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 큰 일들을 마치 작은 일처럼 하도록 도와 주소서. 제가 주님의 능력으로 그 일들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작은 일들을 마치 큰 일처럼 하도록 도와 주소서 제가 주님의 이름으로 그 일들을 하기 때문입니다. 치유 - 신유의 은사, 영적치유-오성춘 장신대 신대원 원장(퍼온글) 신유의 은사와 영적 치유를 이야기하려면 먼저 여기에 계신 여러분이 어떠한 신앙의 자리에 앉아 있는지 마음을 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똑같이 성경 말씀을 우리의 최종 권위임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증거를 삶의 최우선 순위로 정하고 있는 신실한 기독교인이라고 할지라도 치유의 은사나 하나님의 기적을 이야기 할 때는 생각이 다르고 입장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자리에 따라서 성도들은 신유의 은사와 하나님의 치유라는 글의 제목만 보아도 반응이 달라질 수 있고, 자기 입장에 굳게 서서 다른 사람의 생각을 무시하거나 간과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에게 드리는 말씀은 먼저 우리의 신앙의 자리를 점검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신유의 은사와 영적 치유를 이야기하려고, 첫 번째 제목으로 나의 자리는 어디인가를 확인해 보는 것입니다. ##나의 자리는 어디인가? --첫 번째, 오순절운동의 사람인가? (1) 오순절운동은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두 번째 주시는 하나님의 복으로서 성령 세례를 강조합니다. 이분들에게서<성령 세례는 방언을 증거로 하여 주시며 방언은 성령 세례를 받은자의 증거>입니다. (2) 오순절운동은 공적 예배에서의 방언을 말하며 은사 집회를 통하여 방언 받기를 구합니다. (3)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과거에 어느 교단에 속해 있었던지 그 교단을 떠나서 오순절 운동에 속한 교단으로 들어갑니다. (4) 오순절 운동은 신유의 은사와 기적을 믿고 강조하지만 방언보다는 덜 중요시합니다. 이들은 방언과 신유를 강조하는 외에 생활이나 신조에 있어서는 엄격한 근본주의 신앙에 서서 철저한 생활의 순결을 강조합니다. --두 번째, 은사운동 혹은 신오순절주의에 속한 사람이 아닌가요? 이 운동은 1960년 4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벤나이스시 성 마가 성공회 담임 데이빗 바녀 신부가 예배 도중에 교인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5개월 전에 자기가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실을 고백한 사건에 비롯되었다고 보고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자기 교단을 떠나지 않고 방언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바녀신부처럼 공개적으로 자기 교단에 머물겠다고 선언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은사 운동의 특징을 네 가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방언과 함께 성령 세례를 받는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면서도 <방언을 받아야만 성령 세례를 받는 것은 아니>라고 약간 부드러운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데 정통 오순절주의와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2) 공중 예배 시에 방언 말하는 것을 자제하게 합니다. 그러나 은사 집회에서는 방언을 사모하며 신유를 구합니다. 이런 점에서 역시 오순절운동과 약간 다른 점이 있습니다. (3) 방언의 은사를 받은 후에도 자기 교단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데서 결정적으로 오순절운동과 차이가 있습니다. (4) 은사운동은 방언의 은사, 신유의 은사, 기적의 체험 등을 같은 무게로 강조하며, 2,000년 전에 이스라엘 가운데서 기적을 베풀던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가운데서 신유의 은사를 베풀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전통적 복음주의운동에 속한 것이 아닌지요? 제가 임의대로 이렇게 이름을 붙여본 것인데 여러분께서 고치셔도 괜찮습니다. 특별히 합당한 제목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통적 복음주의운동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 이름은 복음주의운동 가운데서도 방언, 방언통역, 신유, 기적행함 등의 은사들이 사도시대가 끝나면서 중지되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뿌리는 프리스초닉 벤자민 위필드와 존 칼빈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전통적인 복음주의운동은 개혁신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오늘날에는 신유의 은사가 나타나지않는다고 믿고 있는 그룹을 제가 이렇게 따로 구분해 보았습니다. 존 스토트는 1966년 베를린에서 있었던 세계복음주의 대회에서 교회에게 주어진 사명은 병자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기적적인 치유사역을 행할 권세가 없습니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전통주의 복음주의의 입장을 j. i 페커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은사운동 그룹이 오순절운동주의로 부터 이어받은 사도시대의 은사들이 현재에도 나타난다는 이론은 적용이 불가능하다. 신약성경의 은사들 - 방언, 방언통역, 신유, 기적행함 등의 은사가 현재에도 나타난다는 것은 누구도 확신할 수 없고 또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네 번째, 제 3의 물결을 지지하지는 않습니까? 피터 와그너는 빈손 사이넌과 제임스 왕을 인용하면서 제3의 물결을 주장합니다. 와그너는 오순절운동이나 은사운동과 마찬가지로 성령의 은사가오늘에도 나타날 뿐 아니라 이 은사들은 교회성장과 그리스도의 복음확장과 성도들의 삶에 생명을 공급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의 네가지 점에서 제 3의 물결은 오순절운동이나 은사운동과 다릅니다. (1) 신약성경에서 보는 성령의 힘으로 가득 채워지는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성령세례라는 표현보다는 성령 충만으로 보아야 하며, 성도들은 계속적으로 성령 충만을 받아야한다. 이 입장의 뒷면에 보면 `모든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성령을 받는 것이다'라는 주장이 깔려 있습니다. (2) 성령세례는 일회적인 사건으로 성령을 받아 교회의 지체로 가입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3) 방언도 성령의 은사이나 모든 사람이 다 방언을 받아야 하는 것은아니다. (4) 성령께서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필요에 따라 성령의 자유로운 결정에 따라 사람들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실 수도 있고 안 주실 수도 있다 라는 것입니다. (5) 신유의 은사는 매우 중요한 성령의 은사로 `그리스도의 복음 증거를 위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은사라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대체로 이 4가지 입장 가운데서 어느 한 가지에서 있을 것입니다. 그중에서 오순절운동이나 은사운동이나 제3의 물결의입장은 그 정도나 강조의 차이점은 있을지라도 신유의 은사가 오늘에도나타난다고 믿기 때문에 신유의 은사를 이야기 할 때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복음주의는 상당한 저항감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글은 먼저 치유에 대한 일반적인 소개를 하고 하나님의 역사와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사건들을 종합하면서, 하나님의 치유를 하나님께서 단순히 우리의 병을 고치는 은사로 이야기하는 신유의 은사는 하나님의 치유의 과정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 두 번째로 치유의 네 가지 유형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아퀴나스신학교에서 목회학을 강의하다가 병으로 고통하는 형제들과 자매들의 상담을 받으면서 그들을 돕고자 기도하던 중에 신유의 은사를 받은 프란시스 맥넛이라고 하는 신부가 있었습니다. 이 프란시스 맥넛은 이론적이고, 합리적이고, 어떠한 기적도 믿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그 지역의 많은 수도원과 수녀원에서 있던 분들이 찾아와서 자신들의 질병으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것을 상담할 때 그는 이것을 어떻게 도울수 있을까 하는 과정에서 이런 신유의 은사를 받은 분이십니다. 이 분은 질병의 종류와 질병의 발병원인에 따라서 네 가지 형태의 치유로 유형을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질병은 같은 원인으로 오지 않습니다. 어떤 질병은 개인적인 피해로 인해 발생할 수도 있으며, 또는 과거의 고통스러운 감정의 상처로 인해 발생한 병도 있으며, 사고나 바이러스로 발생한 경우도 있으며, 귀신으로 말미암아 오는 병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질병의 원인들이 여러 가지라는 뜻은 질병을 고치는 데에도 여러가지 방법이 필요하며 그 질병을 위하여 기도할 때도 여러 가지 다른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적이면서도 임상적인 지혜를 포괄한 치료는무엇인가? 앞서 언급한 프란시스 맥넛의 분류에 근거하여 우리는 다음의네가지 유형으로 이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첫 번째로 영적인 원인으로 오는 질병입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죄가 원인이 되어 발생하는 질병을 말합니다. 마가복음2장 1-12절에 나오는 중풍병자에 대하여서 성경에 자세한 언급은 없으나예수님께서 지붕을 뚫고 자기앞에 내려온 침상에 누워있는 중풍병자를 보실 때에 먼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병이 죄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이웃과의올바른 관계가 파괴된 인간은 흔히 정서적인 질병을 앓게 되며 그것이 때때로 신체적인 질병까지도 일으키게 됩니다. 