다.
  그러므로 이 거룩한 독서를 준비하기 위해 내 몸과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내 온존재를 한 초점-말씀에 맞추기 시작한다.   몸에 관하여 동서양의 모든 기도 수련에서 공통되는 일관된 원리는 등을 똑바로 세우지만 긴장하지 않는 것이다.   다리를 접거나 포개서,  마루나 방석에 앉든, 혹은 똑바로 의자에 앉든 간에, 그 기본 의도는 혈액순환이나 호흡을 방해하지 않고, 반면에 충분히 집중하고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이런 모든 준비들은 나와 하나되어 현존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한다는 믿음을 확고히 하고 깨닫도록 돕는 수단이다.  이러한 마음 자세로 성경말씀을 선택하는데, 짧은 성경 구절이 더 좋다. 그리고 '천천히' 읽으면서, 온전히 주의를 기울여 마음으로 듣는다.  이것은 이미 정신과 마음을 당신께로 열도록 나를 부르시는 그분께 대한 내 응답의 시작이다.  때때로 나를 사로잡는 성경구절은 이미 나의 가슴에 충격을 주었던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요 근래 성례에서 제시된 구절일 수도 있다.  또는 주제별 성경구절을 이용할 수도 있다.   전체적으로, 렉티오에 있어서 내 목표는 말씀들을 인격화하고 현실화하여, 마치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말씀하고 계신다고 여기게 하는 것이다.
  한 예로, 주제별 성경구절에서 뉘우침과 자비 중의 사65:1-2가 나를 사로잡았다고 가정해 보자. 앞서 제시한 준비 후에, 나는 읽기(Lectio)를 시작한다. 그리고 나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좇아 불선한 길을 행하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사 65,1-2).>
-  내가 믿음을 갖고 이 말씀을 들을 때, 비록 짧은 성경구절이지만 주님께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말씀하시기에, 나는 이 성경 말씀으로 돌아갈 때마다 매번 다른 의미와 중요성을 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비록 내가 이기심이라는 불순함을 지니고 찾더라도, 그분은 당신을 찾도록 '허락 하신다' 는 깨달음이 나를 후려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갑자기 보잘 것 없음과 감사의 느낌을 내 안에 일깨운다. 혹은 <나 여기 있다>는 세 단어는 예기치 않게 곧장 울려 퍼져, 나로 하여금 그분의 항구한 현존을 새롭게 깨닫게 한다.
  성경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유일한 분을 받아들이고 단어 자체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 너머를 듣는 것이다. 마치 다른 사람이 말하면 단순한 상투어에 불과할 수도 있는 그 말을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진정성의 무게를 싣고서 내게 말할 때 그것은 완전히 다른 말이 되듯이, 단어들을 살아있게 하는 성령은 그 단어들을 '통하여' 표현되는 것 이상의 의미 그 자체이다. 똑같은 성경구절을 듣는 각 사람들이 저마다 완전히 고유한 자기 방식으로, 아주 빈번하게 내가 전에는 전혀 기대하거나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들을 때 그러하다.
  예를 들어 앞에서 제시한 성경구절에 잠재되어 있는 무수한 은총이 여기서 드러날 수 있다. 이것은 거저 주어지며 내 자신의 논리적 추리의 산물이 아니기 때문에, 그 단어들이 '나를 감동시키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때 나는 단지 평화롭게 <나 여기 있다>와 같은 한 구절을 택하여 나의 의식 속에서 계속 되뇌이고,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일 뿐이다. 이런 식으로 단순하게 사랑과 신뢰의 상태에서 주님과 '함께 있음'으로 참으로 흡족할 것이며, 특별히 이 때 말씀하시는 분을 위해서 내 자신이 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고 또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실제로 이 깨달음은 이 기도 시간의 참된 열매일 수 있다. 이 때가 바로 관상으로 들어감의 초입단계인 기도(Oratio)가 된다. 그러나 반복적인 읽기 속에서 특별히 하나님께서 마음에 떠 올려주시는 단어나 구절에 집중하여서, 나의 지성을 성령께 맡겨서 그분의 조명하에 그 의미(느낌과 이미지)를 성찰하기 시작하면, 그 때는 렉티오의 다음 단계인 묵상으로 들어가게 된다.
2. 묵상(Meditatio-5분) : 성령의 인도와 조명하에 지성(상상과 기억-지식)과 감성을 동원하여, 기록된 말씀으로 이미 계시된 그분을 더 잘 알고 존귀하신 그분께 합당하도록 사랑하며 순종하기 위해 -- 마음에 부딛혀 오는, 내게 주신 <단어나 구절>을 반복해 읊조리며 그것에 대한 느낌-이미지-생각들을 상하전후좌우 다각도로 되씹어 성찰함. 곧 말씀이 마음을 비추어 드러냄
-  앞에서 거룩한 독서를 서로간의 관계를 심화시키는 것으로 기술하였다. 이 과정에서, 읽기(Lectio)의 역할은 단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사랑하고 신뢰하는 다른 인격을 진실되게 만나러 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설명하였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우리의 사랑과 신뢰를 주고받음이, 우리의 상호관계를 성장하게 하고 더 심화시킬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내 생활에 공간을 만들고 하나님께 나아간다.
  이제 그분에 대한 이 열망은 나를 그분의 의미를 음미하게 하는 묵상으로  끌어당김으로써, 나는 그분에 관해서 좀 더 알고 싶고, 더 큰 신뢰와 확신을 갖고 내 삶 속에 그분을 받아들여 그분께 나를 열어드리고자 한다. 나는 그분이 참으로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알고 싶고, 그분이 나에게 이미 주신 말씀가운데에 계시하는 것을 알고 싶다. 이 계시에 관해 다음과 같이 빗대어 설명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책방에 가서 그리스어나 일본어, 혹은 히브리어로 쓰여진 책을 보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나는 그 언어를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뒤에서 앞으로 읽는지, 아래에서 위로 읽는지, 혹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지 조차 모른다. 내가 얼마나 이해하고 싶은가와는 상관없이, 내게 그 책은 이른바 '닫혀진 책'이다. 그러나 한 점원이 우연히 내 어려움을 알아채고 자원해서 한글로 번역된 책을 건네준다면, 나는 즉시 각 페이지에서 전달하는 의미와 접촉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또 다른 언어'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유한한 지성과 이해로는 그분의 완전함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은 예수님 안에서 자신을 우리의 인성(지성과 감성을 지닌, 이해 가능한 분)으로 번역하여 나타내 주셨다. 우리가 함께 나누는 인간의 삶을 가능한 한 가장 깊이까지 살고 체험하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은 살과 피로 나에게 드러나 계신다. 예수님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 '이다'. 그리고 단지 역사 속에서 살다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지금 내 세계에, 내 마음 안에,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으로, 내가 알고 사랑할 수 있는 한 인간으로 드러난 계시 '이다.' 또한 약속하신 성령의 선물을 통하여, 그 선물은 이미 주어졌다. 그분은 참으로 나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여기서 여러분들이 읽기를 잠시 멈추고, 아래에 제시된 요한복음 14장의 주목할 만한 구절을 잠간동안 깊은 믿음으로 묵상하고, 마치 처음으로 '여러분에게 직접 일러주시는' 것처럼 들으라고 제안한다. 이렇게 개별화하는 일을 강조하기 위해서, 별표 안에 여러분들의 이름을 넣으면 좋겠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 없습니다. 그대들이(★)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분을 알게 되었고 또 그분을 뵈었습니다 (요 14:5-7절).> <그리고 나는 아버지께 청하겠습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영원히 함께 계실 다른 협조자를 그대들에게 붙여 주실 것입니다.그분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세상은 그분을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그대들은(★) 그분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그대들과 함께 머물고 그대들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요 14:16-17절)>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서 보내실 협조자 성령(=예수의 영=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내가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해 주실 것입니다(요 14:26절)>
*** 기도(Oratio)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들어가고 있는 신앙의 차원에 관하여<나는 이미 계시되어진 살아계신-전지전능하신-거룩하신-사랑이신-제한받지 않으시는 영이신 참 하나님을 만나뵙는 것이며, 기도하는 내가 참 나이기를 -  즉 마음에 은혜의 보혈의 피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돌아보아 깨닫게 하시는 죄를 남김없이 회개하고, 몸을 말씀의 맑은 물로 씻으며 은혜의 보혈을 의지하여 그분만 갈망하는 참 마음과 확신과 신뢰의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고 있는지(히10:22)> 자신의 영혼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모세가 불타는 떨기에 가까이 갔을 때, 그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출 3:5-6) > 이와 비슷한 내적 혹은 외적 방법을 취할 때, 우리 역시 우리가 다가가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인정해야 한다. 그 때 우리는 기도 중에 의식적으로 그분 앞에 나올 수 있게 하는 신앙의 선물이 지닌 경이로움과 신비를 알아차리게 된다. 묵상 중에, '하나님과 교통' 이 물론 가능하다고 자주 습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가! 그러므로 시작할 때부터 기도는 언제나 성령의 사랑어린 주도권에 따라 선물로 받은 '응답' 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것(현실화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모든 기도는 그분의 선물이므로, 우리가 구하는 바를 예수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적절하다. 위에 제시한 요한복음의 인용구절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듣고 깨닫기 위하여 내 정신과 마음을 여는 방법(=말씀과 이미 내주하시는 성령을 겸손히 의지하는 믿음)을 깊이 가르쳐 주시도록 성령께 간청함으로써 예수님의 그 약속 이룸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또한 더불어 평소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곧, 하나님의 성품과 이름에 대한 묵상이 중요하다.)
