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ikaiosuvnh(1343, 디카이오쉬네) = 의로움, 의-----<의로움>은 하나님께 합당함.. <의>는 하나님의 어떠하심 그 자체의 참 표현, 곧 JC... 하나님의 성품/속성(성-의-진-선)으로서의 <의>는 사랑과 빛이신 그분이 거룩하심-선하심-참되심(말씀하신 그대로이며 반드시 그리하심)에 있어서 <바로 그 자체이심>을 말하며 피조물에 대해서는 공의<공평-변치 않는 올곧음으로 적용>와 정의<말씀대로 시행하심>로 나타남. 성도 편에서 볼 때, 성도의 의는 하나님께 합당하며 조금도 거리낌 없음(righteousness), 사람에 대해 거리낌 없음(justice), 곧 양심의 평강안에서 생명의 빛이 충만한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넘치는 사랑으로 나타남 ..하나님의 어떠하심(성품)의 체현/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이심 : . ..성도가 내주하시는 성령을 따라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의>이신 JC를 살아낼 때 세상에 대해 <하나님의 의>가 됨 - ..<성도의 의>라고 할 때, 객관적인 의는 주님의 구속하시는 은혜로 <믿을 때>주어졌음, 한 편, 성도의 주관적인 의는 <성도가 삶속에 살아낸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로서 성도의 객관적, 주관적 의는 모두 그리스도임..JC는 <성도의 옷, 두 벌>로 표현됨 명사 디카이오쉬네(Theognis. Hdt. 이래)는 디카이오스(divkaio", 1342: 의로운)에서 유래했으며, 의로운 사람의 덕, 자질, 상태를 나타낸다. 70인역본에서 히브리 체테크(올바름, 공정함, 의로움)의 역어로 자주, 헤세드(선함, 친절, 긍휼)의 역어로 드물게 사용되었다. 명사 디카이오쉬네는 신약성경에서 92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넓은 의미에서, '그의 의무를 이행하는 자의 상태, 의로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조건' ① 일반적으로: "의의 말씀", 인간이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 받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는 길(way)에 관한 교훈, 히 5:13; "의의 왕", 하나님께서 시인하신 왕, 그의 백성을 하나님께 용납되게 하는 왕, 히 7:2; ② '삶의 성실, 미덕, 순결, 정직, 생각, 느낌, 행동이 -하나님 앞에-올바름'(오직 성령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살 때): 마 3:15; 마 5:6, 마 5:10; 마 6:20; 마 6:1; 행 13:10; 행 24:25; 롬 6:13, 롬 6:16, 롬 6:18-20; 롬 8:10; 고후 6:7, 고후 6:14; 고후 11:15; 엡 5:9; 엡 6:14; 빌 1:11; 딤전 6:11; 딤후 2:22; 딤후 3:16; 딤후 4:8; 딛 3:5; 히 1:9; 히 12:11; 약 3:18; 벧전 3:14; 벧후 2:5, 벧후 2:21; 벧후 3:13, "의의 도로", 의의 길로 행하는, 즉 정직한, 의로운 사람, 마 21:32; "그의 의를 구하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 마 6:33; 약 1:20; '자선'에서 나타나는 의에 대해: 고후 9:9. "의와 성결"로 연결되어 나오는 경우, - 눅 1:75; 엡 4:24, - 전자는 인간에게 향한 옳은 행동을, 후자는 하나님께 향한 경건을 나타낸다. 의를 행하는 것, 의롭게 사는 것: 요일 2:29; 요일 3:7; 요일 3:10. 의를 행하는 것, 행 10:35; 히 11:33; 의를 위해 사는 것, 의를 위해 생명을 바치다, 벧전 2:24; 옳은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완전하게 수행하다, 마 3:15. 디카이오쉬네가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할 때는, 그의 완전 무결한 도덕성, 고결성, 죄 없으심을 나타낸다: 요 16:8, 요 16:10; 하나님에게 사용될 때는 그의 '거룩성'을 나타낸다: 롬 3:5, 롬 3:25이하. ③ 바울 문헌에서 헤 디카이오쉬네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며 유대인과 유대 기독교인의 견해에 대립된다.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특히 다음의 사실들이 주목되어야 한다: 한 민족으로서의 유대인과 그들 가운데서 기도교도로 개종하게 된 매우 많은 유대인들은, 모세 율법의 요구사항에 부합하는 행위를 행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다 - 마치 공로의 방식으로 - 고 생각하며, 또한 그리하여 영원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율법은 그 가르침 모두에 완전히 복종할 것을 요구하며, 그러한 복종을 이행하지 않는 자들을 정죄한다(갈 3:10, 갈 3:12). 이런 식의 복종은 유대인도 이방인도(롬 1:24-롬11:1) 그 누구도 이행할 수가 없다(롬 3:10) - 이방인에게는 모세 율법 대신 그들의 마음에 새겨진 타고난 올바른 법이 있다(롬 2:14이하).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 즉 그의 독생자 그리스도를 인간의 죄를 속하는 희생제물로 죽게 내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인류에게 그의 은총과 선한 뜻을 입증하셨고, 그리하여 인간이 마치 죄를 짓지 않은 양 구원을 소망할 수 있게 한 그 사랑을 선포한다. 그러나 이 소망을 얻는 길은 오로지 믿음을 통하는 것 뿐이라고 가르친다. 이 믿음으로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고 보증된 하나님의 그 은총을 전유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믿음을 인간에게 디카이오쉬네로 간주하여 주는 것이다; 디카이오쉬네는 '한 죄인이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은총을 받아들이는 그 믿음을 통하여 그 죄인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께 용납(열납)될 수 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이런 의미에서 디카이오쉬네는 롬 4:5이하, 롬 4:11; 롬 5:17, 롬 5:21; 롬 9:30이하; 롬 14:17; 고전 1:30; 갈 5:5에서 수식어구 없이 사용된다. 하나님으로 인한 의,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하신 것, 롬 1:17; 롬 3:21; 롬 10:3. 이 단어가 함축적으로 사용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에게 받아들여질 만한 상태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낸다, 롬 10:4; 추상적인 것으로 구체적인 것을 나타내는 용법에서는,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신 자들을 뜻한다. 고후 5:2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롬 3:22; "믿음으로 된 의", 믿음으로 얻어지는, 믿음에서 나타나는 의, 롬 4:11, 롬 4:13; "하나님께로서 난 의", 즉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의, 하나님으로 인하는 의, 빌 3:9(내가 가진 의는 믿음에 기초한 의라는 것이다). "믿음에서 난 의", 롬 9:30; 롬 10:6; "믿음을 좇는 의", 롬 9:30; 롬 10:6; "내가 가진 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 빌 3:9; "믿음을 쫓는 의", 믿음에 따르는, 믿음에 합당한, 히 11:7(그러나 히브리서에서의 '믿음'의 개념은 바울 문헌에서보다 더 폭 넓다는 사실을 주의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그가 없이는 의가 존재할 수 없는 분으로서, 의의 창시자로서로 불리운다, 고전 1:30. "의를 이루기 위하여", 결과로서 의에 이르기 위하여, 의를 얻기 위하여, 롬 10:4, 롬 10:10. 믿음은 사람에게 의로 간주된다, 즉 의는 믿음에서 기인하고, 믿음에서 인정된다: 롬 4:3, 롬 4:6, 롬 4:9, 롬 4:22; 갈 3:6; 약 2:23. "의의 직분", 고후 3:9. 믿음에서 생겨난 "의", 즉 율법 순종의 결과로 생각되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상태와 반대된다, 롬 5:5이하; 율법에 의존하는, 즉 율법에 대한 가상적 복종에 의존하는 의, 빌 3:6; 어떤 사람이 자신의 행위로 스스로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의, 롬 10:3; 빌 3:9; (b) 더 좁은 의미에서 '공의, 정의', 혹은 '각 개인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시는 미덕', 이것은 모든 기독교인에게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공평하게 부여하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이라고 한다. 벧후 1:1. 법률상의 정의, 롬 9:28; "공의로 심판", 행 17:31; 계 19:11.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표식(SIGN : 성례전) 주제성구 : 마태 26:26-28 http://ghyle7.blog.me/40039347448 성례전을 영어로는 세크라멘트 (Sacraments) 라고 하고 희랍어로는 유카리스트 (Eucharist) 라고 하는데 이 말은 최후의 만찬 때 우러러 축사 하셨다는 데서 나온 “축복” “감사”라는 뜻이 있습니다. 성례전은 우리의 신앙을 더욱 북돋아 주고 강화 시켜 주고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는 것을 확인 시켜 주는 하나의 은혜 받는 방편으로 그리스도께서 우 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 성례전을 통하여 주님의 제자로서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주님을 기념하며 주님을 증거 해야 한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이 성례전의 예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을 허락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표식입니다. 그러므로 성례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신의 경건을 간증하는 것입니다. 이 성례전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성례전의 의미와 목적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성례전은 세례와 성찬식 두 가지가 있습니다 . 