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3.05.28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통전적 선교신학-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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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통전적 선교신학) -서정운
  “우리가 이제는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린도전서 13:12)


 선교는 본래부터 통전적인 사역이었다. 부분적인 구원이 구원일 수 없는 것처럼, 부분적인 선교가 있다면 이미 그것은 선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 유의할 것은 먼저 ‘통전적’이라는 말과 ‘성경적’이라는 단어의 성격이다. 어원적으로 통전적(holistic)이란 전체적(whole)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개체성을 무시한 전체가 아니라 부분적인 개체를 인정하는 총체(gross)로서의 통합(total)이다. 각기 다른 부분적인 사역을 무시하지 않고 그 자체를 인정하면서 완전(complete)을 추구하는 것이다. 구체적이면서도 포괄적이고, 개별적이면서도 종합적이다. 선교는 목적과 대상과 내용와 방법이 모두 통전적이다. 복음전도 대상으로서의 인간이 전인적이기 때문이다. 육체와 영혼이 분리된 인간은 이미 전도 대상으로서의 인간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완전함은 성경적인 것은 말한다. 결국 통전적인 선교신학이란 성경적인 선교신학을 이르는 말이다.


  오랫동안 논의를 거듭하던 복음전도냐 사회참여냐 하던 문제도 1974년 로잔에서 열린 복음화 국제대회 이후에는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복음에 대한 개념이 종전보다 더 광범위하게 사용되어지고, 사회참여 문제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1977년의 시카고 대회는 복음 전도가 영혼 구원뿐만 아니라 전 인간에게 행하는 전인적인 구원(Holistic Salvation)임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더구나 새로운 관심은 복음적 위임(Evangelistic Mandate)과 문화적 위임(Cultural Mandate)이라는 양분된 입장이 분리가 아닌 통합적인 방법으로 이해되어지고, 이제는 통전적이라는 말이 단순히 이분법적인 사고 구조나 양분된 선교 입장을 하나로 만드는 데 사용되는 용어가 아니라, 다원화된 사회 구조 속에서 다양한 원리나 분산된 주장들을 하나로 통합한 새로운 방법이나 전략을 모색해 나가는 방법을 지칭하는 말로 이해하게 되었다.   


  서정운이 말하는 선교신학의 통전적인 입장은 성경적으로 볼 때 모든 학문이 신학적인 의미를 내포해야 하는 것처럼 모든 신학은 선교적인 의도와 차원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동시에 신학은 교회의 신학이기 때문에 선교가 교회의 부분적인 특수한 기능이 아니고 교회가 존재하는 기능자체인 동시에 교회의 자기 표현이기 때문에 교회를 온전하게 만드는 신학과 선교의 중요한 역할을 이야기함으로 교회가 갖는 통전성을 강조하였다.1) 선교는 모든 신학의 최종적인 결과인 동시에 목적이며, 신학은 반드시 교회의 학문이어야 한다는 전제 아래 선교신학은 교회와 신학을 연결해 주는 주요한 사명이 있다는 것이다.
  선교신학에 대한 이광순의 입장도 마찬가지이다. 선교는 신학의 모체이자 신학의 어머니(The mother of theology)임을 강조하면서 교회 역시 선교공동체임을 분명히 한다.2)
  이광순이 말하는 선교신학의 특징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통합적인 선교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광순이 말하는 ‘하나님의 선교신학’은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선교’와는 구별된다. 이광순이 말하는 ‘하나님의 선교신학’은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주장되어 온 기독론 중심의 선교신학과 20세기의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그리고 오순절의 성령중심의 선교신학을 모두 통합하는 방향에서 제시된 통전적 입장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선교’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위에서 말하는 두 신학자의 입장이 모두 성경을 근거로 한 선교신학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주목하면서, 통전적인 선교신학은 성경적이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성경이 말하는 통전적인 선교신학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럴 때에 교회도 교회의 학문인 신학이 제시하는 근거에 따라 교회가 가져야 할 통전적인 입장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이 강조하려고 하는 것은, 선교신학은 모든 학문을 통합하는 통전적인 기능을 가진 교회의 신학이라는 사실과 함께 성경은 선교의 책이며 선교신학은 성경에 근거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학임을 확인함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선교신학은 분명한 통전성을 지니고 있음을 밝히되, 더 중요한 것은 아직도 한국 장로교회가 각기 자기 교단을 장자(長子) 교단임을 내세우고 있는 만큼 아직도 통합교단이 장자교단이라는 착각 속에서 통전적인 입장에 서 있어야 할 한국교회의 어머니교단(母敎團)이라는 사실을 포기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하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 교단이 가지고 있는 위상과 그 정체성에 대해 다시 한 번 확인함으로 선교신학이 오늘날 교회의 신학으로서 지향해야 할 실천적인 방향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려고 하는 것이다.


1. 선교신학의 위치(학문의 통전성)
 

 서정운이 말하는 선교신학은 “산 신학”(living theology)으로서의 선교신학이다.3) 서정운이 말하는 선교신학의 특성은 ‘신학’이 가지고 있는 그 자체의 특성과 함께 다른 모든 신학을 통합하는 ‘선교’라는 신학의 목적이 갖는 통전성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모든 신학은 선교를 전제로 하여 발전하여 왔으며, 모든 신학의 최종적인 목적은 언제나 선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학이 ‘산 신학’이 되기 위해서는 신학이 선교를 인도하고, 선교가 신학에 생명을 줄 수 있는 상호적인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하나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교회의 학문인 신학과 교회 존재 목적으로서의 선교가 상호작용을 함으로서 모든 교회는 제도적인 교회가 아닌 선교적인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서정운은 이러한 신학이나 교회의 역할에 대하여 통전적이어야 한다거나 통합적이어야 한다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선교가 모든 신학의 중심이 되고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나, 교회와 선교가 분리되지 않아야 하며 모든 신학이 교회의 학문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은 선교신학의 통전성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고도 남는다. 더군다나 ‘산 신학’이라는 말은 생명력이 있다는 말인데, 생명은 언제나 복합적인 요소들이 통합적으로 구성되지 않는 한 유지되거나 성장하기 어려운 것이다.


