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욕의 개념 ejpiqumiva(1939, 에피뒤미아) ===충동, 욕망, 갈망.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에피뒤미아(Hdt. 이래)는 에피뒤메오(ejpiqumevw, 1937)에서 유래했으며, '충동, 욕망, 갈망'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처음에 문학에서 중립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속에 윤리적으로 나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왜냐하면 다른 세가지 격정 곧 두려움, 쾌락, 슬픔과 마찬가지로 에피뒤미아도 재물에 대한 잘못된 평가와 이생의 악에서 야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에피뒤미아는 70인역본에서 약 80회 나오며, 주로 타아와 하마드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a) 도덕적으로 평범한 욕망(예: 신 12:20 이하, 네가 원하는 만큼), (b) 칭찬할만한 욕망(예: 창 31:30, 인간의 아버지 집에 대한 사모), (c)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악한 욕망(민 11:4; 민 11:34; 신 9:22 등)을 나타낸다. 만일 열번째 계명(출 20:17)이 이런 욕망을 금지한다면, 이는 하나님이 인간에게서 단순히 행위의 순종을 요구하실 뿐 아니라 그들의 말, 생각, 모습, 노력 그리고 소망 가운데서의 순종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그는 마음 전체에서 우러나온 사랑을 요구하신다(신 6:5).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에피뒤미아는 신약성경에서 38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에피디미아가 중립적이거나 좋은 의미로 나오는 경우는 눅 22:15; 빌 1:23; 살전 2:17; 계 18:14 뿐이며, 다른 곳에서는 나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에피뒤미아가 '나쁜 욕망'(evil desire), 혹은 '정욕'(lust)이라는 나쁜 의미로 사용되는 곳에서 신학적으로 더욱 중요하다. (b) 공관복음에서 에피뒤미아는 나쁜 의미로 나타난다. ① 마 5:28에서 성적 욕망과 정욕에 대해 언급한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② 막 4:19에서 이 단어는 부와 같은 이 세상의 모든 종류의 여러가지 재산들과 가치들에 대한 욕망에 대해 사용되었다: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이 두 구절들에서 예수님이 에피뒤미아를 상당히 파괴적인 죄로 여기셨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이것은 말씀을 결실치 못하게 만든다(막 4:19, 여기에서 이것은 저지를 당하지 않으면 언제나 뻗어 나가려고하고 무성하게 자란 가시덤불에 비유된다). 이것은 결혼을 파괴시킨다(마 5:28).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은 욕망이 "오직" 마음의 생각과 원망 속에서 작용하는 것이지, 행위의 영역에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욕망을 결코 가볍게 보지는 않으셨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악한 욕망은 악한 행실과 같이,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악한 마음에서 흘러나온 것이며, 그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c) 바울은 에피뒤미아를 인간을 지배하는 죄에 대한 하나의 표현이라고 본다. 그는 이것을 인간의 "육체", 곧 하나님을 떠난 죄에 가득찬 존재 속에 있는 휘몰아치는 힘으로 본다. ① 갈 5:16에 따르면 에피뒤미아는 육체의 욕심을 추구한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행동하도록 인간을 충동질한다. 이 모든 것을 통틀어보면, 이것은 자기 생의 중심을 자신 안에서 발견하고, 자신을 신뢰하고 다른 사람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려는 인간 속에 깊이 뿌리내린 성향을 나타낸다. 욕망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성령이다. 성령과 동행하는 사람은 욕망을 이겨낼 능력을 지닌다(롬 8:9 이하). 