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눅16:1~18]불의한 청지기 비유.... <천산생축과 세상의 금은보화를 친히 만드시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의 청지기 삼아서 맡겨주신, 또한 지금도 없는 것을 만들어 공급해 주실 수 있는 전능하신> 주님에게 있어서 낭비란 과연 어떤 의미일까......그분의 성품인 생명, 빛, 거룩함, 사랑, 의, 참되심 그 영광자체를 어떻게든 손상시키고 있음을 뜻하는 말 아닐까.<주님 성품과 그 이름에 합당한 사업을 선택하고 부지런히 열심히 일하고 모은 재물과 시간을 드려 선한 사업을 힘쓰며 너그러이 나누어주며 합당하게 베풀며 심으라>....그것은 투자한 사업 영역이 어떤 성격의 것이냐에 더하여 그 다음은, 그 소득 얻는 과정에도 이웃에게 악을 행함-임금착취나 두개의 저울추로 속여 과도한 이윤 남김, 거짓말, 위증이나 이간질로 분열케 하여 부당한 이득 얻기, 정보 선점/독점하거나 강매로 손해 입히거나 원망 유발케 하는 부당함-이 없어야 하는 바, 상호 윈윈하는 수고하고 애쓰고 땀 흘린 원칙에 따른 합당하고도 정당한 소득인가가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그 얻은 소득을 주로 주 되시게 하는 원칙<시간과 함께..기회가 주어지는대로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마치 소유를 다 쓰지 못하고 죽을 것처럼 여겨서 겸손히 그리고 부지런히 > 선한사업에 주님의 성품과 그 뜻, 곧 하나님 이름에 합당하게 사용함으로써 그 영광 드러내고 있느냐는 측면까지 포함해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누가복음 16장 [개역개정] 1.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4.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6.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9.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10.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1.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3.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14.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15.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16.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17.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18.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그 청지기가 <양심을 따라 사는 것을 우습게 아는 이 세상의 가치 관점에서 보면>어쩌면 주인을 위해서도 참 잘해왔고 빚진 자들에게 대해서도 마땅히 할 바를 해 온 것처럼 보여진다. 그 결과로 차용자들에게 계약을 맺을 때 갑의 지위를 이용하여 억지고집을 부려서 마땅히 받아야 할 그 이상의 값으로 인색하고 박하게 맺었고.. 그래서 그 채무자들은 점점 빚을 갚을 수 없었으며 빚은 자꾸만 밀리고, 그래서 어쩌면 차용인과 그 가족들이 파산하게 될 지경에 이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 그 업무를 떠나려는 마당에 이르러서 그는 이것을 돌이켜 생각하고, 그가 <양심적 측면에서 볼때에 합당한 정도로>마땅히 해야 할 의로움과 자비로움을, <단순히 그들의 밀린 빚을 덜어 주는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자기가 살아야 할 앞날을 위해서> 그 빚을 감해 주려는 생각으로 베풀었다. "얼마나 빚졌느뇨?" 한 것은 "현재 얼마나 큰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느냐?... 오너라. 네가 꼭 갚아야 하는 것 이하로는 안 되겠지만, 내가 해 줄 수 있는 한 좀 가벼운 계약으로 네 빚을 감경시켜주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지금까지 "오직 주인의 세상적 유익만을 위한" 사람이었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빚진 자들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기독교가 목적하는 것이 신적인 신비개념으로 우리를 위안시키거나 신적인 자비개념으로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해이다. 그렇지 않다. 복음에 나타난 이 양자의 신적인 계시는 <맡은 자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충성-주인의 뜻에 부합한>인 바,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실제로 실행함에 무엇보다도 우리가 가진 또 할 수 있는 것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자선과 선행을 베푸는 일에 우리를 참여시키고 고무시키려 함이다. <주님은 당신의 것을 우리에게 위임하여 맡기실 때에 무엇을 어떻게 할 지는 맡은 자가 주인의 뜻을 헤아려서 자유의지로 선택하되 그분의 원하시는 뜻은 기록된 말씀으로 분명히 계시하셨음을 기억하자...거기에 부합하는 것이 충성됨을 판단하는 첫 기준이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 구주 예수님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많은 은혜의 청지기"임을 상기시켜서, 바로 이 점을 우리에게 요청하신다. 사실 우리는 여러 경우에 불(不)충성 했었고, 주님의 은총을 백안시했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재물들을 좋은 일에 사용할 수 있느냐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지혜 있는 태도인 것이다. 