 -- 묵상의 방법은 주님과 각 사람의 기도 관계 만큼이나 고유하다. 개인 은사들이 다양하다는 것이 하나의 근거이다.  상상력이 잘 발달되고 활성화된 사람들일 경우, 상상을 이용하면 그들의 묵상을 생생하게 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받을 것이다.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서는 이러한 접근법을, 즉 상상을 이용한 묵상을 (*비록 우리가 사용하는 고전적 의미의 관상과는 다르지만) 관상(contemplatio)라고 나름대로 부르는데, 상상력을 통하여 복음서의 시대적 장면 속으로 들어가서 사람들을 보고, 듣고, 주위 환경을 만지고, 냄새 맡는다고 상상한다. 그 장면에 나오는 사람들과 나를 동일시하거나, 내 자신이 거기에 머물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고, 듣고, 체험하는 것이다. 방금 인용한 요한복음서의 발췌구절을 예로 들면, 내 상상력을 동원하여 무대를 재설정해 본다 -이 장면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마지막 만찬을 가지신다. 그리고 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고, '내 눈으로 그분의 응시를 받아들인다. 그분이 그 자리에 함께 참여한 나에게 말씀하실 때 내 눈으로 무엇을 보는가? 그리고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상상력이 활성화되거나 잘 발달되지 않은 대신 좀 더 직관적인 사람은 그 구절 자체에서 진리나 내적 통찰을 음미함으로써 더욱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확고한 사랑이 심저를 깊이 꿰뚫을 때까지, 그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 그 말씀을 천천히 거듭거듭 되풀이함으로써(읊조림으로써) 예수께서 지금 말씀하고 계신 내용을 깊이 내면화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응답하게 된다.
--  우리가 기도에 어떻게 접근하든 간에, 기본원리는 다음과 같다. 1900년대 초기에 활동했던 저명한 베네딕도회의 영성지도자 돔 체프만은 이것을 간결하게 요약했다. <네가 할 수 있는 대로 기도하라. 할 수 없는 것은 하지 말라. >참되고 진실할 때, 가장 단순한 단어나 말은 (혹은 가슴이 너무 벅차면 전혀 말이 없을 수도 있다.) 날조되고 빌려온 최고로 과장된 웅변술보다 확실히 더 웅변적이다. 그리고 가장 명백한 것은, 그러나 분명하기에 아마도 쉽게 간과될 수 있지만, 성령께서 내게 기도를 직접 가르쳐 주시도록 자주 '청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마음이 감화를 받아 불이 붙을 때까지 하나님의 시선 아래에서 읽으십시오.-프랑스의 베네딕트회 수도사 마흐미옹(Marmion)
  나는 이 '묵상' 부분을 더 이상 펼쳐나가지 않고 여기서 끝내려고 한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묵상은 내적 움직임이고 우리 존재의 자발성과 실제성에 따라 그것의 모든 진정성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오직 성령만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칠 수 있다. 그 밖의 사람들이 제공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가 성령의 가르침을 체험적으로 '받아들이도록' 도와줄 뿐이다. 사랑 안에 있음이라는 우리의 근원적인 비유로 돌아가면, 우리에게 사랑하기를 가르치는 것은 사랑이고, 그것은 어떠한 객관적인 방법을 따르지 않는다.
  하나님의 이 사랑이 우리 마음에 와 닿을 때, 우리는 기도(0ratio)라는 다음 단계로 끌려 들어간다. 이전의 모든 것들은 준비 과정이며, 이 단계가 진정한 기도의 시작이다.
3. 기도(Oratio-5분) : 말씀이 마음을 건드림-그 단어나 구절을 주신 하나님께 그분의 생각을 직접 말씀해 주시도록 요청하고 잠잠히 들음으로써 대화를 나눔, 주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마음으로 토로하며, 삶에 적용하여 순종하기로 고백하고 결심하여 올려드림.  이어서 이제 말씀하시는<하나님 그분 자신과 하나되어 사랑하며 누리기>인 마음의 기도-향심기도와 관상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  앞 부분의 주제인 묵상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형성되어 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우리는 묵상을 통해 모든 피조물 안에서, 그리고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 묵상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친밀함,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키우고 풍요롭게 하며, 사랑과 섬김으로 부르시는 그분의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해야 되는지를 성찰하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이 모든 것은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닐 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요한 믿음과 신념의 본질적인 기초를 확립하도록 돕는다.
  그러나 묵상은 주로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지적 활동과 상상이므로, 만약 묵상이 지성적 차원에만 머물러 있다면 참된 기도에 도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의 목표는, 비록 최고라 할지라도, 하나님에 '관한' 사고나 개념, 혹은 지식이 아니라, 내 가장 깊은 곳, 참 자아 안에 신비스럽게 숨어계시는 그분,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리라. 신비가들의 말로는, <하나님은 나의 나이다(God is my me).>

  ###이 자아의 가장 깊은 중심인 우리의 영은 관상(Contemplacio-10분)의 영역,  혹은 마음의 기도의 영역인데 거기에 이르는 길의 시작에 대해 지금부터 고찰하고자 한다. 이 시작은 우리 자신의 계획에 따라 미리 결정되는 것이 아니므로, 어떤 지침 -마치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어떤 것을 '하고' 나서 다음에 할 것이 이어지는- 을 따르지 않는다. 그것은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응답할 때 마침내 마음에서 자발적인 어떤 움직임이(=성령의 운행하심에 따른 사랑자체이신 그분에 대한 깊은 내적 갈망이) 일어나는 것을 심령 깊은데서부터 겸손히(=주 밖에 의지할자 없으며, 홀로 설 수 없으며, 연약하며, 나약하며, 부족하며, 힘 없고 무능력하며 주님 없이는 삶 자체가 의미가 없음을) 솔직단순하게 (짧은 말이나 단어로)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성인들의 인용구 중에서 <오, 하나님! 당신을 위해 우리를 내시었으니,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쉬기까지 안식이 없나이다!>라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보다 더 널리 잘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일반적으로 이 말은 자명한 진리처럼 인정받고 있으며, 또 우리의 표면의식 아래 가까이 있는(무의식, 또는 잠재의식 속에 각인된) 내적 갈망을 되울려준다. 우리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우리의 방어기제와 가면을 벗으며, 하나님 앞에 우리의 적나라한 궁핍과 피조물 상태로서 있을 때, 본래부터 있던 이 갈망은 기도 안에서 일깨워진다. 시간이 지나면 이 (하나님으로 채워지기를 바라는)갈망이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갈망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가온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그 상태가 그 사람에게 있어서 지고지선의 진복의 상태이기에)  또한, 기도(0ratio)는 (마음에 주신 말씀을 입을 열어 고백함으로써) 우리 활동을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활동하시는 길을 준비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의식적으로 끊임없이 그분께 향하여 열고, 성령의 처분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 적극적인 노력이다. 
  우리는 묵상과 이 마음의 기도 사이에서 오랫동안 움직일 수 있지만, 마침내는 점차적으로 단순하게 된다. 지적인 추리와 사고가 점점 줄어들고, 반면에 마음은 단순하게 솟아나는 사랑과 열망으로 점점 더 가득 차 오르며, 이것은 이윽고 친밀한 쌍방향의 보고 듣는 내적 대화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하나님을 아주 가까운, 그러나 아직 너무 멀게 느끼면서 우리 마음의 갈망이 자발적으로 그분을 소리쳐 부르거나, 혹은 마음의 불신과 무가치함을 깨닫고서 회개할 것이 점점 더 많아지고 치유와 자비를 청한다. 때때로 사랑에 겨워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는 온갖 어리석은 약속을 다 하게 되고 우리는 하나님과 은밀해진다.
  이 기도 중에 순복하고 신뢰하는 우리 마음은 그분께로 들어 올려지고 그리고 그분에 의해 열려지고, 그래서 그분의 빛으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그분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에 당신의 은총으로 나아가는 데 조금이라도 장애가 되는 것은 그 무엇이든지 -설령 그것이 거룩한 환상이라해도 우리의 환상 속에 우리를 -그대로 그냥 남겨두지 않으신다. (빠르든 늦든 간에 그 환상들은 우리에게 정체의 근원을 드러내기 시작할 것이다. 성령께서 주시는 참된 것인지 거짓된 것인지...) 곧 자율권, 자만심, 통제, 교만, 역할극, 관대함의 한계 등을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주장하는 거짓 자아는 성령에 의해 그 정체가 드러난다.  이 목록들은 각 개인마다 제각기지만,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은사와 은총의 삶을 저해하는 그 효과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여기서 다시 한번 하나님의 길은 역설적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지금 시작한 거짓된 환상에서 깨어남의 과정은 필연적으로 고통스러울 수도 있지만, 이것은 그분 사랑의 더 큰 은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큰 사랑의 은총에 순복함으로 협력할 때, 우리는 거짓 자아의 지배에서 풀려날 것이고,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모상과 닮은꼴인 참 자아에 우리의 중심을 두게 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분이 우리에게 계시하시거나 요청하는 대로 행동하지 못하면, 그만큼 우리의 기도는 진실하게 되지 못할 수도 있다. 이것은 결코 그분에게 완전하게 응답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분께 사랑과 신뢰로 나아가며 응답하는 우리의 지향과 노력이 서두름 없이 참으로 참으로 진실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무지의 구름』의 다음 구절은 위안과 용기를 준다 :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비 가득한 눈으로 네가 누구이거나 또는 무엇을 했느냐를 보시지 않고, 네가 열망하는 상태를 보신다. >(저자(성 카타리나)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그레고리오 성인은 선언하신다. <모든 거룩한 열망은 성취를 늦춤에 따라 강도가 높아지고, 늦추어서 희미해지는 열망은 결코 거룩한 열망이 아니다. >
-  이 거룩한 열망의 증가는 기도(Oratio)가 주는 효과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거룩한 열망을 통하여, 또 우리의 갈망뿐 아니라, 때로는 우리가 그분을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들 때 체험하는 바로 그 좌절과 무력감을 통하여, 당신 힘으로 더 큰 능력을 우리 안에 창조하신다. 이것은 우리의 참 자아와 중심이 일치하는 곳인 마음 깊은 곳에서 우리가 우리의 무게중심인 하나님을 향하여 마치 자석의 힘에 이끌리는 것과 같다. 우리가 지속적인 회개 과정을 방해하는 환상을 더 많이 털어버릴수록, 이 이끌림이 한층 더 강력해진다는 것을 체험할 것이다. 다시 말해 그분을 위해 살기 위해서 우리의 참된 중심인 하나님께 더 온전하게 방향을 전환하게 되는 것이다. 이 일은 기도 중에 일어날 뿐만 아니라, 기도로부터 흘러나와 구체적이고 세세한 일상까지 스며들어 다른 이들과 사건에 대하여 반응하고 응답하는 가운데서도 일어난다.