왜냐하면 성령이 욕망 대신에 그의 삶을 결정하는 힘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엡 4:23). ② 엡 2:3에서 바울은 육체와 정욕을 지닌 이러한 경향을, 인간을 하나님에게서 몰아내는 능력들과 같다고 본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③ 엡 4:22에서 "옛 사람"의 능력은 에피뒤미아로 나타내어진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d) 바울 서신에서 욕망은 모든 방면에서 나타날 수 있다. 즉 성적 욕망, 물질적인 향유, 다른 사람의 재물을 탐내는 것(롬 1:24; 딤전 6:9; 딛 3:3; 갈 5:16-21) 등이다. 이 욕망들은 사람의 주의를 방향 지음으로써 인간을 완전히 욕망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욕망의 충동에 내어맡긴 사람은 누구든지 이미 죄의 지배 하에 있는 것이라는 인식이 롬 6:12에 나타나 있는데, 이 인식은 자주 바울의 문서들에서 상기된다(엡 2:3; 딤후 3:6; 딛 3:3). 이 욕망들이 한 인간을 좌우하고 그를 사로잡는다. 그가 이 욕망의 매력과 유혹의 노예가 되는 반면(엡 4:22), 그의 "마음" 곧 그의 전 인격의 중심(롬 1:24)은 이 욕망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된다.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면, 의지의 모든 결정, 그리고 심지어 가장 좋고 가장 숭고한 인간의 감정과 능력들까지도 이 욕망에 의해 좌우된다. 하나님의 뜻과 규정에로 향하고 하나님께 종속되고 그에 의해 결정되는 삶만이 이와 반대되는 모습을 제시해 준다(롬 6:12 이하; 엡 4:22 이하; 딛 2:12 이하). (e) 롬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바울은 인간의 욕망 속에는 원시적이고 본능적인 면이 있으므로 율법이 욕망에 대해 말할 때, 이 욕망 그 자체가 실제로 무엇인가에 대하여 인식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리하여 욕망은 인식적인 죄가 되어(롬 7:7 이하) 극악무도하게 하나님의 계명을 거스린다. 내가 율법을 알기 전에는 욕망이 본능적인 것이었지, 아직 의식적으로 바라는 의지는 아니었다. (f) 요한의 기록들에서 욕망의 근원은 훨씬 거슬러 올라간다. 욕망은 단순히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기원한 것이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 2:16). 궁극적으로는 악마에게서 나온 것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 8:44). 여기에서 세상이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 적대 영역을 의미하며, 인간은 이 영역 속에서 "이 세상의 왕"이 지니고 있는 권세를 인식한다. 이 세상의 왕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요일 2:16), 곧 감각 및 그것들의 본성 안에 있는 관능에 호소하는 외적인 매력으로 우리를 유혹하여, 그것으로 우리의 "사랑"을 얻고자 한다. 그는 인간 안에 잠재해 있는 증오의 생각들과 거짓말하려는 인간의 경향들을 일깨운다. 왜냐하면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기 때문이다(요 8:44). (g) 요일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욕망이 "이 세상에서" 생겨난 것이므로, 이 욕망도 이 세상과 마찬가지로 무상한 것이다. 욕망에 의존하여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삶을 욕망에 의해 결정되도록 허용하는 사람은 그 욕망과 더불어 "멸망할"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거할" 것이다. (h) 공동서신에서 에피뒤미아의 용법은 중립적이거나 바울 및 요한 문서에서와 같은 경향을 보인다. 이것은 "육체"와 육체의 정욕을 의미한다(벧전 2:11; 벧후 2:10). 이것은 정욕과 연락과 술취함과 방탕(벧전 4:3)과 허탄(벧후 2:18) 안에 있는 다른 여러가지 감각의 욕망들과 관련된다.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욕망의 지배를 받도록 하기위해 인간을 유인하고 부추기고 유혹하는 하나의 능력이다(약 1:14; 벧전 1:14; 벧후 2:18). 이것은 인간에게 완전한 해방과 자유를 약속하지만 실제로는 야비하게 인간을 예속시킨다. 이것은 언제나 인간의 마음 속에 숨어 있기 때문에 적절한 때가 되면 인간은 자기 뜻을 그 욕망에 굴복시켜 그 욕망의 지배를 받게 된다(약 1:14). 그런 일이 생겨나게 되면, 이 욕망은 죄에 가득찬 행동을 "유발시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범죄하게 만든다(약 1:15). 