또한 비유는 처음 말해질 때의 의도의 범위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개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는 한국속담처럼>주님이 혐오하시는 사업을 통해서 그 결과로 얻은 것을 자비와 선행에 투자하면서 다가 올 저편 세상에서 벌을 면하고 상을 받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보다는 세상 사람들이 이생에서의 일시적인 이익을 위해 즉 세상과 벗하고 다른 세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자기 재산을 쓰는 것처럼, 우리가 미래의 영원한 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해서 자선과 경건한 일에 우리의 부(소유)를 열심과 근면으로 쓰는 것이 정말 지혜 있는 태도이다. 이제 자세히 살펴보자. Ⅰ. 비유 이 자체에서는,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의 재물의 "청지기"로 표현되고, 우리가 바로 청지기임을 얘기한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는 단지 우리 주님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그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것뿐이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는 랍비 켐시의 말을 인용하여 "이 세상은 하나의 집, 하늘은 지붕이요, 별은 등불, 이 땅은 과일로 차려진 식탁. 그 집의 주인은 거룩하고 영광 받으실 하나님이시며, 사람은 집안의 모든 재물을 맡은 청지기이다. 그가 잘 처신하면 주의 앞에서 은총을 입을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맡겨진 직무를 박탈당할 것이다"라고 했다. 이제 보자. 1. 이 "청지기"의 "불성실". 그는 "주인의 소유를 낭비했다." 착복 횡령했고, 잘못 투자했으며 또는 부주의하게 관리하여 손실과 손해를 입혔다. 이 일 때문에 그는 "주인에게 고발되었다"(1절). 그런데 우리들도 똑같은 고소를 당하고 있음을 알자. "우리들도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맡겨 주신 것들을 마땅히 증진시켜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고 오히려 목적에 어긋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심판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고 자신을 돌이켜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2. 청지기직의 "박탈". 주인은 "그를 불러서" 말했다.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나는 네가 잘 행하기를 바랬는데" 그는 청지기가 자기를 실망시킨 것을 유감스럽게 말하며 할 수없이 그를 해고시킨다. 즉 그는 그 말을 듣고 속이 상했고, 청지기는 부인할 수가 없었기에, 응당한 책임을 물어 곧 해고시키는 도리밖에 없었다(2절). 이것은 우리를 가르치려고 짜여진 것이다. (1) 우리는 모두 얼마 후에 이 세상에서의 "청지기직"을 벗어나게끔 되어 있다. 그러므로 지금 즐기고 있는 것들을 즐기지 말아야 한다. 죽음은 곧 찾아와 청지기직을 우리로부터 "벗길" 것이며, 우리가 지금 가진 선행의 능력과 기회를 "빼앗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자리와 우리가 가진 것들을 차지할 것이다. (2) 죽음에 이르러서 우리의 청지기직 해고는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주님의 재화를 낭비했고 그래서 우리의 신뢰를 상실했기 때문에 그래야 마땅하며, 불평할 근거가 하등 없는 것이다. (3) 청지기직을 벗게 될 그날에 우리는 주님께 그것에 대해, "보고를 드려야"만 한다. 즉 "죽음 후엔 심판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해고와 보고의 양면으로 경고되며 자주 이것들을 심사숙고해야만 한다. 2.그의 "각성". 이렇게 되자 그는 "내가 무엇을 할꼬"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런 것을 불(不)충성으로 좋은 자리에서 어리석게 쫓겨나기 전에 생각했더라면 좋았을 테지만, 늦게라도 "생각한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우리들은 모두 조만간에 청지기직을 반드시 그만 두게 되리라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그 다음엔 어떻게 할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는 살아야만 하는데 어떻게 목숨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1) 그는 노동을 해서 생계를 유지할 만한 정도의 열심히 자기에게 없는 것을 알았다. "땅을 팔 수도 없다. 노동으로 먹고 살 수는 없구나." 왜 땅을 팔 수 없다는 것인가? 그가 나이가 많거나 절름발이로는 보이지 않는다. 사실은 그는 "게으른" 것이다. "그가 할 수 없다"는 것은 "할 뜻이 없다"는 말이었다. 그가 일을 잘 하지 못한 것은 자연적인 능력 부족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부족했던 것이었다. 만약에 주인이 그를 청지기에서 해고시키고 노동에 종사시켜 그 위에 감독자를 두었더라면 그는 땅파는 일을 했을 것이다. 그는 그런 일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땅을 팔 수가 없었다." 바로 이것은 이 세상의 어떤 일로도 우리 영혼의 생명을 얻을 수는 없으며 우리가 가진 능력으로 우리 영혼을 위한 목적에 맞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2) 그는 구걸로 자기의 빵을 벌도록 "겸비"함을 갖추지 못한 것을 알았다.