세례를 침례교에서는 침례라고도하나 이곳에서는 세례로 통일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세례는 깨끗이 씻음을 받음과 깨끗하게 되었음을 증명하여 주는 것이고, 성찬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되었음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례전은 우리의 예배 중에 중요한 예식입니다 . 성경말씀이나 설교와 마찬가지로 복음을 구체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례전은 말씀의 양식처럼 우리의 귀중한 영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성례전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에게 약속하신 구원을 틀림없이 주신다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례전을 통하여 말씀으로 주신 약속들에 대해 보증해 주시며 성례전에 참여하는 자들을 그때그때 마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축복과 자녀 됨을 구체적으로 확인하면서 새로운 용기와 위로와 소망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성례전이 구원을 얻는데 절대적인 조건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은혜와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성례전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성례전에 참여하지 아니한자들 중에도 믿음으로 구원 얻는 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성례전은 그리스도께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만드신 것이기 때문에 신앙을 고백한 자들은 참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성례전에 참여함으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구속받았 음을 확인하고, 더욱 신앙이 불붙게 되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며 유익을 얻게 됩니다. 성례전이 은혜의 수단으로써 그 효력을 발생하는·것은 성례전 자체의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례전은 상징이며 본질이 아닙니다. 성례전은 말씀을 떠나서는 독립적으로 시행될 수 없고, 항상 말씀에 의존하여 시행되며, 또한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이는 성례전이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맙니다. 만일 성령의 역사가 없다면 이 성례전은 우리의 신앙에 아무런 유익을 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성례전을 집례 하는 자나 성례전에 참여하는 자가 다 말씀과 성령에 의지해야만 성례전을 통하여 신령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성례전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로운 몸을 눈앞에 보여 주시므로 우리의 신앙을 굳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성례전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이 온전하게 확립 되어져야 하며 강화 되어져야 합니다. 성례전에는 세례와 성찬이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 두 가지만이 우리 주님께서 친히 만들어주신 것이기 때문에 개신교에서는 이 두 가지를 성례전으로 받아들이고 지키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 먼저 세례에 대하여 말씀드립니다. 세례는 깨끗하게 씻음을 받았다는 상징의 증거로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씻는 예식인데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씻음을 받고 깨끗이 됨을 증명해 주는 것이며 ,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연합됨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은혜에 참여함과 주님의 제자가 되기로 하는 서약을 표시하며 인치는 것입니다. 세례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를 영접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이루어 놓으신 신분의 변화를 외적으로 또는 공적으로 상징하는 예식입니다. 세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씀 드린다면 첫째, 세례는 신자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켜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고 모든 은사를 누리게 함을 의미합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이미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죄 사함을 받고,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것을 말하며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말합니다. 죄가 사해졌기에 그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으시고 죄에 대한 책임도 묻지 않으신다는 것을 확인 시켜 주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로써 하나님 앞과 성도들 앞에 공적으로 선포하시고 확인 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확실한 구원을 얻게 하셨는데 단지 구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 뒤에 따라 오는 은혜들을 누리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며 사람들 에게 우리의 신앙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며,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성결된 삶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써 확신 있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둘째, 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믿음으로 받는자 들에게 자신이 약속한 예식이며 한 평생을 주님을 위해 헌신하며 살 것을 약속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홍수 후에 다시는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보증하기 위해 하늘에 무지개를 보이신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을 확인 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고 다른 사람들이 세례를 받는 것을 볼 때에 구속의 진리를 다시금 확신케 되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강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희생하셨고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셨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하여 내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기로 서약하며 하나님이 거룩하심과 같이 이 땅에서 거룩하게 살기로 다짐하는 것입니다. 셋째, 세례는 공적인 신앙고백을 통하여 구별되게 잘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신자가 세상과 분리되었음을 표시하는 것이며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 사람들의 모임인 것입니다. 이 세례는 그리스도에게 붙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한 지체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는 그리스도의 한 지체들로서 다른 신자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지속적인 교제가 이루어져야 하며 상호 협력해야 합니다. 특별히 세례를 받은 자를 제자라고 부르며 이제는 세상에서 즐기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버리고 희생도 감수한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의 상징이며 성도로 하여금 교회 생활과 연합하여 성장과 활기를 불러 일으키도록 하는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 사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섬찬식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세례는 성도의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성찬식은 성도의 생활에 계속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찬식은 은혜의 최고 수단으로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간에게 주시는 것 이며 이를 통하여 인간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이것을 기념하라”고 까지 강조하신 거룩한 예식입니다. 이 성찬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대로 떡과 포도주를 주고 받으므로 주님의 죽으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합당하게 받은 자들은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먹고 신령한 양육과 은혜 안에서 성장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새롭게 확인하며 한 지체들로써 서로 사랑함과 교제를 나누면서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성찬식이란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살을 찢고 피를 쏟아 대속의 죽음을 죽으실 것을 아시고 말씀하신 설교입니다. 