 서정운은 성경적으로 보면 모든 학문은 신학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야 하며, 신학은 모든 학문의 중심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모든 신학도는 신학의 참된 목적이 사람을 구원하고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목적과 의미를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선교적인 의도와 차원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선교신학은 신학의 한 부분이 아니라 모든 신학의 결과이자 목적이다.4)
  신학은 처음부터 선교적이었다. 그 주제들을 살펴보아도 성경의 사건들과 교훈들이 모두 중요한 신학적 주제들이며, 선교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것이나 사도 바울에 관계된 것들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의 생애와 바울의 서신들은 모두 선교적 의도에 의한 것이며, 예수님께서도 스스로 아버지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선교사이심을 말씀하셨고(요20:21), 바울도 신학자로 자기의 소명을 인식하고 있었다기보다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도 내지는 선교사로 자신을 규정하였다. 결국 신학은 선교의 산물이다. 신구약 성경은 선교의 책이며, 교회의 역사는 선교의 역사이다. 교리(조직신학)는 선교의 내용이며, 윤리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대한 선교적인 책임을, 실천신학은 선교의 방법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신학은 선교의 바른 지표를 제시해 주는 것이다. 일찍부터 선교신학이 학문으로 인정받지 못한 이유도 모든 신학이 존재하는 목적이 모두 선교와 관련이 있을 뿐 아니라, 그 성격 자체가 통전적이고 포괄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는 선교공동체이며, 교회 사역의 중심이 선교이기 때문에 모든 신학의 중심인 선교신학은 교회와 신학이 일체적인 관계를 맺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교회라는 용어를 맨 먼저 사용한 것은 사도들의 공동체로서, 이들은 주님의 지상 명령인 선교 명령을 받고 간절히 기도하던 중에 하늘로부터 급하고 바람 같은 소리와 함께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며 각 사람의 머리 위에 임하였다. 성령이 임재한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시작이다. 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모임을 말한다. 교회는 통전적인 성격을 갖는다. 다양한 구성원이 그렇고 종합적인 활동이 그렇다. 내적인 성장이나 외적인 활동 목표가 그렇고, 질적인 성장이나 양적인 부흥이 그렇다. 최근 NCD(Natural Church Development) 운동가들까지도 이상적 교회는 형식과 내용, 정적인 요소와 동적인 요소, 제도주의와 영성주의라는 양극성이 조화되고 통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5) 사실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교회라는 공동체 중심의 선교신학이 갖는 학문의 통전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예가 되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선교신학(주체의 통전성)


  이광순이 말하는 통전적인 선교신학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하나님의 선교신학’이다. 이광순은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하여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그 하나는 성경을 선교의 책으로 규정한 후 성경을 다섯 개 영역으로 분류함으로 성경적인 선교신학은 하나님의 선교신학이라고 규명하는 것이며, 또 다른 방법은 20세기의 선교 역사를 세 부분으로 분석한 후 21세기는 분할과 분열로부터 화합과 통합을 이끌어 내어야한다는 전제 아래 통합적인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신학을 정립해야 함을 역설한다.


   성경의 주제는 선교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계획과 그 역사 하심을 기록한 책이다. 선교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실현하는 것이므로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자 선교가 된다. 구약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며 대체로 성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役事)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신약은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의 선교 사역을 기록하고 있다. 계시록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며, 선교의 완성을 예시해준다. 이처럼 성경은 일관되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인간 세상에서 펼치고 실현해 가는 과정을 기록하고 그 완성을 예시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의 주제는 구원이며 선교이다. 동시에 성경은 구원과 선교의 지침서이자 교과서이다. 신구약 전체를 일관되게 흐르는 한 가지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선교이다. 6)


 사실 성경은 선교라는 주제로 일관되어 있다. 구약은 창조로부터 시작한다(창1:1). 그러나 신약은 구약이 ‘저주’라는 용어와 함께 말라기 4장 6절의 미완으로 끝난 데 비하여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약속을 성취시키려는 새 족보 즉 새로운 창조로 시작해서 주 예수의 은혜(계22:21)로 완성된다. 이광순의 주장처럼 신구약 성경 전체에 흐르는 주제는 하나님의 구원이며 선교이다. 따라서 선교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광순은 성경 전체를 다섯 개의 큰 흐름으로  분류하여 자신이 강조하는 “하나님의 선교”의 근거를 찾는다. 성경 전체를 분류하여 분석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구약은 성부 하나님
  창조자 하나님은 전 인류의 하나님이시다. 구약의 하나님은 선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2. 복음서는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전 우주의 구세주이시다. 복음서의 그리스도는 선교하시는 그리스도이시다.
3. 사도행전은 성령 하나님
  성령 하나님은 사도들에게 역사하신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은 선교하시는 성령이시다.
4. 서신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교회는 선교적인 교회이다.
5. 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선교의 완성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인류 역사의 최고 정점이다.


다음은 선교신학의 발전과정을 통하여 살펴본 하나님 중심의 선교신학이다. 이광순은 20세기의 선교신학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발전해 왔으나, 새로운 세기에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균형 잡힌 선교신학으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지난 세기까지는 전통적인 성자 하나님 중심의 선교신학과 현대의 성부 하나님 중심의 선교신학 그리고 오순절의 성령 하나님 중심의 선교신학으로 나누어져 있었지만 이제 21세기는 그러한 분할과 분열로부터 화합과 통합을 일구어내야 할 것이며, 그 첫 과제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의 통합적인 선교신학을 정립하는 것7)임을 강조한다.
복음주의 입장에서 강조해 온 전통적인 선교신학은 성자 하나님 곧 기독론 중심의 선교신학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주제로 하는 복음주의 선교신학은 자연히 선교 사역에서도 전도를 중시하게 되었으며, 전도 과정에서 회개와 영접, 거듭남과 구원을 강조하게 되어, 전도를 해서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는 전도를 통해서 성장하고 또 다른 교회를 개척하여 전도자와 선교사를 파송한다는 교회 중심 선교이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세계교회협의회 출범과 함께 등장한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은 성부 하나님 즉 신론 중심의 신학을 주장하였다. 이른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관점에 근거하는데, 이는 창조자이신 성부 하나님을 선교의 주체로 삼고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특히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의 관점을 견지하는 창조 신학은 소위 JPIC 즉, 정의, 평화, 창조 질서의 보전을 강조하였다. 결과적으로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은 인간의 영혼 문제보다 사회 정의와 인권 문제를 더욱 중시하는 경향을 가지게 되었고, 자연적으로 선교 사역은 개인 전도와 회심보다 인적 교류와 교회간의 연합과 협력 관계를 강조하게 된 것이다.
 20세기에 대두한 또 다른 선교신학은 오순절 성령 운동이다. 이 신학은 성령 중심의 신학이다. 이 운동은 세계교회협의회처럼 거대한 기구를 가지고 조직적으로 출발한 것은 아니라 기존 교회들을 부흥시키고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을 돌아오게 함으로 점차 선교 운동의 확산을 자져오게 한 운동이었다. 현재 기독교(개신교)의 다양한 교파 가운데 가장 급속히 성장하고 있는 교단이 오순절 교단이다. 20세기 후반의 복음적인 기독교인의 양적 성장은 오순절 성령 운동의 결과라는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이광순은 이러한 세 가지의 흐름을 통합하는 방향에서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의 선교신학’을 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듭 강조하는 바 통전적인 선교신학은 비성경적인 내용을 수용하지는 않는다. 동시에 성경적인 내용이라 할지라도 양자택일하거나 취사선택하지는 않는다. 지난 반세기 동안 확고한 선교신학을 정립하지 못한 한국 장로교회는 교단의 분열 및 갈등을 통하여 혼란을 거듭하여 왔다. 그러나 이제 통전적인 선교신학을 바르게 정립함으로 교회와 교단의 연합뿐 아니라 선교에 더욱 매진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 양극화의 극복


