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3.05.13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레위기 희생과 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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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 안의 그리스도: 레위의 제물에 대한 소개 === 짐  플레니건


레위기의 제물을 연구하는 이들은 그 누구라도 후회하지는 않는 것 같다. 꽤 오래된 신자들은 레위기의 처음 장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함의 기쁨에서 처음에 설렜음을 기억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경험에 이정표가 되었으며 그 들 중 소수는 지금 비로소 구약 성경을 처음 읽고 있는 어린 신자를 대견해 할 수도 있다. 그것은 이들 제물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찾아내는 어떠한 권위라도 있는 것인지 여부를 질문 받는 경우, 확실히 그런 권위가 있음을 담대히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 예수님 자신이 그분의 제자들 중 두 사람과 함께 엠마오로 가시는 중에, 그분은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기록 안에서 실제로 발견할 수 있다는 특권을 두 사람에게 보여주셨다. 모든 성경에 그분 자신에 관한 것들이 있었다, 그분은 그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은 구약에 근거한 것이었고 나중에 그분께서 특히 시편을 정확하게 언급하셨다(눅 24:27,44). 히브리서는 성소와 제물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사역의 상징들을 많이 언급한다(히 8:1-5; 9:1-9; 10:1-9). 이들은 우리의 주 예수님의 모본, 상징, 실례와 그림자이었고 실현과 실체이다. 슬픈 것은 때때로 간혹 누군가만이, 레위기의 책처럼 오늘날 신약 신자들이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오래된 유대인 종교 의식과 의례의 기록을 주목햐여 진귀한 보물들을 캐낸다는 것이다.


레위기의 처음 7개 장들에는 5개의 주요한 제물들이 최초로 소개되어 있는데 그들이언급된 순서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 의미는 나중에 상고하게 될 터인데, 번제가 먼저 언급되고, 소제가 즉시 따랐다. 다음 가운데 위치에 화목제, 그리고 마지막으로 속죄제와 속건제가 언급되었다. 그외에 또 전제와 같은, 일반적으로 보조 제물이라 불린 다른 제물이 있다. 전제는 희생물이나 소제에 부어지는 소량의 포도주였다(출 29:40; 레 23:18; 민 15:5,7). 다음에 느헤미야 10:34, 13:31에서만 언급된 것으로서, 가장 덜 알려진 목제 제물은 제단 불의 유지를 위해 결코 없어서는 안되는, 절대로 필요한 것이었다(레 6:12-13).


제물의 각각에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각각 독특한 방법으로 사람의 어떠함, 직임, 봉헌자들, 주 예수님의 완벽함을 묘사하는 공통점이 있다. 마치 사복음서가 모두 그리스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런 것처럼.., 그러나 그와 같은 제물들 모두 각각 그 자신의 독특성과 함께 상이함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분의 삶과 사랑스러운 인격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고난과 경이로운 죽음안에서, 서로 결합하여 복되신 주님의 모난 것 없이 충만한 그림을 제공한다. 그것은 동일한 한 사람이 서로 다른 상황에 맞추어 옷을 갈아입고 사진기에 찍힌 것과 같은 것이다. 그는 한 때는 정장 드레스로,  그리고 다른 시간엔 평상복으로, 때로는 육체 노동 위한 작업복 차림으로, 다시  집에서는 마음에 드는 옷으로 입고 그의 의자에서 편안하게 휴식할 수도 있다. 사진으로 볼 수 있는 그는 얼마나 묘사가 다양하고, 얼마나 아주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는지.. 그러나 그것은 항상 동일한 사람이다. 그림은 더불어서 우리에게 그가 일하는 것과 그의 사람됨의 범주의 전반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그래서 그것은 <복음과 함께 그리고 제물과 함께> 이다. 그것들이 매우 다양하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의 상징적인 뜻에 항상 일관되게 풍부하다!


 번제는 가죽을 제외하고 큰 제단에서 완전히 불살라졌으며 제물 전체가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을 만족시킨 제물의 가죽은 번제를 주관한 제사장에게 주셨다.. 제물은 “올라가는 제물”로 알려진 까닭에 향기로운 향으로 올라갔다. 그것은 예배자의 가장 높은 수준의 감사를 나타내며 따라서 모든 제물 중에서 그것이 제일 먼저 나타나야 한다는 것은 아마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여호와께서 성막의 건축 지시를 하실 때 그분은 지성소로부터 시작하셔서 번제단까지 움직여가셨다. 이렇게 지금 그분은 그 자신만을 위해 독점적이었던 제물의 높은 근거로부터 예물드림 설명을 시작하시고 그 후에 그분의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함께 누림이 허용된 다른 제물에 대해 진행해 나가신다.


소제는 고운 가루의, 다양한 형태로 준비되어 봉헌된 피 없는 제물이었다. 우리는 소제에서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향기롭게 사셨던 구세주의 삶속의 도덕적 영광의 기쁨 충만한 예시를 보게 될 것이다. 소제 안에는 속죄에 관한 개념이 없다. 동시에 고난의 상징은 있지만 피를 흘림은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 만족을 드리는 끊임없는 거룩함과 순결함에서 흠 없는 삶을 사셨던 분의 상징이다. 그러나 이 제물에는 제사장들의 몫이 있게 되는데,  이것이 오늘날 제사장적 특권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도들인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최초로 하나님의 갈망을 만족시켜드린 그분을 우리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화목제는 이전의 제물들처럼 향기로운 제물이었다. 그것은 헌신적이고 감사의 마음에서 주어진 자발적인 제물이었으며 또한 교제의 제물이었다, 그 제물안에는 제사장 가족을 위한 몫, 제단을 위한 몫, 그리고 봉헌자가 그의 가족과 친구들이 함께 누릴 수 있는 몫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들이 거룩한 교제(주의 만찬)가운데에서 함께 교통할 수 있는 분, 그리스도의 위대함을 상징한다.


속죄제는  일차적으로 사람이 부지중의 죄, 즉 고의적으로 범하지 않은 죄에 대한 것이었다. 이것이 가르치는 바는 인간의 마음 상태는 언제든지  죄를 범할 수도 있고 또 죄 범했음을 스스로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복잡한 율법의 규례와 법도로 인해 괴로운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알지 못한 죄 짓는 것이  그렇게 용이했을는지는 의문이지만,..그러나 무지의 죄들이라도 죄 범함이었고 제물과 피 흘림이 필요했다. 갈보리는 우리의 그런 요구를 만족시킨다.


속건제는 고의로 지은 죄들,  곧 이웃에 대해, 그리고 물론 주께 대해 고의로 지은 죄들에 대한 것이었다. 이들도 역시 제물이 요구되었고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대로 속건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는 그분의 죽음안에서 모든 믿는 이들에게 화목을 가져오셨다,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벧전 3:18). 우리는 그분께서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신 것을 인식함안에서 기뻐한다 (계 1:5).

 

  @속죄제는 우리의 죄의 본성, 우리의 타락한 존재의 본성인 죄를 처리한다.
우리의 타락한 존재의 본성은 죄이며 이 죄의 본성은 사탄의 본질이며, 사탄의 실체이며, 사탄의 성분이다. 우리의 죄의 본성-우리 존재 안의 죄-은 사탄적인 것이다. 우리는 그 죄가 사탄 자신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배역인 죄는 사탄이다. 이 죄는 우리 안으로 주입되어 우리로 하여금 죄인들로 조성케 되도록(롬 5:19), 다시 말하여 죄인들이 되게 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은 죄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가 완전히 죄로 구성되어 있고, 하나님의 대적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아야 한다.
속죄제는 우리의 죄의 본성을 처리한다. 죄는 우리의 본성이며 심지어 우리 자신이다. 첫아담이 인류의 대표였듯, 그리스도 또한 온 인류를 대표하는 둘째 아담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그분은 우리의 죄들을 위하여 죽으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다(고후 5:21). 그리스도는 죄로서 못 박히셨다.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죄 또한 못 박혔으며 우리 역시 못 박혔다. 그리스도께서 죄로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죄와 사탄과 우리 자신이 그분과 함께 못 박혔다. 이것이 속죄제의 의미이다.
속건제는 우리 안에 있는 우리의 본성이며, 우리 존재이며 ,우리의 구성성분인 죄의 결과로 나온 죄들을 처리한다. 죄의 여러가지 열매인 죄들은 또한 범죄, 허물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속죄제와 속건제가 모두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의 죄들의 근원인 죄를 처리하는 속죄제가 필요하다. 우리는 죄에서 나온 모든 것들을 처리하는 속건제가 필요하다.  


속죄제와 속건제는 사실상 우리의 죄와 죄들을 포함한 총체적인 죄를 처리하기 위한 하나의 범주이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여기서의 「죄」는 우리의 본성과 우리의 죄의 행위를 포함한 총체(總體)적인 죄이다. 그리스도는 죄와 죄들을 모두 처리하는 제물이시다. 우리의 죄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 그분은 속죄제이시다. 우리의 죄들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그분은 우리의 속건제이시다. 이 제물들은 모두 한 가지-죄의 총체를 처리하는 것-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레위기 5장과 6장은 그 제물들을 때때로 속건제는 속죄제로, 속죄제는 속건제로 바꾸어서 적용하기도 한다.


속죄제와 속건제를 언급함에 있어서, 나는 먼저 <화해>에 대하여 좀 더 깊이 짚고 넘어가기를 좋아한다.
레위기 14장 18절은 제사장이 여호와 앞에서 문둥병자를 위하여 화해(propitation-원문 참조)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화해라는 히브리어를 번역하기란 쉽지 않다. 흠정역은 이 히브리어를 「속죄(atonement)」로 번역한다. 속죄는 하나됨=「at-one-ment」의 문제라는 뜻이다. 양측에 해결되어야 할 문제, 다툼이 있다.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들 양측은 하나가 아니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상황을 누그러뜨리고, 문제를 해결하고, 그들을 하나로 만들 수 있는 어떤 것이 필요하다.
화해란 한편에서 다른 편을 화나게 했거나 어떤 것을 빚짐으로써 생긴 문제나 상황을 진정시키는 문제이다. 실은 하나님 편에서의 문제가 아니라 죄 범한 사람편에 문제가 있는 데 그 문제를 해결할 힘과 능력이 전혀 없는 데에 <전적인 무력함>에 그 문제의 근원이 있다.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양자 사이에는 평화가 없다. 그래서 제삼자가, 이편과 저편이 하나될 수 있도록 빚을 갚고 감정 상한 것을 없이 하기 위하여 첫 번째 측의 역활을 하러 온다. 이것이 진정시키는 것이며 화해시키는 것이다.  
레위기 14장에서 문둥병자는 첫 번째 측, 즉 감정을 상하게 한 쪽이고 하나님은 감정이 상한 두 번째 측이다. 물론 문제는 문둥병이다. 우리는 문둥병은 죄이고, 죄는 반역이며 반역은 사탄이라는 것을 지적했다. 이 네 가지-문둥병과 죄와 반역과 사탄-는 같은 말이다. 이것은 그것들이 하나라는 뜻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문둥병이 있기 때문에 문둥병, 즉 죄와 반역과 사탄 자체를 없이 함으로 상황을 진정시킴이 필요하다. 이러한 진정시킴에 있어서 두 마리 새로는 부족하다. 두 마리의 새로는 정결케 함을 이룰 수 있으나 화해를 시키지는 못한다. 진정한 화해를 이루기 위해서는 속죄제와 속건제와 번제와 소제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이 네 가지 제물들을 가질 때만이 정결케 되는 동시에 화해될 수 있다. <참된 사과는 그 대상이 누구인지에 대한 합당하고도 충분한 인식 -- 문제 유발/불화에 대한 솔직한 인정과 고백-상대방의 감정에 대한 공감-개선 의지의 결단-합당한 보상의지의 구성요소가 완비되어야 함>
하나님의 정죄 아래 있고 하나님과 문제를 가지고 있는 문둥병자는 세 가지-치료됨, 정결케 됨, 화해됨-가 필요하다. 문둥병자에게 화해가 필요하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의 교통 안으로 다시 이끌려져야 함을 의미한다. 화해는 문둥병자와 하나님 사이의 장애물을 제거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정결케 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화해를 이루시기 위하여 오셨다. 화해를 이루기 위하여 그분은 우리의 속죄제와 속건제와 번제와 소제가 되셔야 했다. 
 

