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11.18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벧전1:13-23.육신.사르크스.마음-통찰-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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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20.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21.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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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러 주심에 걸맞는 거룩한 생활
13.  ○그러므로 여러분은 마음을 굳게 먹고 정신을 차려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이 받을 그 은혜를 끝까지 기다리십시오.
14.  여러분이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가 되었으니, 전에 알지 못할 때에 가졌던 욕망을 따라 살지 말고,
15.  여러분을 불러 주신 그 거룩한 분을 따라 모든 행실을 거룩하게 하십시오.
16.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17.  ○그리고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을 여러분이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여러분은 나그네로 있을 동안에, 두려운 마음으로 지내십시오.
18.  이제 여러분은 조상으로부터 물려 받은 여러분의 헛된 생활방식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도 알지만, 은이나 금과 같은 썩어질 것으로 되지 않고,
19.  흠이 없고 티가 없는, 어린 양의 피와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되었습니다.
20.  이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예정되고, 이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하여 나타나셨습니다.
21.  여러분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에게 영광을 주셨으니, 여러분의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22.  ○여러분은 진리에 복종함으로써, 영혼을 정결하게 해서, 꾸밈없이 서로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순결한 마음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23.  여러분은 거듭났습니다. 그것은 썩을 씨가 아니라, 썩지 않을 씨, 곧 살아 계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24.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선포된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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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Wherefore gird up the loins of your mind, be sober, and hope to the end for the grace that is to be brought unto you at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14.  As obedient children, not fashioning yourselves according to the former lusts in your ignorance:
15.  But as he which hath called you is holy, so be ye holy in all manner of conversation;
16.  Because it is written, Be ye holy; for I am holy.
17.  And if ye call on the Father, who without respect of persons judgeth according to every man's work, pass the time of your sojourning here in fear:
18.  Forasmuch as ye know that ye were not redeemed with corruptible things, as silver and gold, from your vain conversation received by tradition from your fathers;
19.  But with the precious blood of Christ, as of a lamb without blemish and without spot:
20.  Who verily was foreordained 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but was manifest in these last times for you,
21.  Who by him do believe in God, that raised him up from the dead, and gave him glory; that your faith and hope might be in God.
22.  Seeing ye have purified your souls in obeying the truth through the Spirit unto unfeigned love of the brethren, see that ye love one another with a pure heart fervently:
23.  Being born again, not of corruptible seed, but of incorruptible, by the word of God, which liveth and abideth for ever.
24.  For all flesh is as grass, and all the glory of man as the flower of grass. The grass withereth, and the flower thereof falleth away:
25.  But the word of the Lord endureth for ever. And this is the word which by the gospel is preached unto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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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신과 거룩(벧전 1:13-23)
여기에서 사도 베드로는 전에 서술한 바 있는 존귀한 상태에 있는 그들에게 권유를 시작하고 있다.

이것으로 기독교 신앙은 우리를 현명하게 할 뿐 아니라 더욱 선하게 만드는 믿음에 따르는 거룩의 교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다.
성도들로 하여금 조심하며 거룩하도록 권유하고 있다.
1.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13절)

이 말씀은 이렇게 풀이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매우 존귀하게 되고 구별된 자가 되었으니 너희 마음의 허리띠를 동이라, 여러분들은 가야 할 예정이 있고 달려갈 경주가 있으며, 성취해야 할 전쟁과 행해야 할 크나큰 과업이 있다. 여행자와 경주자, 용사 또는 노동자들이 그들의 길고 늘어진 옷을 여미고 띠를 띰으로 그들의 일에 착수할 준비와 신속성을 기할 수 있는 것같이 여러분들도 여러분의 마음과 내적 인간을 또한 그 안에 자리잡고 있는 애정의 띠를 띠라. 그것들은 한데 묶어 띠를 띄우므로 늘어져 당신들에게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지 않도록 하라. 그들의 낭비를 제지하고 혹은 마음의 강함과 용맹스러움이 당신의 임무를 다하도록 하라. 이로써 당신을 방해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당신을 해방시키라. 그리고 결정적으로 모든 것이 여러분의 주관 하에 들어오도록 하라. 여러분의 영적인 위험과 모든 원수에 대해 조심하며 깨어 있으라. 그리고 먹고, 마시며, 입는 것, 즐기는 것, 사업 그리고 여러분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의사 표시이나 실천하는데 있어서도 근신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며 여러분 자신을 판단하는 데에도 겸손을 지녀야 한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만약 사도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최종의 나타나심에 대한 그들의 소망을 나타내었다면 이것은 마지막 심판에 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합당할 것 같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안에서 혹은 그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혹은 순전히 바랄지어다. 이 은혜는 생명과 영혼을 빛으로 인도하는 복음에 의한 것이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에게 지금 주어질 은혜를 온전히 바라고 의심 없이 믿으라."
(1)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일은 그의 생각과 마음의 올바른 관리에 있다.

사도 베드로의 첫째 지시가 [진리로]마음의 허리를 동이라는 것이다.
(2) 훌륭한 그리스도인은 근신하라는 권유를 받아야 한다.

탁월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그것을 마음에 기억해야 한다. 곧 근신은 감독이나(딤전 3:2) 성숙한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이며(딛 2:2), 젊은 여인들은 조심함으로 교훈을 받고, 젊은 남자들은 조심한 마음을 가지도록 요구된다(딛 2:6).
(3) 그리스도인의 임무는 그가 은혜의 상태에 들어감으로 즉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계속해서 더 많은 은혜를 얻기 위해 바라고 싸워야 한다.

그는 좁은 문으로 들어갔어도 여전히 좁은 길을 걸어야 하며, 그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마음의 허리를 동이어야만 한다.
(4)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철저하고도 온전한 신뢰는 우리들의 의무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우리의 최선의 노력과 바로 일치하고 있다.

곧 "우리는 온전히 바라고 허리를 동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신에게 격려를 받으며 보다 윤기 있게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착수하여야 한다."
2. "순종하는 자식처럼……되라"(14절).

이러한 말들은 하나의 경건한 생활의 규범으로 취급되고 있다.

즉 하나는 적극적인 면에서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하나님의 권속으로 삼으심을 받아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로 지음을 받은 자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며, 한편 소극적인 면에서는 "이전에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의 사욕을 본 삼지 말라"는 권면이다.

또 이 말들은 그들이 지금 순종의 자녀라고 하는 점을 고려하고 동시에 사욕과 무지 가운데 살던 때에 그들이 어떤 존재였는가 하는 것을 숙고함으로써 그들에게 거룩함을 강조하는 논의로 나타나고 있다.
(1) 자녀들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복종과 현재적, 계속적, 그리고 절대적인 순종으로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 해야만 한다.
(2) 가장 훌륭한 하나님의 자녀들도 사욕과 무지의 때를 가지고 있었다.

그 때는 그들의 생활과 처세, 그리고 양식의 모든 계획이 그들의 부당한 욕망과 부도덕한 기호를 만족케 하였던 때이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과 그들 자신을 그리고 그리스도와 복음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3) 거듭난 사람들은 과거의 자기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들은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것과는 다른 양식과 행실의 사람들이다.

그들의 내적 상태와 행위와 그리고 언어와 행실이 그들이 과거에 가지고 있던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4) 죄인들의 사욕과 낭비는 그들의 무지의 열매이며 표증인 것이다.
3.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거룩할 지어다"(15,16절).

여기에 강렬한 논의로써 강요되고 있는 하나의 고상한 규범이 있다. 곧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는 말씀이다.

이에 만족하리 만큼 합당한 자가 누구인가?

그러나 강력한 말로 요청되고 있으며,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주신 은혜와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명령 그리고 그의 모범으로써 비롯된 세 가지 이유로 우리에게 거룩하게 될 것을 강요하고 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1) 죄인을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는 거룩에 대한 능력 있는 약속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와 비극의 상태에서 새로운 언약의 축복을 소유하는 상태로 부르심을 받게 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은총이다.

크나큰 은총은 강렬한 의무를 내포한다. 하나님의 은총은 거룩을 강요할 뿐 아니라 또한 거룩하게 하실 수도 있다.
(2) 온전한 거룩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요구이며 의무가 된다. 여기에 거룩의 두 가지 규범이 있다.
① 거룩함의 범위에 대해서는 전 우주적이어야 한다.

우리들은 거룩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한다.

곧 모든 신앙적인 일들에 있어서 잘 되든지 못 되든지 어떠한 처지와 형편에서든지 거룩해야 하며, 친구들에게나 원수들에게나 누구에게든지 거룩해야 하며, 우리들의 모든 대인 관계와 사업에 있어서 거룩해야만 한다.
② 거룩의 표본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거룩하심같이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일할 수는 없으나 그를 닮아야 한다. 하나님은 온전히 거룩하시고 영원히 거룩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같은 이러한 상태를 갈망해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숙고는 우리가 이를 수 있는 최상의 거룩한 단계에 이루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3)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가장 확실한 규범이 된다.