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3절). 앞의 것이 나태라면 이것은 그의 교만함에서 나오는 말이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함에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이 청지기는 빵을 구걸하는 것보다 주인을 속이는 것에 더욱 부끄러움을 가졌었다. 3.결심. 그래서 그는 결심하기를 주인에게 빚진 자들과 친하고, 또는 소작료가 늦고 있는 고용주들과 사귀리라 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빚진 문서를 넘겨주었다.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4절). 내 주인은 나를 쫓아낸다. 내가 빚진 자들과 친하고 그들에게 여러 번 좋게 대해왔는데, 한 번 더 그렇게 하면 그들이 나를 집으로 초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최대한으로 잘해 줄 것이다. 그러면 내가 살아있는 한, 적어도 내가 혼자서 잘 살아갈 수 있게 될 때까지는, 그들 집에 머물며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겨다니며 신세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빚진 사람들을 친구로 만드는 방법은 그들이 주인에게 빚진 중에서 상당한 몫을 잘라버리고 실제보다 매우 적게 매기는 식이었다. 그에 따라서, "기름 백 말"을 빚진 자를 불러(그와 같은 필수품으로 빚을 갚았었다) "네 증서를 가져오라"고 말하고, "빨리 앉아 50이라고 쓰라" 일렀다(6절). 그렇게 해서 그는 빚을 반감해 주었다. 다음을 살펴보자. 그는 그 일을 행할 때에 급했다. "빨리 앉아라. 그리고 들키거나 의심받지 않도록 고쳐 써라." 그는 또 "밀 백석"을 빚진 자를 불러 증서에서 5분지 일을 감해 주어, "80석"이라고 쓰도록 명했다(7절). 아마도 그는 장차 받을 친절을 예상해서 다소간 차이를 두면서 감해 주는 방식으로 다른 빚진 자들에게도 그러했을 것이다. 여기서 이 세상에 속한 재물은 얼마나 불확실한가를 생각해 보자.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에게도 역시 그렇다. 그들은 재물을 관리하도록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고 그리하여 맡겨진 사람들이 "주인인 자기를 속일 수도" 있는 권한은 그들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직접 자신의 눈으로 감찰하는 게 귀찮기 때문이다. 또 신뢰하여 맡겨진 사람들 가운데에 얼마나 많은 배신이 발견되는가를 생각해 보자. 안심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나님은 신실하시지만 모든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 이다." 이 청지기는 부정직한 것이 판명되었지만, 아직도 그렇게 하고 있다. 사람들은 잘못 때문에 벌을 받지만 그것을 고치는 법은 참으로 드물다. 4. 청지기의 각성에 대한 주인의 인정(人情).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다(8절). 이 말씀 가운데 "주인"을 "그의 주인," 그 종의 주인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그의 주인이 이 속임수를 보고 분노할 수밖에 없을텐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종이 자신을 위한 교묘한 꾀와 방책을 세웠음을 귀하게 여겼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위의 칭찬의 말씀을 "우리주님(Our Lord)"의 말씀으로 봄이 옳다고 본다. 즉 위의 말씀의 뜻은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자신을 위하는 길이며 또 현재에 주어진 남은 기회를 잘 선용할 줄 알며 앞날의 불행을 대비한 대책을 세울 줄 아는 사람을 귀히 여기신다는 말씀인 것이다. 예수님은 주인에게 "거짓되게" 행했기 때문에 그 청지기를 칭찬한 것이 아니고, 그가 자기 자신을 위해 "지혜롭게" 행했기 때문에 칭찬하셨다. 그러나 아마도 여기서는 그 청지기가 주인을 위해서도 잘했고 빚진 자들에게는 마땅히 할 바를 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차용자들에게 "계약을 맺을 때 참으로 박하게 맺었었다"는 것을 자신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빚을 갚을 수 없었으며 그가 고집 세게 인색하였으므로 "빚은 자꾸만 밀리고," 그래서 차용인과 그 가족들이 파산하게 될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떠나려는 마당에 이르러서 그는 이것을 생각하고, 그가 마땅히 해야 할 의로움과 자비로움을, 단순히 그들의 밀린 빚을 덜어 주는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앞날을 위해 그 빚을 감해 주려는 생각으로 베풀었다. "얼마나 빚졌느뇨?" 한 것은 "현재 얼마나 큰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느냐? 오너라. 내가 네게 꼭 갚아야 하는 것 이하로는 안 되겠지만, 좀 가벼운 계약으로 풀어 주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지금까지 "오직 주인을 위한" 사람이었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빚진 자들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가 "주인의 신용"을 잃었을 때에 "그들의 호의"라도 얻을 수 있을까해서이다. 그들의 빚을 감해 준다는 것은 지속하는 친절일 수도 있으며, 단순히 감해 준다는 것 이상의 약속이 될 수도 있다. 