이러한 경우에 우리의 기도는그 개인적인 죄의 회개를 촉구하는 기도를 먼저 드려야 하며, 죄의 용서없이는 온전한 건강회복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 두 번째는 감정의 상처로 오는 질병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질병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가운데서 입은 마음의 상처 때문에 오는 병입니다. 현대심리학은 인간이 얼마나 상처입기 쉬운 존재인가 하는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아동기 경험과 감정억압이 무의식의창고에 차곡차곡 쌓여있다가 정신장애와 질병을 일으키며 수많은 사건들과관계들이 인간을 스트레스에 쌓이게 만듭니다. 이러한 정신적인 억압, 상처, 스트레스 등은 흔히 영적인 질병을 일으켜하나님을 떠나게 하며 육체를 병들게 만듭니다. 펠레티어는 스트레스를연구,조사한 후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지난 십여년동안 의학적 정신적인 문제발생의 제 1의 원인은 스트레스이다. 스트레스가 모든 병의 발병원인중 50-80%를 차지하고 있다. 스트레스는 그 사람의 뇌파의 활동, 면역의 균형, 혈압과 피공급, 호흡의 속도와 호흡량, 내분비 소화과정 등에 현저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이렇게 감정이 원인이 되어 질병을 일으켰을 때에는 의학적인 치료와 함께 상담이 필요하며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도 과거의 상처들과 억압들과 스트레스를 치유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카터 대통령의 여동생되는 스테이픈 카터의 '내적치유'(Inner Healing)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에서 보면 사람들과의 감정으로 입은 상처를 어떻게 기도로 고치는가 하는 내용을 주로 써놓은 책입니다. 우리 말로도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아주 작은 책인데 지금은 구하려고 해도 구하기 어렵더군요. -- 세 번째, 육체적인 질병입니다. 이것은 질병, 사고, 심리적 스트레스 등의 정신,신체적인 원인에 의하여 발생하는 질병으로 성경은 이러한 질병을 하나님께서 고치시고 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러한 육체적 질병의 환자가 신체적 장애만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환자에게 총체적인 장애를 초래하고 있다고 암시하고 있습니다. 조금 뒤에 설명하겠습니다만, 예컨대 마가복음1장 40-45절에 나오는 문둥병자를 봅시다. 그의 질병은 분명히 문둥병이라는 육체적인 원인에서 왔습니다. 그 문둥병은 그에게 정신적으로 공포, 불안, 수치, 분노, 스트레스 등의 정서적 질병을 가져다 주는 정서적 장애, 가족과 사회, 사랑하는 이웃과 격리되어 문둥병자촌에 수감되는 사회적 소외를 당해야 하는 사회적 장애, 이웃과의 친밀관계가 단절되는 아픔을 경험해야 되는 관계의 장애, 하나님께 재앙을 당하고 있다는, 저주받은 인생을 살고 있다는 하나님과의 단절된 영적인 장애가 겹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체적 장애는 다양한 질병과 장애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며, 그의 삶을 총체적으로 위태롭게 만듭니다. 이렇게 신체적인 원인에 의하여 발생한 질병은 의학적인 방법을 사용하면서 육체적인 질병의 치유를 위한 기도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특히 신체적인 병이 총체적인 장애를 만들고 있기 때문에 신체적인 질병의 치유와 함께 총체적인 건강회복을 위한 기도를 드리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 네 번째, 귀신에 의한 질병이 있습니다. 성경은 귀신들려 질병에 빠진 사람들을 많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가나안여인의 딸은 귀신들려 정신적으로 미쳐있었으며, 간질병에 걸리기도 하며, 눈멀고 벙어리가 되게 만들기도 합니다. 오늘날 어떤 이들은 모든 질병의 원인은 귀신들렸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극단에 흐르기도 하고, 반대로 다른 이들은 귀신들리므로 병이 온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려고 하는 극단에 빠지기도 합니다. 모든 질병이 귀신 때문이 아닌 것은 사실이며, 질병 가운데는 귀신에 기인하는 것이 있다는 것도 성경이 가르치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귀신에 기인하는 질병은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의 방법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세기 이후에는 기도의 방법으로만 귀신을 쫓아 내도록 제한시키는것이 교회의 전통이 되어 왔습니다. 귀신에 의해 질병을 앓고 있을 때에는 귀신의 속박에서 구출하여 달라는 기도를 하나님께 하여야 합니다. 성경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실 때는 그 귀신을 책망하여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마이클 그린이라는 사람은 귀신에 의한 병을 분별한 11가지 특성을 제시합니다. 그러니까 이사람이 귀신에 들린 병인지, 정신적인 장애로 오는 것인지, 육체적인 것에서 오는 질병인지를 분류하여 그 가운데 귀신에게서 온 것이라는 특징11가지를 써놓았는데, 예수 그리스도, 성경, 십자가등 하나님께 속한 것에 이상 반응을 일으킴, 우상숭배와 이단과 관계가 있음, 우상이나 이단이 숭배하는 목적물을 접촉하거나 가지고 있을 때 발병함, 조상이 귀신병에 걸린 이력이 있음, 성적인 집착, 또는 성적인 도착에 빠짐, 예배분위기에 강하게 반발함, 기도하기가 아주 어려움, 이상한 두려움에 자주 사로 잡힘, 비상한 힘을 발휘함, 목소리 변화가 심함, 눈의 움직임이 이상함 등으로 분류하게 됩니다. *** 이상과 같이 질병의 유형이 다양하다고 한다면 병든 사람을 치유하기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 알아 보겠습니다. 프란시스 맥넛은 다음과 같이 3단계의 치유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제 1단계, 근본적으로 어떠한 질병인가? 그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 인가? 어디가 아픈가?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어 나가는 단계입니다. 병의 진단과 원인조사를 뜻합니다. 제 2단계, 질병의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왜 이런 질병을 앓고 있는가? 라는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제 3단계, 어떠한 도움과 수단이 필요한가, 곧 기도가 필요한가? 상담이나 의료 혹은 약물 치료가 필요한가? 등의 결정을 하는 단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 가지 과정을 거쳐서 환자를 총체적으로 치료하신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질병을 고치실 때에 기도라는 단 한가지 통로만을 통해서 고치지 아니하시고 그 외에도 그 발병의 원인에 따라서 약물치료, 의학적 치료수단, 축사, 상담, 목회 등의 통로를 통해서 얼마든지 환자를 치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기도라는 한가지 통로를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신유의 은사를 주신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조그만 하나의 통속에 가두는 위험스런 일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 세 번째, 신앙과 치유의 상관관계 -- 고침을 받으려면 믿음이 있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대체로 치유를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믿음으로 고침을 받든지 또는 믿음이 치유의 전제라고 하든지 아니면 고침을 받으려면 믿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성경을 보면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구절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여인을 향하여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디메오 또한 곧 보게 되어 예수님을 좇았다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네 믿음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실 때 바디메오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러한 구절들만 보아도 우리는 믿어야 고침을 받으며 고침 받으려면 믿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말씀과 하나님의 역사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질병과 구원의 사건들 가운데는 수혜자 즉 고침을받거나 구원을 받은 자들이 믿음과 치병과 구원 사이에 어떤 연관성을 찾기에 어려운 사건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38년 동안 병이 들어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있던 병자는 자기를 고쳐준 이가 예수님이신지를 알지 못했는 데도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 문제는 여러분들께서 성경구절을 다시 한번 점검해 보세요. 예수님이 거라사인의 지방에서 만난 군대귀신 들렸던 병자는 예수님이 떠나기를 간구했으나 고침을 받았읍니다. 마가복음 5장1절로 20절을 읽어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가버나움에 있던 제사장의 하인과 왕의 신하의 아들은 집에 누워만 있었고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었으나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런 경우에 믿음으로 고침을 받는다는 명제를 정당화시키고자 한다면 그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신유의 사건들 가운데 수혜자의 믿음이 신유의 조건이 되는 사건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건들도 있다면 우리는 수혜자의 믿음과 신유와의 관계를 어떻게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실제로 성경은 수혜자에게 전혀 믿음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사건을 해석하면서 신유를 믿음의 결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사도행전 3장의 앉은뱅이 거지의 치유사건은 초대교회의 선교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제 9시 기도시간에 성전에 올라갈 때에 그 앉은뱅이는 사도들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쳐다 본 것이 아닙니다. 