성찬식에서 먹을 떼는 것은 우리를 위하여 주님의 몸이 희생됨을 의미하며,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서로 교통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기 위하여 보혈을 흘리신 것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성찬식은 주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먹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 주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 예식은 주님을 기념하면서 주님이 오실 때까지 거행되어야 하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성찬식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첫째, 성찬식은 주의 죽으심과 주와 연합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성찬식은 예수님께서 나와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내대신 죽으신 것과 주와 연합되어 하나 되었음을 표현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찬식에 참여할 때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그대속의 죽음을 생각하며 묵상하여야 합니다. 성찬식을 통하여 성도는 주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되고 그리스도께서 누리는 영광을 누리게 되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곧 자신의 생명이 되는 것을 알게 되는 예식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모든 유업을 이을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둘째 , 성찬식에 참여함으로 영적으로 양육 받고 성장되는 것입니다. 떡과 포도주가 사람의 육체를 자라나게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생명의 떡이므로 우리의 영혼을 자라나게 합니다. 영적으로 양육을 받으며 성장되기를 원하는 자는 이 성찬 예식에로 참여하여야 합니다. 셋째, 성찬식은 모든 성도들과 연합됨과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랑이 우리가운데 풍성하게 임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주의 몸의 상징인 먹을 떼며 주의 피를 상징하는 잔을 나눌 때에 우리는 주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란 사실을 확인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한 지체들로써 깊은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시간인 것입니다. 서로 사랑을 확인하고 나누는 아름다운 시간인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자신의 몸과 피를 주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보존하시며 지키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삶 자체가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 성찬예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풍성한 주의 사랑하심이 나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확인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살을 찢기시고 물과 피를 흘려주신 것은 온전히 나를 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생활에 만족과 확신을 주시는 것입니다. 넷째, 성찬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케 됨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의미가 있습니다. 성찬식을 통하여 과거의 생활을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고 새로운 생활로 부활의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고 주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에 참여케 되는 것을 확신케 되는 예식인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지금 현재에도 누리게 됨을 나타내며 그때를 위하여 지금의 생활을 인내함으로 장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찬식은 구속하신 주님을 고백함으로 이루어지는 교회의 감사와 찬미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하여 화해가 이루어진 희생의 감사입니다. 우리와 같은 죄인들이 성찬식에 참여할 수 없지마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여 할 수 있는 축복을 받았으므로 가장 큰 감격이요 감사요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와 같은 죄인들이 용서함 받고 주님께 연합되는 것은 성도로서 최고 의 기쁨인 동시에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기쁨과 감사함으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헌신하고 충성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성도의 응답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51 에 “나는 하늘로써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고 말씀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죽음을 삼키셨고 부활로 우리익 썩을 폼을 영광과 썩지 아니할 몸으로 살리시는 생명의 떡으로 나타내신것 입니다. 우리가 성찬식에 참여함으로서 주님께서 주시는 당신의 살과 피를 먹어야 영생한다는 진리를 깨달아야 하고, 성찬에 참여하는 자는 멜 수 없는 불가분 의 관계가 되어, 큰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 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6:53-56)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식에 참여함으로 영적으로 양육을 받게되고 영원히 살게되는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혹 어떤 성도들은 지금까지 믿음의 생활을 잘못하여 성찬예식에 참여하는 것을 꺼려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마음으로 이 예식에 참여하여 주님의 헌신과 희생의 마음을 본받아 살아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 성경 고런도전서 11장 27-29 절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찬 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좌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예식에 참여하는 자들은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감사함이 충만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 성례전에서 내가 죄 사함을 받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확인하게 되고, 주님을 위해 살기로 새롭게 다짐하게 되는 것이며, 감사의 삶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잠자고 있는 신앙이 성례전 예식에 참여함으로 더욱 힘과 능력을 얻게 됩니다. 성례전은 하나의 의식이지만 의식적인 행사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성례전은 믿음으로 참여하게 될 때 영적인 풍성한 은혜를 힘입게 되고 감격과 감사가 있는 축복된 삶을 살게 되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식에 참여하는 자는 확신 있는 믿음으로 거룩하게 경건한 마음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허락하여 주심과 같이 우리는 우리 이웃과 보이는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며 기꺼이 헌신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 DE-COLOLES @@의의말씀.. 유일한 신약 사역의 내재적인 본질에 따라 주님의 회복의 현재의 이상을 긴밀히 따름. 우주 가운데 하나님의 위대한 네 행동은 창조, 선택, 새 창조,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새 예루살렘과 관련된다. 이 행동의 각 방면에서 우리는 하나의 문제를 보게 된다. 하나님의 창조에서 하나의 단체적인 사람이 있었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에서도 오직 한 사람이 있었다. 나아가서 한 새사람인 교회는 하나님의 새 창조물로서 유일하게 하나이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우주 가운데 있는 새 성(城)은 하나가 그 특징일 것이다. 실지로 그 성은 단체적인 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는 하나님의 행동의 기본적인 요소이다. 이러한 하나가 존재하는 까닭은 하나님 자신이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는 하나님의 본성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행동에서 하나의 근원과 하나의 요소와 하나의 본질을 본다. 하나님의 창조에서 우리는 한 하나님과 단체적인 한 사람을 본다. 하나님의 선택에서도 한 하나님과 한 사람이 있다. 더욱이 교회 안에는 한 영과 한 새사람이 있다. 결국 새 예루살렘에서 우리는 유일하신 삼일 하나님께서 하나의 보좌, 하나의 길, 하나의 강, 하나의 나무로 특징지어지는 한 성 안에 계신 것을 본다. 요한복음 17장 22절에서 주님은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을 우리에게 주셨다. 이것은 신성한 본성과 신성한 존재 안에 있는 하나를 가리킨다. 삼일 하나님의 셋은 본성과 존재에서 하나이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의 하나도 본질적으로 동일해야 한다. 성경에는 하나의 문제를 다룬 중요한 네 장이 있다. 이것은 신명기 12장과 시편 133편과 요한복음 17장과 에베소서 3장 마지막 부분부터 4장까지이다. 에베소서 4장 1절부터 6절까지를 3장 16절부터 21절까지와 분리하는 것은 이 부분을 이해하는 데 커다란 손실과 장애가 된다. … 4장 1절부터 6절까지에서 말한 하나는 3장 16절부터 21절까지에서 다루어진 것과 긴밀히 관련된다. 4장 1절에 있는 ‘그러므로’라는 단어가 이것을 입증한다. 