  

  

##제물 안의 그리스도: 번제(1) === 짐 플래니건

 

예배의 응답 --레위기 1:1-17; 6:8-13; 7:8
널리  알려진 한 성경 사전에 기술된 레위기에 관한 언급을 인용해보자, “<레위기>란  이름이 붙은 것은 그것의 내용이 어떤지를 나타내 준다, 그것은 제사장의 율법, 레위의 아들들인 제사장의 율법을 다룬다. … 그 정의는 레위기를 구약 제사장체계의  설명서로 책을 자리매김해 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흔히  시작 어구로  그 책이름을 정하곤 했다. 레위기에서는 <와이크라>, 즉<그리고 그분이 부르셨다>가 거기에 해당된다. 레위기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제사장의 접근의 방법을 설정하고 있다. (웅거)".
레위기의 시작 구절은 출애굽기의 마지막 구절과 함께 연결시켜서 읽어야 한다(출 40:34-38). 그 구절들에서 두 번 기록된 것은, “성막에 충만한 여호와의 영광.”이었다.  성막은 바로 그 시내산 기슭에 세워졌고 모세로 하여금 장막에 들어갈 수 없었던 이유는 성막을 가득채운 하나님의 바로 그 영광이었다. 여호와께서 레위기 1장1절에서 모세를 부르신 부르심은 성막에 가득찬 영광으로부터였다.
주님께서 <영광으로부터> 모세를 부르셨던 것은 이번이 첫번째가 아니었다. 그분은 출애굽기 3:4에서 그를<그의 이름을 친히> 부르셨고 출애굽기 19:3에서 다시 그를 부르셨다. 첫번째 부르심은 떨기나무로부터 였고; 두번째는 시내산에서 였다; 그러나 세번째의 이번 부르심은 성막으로부터 나온다. 모든 의미에서 부르심은 영광으로부터 나왔다. 첫번째는 섬김<구원사역>에 대한 부르심이었고 두번째는 거룩함에 대한 부르심이다, 그러나 이 세번째 부르심은 예배>에 대한 부르심이었다. 믿는 이들인 우리의 봉사는 당연한 의무요, 우리가 거룩함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섬김의 가장 높은 모본은 지성소에서 거룩한 손을 들어올리는 우리의 예배이다. (시 134:2; 딤전 2:8).

 
그분의 모든 위대함 안에 계신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어떤 것을 원하셔서 그  영광으로부터 친히 부르신다는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지!  “사람”과 “여호와” 사이의 대비됨을 곰곰히 생각해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부르심은 “여호와”께로부터이다. 그분은 영원히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 창조자, 영존하시는 분, 그리고 온 우주의 주권자, 바로  그분이 “사람”을 부르고 계시다, 히브리 말에 아담은 먼지와 진흙으로 만들어진 피조물이다. 마찬가지로 어느 사람이 물을지도 모른다, “내가 어쩌면 다 이해할 수도 없는, 측량할 수 없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여호와께 드리는 일을 연약하고 유한한 인간인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가?”  탁월함과 말로 다 할 수 없는 영광 가운데에 계시며, 스스로 충족시키시는 여호와께 영적 도덕적 빈곤 가운데 있는 사람이 무엇을 드릴 수 있단 말인가? 계속되는 절에서 주님께서는 찬미(진가 알아드림), 감은(은혜에 대한 감사), 예배(그분께 합당한 드림과 교제)를 위해 찾고 계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많은 세월이 지난 후 구세주 자신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씀하실 때 그분은 참된 예배자에 대해 그녀에게 동일한 위대한 진리를 직접 확증하셨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 4:23, 24).
예배자는 여호와께서 규정한 제물을 가지고 지정된 방법따라  나아와야 한다. “가져오다”(히브리어 가룹) 단어는 제물을 드리려는 의도로 나아오는 경건한 접근을 사사한다, 그래서 번제는 “접근 제물” 이라고 종종 언급된다. 노아와 욥에 의하여 제공된 제물은 번제이었다. 이들은 레위의 제사장직 취임 이전 시대에 그들의 접근과 용납을 위해 봉헌했다(창 8:20; 욥 1:5).


번제는 실제로는 세 개의 다른 영역에서 골라 낸 각각 다른 5가지 모양의  제물중의 어느 하나로 드리라고 하셨다. 제물은 (소)떼, (양. 염소)무리, 또는 가금의 세 영역에서  수소, 양, 염소, 멧비둘기, 또는 어린 집비둘기의, 다섯의 각각 다른 모양을 지니고 있었다. 성경 숫자에 관심 있는 이들은 레위의 제물을 통해서 반복해서 계속적으로 나타나는 “5”와 “3”에 숫자에 의미가 있음을 볼 것이다. 숫자 5는 일반적으로 은혜의 하나님(책임) 또는 또는 혹자들이 말하듯 자신의 연약함에 싸여있는 연약한 사람들과 관련된다. 얼머나 차이가 큰지!! 확실하고 또 분명한 것은 연약함 안에 있는 사람은 항상 은혜의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숫자 3은 신성한 숫자로서 언제나 거룩하신 하나님의 삼일성과 관련된다. 여기 이들 제물안에는, 거룩한 완전성안에 계신 주님 자신에 의해 고안된 방식으로 영광 안에 계신 하나님께 접촉하는  연약함에 싸인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3절에서 번제를 위해 사용된 단어는 히브리어 <올라>이다. 그것은 연기에서 올라가는 것을 나타내고 또 그 단어는 더 잘 알려져 있는 영어 “대학살-홀로코스트”에 연결되어 내포된다. 여호와께 올라가는 달콤한 향기를 올려드리기 위해 대제단(번제단)위에 드려진 모든 번제를 묘사하는데 이 단어가 얼마나 적절한지!!  그 번제가 하나님께 대한 단맛<향기로움>으로 항상 열납되어질, 장래에 나타날 사랑스러운 바로 그 사람, 골고다 제단에 하나님께 흠 없이 봉헌되었을 바로 그 사람을  얼마나 의미심장하게 잘 예시하였는지!!
봉헌자는 성막의 문앞에 서서 그 번제물 머리위에  두손을 얹어 안수하도록 명하셨다. 이것은 상징적인 동작이었지만 그 안에서 동시에 두 가지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첫째로, 그는 실제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것은 나의 제물, 내 것-나 자신을 드리는 것-이다.” 안수함으로써 그는 <하나님의 절대적 기쁨-만족인> JC를 표상하는 흠없는 그 번제물과 동일시 된다. 다음은 제물의 모든 <하나님의 절대적 기쁨-만족인>긍정적인 모든 것과 함께 그 제물 자체를  자기자신으로서 새로이 받아들이고 부정적인 옛사람인 자신 전체를 그 번제물에 옮겨 전가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받으실만한 그 제물은-여호와께 절대적인 만족과 기쁨 되기에-  드리는 그를 위해 받아들여졌는데,  그는 그 제물안에 포함되어 여호와께 받아들여졌다. “속죄” 단어는 히브리어 <카파>이다, 본래 의미는 “덮기 위해”이다. 봉헌자의 모든 죄악과 허물이 그제물을 하나님이 받아들이심- 용납하심-안에서 덮어졌고 그도 여호와께 받아들여졌다(=용납하심을 받고 교제가 가능해짐.).
그러므로 3절에 “자원하여, 즉 그 자신의 자발적인 의지로”가 오히려 4절에서처럼 “그의 받으심을 위해”로   묘사되어야 함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JND, RSV, ASV, 및 다른 것들을 보라). 이것은 속죄제가 아니다. 그 제물을 가져오는 손은 예배자의 손이다.  그분이 요구하시는 것-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주님께 드리는 것은 하나의  특권이다, 그러나 그분에게 최상의 기쁨과 만족이 되는 것을, 그분이 <받아 마땅한 것으로서> 요구하지는 않으셨지만, 감사와 사랑, 믿음이 충만한 마음으로부터 <자원하여> 그분을 위해 드리는 것은 더 큰 특권이다. 이것이 예배이다.
다음의 세부사항들은 모든 감사하는 마음을 여호와께 드리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의 참기쁨의 측면들을 묘사한다..

 

##제물 안의 그리스도: 번제(2) === 짐 플래니건

 

 깊은 감사를 받으심
주께  그의 제물을 드리는 봉헌자는 손수 제물을 죽여야 하는 과정에서 엄숙하고 고통스러운 죄에 대한 책임감을 느껴야 했다. 예배자는  그의 용납하심을 위한 희생제물의 머리위에 자신의 손을 얹어서 자기의 어떠함과 자기자신 전부를 전가함의 안수를 먼저 해야 했고 그의 손으로 그 제물을 직접 죽여 각을 떠야 했기에 그의 손은 희생제물의 흘린 피로 물들여 졌다. 따라서 현 시대를 살고 있는 믿는 이들도 그 자신을 용납해주신 분 안에서, 자신의 죄들이 그분의 죽음에 대해 책임 있음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그분의 용납하심안에는 차등도 더 나아감도 없다는 것을 주목하라.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감과 감사에서 있어서는  진전에 차이가 있을 수가 있다. 그러나 그분의 용납하심안에서는 그렇지 않다. 우리 모두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를 받으심/용납하심”(엡 1:6)에 있어서는 영원히 동등하다.


이전에 언급했던 것과 같이, 번제의 형태로는 다섯 가지가 있다. 사람은 그의 재원에 따라서 수소, 양, 염소, 산비둘기나 어린 비둘기를 각각 가져올 수 있었다. 우리는 여기에 시장 가격을 도입하면 안된다. 그것들은 다양한 감사드림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드리는 사람의 재정능력에 따라 달리 드렸겠지만 각각의 제물봉헌자들은 기꺼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봉헌하였고 모두 주님께 열납되었다. 한정되고 빈약한 재원을 가진 사람이 수소를 드릴 수 있었다고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드릴 수 있는 범위안에서 가져오는 그것을 주님은 받아주신다. 반대로 풍부한 재원을 가진 사람이라면 산비둘기나 비둘기 드렸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린 신자는 비록 신앙 연륜이 오래된 신자에 비해 구세주에 대한 풍성한 경험이나  지식 중 아직 미약할 수 있지만,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봉헌한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는 더 오래된 성도의 유창한 감사만큼 당연히 동일하게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을  것이다.