  이러한 회심의 역동성은 세례자 요한의 단호한 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 <그분은 갈수록 커져야 하고, 나는 갈수록 작아져야 합니다.> 이 복음의 원칙이 지닌 긍정적인 면은 나의 참 자아는 점점 커져야하고, 거짓 자아는 점점 작아져야한다는 것이다. 전쟁터, 혹은 투쟁의 영역은 내적 생활과 외적 생활을 망라한다. 동전의 양면처럼, 내적 생활에서는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활동에 승복하기 위해 투쟁하고, 외적 생활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승복을 매일의 삶에서 행동하고 구체화하기 위해 투쟁한다.
  이 기도(0ratio) 단계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인내롭게 기다리며 마음을 평온하게 하기를 배울 때까지는, 결국 기도가 우리에게 가르쳐줄 터인데, 가끔씩 아주 간단한 성서구절 읽기(Lectio)로 돌아가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시편 42장의 첫 구절같이 간단한 구절을 읽는 것이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 이 몸은 애타게 당신을 찾습니다.>
-  그러나 독서를 기도로 대치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 기도(Oratio)단계에서 점차적으로 우리는 천천히 나타나기 시작하는 하나님을 더 민감하고 더 직관적으로 깨달아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제한된 지적 기능이라는 덜 밝은 빛을 성급하게 추구함으로써 그 깨달음이 가려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여기에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가 제시하는 도움말을 들어보자. 성녀는 우리가 작은 불을 피웠을 때 (우리의 기도 중에), 그 불이 계속 타오르도록 이따금 작은 가지 하나나 둘(예를 들어, 성서의 몇 마디 말씀)을 그 위에 놓아도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큰 가지(긴 독서나 혹은 정신의 활동)를 그 위에 던져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준다. 그러면 그 불꽃은 꺼지기 때문이다.
  이 기도(0ratio)단계에 적합한 기도의 예를 들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방언기도처럼) 그 기도는 그분께 열렬한 사랑으로 손을 뻗쳐 하나님께서 직접 어루만지시는 마음이 자발적으로 고유하게 내는, 더욱더 고양되어 가는 정감적 기도의 소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룩한 독서의 네 단계 중 셋째단계에 있다. 돔 마르미온(베네딕도회 아빠스, 1853-1923)은 이것을 아래와 같이 시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읽는다                        (읽기 : Lectio)
하나님의 눈 아래서                   (묵상 : Meditatio)
마음에 와 닿을 때까지                (기도 : Oratio)
그리고 불길 속으로 뛰어 든다         (관상 : Contemplatio)
-  깊이 사랑하는 친밀한 인간관계의 지속적인 발전이라는, 앞에서 인용한 유비에 따르면,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사랑에 빠지기 시작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분은 실제로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가고, 우리는 온전히 내어주고 온전히 받아들이려는 갈망, 즉 사랑하는 이들의 일치하고자 하는 갈망을 체험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다시 우리 매일의 삶은, 그 기도가 참되다면 우리의 기도와 병행되어야 한다. 우리는 기도에서 요청받은 것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일을 매일의 관계 속에서도 그만큼 확장시켜야 한다. 이 일이 불완전하다 할지라도, 우리의 열망과 노력은 진실해야 한다.  보통의 영적독서는 여기까지만 가는 경향이 많다. 하지만 더 가야할 길이 있다.. 그 분을 온전히 사랑하기 위해서는
###.관상으로의 변형
--  보다 깊은 차원으로 움직이고는 있다 할지라도, 지금까지의 읽기(Lectio), 묵상(Meditatio)과 기도(0ratio)의 연속적인 세 차원에서, 우리는 여전히 이성이나 상상을 동원한 지성과 감성의 활동이 지배적인 요인으로 남아 있는 영역에 있다. 마지막 관상(Contemplatio)으로의 변형, 또는 관상(이것은 종착점이 아니라 새롭고도 결정적인 시작)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왜냐하면 우리는 빛이신 하나님을 향해서 움직이는 반면에, 기대하지 않았던 <감각의 밤- 영의 어둔 밤>이라고 표현되는 일종의 어두움이나 '밤'이 덮쳐오고, 우리의 길이 불분명해질 때 겪는 우리의 '체험'은 이것과 <보다 깊은 교제의 차원으로 들어가는 -우리가 보통 기대하는- 통상적인 정감적 느낌>과는 상치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관상>가운데에서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하나님께서 이성과 상상이란 우리의 본능적 기능들을 '폐쇄' 시키고 만족과 열정의 정감적 느낌을 박탈함으로써, 그분이 점점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신다는 것이다. 그 결과 때때로 하나님에 관하여 뚜렷하게 사고하거나 추리할 수 없게 되고, 아울러 열성과 느낌이 말라버리는 느낌이 온다.  광야의 느낌이 시작된다. 이 위기에서 우리가 어떻게 계속 나가야 하는가를 이해하려면, 그리고 위대하나 분간할 수 없는 약속의 출발점에 있음을 깨닫지 못한 채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하도록 유혹받지 않으려면, 현명한 지도를 받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밤에서 새로운 새벽으로 가는 이 여정을 이끌 정평 있는 스승은 십자가의 성 요한이다. 그는 이 주제에 대해 󰡔가르멜의 산길󰡕 󰡔어둔 밤󰡕 󰡔살아있는 사랑의 불꽃』등의 저술에서 상세하나 다소 빙빙 돌려 말하면서, 다양한 형태로 계속 다룬다. 그러므로 텔마 홀은 간략하게 요점을 정리하고 관련되는 주요사항들을 함께 제시하였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제시한 세 개의 표지
- 첫째, 성인은 어둔 밤과 무미건조함의 체험이 성령의 직접적인 개입의 확실한 지표인지, 혹은 단지 우리의 방종과 싫증 같은 어떤 다른 원인에 의한 결과인지를 식별하는 세 가지 표지를 제시한다.
1. 전처럼 상상이나 심상을 동원한 감성의 묵상 또는 추리적인 묵상을 할 수 없거나, 묵상에서 만족이나 위안을 얻지 못하는 현실.  (주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한 이 때까지 해 오던 묵상을 계속하고 섣불리 빼먹지 말라.. 어느 시점에가서는 전혀 할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 때부터는 묵상을 건너 뛰고 관상으로 직접 들어가야 한다.)
2. 하나님 그분 외에 하나님과 관련되어 말해진 다른 상세한 점에 상상이나 감각을 집중하기가 싫어짐. --예를 들어, 더 이상 하나님 생각으로 만족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체와 하나님에 대한 개념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어떤 정신적 이미지나 개념에 정감을 느끼지 못하고, 그분의 현존과 관련된 모든 감각적인 위안이 소멸된다. 따라서 때때로 엄청난 고통을 체험하게 될 수도 있고, 우리가 퇴보하거나 길을 잃었다는 두려움이 따르며, 전혀 기도할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때때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모두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 그분자체가 아닌한 하나님에 관한 것들에 대한 혐오뿐이다. 이것은 혼란스럽고, '미지근함'으로 받아 들여진다. 그러나, 어떤 해박한 영적 조언자에게는 명백한 것처럼, 바로 이 고통이 참된 관심을 무심코 드러낸다. 왜냐하면 실제로 미지근하다면 그런 관심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홀로 고요한 가운데 사랑으로 하나님만을  우러러 보는 것 그 자체가 큰 기쁨으로 다가옴의 세번째의 확실한 표지가 결정적이다. 첫째와 두번째 표지는 영적으로 침체되거나 소진된 경우, 또는 우울증이 왔거나 단지 마음 상함으로 인해 진지함이 부족한 경우에도 체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 가지 표지가 함께 드러날 때, 성 요한은 그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확신해도 된다고 주장한다. 이 표지는 묵상을 할 수도 없고, 그 외의 어느 것에서도 만족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특별한 지식이나 이해, 또는 지적인 활동, 기억과 의지 없이도, 하나님께 대한 단순한 사랑의 깨달음에서, 내적 평화와 고요와 쉼 안에 홀로 머물도록 이끌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일반적인 사랑의 깨달음과 앎 속에서만 머물기를 좋아하게 된다.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
  그런 다음, 성 요한은 어떻게 우리 자신을 이끌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특유의 조언을 하는데, 기도 안에서 우리의 활동으로부터 이루어지는 변형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지적했다. 성 요한은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얼마나 쉽게 하나님의 일이 그릇되어 망가지는지를 주시하고, 우리의 노력은 여행의 목적지에 도달해 있는 사람이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 계속 걷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이어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음에 더하여, 필연적으로 그는 목적지로부터 떠나갈 것입니다.>
  성 요한은, 비록 우리가 할 일 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것처럼 보이고, 이렇게 하는 것이 다소 잘못된 것 같아 보일지라도, 오히려 우리 자신을 고요함 속에 머물도록 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인위적인 관심, 노력으로 하나님을 맛보고 느끼려는 열망 없이, 오직 은밀하게 진정한 연인 사이처럼 깊은 신뢰와 겸손으로 사랑스럽고 평화로이 하나님께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단순히 만족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열망들은 우리를 소란스럽게 하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활동에 의해 우리에게 은밀하게 교통되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주의를 흩어놓기 때문이다. 그 시간은 수용적인 수동을 위하여 받아들이는 시간이며, 이것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그렇게 보일지라도 게으름과는 거리가 멀다. 여기에 선(禪)의 지혜를 적용해 본다. <고요하게 앉아 있어라. 아무 것도 하지 말아라. 봄은 오고, 그리고 풀은 저절로 자란다.>  비록 우리가 활동하지 않는 것 같아도 은총은 제 갈 길을 가고, 우리의 탁월한 지식이 없어도 성령의 일은 진행된다.