 선교신학이라는 과목이, 그리고 교회에서 차지하는 선교의 위치가, 성경전체에 흐르고 있는 내용이나 역사적인 흐름이 포괄적이고 통합적인 선교신학이요, 통전적인 선교를 요구한다 할지라도 통전적이라는 용어 자체가 등장하게 된 배경은 역시 양극화 논리에 의한 보수와 진보의 갈등에서 시작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가장  많았던 논란이 두 명령(two mandate)에 대한 대립적인 구조이다. 전도와 봉사, 복음과 문화, 개인 구원과 사회적 책임, 보수와 진보, …. 오랜 기간동안 이러한 논쟁은 지속되어왔으며, 교회는 선교에 쏟아야 할 많은 힘들을 여기에다 소진해 버렸다.
제마다 자신의 주장이 옳으며, 자기 입장이 더 성경적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양쪽 내용을 다 수용하면서 모두가 다 성경적이며 선교적인 실천을 위하여 필요한 요소임을 역설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지조 없는 사람, 상대 무리와 같은 사람, 중간치들, 심지어는 절충주의자로 몰리거나 사탄은 처음부터 양다리를 걸쳤다는 욕설까지 감수해야만 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분명하게 밝히려 하는 것은 통합이다, 통전이다 하는 말이 소위 중도나 중간이나 중심과 같은 부분적 용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성경적 선교신학에서 강조하는 통전적 선교신학이란 성경 중에서 어느 부분은 우리에게 유용하니까 취하고 어느 부분은 불리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버리는 신학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받아들이는 입장이다. 이쪽에서 몇 가지 저쪽에서 몇 가지를 취사선택하는 식의 부분적인 중도 융합이나 자기 중심적인 혼합 절충을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양자택일이나 취사선택, 융합 절충할 권한이나 능력이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말씀하신 그대로 순종하는 신학이 통전적인 신학이며, 성경적인 선교신학이다.          


1) 창조와 위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신구약 성경의 시작인 이 한 구절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인 동시에 모든 인류를 향한 선교의 근거가 된다.


창조기사에 선교적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창조는 인간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는 데, 하나님에 의한 창조는 오직 한 인류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즉 모든 인류는 한 조상을 가진 한 혈통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은 한 종족의 신이 아니라 모든 족속의 하나님이요, 아버지이심을 알 수 있다.8)
동시에 창조의 기사는 온 인류가 공통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동일한 존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종족이 다 창조주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 수 있도록 함에 그 선교적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그 중에서도 인간은 특별히 구별된 피조물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6-28)
 하나님은 그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 명령하셨다. 아직 인간이 선악과를 먹기 전이라 죄에 대한 언급은 없다. 순서적으로 보아 문화적인 명령(cultural mandate)이 먼저였다.
선교의 최종적인 목적은 복음적 명령(evangelistic mandate)이라 할지라도 복음 전파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문화적인 접근 방법을 먼저 이야기할 수 있는 상당한 근거가 된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    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
 이 명령을 오늘날 우리는 사회적 명령으로 풀이한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성경이라는 긴 여정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시고 말씀해 주신 절대적인 명령을 수령하게 된다. 모든 믿는 자들, 곧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이 명령은 원복음(protoevangelium)이라 불리는 창세기 3장 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여야 하는 명령이다. 이 명령을 우리는 개인 구원을 위한 전도명령이라고 부른다.


 죠지 피터스(george W. Peters)는 이것을 두 명령(Twofold Mandate)이라 불렀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명령하신 두 가지의 명령이 있는 데, 이 두 명령은 각(구약과 신약) 성경의 시작에서 각 인간(첫 번째 아담과 두 번째 아담인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것으로 풀이하였다.9)
 문화적(첫 번째) 위임 ;  하나님이 …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이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1:28, 2:15, 8:17)
 복음적(두 번째) 위임 ;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마28:19-20, 막16:15, 눅24:48, 요20:19-23, 행1:7-8)
 