어떤 형태의 제물이든지 공통점은 두 자기 필수요건을 갖추어야 했다.. 수컷이어야 하고 흠이 없을 것.. 수컷은 주도권과 활동력의 상징이다. 또 다른 제물의 암컷은 다른 특징을 묘사한다. 우리의 주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소년기와 청년에 이르기까지 분주하고 활동적인 삶을 사셨다. 그분은 하늘아버지의 일에 대해서도 항상 그러하셨다(눅 2:49). 그분은 사회의 소음과 북적임에서 고립된 수도원에서 사신 것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나사렛에서 목수로 일하셨다. 그분은 사람들과 섞여 만나고, 유대교 회당을 참석하고, 그 도시의 거리를 걸으셨다, 그리고 아마 그의 경건한 부모와 도시주민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예루살렘에 여행하셨다. 그러나 시종일관 따랐던 그 모든 시간들과 이어진 공생애사역의 몇 년 동안에도 그분은 죄를 모르신 순수함 그대로이셨다. 그분의 삶은 점없고, 흠없고 결점이 없는, 끝까지 활동력 넘치는 삶이셨다.
번제로 드려진 동물과 새 안에서 아버지를 만족시킨 그리스도의 그 특징을 보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수소 안에는 지치지 않는 섬김이 있고; 양에는 유순하고, 불평하지 않는 고난감수함 ; 염소에는 변함없고 확고부동한 걸음 ; 비둘기에는 동요하지 않는 일편단심의 헌신, 그리고 새끼 비둘기에는 불평하지 않는 청빈.


수소는 강하고, 참을성 있고, 확실히 지치지 않는 종이었다. 쟁기질에 동원되거나 또는 추수기에 수확하여 모으고, 또는 타작하는데 쓰이는 수소는 복종의 길에서 묵묵히 꾸준히 일하는 준비되어 있는 종이었다.  우리의 복된 주님이 바로 그런 분이셨다. 그분은 가르치고, 전도하고, 치유하고, 기도에 항상 바쁜 복음전도자, 목자와 교사들의 모본이셨다. 아무도 이제까지 그와 같이 사람들을, 뿐만 아니라 그분이 하셨던 것처럼 섬겼던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분은 결코 사람의 종이 아니셨다. 그분은  여호와의 완벽한 종이셨다. 그러한 분을 우리가 예배할 때 우리가 묵상/관상한다.


양은 그 유순함이 특히 두드러진다. 침례 요한은 “그분이 걸으셨던 대로” 예수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하기를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을.”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 순순히 복종하심안에서  사람들에게 그분의 권리, 그 자신을 내어주신 그분의 거룩한 걸음을 숙고하는 것을 우리는 매우 기뻐한다, 그 잔인한 자들은 그분의 권리를 털깎듯 하였고, 가시로 그분에게 관 씌우고, 그분을 채찍질했고, 그리고 결국 성밖에서 나무에 그분을 매어 달았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분의 공손한 순종이었다. “내 뜻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염소의 호소력 있는 특징은는 잠언 30:29-31에서 볼 수 있다. 그것은 JND의 사랑스러운 표현에서, “위풍 있게 다니며”와 “잘 걸으며”이다. 위풍 있게 다니는 것에서 참으로 굳은 결심을 말하며, 그래서 그것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하나님의 뜻의 길에서 그분을 단념시킬 수 없었다. 그분의 가장 가까이 따랐던 이는 그분께서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셨던 것에 대해 말한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그러나 그분은 확고부동하셨다. “자기가 … 올라가 …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마 16:21-23).
이들 번제물의 내장과 다리는 물에 씻겼다. 이것은 그 번제물들에게 늘 행하는 것이었지만 주 예수님께는 본질적인 것이었다. 그분은 내적으로 그리고 외적으로 거룩하며, 본질적으로 또한 도덕적으로 순수하셨다.


산비둘기는 그 배우자에게 확고하게 영속하는 헌신으로 인해 주목된다. 또한 그 애정의 대상만 바라보는 단 하나의 눈만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분의 아버지께 대한 순수하고 질투할만큼의 헌신에서 살고 걸으셨던 그분의 참된 실제가 아니었던가?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그분은 말씀하실 수 있다,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요 3:35; 5:20; 14:31).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슴에 항상 거하는 아들 사이에  불가해한 영원한 애정이 있었다. 얼마나 깊은 묵상 주제인지!


비둘기는 바로 가난함의 그림이다. 얼마나 우리의 마음이 스스로 “가난하게 되신”(고후 8:9) 그분에게로 나아가는지. 그분은 구유에, 포대기(강보)에, 그리고 나사렛에 목수의 가정의 가난안에 오셨다. 그분은 어떤 재산도 소유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동전, 배, 나귀, 다락방과 십자가 조차 빌렸다는 것을 성경은 자주 말씀하고 있다. 오 그분의 가난함!


따라서 우리는 이들 고대의 성경에서 이렇게 오래 전에 묘사되었던 분인 이 사랑스러운 사람에 관한 우리의 감사를, 예배안에서 하나님께로 가져온다. 많은 세부사항들은 언급되지 않고 남겨져 있다. 그것들은 이들 짧은 논술의 영역 보다는 더 위대하다, 그러나 우리 미래의 개인적인 연구에서 그것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제물안의 그리스도 === 소제(1) --- 짐 플래니건

 

하나님께 드려지는 선물
레위기 2:1-16; 6:14-18
우리는 먼저 장에서 번제의 다섯 가지 형태가 있었다는 것을 보았다. 이들은 수소, 양, 염소, 산비둘기, 또는 새끼 비둘기였다. 이들은 주 예수님의 지속적인 섬김, 불평하지 않는 고난, 벗어나지 않는 걸음, 확고한 헌신 및 불평하지 않는 가난에 관한 저마다의 상징이다. 우리가 JC의 도덕적 영광이라고 칭하는  그것이다. 주 예수님의 도덕적인 아름다움은 수 세기에 걸쳐 찬송가와 묵상의 장엄한 주제이다. 그분의 흠없는 걸음걸이에 관한 경탄할 만한 연구서인 사복음서 안에서 실제적으로 보게 되는 것이라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서신서에서는 죄 없으셨던 분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말한 기자들에 의해 교리적으로 연구되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고대 성막의 섬김과 사역을 재료와 색상 안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다. 우리의 현재 장들은 소제의 예표적 언어안에서 그 도덕적인 영광을 전시한다.


우리의 성경(AV 또는 KJV)의 공인된 판은 시종일관 “소제”를 말하는 동시에 다른 많은 번역들에는 식사제물, 음식제물, 알곡제물 또는 곡물제물의 표현을 선호한 그것을 관찰하게 될 것이다. 이들 서로 다른 표현을 일으키는 단어는 선물, 공물(公物), 예물, 또는 헌물을 단순하게 의미하는 히브리어 <민차>이다. 그와 같은 예물/선물은 음식-food-의 형태에서는 일반적인 것이다, 그리고 음식을 위한 더 오래된 단어는 마가복음 14:3, 요한복음 4:8,32,34에 관한 “음식-meat”이다, 그리고 실제로 초기에 창세기 1:29-30처럼, 그래서 그것이 여기 레위기 2장에 있다. J.N. 다비는 문자 그대로 민차를 인용하고 그리고 단순하게 소제를 “헌물”로 부르며 표현한다. 소제는 제단과 제사장을 위한 음식의 선물이었다.
“식사 제물”을 선호하는 사람은 명사 어구적으로 제물이기 때문에 이 제목을 사용하는 다양한 모양의 식사 또는 가루였다, 그러나 “식사”도 아니고 “알곡”도 아니기에 민차의 올바른 번역이 아니다. 여기에서 “고기”는 “육체”와 무관하다.
많은 젊은 신자는 처음으로 소제에 접근하는 여기에서 피 없는 제물과 관련된 어떤 문제를 감지할 것이다. 많은 원기 왕성한 복음 전도자들의 큰 소리로 가인과 그의 피 흘림 없는 제물에 대한 비난과 하나님께서 그것을 거절하심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피 없는 제물을 드림에 대한 분명한 명령이 있고 그것이 가인을 거절하셨던 동일한 주님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짐을 보게 될 것이다.

이 명백한 문제에 대한 이중 응답이 있다. 첫째로,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죄를 위한 제물이 아니다. 이 제물에는 죄에 대한 사고(思考)가 없다. 제단을 위한 고운 가루의 한 움큼을 잡은 손은 용서를  갈망하는 죄인의 떨리는 손이 아니다. 여호와께 선물을 드리기 원해서 감사함을 표현하는 예배자의 손이다. 이후에 장들에서 우리는 속죄제와 속건제에서 이들을 볼 것이지만, 소제는 그 어느 쪽도 아니다.
둘째로, 이 제물은 보통 동반하는 제물이었다. 번제에 부가된 것이었다. 민수기에서 특히 많이, 많은 때 우리는 번제가 있었을 경우 소제에 의해 동반될 것을 말하는 경우처럼 “번제와 그의 소제”를 읽는다(민 28:10-12 그리고 29장을 전부). 그 경우에 소제의 가루는 제단에서 번제물의 피에 의해 빠르게 적셔졌다.
“제물 안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추구하는 경우, 분명히 피 없는 제물은 그분의 죽음 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삶과 성품에 대해 우리의 마음을 향하게 할 것이다. 그렇지만, 구세주의 삶의 완벽성과 그분의 죽음의 가치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계획에서 상호의존적이다. 갈보리는 우리의 주님의 도덕적인 영광의 최고점이다. 그분은 “죽기까지 순종했다”(빌 2:8). 십자가위에서의 그분의 죽음은 완벽한 삶을 내려놓음이었기 때문에 형언할 수 없는 무한한 가치가 있다.

 
이 제물에서는 죽음의 견해도, 동시에 죄를 위한 고난도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역시 깊은 고난에 대한 전형적인 몇가지의 암시가 있는데, 이들은 제물의 가루가 준비되고 봉헌됨에 있어서의 다른 형태들의 연구 부분에서 고찰될 것이다. 우리의 주 예수님은 “속죄”라는 우리의 용어와는 별개로 그분의 일생 동안 고난 받으셨다. 우리 믿는 이들은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영원히 당신에게 매달린 슬픔의 무거운 마음을 짊어지셨다.” 그분은 오해, 허위진술의 상처, 비난과 거부의 고통들을 겪으신 슬픔의 사람이셨다. 그분은 그 자신의 가정에서 조차 불신앙의 슬픔을, 그리고 그 후에 그분께서 약속된 메시야로 오심에 대해 결국 민족의 거절을 감당하셔야 했다.
그분은 과연 -
수고와 눈물의 슬픔의 사람,
거절된 사람 그리고 쓸쓸함;
그러나 그분은 나를 바라보셨다,
그리고 끝없는 세월을 통해
그분을 나는 사랑해야 한다 - 그분만을.
- Frances Bevan
번제의 경우처럼 이들도 소제의 다섯 가지 모형이 또 있으며, 이들은 세 개의 다른 영역에 있다. 숫자 5와 3의 중요성은 처음 제물에 관한 우리의 연구에서 이미 제시되었다. 비록 소제가 항상 고운 가루이더라도, 때때로 가루는 그것의 굽지 않은 상태로 드려질 수도 있으며, 다른 때에 그것이 구워질 수도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처음 익은 곡식의 이삭이 될 수도 있다. 이것들이 세 개의 영역이다.
제물의 다섯 가지 모형에 관해서는, 굽지 않은 고운 가루; 화덕에서 구워 낸 가루; 냄비 또는 철판에서 구워 낸 가루; 번철-튀김판-에서 부쳐 구워 낸 가루; 불에서 말렸던 녹색의 곡식 이삭이 있다. 이들 모두는 어떤 방면에서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며 분명히 그분의 인성의 다양한 관점과 함께 다양한 감사의 양상을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이 사람이 이런방법으로 그의 제물을 드릴 것이고, 또 다른 사람은 그의 예물을 다른 형태로 가져올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오늘날 신자들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구주의 염려들과, 각각 다른 이해 능력을 가지고 있다. 러나 그것은 그분의 아버지의 마음을 그렇게 기쁘게 했던 JC를 감사함으로써 그분의 백성들이 그 한 줌을 가져올 때 하나님의 마음을 반드시 기쁨으로 움직이게 한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귀중한 세부사항은 다음 장에서 뒤따른다.