이 단어는 4장에 있는 이 구절들이 4장 바로 이전 구절들의 결과라는 것을 보여 준다. 3장 16절부터 21절까지에서 바울은 “아버지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분의 영을 통하여, 능력으로 여러분을 강하게 하셔서 속사람에 이르게 하시고,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서, 모든 성도들과 함께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는 충분한 역량이 있도록 하시고, 또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하시어, 하나님의 모든 충만에 이르도록 여러분이 충만하게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기도했다. 그 결과는 …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의 빛 안에서 바울은 4장 1절에서 “그러므로 주님 안에 갇힌 사람인 내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부름을 받았으니 그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십시오.”라고 선포한다. 문맥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주님께 합당하게 행하는 것은 주로 그 영의 하나를 지키는 것이다. … 계속해서 바울은 그 영의 하나가 바로 삼일 하나님임을 지적한다. 바울은 몸에 대하여 말하고, 한 성령과 한 주님과 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하여 말한다. 몸과 삼일 하나님이 함께 언급되었다는 사실은, 하나가 사실상 삼일 하나님과 믿는 이들의 연합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단지 더해져서 하나를 이루는 것은 매우 피상적인 것이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는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과 그분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의 연합이다. 이것을 볼 때 우리는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하나에 대한 주님의 기도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요한복음 17장에 있는 하나는 신성과 인성의 연합이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신성은 신성 그 자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 되심과 인간 생활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거치신 후의 신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신 후에 삼일 하나님은 우리의 몫과 누림이 되신다. 생명 주시는 영이신 삼일 하나님 자신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과 연합되신다. 성경 육십육 권 전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계시해 준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실체로 함께 체현된 것이 바로 새 예루살렘이다. 성경 육십육 권은 새 예루살렘으로 최종 완결된다. 성경 육십육 권에 기록된 모든 긍정적인 것의 총체는 새 예루살렘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성경이 신성한 계시의 중심 노선인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의 분배를 계시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성경이 우리에게 계시하는 것의 총체가 새 예루살렘이라고 요약하여 말할 수 있다. 새 예루살렘은 성경에 나오는 계시 전체의 총체적인 구성체이다. 새 예루살렘의 기초는 열두 층의 보석으로 구성되어 있다(계 21:14, 19-20). … 새 예루살렘의 기초를 구성하는 열두 층의 보석들의 색깔은 무지개처럼 보인다. 창세기 9장 8절부터 17절까지에 따르면, 무지개는 말씀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을 상기시켜 주는 표징이다. 하나님의 신실함은 그분의 의에 근거한다. 의가 없다면 신실함도 없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의 기초는 하나님의 신실함을 수반하는 하나님의 의이다. 새 예루살렘 안에는 생명의 강이 있고, 이 강은 열두 문 모두에 도달하기 위하여 성의 꼭대기에서부터 바닥까지 나선형으로 흘러내린다. 생명의 강의 흐름은 성 전체를 적시고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자란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의 내용은 생명이다. 성 안에는 생명의 강이 흐르고, 생명나무는 포도나무처럼 강의 양쪽 둑에서 자라면서 성 전체를 공급한다. 이것은 새 예루살렘 전체가 의의 기초 위에 건축된 생명의 문제임을 가리킨다. 생명은 의의 완결이며, 의는 생명의 토대이자 기초이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의 체현이며,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은 하나님의 의를 기반으로 하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완결되는 구성체이다. 이것이 성경의 계시이다. 새 예루살렘에 관한 완전한 기록에 이를 때, 자연히 우리는 이것이 삼일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개인적인 체험과 전적으로 관련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새 예루살렘을 다만 장래에 어떤 부류의 사람들만을 위한 객관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우리는 요한계시록 21장과 22장에 기록된 것들이 오늘날 우리가 개인적으로 체험해야만 하는 항목들임을 깨달아야 한다. 체험적으로 말하면, 합당하고 정상적인 모든 그리스도인은 ‘작은 새 예루살렘’이다. 새 예루살렘에 관해 단체적으로 묘사된 것은 모두 우리가 개별적으로 직접 체험해야 할 것들이다. 우리 각 사람에게 혹은 각 사람 안에는 신성한 삼일성의 세 문이 있다. 더 나아가서 우리 각 사람 안에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마음과 영 안에 그분을 보좌에 앉혀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 존재의 가장 중심에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새 예루살렘에 대한 기록에서 마지막에 나오는 보좌는 매우 특별한 항목이다. 하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하나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그 영을 포함한다. 에베소서 4장 3절부터 6절까지는 이것을 가리킨다. 이 구절들에 계시된 하나 안에서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 주 그리스도, 생명을 주시는 분이신 그 영을 소유한다. 이 하나는 거듭난 영과 변화되고 새로워진 생각과 같은 긍정적인 것들을 포함한다. 긍정적인 모든 것이 합당한 이 하나 안에 포함되어 있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와 그 안에 포함된 긍정적인 모든 것의 최종 완결일 것이다. 그러나 불 못은 분열과 그 안에 포함된 부정적인 모든 것을 담는 최종적인 통이 될 것이다. … 불 못은 최종적이며 우주적인 쓰레기통이 될 것이다. 이와 반대로 새 예루살렘은 하나의 최종 완결과 표현이 될 것이다. 이 성은 하나의 보좌, 하나의 강, 하나의 나무, 하나의 길로 특징지어질 것이다. 이 길에는 생명수의 강이 흐를 것이며,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의 길을 생명의 길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유일한 길이 있으므로 분열은 결코 없을 것이다. 참된 하나, 곧 기독교에 의해 잃어버렸던 하나가 회복된 것에 대하여 어찌 다 주님께 감사드릴 수 있으랴! 이 하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즉, 긍정적인 모든 것을 포함한다. … 우리가 하나로 돌아올 때 경건하고, 하늘에 속하며, 영적인 모든 것이 돌아온다. 그 이유는 이러한 모든 것이 ‘하나’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 경건한 모든 것과 영적인 모든 풍성은 하나라는 터 위에 있는 우리의 것이다. 오늘날 주님의 증거는 하나라는 터의 회복과 함께한다. 이 증거는 스스로를 개선하려는 우리의 노력에 달려 있지 않다. … 주님의 증거는 … 주님께서, 하나라는 터 위에 서 있는 우리 안에서 일하신 것에 달려 있다. 우리가 교회생활 안에 들어온 후 자연히 경건함과 거룩함과 영적인 것에 대한 열망이 우리 안에 일어났다. 이것은 우리 자신이 이룬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완전히 주님께서 이루신 것이었다. 우리가 합당한 터인 하나라는 터 위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투명하게 열린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라는 터 위에 있는 주님의 축복 때문이다. 하나라는 터의 회복이 있는 그곳에 주님의 증거가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 하나님의 증거에 관계되는 모든 것, 곧 제단과 제물들과 성전과 절기와 풍성한 누림이 모두 돌아왔다. … 바빌론에서는 경건한 것들이 발견되지 않았다. 경건한 것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유일한 장소인 예루살렘에 있었다. 교회생활 안에 들어오기 전에 우리 중 많은 사람은 다소 느슨했고 자신의 선호에 따라 모든 일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회복 안에 들어온 직후에 우리의 양심이 합당하게 작용하기 시작했음을 간증할 수 있다. 차츰 우리는 어떤 일들을 처리하고 버리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교회생활을 떠난 사람들이 결국에는 이와 정반대의 것을 체험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들의 양심은 기능을 상실하기 시작했으며, 그들이 벗어 버렸던 세상에 속한 부정적인 것들이 서서히 되돌아왔다. … 이것은 하나가 우리를 악에서부터 지켜 주는 반면에, 분열은 악에게 문을 열어 준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가 말하는 하나는 부분적인 하나가 아니라, 크고 완전하고 포괄적인 하나, 곧 전체적인 하나이다. … 우리가 전체적인 하나에 대한 이상을 본다면, 분열의 모든 세균은 죽을 것이고 우리는 각종 분열에서 구출될 것이다. 하나님-사람들인 우리는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할 신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참여하다’라는 말은 … 우리가 어떤 것을 소유하고 또한 소유한 것을 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사람들인 우리는 … 하나님의 신성, 곧 하나님께 참여할 권리를 갖고 있다. 