 피터스가 강조하는 것은 이들 중 어느 하나가 무효가 되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되거나 복제될 수 없으며, 흡수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즉 이 두 명령은 동등한 위치를 갖는다. 이 두 명령은 서로 다른 환경으로 나왔으며, 다른 필요와 목적으로 봉사할 수 있도록 주어진 별개의 명령이기 때문에 독립적이다. 독립적이면서도 동등하기 때문에 통전적이다. 그래서 스나이더(Howard Snyder)도 “한 마디로 요약해서 전도와 사회 관심은 함께 이루어져야 하며, 이 둘은 모두 한 복음에 본질적인 두 면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10)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 번째 위임(cultural mandate)은 인류와 모든 인류 문화를 포함하는 전 영역의 대표로서 아담에게 주어진 것이다. 피터스의 표현대로 하면 “유일하신 하나님의 계시에 기초를 둔 문화의 질적 양적 개선”이다. 그러므로 이 명령은 사회적, 문화적 복지 사업과 관련이 있으며,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의에 기초한 국가와 사회를 위한 윤리적인 본질인 동시에 도덕적인 질서와 창조의 목적에 따라 진실한 존재로 살 수 있도록 건전한 문화를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 명령은 홍수 이후 노아에게도 말씀(창8:15-17)하셨으며, 도덕적인 질서나 기본적인 인권을 위반하였을 때마다 이스라엘과 세계 열방에 대하여 직접 예언자들에게 힘있게 말씀하셨다. 이 책임은 국가의 권력 앞에서도 강조되어 바울은 로마서 13장에 국가와 그 권력에 순종할 것을 명한다. 이 명령은 분명하게 사회 질서와 복지를 위한 것으로 타락 이후에도 여전히 인간은 문화 창조자이며, 하나님의 도구로서 도덕과 질서, 사회의 조직 구조와 발전된 문화만큼 거기에 따르는 책임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그가 발달된 문화의 질에 따라 그것을 파기하거나 발전시킬 특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위임(Evangelistic Mandate)은 전적으로 복음의 영역에 포함되는 것으로 교회의 대표로 사도들에게 주어진 말씀으로 물질적이거나 사회적 복지 문제보다 인간의 영적인 자유와 회복을 강조한다. 전인적인 인간, 즉 복음을 통한 인간 회복을 계획한다. 피터스가 강조하는 두 번째 위임은 실행 방법은 복음 전도와 제자 훈련, 교회 개척, 교회 양육, 자선 사역으로 그가 제시한 성경의 근거는 (1)열 두 제자 파송 (마 10:1-20; 막 3:13-19; 눅 6:12-16);  (2) 70인의 파송 (눅 10:1-20); (3) 12명을 더 멀리 보냄 (마16:14-18; 눅 24:36-49; 요 20:19-23; 행 1:7-8) ; (4) 바울의 파송 (행 9: 15-16; 26:14-20)등이다.11)
  두 번째 위임은 죄와 허물의 문제를 주로 다루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지는 죄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본래적인 목적을 선교, 완전한 인간 회복을 위하여 복음을 선포한다. 이 두 번째 위임은 크리스챤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회원으로서의 위임이다.


 이 두 위임은 모두 하나님에 의하여 비롯되며 인류에게 봉사하기 위한 것이다. 모두 필요한 것이다. 복음만으로 인류의 모든 부족한 부분을 섬길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굶주린 사람에게는 빵이 필요하며, 벌거벗은 사람에게는 옷이 필요하다. 치료가 필요하다면 치료해 주어야 한다. 복음이 중요한 만큼 문화도 중요하다. 둘 다 긴급하다. 문화 없이는 생존할 수도 없다. 죽어 버린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할 수 없다.
 만약 부자연스럽게 그리고 무분별하게 이 두 위임을 분리시키거나 양분시키게 되면 부정적인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이며, 만약 이 두 위임이 지나치게 가까워지거나 혼합시키게 되면 기독교는 문화적인 종교(의식적인 종교, 문화 기독교, 그리고 모든 윤리적인 종교)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복음 전파가 더 어려워지고, 거룩함에 대한 생각이 흐려지게 되며, 영적 문제가 위태롭게 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성경적인 복음이 희석되어지는 곳에 사회적인 복음과 자유주의의 이름이 붙여진다. 결국 사회 봉사나 이웃 관계, 복지 프로그램 등이 전도나 복음을 대신할 수 없다. 그러므로 통합과 혼합, 통전과 융합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오랫동안 이 주제에 대한 논쟁을 계속해 왔다. 로잔언약 이후 복음주의의 입장에서 ‘전도와 사회 참여’라는 문제는 모두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의무의 일부임이 확인되고 사회적 관심에 대해서도 매우 진지하게 취급되어졌음을 보게 된다. 그래서 로잔 언약은 교회의 사회 참여에 대한 방법적인 문제에 있어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해야 한다’(마10:16)는 점을 강조함으로 선교에서는 전도의 우위를 강조하였다.12) 그러나 앞서 논의한 것처럼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가 되기 위하여 교회가 사회에 대한 예언적인 사명을 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피터스가 주장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 두 위임은 교회보다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사명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 보수적인 학자(George W. Peters)는 문화적인 명령이 그리스도인의 사명 중의 하나인 것은 자명하지만 선교명령은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서 교회에 대한 선교 명령과 개인에 대한 사명을 구별한다.
   

 나는 성경에서 이 첫 위임이 선교에 대한 성경적 범주 아래에 있다고 기록된 곳을 찾아보지 못했다. 이는 인간의 차원에서 충족되어야 하는 것으로 사람으로서 부여받은 책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두 위임을 혼돈하여 이 둘을 선교적인 사명이라고 한다든지 교회의 할 일이라고 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이다.13)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인류의 한 부분임에 틀림 없지만 교회의 일원으로서 사회적인 책임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건전한 복음 그리고 그것과 충돌하는 (교회라는 그늘에서 자란) ‘문화의 열매’에 대한 논쟁에 대하여 로잔언약 제10문단에서도 ‘모든 문화는 성경에 의하여 검토’되어야 함을 주장한 적이 있다.14) 선교에 있어서 빈번하게 복음과 함께 이질적인 문화를 수출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의 메시지나 전달된 내용이 일부는 성경이고 일부는 그들의 문화에서 온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터스도 복음과 문화가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지 문화적 명령 자체를 부인한 것은 아닌 것이다.