 

###제물 안의 그리스도: 소제(2) ==      짐 플레니건


 레위기 2:1-16; 6:14-18
여섯 개의 재료들이 소제와 함께  언급된다. 이들중의 네 개는 제물을  구성하는 것으로서 필수적으로 항상 포함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두 개는, 금지되었고 엄격히 말하자면 배제되어야만 했다. 소제에는 반드시 고운 가루, 기름, 유향과 소금이 있어야 하며, 누룩이나 꿀 어느 것이든지 있어서는 안되었다. 이들 재료의 세부내용들은 그분의 도덕적인 영광을 제시하고 보호하며 그리스도의 인성에로 항상 우리를 이끈다. 가루의 고움, 기름의 충만, 유향의 향기, 그리고 소금의 신선함은 하나님께 그렇게 큰 기쁨을 가져왔던 사랑스런 삶의 전형적인 아름다움이다.

 
가루의 고움
가장 정미한 가루에는 조잡함, 거칠함, 까칠까칠한 덩어리도 없다. 그러함이 바로 주 예수님의 특성이었다. 특별히 선택된 성도들에게서는 모두 눈에 띄는 몇몇 덕이나 특질에 있어서 칭찬할 만것을 가지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욥의 인내심, 아브라함의 믿음, 모세의 온유함, 솔로몬의 지혜, 다니엘의 용기, 베드로의 힘, 요한의 사랑, 그리고 바울의 지식을 감탄한다. 이들 동일한 본질을 오늘날 우리의 많은 형제들에서도 본다. 그러나 우리의 주 예수님은 그 온전함과 완전함안에 있는 성령의 열매를 맺으신다. 기쁨 보다는 사랑이, 인내 보다는 평화가, 양선 보다는 온유함 그리고 절제보다는  믿음과 겸손이 더 있었는가? “아니오!” 우리는 응답한다; 모든 기쁜  특성들의 완벽한 균형이 그분 안에 나타났다. 그분의 성품 안에는 고르지 못함(요철)이 없었다.
소제의 아름다움 안에 고운 가루
완벽한 사람을 묘사한다,
부과된 그분의 모든 길 안에서,
그분의 모든 하늘 길들 안에서.
I. Y. Ewan


기름의 충만
기름은 빛, 열, 건강의 근원이신 성령님의 잘 알려진 상징이다. 그것은 세 가지의 다른 방법으로 소제의 가루에 적용되었다. 때때로 가루는 기름과 같이 섞였다, 때때로 기름은 부어졌다, 그리고 때때로 기름이 그것에 부어져서 적셔져 스며들었다. 가루가 기름과 같이 섞였다! 우리는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말하는 것을 듣는가?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 1:35). 처녀의 자궁에서, 성육신의 신비안에서 구세주는 성령의 능력으로 임신되었다. 우리는 이해하거나 설명하거나 질문하기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믿도록 요청하는 것이다. 가루가 마리아의 자궁에서 기름과 함께 신기하게 마치 섞였던 것처럼 말이다.
잊을 수 없는 그  어느 날, 예수님은 대략 30세쯤일 때, 그분은 여전히 신실하고, 순종하는 남은 자로서 요단강안에 서셨다,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눅 3:22). 잠시 후에 그분은 그분께서 읽은 대로 자신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적용할 것이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눅 4:18). 가루는 기름으로 덮여졌다..
그 시기는  바쁜사역생활의 초기였는데,  성령의 거룩한 교제가 함께 스며든 섬김이었다. 베드로는 정리해서 말한다,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행 2:22).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가루는 기름과 함께 적셔져 스며들었어 충만해졌다!

 
유향의 향기
유향은 깨끗하고, 순수하며, 진귀한 그리고 매우 단 맛이다. 그것은 그분이 아버지의 마음을 그토록 기쁘게 하셨던 분임을 상징한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가루와 기름은 한 줌만 함께 제단에 두었지만, 유향은 하나님을 위해 전부를 거기에 두었다, 단지 하나님 그분 자신만이 그 사랑스러운 삶의 향기를 전적으로 받아 감상하실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비록 우리의 모든 감사를 함께 모은다 해도 구세주의 아름다움을 완전히 표현하는 데에는 불충분할 것이다..
오직 아버지, 영광스러운 요구,
아들은 이해할 수 있다.
Josiah Conder
유향을 포함함에 반대가 되는 것으로서, 소제에는 꿀은 결코 넣어서는 안되었다.. 유향은 불이 가해질 때 실제로 더 많이 스며 나오는 순수한 단맛이다. 꿀은 단맛이지만 불의 온기에 의해 시어질 수 있다. 그것은 자연적인 단맛이다. 우리의 주님의 성품의 향기는 고난의 열에 의해서만 증가될 수 있었다;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그분은 말씀하실 수 있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소금의 신선함
소금은 훌륭한 방부제이다; 누룩은 보통 부패시키는 성분이요 성경에서 사용할 때, 항상 악의 상징이다. 여호와는 우리에게 주예수님의 순수성에 대해 두 배의 확증을 주시려하는것인가? 보존하기 위해서 소금을 넣고 누룩은 밖에 버리라고 그분께서 명령하신다. 바리새인의 누룩은 형식주의이었다; 사두개인의 누룩은 합리주의이었다; 헤롯의 누룩은 쾌락주의이었다. 고린도에 있는 누룩은 도덕적인 악이었다; 갈라디아에 있는 누룩은 교리적인 악이었다. 그리스도를 예시함에 있어서는 항상 악의 상징이 되는 누룩은 여지가 없다..
좀더 주의깊게 연구해 본다면 때때로 소제가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볼 수 없는 은폐된 화덕에서 구워졌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예를 들면 그분이 광야에서 사단과 홀로 만나셨던 것처럼 그와 같은 우리 주님의 고난의 몇몇이 이에 해당된다. 다른 시기에 제물은 철판에 공공연히 구워졌다. 구세주의 몇몇 슬픔들은 -십자가에서 그분의 눈물, 탄식, 신음과 그분의 육체적인 고통과 같은 것들은 -모두에 의해 목격되었다. 그러나 때때로 제물은 가마솥, 부분적으로 보이지만 부분적으로 숨겨진 비밀 같은 작은 용기에서 준비되었다.  겟세마네 같은 특별한 슬픔을 가지셨음은 그분에게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에 의해서만 관찰되었다. 공간의 부족해서 첫 열매, 불에 말린 푸른 첫 이삭에 관한 상세한 연구를 여기에서는 더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감사로 한줌을 가지고 또한 그분의 즐거움을 위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 우리는 우리의 제사장 책임을 다하기 위해 일어서는 것도 좋다!


 

###제물 안의 그리스도: 화목제(3) ===  짐 플레니건
 

교제 안에서 축제
레위기 3:1–17; 7:11–21,29-34
제물에 대한 서언에서 말했듯이 화목제는 다섯 가지 제물 중 세 번째가 되며 중앙 위치를 차지한다. 번제와 소제, 즉 처음 두 제물은 주로 하나님의 마음에 대한 것이요 마지막 두 개는 죄 많은 사람들의 필요를 만족케 하기 위한 것이다. 화목제에서는 만족하신 하나님과 용서받은 사람들이 거룩한 교제(주의 만찬)에서 함께 만난다. 이것이 실제로 이 장들에 있는 단어 “평화”의 의미이다. 보통 쓰이는 아름다운 히브리어 살롬이 아니지만 그러나 어원이 같은 단어 셀렘-쉘렘-으로서 이 단어는 교제, 친교, 일치를 가리킨다.


중요한 점은 사람들이 사람들이 평화를 만들어내거나 얻어내기 위해 화목제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화목은 이미 이루어졌고 드리는 이는 화목의 즐거운 누림안에서 예물을 가지고 나아오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번제에 우선하여 화목제를 가져오는 사람이 있었는가?” 그 대답은 실은 “교제”라는 단어 안에 있다. 번제는 완전히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그것을 전혀 먹지 않았다. 그러나 화목제물은 제단, 제사장들, 봉헌자와 그의 가족과 친구들을 위한 몫으로 분배되었다. 다른 사람들도 또한 기뻐할 수 있게끔 햐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위해 어떤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얼마나 큰 특권인지! 그와 같은 화목제가 있었고, 또한 그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과의 사이에서와, 서로서로사이에서의 교제안에서 그리스도를 관상함으로서 갖는 그런 화목제, 그런 기쁨이란 어떤 것인지... 이런 상태안에서 우리는 참으로 다음을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요일 1:7), 그리고 “우리의 교제는 아버지와 ... 함께하는 것이니라”(요일 1:3). 제사장의 고귀함안에서 우리는  아버지께 아드님을  우리의 감사로  가져다 드린다. 이것이 예배다.

 
여기 “평화” 단어는 영어로는 번역할 수 없는 복수 단어 셀레밈인 것을 주목하라. 종종 히브리어 복수는 규모, 양, 또는 강도를 의미한다, 그러나 영어란 언어적 의미 안에서 구태여 그 단어의 복수성을 이해하고 싶어한다면, 모든 신자가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고 하나님과 평강을 누리며 평강의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체험하여 앎안에서 즐거워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화목의 다른 측면들이며 실제로 복수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대하는 바로는 위대함, 광대함, 웅대함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의 의미에서 복수성의 의미가 가장 그럴듯해 보인다.


주의를 기울일 또 다른 재미있는 특징은 비록 화목제가 처음에는 다섯중 가운데에 오는 제사였는데,  6,7장에서의 제물에 대한 율법에서는 화목제가 맨 마지막에 온다. 여기에는 두가지 간접적인 의미가 있다고 여겨진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가 참으로 화목제에서 의미있는 교제를 누리기 전에, 다른제물의 선함, 곧 그의 모든 충만안에서 갈보리를 감사함안에 있을 필요가 있다. 둘째로 우리는 여기에 묘사된 교제의 즐거움에 도달했을 때, 더 이상 따라올 것이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모든 신자의 궁극적인 경험은 거룩한 3위일체하나님의 인격(devine Persons)과 함께 그리고 그분과 닮은 성도들과 가지는 친교(교통)를 즐기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실제로 거기에 도달했다!

 
반면에 주목할 또 다른 중요하고 아름다운 관점은 <소, 양, 염소의 암컷이나 수컷..>여기 화목제에서 처음으로 암컷이 제물로 소개된 점이다. 번제물은 모든 모양에서 “흠이 없는 수컷” 이어야 했다. 우리는 주 예수님 안에 예시된 남성의 특성을 보았다, 그러나 여성의 온화한 특성 또한  그분의 사랑스런 삶안에서 감동적으로 느낄 수 있다. 남성은 책임, 활동과 지배권/머리됨을 나타낸다, 그러나 또한 그리스도안에는 여성에서 볼 수 있는, 수동적인 태도와 인내, 복종과 순복, 헌신과 순종이 남성성과 완벽하게 섞여 있다. 우리가 교제하는 그분은 그 모든 기뻐할 만한 특징들을 가지시며 완벽한 조화를  나타내신다.