  그리고 나서 성 요한은 이러한 일반적인 사랑의 지식을 지니게 되는 초심자들이 '항상' 묵상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명백히 밝힌다. 왜냐하면 이 변형은 즉각적으로 또는 총체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일반적으로 관상이 습관으로될 때까지 상당한 기간에 걸쳐 일어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묵상하려고 하는 매순간 우리는 묵상하려는 우리의 열망과 능력의 부족의 느낌과 함께, 이러한 지식과 평화도 즉시 알아차린다. 따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우리가 우리방법대로 특별한 것들을 숙고하고 이해하려고 고집한다면, 우리의 흐릿한 생각으로 성령의 단순한 빛을 가리고 간섭하게 될 것이라고 성인은 주의를 준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도저히 예측할 수 없다. 하나님은 각 사람을 고유하게 대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 요한은 우리에게 보증하기를, 조금씩 조금씩, 놀랍고도 장엄한 참된 하나님 지식을 지닌 성스러운 고요와 평화가 신성한 사랑에 둘러싸여 우리 영혼에 불어넣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이 활동하지 않고 무심해지는 동안 이 관상이 활성화되기 때문이다. 마치 이것은 우리 손에 붙잡으려 할 때 사라져버리는 공기와 같다. 이 시간에 사람의 노력은 소용이 없을뿐더러, 내적 평화와 감각의 무미건조함을 통하여 영 안에서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일에 장애가 된다.
  여기서 중요한 요점들을 간략하게 정리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
***세 가지 표지 :
1. 전에 하던 묵상을 할 수 없음
2.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에 흥미를 잃음. 대개 길을 잃어버렸다거나 퇴보한다는 두려움이 따름. 감각이 무미건조함
3. (1번, 2번과 함께 드러날 때 결정적임) 고독한 기도로 이끌림  - 주의를 기울이고, 전반적이면서 사랑 가득함, 그러나 모호함 : 수동적으로  주의를 기울임
***해야 할 것
* '받아들이기', 그리고 성령께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자리를 마련하기.
* 내적 침묵으로 이끌림에 따르고 사랑에 찬 주의를 기울이면서 머물기.
* 모든 활동을 버리고, 자기를 잊은 채, 하나님 사랑의 어두움 속으로 끌려가도록 내버려두기
* 묵상을 다시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할 것, 내적 침묵이 습관으로 될 때까지.
==  나는 두 가지 중요한 이유 때문에 마음의 기도에서 관상으로 변형되어 가는 영역을 이 정도까지 조명하였다.
  첫째,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하여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의 좋은 지향이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 있다. 그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이끄심대로 따르기보다 그 이끄심을 반대할 수 있다. 성 요한은 망치밖에 모르고 그 연장으로(이성과 상상 등) 두드려대는 대장장이와 같은 영적 지도자들을 맹렬히 비난하며, 그래서 그들이 알아챌 수 없는 성령의 움직임에 역행한다고 했다. 지도자들은 이 일에서 그들 자신이 주요 대리인, 안내인 영혼을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주된 안내자는 성령이라는 점을 성찰해야 한다
  둘째, 기도(Oratio)에서 관상(Contemplatio)으로 변형되어 가는 이 영역은 16세기경에 가르치기 시작하였던 기도의 영성에서 자라지 못한 끊겨진 지점이 되었다. 그 결과 관상은 정상적인 기도 밖으로 고립되었고, 오직 드물게 '선택된 영혼들' 만을 위한 범주로 따로 떼어졌다.    오늘날 그러한 외부 제도나 교회의 강요는 주된 요소가 아닌 반면에, 현대 서구 사회에 지배적인 사조의 '영향' 으로, 그리스도인의 기도에서 관상을 저지하고 배제할 수 있다는, 또 다른 현실적인 가능성은 여전히 있다. 이 기술의 시대에서 실용적으로 머리를 써서 거둔 모든 업적들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물질세계의 대부분을 지배하기 위해 종종 직관 기능의 발달을 희생시키는데, 그 기능이야말로 관상과 직접 관련된 것이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은 기도하는 동안에 끊임없이 이지적으로 생각하고, 분석하며, 판단하고, 일반적으로 책임을 맡으려는 후천적인 고집 센 경향 때문에 관상의 자발적인 성장을 막거나 지연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통제하려는 어떤 노력이라도 떠나보내길 요구하는 관상의 내적움직임에 정면으로 어긋난다. 관상에는 수동적인 받아들임이 요구된다. 그것이 실제적인 창조이고 응답인데도, 실용적인관점에서는 순전히 시간 낭비로 보인다. 그러므로 특별히 마음의 기도에서 관상으로 변형되어 가는 이 지점에서, 우리가 무엇을 체험하고 필요로 할 것인지에 관한 명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향심기도(Contering prayer)는 󰡔무지의 구름』의 가르침을 효과적으로 현대에 적용시킨 것이다. 이 기도는 읽기와 묵상으로부터 마음의 기도, 관상의 내적 침묵에까지, 자발적인 움직임 안에 들어 있는 지적인 암초들을 떠나보내는 것을 특별히 지향하고 있다. 기도에서 지적인 활동 때문에 유난히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토마스 키팅의 책 󰡔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를 지속적인 안내자로 삼으면, 큰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토마스 키팅 신부는 향심기도 운동의 창시자로서, 풍부한 관상 전통을 그 책에 담고 있다
4. 관상(Contemplatio-10분) : 침묵으로 들어감,   말씀에 깊이 잠김 -- <거짓된 나는 죽고 참 나로서 진실로 하나님과 합한 한 영 됨을 살기> 나의 모든 짐을 주께 아뢰고 내안의 주께서 대신 기도하는 것을 바라봄.
-  관상은 이상한 신천지로, 그곳에서는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모든 것들이 뒤집혀 있는 것같이 보인다. - 그곳에서 우리는 새로운 언어(침묵)와 새로운 존재방식('무엇을 함'이 아니라 단순히 '있음')을 배우게 된다, 우리의 이 때까지의 사고-개념-상상-감각과 느낌을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믿음을 위하여 버리게 되며, 하나님의 부재(우리의 감각으로는)가 그분의 현존 그 자체'이고' 그분의 침묵(우리의 일상 인식으로는)이 그분의 언어 자체'임을' 오직 믿음으로 체득하게 된다. 이것은 무지로 들어가는 것이고, 우리의 안전을 위하여 매달리는 친숙한 것들을 떠나보내는 것이다. 또한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계 3:17) 존재(은총이 우리에게 드러내지만, 우리가 본질적으로 받아들이기는커녕 인정하기조차 두려운 것)에 우리의 모든 희망과 기쁨의 가능성이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참 자아를 아는 것은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피상적인 거짓자아는 환상이므로 이 여정에서 버려야만 한다. 거짓 자아는 하나님 현존 의식을 소유하고 잡으려고 애쓰지만 결코 잡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움켜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손을 펴야 받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거짓 자아는 알려질 수 없는 것 - 무지의 직관적인 사랑으로만 알 수 있는데- 을 '알기' 원하는 자아이다. 또한 자율권, 통제, 자기에게 의미의 중심을 두기라는, 실재처럼 가장한 환상을 옹호함으로써 거짓 실존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자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연민어린 목적은 오로지 우리에게 실망과 슬픔을 줄 그러한 환상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관상의 시초에서 체험하는 어두움이라는 수단을 통해서(그리고 간헐적으로 빛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아마도 관상기도에 관하여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으로 말할 수 있다면, 이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을 신뢰하라는, 또한 당신께 '너 자신을 내게 맡기라' 는 하나님의 초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 자신 너머로, 예컨대 그분의 사랑으로 들어가는 이 신비스러운 여정에 들어갈 수 없는 우리의 피상적인 자아 너머로 우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말이다.
  어떻게 기도하느냐고 아주 단순하게 물어본 수피 친구에게 써 보낸 토마스 머튼의 답장은 관상기도의 방법에 대한 귀중하고 아름다운 증언이다 :
--이제 당신은 나의 묵상 방법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 기도 방법은 아주 단순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현존과 그분의 의지(뜻)와 사랑에 (단순한 믿음으로) 주의를 집중하는 것입니다. 즉 '믿음'으로 집중함으로써만 우리는 하나님의 현존을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나의 기도 특성을, 예언자가 묘사했듯이, 마치 당신이 그분을 보았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것을 상상하거나 하나님의 구체적인 모습을 상상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내 생각으로는 일종의 우상숭배이기 때문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이것은 <모든 것 되시는 그분>을 경배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은 무(無)임을 통째로 깨달으려는 커다란 갈증이 내 마음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내 기도는 무와 침묵의 중심에서 솟아나는 일종의 찬미입니다. 여전히 내가 내 자신(my self)으로 있다면, 이것을 나는 장애로 여길 것입니다. 그분이 원하신다면 없음(無)을 온전한 명료함으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원하시지 않는다면, 이 없음은 실제로 그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보이고 그러므로 장애물이 됩니다. 이것이 나의 평범한 기도방법, 묵상입니다. 이것은 어떤 것에 관하여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얼굴을 직접적으로 찾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그분 안에서 길을 잃지 않는 한, 그분을 찾을 수 있습니다.