  2) 구심력과 원심력 (구약과 신약의 통전성)
   결국 피터스가 말하는 하나님의 두 명령이 의미하는 바 그 뜻은 신구약 성경의 통전성이다. 그는 구약성경을 문화적인 명령으로, 신약성경을 복음적인 명령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는 구약과 신약을 각각 부르심과 보내심(“come and go”라는 명령)이라는 내용으로 설명하면서 그 내용을 <그림1>과 같이 표현하였다.15)
              <그림1> 성경의 선교 ‘부르심과 보내심’
 성경적 선교신학은 신구약 성경을 통전적으로 이해한다. 율법과 복음, 심판과 은혜, 공의와 자비, 이스라엘과 이방인, 행위와 믿음… 결국의 선교의 두 가지 힘을 요약하면 일반적으로 구심적(centripetal)인 힘과 원심적인(centrifugal) 힘으로 설명할 수 있다.16)
            <그림2>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선교의 구심력과 원심력
  그 외에도 구약을 이스라엘이라는 특수성으로, 신약을 ‘온 인류(세상) 구원’이라는 보편성으로 설명한다. 하나님의 피조물은 자연에 국한되지 않는다. 세계 만민이 다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은 그들에게 관심을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그 한 민족을 통하여 전 인류를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이며, 약속이다. 세계주의(universalism)에서 특정주의(particularism)로, 또 다시 이 특정주의는 우주주의로 나아가게 된다. 창세기의 족장들에게 주어진 복은 그들만의 복이 아니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창12:2-3)
  아브라함 - “땅의 모든 족속이”(창12:3), “천하 만민이”(창18:18, 22:18)   
  이삭 -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창26:4)
  야곱 -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창28:13-14)
  요셉을 통해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애굽 사람들은 7년 흉년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17)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그의 온 백성을 위한 “제사장의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출19:6)으로서의 특권을 누린다. 그러나 출애굽의 과정에 나타난 열 번째 재앙은 애굽인이냐 유대인이냐 하는 것도 보다 죽음의 사자가 확인한 것은 문설주와 문인방의 ‘피’였다는 사실(출12:23)이다. 그래서 출애굽 시 중다한 잡족들이 그들 무리에 가담할 수 있었다(출12:38). 주목할 일은 이스라엘의 율법은 제한적이지만 에돔은 3대, 암몬과 모압은 10대를 기다리면 이스라엘의 회중에 들 수가 있었으며(신23:7-8) 그들은 또한 유월절이나 안식일 규례를 함께 지킬 수도 있었다(민9:14, 출20:10, 신17:15 참조). 특별히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들을 압제하지 못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관대해야 함을 명하였다(출22:21, 대상16:19-20, 레9:9-10, 33-34). 라합이나 모압여인 룻의 이야기나 나아만 장군에게 베풀었던 관용은 모두 구약 속에 나타난 보편성과 선교의 원심적인 성격을 대변해 주는 내용들이다.
특히 유대인들이 그토록 소중히 여긴 예루살렘과 성전에 대해서도 솔로몬은 헌당 기도를 통하여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을 호소하게 됨을 보여주고 있다.


  “이방인에 대해서도 … 이 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 땅의 만민으로 주의 이름을 알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처럼 경외하게 하옵며…”    (대하 6:32-33)
구약성경이 이스라엘 중심, 예루살렘 중심의 구심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구약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스라엘의 선택이나 예루살렘 중심의 은총은 전 세계 만민과 열방들을 향한 원심적인 성격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18) 신약성경이 구약성경보다는 분명히 더 선교적이라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결코 구약의 보편성을 경시해서는 안된다.19) 신약성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의 선교명령이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행1:8)을 향한 원심적인 명령이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이 일을 위하여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아니하고 모여서 약속한 성령을 기다려야만 했다(행1:4). 교회는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사명이 중요한 만큼 모이는 교회로서의 역할을 다하게 될 때 교회다운 교회로서의힘을 유지할 수 있엇던 것이다. 그래서 이광순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특수주의의 성격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보편주의적인 성격의 기독교 교리에 교차 또는 상호 침투(interpenetrated)해 있는 것처럼 기독교와 기독교 선교는 특수성 속에서 보편성을, 보편성 속에서 특수성을 추구하며, 특수주의를 보편화하고 보편주의를 특수화함으로서 기독교적인 보편세계를 확장해 나가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20)
  결국 선교의 특수성과 보편성, 구심력과 원심력,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 부르심과 보내심, 소명과 사명은 신구약 성경의 전반적인 성격을 규명해 주면서도, 결코 어느 하나를 버리거나 양자택일할 수 없는 통전적이고 통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3) 예수님의 선교와 바울의 선교전략(사역의 통전성)


     예수님은 선교사이셨다. 선교(mission)라는 단어가 ‘보내다’(missio)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처럼 선교는 보내는 것이다. 예수님은 스스로 보내심을 받은 자이심을 밝히셨고, 또 우리를 보내셨다(요20:21).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성자 예수님의 사역은  오늘날 그로부터 보냄을 받은 우리들의 사역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선교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복음 전파로 요약될 수 있다.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유대와 예루살렘으로 이어지는 여정과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사역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신” 일들이었다(마4:23, 9:35).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자체가 선교였다. 우선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살펴보면21) 먼저 유대 땅에서 기적(귀신들린 자의 치유 사건)을 베푸셨다(1:21-28). 이방 땅에서도 마찬가지였다(5:1-20). 베드로 장모의 열병 치유나(1:29-31) 게네사렛에서 병상 채 메고 나온 환자의 치유(6:53-56), 5병 2어(6:34-44)의 기적과 7병 2어(8:1-9) 기적은 모두 유대와 이방에서 행하신 능력이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방 여인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믿음을 보셨다(마15:28 참조).  시니어(D. Senior)는 이것을 이방선교를 위한 마가의 “갈릴리 편들기”로 표현하였다22). 갈릴리는 인종이 혼합된 지역이며, 남쪽 사람들에게는 유대인의 정통성을 의심받는 지역이며, 정치적으로도 헤롯이 아닌 로마가 직접 통치하는 지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가는 예루살렘을 반대와 죽음의 장소로, 갈릴리에서 만난 반대자들조차 예루살렘 출신(3:22, 7:1)임을 부언한 것은 예수님의 선교가 유대인과 이방인을 모두 포함하는 통전적인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선교가 통전적이었다는 것은 비단 이방인과 유대인에 대한 문제 뿐 아니라 선교 방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종으로 묘사된 마가복음의 예수는 철저한 섬김을 통하여 사역하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다. 예수님은 약 3년의 공생애 기간에 중점적으로 두 가지 일을 하셨는 데, 첫째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었고(전도․선교), 둘째는 병든 자, 귀신 들린 자, 눌리고 소외된 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디아코니아)이었다.23)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셨고 귀신을 쫓아내시며, 혈루병 환자와 열병을 고치시고, 세리들과 함께 식탁 공동체를 베푸심으로 위로하시고 동행하셨다. 섬김과 봉사가 없는 선교는 불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 사역은 디아코니아로 시작되고 있다. 굶주린 무리들에게는 빵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5병2어와 7병2어의 기적을 행하셨다. 디아코니아의 선교 사역은 복음의 전파를 위한 사역이기도 하지만, 복음 전파와 함께 이루어져야 할 사역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사역을 통하여 모범을 보여 주었다.
  교회는 세상과 타협을 해서도 안되지만 세상을 무시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된다. 특히 이러한 입장은 예수님의 선교사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유대인을 버리고 이방인을 취한 것이 아니라 둘 다 선교의 대상으로 삼았다. 선교는 멀리 해외로 선교사를 파송하여 복음을 전하게 하는 일로만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선교의 일차적인 의미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방 민족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 원하고 계신 것은 좁은 의미에서의 해외 선교만이 아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이방 민족들에게도 그의 종을 파송하시지만 또한 이 땅의 소외 받고 버림받은 작은 자들을 향해서도 끊임없이 그의 일꾼을 파송하신다.24)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통한 전도 방법은 복음을 선포하고, 제자들을 훈련시키는 것 못지 않게 철저한 섬김과 봉사와 치유를 통한 선교였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주님은 먼저 당면한 인위적인 문제부터 먼저 해결하셨다. 더 이상 영혼 구원이 먼저인가? 혹은 사회적인 책임과 봉사가 우선인가를 논의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영혼 구원을 위한 개인 전도가 중요한 만큼 사회적인 봉사도 중요하다.