우리 사람은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었다. … 그러나 창조 시에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에게서 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하나님-사람들인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에 참여할 권리를 가졌을 뿐 아니라, 신격에서가 아니라 생명과 본성과 표현에서 하나님이 될 권리를 갖고 있다. 먼저 하나님-사람들인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할 신성한 권리가 있다. 요한복음 3장 15절은 누구든지 주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 영원한 생명은 신성한 생명, 곧 하나님의 생명이다. 우리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생명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지만 하나님의 생명은 없었다. 거듭남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그분의 신성한 생명을 은혜로 받았다. 거듭남을 통해 하나님은 그분의 생명을 우리의 존재 안으로 넣으시고 분배하셨다. 하나님-사람들인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할 신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에베소서 1장 4절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사랑 안에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셨습니다.”라고 말한다. … ‘거룩함’이란 하나님께 거룩하게 되고 분별되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모든 세속적인 것과 다르게 되고 구별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지만, 우리는 세속적이다. … 거룩함은 하나님의 본성이다. 하나님은 그분이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는 의도를 갖고 계신다. 거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 우리의 존재 안에 거룩한 분이신 그분 자신을 분배하심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어, 우리의 전 존재가 그분의 거룩한 본성으로 적셔지고 침투되도록 하신다. … 거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에도 참여한다. 거듭남을 통하여 하나님-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생각에 참여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 빌립보서 2장 5절은 “여러분 안에 이 생각을 품으십시오.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었던 생각입니다.”라고 말한다. … 에베소서 4장 23절은 “또한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롭게 되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영은 믿는 이들의 거듭난 영이며, 이 영은 하나님의 내주하시는 영과 연합되었다. 이러한 연합된 영은 우리의 생각 안으로 확산되고 따라서 우리의 생각의 영이 된다. … 이것은 그분의 생각을 우리의 생각이 되게 하는 것이며,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에 참여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참여할 신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 우리는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고 있는데, 이것은 ‘주 영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변화의 일이 주 영께 속한 어떤 것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 영 자신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우리는 바로 하나님의 존재로 변화되고 있다. 하나님-사람들인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형상에 참여할 신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 우리는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되고 있다’. …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은 외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으나, 우리가 변화됨으로 본받고 있는 형상은 내적인 것이다.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은 부활하시고 영광스럽게 되신 그리스도이신 하나님의 맏아들과 같은 형상이 되고 그분과 똑같이 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 안으로 이끌리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것이다. 히브리서 2장 10절은 하나님께서 많은 아들들을 영광 안으로 이끄신다고 말한다. 동일한 내용을 바울은 로마서 8장 30절에서 “…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라고 말한다. 영광스럽게 됨은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의 한 단계이며, 이 단계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생명과 본성의 영광으로 우리의 몸을 완전히 적시실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변형시키시어, 그분의 아들의 부활하고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형상이 되게 하실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유기적인 구원의 최종 단계이며, 이 단계에서 하나님은 완전한 표현을 얻으시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새 예루살렘으로 나타날 것이다. 또 다시 이스라엘 자손들의 체험을 생각해 보자. 거룩함이나 승리나 영성은 그들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었다. 이런 미덕들은 다만 그들이 성전과 지성소와 언약궤에 대해 올발랐기 때문에 그들의 것이 되었다. 그들이 성전에 대해 올바름으로써 하나 안에 머물 때, 그들은 거룩해지거나 승리하거나 영적으로 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자동적으로 하나 안에 있는 축복의 일부로서 이러한 미덕들을 가졌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승리나 거룩함이나 영성을 갖지 못하는 까닭은, 그들이 교회에게 그리고 지성소 안에 있는 언약궤이신 그리스도께 잘못이 있기 때문이다. 거룩하고 영적이고 승리하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교회에게 올바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바꾸어 말해서 우리는 합당한 하나 안에 머물러야 한다. 우리에게 모든 긍정적인 미덕들과 속성들을 주는 것은 바로 하나이다. 나는 교회를 반대하고 공격했던 사람들 중에 영적으로 성장한 사람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을 해쳤으며 그들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다. 우리를 영적으로 유일하게 보호해 주는 것은 하나이다. 우리가 하나 안에 머문다면 긍정적인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분열의 길을 간다면, 온갖 종류의 악한 것, 곧 미움과 질투와 멸시와 심지어 우상숭배와 간음 같은 것이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조만간에 분열적인 사람들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갈 것이다. 시편 133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들이 연합하여 사는 모습!” 그리고 이렇게 끝맺는다. “주님께서 그곳에서 복을 명하셨으니, 그 복은 곧 영원한 생명이다.” 이 시편이 분명히 보여 주는 것처럼 생명의 축복은 하나님의 백성의 하나와 관계있다. 시편 133편은 또한 기름 바름과 헐몬의 이슬에 관해 말한다. 보배로운 기름과 이슬은 아무 곳에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반대로 기름과 이슬은 특정한 장소에서만 누릴 수 있었다. 만일 어떤 이스라엘 사람이 주님께서 명하신 복을 누리기 원한다면 하나의 장소 안에 있어야 했다. 이것은 적어도 일 년에 세 번 시온 산으로 여행을 떠나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령 단 지파에서 온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왜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모두 한 장소에 가야만 합니까? 이것은 너무 편협하고 분파적이고 배타적인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십니다. 우리는 단에 머물면서 하나님께 즐겁게 찬송할 수 있습니다.” 단에서 온 사람들이 찬송을 누릴 수는 있겠지만, 시온 산에 가지 않는다면 그들은 여호와께서 명하신 복을 누릴 수 없다.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은 그들에게도 주님께서 명하신 복이 있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실지로는 그렇지 않다. … 하나님은 그분의 원칙과 경륜에 관하여 명확한 분이시다. … 시편 기자는 하나가 있는 ‘그곳에서’ 주님께서 복, 곧 영원한 생명을 명하셨다고 말한다. … 하나 안에 기름이 흐르고, 이슬이 내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생명의 복을 누린다. 만일 하나를 잃는다면 우리는 기름과 이슬과 생명의 축복에 대한 체험을 잃게 된다. 하나 안에 머물기 원한다면 우리는 생명 안에 머물러야 한다. 왜냐하면 생명이 하나를 유지해 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사실이었고,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시편 133편을 부르며 시온 산으로 올라갈 때, 그들은 도저히 다른 사람을 미워하거나 멸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시편 133편은 하나에 대한 시이다. 이 하나는 모든 긍정적인 속성들과 미덕들을 포함한다. 하나를 지킬 때 우리는 자연적으로 이 모든 속성들과 미덕들을 누릴 수 있다. 이뿐 아니라 하나를 지킬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갖는다. 고린도후서 3장 3절에 나오는 ‘사역하다’라는 단어는 사실상 섬기는 것을 의미한다. 