그저 단순히 무엇을 얻을까 하여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자기에게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는 사도들에게 더 많은 동정을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베드로는 단순히 그의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며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명했습니다. 그리고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았을 때에 이것이 결코 베드로와 요한의 권능과 경건의 결과로 온것이 아님을 선포하고있습니다. 이 구절은 앉은뱅이의 믿음도, 베드로와 요한에게 있는 믿음도 앉은뱅이를 고친 조건이 되지 않는다고 분명히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베드로는 믿음의 결과로 온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낳게 하였느니라. 믿은 사람은 없는데 믿음으로 고쳤다는 거예요. 거기에서 보면 성경해석이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경우에 우리는 어떻게 믿음을 이해하여야 합니까? 신유의 수혜자인 앉은뱅이에게도 믿음은 없었고, 신유의 은사를 실천한 베드로와 요한에게도 권능이 없었다면, 이 앉은뱅이를 고친 권능 즉 믿음은 어디에서왔을까요?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신유의 사건들 속에서 공통된 요소들을 분석하면서 그 대답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 신유의 사건의 공통된 요소들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앞서 언급한 사건들은 그것이 수혜자의 믿음으로 일어난 것이든, 또는 수혜자에게 어떤 믿음의 근거도 없는데 일어난 사건이든 간에 몇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TIP>>그것은 오직 하나 <수혜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그 동기가 되고, 목적은 전인구원에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매개자 자신이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과 신뢰 가운데에서 영광의 하나님께 잠겨들어, 하나님의 임재의 통로로 자신을 내어드리고, 치유를 인도하시고 지시하시는 <사랑과 긍휼의 기름부음>이신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과 느낌을 자신에게 주셔서 역사하시도록, 매개자는 기도해야만 합니다. *첫 째로 모든 신유의 사건에는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관심의 촛점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은 여인, 맹인이되어 거지차림을 하고 있는 바디메오, 38년동안 고생한 앉은뱅이, 백부장의 하인, 또는 모든 치유의 사건은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의 촛점을 모으고 있습니다. 성경에 쓰여진 신유의 사건들은 그 병이 어떠한 병이냐, 또는 어떻게 해서 그런 병에 걸리게 되었느냐, 또는 어떠한 방법으로 고쳤느냐 하는 것에 그렇게 중요하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 환자가 그 질병으로 인하여 얼마나 고통당하고 있느냐, 그 질병으로 어떠한 장애를 만나고 있느냐, 또는 어떻게 그 환자를 고통 가운데서 건져내어 생명이 넘치는 풍성한 삶을 살게 할 것이냐 등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성경의 신유의 사건들 중 첫번째 공통점은 환자 자신의 고통과 완전한 인간회복, 즉 구원에 관심의 촛점이 맞춰져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 공통점은 성경의 신유의 사건의 공통점은 하나님께서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에게 지극한 관심을 가지시고 그들을 질병의 고통 가운데서 건지실 뿐 아니라 생명이 넘치는 풍성한 삶으로 인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인간의 권능이나, 경건이나, 믿음이 신유의 사건들을 일으키는힘이라고 암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예수께서 병을 고치시는 사건 속에서 사람들은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그들의 병을 고치고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스가랴선지자의 예언대로 신유의 은사는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도 되지 아니하며,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으로만 되는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신유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 가운데서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하나님의 지휘에 따라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서 행하시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유를 이야기할 때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사역의 하나로 이해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공통점은 성경에 기록된 또하나의 공통점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손을 사용하여 신유를 베푸시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복음서에 기록된 대부분의 신유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심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인간 예수님의 치유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와 달리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예수님의 치유는 인자의 치유요, 예수님 자신 한 인간으로서의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사랑과 긍휼의 기름부음의 움직임에 따라,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병고치실 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 자신에게는 영광을 돌리지 않은 것은 예수님 자신을 우리곁에 서 있는 한 인간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공통점은 사도행전에서도 분명해집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치유는 전적으로 인간이라는 통로를 거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앉은뱅이를 고칠때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의 치유의 통로가 되고 있으며, 유두고를 살릴 때 바울이 하나님의 치유의 통로가 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신유의 전 과정이 믿음의 사건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신유는 필연적으로 하나님 믿음을 불러 일으킵니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모든 신유의 사건,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환자에게 사랑의 관심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그가 선택하고 위임한 사람들을 통하여 고통당하는 환자를 치유하고 넘치는 생명으로 치유하시는 구원의 사건인것입니다. 즉 신유의 사건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일어나는 사건이요, 고통당하는 인간을 회복시키시고 완전케 하시는 구원의사건이시요, 하나님이 선택하고 위임한 하나님의 종들을 사용하여 일으키신, 하나님 자신의 목회를 일으키시는 믿음의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신유의 은사의 중심은 환자의 확신에 있는 것도 아니요 질병을 고치는 신유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신유의 중심은 하나님께서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환자를 사랑하시고 그를 고치시기를 원하신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에 있는 것이며, 그 환자를 고쳐 완전한 인간 --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한 인간으로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유는 하나님의 사건이요, 하나님의 구원이요,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 속에 믿음으로 넘치게 만들어 가는 과정 가운데 하나입니다. 즉 신유의 사건 그 자체는 믿음의 사건이요, 믿음의 과정이요, 믿음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믿음이 치료받아야 하는 모든 인간 속에 이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음없는 우리 가운데서, 믿음이 생기도록 이루어 나가는 하나님의 역사의 과정이며, 그것을 우리가 <하나님믿음>으로 이해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 네번째 영적치유와 전인 회복입니다. 흔히 하나님께서 육체의 질병을 치료하는 신유의 은사와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적인 병인 죄를 용서하고 영생을 선물로 주신 구원, 소위 영적치유를 구별하여 보는 것은 신유와 영적치유 하나님의 구원의 외형에 너무 지나치게 관심을 모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외형상으로 볼때 신유는단순히 우리의 육체의 질병을 고치는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치유는 인간의 삶의 구석 구석을 좀먹고 썩게 만드는 죄의 독소를 물리치고 씻어내어 진정한 인간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보이는 신유와 영적치유는 이처럼 명백하게 구별할 수 있는 경계선을 찾기 힘들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즉 신유와 영적치유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의 양면이요, 영적치유의 한 과정 곧 신유의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문둥병 환자의 치유의 사례를 우선 소개하고자 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마가복음 10장 40-45절에서 읽은 문둥병자의 사건을 예를 들어 살펴봅시다. 