이 규범에 의하여 우리들은 나날이 거룩에 가까워지게 된다.
(4) 구약의 계명은 신약 시대에 이르러 연구되어지고 또한 지켜야만 한다.

사도 베드로는 모세로 인하여 주어진 계명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거룩을 요구하고 있다.
4.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두려움으로 지내라"(17절).

이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그들의 거룩하신 아버지라고 불렀는지에 대해 어떠한 의심을 여기에서 표시한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사도 베드로는 "그들이 나그네로 있을 때 두려움 가운데서 지내라"고 그들에게 말하고 있다.

이는 "만약 위대하신 하나님을 여러분들이 아버지와 심판자로 인정한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여러분들의 나그네된 때를 살아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1) 모든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들을 나그네나 행인으로 보며 그들이 머물러 있던 곳에서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며 지내는 나라의 나그네처럼 생각한다(시 39:12; 히 11:13).
(2) 우리들이 땅에 머물러 있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지내야 한다.
(3) 하나님을 심판자로 생각하는 것은 그를 아버지라고 진실히 부르는 자에게는 부적합한 말이 아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경건히 신뢰하는 것과 심판자로서 그를 두려워하는 것과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나님을 심판자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 된다.
(4)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한다. 오로지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신다."

인간의 외적인 관계는 그가 맡은 심판을 막아 주지 못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 또는 아브라함을 그들의 조상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또한 외적인 판단으로 그들을 칭찬하시지 않으신다.

다만 각 사람의 행위대로 그들을 판단하신다. 인간들의 일은 마지막 날에 각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그들의 행위를 보시고 누가 그의 자녀인가를 만방에 나타내실 것이다.

우리들은 믿고 거룩하고 순종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우리들의 행위는 우리가 우리의 임무를 수행했는지 아니했는지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이 될 것이다.
5. 이런 관점에서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권고한 사도 베드로는 18절에서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라는 두 번째 논란을 첨가하고 있다.

여기에서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이러한 것들을 상기케 했다.
(1) 그들은 아버지께 속죄물을 드림으로 구원을 얻었다.
(2) 그들의 구속함을 위해 드리어진 대가는 "은과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다."
(3) 이러면 그들이 무엇으로부터 구속함을 받았는가? 그들은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로부터" 구속함을 얻은 것이다.
(4) 그들은 이 사실을 알았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 놀라운 사실에 대해 모르는 척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① 우리들의 구원에 대한 숙고는 거룩함에 대한 영구적이며 힘있는 동기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되어야만 한다.
② 그리스도인은 그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 합당하게 살 수 있기를 하나님은 기대하신다.

그러므로 시편 39편 4절의 말씀대로 우리들이 이미 알고 있는 바를 마음에 간직하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을 알 수 있다.
③ 은이나 금이나 이 세상에 없어질 그 어느 것으로는 한 사람의 영혼도 구속할 수 없다.

그들은 때로 인간을 구원하는 일에 뱀이 되며 시험과 방해가 되기 일쑤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구원을 할 수도 없고 얻을 수도 없다.

그들은 없어질 것들이므로 썩지 않는 영원한 영혼을 구원할 수 없다.
④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인간 구원의 유일한 대가가 된다.

인간의 구원은 실제적인 것이지 결코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대가로 팔리었고 그 대가는 우리들이 얻은 바와 동일한 것이다.

곧 이것이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다.

이 피는 무죄한 사람의 피요, 어린 양으로 나타난 흠이 없고 점도 없는 양의 피며,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무한성을 지닌 사람의 피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피라고 일컬어진다(행 20:28).
⑤ 그리스도께서 그의 가장 보배로운 피를 흘리신 계획은 우리를 이후의 영원한 비참한 상태에서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망령된 행실에서부터 구속하시기 위함이었다. 공허하고 경박하며 사소한 행실은 망령되며 하나님의 영광에 무용지물이 되며, 그것은 종교의 공적이며 불신자의 신념이며, 인간 스스로가 지닌 양심의 위로와 만족을 주는 것이다.

드러난 악의 요소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행실이 공허하며 무익함은 가장 위험한 것이다.
⑥ 인간의 행실은 현실적인 표현을 지닐 수도 있으며 때로는 자기의 행실을 방어하기 위하여 고전적 유풍이나 관습, 또는 전통을 구실삼아 변명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가장 망령된 행실일지도 모른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형식 존중으로 인해 이점에 대해 할 말이 많을 것이나,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망령된 것이요,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이 그들을 행실 주의에서 구원해 낼 수 있다.

고전적인 유풍은 진실에 대한 확실성 있는 규범은 될 수 없으며 동시에 현명한 결론은 될 수 없다.

"내 조상들이 그렇게 살다가 죽었으니 나도 그런 방법으로 살다가 죽으리라"는 식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6. 구속의 대가를 언급한 후 사도 베드로는 구속자와 구속을 받은 자 양자간에 관계된 바를 계속 언급하고 있다(둘째,21절).
(1) 구속자는 흠이 없는 양으로서만이 아니라 아래와 같은 자로 좀 더 서술되고 있다.
①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된 자" 곧 미리 알려졌거나 예지된 분이었다는 의미다.

하나님에 대해서 예지가 언급되어질 경우 그것은 밝은 전망 혹은 추리 이상의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도행전 2장 23절에 나타난 바 의지적 행위, 이루어질 사건의 결단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그의 아들이 인간을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아실 뿐만 아니라 결정하시고 선포도 하셨다.

이 선포는 창세 전부터 이루어진 바다. 시간과 세계는 함께 시작되었다.

시간이 시작되기 이전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단지 영원만이 존재하였다.
② 이는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가 되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이미 정하신 바 구속자로 증거되고 나타났다.

그는 그의 탄생과 아버지의 증거와 그 자신의 역사, 특별히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증거 되었다(롬 1:4).

"이 일은 너희들, 유대인인 너희들, 죄인된 너희들, 괴롬당한 너희들을 위하여 신약과 복음의 마지막 때에 행해졌다. 너희가 그를 믿기만 하면 그리스도의 증거와 계시로부터 오는 위로를 받게 된다."
③ 그는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였다.

아버지는 그의 아들에게 영광을 허락한 것이다.

능력의 행위로 생각되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부, 성자, 성신, 삼위 모두에게는 일반적인 사실이었으나 심판의 행위로써의 부활은 특별히 성부에게 관련된 것이다.

심판자가 되시는 아버지는 그리스도에게 실시한 그의 심판으로 무덤에서 그를 일으키시고 그에게 영광을 주시며 죽음 가운데서 다시 부활하심으로 그의 아들 되심을 만방에 선포하셨다.

그리고 하늘로 올리워 그에게 존귀와 영광의 면류관을 씌우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시었고 만세 전부터 하나님과 더불어 가지고 있었던 영광을 그에게 허락하셨다.
(2)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 대해서 여기에서 역시 그들의 믿음과 소망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믿음과 소망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곧 "너희가 창조자와 권고자가 되시며 보조자가 되시며 너희 믿음의 완성자가 되시는 그로(예수) 인해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너희의 믿음과 소망의 중보자 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와 화목케 되신 하나님 안에 지금 있게 되었다."
(3) 이런 점으로 보아서 우리는 아래와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① 그리스도를 중보자로서 보내신 하나님의 섭리는 영원전부터 있었으며, 의롭고 자비스러운 섭리였는데, 이 섭리는 사도행전 2장 23절에 나타난 대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인간의 죄를 결코 묵과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이러한 은혜를 나타내기 오래 전부터 그의 백성들에게 특별한 은총의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② 말세에 나타날 기쁨은 옛 세대가 즐기던 기쁨과 비교할 때 그것은 굉장한 것이다.

빛의 선명함, 믿음의 유지, 법령의 효력, 그리고 위안의 정도 등이 일찌기부터 있었던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현현 이후로 더욱 대단한 것이 되었다. 우리의 감사와 봉사는 그러한 은혜에 합당한 것이 되어야 한다.
③ 그리스도의 구속은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으며 오직 진실한 신자에게만 속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탄원은 일부 사람에 의해서 주장되었다. 또 다른 일부층의 사람들에 의해서는 부인되고 있다.

그 어느 누구도 모든 것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일반적인 적용을 주장할 수 없다.

위선자들과 배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멸망을 다할 것이다.
④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절대적인 대상이 된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이에 따른 영광이 이를 크게 뒷받침해 주고 있다.
Ⅱ.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형제애를 권장하고 있다.
1. 사도 베드로는 그들이 성령을 통하여 진리에 순종할 때 그 복음이 이미 그들의 영혼을 깨끗케 하리만큼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생각한다.

더욱이 그 복음은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도록 했다.