  바울은 모범적인 선교사였다. 바울 선교의 통전성은 그의 다양한 선교 방법과 융통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유대인들과 교회지도자들로부터 숱한 비판을 받으면서도 그의 사역은 언제나 융통성 있었고 방법 역시 다양하였다.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All things to all men) 적용되는 바울 선교의 중요한 특징은 ‘방법에 있어서의 다양함’ 뿐만 아니라 대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임을 말해 주고 있다.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되어서 복음을 전파하였고,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 되어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바울의 복음 전도는 때와 장소에 구애되지 않았다. 어떤 곳에서는 수주간만 머물렀는가 하면 어떤 곳에서는 2-3년을 머물렀으며, 회당을 중심으로 한 전도에 힘을 쓴 것은 사실이지만 강가에서(행16:13), 감옥에서(행16:30), 시장에서(행17:17), 심지어 죄수의 몸으로 호송되어 가는 가운데 멜리데 섬에서까지도(행 28:4-6) 기회를 놓치지 아니 하고 전도하였다.
  바울의 전도 방법은 가정을 대상으로 하는 전도였으나 개인 전도에 대해서도 등한히 하지 않았으며, 서신을 통한 문서 전도나 제자 양육을 통한 교육전도(행19:5-10)에도 힘을 썼다.
그의 효과적인 복음 전달을 위한 융통성 있는 선교 전략은 때때로 모순적인 사람으로 묘사될 정도로까지 지역 상황과 필요에 따라 행동하였으며, 심지어  ‘극단적인 실용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주위 환경에 순응하고 경험을 통하여 배우는 데 민감한 사람이었다.25)
대적하는 자들 중에는 예수님의 선교 명령에 대하여 문자적으로 지키려고 하는 걸식 전도자들도 있었다. 고린도전서 9장에 의하면 그들은 고린도교회 내에서 바울을 반대하며, 그의 사도직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로 나타나 있다. 반대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바울은 사도의 규범을 깨뜨린 것이다. 그러나 그는 노동을 하는 일(tent-making missionary)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있는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 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살전2:9)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살후3:8)


 짐작컨데 바울은 생활비 거절 자체를 원칙으로 삼았던 것은 아니고 다만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처신함으로서, ‘새로운 지역에서 개척 전도가 가능한 한 효과적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구체적인 상황에서 생겨 난’ 방법이었을 것이다.26) 바울은 비록 문자적으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치 아니 하였으나 실제적으로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효과적인 선교를 위하여 융통성 있는 선교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바울의 선교전략은 매우 통전적이고 통합적이었으며 복음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떤 경우에도 복음의 내용에 관한 한 일체의 양보가 없었다.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받으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6:8). 아무리 시대적인 상황이 바뀌어 간다 할지라도 복음은 변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이시기 때문이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행4:12)이기 때문이다. 성경말씀 그대로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갈 자가 없기’(요14:6) 때문이다. 


4. 지상명령과 제자 삼기(목표의 통전성)

  복음 전도의 최종 목표는 ‘제자 됨’에 있다. 중요한 근거는 주님의 지상명령(Great Commission)이다. 물론 복음서마다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피터스(George W. Peters)는 복음서의 나타난 지상명령이 각각의 복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하나의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 말씀들은 모두 그 강조점이 다르면서도 서로 아름답게 보완되고 있으며, 그 가운데 하나의 통일성을 가짐으로서 온전한 명령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4복음서 모두가 합해져서 전체적인 하나의 지상명령을 완성시키고 있다는 것이다.27)

                                                             
   마태복음 - 권위, 사역에 대한 포괄적인 목표, 시간의 확장(세상 끝날까지)
   마가복음 - 긴급성, 사역의 방법과 지리적 범위.
   누가복음 - 기독론적 메시지와 사역의 보편성
   요한복음 - 영적인 준비와 사역의 영적 본성


 그러나 이 지상명령의 분석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또 다른 강조점이 있다. 마태와 마가에 각각 나타난 두 개의 중요한 명령형 동사이다. 바로 마태복음의 ‘제자 만들기’와 마가복음의 ‘복음 선포’이다. 누가와 요한에게는 명령적인 동사가 없다. 그러나 ‘성령을 받을 것’을 강조하는 것은 성령의 역동성과 영적인 사역의 명령적인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다.28) 또 마가복음의 ‘복음 선포’는 마태복음의 ‘제자 삼기’ 위한 증거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단어는 “제자 만들기”이다. 이것은 마태복음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가서, 세례를 주고, 가르치고, 지키게 하는 것은 모두 ‘제자삼기’를 위한 보충이 된다. 이종윤은 선교의 긴급성을 설명하는 가운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명령은 소위 가장 큰 명령, 대명령, 혹은 지상명령이라고 한다. 이 지상 명령을 세분하면 ‘가라’고 했고, ‘세례를 주라’ ‘가르치고’ ‘증거하고’ ‘제자 삼으라’고 했다. 여기에서 다섯 개의 동사가 나타나지만 본동사는 하나 - 즉, ‘제자 삼으라’는 것이다. 가서, 세례 주고, 가르치고, 증거 하라는 말은 모두 분사형이다. 다시 말해 조동사 역할을 하는 것이다. …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교하는 데 있어서 바른 목적은 제자를 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를 삼고, 그리스도를 따라가고, 그리스도를 위해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제자를 만드는 것이 선교의 바른 목적인 것이다.29)
  