이 사건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고치신 신유의 사건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네가지 입장 가운데 전통적 복음주의 입장에 따른 이 사건은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증거하기 위한 기적적인 신유의 사건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사건의 목적은 단순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입장을 따르면 문둥병으로 고통당하는 문둥병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든가 문둥병자의 구원등은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문둥병자를 고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이 사건은 단순한 신유의 사건이요, 영적인 치유와는 별개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세번째 입장입니다. -- 문둥병자의 측면에서 보면, 우리가 몸의 질병으로 고통당한다고 생각하는 이 문둥병자는 첫 번째, 육체적인 질병 뿐 아니라 총체적인 인간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인간적인 문제에 대해서 알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육체적인 결함에서 오는 문제입니다. 이 환자는 문둥병이라는 육체적인 질병으로 고통 당하고 있습니다. (2) 정신적인 결함입니다. 이 환자는 문둥병으로 말미암아 절망, 분노, 수치, 죄책, 불만, 불안, 공포, 무기력, 부정적 사고 등 정신적, 정서적 충격을 받고 있습니다. (3) 사회 속에서 그는 사랑의 공동체로부터 강제로 격리되어 문둥병자촌에 수용되어 살고 있으며, 모든 인간의 특권과 정체성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4) 영적인 단절입니다. 이 병은 저주의 병입니다. 하나님은 더이상 사랑이나,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저주와 재앙의 하나님이 되고 있습니다. (5) 복합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이 환자에게 가정의 문제, 경제적인 문제, 관계의 문제 등을 가져다 주었으며, 죄의 삶을 살게 만들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삶을 살게 만들고 있습니다. -- 두 번째,예수님의 관심과 치유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에 관심을 두고 이 환자를 치유하고 있느냐? 정서, 정신의 치유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문둥병을 민망히 여기사 그를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문둥병자의 마음과 자기의 마음을 하나로 공감하므로 문둥병자의 상처입은 정서를 치료하고 있습니다. -- 세 번째, 사회적 소외의 치유입니다. 예수님은 교제가 금지된 문둥병자를 만나시며 그의 몸에 손을 대시며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리게 하므로 소외되었던 문둥병자에게 사회적 환원과 친밀 공동체 회복을 성취시키십니다. -- 네 번째, 육체의 치유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므로 문둥병이 그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함을 받게 하십니다. -- 다섯 번째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입니다. 문둥병자는 예수님이 문둥병을 고치시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임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문둥병이 있는 자신의 몸에 손을 대시고 말씀으로 그 병을 고쳐주셨을 때 저주의 하나님은 치유와 사랑의 하나님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더 이상 그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사 그를 고치셨습니다. 이제 그 문둥병자는 하나님께 감격하며 헌신하는 새 사람,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 여섯 번째, 치유와 구원입니다. 우리는 위에서 본 대로 문둥병자의 근본문제가 육체의 병인 것은 사실이나 그의 질병은 육체의 질병에만 머무르지 않고 있습니다. 정신적, 사회적, 영적인 병까지 야기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치료하실 때도그 문둥병자의 문둥병을 고치는 데만 관심을 집중시킨 것이 아닙니다. 그의 정신, 정서의 상처를 치료하고 사회적 소외를 극복할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도우며,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를 치유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문둥병의 치유에만 그치지 않고 그가 하나님과의 사이에 사랑의 관계, 감격적인 친밀관계를 회복시켜주는 데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치유는 문둥병의 치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둥병자의 모든 결함을 총체적으로 치유하사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 출발하도록 하는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분명한 한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치유가 단순히 한 인간의 육체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전인적으로 회복시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육체의 치료와 영적인 구원을 구분하는 것은 치유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는 오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 다섯 째 인간 존재 차원의 연계성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폴 틸리히는 인간의 관심사를 예비적 관심과 궁극적 관심으로 구분하여 삶의 차원을 두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틸리히에 따르면 예비적인 관심은 우리 인간의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필요와 욕구에 대한 관심이며, 궁극적 관심은 인간의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에 대한 관심입니다. 전자는 육체적인 건강, 정신, 정서적인 건강,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 사회적 관념과 정의사회 구현, 자연의 보존 등에 관한 인간의 필요를 채우는 것에 촛점을 맞추고, 후자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그 촛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양자는 서로 배타적이거나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며 양립적입니다. 그 뜻은 예비적인 관심이 보다 효과적인 충족을 보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틸리히에 따르면 먼저, 인간의 육체적 질병의 치유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촉진시키며 그 다음,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육체의 질병치료에 영향을 줍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치유는 육체의 질병만 치료하는 의사나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만을 회복하는 제사장이아니라 육체의 질병과 함께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 까지도 회복할 수 있는 의사겸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의사 제사장의 완전한 치유자의 모델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 중점을 둔 제사장들은 육체의 건강과 질병의 치료에 관심을 가지고 질병의 치료를 담당한 의사는 영적인 관계 회복을 지향할 때에 진정한 치유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브리스터는 상담학자로서 조직신학자인 틸리히와 다른 입장에서 질병의 치료와 영적인 구원의 관계를 논하고 있습니다. 그는 목회상담이 목적인 독특성을논하면서 일반 상담자들이 질병 그 자체에 치유에 관심을 가진데 비해서 목회 상담자들은 고통당하는 인간에게 관심의 촛점을 모으기 때문에 내담자의 전인 건강과 더불어 영적인 구원이라는 이중의 목표를 가지고 상담해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전인 건강이라는 것은 수평적인 삶의 차원을 건강하게 회복시키는 것이며 몸의 건강, 정신, 정서의 건강, 건전한 인간 관계, 정의로운 사회 구현, 자연의 보존 등을 통하여 인간의 삶의 전인성을 회복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영적구원이라고 브리스터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우리의 모든 삶의 차원을 하나님의 영적 질서 안에서 조화로운 삶을 살게하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받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브리스터의 입장은 틸리히와 다른 용어를 사용할 뿐 실제로 이 두 학자가 주장하는 삶의 차원은 거의 동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학자들은 한 사람은 조직신학자로서 다른 한 사람은 상담학자로서 그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에 구체적인 설명의 방법이나 사용하는 용어에 차이가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 두고 있는 주장은 이 세상에서의 수평적 삶의 차원들과 하나님과의 수직적 삶의 차원에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 양자 모두의 치유가 없이는 건강한 인생을 살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워드 클란벨에서 좀 더 구체적인 삶의 차원들의 연계성을 볼수 있습니다. - 클란벨은 상호 의존적인 삶의 차원을 여섯 가지로 구분하여설명합니다. 그 중에 오차원들은 수평적인 삶의 차원이요 나머지 한 차원은 수직적인 또는 영적인 차원입니다. 