이 생에서의 안락한 생존을 위해 이 청지기의 이와 같은 예비를 생각할 때 내세를 위한 우리의 준비 없음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이생을 선택하고 여기서 몫을 가지는 "이 세대의 아들들"은 영혼과 영원을 관심하여 "자기 시대에서" 복음을 즐기는 "빛의 아들들"보다 "자기들의 당대를 위해선 더욱 현명하며" 세상적 이익과 모험에 대해서 더욱 깊이 생각하고 더욱 신중히 고려한다. 다음을 살펴보자. (1) 우리는 이 세속적 일에 관심하는 세상 사람들의 지혜를 우리의 영혼에 관심하는 일에 "본받아야" 한다. 그들의 원리는 기회가 닿는 대로 이용하고, 가장 필요한 것을 즉시 실행하며, 겨울을 위해 여름과 가을철에 저장하고, 좋은 계약을 닿는 대로 맺고 "신실한 사람"은 신용하고 "불성실한 사람"은 믿지 않는다. 우리가 영적인 일에서 이처럼 현명하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2) 빛의 자녀들은 보통 이 세상의 자녀들에게 "진다." 그것은 이 세상의 자녀들이 "진짜 현명"해서가 아니라 단지 "이 세대에서"만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의 청지기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예고를 들으면서도 장래를 위하여 예비하지 못한다면 예고를 듣고 준비할 줄 아는 그들이 장래 일에 있어서도 우리보다 더 현명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마치 "여기서 늘" 살 것처럼 또 "이 생후의 내세는" 없는 것처럼 살고 있다. 그리고 이 청지기직에 있을 때 "내세"를 준비해야 하는 것을 열심히 구하지 않는다. "빛의 자녀들"이라 하지만 우리는 앞에 놓인 "다른 세계"를 보지 않을 수 없는데, 당연히 그것을 위해 준비하고 최선의 노력과 애정을 기울여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Ⅱ. 이 비유의 적용과 그것으로부터 끌어내어지는 결론(9절). "내가 너희에게 즉 내 제자들에게 말하노니(그들에게 이 비유는 알려진 것이었다(1절)) <<여기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주님의 제자들은 소유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세상에서 적게 가졌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어떻게 선을 행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라." 다음을 살펴보자. 1. 우리 주 예수께서 여기서 무엇을 권면 하시는가. 즉 이 세상에서 지금 우리의 소유와 즐기는 것들을 <생명과 사랑의 고양과 실행관점에서>유용하게 사용하여 내세에서의 행복을 편안히 맞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주인의 재산을 가지고 청지기가 빚진 자들을 친구로 만든 것처럼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말씀하신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지혜를 가지고 돈을 사용하여 단순히 현재만을 보지 않고 장래의 유익을 찾는다. 그러길래 이자를 놓든지 땅을 사든지 여기 저기 자본을 대는 것이다. 우리도 그들을 배워 돈을 유용하게 사용하여 장차 내세에서의 더 유익함을 도모해야 한다. 그들은 단지 이 땅 위에서의 미래에 더 나아지는 것을 바라지만 말이다. 그러나 "너는 네 식물을 물위에 던져라. 우리가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 11:1). 더구나 우리의 경우를 보면, 우리가 무엇이든지 "우리 주님의 재산"을 가진게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주님께 빚진 자"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그들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다면 그것은 주님께 나쁜 일이 되기는커녕 우리 자신들을 위한 좋은 방책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그분께 대한 의무이기도 하다.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1) 세상의 것들은 <소유한 자들로 하여금 그것이 영원히 있을 것처럼, 영원히 안전을 가져다 줄 것처럼 본질상 깜박 속아넘어가서 파멸을 초래케 하는> "불의의 재물"이다. 즉 졸렬하고 불의한 방법으로 벌었다는 면에서 뿐이 아니라, 그것에 의지를 하고 만족과 행복을 구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속을 것이기 때문에 나쁜 "재화"란 뜻이다. 부란 사라져 가는 것이며 그것으로부터 기대를 거는 사람은 실망하게 된다. (2) 이 "불의한 재물"은 행복을 가져오는 것으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에 도움이 되도록 "이용할 수도 있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한다." 비록 우리가 그것 안에서 진정한 만족을 찾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것과 "친해질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돈 자체를 목적 삼기 위해서가 아니가 그것으로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친구로 삼으며, 천사와 성도들을 그리고 불쌍한 사람들도, 친구로 삼을 수 있다. 이같이 앞으로 하나님 앞에서는 날을 준비하기 위하여 또 재물을 선한 목적으로 쓰려고 재물과 가까이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3) 죽음에 당도해서는 우리는 모두 실패할 수밖에 없다. 즉 ‘오탄 에클리페’(16:9) - 즉 네가 빛을 잃게 될 때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게 된다. 죽음은 우리를 소멸케 한다. 