그리하여 마침내 "사망"(롬 7:5)과 "썩어짐"(벧후 1:4)에 이르게 한다. 에피뒤미아가 인간의 본성과 이처럼 결부되어 있으므로, 기독교인들은 항상 이 욕망에서 벗어나는 일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깨어 있어야 한다. 만일 그가 언제나 하나님의 영에 의해 지배를 받고 "하나님의 뜻을 좇는"(벧전 4:2) 삶을 산다면, 그는 이 욕망을 이길 수 있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거듭난 이들은 모두가 이미 그리스도안에서 혼 목숨을 맡겨 드렸기에, 모든 기본적 욕구를 또한 주께 맡긴 자들임을 기억할 것..JC안에 있을 때, 우리의 모든 필요에 대해 전적으로 주님의 공급하심과 그 주권을 인정하고 그 부분에서조차 주 되심을 인정해 드릴 때, 진정한 평강이 있음. ##일반적 의미에서의 정의들 욕구(Needs) : 삶을 영유하는데 필요한 것들의 결핍을 느껴서, 무엇을 얻거나 무슨일을 하고자 바라는 일. 욕망(Desires =욕심이 본격적으로 시작됨) : <자기 스스로가 세운 기준에 도달하지 못해서> 만족하지 못함따라 부족감을 느껴 더 원하여 가지려는 마음. 탐욕(Greed) : <남을 해롭게 하여 관계를 깨뜨릴 정도의>지나치게 탐하는 욕심. 사실 세 단어는 비슷하지만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 특히 탐욕...... 세개를 구분하는 것은 원하는 정도의 차이라 할 수 있겠다. 욕구는 결핍된 상태를 채워서 현상을 유지하는 정도이고, 욕망은 현상 유지에는 문제가 없으되, 자기 스스로가 세운 그 기준에 도달 못함으로써 부족을 느껴서 한걸음 더 나아가 원하는 것이므로 욕구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된다. 탐욕은 욕망을 뛰어 넘어 남들이 보기에도 과도하게 욕망을 추구하는 것으로 이 단계가 되면, 남들에게 피해를 줄 정도일 것이다. 따라서 욕구는 삶을 유지하는데 생기는 필요들로서, 왠만하면 충족되어야 하는데, 부족을 느끼면 그때 그때 채워넣어야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배고프면, 밥먹어야 한다. 다른 방법이 없다. 하지만 욕망은 배는 고프지만 '나의 품격에는 소고기야'라는 식으로 스스로 기준을 세워서 판단하여 "배고픔을 채울 것 + @"의 요건이 들어간다. 여기서 @가 너무 과대하여 관계를 깨뜨리는 정도기 되면 탐욕이 된다. 사람의 욕구에 대한 이론으로는 <매슬로의 인간욕구 5단계론>이 있는데, 이것들이 부족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나, 과도하면 문제된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함. 1. 생리적 욕구( 식욕, 수면욕, 성욕 ) 2. 안전의 욕구( 질서, 안정된 수입, 나를 지켜주는 지도자) 3. 소속과 애정의 욕구( 친밀감, 배려, 재미, 애정, 호감, 남들과의 원만한 관계 ) 4. 자존(인정)의 욕구( 타인으로부터 높은 평가와 존경을 원하는 욕구 ) 5. 자아실현의 욕구( 꿈을 실현 ) **매슬로우는 말년에 6.자기초월의 욕구를 추가하였다. ###자존심, 자부심, 자존감(자기존중감, 자기가치감)의 차이점 2008년 EBS에서 방영한 '아이의 사생활 3부 - 자아존중감' 편에 출연한 후 나의 이메일함은 '어떻게 하면 아이의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지' 물어오는 내용으로 오랫동안 북적거렸다. 그때 심심찮게 접했던 질문 중 하나는 '우리 아이가 자존심은 참 센데, 자존감도 높을까요?'라는 것, '우리 아이는 성적은 좋은 편인데도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없어요, 혹시 자존감에 문제가 있는 건가요?'라는 질문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자존심과 자부심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 속에 얼마나 깊이 파고들어 있는지 새삼 깨닫곤 했다. 반면에 자존감은 우리나라 엄마들에게 아직은 참으로 낯선 개념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비교를 통한 만족, 자존심 내로라하는 수재들이 다닌다는 한 수학학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 수학학원에서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수학경시반 시험을 치렀다. 각기 다른 학교에서 전교권 성적을 유지하는 아이들끼리 겨룬 끝에 4명의 아이가 경시반 시험에 합격했다. 문제는 이들이 공부할 경시반에 초등학교 6학년 아이 2명도 포함된다는 사실이었다. 