사람이  화목제를 가져올 수 있는 세 가지 상황이 있었다. 때때로 그것은 감사를 위한 것이었다(7:15). 하나님께서 자비로우셔서 사람의 어떤 요구사항을 들어주시거나, 어떤 특별한 경우에는 굉장한 복을 주시기도 한다.. 이 때 그 사람은 그의 감사를 표현하기 원하여 화목제를 가져왔다. 당연히 그는 예전에 살펴 본 대로 번제를 가져올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의 감사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공유하기를 원했고,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은 화목제였다.
어떤 이들은 서원과  관련하여 그의 화목제를 가져왔다(7:16). 아마도 그는 하나님을 위한 몇몇 섬김에 착수하려고 하거나 그의 삶과 가족 안에서의 명령받은 어떠한 것을 작정하려 하고 있는 상태일 것이며,  제단은 그가 하나님과 만나는 밀회/화합의 장소가 될 것이었다. 하나님께 유사한 약속을 드리기 위해서, 신자들에게 있어서 십자가그늘에서 보다 더 나은 곳이 있겠는가. 갈보리의 엄숙함안에서 그러한 만남/화합은 참으로 거룩하게 될 것이고 봉헌자는 그의 약속을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은 아직도 또 다른 이유로 그의 화목제를 가져왔다. 그것은 자신을 위해 자원하여 드리는 예배의 의지를 표현하는 자원하는 제물이었다(7:15). 이 경우에는 충만한 마음으로 무언가를 나님께 드리기 원하는 갈망외에 특히 아무 이유도 없을 수도 있다. 다시 이렇게 질문받을 수도 있다, “왜 제단에서 전체가 불살라져서 향기로운 냄새로 하나님께 올라가는 번제가 아닌가?" 전에 언급한대로 화목제의 드림은 예배드리면서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었다.. 하나님, 제사장, 봉헌자, 가족과 친구들은 그의 예배에서 이 봉헌자와 모두 함께였다.. 예배에 참여한 모두는 각각 그들의 역할이 있고 모두는 각자에게로 분배된 그들 각자의 몫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이들 몫은 다른 글에서 살펴볼 것이다.
다시 한번 더, 화목제가 감사-서원-자원하는 제물 드림 이외의 다른 경우로도 드려졌는 지를 주목하자, 이런 경우는 평강을 얻기 위해 봉헌하는 경우였다. 그는 평화의 누림가운데 이미 제단에 나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안에서 그에 알맞은 제물을 드리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도 신성한 평강을 소우함안에서 그렇게 하자, 우리의 감사를, 우리의 서원을, 우리의 예배를 나타내어 드리자... 갈보리는 그것을 모두 가능하게 했다.
예수님 피를 통한 안식에,
자신과 죄로부터 안식에,
구원받음과 당신이 가진 평화에, 오 하나님
우리는 담대하게 안으로 들어간다.
안식 그리고 두려움 없음,
그러나 합당한 경외심으로,
그분이 만드신 완전한 평강 안에 고요함,
우리는 겸손하게 다가간다.
I.Y. Ewan

 제단의 음식
사려 깊은 많은 독자들이 때때로 사복음서와 주요제물들을 연결하는 추구를 시도했다, 그리고 거의 분명해 보인 것은 화목제는 누가복음에서 특히 드러나 보인다는 것이었다. 누가복음의 24개 장에서 “평화”의 단어가 19개 정도 발견되고 있으며,  또한 누가복음에서는 남성과 여성, 남성과 여성, 남성과 여성의 반복되는 언급이 있다. 이들의 예로는 스가랴와 엘리사벳, 요셉과 마리아, 시므온과 안나, 나아만과 사렙다 과부들을 들 수 있다. 이들 모두는 시작 장들에 있고 전체 복음서를 신중하게 정독해 본다면 화목제에서 나타나는 남성과 여성의 특성들을 가진 그러한 짝들을 더욱 많이 발견해 낼 수 있을 것이다(레 3:1).
다른 제물과 마찬가지로 화목제물을 가축떼에서 또는  무리에서 가져다 드릴것인지에 대해서는 특정한 규정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 서로 다른 다양성의 특성과 특징은 도입부에서 이미 명시한 바 있다. 한 번 더 봉헌자는 마치 “이것은 내 것이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의 제물의 머리에 안수해야 한다. 그는 말없이 자신의 안수하는 행동으로 자신의 제물을 동일시하였다. 제물과 함께 이 개인적 동일시의 안수는 반드시 행하여야 하는 필수 요구조건이었다. “여호와의 화제는 그 사람이 자기 손으로 가져올찌니”(레 7:30).

 
봉헌자 스스로가 희생제물을 죽인 후, 그는 제단, 제사장, 봉헌자의 몫을 각각 나누어 놓아야 했다.  피, 내부장기의 기름과 콩팥은 하나님의 몫이었고 이들은 첫째로 언급되었다. 피는 제단 둘레의 주위 사방에 뿌려졌다. “뿌림”은 피가 제단 변두리에 실제로 뿌려졌던 것에 대해 아마 지나치게 가벼운 단어이다. 다음에 제물의 내부장기를 덮는 지방질, 콩팥과 간 위의 꺼풀은 흠향하심의 향기를 위해 제단에 모두 태워졌다.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이들 모두가 얼마나 아름답게 묘사하는지!
피는 육체의 생명이다. 제단에 피를 붓는 것은 심지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순종으로 아낌없이 자신을 드리셨던 구세주의 아름다운 삶을 암시한다.
기름은 제물의 생명력/활력이요, 제물의 풍요로움과 건강을 상징한다. 그래서 그것은 우리의 주 예수님의 바로 어떠하심/주예수님께만 있는 것이었다.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로 그분은  아버지의 뜻에 그분 자신을 헌신하셨다! 밤낮으로 그분은 하나님의 기쁘심을 위해 거룩한 섬김안에 끊임없이 몰두하셨다.
내부장기에는 보이지 않는 특징이 있었다. 그리스도의 숨겨진 느낌, 동기, 감정/애정들, 생각은 하나님께만 알려지셨다. 아드님의 소원은 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주예수님은 다른 사람이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씀하실 수 있었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요 8:29).
간 위의 꺼풀은 아마도 호흡이나 숨결의 조절과 관련되었던 횡경막을 의미하는 것 같다. 구세주의 일상 생활, 모든 호흡은 하나님의 즐거움과 기쁨을 위한 것이었다.
이들은 전부 제단위에서 번제물 위에서 불살라졌고 그래서 그것은 모두 하나님께 향기로운 향기로 함께 올라갈 것이었다. 그분이 완전함안에서 예수님의 모든 것, 그분의 모든 행하심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먼저  제단을 만족케 해 드리고 남은 것 중에서 자신들의 몫을 얻었다. 제단의 음식이었던 그것을 먹는 것은 대단한 특권이었다. 아론의 아들들은 제물의 가슴과 오른쪽어깨를(또는 오른쪽 뒷다리) 먹도록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제사장의 몫조차 하나님께 먼저 보여드리야 했다, 그래서 그것의 가슴은 “흔든<요제> 가슴”으로 알려졌고 또한 어깨는 “들어 올리는<거제> 뒷다리”로 알려졌다. 가슴은 주님의 앞에서 의식적으로 좌우로 흔들었을 것이며, 그래서 그분의 눈은 그분의 제사장들이 먹을  그것을 보셨을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동물의 어깨<뒷다리>는 위를 향해 들어 올렸다; 다시 하나님께 의식적으로 보여 드리기 위함이었다. 이것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형식이나 상징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표현하는 가슴은 아버지의 기뻐하심이 되었고, 그리고 지금은 놀라운 은혜 안에서 그분의 백성들의 기뻐함과 누림이 되었다. 예수님은 말씀하실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또한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므로”(요 5:20; 14:31),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을 공유하기 위해 드려졌다.
어깨/뒷다리는 힘을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위해 사셨던 주예수님의 능력과 충성스러움/굳건함이며 지금은 그분은 그분의 백성들을 지탱하신다. 그리스도 안에는 약함이나 흔들림이 없다. 결국 어느 날 정사/지배권은 그분의 어깨에 있을 것이고(이사야 9:6) 그분은 그 동일하고 강한 어깨에 그분이 발견하시는 모든 잃은 양을 메고 오신다(눅 15:5). 그분에 관해서 얼마나 자주 읽는지.. “그분은 하실 수 있다”(빌 3:21; 딤후 1:12; 히 2:18; 7:25).  자기 만족/충족감의 즐거움에 차서 아버지는 주예수님의 사역의 기간 동안 그분의 종-아드님의 지속적인 변함없음을 보셨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에게서 동일한 즐거움을 즐기실 것이다.


제물의 남은 것은 봉헌자가 회막 바깥에 있는 자기집으로 가져왔다. 그의 가족 및 친구들과 함께 봉헌자는 이미 제단과 제사장들이 먹었던 그것을 먹고 즐길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규정이 있었다. 감사로 봉헌되었던 제물인 경우 그때 그것은 그 날안에 다 먹어야 했다. 감사는 적은 영성을 요구하는 아주 기본적인 행사이다. 그것은 단번에 수행되어야 하거나 그것이 잊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제물이 서원과 함께 가져왔거나 자원하는 제물이라면, 그러한 경우에 봉헌자는 어떤 더 깊은 행함이 있었고 그래서 다른 날까지도 제물을 먹는 것이 허용되었으리라고 추측해 볼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봉헌자는 제단에서 너무 멀리 있지 않아야 했다.  일반적인 음식과 혐오스러운  음식이 변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부르는 노래, “예수님은 십자가 가까이 나를 붙드시네.” 우리의 행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려면 우리는 제단에서 결코 멀리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
화목제는 달콤한 향기의 제물들의 마지막이다, 이후에는 범죄 제물들의 세부사항이 이어진다.

 

 

###제물 안의 그리스도: 속죄제(4) === 짐 플레니건 


“사람이 하나님을 탈취<도둑질>할 것인가?”
비록 속죄제와 속건제는 공통점이 많이 있을지라도, 그러나 그것들은 서로 구별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속죄제는 죄들을 위한다기보다는 죄인 자체를 위한 것이라고 말해도 좋다, 그러나 속건제는 특정한 죄와 불법<범과>과 그러한 것에 대한 당연한 형벌을 인지하고 감당하는 것이었다. 이 의미는  종종 말했던대로,  나의 속건제 되신 그리스도는 내가 행한 행위의 죄들을 위함이요, 나의 속죄제로서의 그리스도는 내가 어떠함(죄됨=죄인됨의 상태)을 위함이다. 진실로 나의 어떠함<죄됨>은 내가 결코 행하지 말았어야 할, 내가 행한 그 어떤 죄들보다 실제로 더욱 나쁜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죄됨=죄인됨>이 없었다면 어쩌면 내가 범한 죄들은 반드시 범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경우에,  속죄제는 죄인의 무지에 대한 속죄<보상>을 위하여 봉헌되었다. 무지는 일반적일 수도 특별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지의 죄들은 반드시 피흘림을 요구하는 죄들이다. 그것은 사람이 죄 자체이며 심지어 그가 죄를 범했음을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람의 영의 상태의 슬픈 반영이다. 자주 강조되는 바로는, 속건제물은 이미 구속받은 사람들의 죄들을 처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불신자든 그분의 백서이든지 상관없이 죄를 혐오하시며  죄에 대한 신성한 증오의 기준은 십자가에서 보여졌다..
레위기 4장을 통하여, 예견되는 바, 4 부류의 사람들은 죄를 지을 수 있는 죄됨 그자체이며 죄는 어떤 식으로든지 항상 하나님을 탈취하는 것이라 말해도 좋다. 제사장이, 전체 회중이, 통치자가,  일반 백성 중 하나가 죄를 지을 수도 있었다. 제사장, 백성, 왕, 그리고 평민 모두 범죄에 취약하지만,  왕이든지 평민이든지간에 속죄제물이 필요했다.