상인은 "파산자가 될 때, 이젠 끝이다"라고 말한다. 우리 모두 조만간에 이처럼 실패해야만 한다. 죽음은 상점 문을 닫고 손에 도장을 친다. 이 세상에서 받던 평안과 즐기던 것들 모두 다 "우리를 저버릴 것이다." 살아있는 육신도 우리를 내동댕이칠 것이다. (4) "우리가 허무하게 죽을 때, 하늘의 영원히 거할 곳에 들어갈는지 스스로 분명히 확신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하늘의 "거주지"는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영원한 손으로" "영속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고후 5:1). 그리스도는 구원받은 자들의 처소를 예비하기 위해 먼저 가셔서, 지금 "그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계시다. 즉 아브라함의 품은 그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고 "천사의 무리"가 그들을 그리로 데려가면 "천사들의 합창"이 거기서 그들을 영접하도록 마련되어 있다. 가난하게 살다가 영광의 나라로 먼저 간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준 그들을 맞이해 줄 것이다. (5) 이것이 이 세상의 것들을 하나님의 영광과 형제들의 유익을 위해 써야 하는 마땅한 이유인데, 즉 그렇게 함으로 그것들을 다가오는 영원, "찾아오는 그 때"의 좋은 기초로, 안전한 기반으로, "좋은 약정으로 저축해" 두고자 함이다. 디모데전서 6장 17-19절을 보면 잘 설명이 되어 있다. 2. 경건과 자선의 일에 위와 같은 일을 많이 할 것을 여러 말씀으로 설득하심. (1)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들"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한다면 "그분의 영적인 은혜의 선물들"인 현재와 미래의 평안함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여기서 이 둘을 직접적으로 비기지는 않으시지만 그렇지만 보여 주시기를 이 세상 것들을 충실하게 사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구실이 되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들을 불성실하게 사용할 때는 틀림없이, 우리를 영광으로 옮기는데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를 "몰수"시키는 것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10-14절에서 말씀하신다. 이 세상의 부는 "아주 작지만," 은혜와 영광은 "더욱 크다." 우리가 작은 것에 불(不)충성하고, 이 세상 것들은 주어진 목적을 벗어난 다른 목적에 쓴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들을 받을 때도 거꾸로 그러하고, 받아야 소용이 없으며, 그러므로 그것들은 우리에게 거절될 것이란 점을 마땅히 두려워해야 한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다." 자기의 돈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더욱 고상하며 가치 있는 지혜와 은혜의 재주, 또한 영적인 은사, 그리고 하늘의 열심을 가지며 역시 하나님을 섬기며 선한 일을 힘 쓸 것이다. 그러나 "한 달란트"를 가지고 묻어 놓는 사람은, 영적인 은사 "다섯 달란트"를 가져도 절대로 증진시키지 못한다. 하나님은 턱없이 인색하고 세속적인 사람들을 우리보다 더 잘 간파하시고 그들에 대한 그의 은혜를 보류하신다. 세상 재물은 "헛되고" "불확실하다." 그것들은 "불의한 재물"이다. 그것은 재빨리 도망치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하려면 급하게 손을 써야 <생명을 고양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선한 사업에 투자해야>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유일한 "진정한 재산"인 영적인 부를 어떻게 위탁받기를 기대하겠는가?(11절) 이것에 대해 확신을 갖자. "진실로" 부한 사람, "놀라운" 부자인 사람은, 신앙으로 부한 사람, "하나님께 대해" 부자인 사람,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에서, 하늘에 대한 진정한 열심에서 부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우리의 재화를 하늘에 쌓아 두고 하늘에서 몫을 받을 생각을 하고 무엇보다 우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마음에 두자. 그리고서 다른 재화가 우리에게 들어온다면, 영적인 바탕에서 그것들을 사용하여서, 그것들을 잘 이용함으로 "참다운 부"를 더욱 견고히 잡을 수 있고, 하나님께로서 "더 많은 은총"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도록 하자.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가 보시기에 선한 사람에게" 즉 열린 마음으로 자비로운 사람에게,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신다"(전 2:26). 바꾸어 말하면,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는" 사람에서 하나님은 "진정한 부"를 주신다. 이 세상의 재물은 "다른 사람들의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혼과 영혼의 본성과 이익(흥미)에 낯선 것들이다. 영혼은 하나님의 것,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권리는 우리들보다 앞선 것이며 우세하다. 