이를 안 경시반 중학교 1학년 학생 4명은 한결같이 창피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창피해서' 내놓은 4명의 대처 방법은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3명이 '창피해서 그 반에서는 공부 못하겠다'고 말한 것과 달리 나머지 1명은 '창피하더라도 공부를 제대로 해야겠다'고 말한 것이다. '창피해서 그 반에서 공부 못하겠다'고 말한 아이들은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존심이 센 유형이다. 자존심은 남에게 굽히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품위를 지키려는 마음을 뜻한다. 즉, 다른 사람과 비교를 통해 자시을 인정하려는 마음이다. 우리는 어릴적부터 자존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자란다.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존심을 지켜야 해." "너는 자존심도 없니?" "자존심 상해서 못살겠어." 그래서 은연중에 자존심만은 꼭 지켜야 한다는 강박을 갖고 있다. 흔히 자존심은 다음 5가지 상황에서 생겨난다. '누가 더 많이 가졌는가'에서 출발하는 소유, '내가 상대보다 더 잘했는가'에서 비롯되는 성취, '저 사람보다는 높은 자리에 있어야지' 하는 지위, 다른 사람보다 아름답고 싶은 외모, '내 주위엔 훌륭한 사람이 많아'처럼 나를 돋보이게 해줄 인간관계 등이다. 말하자면 누군가와 비교를 통해 충족되는 마음이 자존심인 것이다. 위의 이야기에서 '창피해서 그 반에서는 공부 못하겠다'고 말한 아이들을 자존심이 센 유형으로 본 이유는 이 아이들이 '6학년 동생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를 먼저 따져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들은 자기 만족도에 상관없이 상대로부터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상황을 참지 못해 자존심에 타격을 입곤 한다. 이를테면 학교 시험에서 혼자 100점을 받았을 때와 여럿이 100점을 받았을 때의 반응이 선명하게 엇갈린다. 혼자만 100점을 받았을 때는 자존심이 살아나는 반면, 여럿이 100점을 받은 상황은 최상의 결과를 얻어냈음에도 못내 자존심 상해한다. 반대로 '창피해서라도 공부해야겠다'고 말한 아이는 자존심은 약할지언정 자존감은 높은 유형에 속한다. 자존감이 높은 아이는 위기에서도 흔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긍정적인 생각으로 힘든 상황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이처럼 자존심과 자존감은 자기 스스로를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비슷하지만, 그 마음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뜻을 지닌다. 즉, 자존심은 상대와의 평가를 통해 자기만족을 꾀하는 마음이지만, 자존감은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굳건하게 지켜지는 마음이다. 비슷한 어감이지만 자존심과 자존감은 위의 이야기 속 상황처럼 서로 상반된 양상을 보인다. 어떤 상황에서든 자존심을 먼저 내세우는 아이는 오히려 자존감이 낮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에 자존감이 높은 아이는 무턱대고 자존심만 운운하는 게 아니라 부족하고 인정하기 싫은 부분까지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 @외부 환경에 영향받는 일시적 만족감, 자부심 엄마들을 상담하다 보면 이런 고민을 털어놓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우리 아이는 도대체 종잡을 수 없어요. 잘할 때는 잘하다가도 한 번 실수를 하게 되면 그때부터 확 떨어지거든요. 그러다 보니 성적이 들쭉날쭉해요." 이런 아이는 일시적으로 기대 이상의 성과를 냈을 때는 자부심이 커지지만 평소보다 못한 결과가 나타났을 때는 자부심이 대폭 감소하거나 없어진다. 자부심은 자신의 능력이나 노력에 의한 성과를 통해 발생하는 긍정적인 자의식이다. 성공을 맛보았을 때나 원하는 목표를 달성했을 때 경험할 수 있는 일시적인 달콤한 감정이다. 다만 이는 상황에 관계없이 지속성을 갖는 자존감과 달리 어떤 이벤트나 외부 환경의 영향을 받는 일시적인 만족감이다. 따라서 자존감이 낮은 아이라 해도 무언가 원하는 성과를 이뤄냈을 때에는 일시적으로 자신에 대해 만족스러워하는 자부심을 느낀다. 피아노 콩쿠르에서 상을 받았을 때나 달리기대회에서 1등을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의 칭찬과 성취감을 통해 자부심을 갖는다. 하지만 이러한 자부심을 자존감과 동인한 감정으로 연결시키기는 어렵다. 평생토록 이어지는 자존감과 달리 자부심은 상황에 따라 자리잡았다가 이내 빠져나가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기 가치를 인정하는 마음, 자존감(=자기가치감, 자기존중감.....