 
첫째는 제사장이 범죄한 경우이다. 이것은 비통하고도 심각한 것임에 주목하라. 그의 경우에  “무지함 때문에”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특권적 위치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알고 있어야 했다. 진실로 무지의 소치일 수도 있지만 그것을 위한 변명의 여지는 없다.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예배를  탈취당하셨다.. 어떻게 범죄한 제사장이 그 자신을 위해서나 그가 대표하는 자들을 위해 예배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속죄제 드림을 통해서만 그가 책임져야 할 부분에 합당한 균형이 잡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둘째는, 전체 회중이 범죄한 경우였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증거함인 효능 있는 고백을 탈취당하셨다. 어떻게 범죄한 회중이 하나님에 대해 합당하게 증거할 수 있겠는가. 반복적으로 이스라엘은 주께 반역하는 죄를 범함으로써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들을 버려 그들의 대적들에게 넘겨버리시도록 하였다. 수 세기에 걸쳐 또한 그들은 그분의 절기들 지킴과 십일조 드림을 준행하는데 실패했다, 그래서 말라기에서 그분은 그들을 책망하신다, “너희는 내 것을 강도질하고”(말 3:8,9).
셋째는 통치자가 범죄한 경우이다. 하나님은 그 결과로 통치권<경륜, 행정>을  탈취당하셨다. <하나님의 위임을 받아 수행하는> 그것은 사람들을 다스리는 통치자의 책임이었다, 그러나 통치자가 죄를 범한 경우에 그런 원칙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범죄한 왕이 어떻게 백성들에게 합당하게 그리고 백성들이 받아들일 수 있게 다스릴 수 있을 것인가? 동일한 원리는 신약에서도 볼 수 있다.. 장로에 대한 고소는 증거가 충분해야 한다, 그러나 그때 확증들이 있는 경우에는,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딤전 5:19-20)고 명령한다.
네 번째는 일반 백성이 범죄한 경우이다. 이것도 아주 심각할 수 있는가? 참으로 그렇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때문에 친교/교제를 탈취당하신다. 그의 구속된 백성들 사이의 교제는 그분에게 너무나도 귀중하다, 우리가 합당한 속죄제를 깊이 숙고해 볼 때 그것의 귀중함에 대해 참으로 보게 될 것이다.

 
범죄한 제사장은 속죄제의 가장 높은 모형인 수소를 가져와야 한다. 그의 위치와 그의 지식으로 인해 큰 제물을 필요했다. 그는 성막의 문으로 그의 속죄제물인 수소를 가져와서 그것의 머리에 안수해야 했다. 그것은 공식적으로 그가 범죄했음을 자백하는 것이기에 고통스러웠을 것이었다. 그때 죽임 당한 수소의 피는 성막 안으로 가져가서 하나님의 눈이 보시도록 휘장 앞에 일곱번 뿌려져야 했다. 황금 제단-향단-의 뿔에도 피가 발라지고 나머지 피는 안 뜰에 있는 큰 놋제단의 바닥에 쏟았다. 기름과 콩팥과 간에 덮인 꺼풀은 번제단 불 위에 넣었고, 이어서 그의 몸과 함께 육체, 머리, 다리, 나머지 안쪽과 배설물은 진 밖으로 옮겨서 태워야 했다. 이것은 더럽혀진 자의 장소, 버림 받은 나병환자의 장소,  사형 집행 장소이었다. 죄는 하나님께 상반되는 것이다, 그리고 속죄제는 진 밖에서 완전히 태워져야 했다. 상징하는 중요성은 분명하다. “이는 죄를 위한 짐승-가축이 짐승이 됨-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 13:11-12).


범죄한 전체 회중은 마찬가지로 수소를 가져와야 한다 그리고 장로들이 수소의 머리에 안수함으로써 다시 죄를 공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범죄한 제사장을 위해 수행된 그 제물 희생 의식이  다시 회중을 위해서도 수행되었던 것이다.

 
범죄한 족장의 경우에 그는 수염소를 그의 범죄를 위해 가져와야 한다.  마찬가지로 그는 제물의 머리에 안수한 후  그것을 죽였고, 기름을 번제단에서 태우는 동안 그때 피의 일부를 번제단의 뿔에 바르고, 그리고 나머지는 제단의 바닥에쏟았다.


여호와께서는 죄를 범했던 일반 백성들을 위해서는 염소의 암컷새끼나 어린 양의 암컷 새끼를 속죄제물로 받으셨다. 기름이 번제단에서 태워지는 동안 번제단 뿔에 피가 발라졌고 번제단 바닥에 나머지 피를 쏟았다,  이 제물의 경우에 그러나, 이 속죄제의 경우에 가장 감동적인 첨가되는 표현이 존재한다. 속건제물들과 관련된 단 하나의 유일한 때에 사용되는 표현, “달콤함을 위하여=단 맛을 위하여”(레 4:31). 죄를 지은 평민 한 사람이 회복됨이 하나님께 얼마나 달고 얼마나 귀중한 것이 되는지....
속죄제에서 많은 사랑스러운 세부사항들이 현재 빠트려져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라면, 계속되는 지면에서 숙고하게 될 것이다.

 

 그분의 백성들의 죄들을 위한 하나님의 요구
속죄제와 속건제 사이에 확실한 차이가 있음과 동시에, 5장의 처음 13개의 절에서 “중간 지대”이라 칭했던 것이 있음이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한 구절만으로도 이것을 적절하게 설명된다. “그 범과를 인하여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리되 양떼의 암컷 어린 양이나 염소를 끌어다가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레 5:6). 여기에 하나의 짧은 절에서, 동일한 제물을 묘사하기 위하여 “속죄제와 속건제”의 표현을 둘 다 사용한다. 대답은 비록 두 개의 제물 문제에서 서로 구분이 되더라도 그러나 양쪽에 대해 적용하는 것이 원칙이며, 그리고 레위기 5:1-13은 둘 사이에 <중간지대>처럼 보인다.
이 부분에 죄를 설명하는 것은 죄들의 위임과 무지의 요소를 가진 것 보다는 오히려 생략<빠뜨림>에 관한 죄들이다. 모두는 거짓을 말하는 것이 죄인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사람의 경우 전혀 말하지 않을 수도 있다. 행정관에 의해 명령받았지만 그는 그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하지 않는 경우, 그는 거짓말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말하지 않을 지라도 범죄했던 것이다.
 
그 다음에 아마 오랫동안 잔디나 덤불에서 걷다가 부정한 짐승의 시체에 부지중에 발에 걸리는 사람의 경우가 있다. 이것은 실제로 인지못함 가운데에 이루어졌다; 그가 알았다면 그가 그것을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몰랐거나 알았거나간에 그가 닿았으면 그것으로 인하여 부정하게 여김 받았다. 더럽힘과 관련된 사물들은 사람을 부정케 할 수 있기에 조심해서 피해야만 했다..
어떤 것을 수행하기로 약속했던 사람을 예를 들어보자. 그는 그의 작정에 대해 엄숙히 맹세했으나 어떤 이유에서건 그 때가 닥쳤을 때 그 약속을 이행하지 못했다. 그의 동기는 선했고 벌어진 상황은 그가 조금도 어찌해볼 수 없었기에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런 경우에 어떻게, 왜, 죄 범함이 되었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하나님께서 약속 때에 그분은 항상 그분의 약속을 지키신다. 만일 사람이 약속하고서도 자기의 약속을 지키지 못함은  하나님처럼 신실하지 못함을 드러내고 따라서 악함을 의미한다. 약속은 닥칠 수 있는 상황들에 대한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경솔하게 한 것이 아닌가 참으로 <모름>의 요소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죄요, 그리고 죄 범함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 해결 위해서는 세 가지의 요구조건들이 있다.

 
첫째로, 죄의 완전하고 솔직한 자백이 있어야 한다. 실패를 일반적인 인정하는 것만은 충분하지 않았다. “이 중 하나에 허물이 있을 때에는 아무 일에 범과하였노라 자복하고”(레 5:5). 자백은 사람이 용서를 구하고 있는 특정한 죄 와 구체적으로 연관되어야 한다.
둘째로, 적절한 제물이 있어야 한다; 이 경우에는,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4:28,32의 평민의 경우와 같이, 양이나 염소무리에서 양이나 염소의 새끼의 암컷을 요구했다. 나중에 성경에서 엄중한 문장이 되풀이 될 것이다,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겔 18:4,20). 아담 조차 그것을 알고 있었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 죄에 대한 형벌은 죽음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사람에게 벗어나는 방법을 제공하셨다. 다른 허용되는 생명이 발견된다면 그 범죄를 위해 대속물로서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심지어 하나님의 율법 아래서 조차 아주 자비로우셔서, 나중에 언급될 것이지만,  백성들 일부의 자원의 결핍을 고려하셔서 허용의 여지를 만드신다.
셋째로, 속죄제를 봉헌하는 제사장은 성막의 안뜰 거룩한 곳에서 먹어야 한다(레 6:26). 그것은 제사장이 죄인의 심정안으로 들어가 공감하고 그리고 죄의 심각함을 자기 것으로 여김이 된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대한 그 교훈은 책임 있는 형제들이 진실한 제사장의 마음으로 교회의 모임중에서 인도해야 한다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곧 회중들의 죄에 대해 거룩한 곳-하나님 임재의 격리됨안-에서 슬퍼함이 될 것이다. 죄는 진영의 공중앞에서 공포되거나 험담거리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앞에서 제시되었던 것처럼 여호와께서는 자비로우셔서 일부 사람들의 가난을 생각하신다. 두어 개 어구를 주목하라, “만일 힘이 …미치지 못하거든”(레 5:7,11). 일부가 자원이 있다해도이 제물을 위한 어린 양을 가져올만큼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 그들은 산 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져올 수 있었고 이것들도 받으셨다.. 새 한 마리는 속죄제로 봉헌되었을 것이고 그것의 피는 제단 곁에 뿌려지고 나머지 피는 또 제단의 바닥에 쏟아 흘렸다. 그것은 희생물의 대속하는 죽음이었고, 죄는 용서되었다. 두 번째 새는 번제로서, 모든 번제가  죄인의 필요를 충족시켰던 것과 동일한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몫이었다.
그러나 2마리의 새 조차 일부 사람들에게는 벅찬  때가 있었다. 그 때 여호와께서는 속죄제를 위해 고운 가루의 에바의 10분의 1도 받으셨다. 이것은 기름도  유향도 없는, 다만 몇 파인트의 가루에(0.55리터) 불과했다., 그러나 여기에 제기되는 문제는, “어떻게 피없는 제물이 죄사함받기 위한 속죄제가 될 수 있는가?” 이다. 거기엔 참으로 피가 없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그의 자원에 따라 드리고 있었고 그리고 그의 규정된 한줌의 제물이 제단위에 뫃일 때 다른 제물들의 피가  거기에 함께 스며들어갔다. 이 제물의 남은 것은 소제로서 제사장의 음식이 될 것이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어린애 같고 의지가 약한 이들이 극단적이시며 완전한 단순성 가운데에 있는 구세주께 온다. 그들은 속죄와 화목과 대속과 속죄 그리고 칭의 사이의 다름을 알고 있는가? 천만에. 그들의 정신적/지적인 자원은 참으로 빈약하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셨고 그들은 그분을 신뢰하며 송축한다. 그것은 고운 밀가루 10분의 일 에바처럼 충분하다. 토마스 뉴베리가 말한 대로, “신성한 은혜는 인간적인 연약함에 대해 자기를 낮추심이다.”
 