1, 정신 정서적 차원, 2, 몸의 차원, 3, 이웃과 관계의 차원, 4, 사회적 삶의 차원, 5, 자연과의 관계의 삶, 이 다섯 개의 차원은 수평적 차원의삶이고 6, 하나님과의 관계의 차원은 영적인 차원입니다. 클란벨에 따르면 다섯 차원의 수평적 삶은 상호 연결이 되어있어 하나의 결함은 다른 차원들의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며 한 차원의 치유도 다른 차원이 치유에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클란벨은 수평적인 차원의 삶이 서로 연계되어 있으므로 상담이나 목회는 전인적인 회복을 염두에 두고 상담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하지만 그가 이처럼 여섯개의 삶의 차원을 이야기 할 때 그 핵심은 영적인 차원에 중심을 둔 인간회복이라는 데 있습니다. 즉 모든 수평적인 삶의 차원들은 영적인 삶의 차원에 연결이 되어 있으며, 모든 수평적인 삶의 차원들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하에 놓일 때에 영적인 차원으로 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실제로 영적인차원에 속한 제 6의 삶은 존재하지 않으며 수평적인 다섯개의 삶의 차원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때에 그것들이 곧 영적인 차원으로 변화된 것이라는 겁니다. 즉 '인간의 영'이란 뜻은 인간의 수평적인 삶의 차원을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고리의 역할을 하는 인간의 삶의 차원입니다. ## 이상에서 우리가 논의하는 것을 요약하면 인간의 모든 삶의 차원으로 상호연계 되어 있기 때문에 (1) 육체의 치유와 영적인 구원을 구별하여 이야기 할 수 없고, (2) 육체의 치유는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우리 영적인 삶에 영향을 미치며 영적인 구원은 우리의 육체의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는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치료는 저절로 영적인 가치가 생겨나는 것인가?그리고 영적으로 구원을 받으면 모든 질병이 치유되는 것인가?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대답할 수있습니까? 치료, 구원, 그리고 믿음 모든 치료가 하나님의 구원의 의미를 함축하고있으며 모든 의사들은 어떤 의미에서 영적인 사역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이 틸리히의 주장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공동체 안에서 치유를 논하고있기 때문에 이러한 틸리히의 주장은 우리 논의 밖에 있는 일입니다. 신유의 은사는 육체의 질병의 치료에 관심을 가진다는 점에서 의사의 관심과 비슷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몇 가지 점에서 의사의 관심과 목사의 관심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가 없습니다. (1) 신유의 은사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믿음의 사람들에 의해서 일어나게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의사가 병자 앞에서 치료행위를 하는 것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프리스터가 지적한 대로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이 환자 앞에 설때에 그 환자는 믿음의 사람을 통하여 거기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깨달으며 그 하나님 앞에 자기를 세웁니다. 즉 신유의 은사는 그 시작에서부터 몸의 질병의 치료와 함께 그 환자를 하나님앞에 서게 만든다는데 차이가 있습니다. (2) 교회 공동체에서 질병을 치료하는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을 고칩니다. 가끔 약품이나 기름이나 물이나 술을 병행하여 사용할 수 있으나 이 때에도 믿음의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안수하며 병을 고칩니다. 이 때에 환자는 자기에 육체의 질병을 치료하는자가 사람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을 통하여 자기에게 임재하신 주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신유의 은사가 주 예수님을 그 환자와 직접 연결시켜주는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유는 그 자체가 영적인 행위요, 영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3) 신유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질병을 고치신다는 믿음에 근거 합니다. 즉 신유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 속에 오셔서 병으로 고통하는 환자를 병의 고통속에서 해방시켜 건강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신유를 통하여 환자에게 들어오시며 환자의 마음과 정서와 삶을 총체적으로 회복시킬 뿐 아니라 그 환자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거나 하나님과 더 친밀한 관계를 갖도록 만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앞서 언급한 인간존재의 차원의 연계성을 거듭 확인합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수평적인 삶의 여러 차원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수평적인 삶은 하나님과의 영적 삶의 회복에서 완성되었다는것입니다. ##결론적으로 (1) 하나님은 우리의 수평적인 삶에 관심을 가지고 또 수평적 차원의 삶을 건강하게 회복시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 내시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눌린 자에게 자유를, 불구자를 완전하게 회복시키십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억압과 폭력에서 구원하시며 모든 대적자들로부터 이스라엘을 건지십니다. 이 모든 사건은 하나님 구원의 한 부분입니다. (2) 모든 수평적인 차원은 그 자체의 건강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이라는 두 가지 삶의 차원을 가집니다. 예를 들면, 몸의 건강회복만으로 몸의 가치가 완성되지 않으며 하나님 안에서 영적인 목적의 가치를 발견하여 영적인 몸이 되었을 때에만 즉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몸이 되었을 때에만 완전한 건강을 회복합니다. (3) 신유란 몸의 치료에만 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건강에까지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들을 사용하여 우리의 질병을 고치실 때에 그 질병의 치유와 함께 영적인 구원까지 관심을 가지시고 치유합니다. 하나님은 교회공동체를 통하여 환자를 고치시며, 치유된 환자에게 더욱 영적 건강과 몸의 건강을 증진 시키도록 교회에게 위임했습니다. (4) 신유는 고침받은 자를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계속하여서 신실하게 살수 있을까를 도와주는데 까지 포함이 됩니다. 요약하면, 모든 신유의 과정은 영적인 구원에서 완성되며 영적인 구원은 몸의 치료와 전인건강을 회복시킬 때에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넘치는 삶에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이 모든 치유의 과정을 통하여서 믿음은 환자와 신앙 공동체에 전달되고 있는 것입니다. 치유사역의 접근 A. 신유의 접근 1. 믿음 히브리서 11:1에는 믿음을 정의하기를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다. 로마서 10:17에 의하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7에서 믿음에 대해 밝히기를 <보는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했다. 야고보는 약1:5-8에서 <의심하지 않는것>이라고 말한다. 믿음이란 이처럼 보이지 않고 불가능한 형편에서도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 말씀대로 의심없이 순종하는 것이다. 이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그에게서 상을 얻게한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일으킬 수 있다.> 힐트너(Hiltner)는 말하기를 [신도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을 믿고, 그것에 주의하면 뚜렷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보다도 더욱 큰 힘으로 그의 곁에서 싸워주셨고, 현재 싸우고 계시며, 앞으로 싸워 주실것을 믿을 때, 영적 육적으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고 했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중에는 믿음을 요구하시거나 믿음을 보시고 능력을 나타내신 경우가 많았다. 또 그 반대로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능력을 행치 않으시기도 하셨던 것이다. 2. 기도 기도는 하늘의 우리 아버지에 대한 믿음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E.M.Bounds는 기도를 정의하기를 [기도란, 하나님의 현존을 나의 현존으로 인식하여 그 분에게 나의 모든 필요를 요구하고 그 요구가 충족되면 충족된것을 가지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과 그 분의 사업을 위하여 투자하는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의 열망이다.]고 했다. 믿음이 불가능한 것에 대한 실현을 기대하는 특권이라면 믿음은 기도를 통해서 표현되게 되어 있다. 이런 믿음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병의 치유를 위해 기도할 때 그 병은 치유된다. 아그네스 샌포드는 기도에 관해 말하기를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통이다. 기도는 하나님께 자기를 바치어 하나님의 권능으로 충만되어 풍요한 생명의 흐름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랑이신 하나님의 무한한 생명력이 기도자를 통하여 이웃에게 흘러 들어 갈 수 있는 통로가 된다]고 했다. 존 터너는 [기도는 하나님이 치유의 에너지를 내어 보낼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을 채우는 것이다. 