++  십자가의 성 요한이 기술하기를, 관상은 하나님께서 은밀하고 평화롭고 사랑스럽게 흘러들어오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만약 방해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영혼을 사랑의 영으로 태울 것이다. 그러나 그는 덧붙이기를, 사랑의 불은 대체로 처음부터 느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해가 부족한 영혼은 그 자신 안에 사랑을 위한 평화로운 자리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우리 자신의 반성이나 의지의 힘이라는 매개물을 사용하고 거기에 의존한다면, 우리는 다만 흘러들어오는 것을 차단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모든 것은 <우리가 야훼 앞에서 고요히 머물고, 그분을 그리워하며 기다는 것이다(시 37:7).>
여기서 '내가 '기도하는 동안 여기 앉아 있어라'고 겟세마네에서 제자들에게 이르신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은 아주 적절하다.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라, 옆에 앉아서 그분과 함께 깨어 있으면서, 단지 깨어 나를 위해 직접 기도하시는 그분의 기도를 도우며, 참여하며 그분의 마음과 합하여 한 영이 되어 그분께 녹아들며 나는 죽고 그분이 사시기까지 그분을 알고 배우자) 머튼은 이 개념을 아래와 같은 특유의 표현으로 제시한다 : --내가 <기도하는 행위>는 때때로 위험천만한 행위입니다. 그 위험은 우리의 그 기도들이 우리를 통해 기도하시는 예수님과 내 스스로 기도하려는 우리 사이에서 갖게 되는 위험입니다. 기도의 위대한 점은 기도 그 자체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곧장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당신의 기도행위가 (그대안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진실된 기도를 방해한다고 느껴진다면, 그만 두십시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도록 하십시오. <나를 통해, 나를 대신해 내주하고 계시는> 예수님이 기도하고 계심을 하나님께 감사드리십시오. 자신을 잊어버리십시오. 예수님의 기도 안으로 집중해 잠겨들어가십시오. 우리 안에서 한 영이 된 그분이 기도하도록 하십시오‥‥ 최고의 기도방법은 당신의 기도를 그만 두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것을 알든 모르든, 당신 안에서 기도하시는 분이 기도하게 하십시오. 이것은 은총의 힘으로 우리가 (작은)그리스도라는 … 우리의 참된 내적 정체성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의미합니다.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성령 안에서 누리는 성부와 그리스도의 관계입니다.  이러한 자아의 소멸로 예수님의 영은 우리 안에서 기도할 수 있고 우리 안에서 사랑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것은 오직 기도 시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줄리안 그린이 말하듯이, <사람은 인간을 위한 마음 하나와 하나님을 위한 또 하나의 마음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오직 거기에 있습니다...>
  --점차적으로 그분의 사랑으로 가는 데 우리가 놓는 장애들을 아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치우기에 충분할 만큼 사랑하는 것(혹은 그것들을 치우도록 허용하는 것), 그분의 사랑을 신뢰하고 그 사랑에 승복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매일의 삶 안에서 병행되어야만 한다. 그럴 때 매일의 삶에서 우리는 천천히, 반복해서, 우리 자신을 위해서 무엇을 얻으려 하기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우리자신을 내어주는 쪽을 선택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머튼의 말을 다시 인용하면, 관상은  다른 사람에 대한 연민을 키우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전혀 불가능하다 그 연민은 심지어 -그리고 특별히- 우리에게 드러나는 어두운 우리 자신에게까지 확장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어두운 자신을 부정하거나 그로 인해 화가 나는 것은 거짓 자아가 자기를 영속화하려는 반응이기 때문이다.
  성인들과 신비가들에 관하여 쓴 책에서, 관상은 매우 빈번하게 비상하고 때때로 기괴하기까지 한 현상들과 연루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가운데서, 그들 자신조차 모르는 채, 활동하고 있는 참된 관상가들이 얼마나 되는지 추측할 수 없는 것 같다. 마찬가지로 수동적이고, 움츠려들며, 환상에 잠기고, 때로 억압된 관상가의 유형은 풍자일 뿐이다. 왜냐하면 관상은 열정을 위한 능력, 그리고 삶에 대한 불타는 사랑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때때로 이상한 용어(어둔 밤, 감각의 무미건조, 포기, 신비적 은총 등)를 써서 관상에 대해 말하는 글은 관상을 일상생활이나 보통사람들과 무관한 것으로 보게 할 위험성을 지닌다. 그러나, 신뢰하라, 담대하라, 뒤로 물러서지 말라, 과감히 앞으로 나아가자!!!  하나님은 '평범하시다!' 육화가 계시한 대로 그분은 우리의 인간성에 들어오셨고, 반드시 그 안에서 그분은 발견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와 모든 피조물은 그분 안에서 존재한다. 엘리사벳 발레트 브라우닝이 쓰기를 : <땅은 하늘로 가득 차고, 모든 흔한 덤불들은 하나님으로 불타네, 오직 보는 사람만이 신을 벗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 주위에 앉아 먹딸기를 따네>
-  더 나아가, 관상은 물리적 은둔생활(이것은 결코 관상가들을 배출한다는 보장이 아니다)에 의존하지 않고 '마음의 은둔생활에 의존한다. 즉 세속에서 애정 어린 관계들과 활동적인 역할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약속하셨듯이 이 세상에 발붙여 일상을 살면서 단지  하나님의 집이 되는 것이다. <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 안에(그의 영안에) 집을 지을 것이다(요 14:23 ; 사역).>
  그러므로 관상가가 되는 것은 봉쇄 수도자나 활동 수도자 같은 어느 특정한 생활양식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우리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형태가 무엇이든 간에, 오히려 그것은 '사랑이 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으면서 모든 일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관상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 관심을 덜 갖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갖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그리고 어떤) 기도 안에서 성장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심화시키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날마다 기도 중에 내적 고요와 침묵을 위한 실질적인 시간을 마련하고, 진실로 거기에 우선권을 두고 충실하게 머물러야 한다. 유연할 필요는 있지만, 하나님과 우리 사랑의 관계를 유연성의 원칙과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 연인들은 서로 혼자 있기 위한 시간을 계획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일이 저절로 일어나게 한다. 그런 시간 없이는 어떠한 깊은 관계도 가능하거나 지속할 수 없으며 성장할 수 없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재적인 하나님은 발견될 수도 있으나, 초월적인 하나님은 당신 스스로를 계시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계속 충실하게 기도할 때, 우리는 충실성과 항구함 안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한 분께 주의를 다하여 깨어 있는 마음으로 열정적으로 기다리는 일이, 우리가 빛 안에 있든 어두움 속에 있든지 간에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성 베르나르도가 우리에게 확인시키듯이, 비록 그분을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때라도, 찾는 과정이 결코 헛되지 않는 그분만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기도한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3:16-19)>   사도는 다음과 같이 기도를 마친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엡 3:20).>
  -기도 시간 외에도 우리는 성찰하며 삶으로써 사물의 표면 보다는 삶 자체에 관해서 묵상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것은 삶을 듣기,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과 사람들과 평범한 일상사에서 어떻게 현존하시는지 알아차리기이다.
  이 묵상법을 현실적으로 성장시키는 데 매우 도움이 되는 훈련은 이렇다. 즉 하루를 마치기 전에 우리를 스쳐간 시간들 속에서, 또는 그분이 드러나기보다는 숨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환경 안에서 아마도 평범한 일로 위장되었을 텐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가를 성찰하고 기도로 분별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란 우리가 살고 있는 내내 끊임없이 숨쉬는 공기와 마찬가지로, 매순간 생명과 존재와 사랑으로 그분을 받아들이며, 우리가 하나님 안에 몰두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은 일은 우리의 내적 눈을  열어 항상 거기에 있는 것을 '보고,' 이 가장 깊은 실재에 관하여 깨달아가면서 성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 안에서 숨쉬며 움직이며 살아가기 때문(행 17:28)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유머스럽게 말하기를, <하나님은 언제나 집에 계신다. 밖에 나가서 돌아다니는 것은 우리들이다. > 관상은 믿음의 선물을 발전시키면서 이러한 깨달음을 발전시킬 것이며, 이것으로 우리는 현실을 보는 하나님의 비전에 참여하게 된다.    비록 사소하긴 하지만 우리가 내적 생명을 양육하고 육성 할 수 있는 방법들은 많이 있다. 내적인 삶은 최소한의 내적 침묵을 요구하므로, 우리는 예를 들어 우리를 지배하는 자동차, 라디오, 텔레비전 등의 끊임없는 소음을 차단할 수 있다. 우리는 쓸데없는 소란과 동요를 피하고 생명을 주는 고요와 평화의 섬을 창조하기로 선택할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기도의 질뿐만 아니라  우리 관계의 질, 가족, 친구, 우리가 접하는 모든 이들과의 관계에 기여한다.   우리 중 거의 대부분은 영적 성장의 커다란 적(敵)인 자기중심적 지향에 도전하는 기회를 찾으려고 아주 멀리 볼 필요가 없다. 이 기회들은 가정이나 단체 생활 안에 넘치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의 '스승'은 우리가 처한 바로 그 상황임이 판명될 것이다. 거기에서 하나님은 참생명이신 주님만 바라보며 사랑과 긍휼의 주님의 마음이 이끄시는대로 남을 위하여 (구습을 따라 자신의 육신의 정과 욕심을 추구하는 거짓자아에 따르지 않고, 반대정신으로) 우리의 (혼)생명을 내어주는 데 동의하라고(그것은 부활생명으로 살아감을 선택하는 것이기에) 요청하신다. 오직 극적이고 영웅적인 경우에만 그것들을 기대한다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생명이 자라나기 위해서, 거짓 자아에 대해 죽을 수 있는 많은 기회를 놓칠 수 있다.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는, <물론 우리는 고상하고, 장엄한 방법으로 고통 받으려 합니다.… 얼마나 환상적입니까! 보잘 것 없이 고통당하는 것, 그것이 고통입니다!>라고 말한다. 고통당하는 것은 받아들이고, 참고, 견디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내와 연민을 지니고, 우리 자신을 참아내고 견디어 내는 것이 가장 오래 지속될 필요가 있는 시간들이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과 우리의 불완전함과 실패에 무자비해지거나 화가 나는 참 이유는 실제 그 뿌리를 보면 오로지 진리를 거부하며 받아들이지 않는 거짓 자아와 완전함이 가능하다는 거짓 자아의 환상에서 더 많이 비롯하기 때문이다. 다시금 역설의 요소가 이러한 관찰 속에서 드러난다. 왜냐하면 거짓 자아를 부정하는 모든 경우와 기회는 자유와 기쁨이라는 동전의 다른 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길이고, 그분의 약속이다.   그래서 관상은 궁극적으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가는 움직임이다. 한 랍비의 이야기가 이 사실에 함축되어 있는 것들을 뛰어난 감수성으로 잘 보여준다. -옛날에 한 랍비가 한번은 제자들에게 밤이 지나고 새날이 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한 제자가 멀리 있는 동물을 보고 양인지 개인지 분간할 수 있을 때 새 날이 아닙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랍비는 대답했습니다. 아니. 또 한 제자가 멀리 있는 나무를 보고 무화과나무인지 복숭아나무인지 분간할 수 있으면 새 날입니까? 랍비는 대답했습니다. 아니. 음, 그렇다면 무엇인지요?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너희가 보는 사람들의 얼굴이 다 너희의 자매형제로 다가올 때, 그 때가 새 날이다. 만약 너희가 이것을 할 수 없다면, 시간이 언제이든 상관없이, 여전히 밤이다.