그 다음 사도 베드로는 좀더 높은 사랑의 차원을 향하여 순전한 마음으로 피차 뜨겁게 사랑하자고 말하고 있다(22절).
(1)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그의 영혼을 깨끗케 해야 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도 베드로는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라는 말씀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그 영혼을 더럽게 하는 어떤 굉장한 부정과 불결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 불결이 제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율법 아래서의 레위인들의 정결케 함이나 그 밖의 사람들의 위선적인 정결도 이 일을 해낼 수 없다.
(2) 하나님의 말씀은 죄인을 정결케 하는데 큰 교훈이 된다.

즉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케 하여"라고 하신 말씀으로도 알 수 있다.

복음은 위험과 실수와 그림자 또는 과오에 반대되는 진리. 절대유일무이의 참진리라고 일컬어진다.

진리에 순종을 한다면 이 진리는 영혼을 깨끗케 하는데 효과적이다(요 17:17).

많은 사람들이 진리에 귀를 기울이나 그 진리로 인해 깨끗함을 입지 못한다. 이는 그들이 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거나(않거나) 그것에 순종하지 못하기(않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영은 인간의 영을 깨끗케 하는데 크나큰 동기가 되신다.

성령은 영혼의 불결함을 확신시키며 믿음과(행 15:9) 소망과(요일 3:3) 하나님을 두려워함(시 34:9)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아름답고 정결한 미덕과 은혜를 제공한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노력을 고무하며 또한 성공토록 하신다. 성령의 도우심은 우리들의 노력을 폐하시지 않는다.

이 사람들은 그들의 영혼을 정결케 하나 그러나 그것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4) 그리스도인들의 영혼은 그들이 거짓 없이 피차 사랑할 수 있기 전에 정결함을 입어야 한다.

인간의 본성 안에는 사욕과 불공평함이 깃들이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우리가 꼭 행해야 할 피차간 사랑하는 일도 할 수 없다.

깨끗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외에는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5) 피차간 진지하고도 뜨겁게 사랑하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이다.

우리들의 피차간의 사랑은 진실하고도 실제적이어야 하며 뜨겁고 지속적이며 광범위한 것이어야 한다.
2.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의 영적인 관계를 숙고함으로 순전한 마음으로 더욱 뜨겁게 서로 사랑할 의무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음을 강조한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라"는 말로 이것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몇 가지 배울 바가 있다.
(1)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거듭나야 한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은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는 것임을 말한다.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새롭고도 가까운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그들이 거듭남으로 형제가 된다.
(2) 야고보서 1장 18절의 나타난 바 하나님의 말씀은 중생에 유일한 수단이 된다. 중생의 은총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다.
(3) 이 새로운 두 번째의 탄생은 첫 번째의 탄생보다 더 바람직하고 놀라운 것이다.

썩어질 씨에다 썩지 아니할 씨를 비교하며 이 사실을 사도 베드로는 가르치고 있다.

전자의 것으로 우리는 사람의 자녀들이 되며 후자의 것으로 자존자의 아들과 딸들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비유하는 그 씨는 외모로 볼 때는 비록 적은 것이나 작용의 힘은 놀라운 것이며, 얼마 동안은 감추어져 있으나 그것이 자라 종국에는 놀라운 열매를 맺게 됨을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이다.
(4) 거듭난 사람들은 피차 순전한 마음으로 사랑해야 한다. 태어날 때부터 형제들은 사랑으로 피차 매이게 된다.

그러나 영적인 관계가 이루어진 곳에는 그 의무는 배로 증가된다.

그들은 동일한 통치하에 있는 것이며, 동일한 특권을 나누며, 동일한 관심을 가진 자들이다.
(5)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살아 남아 있다. 이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히 4:12).

이 말씀은 생명으로 시작되고 생명 안에 보전되어 있는 말씀으로, 임무 수행에 있어서 우리를 생기있게 하고 힘있게 하는 영적 생활의 수단이다. 그 말씀은 영원한 진리로 존속하여 중생한 사람들의 심령에 세세토록 살아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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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제 1장

=====1: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 -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는 베드로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다. 

이 호칭은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전파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보냄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으로 사도로서의 베드로 자신의 권위와 존엄을 나타낸다(마 16:18,19; 막 3:16; 요 1:42; 21:15-19, Blum, Stibbs).

한편 '베드로'는 아람어에서 '바위'를 의미하는 '케파'(* )를 헬라어로 명명한 별명이다. 베드로의 히브리 이름은 '시므온'이었을 것이며 헬라어로는 '시몬'이었다(행 15:14; 벧후 1:1).

@본도, 같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 본문에 언급된 다섯 지역은 모두 소아시아에 위치해 있었으며 현재는 터어키 타우루스 산맥(Taurus Mountains)의 북쪽에 해당하는 로마 지역이다. 당시 소아시아에는 보다 많은 지역에 그리스도인이 거주하였음에도 불구하고(행 16:6-8) 본서에서 다섯 지역만 언급되었으며 '본도'와 '비두니아'가 동일 지역에 대한 이름임에도 불구하고 두번 언급된 것에 대해 혹자는 이 편지를 소지한 실루아노(5:12)가 심방한 지역이었다고 주장한다(Hort, Robertson). 즉 이 견해에 따르면 실루아노가 배를 타고 흑해를 지나 본도에 입성하여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를 거쳐 비두니아를 통과해 로마로 항해해 갔기 때문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지명이 각기 따로 언급되었으며 본서 수신자들이 사는 지역도 이 다섯 곳만 언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단지 추정에 불과하며 본문에 특별히 다른 언급이 없으므로 단정하기 어렵다(Michaels). 한편 '흩어진 나그네'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레피데모이스 디아스포라스'(*)에는 관사가 없어 정확히 누구를 지칭하는지 불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아스포라'는 '팔레스틴을 떠나 사방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을 의미하며 '파레피데모이'는 '어떤 지역에 머무르는 사람들'을 의미하였기 때문에 당시 네로 황제(A.D.54-68)의 박해를 피해 소아시아에 흩어져 살던 그리스도인은 자신들을 가리키는 말임을 인식하였을 것이다(Stibbs). 또한 '나그네'라는 표현은 수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다니는 입장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안식처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 나라임을 인식하고 순례하는 자임을 암시한다(Blum).

=====1:2

본절에서 베드로는 앞절에 '흩어진 나그네'로 지칭된 수신자들을 삼위 일체적인 신앙과 사역에 입각하여 묘사하고 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택하심을 입은 자들 - '택하심을 입은 자들'(* , 에클레크토이스)은 개역성경에는 본절에 나타나나 헬라어본문에는 1절에서 나타난다. 

'에클레크토이스'는 1절의 '파레피데모이스'(*, '나그네들')와 대비된다.'에클레크토이스'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묘사하는 반면 '파레피데모이스'는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성을 나타내며, '에클레크토이스'가 하나님 앞에서 특권을 소유한 그룹인 반면 '파레피데모이스'는 세상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그룹을 나타낸다(Michaels). 이러한 '에클레크토이스'는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칭하는 칭호였으나(대상 16:13; 시 105:6; 사 65:9,15)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하는 집합적인 칭호이다(2:9; 5:13). 한편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은 하나님의 목적, 선택, 부르심, 섭리와 연관된 것으로 단순히 하나님께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아신다는 의미 이상으로 개인과의 특별한 관계를 시사한다(1:20; 암 3:2; 행 2:23; 롬 8:29,30; 11:2, Cranfield, Stibbs). 이 특별한 관계는 하나님의 선택하심과 자기 백성을 통치하시는 섭리를 가리킨다(Blum).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 '거룩하게 하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아스모'(*)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연관된 것으로(살전4:7) 한편으로는 부르심 그 자체와 동일한 실제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을 의미하여 구별됨을 시사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부르심에 합당하도록 즉 인간의 책임을 의미한다(롬 6:19,22; 살전4:3,4; 딤전 2:15, Michaels). 구속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에 의해 거룩한 삶 즉 성화의 삶을 살게된다(Cranfield).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에이스 휘파코엔 카이 란티스몬 하이마토스 예수 크리스투). '휘파코엔'(*, '순종함')과 '란티스몬'(* , '피뿌림')이 비록한 전치사'에이스'(* , '위하여')와 연결되어 있다 할지라도 '예수 크리스투'(*, '예수 그리스도의')는 '란티스몬'에만 연결된다(Michaels).