기도로서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이 잘 통할 수 있도록 통로를 깨끗케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치유를 포함한 기도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주의할 기도의 조건들이 있다. 1)합당한 이유를 위해 기도하라.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4:2-3) 2)올바른 관계안에서 기도하라.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하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3:7) 3)올바른 믿음을 갖고 기도하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1:6-8) 4)올바로 행하여 기도하라. -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3:22) 5)올바른 영역안에서 기도하라.-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5:14-15) 6)올바른 절제심으로 기도하라. -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눅18:1) 이 모든 조건을 구비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소원의 응답을 누릴 수 있다. 3. 말씀 예수님께서는 치유 사역을 행하실 때 말씀만으로도 능력을 나타내셨다. 예수님의 말씀은 생명을 창조하고 치유하고 권능이 있었다.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고 하셨다. 또한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으며,...> 믿는 자 속에 역사한다고 했다. 오늘날도 전도나 설교, 가르침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되어지는 곳에서는 영육간의 질병을 치료하며 조화와 관계성이 온전해지는 변화가 일어난다. 육체적인 치유가 기적적으로 일어 났다해도 말씀이 들어가지 못하면 곧 다시 넘어지고 더 큰 질병이나 죄에 빠질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38년된 질병에서 나음을 입은 병자에게 말씀을 주셨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5:14) >말씀은 치료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치료후의 회복과 성장 그리고 더 큰 질병의 예방 능력도 가지고 있다. 4. 죄의 고백 죄는 전인적인 인간의 건강을 위협하고 파괴한다. 어떤 육체적 질병은 하나님 앞에서의 죄의 댓가로서 주어지기도 한다. 또한 육체적이지 않더라도 정서적으로 심한 고통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매일의 생활에서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 건강을 누리는 길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모두가 약하고 죄를 범하는 존재들이므로 죄의 용서가 필요하게 된다. 죄의 파괴력은 하나님 앞에 고백과 회개를 통한 용서를 얻을때 제거되어진다. 우리의 죄의 고백은 실제적인 치유의 능력이 있다. 곧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와 그에 따른 육체적 질병의 짐을 대신 져 주셨기 때문에 사죄의 고백은 용서와 해방감, 그리고 자유와 건강을 누릴 수 있게 해준다. 여기에 대한 근거가 되는 말씀으로는 다음과 같은 귀절들이 있다. --마8:16-17.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벧전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치유는 사죄의 결과라고 볼 때 죄의 고백과 그에 따른 용서는 치유의 역사를 가능하개 한다. 고백을 통한 용서의 감격과 기쁨은 육체에 영향을 미쳐서 육신의 병도 치유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이런 사죄의 고백과 용서받는 감격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에게도 잘못을 고백하며 용서받을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 그럴때 하나님으로부터의 치료의 에너지가 우리의 영혼과 다른사람들의 영혼을 적시고 흘러서 건강한 공동체와 개인을 만들 수 있다. 5. 예배 모든 예배 의식속에는 누군가에게 어떤 종류의 치유가 일어나게 마련이다 . 즉 성도의 교제를 통해 외로움이 치유되고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깨달을 때 과거의 심각한 죄책감이 치유되며,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새로운 희망이 싹터 슬픔이 치유되고, 용서받았기에 용서할 수 있게될 때 실망한 영혼이 치유되고, 하나님은 인생의 사소한 일 조차도 처리해 주실만큼 위대함을 깨달을 때 근심이 치유되고, 자기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게 중요한가 인식할 때 자기 비하가 치유되고, 예배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발견할 때 돈에 대한 강박 관념이 치유된다. 그러므로 예배를 통해서 우리의 삶을 열어놓고 깨끗함과 치유의 능력을 가져오는 성령의파도를 받아들여야 한다. 6. 성례전 성례전을 통해서도 치유가 일어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질병을 담당하시고 돌아가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떡과 잔을 취할 때 예수님의 몸과 피속에 들어있는 치유의 권능이 나타나는 것이다. 성례전을 통해 죄의식에 빠진 사람이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깨닫고 마음과 육체까지도 치유되며, 주님이 나를 위해 피흘리셨다는 것을 확신할 때 자신이 부적합하다는데서 치유되며, 주님이 나를 위해 피흘리셨다는 것을 확신할 때 자신이 부적합하다는데서 치유되며, 가장 비참함을 맛보신 주님을 통해 슬픔에 젖은 사람이 치유되고, 주님의 식탁에서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함을 믿을 때 고독과 외로움에 빠진 사람이 치유될 수 있다는 말이다. B. 현대 의학적 접근 1. 의사와 의약품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의술이나 약은 기도와 믿음과 모순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학적 지혜나 의술을 가진 인간을 사용하시어 병자를 고치시기도 하신다. 의술을 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과정에 대한 끝없는 연구의 참여자들이다. [돕는 은사자]인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지혜를 인류의 육체적 치유를 위해 사용될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병원, 최신 의학기술 그리고 복잡다단한 제약법들은 병든사람을 건강하게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섭리의 일부분이다. 실제로 성경에는 믿는 자들이 의사와 약의 도움을 받을 것을 암시하고 있기도 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포도주를 복용하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의사들과 약을 합당한 수단으로 인정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플 때, 우리는 우리의 건강이 전적으로 의사들에게 달린 것처럼 그들에게 의지할 수 있고, 그와 동시에 우리의 회복이 완전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에 달린 것처럼 계속 기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의사와 약이 한계를 갖는 때에라도 믿음과 기도는 계속될 수 있다. 2. 안수 때때로 예수께서는 단지 말이나 명령만으로 치유하셨다. 그러나 다른사람의 경우에는 말씀하시지 않고 접촉으로만 고치셨다. 마14:35-36을 보면 이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곳 사람들이 예수인 줄로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그러므로 치유는 손을 대는 것으로도 일어난다. 성서에서 안수는 축복할 때(창48:14, 마19:15), 사명을 위임할 때(민27:23, 민8:10, 행66, 딤전4:14, 5:22), 안수하는 자와 받는 자의 동일시할 때(레1:4), 치유할 때(막1:41, 행9:12, 17, 행28:8), 성령의 은총을 받기 위해서(행8:17)사용되었다. 맥트너는 치유를 위해서 이러한 안수의 방법이 필요한 때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소리내어 기도할 수 없을 때는 안수하라는 것이다. 특히 환자들이 병원에 찾아왔을 때, 큰소리로 기도하여 환자들이나 간호원들을 혼란케하지말고, 단지 환자들의 손을 잡고 있어도 하나님의 치유 능력의 통로가 될수 있다. -둘째, 오랜 시간 기도할 필요를 느낄 때에도 안수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만성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을 위해서 오랫동안 기도할 때 우리는 금방 말을 다해버려서 할 말이 없을 경우에는 단순히 계속해서 손을 얹고 있는 것이 가장 크게 도와 주는 것이다. 그 자체가 강력한 기도이다. 맥트너는 그의 책에서 치유의 효과에 대한 간호원들의 연구를 다음과같이 소개한다. 1975년 5월에 발간한 '미국 간호 잡지'(p.784)에서 돌로레스 크리거는 뉴욕 간호대학에서 '환자들의 회복을 위해 어떻게 안수할 것인가?'를 간호원들에게 가르친 경험을 싣고 있다. 그녀는 환자들의 피 속에있는 헤모글로빈의 양이 증가하는 것을 검사한 몇가지 연구를 제시하였다. 세가지 실험을 통하여 그녀는 안수를 받는 환자들에게서 중요한 차이를 발견하였다. 그녀의 연구는, [안수에는 자연적인 능력이 있어서 간호원의 안수는 (1) 치유를 도와 주고, (2) 육체적으로 건강한 간호원 자신의 생명력을 공급한다]고 지적하였다. 크리거교수는 [치료를 위해 안수를 실시하는 것은 육체적으로 건강한 사람들 속에 있는 자연적인 잠재력이 약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강한 동기를 주고 이 잠재력은 실현될 것임을 확신한다]고 하였다.(p.786). 이 연구의 결과에서도 나타났듯이 안수에는 생명력을 전달하는 잠재력이 있다. 크리스찬으로서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누리는 우리도 병자들에게안수할 때 치유의 에너지가 전달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생명력의 전달을 위해서 서로 사랑으로 교제하며 안수의 능력을 사용하고 향상시켜야한다. 3. 기름바름 -<약3:14 너희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라는 말씀에 근거하는 이 치유의 방법은 카톨릭 교회에서 수세기 동안 종부성사로 화해서 이어져왔다. 이 때에 바르는 기름은 감람유로서 병자의 이마와 손에 발라주는 것이라고 한다. 1 세기에 기름이 의학적인 의미에서 사용된 것은 사실이며, 고대인들은 기름이 사람들에게 치유 효과를 주는 것으로 믿었다. 