이 헬라어 단어는 어떤 것을 사람에게 제공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예를 들면 웨이터가 식당에서 시중들거나 스튜어디스가 기내에서 시중드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의 믿는 이들을 사도들이 섬기면서 쓴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섬기다’라는 단어가 충분하지 않음을 깨달은 바울은 계속해서 ‘쓰다’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것은 사역하는 것, 섬기는 것의 의미를 설명한다. 바울이 사역하는 방식은 쓰는 것이었다. 고린도후서 3장 3절에서 바울은 먹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썼다고 말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by)’ 썼다고 말하지 않는다. ‘으로(with)’라는 말은 영적인 먹,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께서 쓰기 위해 사용되는 일종의 본질 혹은 요소이시라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바울이 사용한 ‘으로’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이 말은 그 영이 글을 쓰는 주체나 글을 쓰기 위해 사용되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글을 쓰기 위해 사용되는 본질, 요소, 실질임을 가리킨다. 살아 계신 하나님 자신인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은 붓과 같은 도구가 아니라 글을 쓸 때 사용하는 요소이자 하늘에 속한 먹이며, 이 먹‘으로’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전달하는 살아 있는 편지의 내용이신 그리스도를 사역하여 썼다. 새 언약의 사역은 단지 가르침의 사역이 아니다. 학교의 어떤 선생님도 어떤 본질을 여러분의 존재 안에 쓰지는 못할 것이다. 선생님은 어떤 개념을 여러분 안에 넣을 수 있지만, 어떤 것의 본질을 여러분 안에 축적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새 언약의 사역은 가르치는 것 이상의 일을 한다. 즉, 우리 안에 무언가를 쓴다. 더구나 이 새 언약의 사역은 관념들과 지식과 신학으로 우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본질, 곧 참되고 실질적인 무언가로 우리에게 쓴다. … 새 언약의 사역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쓰이셨다. 신성한 본질이 우리의 존재 안에 기록되었으며, 이 본질이 바로 그 영이다. 고린도후서 3장 9절에 나오는 ‘유죄 판결을 내리는 사역’이라는 말은 또한 구약의 모세의 사역을 가리킨다. … 옛 언약의 사역은 죽음과 유죄 판결에 속한 것이었고, 새 언약의 사역은 그 영과 의에 속한 것이었다. 죽음은 그 영 안에 체현된 생명에 대비되고, 유죄 판결은 의에 대비된다. 고린도후서 3장에서 그 영이 본질이라는 원칙에 근거할 때, 여기에 언급된 의(義)도 하나의 본질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므로 새 언약의 사역은 한 본질의 두 방면을 갖는다. 첫째 방면은 그 영께 속한 것이고, 둘째 방면은 의에 속한 것이다. 새 언약의 사역은 … 하나의 실질을 갖고 있고 또한 외관과 표현도 갖고 있다. 새 언약의 사역의 실질은 그 영이고, 표현과 외관은 의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기록된 사람은 누구나 그의 일상생활에서 의의 표현이 있을 것이다. … 만약 우리가 내적으로 그 영을 체험하고 외적으로 의를 표현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우리에게 무언가 다른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것이 새 언약의 사역의 결과이다. 이 사역은 하나의 본질, 곧 내적인 방면과 외적인 방면을 가진 한 본질을 우리 존재 안에 쓴다. 내적인 방면은 우리 안에서 움직이시는 살아 계신 영이고, 외적인 방면은 우리의 표현인 의이다. 하나님의 네 가지 위대한 행동은 창조와 선택과 새 창조와 … 새 예루살렘과 관련된다. 우주 가운데에는 유일하고도 합당한 근원이신 하나님 이외에, 다른 요소와 결과를 가진 또 다른 근원인 사탄이 있다. 새 예루살렘이 완성될 때에 이 또 다른 근원과 요소와 결과는 모두 불 못으로 던져질 것이다. 그러므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은 유일한 근원이 되실 것이며, 오직 그분의 요소와 산출물만이 남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새 우주 가운데에는 결코 분열이 없을 것이다. 분열은 모든 것을 포함한다. 분열은 부정적인 모든 것, 곧 사탄, 죄, 세상적인 것, 육체, 자아, 옛사람, 악한 성질 등을 포함한다. 우리가 분열의 본성에 관하여 빛 비춤을 받는다면, 분열이 부정적인 모든 것들을 포함하고 있음을 알 것이다. 분열이 육체와 자아와 세상적인 것과 무관한 독자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분열은 부정적인 모든 것과 연관될 뿐 아니라 부정적인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바벨의 분열은 우상숭배를 수반했다. 어떤 역사가들은 바벨탑과 성을 쌓을 때 사용되었던 벽돌 위에 우상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고 믿는다. 우리는 창세기 4장부터 11장까지에서 분열이 미움, 살인, 일부다처, 전쟁, 부패, 배반, 우상숭배와 같은 부정적인 것들을 포함하는 것을 본다. 이렇게 모든 것을 포함한 분열의 요소의 결과 중 첫째는 분열과 혼돈이 가득한 바벨이었다. 그러므로 바벨의 의미는 분열과 혼돈이다. 하나님의 말씀하심은 빛을 가져오고 빛은 생명을 산출한다. 하나님의 말씀하심이 없을 때 거기에는 죽음과 어둠이 있다. 죽음과 어둠은 몸을 해치고 지체들을 떨어져 나가게 한다. 오늘날 기독교는 생명 안에 있는 진정한 하나가 부족하기 때문에 죽음과 어둠으로 가득하다. 우리가 주님의 회복의 길로 돌이켜 교회생활 안으로 들어왔을 때, 자연적으로 분열과 연관된 부정적인 것들이 물러갔다. 그러나 우리가 지적한 것처럼 합당한 하나를 버린 사람들은 자연히 전에 버렸던 악한 것들에 다시 복종하게 된다. 이것으로 우리는 분열이 매우 심각한 문제임을 깨닫게 된다. 분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 사탄은 분열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마치 집의 골조를 갉아 먹어 치우는 흰개미와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열에 대한 생각마저도 물리쳐야 한다. 하나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생명 안에 있고, 모든 긍정적인 미덕들과 속성들을 누린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적 상태는 점차적으로 향상된다. 그러나 분열적인 어떤 생각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악한 자가 들어오는 문을 또다시 열어 주게 된다. 우리는 교회의 터를 생명과 연관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가 생명을 체험하는 기반이기 때문이다. 하나 안에 머무는 것은 생명 안에 머무는 것이다. 교회의 터를 떠나 거룩함이나 영성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헛된 것이다. 거룩함이나 영성은 하나와 직결된 문제이다. 하나 안에 거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지만 분열에 연관되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단지 분열 때문에 주님의 축복과 은혜를 상실했다. 이것은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우리에게 경고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기독교의 분열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 … 우리는 분열에 대한 생각조차도 싫어해야 한다. 하나를 인하여 주님께 찬양하자! 주님께서 우리를 이 하나 안에 보존하심으로써 우리를 주님의 임재 안에 지켜 주시기를 원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게서 나서 믿는 이들에게 의가 되시는 것에는 두 방면이 있다. 첫째 방면은 우리가 하나님께 회개하고 그리스도 안으로 믿어 들어갔을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객관적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믿는 우리들의 의가 되신 것이다. 찬송가 237장 1절은 “그리스도는 나의 의, 아름다움 내 눈부신 옷”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우리의 아름다움으로서,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옷, 영광스런 의복으로 입는다. 이것은 외적이고 객관적인 것이다. 둘째 방면은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나타남이신 그리스도를 살아 냄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믿는 이들의 의가 되신 것이다. 하나님은 믿는 이들이 그분에 의해 주관적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이들에게 주어진 의이시다. 우리는 … 하나님께 회개하고 주 예수님 안으로 믿어 들어갔다. 즉시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영광스런 의복으로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를 덮으셨고, 그 결과 우리는 외적으로 의롭게 되어 하나님께 기쁘게 받아들여졌다. 이것이 객관적인 의이다. 또한 우리가 입을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어지셨을 때,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생명과 생명 공급이 되심으로써 우리가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서 살아 내도록 하셨다. 이렇게 살아 내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즐거운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를 객관적으로만이 아니라 주관적으로도 의롭게 하려고 하신다. 이제 우리는 두 방면, 외적인 면과 내적인 면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 위에 입혀지시며, 또한 우리 안에 들어오시어 우리에게서 하나님을 살아 내심으로써 우리의 주관적인 의가 되게 하신다. 이 두 방면은 누가복음 15장 22절과 23절에서 제일 좋은 겉옷과 살진 송아지로 예표된다. 제일 좋은 겉옷은, 하나님의 의이신 그리스도께서 믿는 이들에게 주어지셔서 믿는 이들을 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덮으심으로써 그들의 객관적인 의가 되신 것을 예표한다. 