-  모든 남녀를 형제요 자매로 보는 것은 신비가의 믿음의 비전에 함께 하는 것이다. 신비가의 핵심 직관은 하나님 안에서 온갖 것(ALL)이 일치하고 하나 되는 것이다. 이것은 관상의 은혜로운 효과로서, 현실을 보는 우리의 눈을 점차적으로 변형시킨다. 이 신비적 비전은 비밀스럽거나 '몽롱한' 꿈과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명백하게 우리 지구의 생존은, 하나의 사랑 곧 하나님 안에서, 모든 사람들과 우주의 모든 것이 일치하고 상호 연대하는 일을 전반적으로 실현하는 데 달려 있기 때문이다.
  <미래의 그리스도인들은 신비가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전혀 그리스도인으로 있지 못할 것이다. >칼 라너의 심원한 진술이다.

###관상 기도의 간단한 수련의 실제
     관상 기도는 하나님의 은총과 정기적인 거룩한 독서로부터 자연스럽게 발전한 것이다. 우리는 기도가 사고와 감정이 언어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한 가지의 표현일 뿐이다. 관상기도는 사고와 단어와 정서를 넘어서서 절대 신비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가슴과 마음을 열어 드리는 것이다. 호흡보다 더 가까이 계시고 사고보다 더 가까이 계시며, 선택보다 더 가까이 계시고 우리의 의식 그 자체보다 우리에게 더 가까이 우리 안에 계심을 믿음으로 알고 있는 그 하나님께 우리의 인식을 열어 드리는 것이다. 관상 기도는 우리가 동의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시작하셔서 거룩한 영의 하나됨과 일치로 이끄시는 (그래서 우리를 내적으로 정화시켜 주시는 과정) 관계이다.   관상기도(Contemlative  Prayer)는 마음과 의지의 기도이다. 마음과 의지는 하나님의 현존을 향하여 나아간다. 입술과 정신은 쉰다.  몸은 쉬고, 마음은 온통 중심에서부터 말없는 신뢰의 기도로 주님께로 나아가고 의지는 주님의 의지와 하나 되기를 추구하면서, 다만 단순히 주님을 영에서부터 그냥 알고자 응시한다.  관상은 알려지고   사랑받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존재의 중심 곧, 영의 자각이다. 우리가 이러한 자각을 믿음(확신과 신뢰)으로 추구할 때, 이것을 습득적 관상(acquired contemplation)이라고 한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자각을 실질적인 체험으로  우리에게 주실 때, 우리는 이것을 주부적 관상(infused contemplation)이라고 한다.
관상기도에는 두 가지 단계가 있다.
 1). 습득적 관상(acquired contemplation) ---  믿음과 희망과 열망하는 사랑으로 우리가 그분의 현존을 향해 나아갈 때. 이 관상은 우리가 믿음으로 그분이 진정으로 현존하심을 아는 것으로 시작하여,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해서 그분과의 접촉을 계속 추구하는 것이다.
 2). 주부적 관상(infused contemplation) ---  그분이 대가 없이 거저 주신 은총으로 기도할 때. 그분께서 현존에 관한 경험에 있어 초보인 우리에게 그분의 현존에 대한 진정한 자각을 주신다. 예를 들면, 그분은 사랑, 평화, 기쁨과 같은 성령의 열매를 체험하게 함으로써 그분의 현존을 참으로 자각하게 해주신다. 우리의 마음 안에 계신 그분의 현존에 대한 자각을 통해서, 또는 다른 방법들을 통해서 자각하게 해주신다.  -----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영적인 실체, 우리 자신의 영의 실체,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의 실체이다. 관상기도가 성령과 그분의 행동과 그분의 은총에 우리를 개방한다는 의미에서, 또는 '그분의 현존을 자각하는 가운데 성령에 의한 우리 영의 정화와 치유로 우리를 남김없이 열어 준다'는 의미에서, 관상기도는 '참된' 기도이고, '영적'기도라고 할 수 있다.    관상기도를 성령기도(pentecostal prayer,)라 부르고, 성령기도를 관상기도라고도 부르는 이유를 지적할 수 있다. 우리가 이 기도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의 위로자로 주신 성령이 우리 안에 내재하신다는 사실을 자각한다는 의미에서, 관상기도를 성령기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성령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며, 성령께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영적인 선물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관상적 기도의 단계에 도달할 수 있다. 기도의 단계들을 학교 과정과 비교한다면,   초등학교에서 읽기와 쓰기를 시작한다(구송기도). 기도의 중등학교는 묵상이다(구송기도를 계속하면서도, 중점적으로  하는 과목은 삶과 계시에  대한 성찰과 숙고이다). 기도의 고등학교는 관상기도를 시작하는 것이다(초등학교와 중등  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잊어버리거나 소흘히 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우리의 기도 생활은 하나님의 현존을 자각하는  일과 성령에게 우리 자신을 여는  일에 성장한다. 그리고 더 높은 신비적 단계에 이른다.
   이 모든 것에서, 우리는 다만 주님의 산(山)을 향할 뿐이다. 우리 각자는 모두 자신의 두 발로 순례를 시작해야 한다. 우리를 이끌어 주는 것은 성령의 숨결이다. 우리를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비록 흐릿하게 보이지만 목적지에서 빛나는 주님의 영광이다‥‥.
   관상기도는 하나님의 은총의 도움으로 노력하는 어떤 선한 사람이라도 할 수 있는 기도이다. 이 기도를 '잠심의 기도', '단순성의 기도', '침묵의 기도', '쉬는 기도',  '단순한 하나님 현존의 기도', 마음의 기도', '구심기도', '집중기도', '향심기도' 등으로 부르고 있다.

◎ 관상기도의 열매(효과)
    매일의 관상기도의 열매와 은혜는 기도하는 그 시간에 받는다기보다는 기도시간 밖에, 즉 일상생활에 영향을 주어서 우리 삶의 질을 높여 준다.
 1) 관상기도는 인격적 변화를 가져 온다. -- 느리기는 하지만 확실하게, 관상기도는 인격을 훌륭하게 변화시킨다.  진정한 관상기도는 성령께 우리 자신을 열어 드리는 것을 전제로 한 다. 성령의 선물과 성령의 열매가  점점 더 분명해질 것이다. 우리는 매일 그분의 성령의 능력으로 치유된다. 그리고 우리 구세주의 완성된  인격으로 성장한다.
 2) 관상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더욱더 진실하게 된다.   이 관상기도의 또 다른 건전한 열매 또는 '효과'는 성령의 활동으로 인하여, 우리가 더 충만하고 더 진실한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3) 관상기도가 우리의 기도 생활에 주는 영향 --  관상기도가 다른 기도들에게 주는 중요한 영향은 새로운 의미와 일치의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4) 관상기도는 우리를 '하나님 화(化)'한다 --   매일의 관상기도 실천은 우리를 '하나님을 현실화'한 사람이 되게 해준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일편단심으로 그분의 'Darshan,거룩한 현존 (하나님과의 조우)의 축복'을 추구하면, 우리의 마음 속에 그분의 현존을 체험하게 된다. 우리는 그분을 알게 될 것이고, 그분으로 가득 차게 되고, 점점 더  그분과 같아지고, 그분과 하나가 된다.

###관상에 대한 묵상
    우리의 몸이 자리를 잡으면서 기도는 시작된다. 몸의 긴장을 풀고 고요하게 하라.   그러나 내적으로는 정신을 차린 상태를 가져라.   기도의 뿌리는 내적 침묵이다.   기도는 말로 나타내는 사고와 감정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한 가지 표현일 뿐이다.   깊은 기도는 사고를 옆으로 젖혀 두는 기도이다.   이것은 언어와 사고와 정서를 초월하신 절대 신비이신 하나님에게 우리의 정신과 마음과 육신과 감정 등 우리의 전 존재를 열어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저항하거나 억압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우리의 노력으로써가 아니라 단지 떠나 보냄으로써 그것들을 지나가는 것이다.   우리 안에 숨결보다 가깝고 생각보다 가까우며,   선택보다 가깝고,   우리의 의식보다   우리에게 더욱 가까이 계심을 우리의 믿음으로 알고 있는 절대 신비 앞에 우리의 인식을 열어 드리는 것이다.   절대 신비이신 분은 우리의 존재가 뿌리박고 있는 근본이며 매 순간 우리의 생명이 솟는 원천이시다.      우리의 전 존재로 완전히 열린 마음 안에, 깊은 기도 속에 현재의 순간에 우리를 내어놓는 것이다.    과거나 미래, 즉 시간 자체는 완전히 망각된다.    단지 절대 신비의 현존 앞에 놓인다.    우리가 숨쉬는 공기와 같이 우리 주변에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와 구별되면서도 결코 우리와 떨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 현존이, 우리의 안에서 우리의 영을 어루만지고 껴안으시듯, 우리를 끌어당기시는 것처럼 느끼기도 하고 우리 자신을 초월하여 우리를 순수한 인식 안으로 데리고 가시는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내적 침묵과 고요와 평화의 이끎에 우리를 내어 준다.    무엇을 느끼거나 사색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노력함이 없이 애씀도 없이 모든 것을 떠나 보내면서, 우리는 이 현존 안에 잠겨 든다. 사랑만이 말하게 하고 현존하시는 분과 하나 되는 열망으로 자아를 잊은 채 절대 신비 안에 쉰다.