이사야 1장 6절에 보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곪아터진 흔적을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한다 >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치료하지 않겠다는 말을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않도록 하겠다>는 표현을 사용하셨다. 이 기름은 특별히 상처난 곳을 싸매어 주고 상처난 곳을 치료하는 능력이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에게 매를 맞고 당한 사람을 발견하고 그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발라주었다.(눅10:34) 마가복음 6장13절은 사도들이 사람들에게 <기름을 바르며 병을 고쳐 주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기름과 포도주가 당시의 치료약이다. 신유를 위해서 기도하고 의사가 필요없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성경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현대목회의 치유사역에서는 이 기름부음의 방법은 기도와 함께 의사의 치료로 병이 낫는 것으로 이해되어 행해져야 한다. C. 심리 치료의 접근 1. 사랑 맥밀렌 박사는 말하기를 미움은 질병을 생산하는 감정이라고 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미워할 때 우리의 몸속에 화학적 반응이 일어난다고 한다. 이 화학 반응에서 생성된 독성이 질병을 유발시키는 원인이 된다고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몸속에 독성이 생성되지 않고 육체속에 치료하는 힘이 생산 되도록 사랑해야만 한다. 샌포드는 말하기를 [사랑은 치유하는 힘]이라고 했다. 사랑은 정신적인 병은 물론 육체적인 병까지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사랑은 질병속에 숨어있는 나쁜 힘을 제거한다. 신체의 저항 능력을 활성화하여 병원균의 감염을 견뎌내게 도와준다. 이상구 박사에 의하면, 엔돌핀의 활성화로 암을 비롯한 성인병의 예방과 치료에 큰 효과가 있다고 한다. 사랑은 살리는 힘이 있다. <요일4:8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죽음과 죄에서 건져내어 살게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안에서 생명을 누리고 서로 사랑하면서 치유하는 삶을 살아야한다. 2. 찬 양 찬양은 치유를 가져오는 힘이있다. 찬양은 정서적인 안정을 가져오며 하나님의 영광을 임재하게 함으로써 질병을 가져오는 사탄을 내어쫓는 힘이있다. 삼상16:23에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니라>라는 기록이 있다. 찬양은 하나님을 모셔들이게 하는 준비자세가 된다. 하나님은 찬송중에 거하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주를 찬양할 때 사탄의 세력은 점점 약화되고 치유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우리가 찬양할 때에 성령이 임재하시므로 치유의 능력이 넘치게 되는 것이다. 3. 상 담 예배는 아무래도 대중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인 면이 소홀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필요한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만나 상담하는 것이 절대적으로필요하다. 개인상담은 상담자가 피상담자에게 교훈을 주는 것으로 끝나서는안된다. 심령이 상한 사람은 심령을 치유받도록,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눔으로써, 기도함으로써, 또한 서로 말함으로써 치유의 역사가 창조되어야 한다. 현대인들은 심령의 병으로 과거보다 더욱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현대목회는 치유목회가 되어야 한다. 4. 돌 봄 돌봄은 상처를 입고 도움을 요청하거나, 전인격적 완성을 추구 하려는 사람들에게 주는 응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그런 자들을 위한 투자라고 할수 있다. 돌봄은 개인이나 그룹이 다른 사람이나 그룹을 위해서 관심어린 자세와 도움을 주는 행위를 의미한다. 기독교적 돌봄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인식하며 인생의 중요성을 깨닫고 투자의 위험성을 전제할 때에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돌봄은 아가페의 사랑위에 세워지고 그 사랑에 의하여 움직여 지는 것이다. 돌봄은 타인의 전존재를 소중히 여겨 바로 그 사람을 위하여 기꺼이 행동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능력이다. 돌봄은 개인과 그룹 혹은 삶에 영향을 주는 사회 구조에 깊은 관심과 아울러 사려 깊은 행동까지 하도록 요구 한다. 돌봄은 인간으로서의 개인의 독특성을 재강화 해준다. 한 개인의 지속적인 정체성 유지, 자기 완성의 가능성, 타인을 위한 행동의 민감성 등은 돌봄에 의하여 더욱 안전하여지고 확장된다. 그리스도인들이 돌봄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인들의 충성 때문이다. 즉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을 돌보도록 부름을 받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위탁하여 주신 양들이 이리의 공격으로부터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아가페의 사랑으로 돌볼때 예방적인 치유가 가능하고 또한 지속적인 돌봄을 통하여 전인격적 치유를 위한 힘을 공급할 수있다고 본다. D. 결 론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을 통하여 거져주시는 성령의 은사는 그 자체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기 위한 것이다. 신약성서에 있어서 성령의 은사는 언제나 공동체를 위한 봉사와 결부되어 있고 공동체의 관계속에서 언급되고 있다. 치유는 성령의 여러 은사중의 하나이다. 성경에는 병고침의 예가 수 없이 많이 나타나며 교회역사를 통해서도 많이 있다. 치유는 구원의 실제적 체험이며 하나님 나라와 메시야 임재의 감격을 가져온다. 오늘도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는 곳이면 신유의 역사는 나타날 수 있다. 교회는 예수의 사역을 계속하는 사명을 맡은 그리스도의 교회이기 때문에 치유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또한 목회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사역을 이어 받는 일이기 때문에 치유하는 목회가 되어야 한다. 목회의 모든 일들은 치유의 사역과 밀접한 관계를가지고 행해져야 한다. 설교는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교육도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 설교와 교육은 치유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 치유목회는 육체적 질병을 포함한 전인과 환경 전체에 대한 목회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치유의 좁은 의미인 육체적 질병을 주로 다루었다. 육체적 질병은 인간의 많은 문제의 근원이 되고 있다. 육체적 질병은 정서적, 영적인 문제를 일으키며, 가정과 사회에까지 그 영향이 파급되어간다. 그러므로 인간을 돌보는 기본적인 한 목회의 형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병든 상태에 있는 인간을 회복시키기 위한 목회가 치유목회이다. 인간의 고통이 감소되고 상처가 아물어져 가는 것으로 기뻐하면서 보살피는 것이 치유목회이다. 그러므로 치유목회는 지역교회에서 필요한 목회이며, 목회자가 가장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목회이다. 목회자는 목회현장에서 만나는 병자에 대한 계속적인 보살핌과 연구가 필요하다. 영혼의 차원에서만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이고, 기능적인 모든 회복, 즉 전인적인 회복이 더욱 필요한 것이다. 목회자는 치유적 사역을 혼자 감당할수 없다. 교회 안과 밖의 전문 치료팀을 잘 연결하여 치유 공동체를 형성 전인 치료에 힘써야 한다. 팀의 구성원을 분야별로 나누어 본다면 다음과 같다. 1) 영적 치유(Spiritual Therapy) - 목회자, 신학자, 영적 상담자 등. 2) 신체적 치유(Somatic Therapy) - 의료인, 간호사 등. 3) 정신적 치유(Psycho Therapy) - 정신과 의사, 정신분석학자 등 임상 심리학자. 4) 사회적 치유(Socio Therapy) - 사회 사업가, 법률가, 경제 부분에 종사하는자 등. 또한, 목회자는 교회 안에 보다 구체적이고 다양한 상담 프로그램을 개발 운용해야 한다고 본다. 한 사람이 병들면 주위의 다른 사람도 함께 병든다. 사실 모든 사람은 질병의 경험과 가능성을 다 소유하고 있다. 이렇게 볼때 목회에서의 치유 사역은 예수님 당시 뿐만 아니고 오늘날 현대 목회에 있어서도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며 중요하다는 것을 재삼 강조하는 바이다. <일반적인 병고침에 있어서 신자의 태도에 관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점검하라 : 믿는 이가 마땅히 먼저 정화되고 영적순결을 회복하기 위하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삶을 돌이켜보아 회개함으로 그들의 마음과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치료의 하나님을 모시며 지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약5:14-16)*(믿는)너희 중에 (영혼몸의)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영적지도자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일반은총의 하나로 주신 치료수단 중 하나로서)기름을 바르며 (병자를)위하여 기도할찌니라 *믿음의 기도는(주께 겸손히 믿음으로 나아가 범한 죄들을 진심으로 자복하고 회개하며 보혈로 죄사함 받음을 굳게 믿고 선포하며 평강과 치유의 그 약속을 믿음으로 붙들어 자신의 약속으로 받아들여 날마다 묵상하며 읊조리고, 의료적 도움이든지 아니면 직접적인 주님의 치유든지 주께서 택하시고 허락하신 치료수단을 감사로 받아 믿음으로 사용하며, 말씀하시는 살아계신 주님을 확신하며 신뢰하며 거룩한 사랑과 열정으로 그분께 잠겨 적셔져서 이루실 그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기다릴 때, 그 드린 바된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회복시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찌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하나님앞에서 돌아보아 주께서 형제에게 고백하도록 깨우쳐 주시는 모든)너희 죄를 (성령님의 인도하심, 사랑을 따라 지혜롭게 모든 잘못된 일들과 거리낌을)서로 고하며 (용서하며 용서를 구하고, 또한 영혼몸의)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보혈로 정결케 되고 예수이름을 믿어 의지함으로 사함받아 의롭게 된) 의인의 (심령의 깊은 곳에서 나오는, 마음을 토하는 지속적인)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형용할 수 없는 효과를 지닌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이 안에 한 영된 예수이름으로)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8:18)><*내가 너희에게 (예수이름으로)뱀과 전갈(마귀의 힘)을 밟으며 원수(마귀)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눅10:19)><*믿는자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16:17)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10:7-8)>고 주께서는 말씀하신다. ---믿는 이는 이미 가이 없는 주님의 은혜를 입어서 예수이름으로 모든 이들을 낫게하며, 모든 환경과 상황을 제어하며 다스리며, 마귀를 대적하여 쫓는 권세를 이미 가진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이다.. 