그 권리는 하나님에게 남아 있고 우리는 다만 사용자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 재물들은 "다른 사람들의 것"이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것을 가지게 되었으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한다. "늘어가는 재산을 가진 소유자는" "눈으로 지켜본다는 것" 이외에 무슨 선한 게 있는가? 오히려 "재산은 쓸 때 불어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화를 곧 누구인지는 모르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그러나 영적이며 영원한 부는 "우리 자신의 것"이며(그것들은 소유되는 즉시 영혼으로 들어간다)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와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우리의 선한 부분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자신의 것으로 삼으며, 그분의 약속을 하늘나라, 우리의 것으로 삼는다면 그것들을 진정으로 "우리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세상의 재물을 맡은 청지기로서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런 것들로 우리를 "부하게 만들어 주신다"고 기대할 수 있을까? (2) 우리가 하나님의 종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방법은 우리 자신을 그를 섬기기 위해 포기하고 우리들이 세속에서 얻은 재물을 그를 섬기는 데 사용하는 것밖엔 없다(13절)..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두 주인이라면 하나님과 "재물"의 경우처럼 일치하지 않는다.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그것에 달라붙게 되고," 어쩔 수 없이 그는 "하나님을 미워하고" 멸시하게 된다. 그는 신앙 생활의 모든 겉치레를 이용하여 세속 이익과 계획에 사용하고 하나님의 소유들을 세상을 섬기고 찾는 데에 이용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께 "매달리면," 상대적으로 그는 세상을 "미워하고"(하나님과 세상이 경쟁하게 될 때) 그것을 "멸시"할 것이며, 세상의 사업과 그 성공을 어떻게든 신앙생활의 확장에 건설적으로 이용할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재물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구원의 사업을 이루는 데에 도웁도록 만들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문제는 간단하다. "너희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같이 섬길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둘의 목적은 분명히 갈라지기 때문에 그 섬김은 절대로 화해할 수가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심했다면, 세상 섬기는 것을 버리고 영구히 버릴 것을 선서해야만 하는 것이다. 3. 다음에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의 이 말씀을 어떤 대접을 들었는가와 그리스도가 그들을 비난한 것을 본다. (1) 바리새인들은 사악하게도 예수님을 비웃었다(14절).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직접 면박할 수는 없었고, "그를 비웃었는지라," 이점을 잘 생각해 보자. 죄를 낳는 "탐욕"의 열매로써의 "죄." 즉 그들의 "부정." 다음을 명심하자. 경건 생활에 대한 지식도 많고 체험도 많은, 입에 발린 신앙 생활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바로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 때문에 멸망한다. 이것보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적대하여 심정을 굳게 하는 것은 없다. 이 욕심 많은 바리새인들은, 그들을 유혹하는 "장본인"인 불타는 욕심을 "건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엑세뮈크테리존 아우톤’(16:14) -즉 그들은 예수님께 코를 들고 킁킁거리며 비웃었다. 즉 예수님께 콧방귀를 뀌었다. 그것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극렬한 비난과 혐오의 표시였다.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긴다"(렘 6:10). 그들은 세상의 보통의 결과, 방법에 예수님이 거꾸로 말씀하시되, 그들이 굳게 붙들기로 작정한 죄에서 그들을 돌이키려하므로 비웃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이 말씀을 희롱하는 것은 보통의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마침내 그것이 농담으로 그렇게 웃어넘길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주의 고통 당하심"에 대해서. 우리 주 예수님은 죄인들의 "반대"만 아니라, 그들의 "멸시"도 참아내셨다. 그들은 매일 "예수님을 조소했다." 그는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는 달리 말씀하셨기에 사람들로부터 비웃음과 조롱을 받으셨다. 이것은 그들의 설교가 부당하게 "조소받는" 충직한 목사들에겐 낙담시키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사는 것은 수치가 아니라, 그럴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도들도 "업신여김'을 당했고, 그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제자가 스승보다 크지 못하다." (2) 예수님은 정당하게 그들을 꾸짖었다. 