본절에서 '휘파코엔'에 대해 혹자는 하나님의 선택의 목적인 하나님에 대한 순종으로 해석하며(Blum, Cranfield, Stibbs) 혹자는 믿음의 순종(롬 1:5; 16:26) 즉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해석한다(Michaels, 22절). 이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복음을 순종함으로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봉사와 순종이 뒤따라야하며 그것을 통해 성장해 간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은 구약 시대의 제사 의식을 암시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피는 새 언약의 매개체로서(출 24:3-8; 히 9:18-21) 이 피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구속함을 받았으며 하나님 앞에 담대하고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히 10:19-22).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 유대인의 전통적인 인사법으로 목회서신을 제외한 바울의 다른 서신에도 똑같이 기술되고 있다. 그러나 바울 서신과 베드로 서신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1) 문법상 바울의 인사는 '소원에 따른 간구'형식으로 표현된 반면(롬 1:7; 고전 1:3; 고후 1:2) 베드로의 인사는 '부정과거 수동태 회구' 형식으로 표현되었다(벧후 1:2). (2) 내용상 바울은 그리스도인 전체에 대해 목자적 심정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임하기를 간구하나 베드로는 그리스도인 각자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체험하도록 간구하고 잇다(Michaels).

=====1:3

@찬송하로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율로게토스'(* )는 동사 '율로게오'(* )에서 변화된 형용사이다. 문법적으로 본문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술어 동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스토'(* , '하게 하다')나 '에스틴'(* , '...이다') 혹은 '에이에'(* , '...지어다')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내려온 유대인의 송영에서는 찬양의 대상이 하나님일 경우 술어 동사를 사용하지 않고 표현하였다. 베드로는 아마도 이러한 전통을 따라 표현한 듯하다 (Robertson).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데오스 카이 파테르 투 퀴리우 헤몬 예수 크리스투'(*)에서 '퀴리우'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결되어 있다. '주'는 승귀된 그리스도에게 부여된 칭호로서 초대 고회의 신앙 고백이었다(롬 10:19; 고전 12:3; 고후 4:5; 빌 2:11, Cranfield). 성부 하나님은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배하시는 대상이며,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이시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Michaels). 

한편 '그 많으신 긍휼대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구원하시고 아버지가 되시는 근원을 시사한다. 그 근원은 '하나님의 긍휼'이다. '긍휼'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어 구원을 얻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이 되게 하는 근본적인 요인이다. 이것은 '은혜'(*, 카리스)와 등일한 의미로 사용되나 '은혜'가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나타내는 반면에 '긍휼'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자 하는 동기를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구원하신 것은 자신의 풍성하신 긍휼을 따라 은혜로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할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 '예수 그리스도의...부활하심으로'의 헬라어 '디 아나스타세오스 예수 크리스투'(*)에서 '예수 크리스투'의 속격은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1) 주격 소유격으로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를 의미한다. (2) 목적격 소유격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를 일으키셨다'를 의미한다. 이 두가지 의미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절 전체가 하나님이 주체로 언급되기 때문이다(Michaels). 

'아나스타세오스'는 '산 소망'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거듭나게 하사'와 연관된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한편 '거듭나게 하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겐네사스'(* )는 동사 '아나겐나오'(* )의 부정과거 능동태 분사로 거듭남의 사건이 과거의 역사적인 사실임과 동시에 현재에도 구체적인 사실로 중명됨을 시사한다. 신약성경에서는 '거듭난다'에 해당하는 헬라어에 대해 일반적으로 '팔링게네시아'(* )를 사용한다. 그런데 본절에서 '팔링게네시아'가 아니라 '아나겐네사스'를 사용하였다. 그 이유에 대해 혹자는 베드로가 기독교의 구원에 대한 이해보다는 이교의 영향을 받아 이 단어를 사용했다고 주장한다(Bigg). 왜냐하면 당시 신비주의나 스토아 학파에서는 '깨달아 거듭난 삶'을 아는자를 '아나겐네사스'란 단어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가 이 같은 이유로 '아나겐네사스'를 사용했다기보다는 본서에 강하게 비쳐지는 예수의 가르침을 그대로 옮기려 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Michaels).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거듭나다'를 '겐네데 아노덴'(* )으로 표현하셨으며(요3:3) 이것은 '아나겐나오'와 같은 어원에서 나왔기 때문이다.'겐네데 아노덴'에서 '아노덴'이 '다시'(again)라는 의미로 사용되든 '위로부터'(from above)라는 의미로 사용되든 모두 '아나겐나오'와 같은 의미가 된다. 따라서 베드로는 본서에서 예수께서 이미 사용하신 단어를 다시 사용하므로 예수의 가르침을 그대로 옮기고 있다.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여 강조하고자 했던 거듭남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요 3:3-8). 그리스도인들은 거듭남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소유하신 생명과 같은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 (Stibbs).

@산 소망이 있게하시며 - '산 소망'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된 결과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안에서 거듭나는 새 생명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의 특징으로 4절의 '기업'이나 5절의 '구원'을 가리킨다(Michaels). 이 '산 소망'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이미 마련한 것이다(Blum).

=====1: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 '기업'에 해당하는 헬라어 '클레로노미안'(* )에 대해 혹자는 구약성경에서는 '거룩하게 구별된 소유물'을 의미하며 신약성경에서는 '현재에 이미 누리는 소유물'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ort). 

그러나 '클레로노미안'이 신약성경에서 사용된 용례를 정리해 보면 대략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1) 하나님 나라(마 25:34; 엡 5:5). (2) 영생(마 19:29; 막 10:17; 눅 10:25). (3) 구원(히 1:14). (4) 약속(히 6:12). (5) 축복(3:9). 이러한 기업은 '산 소망'과 연결된 것으로(3절) 거듭난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Michaels, Blum). 

따라서 본절의 '기업'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자녀와 상속자로서 현재에 누리는 것이 아니라(롬 8:18; 갈 4:7) 미래에 주어질 것을 가리키며 이때 성령은 미래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질 기업의 보증이 되신다(롬8:11,18-23; 엡 1:14, Michaels). 한편 베드로는 이러한 기업의 온전함에 대해 부정접두어 '아'(* )로 시작하는 세 단어, 즉 '아프다르톤'(* , '썩지않고'), '아미안톤'(* , '더럽지 않고'), '아마란톤'(*, '쇠하지 아니하는')을 사용하여 설명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미래에 완전히 소유하게 될 '기업'이 지상의 것과는 달리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임을 시사한다(Lenski, Robertson).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 '하늘에'는 복음서에서 '하늘 나라'와 연관될 뿐만 아니라 예수의 특정한 말씀, 즉 마 5:12; 6:19,20; 눅 12:33과 연결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질 기업이 영원할 뿐만 아니라 전혀 손상되지 않으며 모든 위험으로부터 안전함을 시사한다(Lenski,Robertson). 한편 '간직하신 것이라'의 헬라어 '테테레메넨'(* )은 완료시상으로 이미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기업을 마련해 두셨음을 시사한다(Blum).

=====1: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 '말세에'는 그리스도인의 구원이 온전하게 성취되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 곧 파루시아를 가리킨다(롬8:18-25; 빌 3:20,21; 골 3:4; 요일 3:2). 파루시아 때 성취되는 '구원'은 앞서 언급된 '산 소망'(3절), '기업'(4절)과 연관된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얻어 향유하고 있는 구원의 실현 혹은 종말론적 차원의 완성을 의미한다 (Stibbs, Blum)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 '보호하심을 입었나니'의 헬라어 '프루루메누스'(* )는 '프루레오'(*)의 수동태 분사 현재로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계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프루루메누스'는 본래 군사 용어로서 순례자로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을 공격하는 사단을 막아주며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나타낸다(Stibbs, Leighton). 

종말에 하나님의 기업을 상속할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완성 때까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받는다. 그러나 비록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다 할지라도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므로 믿음 안에 거하여야 하며, 그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종말론적 구원의 완성을 누릴수 있게 된다(Michaels, Stibbs).

=====1: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 '시험'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라스모이스'(* )는 외부에서 다가오는 시험으로 상위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거쳐야하는 시련(test)을 의미한다(약 1:2, Bigg, Michaels). 그런데 베드로가 언급한 '여러 가지 시험'이 어떤 특정한 역사적 사실을 암시하는가에 대하여 혹자는 '포이킬로이스'(* , '여러 가지')가 고전 헬라어에는 나타나지 않고 마카비 시대와 신약 시대에만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마카비 시대에 일어났던 고난이나 신약시대의 예루살렘 멸망(A.D.70)을 예고한 듯하다고 주장한다(Selwyn, Hort). 그러나 이러한 추측이 정확한 지는 분명하지 않다(Michaels).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 개역성경에는 '엔 호'( , '이 가운데')가 생략되어 있다. '앤 호'는 '말세'를 가리키는 것으로(5절, Michaels, Blum) 종말론적 구원의 완성을 암시한다. 비록 현재에 고난을 당하여 근심에 빠진다 할지라도 그러한 고난은 '잠시 동안만' 있을 것이며 그 후 종말론적 구원이 완성되는 파루시아 때에는 현재 당하는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과 기업이 기다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산 소망 가운데 기뻐할 수 있게 된다.