     이 현존은 엄위하면서도 겸손하고 두려움을 자아내면서도 온화하고 무한하면서도 아주 친근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개인적이다.    내가 그분에게 알려지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이 현존 안에서 내 삶의 모든 것은 투명하다.     그분은 나에 관해 무엇이든지, 즉 모든 약점, 더러움 그리고 죄스러움을 알고 있으면서도 무한히 나를 사랑하신다. 이 현존은 그 현존함만으로도 치유하고 힘을 주고 새롭게 하신다.      이것은 비판하지 않고 자신을 내어 주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무한히 동정적이시다.    이것은 결코 떠나본 일이 없는 집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고  늘 가지고 있던 인식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으면 서로 내가 알아보지 못하는 집과 같다.     나는 이 인식을 강제로 가져올 수 없다. 나의 안에 문이 열려 있는데 다른 편에서 열려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감싸면서 스며드는 현존의 신비스런 감미를 예전에 맛본 것과 같이 보인다.   이것은 비움이면서 동시에 채워짐이다.
     우리는 내면과 외부에서 침묵과, 열어 줌과, 고요한 주의 속에서 움직이지 않고 기다린다.      우리는 고요함이 이끄심, 사랑 받음, 그냥 존재함에 우리를 내어 맡긴다.
나를 홍분시키고 용기를 꺾는 모든 것들이 실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들이었는가!     나에게 고문을 하는 정서들을 불러일으키는 욕망들을 나는 용해시킨다.    참된 평화를 맛본 다음에는 이 모든 것을 떠나 보낼 수 있다.    물론 앞으로 다시 걸려서 넘어질 수도 있다.    나는 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왜냐하면 나의 목표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 것이다.

###관상수련(향심기도)의 지침과 설명
1. 거룩한 단어 ----하나님이 당신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심에 동의한다는 지향의 상징으로서 거룩한 단어를 선택하라.
   1) 거룩한 단어는 하나님의 현존 안에 우리가 머물겠다는 지향과 하나님의 활동에 승복하겠다는 지향을 나타낸다.
   2) 거룩한 단어는 간단한 기도 중에 성령께서 우리에게 적합한 단어를 주십사고 청하여서 선택한다.   예 : 주님, 예수, 아빠, 아버지, 사랑, 평화, 샬롬(평화란 뜻), 고요 등.
   3) 일단 거룩한 단어를 선택하였으면, 그 기도 기간 중에는 바꾸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하면 또 다른 사고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4) 어떤 사람에게는 거룩한 단어보다 하나님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하나님을 바라보듯 나의 시선을 내면으로 돌려서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에 동의함을 나타낸다.       거룩한 단어와 마찬가지로 거룩한 바라봄도 같은 지침으로 한다.
2. 자세 ---- 편안히 앉아 눈을 감고 하나님께서 내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실 것을    동의하는 상징으로 거룩한 단어를 조용히 떠올려라.
   1) 편안히 앉는다는 말은 상대적인 편안함을 말하는데, 즉  너무 편안하여 잠이 오지 않을 정도며, 아니면 조금 불편하여서 기도 중에 몸의 불편을 생각하지 않을 정도를 말한다.
   2) 자세와 몸가짐 :: 어떻게 앉든 등은 곧게 세운다.  * 턱은 약간 안으로 당기듯 하는 편이 좋다. 의식적으로 하나씩 몸의 모든 부분에서 긴장과 힘을 빼고 온 몸을 주님께 맡겨 드리라.
   3) 잠이 들었으면, 깨어났을 때 시간 여유가 있으면 몇 분간 더 기도를 계속한다.
   4) 식사를 마친 뒤에 이 기도를 하면 졸리게 된다. 적어도 한 시간쯤 기다렸다가 향심 기도를 하라. 잠자기 직전에 이 기도를 하면 잠자는 습관을 해칠 수도 있다.
   5) 우리 주변과 내면에서 돌아가는 것들을 떠나 보내기 위하여 눈을 감는다.
   6) 가벼운 솜 위에 깃털 하나를 얹듯 아주 가볍게 거룩한 단어를 떠올린다.
3. 사고 --- 사고가 떠올랐음을 인식하면 거룩한 단어로 부드럽게 돌아가라.
   1) 사고'란 감각적 지각, 감정, 영상, 기억, 성찰 해설 둥과 같은 것 모두를 망라하는 단어다.
   2) 사고는 향심 기도의 정상적 부분이다.
   3) 아주 가볍게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라.는 것은 최소의 노력으로 하라는 말이다.  이것이 향심 기도 중에 우리가 하는 유일한 행동이다.
   4) 기도 시간 도중에 이 거룩한 단어는 아주 희미해지거나 사라지기도 한다.
4. 침묵 ---- 기도가 끝날 때 눈을 감고 2, 3분간 침묵 속에 머물러라.
   1) 이 기도를 그룹으로 할 때에는 인도자가 2, 3분간 주님의 기도를 하며 다른 사람들은 그냥 듣는다.
   2) 이 2, 3분은 우리의 정신이 외적 감각 세계로 되돌아오는 데 적응하는 시간을 줄 수 있게 하며,    또  일상 생활에 이 침묵의 분위기를 가져올 수 있게 한다.

###실행점들
1. 이 기도의 최소시간은 20분이다.     하루에 두 번 하도록 권고한다. 한 번은 아침 일찍, 그리고 한 번은 오후나 이른 저녁에  하라.
2. 기도가 끝나는 시간을 알려면 너무 요란하게 울리지 않는 자명종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3. 향심 기도의 주된 효과는 기도중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 경험하게 된다.
4. 신체적 증세 :
   1) 기도 중 신체의 여러 부분에 약간의 통증, 가려움, 뒤틀림을 느끼거나 그저 안절부절못하는 느낌을 가질 수도 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신체 속에서 정서적 매듭들이 풀어지는 데서 온다.
   2) 또한 사지가 무겁거나 혹은 가벼워짐을 느낄 수도 있다. 이것은 보통 영적 주의(注意)가  깊어져서 나타난다
   3) 어떠한 경우든, 주의를 주지 말 것이며, 아니면 그 감각에 잠간 머물렀다가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도록 한다.
5. 거룩한 독서는 향심 기도의 발전의 관념적인 배경을 제공한다.
6. 1 주일에 한 번씩 지원 그룹에서 기도하거나 같이 나눔을 하면 이 기도에 계속 헌신하도록 용기를 준다

###기도의 효과를 일상 생활로 확대하기
1. 하루에 두 번 기도한다.
2. 성경을 정기적으로 읽고(렉티오 디비나), 이 책에서 방법에 관한 부분을 공부한다
3. 매일 하나나 두 가지 방법을 수련한다.
4. 향심 기도회나 발전 프로그램(그 지역에 있으면) 등에 참가한다.
   1) 이 모임에 참가하면 개인 기도에 항구할 수 있도록 용기를 준다.
   2) 또한 테이프나, 독서나, 토론을 통하여 더 지식을 쌓을 기회를 준다.

###더 발전하기 위하여 알아두어야 할 것들
1. 기도 중에 여러 가지 종류의 사고를 분간할 수 있게 될 것이다.(6장-10장)
  1) 상상이나 기억의 일상적인 분심.
  2) 주의를 끌거나 산만하게 하는 사고들.
  3) 내성과 심리적인 개안 등.
  4) 내가 어떻게 하고 있는가?나 이것은 기막힌 경험이군. 등과 같은 자아 성찰.
  5) 무의식을 덜어내면서 일어나는 사고들.
2. 이 기도 중에 우리의 경험을 분석하거나, 기대를 걸거나, 다음과 같은 목표를 지향하는 것을 피하라.
  1) 거룩한 단어를 계속 반복한다.
  2) 아무런 사고도 갖지 않는다.
  3) 마음을 공백으로 만든다.
  4) 평화를 느끼거나 위안을 받는다.
  5) 영적인 경험을 성취한다.
3. 향심기도가 아닌 것.
  1) 이것은 기술이 아니다.
  2) 이것은 정신 이완 훈련이 아니다.
  3) 이것은 자기 최면이 아니다.
  4) 이것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다.
  5) 이것은 심령 현상과 같은 것이 아니다.
  6) 이것은 하나님 현존의 느낌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7) 이것은 논리적 묵상이나, 정감적 기도가 아니다.
4. 관상기도는
  1) 하나님과의 관계이면서 동시에 그 관계를 키워 나가는 수련이다.
  2)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운동이다.
  3) 그리스도와의 대화를 넘어서 그분과의 영적 교통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이다.
  4) 우리가 하나님의 언어인 침묵에 습관들이게 한다.