예수님을 "조소한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예수님은 "수치를 무시하시는" 방법을 아셨다) 경건의 능력과는 멀면서, 경건의 모양과 냄새만 피우며 스스로를 그들이 속이기 때문이었다(15절). 여기엔 그들의 "그럴 듯한 겉모양, 아니 차라리 그것은 "장려한 겉모양"이었다. 첫째, 그들은 "자신들이 사람들 앞에 부끄러움이 없다"고 여겼다. 그들은 무슨 나쁜 것이든지 그들의 책임으로 돌려지는 것을, 설령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시더라도 부인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홀로 거룩하고 신앙 깊은 사람들로 보아주기를 주장했고, 그러기에 예수님의 아래와 같은 공박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악한 자들이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잘 보이려고 전심을 기울이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상 앞에서 자신을 변명하려는 도다. 이러한 일에 너희를 당할 자가 누가 있겠는가?"라고 하셨던 것이다. 둘째, 그들은 "사람 중에 높임 받는 자들"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받아야 할 비난을 "삼갔을 뿐"아니라, 오히려 "찬양했고," 선한 사람들"이자 나아가 "최고의 사람들"임으로 높이 추대했다. 그들의 몇 마디 말은 신탁으로, 그들의 지시는 법률로, 그들의 관습은 침범할 수 없는 규칙으로 여겨졌다. 그들의 "추악한 내면. 그것을 하나님이 감찰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너희들의 마음을 아시나니, 그가 보시기에 몹시 싫으신 것이다. 왜냐하면 모두가 사악한 것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첫째,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게 여김은" 어리석은 짓이다. 또한 사람들이 "우리의 악함을 모른다"는 것이 마지막 심판 날에 우리를 구출해 주고 지지해 주라고 생각하는 것도 어리석은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은 아무도 모르는 우리의 악함을 아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스스로의 가치를 점검해 보고, 스스로를 신뢰하는 마음을 점검케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중심으로부터 아신다"는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많은 허위와 협잡이 거기에 있는가, 우리는 자신들을 낮추고 불신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둘째, 사람과 사물을 그것들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을 따라 평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또한 무지한 대중의 천박한 생각에 편승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귀히 여김을 받는 것"도 사물을 있는 그대로, 또 진리에 따라서 평가하시는 "하나님 보시기에는," 가증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는 멸시받고 저주받는 사람들 중에 주님께는 인정받고 칭찬 받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고후 10:18). (3) 예수님은 욕심과 자만에 쌓인 바리새인들보다는 더 잘 감화를 받을 세리와 죄인들에게로 향하신다(16절). "율법과 선지자는 사실 요한의 때까지이다. 유대인에게만 한정된 구약의 통치는 요한이 나타날 때까지였다. 이때까지는 너희들이 의와 구원을 독점한 것처럼 보였고 또 너희는 이것으로 우쭐하였으며, 그리고 이 때문에 율법과 선지자에 정통한 사람이라고 사람들로부터 높임을 받았지만, 세례 요한이 나타나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파한 후로는 사정이 달라졌다. 이제 신약 시대의 통치에 의하면 사람이 율법에 능통하냐를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유대인만 아니라 이방인이라도 누구든 복음 왕국에서는 평등한 것이다. 이제는 누구도 출신이 좋다고 남보다 특권을 누릴 수 있다거나 또 통치자이나 바리새인이 그 나라로 이끌어 줄 때까지 기다리자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신약의 통치는 구원이 유대인들의 것이었을 때의 유대인의 통치 제도처럼 민족을 단위 하는 정치적 통치 기구의 성격을 띠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제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영혼의 구원과 영원한 세계가 있다고 믿는 사람은 자신의 부주의와 사람들의 아첨에 현혹되어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천심 해야하는 것이다." 몇몇 사람들이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였다. 그들은 "율법과 선지자"에 부와 세상의 재물에 대한 약속이 많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부자들을 멸시하여 말씀하신다고 비웃었다. 하나님의 일군들 중 위대한 많은 사람들, 예로써 아브라함이나 다윗 같은 사람들도 부자였지 않는가? 라고 그들은 힐난했다. 그리스도는 대답하셨다. "사실이다. 지금까지는 그러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 나라의 전파가 새로운 방향 전환을 취하고 있음이 전파되기 시작한다. 