 

 

###제물 안의 그리스도: 속건제(5) ===  짐 플레니건
 

“사람이 하나님을 탈취할 것인가?”
레위기 안에 말씀 전개의 원칙은 정말로 새로운 주제가  아닌 경우라면,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로 새 단락을 시작한다.. 그래서 그 표현이 레위기 5:14에 있다, 그러나 이 장의 후반 절들에는 계속해서 “중간 영역”이 상존한다. 여기, 비록 사람이 무지로 인한 범죄함이라 할 수 있는 죄들이 있지만, 그런경우에도 반드시 죄사함-죄 용서-가 필요했고 따라서 속건제가 요구되었다. 다음 장에는 알면서도 고의로 범한 세부적인 죄들이 나열된다. 속죄제가 죄인의 빈곤에 정상참작의 여지를 두지 않았던 것처럼, 죄인의 빈곤에 대해서는 정상참작의 여지가 없는 거기서, 오히려 고의로 범한 죄에 대해서는 자비에의 탄원이 가능했다..
주목할 사항이 있다. “속죄제”에 대한 히브리어 단어 용법에서의 “죄”(핫타아, str 2403)와 “속건제”에 대한 히브리어 단어용법에서의 “죄”(아샴, str 817)의 뜻은 서로  동일하다. 이로써 알 수있는 것은 이 제물들은 보상이 필요한 죄들을 위한다는 점에서 서로 매우 가까운 동일성을 가짐이 분명하다는 사실이다. .  따라서 우리는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라는 말씀 안에 있는 깊고도 엄숙한 진술을 되새겨보게 된다. 그렇지 않은가? 그분은 흠없는 삶안에서 죄를 알지 못하셨지만 우리의 속죄제가 되셨고 또한 우리의 -죄인으로서의 위치에서- 우리와 하나되어 고난 받으셨다. 거룩하신 분께서는 골고다에 죄를 위한 제물이 되셨다.
죄 없으신 분이 우리의 죄들을 위해 죽으셨다(고전 15:3).
죄를 너무나도 가볍게 생각하는 너희
그 악이 얼마나 큰지는 상상도 못한다,
여기-골고다-에서 그 죄악의 본성이 올바르게 보일 수 있다,
여기에서 그  범죄를 평가할 수 있다.
- 토마스 켈리

 
레위기 5:15에서 직면하게 되는 것은 사람이 주님의 성물들에 대해 범하는 죄라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것은 매우 심각했다. 동료 인간에 대한 범죄는 물론 충분히 심각하며, 또한 시편 51:3-4에서 자백했던 다윗처럼 주님께 대한 범죄로서도 고려된다, 그러나 성물에 대한 범죄는 그분께 대한 직접적인 범죄이다. 이것은 지금까지는 레위기에서 여태껏 언급되지 않던 제물을 요구했다. 그것은 무지-알지 못함-때문에, 그러나 부주의 또는 무관심 때문에 범하는 죄이기에 용서할 수 없음이 당연하다고 인정되었다. 그런데, 얼마만큼이나 성물에 대해서 사람이 죄를 범할 수 있으며 어떻게 오늘날  우리가 그처럼 죄를 범하고 있는가?
이스라엘에게서는 그런 죄 중 하나는 지정된 명절을 준수하지 못함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면에서  민족 전체가 오랫동안 범죄했었다(왕하 23:21-22). 또는 그것은 거룩한 예물이나 희생물, 또는 십일조나 제사장들의 생계를 위해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했던 첫열매들을 보류함에서 볼 수도 있다. 재론해본다면 제사장들에게만 허용되는 음식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장자를 대속하지 않거나 성별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런 죄들은 델리츠(독일 신학자)가 말하는 “여호와의 권리를 침해”와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죄였다.
오늘날 침례를 받지 않은 많은 신자들이 있다. 이것은 무지함 때문인가? 또는 부주의함 때문인가? 또는 무관심 때문인가? 어느 것이건 그것은 우리 믿는 이들에게 주신 주님의 분명한 명령이기 때문에, 그것이 성물에 범죄함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그 마지막 날 저녁 다락방에서, 그분의 지정하신 방법으로 우리가 그분을 기억하고 기념하도록 단순하게 말씀하신 주 예수님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행하기를 실패한다. 아마 우리 신자들이 그분께 속하는 것을 드리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을 얼마나 괴롭게 하고 있는지를 깨닫는다면 우리는 그 분말씀에 따르고 복종하기를 더 열심할 것이다.

 
범죄한 이스라엘은 적절한 제물과 함께 나아가 제단을 의지하고 그 제물이 죽는 것을 보아야 한다. 오늘날 신자는 갈보리를 의지하고 나아가서 거기서 자신을 위해 치루어졌던 모든 비용을 보아야 하며 또한 그때 물어야 한다.. “만약 나의 주님께서 나를 위해 이 모든 고난을 받으셨다면 어떻게 내가 그분에게 무엇이든지 아낌없이 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레위기 5:15에서 요구했던 제물은 숫양이다. 다른 속건제는 어린 양이나 염소의 새끼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숫양의 요구된 이 범과는 숫양의 생명을 요구했다, 따라서 비록 무지의 어떤 요소가 있을 수 있다해고 그 범법함의 심각성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것은 레위기에서 숫양에 대한 첫언급이다. 또한 모든 다른 제물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흠이 없어야 한다. 그분의 이러한 초기의 그림자들은 구세주의 죄 없으심을 시종일관 나타내어 왔다. 오직 죄 없으신 구세주만이 십자가에서 죄 많은 남자와 여자를 대신하여 죄인이 되셨다..
모세와 집례하는 제사장들은 그 때 은 1세겔에 해당하는 가치를 정하도록 요구되었다. 이것이 확정되면 그때 위반자는 그가 보류한 그것을 배상하여 그 값을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 조차 충분하지 않았다. 거기에 성소의 1세겔과 일치한 값의 은의 세겔에 오분의 일이 더 추가되어야 한다.

 
이 모든 전형적인 가르침을 통해서 충분히 분명해 보이는 것은.. 하나님은 사람들의 죄들에 의해 탈취당하셨다는 것이다. 그분의 권리에 관한 이 침해는 에덴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이스라엘과 이방나라들을 통해 계속되어왔고 이 시대까지 지속되는 역사를 통하여 계속되고 있다. 사람은 자기자신 안에서 하나님을 약탈한 죄에 대한 합당한 배상을 하기에는 전혀 무력하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 어떤 거역함도 없는, 어떤 자기 주장도 하지 않으신, 복된 사람 그분이 오셨다, 그분의 거룩함 안에서 주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항상 사람안에서 찾기 원하셨던 그 모두를 하나님께 드리셨다. 그 사랑스러운 삶을 내려 놓음으로써 다른 사람이 탈취했었던 것을 회복하셨고, 그리고 지금은 죽은 자 가운데서 승리안에서 부활하셔서, 영광안으로 많은 아들들을 이끄신다. 그것을 매우 경건하게 표현해본다면 하나님은 오늘날, 지금,  아담의 범죄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영광을 가지고 계신다. 주예수 그분은 유일한 독생자이셨다, 그러나 지금, 영광을 위해 예정된, 모두 그분의 피로 구속받은, 곧 그분과 같이 하늘에 합당한 영광의 몸을 입게 될, 그 아드님과 같은 사람 종족이 여기에 있다.  예언적으로 둘째 사람, 마지막 아담은, 말씀하신다. “내가 빼앗지 아니한 것도 되돌려주었나이다-화복시켰나이다-”(시 69:4). 그리스도는 주되심을 회복하고, 오분의 일을, 은혜의 수익을 추가하셨다. 그것은 그분의 생명을 희생한 댓가이다.
보라, 흠 없는 희생의 죽음을,
십자가위에 계신 나의 보증인;
하나님의 어린 양, 나의 희생제물,
그분은 나를 위해 그분 자신을 주셨다.


 우리의 동료들에 대한 범죄
나의 동료에 대한 범죄가 주님에 대한 범죄라는 것은 몇번이고 강조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모든 죄가 그렇게 가증스러운 것이다. “어떤 혼이 주께 죄를 짓고 범법하되 … 이웃에게 거짓말을 하거나”(레 6:2) 이것은 새 단락의 시작이다, 독자들이 흔히 그러했듯이 죄들은 사람 눈에는 사소해 보일 수가 있어도 주님께는 불쾌하다는 것이다.
거짓말은  많은 이들에게는 바로 삶의 방식이며, 큰 관심을 끌 것 없는 어떤 진지함이나 특별함이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거짓말함의  문제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는 다른 죄들의 경우에서처럼 용서를 위한 희생물의 피 흘림을 요구하셨다. 어쨌든 <참됨>은 하나님의  본성이고, 그분의 이름들 중 구약에서 여러 번 되풀이되었던 하나는 “진리의 하나님”이다(신 32:4; 시 31:5; 사 65:16). 그러므로 거짓말은 진리의 하나님께 혐오스러운 것이고 이런 이유로 바울은 거짓을 없이 하라고 신자들을 권고한다,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그리고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엡 4:25; 골 3:9; 약 3:14). 고대의 계명은 실제이었다, “너는 거짓 증거하지 말찌니라”(출 20:16) 그리고 이것은 주 예수님과 바울에 의해 둘 다 인용된다(마 19:18; 롬 13:9).

 
종종 그러한 경우가 있는 것처럼 거짓말은 다른 어떤 죄를 은폐하기 위하여 쓰여졌고, 이것은 레위기 6장에서 관찰되고 있는 바이다. 여기에 처음은 그의 이웃에 대한 사람의 경우 그를 위해 간수하도록 무언가를 맡겼다. 그것은 길 박사의 주석처럼, “돈 또는 물품, 또는 어떤 살아있는 창조물, 양, 암소, 또는 말”일 수도 있다. 어떤 것을 선한 신뢰로 그에게 맡겼고, 신뢰를 보인 이웃이 자신의 것을 이제 되돌려받으려 하는 그 때  어떤 종류의 거부함이 생길 경우가 있었다. 어쩌면 맡겨 받은 것이 전혀 없다거나, 물건이 분실되었다거나 도난 당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어느 쪽으로든 거짓말하는 죄에 의해 덮여진 도둑질의 죄가 있다.
또 다시, 그것은 어떤 문제에서의 협력에 대한 계약일 수도 있다, 그리고 한 동료됨의 정신안에서 신뢰로 돈, 물품 또는 재산을 보존하기 위하여 맡기는 경우가 있다. 전체적인 합의가 부정되는 그때에, 한 동료는 그의 몫에 대한 그의 요구를 사기당한다. 물론 그것은 절도이고 횡령이다. 그것은 다시 거짓말로 덮여지고 죄는 그 사람이 거짓말에 대해 거짓맹세함에 의해 더 악화된다. 그러한 맹세를 델리츠는 말한다, “이웃에게 했던 부정행위에 더하여 하나님께 향해 범죄를 추가하고 여호와에 맞서는 기만이 된다.”