###관상기도의 방법
   사랑하는 벗이여, 그대가 한번 사랑의 탐색을 시작했다면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되돌려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가 전혀 없을 때 시작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이 사랑의 기도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다시 말해서 전부이신 하나님보다 못한 어떤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넘치도록 베풀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사랑을 탐색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대를 통해 놀라운 일들을  이루실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그대가 조금이라도  나와 비슷하다면 (바울 사도가 일깨워 주듯이) 하고자 하는 선은 실천하지 못한  경우가 많지만, 오히려 하고 싶지 않은 악은 실행하고 만다는 사실을 잘 알 것입니다.  때때로 보면 그대가 제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습관이 된 똑같은 죄를 되풀이해 저지르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무겁든 '가볍든' 모든 죄는 사랑하지 않는 행위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노력하십시오.  죄는 사랑과 정반대됩니다.  우리가 죄를 범할 때  그것이 죄가 되는 이유는 그 속에 하나님이나 이웃을, 또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행위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관상기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탐색이 사랑하지 않는 것과는 정반대로, 존재의 밑바닥에서부터 사랑하는 사람이 되도록 우리를 격려한다는 사실을 알면 커다란 위안이 됩니다.  언젠가  현자에게서 열매를 거두려거든 뿌리에 물을 주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려면 우리 존재의 심장부에서부터 사랑이 올라오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럴 때라야 비로소 우리는, 사랑하는 우리 존재에서 우러나는 행위가 부단히 사랑하는 행위로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때로 이것만이 그토록 짜증스러우면서도 오래된 습관으로 굳어진 미움의 행위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어린 합일은 죄와 죄의 원인들을 뿌리부터 없애버립니다.  어쩌면 이것이, 습관이 된 미움의 행위들을 피하려는 수천번의 결심과 개인적 노력보다 한결 효과적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원천, 유일무이한 사랑의 원천이십니다.  우리가 사랑의 원천과 하나가 되고자 할 때 우리 자신이 그 사랑의 중재자가 되고, 그리하여 사랑이 그 거룩한 원천에서 흘러나와 우리를 거쳐 우리 개개인의 세계로 흘러들게 됩니다.    이쯤에서 관상기도에 필요하다고 보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자 합니다.
  1) 방해받을 걱정이 없는 조용한 자리에 편안히 자리잡고 앉으십시오(위 기도하는 자세를 보세요). 의자에 앉을 때는 발은 바닥에 완전히 닿게 하고 양손은 느슨하게 깍지 끼어 무릎에 올려놓거나 무릎 관절에 바짝 붙이십시오. 의자는 덮개가 약간 부드럽고 팔걸이가 바짝 붙어 있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의자를 사용하든, 바닥에 앉든,  무릎을 꿇고 앉든지 앉는 자세는 본인의 편한 대로 앉으시고, 반드시 허리를 곧게 펴야 합니다. 눈은 감고, 머리는 편안한 각도로 세우십시오. 만일 몸이 불편할 때는 몸 상태에 맞추어 바닥에 않아도 되고 누워도 됩니다.
   2) 잠시 긴장을 푸십시오. 심호흡을 세 차례 하면 도움이 됩니다. 배를 한껏 부풀려 허파를 가득 채우십시오. 그런 다음 5초 동안 숨을 멈추었다가 천천히 내쉬십시오. 이렇게 세번 하십시오.
   3) 하나님을 향한 그대의 사랑과, 사랑으로 하나님을 껴안은 채 이 짤막한 시간을 보내고자 하는 그대의 열망을 표현하는 간단한 기도를 바치십시오. 이런 기도면 됩니다.
--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저는 아버지를 더욱더 사랑하고 싶습니다. 아버지의 현존 안에서 이 30분(1시간)의 기도시간을 은총으로 내려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저는 아버지를 향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아빠, 아버지를, 주님, 주여. 여호와여. 또는 그대가 선택한 어떤 낱말을) 낱말기도(거룩한 단어)를 선택하였습니다(경험상 일정한 단어를 사용하면 좋으며, 이 부분은 기도할 필요가 없으지기도 한다). 분심이 생길 때 이 낱말(주여....)기도(거룩한 단어)로 이 시간으로 돌아 오겠습니다.  저는 이제 성령님께 힘을 얻고, 예수님과 하나되는(일치 혹은 연합하는) 가운데, 이 기도로 아버지께 저의 사랑을 드리려 합니다.
#예 1 :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저는 아버지를 더욱 더 사랑하고 싶습니다. 아버지의 현존 안에서 이 1시간의 기도시간을 은총으로 내려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분심이 생길 때 주여함으로 이 시간으로 돌아 오겠습니다.  저는 이제 성령님께 힘을 얻고, 예수님과 하나되는 가운데, 이 기도로 아버지께 저의 사랑을 드리겟습니다.
#예 2 :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저는 아버지를 더욱 더 사랑하고 싶습니다. 아버지의 현존 안에서 이 1시간의 기도시간을 은총으로 내려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분심이 생길 때 주여함으로 이 시간으로 돌아 오겠습니다.  저는 이제 성령님의 도와 주심과, 예수님의 하나되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사랑을 드리기를 원합니다.
   4) 다음에는 낱말기도를 마음으로 조용히 되뇌이면서 그 기도에 차분히 평화롭게 애정을 가지고 마음의 눈과 귀를 주께 기울이십시오. 소리를 내어 기도하거나 혀나 입술을 움직이지 말고 다만 이 기도로 하나님을 향한 그대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음을 믿으며 신뢰하며 깨달으십시오. 이렇게 20분(1시간)을 계속하되, 그러도록 부르심 받는다고 느낄 경우에는 더 오래 해도 됩니다.
   5) 분심이 (상상이나 기억이나 사고) 생기고 거기에 말려들었음을 깨닫거든 간단히 <나는 내 낱말기도(거룩한 단어 : 3번에서 택한 낱말 아빠, 아버지를, 주님, 주여. 여호와여. 또는 그대가 선택한 어떤 낱말)로 돌아가리라> 말하고 그렇게 하십시오.  20분(1시간) 동안 묵상하면서 그렇게 하기를 수없이 되풀이해도 괜찬습니다.
   6) 만일 이 기도로 사랑의 탐색를 하는 동안 졸음이 오면 그 졸음을 축복으로 알고 하나님께 감사드린 다음, 다시 낱말(거룩한 단어)기도로 돌아가십시오. 졸았다고 해서 조금도 거리낄 것 없습니다. 하나님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으십니다.
   7) 이따금 낱말기도(거룩한 단어)를 '초월하는' 경우가 생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바치던 낱말기도가 중단되고, 그대의 의지가 어둔 방에서 조용히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며, 고요한 쉼 속에서 말씀이나 상징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은 더없이 멋진 일입니다. 혹시 그대 자신이 이런 상태를 맛보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거든 간단히 '나는 내 기도로 돌아가리라'고 말하고 그렇게 하십시오. 이런 체험을 하게 되면 시간은 아주 화살같이 지나갑니다.
   8) 시간이 다 되었다(알람 시계로 맞추면 좋습니다)는 생각이 들거든 시계를 보십시오. 아직도 몇 분이 남아 있으면 다시 기도로 돌아가서 20분(1시간)을 다 채우고,  그리고 나서도 사랑의 기도를 더 바치고 싶고 시간도 있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9).  기도가 끝날 때 눈을 감고 2~3분간 침묵 속에 머물러라   이 2, 3분은 우리의 정신이 외적 감각 세계로 되돌아오는 데 적응하는 시간을 줄 수 있게 하며,  또 일상 생활에 이 침묵의 분위기를 가져올 수 있게 한다. 그런 다음에 주님의 기도를 아주 천천히 드리며 기도를 끝냅니다. (저의 경우는 이 시간에 평소 관심사항 이나 문제 몇 가지 더 구하고 끝마칩니다)

###필로칼리아의 권유

---삶속에서 통회의 눈물-죽음 명상-예수기도-성령열매(절제, 인내, 사랑, 겸손) 묵상및 실천을 통하여 하나님 경외하기-경건을 훈련하라!!!
 : 거짓자아의 자기사랑에서 유래한 8가지 악한생각들인 식욕(폭음폭식/인색)-육욕(간음)-탐욕(돈을 사랑함)-자만(허세/허영)-교만(자기자랑)-태만(게으름/무관심)-분노-우울(낙심)의 발호를, 도우시는 성령의 깨우침 따라 깨어 경계하며 대적하여 이기며
 : 내적고요를 방해하는 집착들 곧, 거짓자아의 잡념(random thoughts)-과거기억 편린(memories)-욕심(desires)-근심(concerns)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 주께 합당한 무정념(Apatheia :주바라기를 사는, 주와 연합된 영의 참자아의 순결한 마음)으로 당신의 영광으로 이끄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경배하고 섬기며 누림(관상)

##사랑, 사랑, 사랑!!!

<(신30:6).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라.
(마22:37)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요일4:19).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시18:1-3).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하나님, 참으로 주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창세부터 당신이 낳으신 자녀들인 우리를, 당신께로 돌이키기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기울여 사랑해 오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의 눈이 어두워 그 사랑을 깨닫지도 못하고 어리석어서 사랑으로 반응할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은  그 사랑에 거역하는 우리를 위해 큰 일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고난 그 자체인 성자 예수님의  대속적인 십자가로 믿는 우리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셔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도록 깨우쳐 주셨습니다!!!  또한  성령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순종하며 걷는 이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심으로써 더욱더 하나님을 사랑함, 곧 마음과 뜻과 정성과 목숨을 다하여, 힘과 능력을 다하여 하나님 사랑함을 고양시켜 주셨습니다. 과연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며,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의 기름부음을 받아서 사랑을 알고 반응하는 존재입니다.  연약한 우리 스스로에게는 자생적인,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전혀  없으며, 그 능력도 없습니다.  오직 구하오니 평생 사는 동안 하나님을 사랑하며 신뢰하여 그 안에 머무르며 그 사랑을 누림과, 하나님의 얼굴과 그 능력을 구하여 부르짖음에 대한 거룩한 열정을 늘 새롭게 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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