이광순이 말하는 복음전도의 목표로서의 4-P구조는 바로 이 ‘제자 삼기’를 선교와 복음 전도의 최종적인 목표로 설명함으로서 지금까지 ‘사회봉사’와 ‘복음전도’의 양극적인 형태로 설명되어지던 수평구조를 수직적인 구조로 바꾸어 놓았다. 의도적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새로운 형태의 통전적인 선교 신학의 목표와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앞서 죠지 피터스가 이야기한 두 명령의 구조에 따라 개인 구원이냐? 아니면 사회적인 책임이냐? 하는 대립적인 구조를 대개 아래 <그림3>과 같이 도식화하여 중도적이거나 중립적이거나 중심적인 신학을 이야기해 왔다.
 

    사회 봉사(사회적   복음 책임)                                         복음 전도(개인 구원)
              진보적 선교관                복음적(중도적) 입장              보수적 선교관
                  <그림3> 통합신학의 위치에 대한 과거의 설명


그러나, 필자의 경우 “Either - or - ”의 구조가 아니라 “Both - and -”의 구조가 되어야 하며, 성경 중 어느 부분은 취하고, 어느 부분은 버리는 것이 아닌 통전적인 입장이라 하여 <그림4>와 같은 모양으로 표현한 것이 고작이었다. 
    사회 봉사(사회 구원)                 복음    전도(개인 구원)
              진보적 선교관                    보수적 선교관
      │←―――――――통전적인 복음주의적 선교관 ――――――――→│
                   <그림4> ‘Both- and-'구조의 통전적인 선교관


 그러나 이광순의 4-P구조는 단순한 통합이나 절충이 아니다.  C. Peter Wagner가 말하는 세 가지의 개념30) 중 사회 봉사를 의미하는 1-P(Presence Evangelism: 현존)나 개인 구원을 위한 2-P(Proclamation Evangelism: 선포),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는 3-P(Persuasion Evangelism: 설득)를 모두 초월하는 4-P(Production Evangelism: 제자 삼기)를 설명함으로서 새로운 구조의 통전적인 선교관을 이야기하게 된 것이다. 
               Evangelism        

4-P   Production  Evangelism ( 4-P   제자 삼기     K. S. Lee  )
3-P   Persuasion Evangelism ( 3-P   설  득   C. Peter Wagner)   

2-P   Proclamation Evangelism ( 2-P   선  포    J. Stott )   

1-P   Presence Evangelism (1-P    현존(봉사)    ---- 사회 봉사 강조)
                   <그림5> 선교목표로서의 제자 삼기31)


복음전도의 최종적인 목표는 제자 삼기이다. 섬기고 봉사하는 것도, 치유하며 가르치는 것도, 가는 것도 전하는 것도 모두 과정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복음전도의 최종 목표는 책임 있는 일꾼을 만드는 것이다. 일하는 제자를 만드는 것이다.
 선교란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문화의 장벽을 넘어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게하고, 그들의 구주로 받아 들이게 함으로서, 주님의 교회의 책임있는 일원이 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복음을 전할뿐만 아니라 그의 의를 실현함으로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일하는 것이다.32)
 명목상 그리스도(Nominal Christian)의 문제가 새로운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제자 훈련은 이름뿐인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을 실제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킬 수 잇는 중요한 방법이 된다는 사실도 간과하지 않아야 한다.      
 결과적으로 제자 삼기는 통전적인 성경적 선교신학이 말하는 복음 전도의 최종적인 목표가 된다. 4-P의 선교관은 1-P나 2-P, 3-P의 과정을 무시하지 않는다. 각각 그 독자적인 활동을 인정하면서 그 결과를 통하여 이루어야 할 새로운 복음전도의 목표를 제시할 뿐이다. 수평적인 구조에서 나나나는 양립의 형태가 아니라, 과정이라는 입장에서 수용하고 인정하는 가운데 그 결과를 중시하는 구조가 됨으로 선교의 목표인 “하나님 나라 건설과 구현”을 위한 그리스도의 제자 곧 그리스도의 일꾼 만드는 일에 교회는 전력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나오는 말(교단의 위치와 사명)