=====1:7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 본절은 약 1:3과 유사하여 혹자는 베드로가 야고보서를 참조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Robertson). 그러나 야고보와 베드로의 표현에는 차이가 있기에 참조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 차이점은 두 가지이다. (1) 야고보서에는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배우는 '수단'으로 언급되는 반면 본문에서는 금보다 더 귀한 가치를 지닌 '목적'으로 취급되고 있다. (2)야고보서에는 믿음의 시련이 온전한 신앙에서 요구되는 한 요소에 불과하지만 본문에서 믿음의 시련은 신앙의 최고 요소로 취급되고 있다. 베드로는 본절에서 앞서 언급된 차이점과 같은 자신의 의도를 강조하기 위해 '히나'(* )로 인도되는 목적절로 믿음의 시련을 수식하고 있다(Michaels). 베드로가 시련을 통한 믿음과 금을 비교하여 강조하는 바는 (1) 참된 믿음은 변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는 사실과 (2) 금이 불로 연단받듯이 믿음도 시련을 통해 연단받는다는 사실이다. 베드로는 이러한 강조점을 통해 고난당하는 수신자들을 위로하고 있다(Bigg, Leighton, Michaels).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 금이 불에 의해 제련되어 순수해지듯이 그리스도인 역시 시련을 통해 참되고 순수한 신앙을 소유하게 된다. 이 참된 신앙이 온진히 밝혀지는 날 곧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순수하고 참된 신앙을 소유한 자는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된다. '칭찬과 영광과 존귀'는 종말론적 보상 혹은 상급으로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기다리는 온전한 '구원'의 모든 것을 나타낸다(롬 2:7,10; 빌 1:11; 히 2:7,9, Michaels).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네 - '보지 못하였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크 이돈테스'(* )는 문법적으로 맞지 않다. 왜냐하면 '이돈테스'는 '호라오'(* , '보다')의 제2부정 과거 능동태 분사로서 분사의 부정으로는 '메'(* )를 써야 함에도 불구하고 본절에서는 '우크'가 쓰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양보적'인 의미보다 '사실적'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Robertson). 즉 본문은 '비록 너희가 예수를 보지 못하였으나'가 아니라 '너희 가운데 아무도 예수를 보지 못했다'라는 의미로 '사실성'을 강조한다. (2) 혹자는 베드로 자신이 예수를 친히 목격했음을 수신자들과 비교해 강조했다고 주장한다(Selwyn). (3) 혹자는 베드로를 포함해 수신자 전체가 현재 계시하시는 예수를 보지 못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표현이라고 주장한다(Michaels). 즉 본절에서 베드로는 예수를 보지 못하나 믿고 있는 수신자들을 칭찬하려고 했다. 세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수진자들이 비록 예수를 보지 못하나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장차 종말론적 보상으로 주어질 영광과 존귀와 칭찬을 현재 볼 수 없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바라보며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한다.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 '받음이라'의 헬라어 '코미조메노이'(*)는 '코미조'(* )의 현재 중간태 분사로 구원이 지금도 실현 과정에 있음을 강조한다. 참된 믿음의 결과인 미래에 주어질 종말론적 보상은 영원하며 온전한 구원이기 때문에 현재 믿음을 소유한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주어질 상급을 소유하고 누리는 것과 동일하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온전히 완성되는 구원은 미래에 속해 있다(Stibbs, Blum). 한편 베드로는 이러한 구원에 대해 '영혼의 구원'(* , 소테리안 프쉬콘)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때문에 베드로가 '영'과 '육'을 구별하는 헬라어 이분법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 쉬우나(Dihle)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영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쉬콘'은 히브리적 이해 속에서 '자아'나 '인격' 전체를 지칭하기 때문이다(2:25; 4:19, Dautzenberg, Selwyn). 비록 베드로가 '프쉬콘'을 신체적 생명으로 생각하였을지라도 그것은 육체적 죽음을 초월하는 생명이다(Michaels).

=====1: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 본절에서 불특징인으로 나타나는 '선지자들'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베드로 당시에 활동하던 선지자들이라고 주장한다(Selwyn). 이 견해는 본서를 읽는 수신자들이 선지자에 대해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베드로가 불특정으로 썼다고 추측한다. (2) 혹자는 구약성경 전체에 나타나는 선지자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ichaels, Blum, Cranfield). 

이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전자의 견해는 본절과 12절 이하에서 선지자들이 예언하므로 유익함을 얻은 자들은 선지자들 자신이 아니라 수신자들을 포함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간파하였으며 신약 시대의 선지자를 포함할 경우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알았기에 그것을 재삼 강조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직접 목격하지 못한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을 가리킨다.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은 메시야의 때에 대해서 간절히 알기를 원했으며 그것을 알기 위해 말씀을 연구하였다(눅 10:24).

=====1: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상고하니라 - '그리스도의 영'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선재(先在)하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Windisch, Lenski). (2) 혹자는 성령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ichaels, Selwyn).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영'은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영' 혹은 '주의 영' 혹은 '성령'과 상호 교환으로 사용되고 있으며(행 1:16; 2:33; 벧후 1:21)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기 때문이다(12절; 요 15:26, Stibbs). 성령께서 예언자들로 하여금 메시야의 때와 그가 받으실 고난과 영광에 대해 예언하게 하였다(삼하 23:2; 눅 24:26).

=====1: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 예언자들이 간절히 알기를 원하며 열심히 상고하고 예언한 것은 예언의 내용 곧 메시야의 때에 대해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기에 예언자 자신과 당대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이었다(롬 4:23,24; 15:4; 고전9:9,10;10:11, Blum, Stibbs, Michaels).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 '보내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스탈렌티'(* )는 수동태 분사로 성령께서 보내심을 받았음을 나타낸다. '성령을 보낸 자'에 대해서 신약성경은 '하나님 아버지'(요 14:16,26; 갈 4:6)라고 나타내기도 하며 '예수 그리스도'(요 15:26; 16:7; 행 2:33)로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성령'을 보낸 자에 대해서 특정한 자로 정하기는 어렵다(Michaels). 

한편 앞서 언급된 예언자들이 메시야의 고난과 영광을 예언하여 전한 것을(11절) 본절에서는 '복음'과 동일시하고 있다.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이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라 말씀을 상고하여 메시야의 고난과 영광을 예언하였던 바와 같이 신약 시대에 복음을 전하는 자들도 성령을 힘입어 메시야의 고난과 영광 즉 복음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였다.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 '살펴보기를'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큅사이'(* )는 '자세히 주의하여 보다'라는 의미로 잘 보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는 것을 나타낸다. 천사들은 본래 하나님의 계획을 전달하는 존재이기에 인간보다 훨씬 더 깊은 뜻을 알 수 있지만 구원의 계획은 너무도 오묘하여서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실현되어 하나님의 계획이 공개되고 선포될 때에야 비로소 깨닫는다. 그들은 예수의 초기 지상 생활을 지켜보았으며(딤전 3:16) 구속이 완성될 때에는 찬양으로 기뻐할 것이다(계 5:11-14, Blum). 

한편 베드로는 10-12절의 논의를 통해 복음의 전달 과정을 세 단계로 기술하고 있다. (1) 선지자(10절). (2) 복음전파자(12절). (3) 천사들(12절). 이러한 전달과정을 거쳐 실현된 하나님의 오묘하신 구속 계획은 신실하게 성취되어 왔다(Lenski,Cranfield).

=====1: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 '동이고'의 헬라어 '아나조사메노이(*)는 '급한일을 당할 때 취하는 태도'(출 12:11)로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게으른 삶을 반성하고 목표로 매진하는 자세'를 가리킨다(Lenski). 

예수께서도 이 단어를 사용하여 종이 취해야 할 바른 자세(눅 12:35)를 말씀하셨는데 베드로가 동일하게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온전한 구원의 성취를 소망하는 가운데 긴장된 자세로 인내하며 주님을 기다리도록 권면하기 위함이다(Michaels).

@근신하여...온전히 바랄지어다(*, 네폰테스 텔레이오스 엘피사테) - 본문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헬라어 문법에서 부사가 '오스'(* )로 끝나면 앞에 있는 날말을 수식한다는 점에 근거하여 '텔레이오스'가 앞에 있는 '네폰테스'를 수식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온전히 근신하여'로 해석한다(Michaels, Bigg). 이 경우 '온전히 근신하여'는 '인내'를 강조한다. (2) 혹자는 일반적인 헬라어 문법으로 따질 때 동사 앞에 있는 부사가 동사를 수식하는 것으로 이해하여 '온전히 바랄지어다'라고 번역하며 '소망'을 강조하는 것으로 본다(Selwyn, Lenski). 이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가져다 줄 은혜를 소망하면서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마음을 가다듬고 언어나 행동에 있어서 조심하며 인내 가운데 살아야 한다(Blum, Stibbs).

=====1: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스 테크나 휘파코에스'(*)는 전형적인 셈어적 표현이다(막 2:19; 눅 10:6).