이 사랑의 하나님이 어찌 자뇨들의 병에 대해 손을 놓고만 있겠는가? 오로지 믿는 이가 기도와 금식으로 주님 앞에 겸손과 믿음으로 나아가 주님의 임재의식과 빛 비추임 가운데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지몽매함, 교만과 방종, 불신앙, 불순종과 반역의 죄를 고백하면서 스스로를 낮추고 자각한 모든 더러움을 토설해 아뢰며 예수님의 보혈을 통한 자비와 긍휼의 약속을 기억해 주시도록 간구하여, 이미 고백하기 전에 자신의 죄를 도말하신 하나님을 감사하면서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케 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정말 간절히 기다림으로써 하나님의 성소된 자신의 영혼을 정결케 하시도록 내어드리면, 주님께서는 정결케하시며 질병의 치유를 위한 저들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며 질병에 대한 그분의 치료제들을 사용함에 있어 축복하실 것이다. --- 질병안에서조차 임마누엘의 주님의 함께 하심을 확인하고 확신하며 주께 감사함으로 영혼의 건강을 누리라. 절대 자신을 포기하여 마귀에게 틈을 내주거나 침륜에 빠져들거나 두려움에 사로잡혀 마비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마귀가 원하는 것이다. 오직 주님 품에 안겨 그분의 눈을 바라보라.. 믿음의 유산으로 우리에게 주신 성령안에서의 기도, 즉 방언기도-향심기도-집중기도-관상기도를 적극적으로 배우고 그 기도로 주님과의 한 영됨을 누리라... 또한 믿음으로 더 나아가 <주께 자신의 질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낫게 하실 것인지 묻고 들을 것을 기대하며 기다리라, 바울에게처럼 주께서 직접 말씀하실 것을 끝까지 기대하며 붙들며 기다리라. 결코 도중에 포기하지 말라. 그분의 품에 기대어 끝까지 친밀함을 추구하며 누리라...주님의 응답이 부정적이라 해도 그러나 절대 -그리아니하실지라도-의 초월적인 믿음과 감사와 남은 삶의 의미성을 굳게 붙들며 버리지 말라..사나 죽으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하나님은 항상 믿는 우리의 최고최대의 유익을 위하신다> --형제와 이웃에 대한 관계를 점검하라 : 또한 믿는 이가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믿음의 기도를 사용하면서 병과 싸우기 위하여는 또하나의 선결 요건이 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자를 용서하여 주지 않으면 하는 아버지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시리라> 즉, 이웃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모든 형제와 이웃과의 화목-화평-거룩함을 추구하는 진정한 금식 곧, 이웃에 대한 원한, 앙심과 원수짓기, 용서하지 못함 같은 흉악의 결박, 멍에의 줄과 매임을 풀어버리며, 진심으로 자비와 긍휼로써 형제와 이웃들을 도와 가진 것을 나누며 구제하고 위로하며, 마땅히 줄 것을 주며, 교만함과 비방과 저주를 회개하고 버리는 <이웃사랑>의 참된 금식을 행하며,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그가 순종함으로써 할 수 있는 모든 최선을 다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금식을 보이는 그를 <네 치료가 급속하리라...는 약속대로(사58장)>치료하며 축복하실 것이다. #사58:6-12<6*나의 기뻐하는 금식은(=참용서와 회개를 통한 공의를 행함-아버지 마음으로 선행-친절-자선-구제-은택을 끼침의 행위)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8*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 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9*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용서하고 회개하고 경계하며 근신하고) 10*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같이하여 긍휼히 여겨 먹이며) 괴로와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위로하고 세우며 격려하여 기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11*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12*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실제적인 방법의 측면에서 고찰해 보자.. 하나님은 직접 치료해 주실 수 있는 전능하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전지전능하신 주님이신 그 분께 먼저 나아가 치료를 위한 말씀과 안내를 받고자 기대하며 기다리라.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대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보다 먼저 앞서지 말라. 차분히 주님 앞에 앉아서 하나님의 인도와 말씀하심에 대해 깨어 있어 들으며 순종하라. 하나님은 또한 일반은총으로써 치료를 위한 지식과 기술, 수단의 적용을 믿는 이에게 은혜로 허락하신다. 그 수단을 통해 치료하시는 분도 바로 치료의 하나님 자신임을 잊지말라. 중요한 것은 그분의 주 되심, 그분만이 참된 치료자이심을 인정하고 그 분의 계획과 생각을 묻고 듣기를 기다리며 바라보는 것이다!!! 어떤경우에는 의료인을 통해 먼저 치료를 시도하시도록 용인하기도 하지만 때로 하나님 자신이 직접 치료하실 수도 있음을 기억하라..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만이 영광 받으셔야 합니다...> -- 자신의 삶의 태도, 곧 영혼몸의 건강에 대한 태도를 바로하라. 믿는 이의 몸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이다. ---첫째, 자의적 겸손으로 몸을 일부러 학대하지 말라. 주안에서 쉼과 안식을 배우라. 주께서 일하시게 하라. 주님으로 주님되게 하고 그분을 따라가라. 주님보다 앞서지 말라.. 둘째, 사명을 다하기까지 방종하지 말고 게으르지 말고 지식과 지혜로 거룩한 성전인 몸을 잘 돌보며 보수하고 균형있게 잘 지키라. 신자의 몸은 자신이 함부로 할 수 있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값을 치루고 되사신 하나님의 성전임을 기억하고 자신의 몸을 존중하라. 만일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주 많은 성령의 조명하심에 따른 빛 비추임을 받고도 스스로 방종하며 개혁을 거절하면서 그릇된 습관에 집착한다면, 그들은 거기에 따른 확실한 결과를 당할 것이다. 만일 그들이 어떠한 희생을 치루더라도 고집하며 기어코 그릇된 식욕과 탐욕을 만족시키고자 결심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몸의 방종의 결과에서 구원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들은 “슬픔 중에 누우리라”(사 50:11). “주님께서 나를 고치셨다. 그러므로 나는 음식물을 제한할 필요가 없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먹고 마실 수 있다”고 말하는 외람된 사람들은 오래지 않아 육체와 영혼에 다시 하나님의 회복시키시는 능력을 필요로 하게 될 수도 있다. 주님께서 은혜롭게 그대를 고치셨다고 하여 그대가 방종하는 행습과 결합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리스도께서 고치시는 일을 하신 후에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1)고 명하신 대로 하라. 식욕과 탐욕과 게으름이 그대의 신이 되지 않게 하라. --건강 지식에 따르는 삶속에서의 태도 개혁은 하나님의 백성의 유익을 위한 그분의 특별한 사업의 한 부분이다. … 병자들이 일반은총으로 주어진, 제시되어진 올바른 건강 법칙을 범하여 방종하고 있는 동안에는, 결국 치유가 불완전해 진다. 또한 주께서 믿음의 기도가 충분히 응답되도록 하기 위하여 건강 개선에 필요한 모든 수단들을 개선하시며 계획하셨기 때문이다. --주께서 주신 사명이 그대에게 있는가? 그렇다면 자신의 사명을 다하기까지 함께 하시는 주께서 그대를 권고하심을 믿으라. 우리의 사명을 수행하는 가운데, 질병이 의미하는 바를 돌아보고 또한 더 깊이 우리의 사명을 다시 점검해서 돌아보라. 어느 것이든지 소홀히 하였으면 깊이 회개하라,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사명을 다하면서 우리가 만나는, 고통당하는 모든 사람을 깨우쳐 복음을 전파하며, 세우며 위로하며 권면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구원을 완성하도록까지, 우리들은 모든 상황이나 환경 가운데서도 건강을 누리며 (비록 병중이라도) 병에 눌림과 구애됨이 없이 자유하며 믿음과 믿음을 살아냄의 선행을 병행시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더불어, 대다수 많은 사람들은 병에서 지켜주시기를 하나님께 단순히 간구하였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그분께서 그렇게 해주시리라고 기대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들의 <그 믿음이 행함의 순종을 통해 온전케 되지 않는다면 그들의 기도가 효력이 없게 될 수도 있음>을 반드시 기억하라.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 믿는 이에게 있어서 질병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보혈과 부활로 인해 삶속에서 더 이상 권세가 없음을 주장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지식에 따라 순종하는 것을 잊지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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