살진 송아지는, 하나님의 의이신 그리스도께서 생명 공급으로 믿는 이들에게 주어지셔서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을 살아 내도록 하심으로써 그들의 주관적인 의가 되신 것을 예표한다. 의이신 그리스도의 이 두 방면은 또한 시편 45편 13절과 14절에 있는 왕후의 두 옷으로 예표된다. 솔로몬에게는 왕후가 있었고, 그 왕후는 두 벌의 옷을 갖고 있었다. 첫째 옷은 우리의 의롭게 됨을 위한 객관적인 의와 일치한다. 다른 한 벌의 옷은 우리의 승리를 위한 주관적인 의와 일치한다. 이 옷은 마태복음 22장 11절과 12절에 있는 결혼 예복과 같다. 로마서 5장 17절은 죽음이 아담을 통하여 왕 노릇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두 가지 것, 곧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이들이 되어야 한다. … 여기에서 의는 객관적인 것이다. 객관적인 의는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다. 또한 로마서 3장 24절은 우리가 그분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다고 말한다. … 우리 믿는 이들은 두 가지 것, 곧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았다. “의의 선물로 말미암아 심판은 사라진다. 심판은 죄 때문에 오지만, 의는 은혜에서 온다. 의는 항상 은혜와 함께 오며 은혜의 결과이다. 주관적인 의는 은혜에서 오고, 은혜는 객관적인 의에서 온다.” 객관적인 의는 하나님의 의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어지셔서 우리의 의가 되신 것이며, 이 의는 죄인인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사라지게 한다. 아담은 죄를 통하여 우리에게 심판을 가져왔다. 의이신 그리스도는 이 심판을 사라지게 하신다. 심판은 죄 때문에 오지만, 의는 은혜에서 온다. 은혜는 또한 그리스도이다. 은혜는 우리가 누린 아들 안에 계신 하나님이다. 객관적인 의는 은혜를 산출하며, 은혜는 주관적인 의를 산출한다. 결국 객관적인 의와 은혜와 주관적인 의는 모두 그리스도 자신이다. 객관적인 의는 우리에게 주어지신 그리스도이고, 은혜는 우리가 누린 그리스도이며, 주관적인 의는 우리에게서 살아 나타나신 그리스도이다. 열왕기상에 따르면, 성전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곳인 예루살렘에 세워졌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이었는데, 왜냐하면 그곳이 하나님의 임재를 위한 유일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이 한 장소가 하나님의 백성을 분열로부터 보호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분의 지혜로, 민족들이 자신의 신들을 섬기던 모든 곳을 깨뜨리고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유일한 곳으로 오라고 그분의 백성에게 요구하셨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는 하나님을 합당하게 경배하도록 그분의 백성을 하나 안에 보존하시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의 하나를 보전하시기 위해, 그들에게 그분께서 선택하신 유일한 장소로 올 것을 요구하셨다. 그러나 산당들은 이 유일한 곳을 대신하고 대치하는 곳이었다. 이것은 분열이 하나를 대치함을 의미한다. 유일한 장소인 예루살렘은 하나를 상징하는 반면에, 산당들은 분열을 상징한다. 모든 형태의 악하고 가증한 것들이 산당들을 세우는 것과 관련되는 것처럼, 신약의 용어로, 모든 형태의 악은 분열과 관련된다. 열왕기상의 기록에 따르면 두 왕, 곧 선한 왕인 솔로몬과 악한 왕인 여로보암은 앞장서서 산당들을 세웠다. 솔로몬의 경우에 산당들을 세운 것은 정욕에 빠지는 것과 관련된다. 솔로몬은 수백 명의 왕비들과 후비들을 거느렸다. 그 후비들의 욕망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 솔로몬은 산당들을 세웠다. … 여로보암은 자신의 왕국을 유지하기를 원했다. 여로보암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간다면, 그의 왕국이 다윗의 집으로 돌아갈까 두려워하여 산당들을 세웠다. 그러므로 여로보암은 야심 때문에 산당들을 세울 결심을 하게 되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분열은 정욕과 야심과 우상숭배와 연관된다. … 산당이란 보통 수준 위로 올려진 고지이다. 이것은 산당이 무언가를 높이는 것과 연관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원칙적으로, 오늘날 기독교 안에 있는 모든 산당, 곧 모든 분열은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것을 높이고 칭송하는 것과 관련된다. 높아진 것들이 악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것들은 매우 선하고 성경 연구나 성경 강해를 포함할지도 모른다. … 그러나 성경 연구가 분열과 관련될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성경 연구를 위한 모임까지도 산당이 된다. 그것은 그리스도 대신 다른 것을 높이는 데에 이를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그 무엇도 높이지 않도록 주님께 긍휼을 구해야 한다. 자신의 의견이나 선호를 높이는 태도를 취한다면, 우리는 ‘산당’, 곧 분열의 장소를 세우는 것이다. …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에게는 어떤 ‘산당’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 우리는 모두 동일한 수준에서 그리스도를 높여야 한다. 솔로몬과 여로보암이 세운 많은 ‘산당’은 하나라는 터에 심각한 손상을 주었다. 만약 이 문제가 …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면 구약은 이것을 반복해서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유일한 장소에서 드린 경배와 제물과 향만이 참된 것으로 여겨졌다. 그 장소는 정욕을 죽였으며, 야심에게 어떤 기회도 주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유일한 장소 이외의 다른 곳에서 드린 제물이 참된 것일지라도, 그것은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는 기회를 제공할 뿐이다. … 모든 ‘산당’은 하나라는 터에 손상을 가져온다. … 정욕과 야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런 산당들을 이용한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 20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에 대해 말한 것은 죄인들을 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고린도에 있는 믿는 이들을 향한 것이다. 고린도의 믿는 이들은 이미 하나님과 부분적으로는 화목했다. … 고린도전서 1장에서 바울은 고린도의 믿는 이들을 성도라고, 하나님에 의해 그분의 아들의 교통 안으로 부름받은 이들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그들은 확실히 어느 정도는 하나님과 화목했다. 고린도전서와 후서는 고린도의 믿는 이들이 하나님과 부분적으로 화목하게 된 후에도 여전히 육체 안에서, 겉사람 안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들과 하나님 사이에는 육체, 곧 타고난 사람이라는 갈라놓는 휘장이 있었다. 이 휘장은 성소 입구에 있는 휘장이 아니라, 장막 안에서 성소와 지성소를 분리하는 휘장과 일치한다. 고린도의 믿는 이들은 성소 안에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지성소 안에는 있지 않았다. …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계신 곳에서 분리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과 완전히 화목하지는 않았다. 고린도후서 5장 19절은 세상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20절은 이미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믿는 이들이 하나님과 더욱 화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완전히 화목하게 되는 데에 두 단계가 있음을 분명히 알려 준다. 첫째 단계는 죄인들을 죄에서 나오게 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들을 위해 죽으셨으며, 이것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객관적인 방면이다. 이 방면에서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들을 짊어지셨고, 그 결과 하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그분께 죄들에 대한 심판을 내리셨다. 둘째 단계는 타고난 생명 안에 사는 믿는 이들을 육체에서 나오게 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그리스도는 사람인 우리들을 대신하여 죽으셔서 우리가 부활 생명 안에서 그분을 향해 살도록 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주관적인 방면이다.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의 이러한 방면에서, 그리스도는 죄가 되시어 하나님에 의해 심판받고 끝나심으로써 우리를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다. 그리스도는 죽음의 두 방면에 의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을 하나님과 완전히 화목하게 하셨다. 이러한 화목의 두 단계는 장막에 있는 두 개의 휘장으로 분명히 묘사되어 있다. 첫째 휘장은 ‘막’이라고 불린다. 죄인은 화목을 이루게 하는 속죄하는 피를 통해 이 막을 지나 성소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께 인도되었다. 이것은 화목의 첫째 단계를 예표한다. 그러나 둘째 휘장이 여전히 지성소 안에 계신 하나님과 그를 갈라놓았다. 이 휘장은 그가 지성소 안에 계신 하나님께 인도될 수 있도록 찢어져야 했다. 이것이 화목의 둘째 단계이다. 고린도의 믿는 이들은 첫째 휘장을 지나 성소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하나님과 화목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육체 안에서 살았다. 그들은 이미 찢어진 둘째 휘장을 지나서,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 그들의 영 안에 계신 하나님과 함께 살 필요가 있었다. 이 서신의 목표는 고린도의 믿는 이들을 지성소로 인도하여 그들을 지성소 안에 있는 사람들, 곧 영 안에 있는 사람들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도가 “하나님과 화목하십시오.”