스스로 자랑함인 자긍심과는 다름.) 자존심과 자부심이 다른 사람과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면, 자존감은 스스로 자기 존재의 가치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이다. '자존감'은 자신이 다른 이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자기가치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잘 해낼 수있다고 믿는 자신감이라는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즉, 자존감은 자기 자신을 제대로 사랑할 줄 아는 방법이며, 모든 행동과 변화의 근원이 되는 마음가짐이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가치 있고 소중한 사람인지 누군가 알려주지 않아도 스스로를 존귀하게 여긴다. 물론 자존감이 높다고 해서 스스로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만 내리는 것은 아니다. 부정적인 부분을 받아들임으로써 긍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비록 부정적인 면을 갖고 있긴 하지만 자신에 대한 사랑과 존중은 흔들리지 않는 마음, 자신의 강점과 약점 모두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자존감 높은 사람들의 대표적인 행동 유형이다. -인생을 성공으로 이끄는 사고방식을 가르친다 우리 아이 자존감의 비밀[조세핀 킴 지음]- ###자고와 오만과 자긍과 거만( 렘48:29) 성경본문 :예레미야 48:29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한 교만 곧 그의 자고와 오만과 자랑과 그 마음의 거만이로다 서 론: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한 교만"이라고 하였으니 교만의 극치(極致)요 절정(絶頂)이라고 하겠다. 즉 그 내용인즉 자고.오만.자긍.거만 등이라고 설명을 하고 있다. 1. 자고(自高) "자고"라고 하면,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것이다. 사람이 높고자 하는 욕망(欲望)이 있을 수는 있으나, 스스로 높고자 하면 오히려 낮아지고, 높이는 일은 남이 높여 주어야 하며,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여주심이 최고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5-11). 바울도 받은 은혜가 더욱 커서 넘어질까 하여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찌르는 가시를 주었다고 하였으니 이는 귀한 축복이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2. 오만(悟慢) 시편 기자는 복 있는 자를 규명하되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자라고 하였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 1:1). 삼상 2:3에는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라고 하였다. 건방진 자세를 가르켜 오만불손(悟漫拂遜)하다고 하니, 겸손하지 않는 모습이다. 시 5:5에는 "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한다"고 하였다. 3. 자긍(自矜) "자긍"이란 스스로 자랑하는 일이다. 자랑도 남이 해 주어야 진실하지 자기가 자가 자랑함은 가장 미련한 소치다. 왕하 25:17-에 보면,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유다 왕 아비샤를 책망권고 하였는데 "네가 에돔 사람을 쳤다 하고 네 마음이 교만하여 자긍하는도다. 네 궁에나 편히 거하라 어찌하여 화를 자취하여 너와 유다가 함께 망하고자 하느냐?"라고 하였으니 교만이 지나쳐 자긍하다가는 자기와 남까지 망치게 되기 쉽다. 4. 거만(拒慢) 잠 1:22에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한다"라고 하였으니 어리석고 미련한 자는 결국 거만한 자들이다. 사 2:12에 보면 "대저 만군의 여화와의 한 날이 모든 교만자와 거만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한다"고 하였으니 교만자, 거만자, 자고자가 동류로 취급된다. 결 론: 결국 이상 네 가지는 교만의 총동원(總動員)이요, 교만의 특성이다. 이는 하나님의 가장 미워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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