특별히 셈족 언어에서 '자녀'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상속자'라는 뜻으로 자녀는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을 권리를 지닌다. (2) '부모의 인격이나 성품을 함께 나눈다'는 의미이다. 이 의미일 경우 누구의 자녀이냐에 따라 자녀의 인격이 결정된다(Selwyn). 이러한 언어적 배경 속에서 베드로는 수신자들을 향해 '불순종의 자녀'(엡 2:2)가 아니라 '순종의 자녀'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통해서(롬 1:5; 16:26) 복음을 받아들이며 순종하는 마음을 보이고 또한 하나님의 상속자이며 자녀가 되어서 아버지에게 순종하며 그 성품을 배워가기 때문이다 (Michaels).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 '알지 못할때'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테 아그노이아(* )에서 '아그노이아'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들이 누구인가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이방인'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Cranfield, Selwyn). 왜냐하면 헬라어 단어 자체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을 의미하며 바울도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의 무지에 대해 여러 번 언급했기 때문이다(행 17:30; 엡 4:18). (2) 혹자는 '유대인'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ichaels, Bigg). 왜냐하면 베드로에게 있어서 '아그노이아'는 십자가의 도를 모르는 것에 해당하기 때문이다(행 3:14-17).

이러한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즉, 이는 이방인이었든 유대인이었든간에 진정한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떠나 영적으로 죽은 상태를 나타낸다(Stibbs). 이러한 자는 사욕 즉 자연적인 충동에 사로 잡혀(Michaels, Stibbs) 충동대로 방종한 삶을 산다. 그러나 영적 생명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의 삶 즉 욕망에 사로잡힌 삶을 버려야만 한다.

=====1: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 '거룩한 자'는 70인역에서 하나님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칭호로서 '거룩한 자' 혹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 나타난다(LXX 시 70:22; 77:41; 88:19; 사 1:4; 5:16; 12:6;17:7; 29:23; 30:12,15; 31:1; 41:20; 45:11; 55:5). 이것은 하나님의 정결함과 도덕적인 완전함을 시사한다(Blum). 이러한 하나님께서 수신자들을 과거에 처했던 어둠에서 광명한 빛으로 부르셨으며 하나님을 닮아 거룩한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2:9;5:10). '되라'의 헬라어 '게네데테'(* )는 '기노마이'(*, '되다')의 단순 과거 수동태 명령형이다. 그러나 고전 헬라어에서 '기노마이'의 수동태 명령형 '되다'(become)의 의미보다 '이다'(be)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거룩한 자가 되라'는 명령의 의미보다 '거룩한 존재이니 거룩함을 나타내라'라는 의미이다(2:9).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닮아야 하는 존재로서 하나님의 성품을 세상에 드러내야 한다. 한편 '행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스트로페'(*)는 본서에서 '선한 행실'(2:12), '선한 양심'(3:16), '정결한 행위'(3:2)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이것은 '거룩'이 하나님께로의 분리를 의미하나 일상적인 삶의 행동과 연관된 것으로서 세상에서 윤리를 실행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Blum, Michaels).

=====1: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 여기서 '기록하였되'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그라프타이(* )는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 사용되는 전형적인 표현이다. 베드로가 인용한 본문은 레위기에 기록된 말씀으로(레 11:44; 19:2; 20:26)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하게 살도록 요청받은 말씀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하게 살도록 요청받은 이유는 거룩한 하나님께서 당신을 닮아가도록 그들을 부르셨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구약성경의 이 말씀을 언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대로 요청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복음 안에 산다 할지라도 율법과 무관하지 않으며 오히려 율법을 완성한 사랑의 원리를 따라 윤리적 삶을 영위해야 한다(Lenski, Stibbs).

=====1: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 '외모로 보시지 않고'의 헬라어 '아프로소폴렘프토스'(*)는 '얼굴을 보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나사파님'(*)에서 유래한 것으로 편견에 사로잡혀 불공평하게 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절대로 편견이나 불공평에 빠지지 아니하시고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공의로운 심판자이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구약시대에서는 생소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에서 기인한 것이다(마 6:9; 눅11:2).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 '보살피시는 분'과(마 6:32) '재판장으로 심판하시는 분'이라고(눅 18:1-7) 가르치셨다. 베드로는 이러한 이해 속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름으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의 아버지가 되셔서 그리스도인을 보살피실 뿐만 아니라 공의로 판단하시는 분이심을 강조하여 위로와 권면을 하고 있다.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 '나그네로 있을 때'는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지내는 삶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본향이 이 세상이 아님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천국 시민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 세상은 영원한 삶을 영위하기 이전에 잠시 거쳐 지나가는 삶에 불과한 것이다(Stibbs). 그러므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히 거할 것처럼 안일하게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로 하나님이 원하는 악에서 떠난 거룩한 삶을 영위해야 한다.

=====1:18

@너희가 알거니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도테스'(* )는 기독교의 가장 기초적인 신앙에 대해 언급할 때나(Hort) 표준이 되는 가르침을 언급할 때 사용되는(Kelly) 관용구이다. '에이도테스'가 사용되는 경우는 두 가지이다. (1)사도의 교훈을 심화시켜 설명할 때(롬 6:9; 고후 5:6). (2) 앞에서 명령한 구절에 대한 설명이나 이유를 보충하고자 할 때이다(고전 15:58; 엡 6:8,9). 이 두 가지 중 본절의 '에이도테스'는 후자의 경우이다. 왜냐하면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17절)는 권면에 이어 계속해서 그 이유를 설명해 나가기 때문이다(Michaels,Blum).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 '망령된 행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스 마타이아스 아나스트로페스'(* )는 유대인의 생활 양식을 가리키기보다는 이방인의 생활 양식을 의미한다(Blum). 더욱이 '망령된'의 헬라어 '마타이아스'(* )는 이방종교의 특성을 나타내는 단어로 우상 숭배와 관련되어 사용된다(렘 2:5; 8:19; 행 14:15; 엡 4:17). 한편 '구속된 것'의 헬라어 '엘뤼트로데테'(* )는 고대 로마의 노예 제도에서 비롯된 용어로 두가지를 의미한다(Blum, Selwyn). (1) 돈을지불하고 사다. (2) 속박에서 해방시키다.

베드로는 본절에서 수신자들이 구속받기 위해 치른 대가가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금과 은'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임을 밝힘으로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신 구속사역이 완전한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막 10:45; Lenski). 이러한 대가의 귀함과 완전함에 대한 베드로의 진술은 '값 없이' 구속함을 받았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사 52 :3)과 상치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비록 문자적인 의미가 다르다 할지라도 그것은 강조점의 차이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구속이 완전하여 (1)과(2)의 의미를 모두 강조하고 있지만 이사야는 바벨론에 포로가 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려는 태도로 (2)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Michaels).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 '어린양 같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스 암누'(* )는 세례 요한이 예수를 가리릴 때 이미 사용한 표현이다(요 1:29,36). 본문의 유래에 대해 혹자는 사53장에서 비롯 되었다고 주장한다(Bigg). 왜냐하면 사 52장에서는 구속의 대가를 예수의 보혈과 비교하며 사 53장에서 예수와 어린양을 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무리가 따른다. 왜냐하면 본절에서 어린양의 피는 예수의 보혈로 비유되는 반면에 사 53장에는 어린양의 피가 없으며 심지어 침묵하는 어린양으로만 비유되고 있기때문이다. 즉 사 53장은 예수의 고난을 나타내나 구속의 보혈과는 연결되지 않는다. 차라리 본문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출 12장에 나타난 유월절 어린양과 대비시킨 것이다. 왜냐하면 본문은 유월절 어린양이 지닌 구원과 해방에 대비된 예수의 사역을 시사하기 때문이다(Michaels). 예수께서는 유월절의 어린양과 같이 죄와 허물이 없으신 유일한 분으로서 그의 구속은 보다 완전하고 귀한 것이다(출 12:46; 요 19:36;고전 5:7, Blum).

=====1:20

@그는 창세 전부터가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 본절은 전형적인 비교 구문인 '멘...데'(* ... ,'한편...또다른 한편')로서 베드로는 이 구문을 통해 '창세 전'과 '말세'를 비교하여 네 가지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1)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창세 전'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진실하게 진행되었다(Michaels). (2) 동사 시제에 있어서 '미리 알리신 바'의 헬라어'프로에그노스메누'(* )는 완료 수동 분사로 하나님께서 구속 사역에 대해 '미리 알리신' 내용이 완전했음을 시사하며, '나타내신 바'의 헬라어 '파네로덴토스'(* )는 부정 과거 수동 분사로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 사역이 일회적으로 완전했음을 시사한다(Lenski). (3) 내용상 '창세 전'은 메시야의 신성과 사역을 나타내며 '말세'는 구속과 부활의 증거를 보여준다(Stibbs). (4) '프로에그노스메누'와 '파네로텐토스' 모두 수동태 분사형으로 인간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인간의 타락이나 죄악도 하나님의 계획을 파기시킬 수 없음을 시사한다(Michaels).