 21세기의 한국교회는 민족 복음화와 세계 선교라는 중요한 과제를 바르게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비록 1980년대 초, “100년 전에는 한국에는 기독교인이 하나도 없었다. 현재는 기독교인이 인구의 30% 정도에 달하며, 1980년대 말에는 50%를 넘을 것이다”33)라고 말한 피터 와그너의 기대에는 부합되지 못하였으나 한국교회는 이미 한국교회의 성장 과정 자체가 선교적이었음을 변명할 수 없다. 최근 들어 한국교회의 교세가 침체 내지 둔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종윤의 “한국교회에는 기도가 있고, 말씀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수준 높은 목회자의 열심 있고, 헌신적인 신자가 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한 순교자들의 피가 있고, 민족과 나라를 이끌었던 역사적 사례들이 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영적 자산과 교회에 대한 사회적 존경심은 아직은 높은 수준에 있다.”는 지적처럼 우리는 무엇보다 한국교회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축복하심은 이 시대를 위해 쓰시기 위함임을 믿어야 한다.34)
 서정운이 제시하는 통전적인 교회성장의 기준에 따라 한국교회도 이제 넓게(양적), 깊게(내적인 성숙), 높게(질적, 윤리적), 크게(외적, 세계 교회와의 관계) 성장하여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일시적인 성장이나 성숙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길게 성장하여야 한다.35)
 그러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과거 한국교회의 역사를 통한 반성이다.
내적으로는 내실이 빈약하였으며, 외적으로는 교단․교파 주의로 인하여 그렇지 않아도 분단된 나라와 민족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물량적인 차원의 성장 중심주의, 교회 중심주의와 신앙 생활의 개인화 등은 모두 극복하여야 할 중요한 한국 교회의 문제점들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세계 선교 역사에 찾아보기 힘든 성장을 계속해 왔으며, 특별히 선교적인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힘써 왔다.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한국인의 힘으로 세워진 교회가 있었는가 하면 한국어로 된 성경이 있었다. 새벽기도회와 성경 말씀을 중심한 사경회, 구역 제도 등은 세계 교회에 자랑할 만한 한국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들이다.
 이제 세계 교회의 추세와 정치적인 변화, 선교사에 대한 민족적인 감정 등은 한국 교회의 도움을 열망하고 있다. 한국 교회가 성장해야 하는 이유는 세계 선교를 위한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제 한국 교회가 먼저 잠자고 있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을 깨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주님의 지상 명령인 ‘제자 됨’의 사명을 깨닫게 함으로 함께 민족 복음화와 세계 선교를 향한 행진에 동참하게 하여야 한다. 한국 교회가 지상 명령에 따른 ‘제자 됨’의 사명에 충실하게 될 때 세계 교회의 관념적 그리스도인들을 실제적인 그리스도인 곧 ‘제자들의 대열’에 동참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1. 장자교단이 아닌 한국교회의 모(母)교단의 위치로 화복하자.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에게 주어진 교단의 자기 정체성이나 입장을 분명히 하여야 한다. 그래야 한국교회에 대한 우리의 입장과 책임이 분명해지고, 우리가 한국 사회와 교회를 위하여 하여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교단마다 자신의 교단을 한국 교회의 장자(長子)교단이라고 한다. 제마다 큰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종종 보면 여기에 편승해서 우리 교단의 지도자들도 우리 교단을 가리켜 장자교단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이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안타까움을 느낀다. 우리 개개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를 영접하여 믿게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다고 묘사한다. 그러나 교회나 교단을 두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분명하고 확실한 것은 우리 교단이 어느 교단으로 나왔다든지, 새로이 교단을 형성하거나 조직한 교단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초기 선교사들이 신학교를 세우고 독노회와 총회를 조직한 이후 한 번도 옆으로 치우쳐 본 적이 없다. 교회의 역사로 보나 규모로 보나 위치로 보나 사명으로 보나 아들은 아니다. 어머니 교단이요, 한국교회의 모교단이다. 어머니가 아들하고 다투면서 서로 큰아들이라 주장하니까 문제가 되고 우리 교단이 표방하고 있는 ‘교회의 하나됨’이 늘 제 자리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가 가슴앓이를 하면서 교회 일치를 부르짖고,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도 타 교단을 감싸 안으며 통전적인 입장을 지켜온 것은 우리 교단이 가지고 있는 어머니의 마음 때문이다.
    ‘이럴 수가 있는가?’라고 하기보다는 ‘이럴 수도 있구나!’라는 화해와 용서36)의 입장은 바로 이러한 어머니 교단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어머니의 마음은 우리 교단뿐 아니라 속해 있는 모든 교회가 가져야 할 마음이다. 이 마음은 성도와 성도간에, 특별히 기존 성도들이 새로 믿기로 결심한 새신자들에게, 더구나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모든 전도 대상자들에게까지 전달되어져야 하는 우리들의 마음이요, 정신이며, 기도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이테크(hightech) 시대가  요구하는 하이터치(hightouch)의 정신인 것이다.


   2. 중심이나 중도의 신학이 아닌 통전적인 선교 신학이 되어야 한다.
     통합적 선교신학은 통전적인 선교신학을 말하며 이는 곧 성경적 선교신학이라고 정의하였다. 교회나 교단은 반드시 성경이라는 바탕 위에 서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보수적인 입장과 진보적인 입장으로 양극화되어 있는 대립적인 상황 가운데에서도 이들의 선교 개념을 통합시키기 위한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 내용을 전체적으로 포용할 수 있을 만큼 통전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미 살펴 본 것처럼 보기에 따라서는 통합이라는 교단이 서 있는 위치가 중간적인 입장이나 중도적인 입장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통합적 선교관은 통전적이어야 한다. 성경 가운데 어느 것은 취하고 어느 것은 버리는 입장이 아니다. 어느 것에 비중을 더 많이 두고 적게 두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말씀에 순종하는 신학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 전도가 우선이냐? 아니면 사회 봉사가 먼저냐? 질적인 성장이냐? 아니면 양적 성장이냐? 가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초대 교회의 모습 그대로의 통전적인 선교와 성장을 계속할 수 있어야 한다.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에 전혀 힘썼으며”(질적 성장 ; 행2:42),  “구원받는 사람의 수가 날마다 더해갔다” (양적 성장 ; 행2:47)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물건을 서로 통용하며”(내적 성장 ; 행2:44),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외적 성장 ; 행2:47). 종합적인 성장을 추구하였다.


 3. 융통성 있는 선교 전략 - 성령의 능력에 의존하는 선교 
   가끔 교단의 선교 정책이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 비판을 받을 때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앞서 우리가 고찰한 것처럼 현재나 다가오는 시대나 모든 선교지가 획일적일 수 없고, 국외 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모든 지역의 여건이 모두 다 동일할 수 없다. 초대 교회의 선교 전략도 언제나 획일적인 것은 아니었다. 특히 바울의 선교 전략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성령에 의존한 선교 전략으로서 ‘융통성 있는 선교 전략’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성령의 지시하심에 따라 선교사로 안수를  받았으며(행13:2-3),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선교하였다.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썼으나 허락되지 않았을 때에는 성령의 지시와 부르심에 따라 마게도냐로 향하였으며(행16:6-10), 에베소의 여러 사람들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였으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는 작별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행18:21).
  이미 21세기는 시작되었다. 세계화의 시대, 정보 통신의 시대, 다원화 시대로 요약되지만 단순히 인간적인 지식과 전략으로만 선교할 수 없는 복잡한 요소들로 얽혀 있다. 그러나 문제의 해결 방법은 성경에 있었다. 끊임없이 변하는 사회 속에서 영원토록 변치 않는 성경적 진리는 오는 세대에도 여전히 유효할 뿐만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 계시다. 하나님은 지금도 교회의 사역과 선교를 지도하시며 인도하신다. 교회는 여전히 선교공동체로서의 사명을 다하게 될 때 교회답다. 선교는 본래부터 통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성경적인 신학이 곧 통전적인 신학이다. 통전적인 선교를 지향하는 통합교단은 여전히 한국교회의 어머니교단임을 자각하고, 복음에 저촉되지 않는 이상 어머니의 가슴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포용할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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