라고 말한 의미이다. 하나님의 많은 복은 성소 안에서 발견되지만, 하나님 자신은 지성소 안에 계신다. 성소 안에는 그 영의 많은 복이 … 있지만,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는 없다. 하나님 자신을 소유하기 위해 우리는 더욱더 화목하게 되어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인도되기 위해 화목의 둘째 단계를 취해야 한다. 이것이 완전한 화목이다. 이 화목은 우리를 죄로부터 이끌어 낼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육체, 타고난 사람, 타고난 존재로부터 이끌어 낸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 인도되어 그분과 하나가 된다. 하나라는 터는 단순히 ‘한 도시에 한 교회’의 문제만은 아니다. 하나라는 터는 이보다 더 깊고, 더 풍성하고, 더 높고, 더 충만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이 우주 가운데 한 장소를 선택하셨고, 그 장소가 바로 교회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께서 선택하신 이곳으로 갈 것을 요구하신다. 영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반드시 교회 이외의 모든 장소와 그리스도의 이름 이외의 모든 이름을 깨뜨려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문화와 종교적인 배경을 깨뜨려야 함을 의미한다. 여러분은 이 나라의 특정한 지역에서 태어났다. 여러분은 그곳에서 받은 영향을 깨뜨려야 한다. 아마 여러분은 어느 특정한 교파에서 얻은 종교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이제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있는 교파에 속한 부분을 깨뜨려야 한다. 우리가 깨뜨려야 하는 것들은 우리의 성질, 성격, 습관들을 포함한다. 우리는 한 새사람의 하나를 손상시키는 모든 것을 깨뜨려야 한다. 골로새서 3장 11절은 새사람 안에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자와 무할례자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노예나, 자유인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시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와 함께한 교회가 곧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유일한 곳이다. 골로새서 3장 11절의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다른 모든 곳은 철저하게 파괴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한 교회가 아닌 것은 모두 깨뜨려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다만 교회생활 안에 있으면서 좋은 땅의 풍성이신 그리스도를 누릴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그분을 누릴 때, 우리는 주님의 집에 심어질 것이고 자랄 것이며 번성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교회생활을 하는 합당한 길이다. 이것이 곧 하나라는 터이다. 이 터 위에서는 분열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분열의 기초가 깨뜨려졌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질과 성품과 타고난 성격과 선호들이 모두 소멸되었다. 우리의 종교와 문화와 특별한 방법들도 또한 깨뜨려졌다. 모든 이방인의 장소들을 파괴했기 때문에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곳으로 오는 것이다. 교회생활은 기꺼이 산당을 깨뜨리려고 하는 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약하게 되었다. 신명기 12장은 오늘날 우리에게 큰 영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의 인간 생활과 문화 속에는 깨뜨려야 할 장소들이 많이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모두 깨뜨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유일한 장소인 교회로 가야 한다.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 이외의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 되셔야 하며 모든 것 안에 계셔야 한다. 이렇게 말하기는 쉽지만, 이것을 확실한 방법으로 실행하기는 쉽지 않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이 원칙을 실행하지 않는 것에 대해 변명할 수 없다. 깨뜨려져야 하는 모든 장소에는 바쳐진 주상(柱狀)이나 상징물이나 형상이 있다. 이것은 우리의 성격이나 기질 속에도 반드시 깨뜨려져야 할 그러한 주상들이나 상징물들이나 형상들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상이나 상징물이나 형상이 있는 모든 곳을 깨뜨려야 한다. 어떤 곳도 남겨 두지 말라. 오히려 그것들을 멸하고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곳으로 가라. 우리가 거듭 지적했듯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곳은 바로 교회이다. 교회에 온 이후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유일한 길인 십자가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갖지 말아야 한다. 그때 우리는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그 땅의 풍성한 소산물 중 최상품으로 누릴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분을 누릴 때, 이 누림은 우리의 경배와 교회생활이 될 것이며 우리 그리스도인의 매일의 생활이 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라는 터 위에서 자라고 성숙할 것이다. 고린도후서 11장 2절에 있는<내가 하나님의 질투로 여러분에게 질투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여러분을 한 남편이신 그리스도께 순수한 한 처녀로 드리려고 약혼시켰기 때문입니다.>라는 바울의 말은 … 우리의 마음을 깊이 만지며 주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우리 안에 주 예수님에 대한 부드러운 느낌이 일어나며, 우리는 주님께서 얼마나 사랑스럽고 귀하신지를 다시 한 번 깨닫는다. … 반대자들은 의문을 불러일으키지만, 참된 사역은 신랑이신 주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오늘날의 유대교도들은 믿는 이들을 동요시켜 주 예수님을 단순히 사랑하는 데서 멀어지게 한다. … 11장에서 바울은 유대교도들, 곧 거짓 사도들에 관하여 매우 강하게 말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말하기에 앞서 자신이 고린도에 있는 믿는 이들을 신학생이 아닌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이신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약혼시켰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진실한 영으로 진정한 복음과 참되신 예수님을 전파할 때마다, 주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공급되실 것이며, 그 결과로 사람들은 그분을 소중히 여기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따르며 그분을 모든 것으로 취할 것이다. 수세기를 통하여 많은 사람이 성경을 전파하고 성경을 가르쳤지만, 그러나 그들의 전파와 가르침은 믿는 이들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귀중한 인격에서 빗나가게 했다. 원칙적으로 그러한 사람들은 창세기 3장에서 뱀이 하와를 미혹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믿는 이들을 미혹한다. 시편 45편 8절 하반절은 “상아궁들에서 들리는 현악기 소리가 왕을 흥겹게 합니다.”라고 말한다. 이 구절에서 ‘궁들’은 지방 교회들을 상징하고, 상아는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을 상징하며, 현악기 소리는 찬송을 상징한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우며 그분을 표현하는 지방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으로 건축되었으며, 지방 교회들로부터 그분을 즐겁게 하는 찬송이 나온다. 우리는 주님을 찬양할 때에 주님의 미덕들과 주님께서 그분을 표현하는 교회를 산출하시기 위해 성취하신 일들을 감상해야 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옷, 곧 그분의 미덕들은 그분의 표현인 교회를 산출했으며, 그분의 옷과 교회는 모두 달콤함으로 가득하다. 시편 45편에서 왕은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 왕후는 교회를 예표하며, … 왕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믿는 이들을 예표한다. 예표에서 이 왕후는 … 단체적이다. 믿는 이들은 이 단체적인 왕후를 조성하고 구성하는 성분들이다. 사실상 믿는 이들은 왕후의 조성성분이자 동시에 존귀하고 아름다운 여인들이다. 우리는 요한계시록 19장 7절과 9절 상반절에서도 동일한 상황을 볼 수 있다. 7절은 “우리가 기뻐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립시다. 왜냐하면 어린양의 결혼 날이 다가왔고, 그분의 아내도 자신을 준비하였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어린양의 아내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9절 상반절은 “어린양의 결혼 잔치에 초대받은 그들이 복이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어린양의 결혼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에 대해 말한다. … 좀더 엄밀히 말하자면 여기서 그리스도의 아내, 그리스도의 신부는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교회이기보다는 오히려 교회 안의 이기는<또한 이겨낸> 이들이다. … 초대받은 사람들도 이기는 이들이다. … 한 면으로 이기는 이들은 신부이지만, … 또 한 면으로는 초대받은 사람들이다. … 시편 45편에서 그리스도의 신부는 왕후로 예표되었으며, 그분께 초대받은 사람들은 왕후 주위에 있는 존귀한 여인들로 예표되었다. 그러므로 사실상 그리스도의 신부는 한 무리의 이기는 이들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