 
이어서 폭력으로 탈취해 간 다른 사람의 물품에 관한 더 명백한 죄가 있다. 이것은 공개적인 강도 또는 다른 이의 소유를 은밀히 강탈하는 것일 수도 있다. 특정한 경우에 이 도둑질은 속임에 의해 완수된다 할 수 있으며, 그래서 이웃이 자신의 물품을 교묘하게 속였고 강탈했다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잃었던 무언가를 찾아낸 어떤 사람의 경우를 살펴보자. 그는 그것이 다른 이의 것이며 또한 그가 소유자의 신원을 알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관하여 거짓말 한다. 그는 돈이나 물품을 발견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도 있다, 또는 그가 그것들을 찾아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것들이 누구의 것인지 알지 못했다고 맹세할 수도 있다. 그는 그가 소유자를 추적하려는 헛된 것을 시도했었다는 것을 심지어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하튼 그는 발견했고 그리고 그것은 확실히 자신의 것이 아니었고, 그리고 거짓말에 대한 맹세는 그에게 위증뿐만 아니라 도둑질의 범죄를 만든다.

분명한 것은 무슨 죄를 범하든지 그것은  죄의 결과는 두 배로 그 영향을 나타낸다.. 그는 자신의 이웃의 권리를 침범했고 또한 주님의 명백한 일반적인 명령을 또한 위반했다. 이웃에게는 손실을 입혔기에 반환이 꼭 필요했고, 그리고 하나님께 또한 속건제의 형태로 배상이 있어야 한다. 본래의 주인에게 반환은 실제의 그것이나 또는 그것에 일치하는 가치에 해당하는 만큼을 반환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거기에 오분의 일이 추가되어야 한다.
이 반환은 범죄자의 속건제를 드리는 바로 그 날에 하루도 지체함없이 수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죄를 범한 사람이 근심/통회하는 양심과 회개함안에서  지금 왔음을 가정했다..

 
그는 숫양을 가져와야 하고, 다시 한번 그 중요한 “흠 없는.” 이란 단어가 추가된다,  잇따라 나오는 단어, “너의 정한 값대로,”의 해석에는 곤란한 점이 있다. 그들은 숫양의 정해진 가격에 적용한 것이 아니라 제사장이 정한 값- 오분의 일이란 가치로 정한 가격에 따라- 정한 값이 될 것이다. 이것은 훔친 물품이 더 이상 수중에 없는 경우 특히 필요할 것이다.
믿는 자들을 위해, 그 모든 전형적인 의미는 분명하면서도 매우 귀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죄있다고 판정했다. 거기에는 많은 지불할 것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던 것을 회복할 수는 없는 영적인 빈곤자들이다. 우리는 슬프게도 범죄하여 하나님의 보좌를 상처 입히고 모욕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의 어린양께서 오셔서, 범죄를 위한 희생물과 보증인이 되셨다. 이로써 그분은 멀리 옮겨졌던 것을 회복시키시고 또한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오분의 일을 추가해주셨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해 그분의 생명을 주셨다. 그분의 피는 뿌려졌다. 신성한 거룩함의 모든 요구는 완전히 충족되었고 믿는 자들은 용서받는다. 우리에게 지워진 의무는 이제 우리가 그분에게 그 깊은 슬픔과 수치를 당하게 했던 죄를 혐오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그렇게 많은 고난을 겪으셨던 그분의 기쁨을 위해,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제물 안의 그리스도: 부가물(6) === 짐 플래니건


다른 제물들
앞서의 기록들안에서의 우리의 묵상은 단지 다섯가지의 중요한 제물에 대한 것만이었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이들 묵상은 단지 소개하고 암시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결코 속속들이 규명해내는 정도는 아니다, 왜냐하면 우물은 깊다! 여기에 다른 제물들이라 칭했던 “보조 제물”도 있다, 그러나 똑같이 중요하고 주의 깊은 연구가 필요한데  이것들에도 역시 그리스도의 묘사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빨간 암소새끼(민수기 19)
이것은 넬슨의 성경 사전에 의해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요약된다. “결점 없는 어린 암소는 이스라엘의 진 밖에서 죽임 당하고 그 후에 불에서 태워졌다. 그것의 재는 부정함에서 정결함을 가져오도록 속죄제처럼 이용되었다. 부정함에서 정결함을 위한 필요는 사람이 시체, 인간의 뼈, 또는 무덤을 만질 때 생기는 것이다. 온전한 암소새끼는 -그 가죽, 살, 피와 내장- 태워졌다. 제사장은 삼목 나무(백향목-내구성의 상징), 우슬초(정결하게 하는 능력, 치유의 상징), 그리고 붉은 실(아마도 죄에 대한 속죄인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을 불에 던져서 함께 불살랐다.. 부정의 문제가 일어날 때, 붉은 암소새끼의 재는 흐르는(신선한 근원) 물과 그릇에서 함께 섞였고 부정한 사람과 그의 사는 집에 우슬초에 적셔져서 뿌려질 것이었다.” 이것은 더럽혀짐에서 정결케 되기 위한 신자들의 끊임없는 필요를 나타낸다. 그와 같은 정결케 함은 그리스도의 희생에 근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효과적으로 이루어진다.

 
전제
이것은 희생제물이나 소제에 부어진 소량의 포도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전제는 보통 단독으로 봉헌되지 않았지만,  창세기 35:14을 한 번 보라. 그것은 아침과 저녁 희생물 위에(민수기 28:7-8) 그리고 제물의 본질에 따라서 다양한 양의 포도주가 각각 다른 때에 매일 부어졌다(민수기 15:5-10). 그것은 그분과 그분의 백성들 모두는 하나님을 위해 부어졌던 것처럼, 전제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들 모두의 기쁨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빌립보서 2:17에 나타난 기쁨은 그러한 기쁨에 대한 암시가 될 수도 있다.

 
나무 제물
이것은 단지 우리의 성경에서 두번 언급되었다(느 10:34; 13:31). 나무 제물을 가져오는 것은 하찮은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번제단의 계속해서 태우는 불을 유지하려면 거의 필수적이었다. 마찬가지로 모든 신자의 가장 낮은 섬김이 모임에서 예배의 유지과 하나님을 위한 증거에 필요하다. 가능한한 모든 경우에서, 우리의 집회 출석, 집회에서의 우리의 기도, 그리고 집회에서 우리의 참여, 이 모두는 불타는 것을 유지하는 겸허한 나무 제물과 같다.


 
@@레위기 희생과 예물 요약

@번제 : 수송아지, 숫양이나 숫염소,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
@소제 : 고운 가루 + 감람유 섞은 것
--- 고운 가루 기름 자체로 :  유향과 소금을 놓아서 살라드림
--- 고운 가루 기름을 조리함
------ 화덕안에 붙여 구워냄(무교병, 기름 바른 무교전병),
------ 불 위에서 구워냄 : 고운 가루 기름을 번철-철판-에 부치는데  여러 조각으로 나누고 기름을 부음.
------ 냄비-팬-안에서 삶아냄
--- 처음 익은 곡식<푸른 첫이삭의 소제>을 불에 볶아 찧어 기름 붓고 유향을 더하여 전량을 불살라 드림.
@화목제 : 소나 양이나 염소 - 수컷이나 암컷,

------ 감사제(삶속의 감사-무교병 드림.. 유교병 포함 가능),

------ 서원제<하나님 뜻대로 살려는 결단>.

------ 낙헌제<하나님께 헌신>
@속죄제 : 수송아지(대제사장이나 온 회중), 숫염소(족장들), 암염소나  암컷 어린 양(평민)
@속건제 :
--- 손해 끼침 없는 이웃에 대한 범과, 모르고 지은 죄<무지함으로 또는 고의로> - 암컷 어린양이나 암 염소의 속죄제 또는 산비둘기 두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마리(속죄제와 번제), 힘이 거기에 못 미치면 고운 가루 에바의 1/10(속죄제)
--- 여호와의 성물에 대한 죄<무지함으로 또는  고의로> : 제사장이 지정한(평가한) 가치에 해당하는 숫양의  속건제물 + 그 가치의 오분의 일 추가

--- 여호와의 계명에 대한 범죄<무지함으로 또는 고의로> : 숫양의  속건제물
--- 이웃의 재산 손해<고의- 맡긴 것을 속임, 도둑질, 착취> : 본래 물건 + 그 물건의 가치의 오분의 일 추가, 제사장이 지정한 가치의 숫양의 속건제물

 

###대속죄일 : <정결케 함>의 속죄제 후 번제를 드림. -- 속죄예식 동안 오직 대제사장만 성소에 출입가능..
@속죄제 : 수송아지(대제사장과 그 권속 위함) 숫염소2(온 백성 위함) :

-----<물두멍애서>몸을 씻은 후에 새로 지은 세마포 옷으로 갈아 입고,

-----번제단에 나아가서 규례대로 수송아지, 목에 붉은 천을 맨 숫염소 순으로 제물을 잡아 피를 받고 섬기는 제사장은 받은 피가 응고되지 않도록 계속 흔드는 가운데 기름-콩팥-간에 붙은 횡경막만을 번제단 위에 살라 드림, 대제사장의 향로에 속죄제를 드린 번제단의 숯불을 가득 담음

---------속죄제물의 내장기름과 콩팥, 횡격막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을 진영 밖으로 내어다가 불사르게 함

-----성소로 나아가서, 성소의 문 앞에 이르러   먼저 번제단의 숯불을 가득 담은 대제사장의 향로와 분향단의 향 두 움큼을 가지고 지성소안에 들어와 향을 살라서 향연이 속죄소를 가리게 함, 그런 상태에서,

-----성소의  문 앞에 대기하고 있는 피로 정결케 함의 예식 거행, 먼저 수송아지의 피를 자기고 지성소로 들어가서 속죄소(덮개) 상면 동쪽부분 1/2 직상부에, 그리고 속죄소 앞에 7번뿌림<지성소의 정결> -->성소의 휘장 앞에 7번 뿌리고 향단뿔에 바름<성소의 정결> : 성소의 문 앞에 대기하고 있는 섬기는 제사장에게 수송아지의 피를 넘겨주고 숫염소의 피를 받음..숫염소의 피로 동일한 과정 반복<수송아지의 피-->수염소의 피 순으로 반복해서 시행>

-----번제단으로 이동해서 : 번제단위에 수송아지의 피를 7번 뿌리고 번제단 뿔에 바름, 이어서 숫염소의 피로 반복 시행<제단의 정결>, 나머지 피들을  번제단 밑에 쏟음

-----회막 앞의 붉은 색 천을 뿔에 맨 아사셀염소는 대제사장의 죄고백<전가>의 안수 후 광야로 내보냄
-----대제사장은 지성소로 들어가서 향로를 내어 옴.

-------> 세마포 옷을 벗고, 몸을 씻고, 대제사장의 평상옷(화려한 옷)으로 갈아입음

@번제 : 숫양(대제사장), 숫양(온 백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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