=====1:21

@너희는...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 '하나님을'의 헬라어 '에이스 데온'(* )은 문자적으로 '하나님 안에'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야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계시하셨으며(요 1:18) 자신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화해시켰기 때문이다(고후 5:19, Blum, Kelly). 

베드로는 본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화해를 이룬 하나님에 대해 두가지로 진술한다. (1)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신 분이시다. 곧 예수의 부활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근거가 됨을 시사한다(Stibbs,Blum). (2) 영광을 주신 - 하나님께서 예수를 부활시키실 뿐만 아니라 영광을 주신것은 예수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도 미래에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보증해 준다(롬 8:17-30; 히 2:10, Stibbs).

@너희 믿음과 소망이 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호스테 텐 피스틴 휘몬카이 엘피다 에이나이 에이스 데온) - 본문을 헬라어 구문상으로 해석할 때 두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본문을 '의도문'으로 본다(Robertson). (2) 이유는 본절이 직설법로 쓰였기 때문이다. 비록 '호스테' 다음에 부정사가 따르면 결과로 해석하는 것이 마땅하다할지라도 문장 전체가 명령법이 아니고 직설법일 때는 '의도'로 해석한다는 주장이다. (2) 혹자는 본문을 '결과문'으로 본다(Robertson). 그 이유는 코이네 헬라어에서 '호스테' 다음의 부정사가 따르면 일반적으로 '결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비록 서술적 용법일 때 '의도'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울지라도 그것은 문법적 규칙이 아니기에 문맥에 따라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문맥상 본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이유가 그리스도의 구속과 부활로 그리스도인들을 안위하기 위함이며 그 결과 그리스도인은 구원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하나님께 두게 되었기 때문에(Michaels)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한편 '믿음과 소망'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1) 혹자는 '믿음'에 '소망'이 종속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Moffatt). 왜냐하면 헬라어 본문에서 '믿음'에는 정관사가 있지만 '소망'에는 정관사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은 '그러므로 너희 믿음이 하나님께 소망을 가지게 한다'(Kuhl)라고 해석해야 한다. (2) 혹자는 '믿음과 소망'은 병렬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Bigg).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동전의 양면처럼 한 사실의 두 가지 의미를 반복적으로 기술하여 강조적 효과를 나타내며 믿음과 소망을 강조하기 위해 앞에서 배경적 설명을(3-9절) 해왔기 때문이다(Michaels, Selwyn).

=====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 '깨끗하게 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그니코테스'(*)는 완료 시상으로 회개로 이루어진 상태를 나타낸다(Michaels). 그리스도인에게 성취된 이러한 정결(淨潔)은 '진리'에 순종함으로 이루어진다. '진리'는 두가지를 의미한다(Selwyn). (1) 거짓과 구별된 참됨을 의미한다. (2) 그리스도의 화육,대속, 부활, 승천을 뜻한다. 본절의 '진리'는 후자의 의미로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받아들며 순종함으로 깨끗하여진다. 이렇게 진리를 통해 죄로 부터 온전히 깨끗해진 그리스도인들은 참된 형제애를 나눌 수 있게 된다. 한편 '깨끗하게 하여'와 관련된 의식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깨끗하게 하여'가 구약 시대의 정결 의식을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Bigg) (2) 혹자는 '깨끗하게 하여'가 세례를 암시한다고 주장한다(Blum).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비록 '세례'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할지라도 '깨끗하게 하여'와 다음 절의 '거듭난'이 모두 완료시상으로 과거에 단회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 '사랑하라'의 헬라어 '아가페사테'(*)는 부정 과거 명령형이다. 부정 과거 시상은 과거의 행위와 뚜렷한 차이를 나타냄과 동시에 행위의 시작을 나타낸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에 서로 반목(反目) 상태였을지라도 회개하여 온전히 깨꿋하여진 그리스도인은 과거와는 달리 하나님의 속성을 닮아 새로운 품성으로 서로 사랑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인이면 행했어야 할 덕목임을 시사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피차가 열정적으로 사랑하여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서로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어야 한다(요일 3:14-18).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 '거듭난'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게겐네메노이(*)는 완료 분사로 앞절의 '깨끗하게 하여'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회심된 상태를 시사한다. 한편 '씨'의 헬라어 '스포라스'(* )가 의미하는 것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ichaels, selwyn). (2) 혹자는 '말씀'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lum, Cranfield, stibbs). 두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신약성경 중 다른 곳에서도 '씨'는 '말씀'에 비유되고 있으며(막 4;14; 눅 8:11) 문맥상 이어지는 설명에서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이라고 진술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거듭남은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담고 있는 살아 있는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진다(시 33:9; 사55:10,11; 히 4:12, Stibbs).

=====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 본절은 포로로 끌려가 고난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는 말씀인 사 40: 6-8의 인용이다. 베드로는 이러한 구약 본문을 인용하여 당시 핍박받고 흩어져 방랑하는 수신자들에게(1절) 위로될 뿐만 아니라(Blum) 모든 육체의 영광 즉 세상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없어질지라도 말씀은 영원하며 말씀을 통해서 약속하신 그리스도인의 구원도 영원함을 강조하고 있다(Selwyn, Stibbs, Blum).

=====1: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 본절은 사 40:8(LXX)의 인용이다. 여기서 '주의 말씀'의 헬라어는 '토 레마 퀴리우'(* )이나 70인역에는 '토 레마 투 데우'(*, '하나님의 말씀')로 되어있다. 인용 과정에서 일어난 변화에 대해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베드로 자신의 의도적인 해석 때문이라고 주장한다(Kelly). (2) 혹자는 사본상의 변화를 그대로 옮겨왔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Hort). (3) 혹자는 베드로가 신약성경의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인용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Michaels).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토레마 퀴리우'에 나타난 속격은 이사야의 말씀처럼 '주격적인 속격'으로 예수의 말씀과 동일하기 때문이다(막 13:31; 눅 21:33, Michaels). 여하튼 베드로는 이러한 구약성경의 인용을 통해서 주께서 전한 말씀인 복음이 영원토록 변치않는 말씀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이 됨을 진술하고있다(Selwy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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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hsou'"(2424, 이에수스) 예수 Jesus (인)

이에수스는 구약에 나오는 예수아라는 유대 이름의 헬라어형인데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음역한 다음 주격 변화를 위해 시그마(-s)를 붙인 것이다. 예수아는 바벨론 포로기 무렵부터 예호수아 대신 일반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이름은 여호와라는 신성한 이름을 포함한 오래된 이름이며 '여호와는 도움이시다' 또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NTD).

예수스는 천사가 마리아에게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알려준 것으로, 아들의 사명을 나타낸다. -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

(a)  이에수스는 구약의 여호수아(출애굽기등에 나타나는 눈의 아들의 이름, 학개와 스가랴에 나타나는 대제사장의 이름, 삼상 6:14과 왕하 23:8의 두 사람 이름, 대하 31:15의 레위인의 이름)의 헬라어 형태이다.

(b)  이에수스는 주후 2세기 초기까지만 해도 통상적인 이름이었다. 신약은 행 7:45; 히 4:8에서 여호수아를 이에수스라고 표기한다(개역: "여호수아"); 참조: 눅 3:29의 이에수스, 마 27:16의 이에수스 바랍바스(개역: "바라바"), 행 13:6의 바리에수스(개역: "바예수"), 골 4:11의 이에수스(개역: "유스도라하는 예수"). 2세기 이후부터는 이에수스라는 이름이 사라졌다. 아마도 의식적으로 그 이름을 사용하기를 피했기 때문인 것 같다.

(c)  이에수스라는 이름은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나타낸다. 그는 바로 이 이름으로 사셨고, 이 이름으로 선포되었고, 이 이름으로 거론되었다.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기타 인물들과 예수님을 구별하기 위하여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마 21:11), "다윗의 자손"(막 10:47-48; 막 1:24; 막 27:37; 요 18:5 등) 같은 문구를 덧붙였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이 이에수스를 "생명의 주"(행 3:15), 하나님의 그리스도, 주님, 구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이에수스와 호 퀴리오스(주님) 사이에는 아무런 구별이 없다. 왜냐하면 이에수스는 하나님께서 주님과 심판자(참조: 빌 2:7; 갈 3:1; 행 17:31)로 만드신 바로 그 사람이기 때문이다. 공관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는 간단하게 이에수스라는 이름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으나, 우리는 또한 호 퀴리오스(누가복음) 및 이에수스 크리스토스(예수 그리스도), 호 퀴이오스 이에수스 크리스토스(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고정된 표현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외의 신약성경에는 간단히 이에수스만 사용되는 경우는 드물다. 바울은 살전 14:14; 고후 4:11이하; 빌 2:10과 같은 곳에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을 생각하면서 "예수"라는 이 단어를 주로 사용하였다. 히브리서와 요한계시록에서도 이에수스라는 이름은 예수의 역사가 신앙의 근거를 형성한다는 것을 암시한다(예: 히 2:9; 히 6:20; 히 10:19; 계 1:9; 계 14:12; 계 20:4; 계 22:16).

(d)  예수라는 이름은 역사적 실존의 견지에서 볼 때 중요하다. 마태와 누가는 예수라는 이름이 우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의 백성을 그들의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려고 오셨기 때문에 그 이름이 주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마 1:21). 이 이름의 완전한 히브리어 형태는 하나의 문장을 이루는데, "야훼께서 구원하신다"이다. 몇몇 교부들은 이에수스와 헬라어 이아오마이(낫게 하다)를 관련 짓기도 하였고, 오늘날, 예수는 구원의 여신인 이아소의 남성형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유세비우스는 예수라는 이름의 히브리어적인 근거를 인정하였다. 그리고 이에수스라는 이름은 그리스도인들과 헬라 세계와의 접촉보다 더 이른 시기부터 사용되었다.

(e)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라는 인물의 역사적 실존을 의심하고 복음서를 신에 대한 역사적 신화로 이해하고자 하는 자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하나님에 대한 유대 신화가 있다는 사실을 보이고 개개의 기사들을 그 구체적인 형태와 연속적인 면에서 비역사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도식(schema)을 만들어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해야만 한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라는 이름은 신화적인 인물의 이름이라는 것도 증명되어야만 하며 기독교 이전의 예수 제의가 있었다는 증거도 제시해야 한다. 그러한 어떤 제의에 대한 직접적 혹은 명확한 증거가 없다(예수 제의는 아마도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관련이 있는 듯하나 이에 대한 논증은 이새 분파가 있었다고 하는 주장이나 테라퓨테가 예수라 하는 제의적 신을 숭배했다고 하는 주장들과 같이 순전히 사변론적인 것이다). 여호수아에 관해서 고찰해 볼 때, 후기 유대교에게 있어 출애굽은 극히 중요하지만, 여호수아의 지휘 하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사실은 율법 수여에 비하면 이차적인 중요성만을 가질 뿐이며, 여호수아는 아무데서도 메시야의 원형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서 신약에서 율법은 아브라함과 그리스도 사이에서 일시적인 중요성만을 가질 뿐이다. 여호수아가 언급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역사적 사건과 관련되어서만 언급될 뿐이며(히 11:30-31; 행 7:45), 출애굽 사건이 성취를 가져다 주지 못하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언급될 뿐이다(히 3:7이하). 나세네 시편(Nassene Psalm)과 마술 파피루스들이 그리스도교 이전의 본문들이라면, 이 본문들은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 제의를 가리킬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본문들은 후기의 것이며, 단순히 역사적인 예수가 준 영향을 단순히 증거하는 것이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예수라는 이름의 단순한 용법은 예수의 역사적 실존에 대한 유력한(완전히 비의도적인) 증거가 된다.(참조: W. Foer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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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stov"(5547, 크리스토스) 그리스도 the Christ.

크리스토스는 '기름 붓다'를 뜻하는 크리오(crivw, 5548)에서 파생되었으며, 아람어 메쉬하, 히브리어 마쉬아흐에 해당하며, 그 의미는 어떤 직책을 위해 의식적으로 '기름부음 받은 자'를 의미한다. 메쉬하의 헬라어 음역은 멧시아스인데 시그마(-s)를 붙여 격 변화된 것이다. 멧시아스란 단어는 헬라어 신약성경에서 요 1:41과 요 4:25에만 두 번 나오는데 복음서 기자는 두 경우 모두 크리스토스로 번역했다. 한글 개역은 크리스토스를 그리스도로, 멧시아스를 메시야로 음역했다. 구약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은 선지자, 제사장, 왕이었으며 이들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다(TDN).

크리스토스는 신약성경에서 596회 사용되었다.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K. H. Rengsto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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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povstolo"(652, 아포스톨로스) 사도 apostole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아포스톨로스(Lysias, Demosth.)는 처음에는 동사적 형용사로 사용되었으나 후에 명사로 사용되었다.

(a)  아포스톨로스(ajpovstolo", 652)는 '보내다'를 뜻하는 동사 아포스텔로(ajpostevllw, 649: 보내다)에서 유래되었으며, 그 기본적 의미는 '보내심을 받은 자'이다.

(b)  아포스톨로스는 고전 헬라어에서 처음에 해양 언어로 발견되는데, 화물선이나 보낸 선단, 후에는 원정 함대의 함장이나 해외로 임무를 위해 '파견된 자'나 원정대, 또는 일단의 식민 개척자들을 의미하였다.

(c)  아포스톨로스는 헤로도투스의 두 구절에서만 한 인격으로써 '사절, 대사, 특사'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그는 Alyattes가 Miletus에게 보낸 사자와 같은 메시지의 전달자를 말한다(1.21).

(d)  아포스톨로스는 파피루스에서 나일강의 배로 운반되는 정부의 곡물 창고로부터 알렉산드리아로 보내는 곡식의 선적량을 지시하는 공식 서류인 나타내는 전문 용어이다. 아포스톨로스는 여권, 안전 통행증, 또는 심부름꾼이 떠나려 할 경우의 출국 허가서(P.Oxy. 1271; 참조: Strabo 2.3.5), 수출 면허장을 말한다. '여권 없이 승선한(알렉산드리아에서) 사람에 대한 법적 조치가 장관의 관할 하에서 취해진다'는 규정이 있었다(Gnomon of the Idios Logos 162).

2. 70인역본 및 구약 등의 용법. 

(a)  아포스톨로스는 70인역본에서 왕상 14:6에 한번 샬라흐의 역어로 나오며, 여로보암의 아내에게 신적인 메시지를 전달한 아히야의 임무를 서술하는데 사용되었다.

대하 17:7-9에 의하면 이 보냄을 받은 자들은 단순한 사절이 아니라 책임있는 직무, 즉 어떤 사람의 권한을 위임받은 대표를 말한다. 그의 행위는 "보낸 사람"에 의해 결정된다. 이 점에서 당사자(보낸 사람)과 그 대리인은 동일하다: "어떤 사람의 샬리아흐는 그 사람 자신과 같다. 그러므로 사자는 자신에게 사명을 준 사람의 대리인이 된다(참조: 삼상 25:40 이하; 삼하 10:4, 6). 사자나 그에게 사명을 준 사람의 인격에는 관계 없이 그리고 심지어 임무에도 관계 없이 샬리아흐라는 말은 '전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행동하는 사람'을 의미한다(참조: W. Schmithals). 이 규칙이 종교적인 영역에까지 적용된다. 샬리아흐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행할 때 그것은 아브라함, 엘리야, 엘리사의 경우(Midr. Ps. 78 5; 173b)에서처럼 하나님 자신이 행하시는(b. B. Mes. 86b) 것과 같다. 랍비들은 희생 제물을 바치는 제사장들을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것 이상을 행하는" 하나님의 샬리아흐로 생각했으며(b. b. Qidd. 23b; 참조: Rengstorf), 속죄의 날에 그들은 대제사장을 "하나님 앞에 있는 백성들의 대표자"로 불렀다(m. Yoma 1. 5; m. Git. 3.6). 회당 기도회의 인도자는 공동체의 샬리아흐였다. 랍비들은 고국의 유대인들과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인들을 시찰하고 결집시키는 산헤드린의 대리자로 보냄을 받았다. 다른 한편 미쉬나와 탈무드에서 샬리아흐는 공동체를 대표하여(m. Ros, Has, 4.9), 그의 선거인들에 의해 권한을 부여받는다. 이러한 사실들은 신약성경의 사도의 의미에 영향을 주었다.

(b)  요세푸스는 이 단어를 사명을 받고 파송된 사절단에 대하여 사용하였다(로마에 보낸 유대인들).

(c)  아포스톨로스는 아마도 후대 영지주의적 계통에서 신적 계시의 중재자로서의 '사자'라는 동방적인 개념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들의 학설에서 그 단수로는 '천상의 구세주'를, 복수로는 '수많은 구원자들' 즉 '영적인 사람들'을 표현하는데 사용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아포스톨로스는 신약성경에서 80여회 나타난다.

(a)  신약성경에서는 고전 헬라어의 경우와는 달리, 아포스톨로스라는 말이 오직 '사자'라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무엇보다 하나의 특정한 직무 즉 원(原) 사도직에 대한 확고한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눅 6:12-눅 6:13, "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따르고, 그의 삶을 함께 나누고, 그에게 속한 제자들 중에서, 특별한 방식으로 그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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