가난한 사람, 애통하는 사람, 박해받는 이들이 지금은 복되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을 존경하는 백성들에게 보답으로 값싸고 쉬우며 형식적인 신앙 생활을 허용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이제 복음이 전파되면서 백성들의 눈은 열리고, 전에처럼 바리새인들을 우러르지 않을 때에, 전에 훈련받은 대로의 신앙 생활의 무관심을 견딜 수가 없게 된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로 거룩한 폭력을 강행한다. 천국에 들어가려는 자는 고통을 당해야 하고, 세태(世態)와 역행하여 싸워야 하고, 반대길로 가는 사람들과 대항하여 강행하여야만 한다는 것을 생각하자. (4) 그렇지만 그래도 예수님은 율법을 무효화하려는 어떤 시도로 반대하신다(17절).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 보다," 땅의 기초와 하늘의 기둥이, 즉 그렇게도 굳게 세워져 있는 "하늘과 땅이 없어짐이 쉬우리라." 도덕적인 법은 확고하고 불변의 것이다. 그 일점이라도 빠뜨릴 수는 없다. 율법이 부과하는 의무는 여전히 의무이며, 율법이 금하는 죄는 역시 죄이다. 진실로 율법의 명령은 복음에 의해서 설명되고 강화된다. 또한 더욱 영적으로 나타난다. 의식적인 법은 복음 안에서 완성되어지고 불분명한 곳은 복음으로 채워진다. "율법의 일획도 어길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설령 율법이 복음 안에서 그 법으로서의 힘은 잃었더라도, 그 모습은 하나의 형으로써 찬란히 빛나며 복음 안에 뚜렷이 판에 박혀 있기 때문이다. 전에 율법은 더 큰 해악을 막기 위해 눈감아 주는 몇몇 가지가 있었다. 그러나 복음은 이런 잘못을 사실상 허용치 않는다. 오히려 복음은 율법에 해를 끼치는 요소들을 제거하였다. 왜냐하면 이로써 복음은 율법을 율법의 근본 의도에 합치시켰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마태복음 5장 32절, 14장 9절의 이혼에 대한 사례에서 살펴보았었다. 그리스도는 이혼을 허용하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복음은 인간의 타락한 욕망과 정열을 밑둥째 치시며, 없애고 뿌리 뽑으려고 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들이 허용되면 더욱 맹렬히 줄기차게 뻗어나갈 것이기 때문에, 과거에 허용되었던 것처럼 그렇게 허용되어서는 절대 안 되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빛의 아들들의 이 땅에서 행하는 모든 수익사업의 목적은 마땅히 하나님의 영광 드러냄<생육번성충만정복 다스림의 문화 명령을 주신 것은.....주께서 공급하신 모든 것을 다스리도록 위임받은 청지기로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그 성품의 <어떠하심> 그대로를 반영하도록 하고, 주신 모든 사업들을 영위하되 영혼구원. 생명 증진 고양을 목표 함>으로써 유익케 함., 곧 이웃사랑에 있다... 주께서는 그 재물 얻을 능력과 지혜의 공급원천이 당신이심을 선포하셨으며 주님의 선한 사업을 확장 증진하기위해 그분에 합당하게 수고하고 정당한 이익을 도모함이 타당하다.<물론 무료자선사업도 있다> .. 하지만 그 사업이익을 획득하는 수단과 방편 또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방법<생명 고양과 사랑의 전파를 목적으로 하는 섬김이기에....타락한 죄성을 이용하거나 그 타락 정도를 더 악화시키는 사업 , 그 과정에서의 공정성 상실한 부당한 사업수익이나 뇌물 수수, 고리대금업 등은 주님의 성품에 비추어 볼 때 합당하지 않다..>과 정도의 타당성도 함께 더불어 말씀하셨다..<사회통념과 양심에서 벗어나는 계약으로 편취, 착취는 옳지 않다> 수행하고 그 얻은 바 또한 그 사업목적에 부합하도록 쓰는 것을 그 전제로 하셨음을 기억하자....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식물을 물위에 던지라 며칠후에 도로 찾으리라]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
**<<스쿼트>> 1 : 완벽한 스쿼트 하는법 익히기 - 두 발을 어깨 너비 정도로 약간 넓게 벌리고 선다. 발은 5~12도 살짝 외전.. 무게중심은 발목에 둠- 가볍게 허리에 손을 얹거나, 앞으로 손을 뻗어 중심을 잡는 등 가장 편안한 자세를 취한다.- 그 상태에서 숨을 약간 <헙 하고>들이쉬어주면 흉골돌기과 배꼽사이에 긴장이 오게 되는데, 이것은 척추정렬상태를 좋게 유지하게 해 주며 척추손상을 방지할 수 있게 해 준다... 이 상테에서 <기마자세로>엉덩이를 뒤로 쭉 내밀면서 내려오되 <턱은 살짝 당겨주어서 경추굽어짐을 제한해주고 눈은 그냥 그 상태에서 정면2미터 부위 응시할 것... 주먹쥐고 들어올린 팔도 운전대 쥔 것처럼 살짝 바깥으로 해주면 어깨의 타이트한 느낌이 유지되는데 내내 이 느낌은 유지되게 한다.., 더불어서 무릎과 허벅지근육들도 바깥으로 약간 비틀린 느낌을 항상 유지하도록> 엉덩이를 뒤로 빼면서 내려갈 때는 항상 고관절을 능동적으로 힌지한다는 느낌을 주면서 무릎이 이루는 각이 거의 직각이 될 때까지 앉는다. 허리는 척추의 곡선을 유지하면서 자연스레 세운 상태를 유지하면서 이때 고관절-허벅지근육순으로 근력 부하를 느끼면 더 좋다...이때 직각으로 앉은 자세에서 복근의 긴장을 느끼도록 하는것도 중요 - 이제 무릎이 최대한 수직에 가깝게 되면, 그 다음 동작으로는 일어나는 동작으로 들어 가게 되는데, 상체를 세우려고 무릎을 먼저 앞으로 내밀면서 그 반동으로 일어나는 일이 없어야 무릎손상을 막을 수 있다. 꼭<일어나는 동작 내내 숨을 길게 <쉬이-하고>내쉬면서> 먼저 발바닥중심에 힘 주어서 엉덩이를 뒤로 약간 밀어주고 그 후 무릎과 힙이 동시에 신전되게 해야 무릎에 부담이 가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라!!. ※ 허벅지가 길다면 무릎이 약간 발끝을 넘어갈 수 있는데, 정석은 무릎이 발끝을 넘지 않아야함 ※ 허리에 지나치게 힘을 주게 되면 하체가 아닌, 허벅지에 부담이 될 수 있음. 2 : 스쿼트 효과 높히기 '스모 스쿼트' 올바른 스쿼트 자세를 익혔다면 이제는 스쿼트의 효과를 높힐 수 있다. 완벽한 자세 만으로 스쿼트의 효과를 높힐 수 있긴 하지만 좀 더 효과를 높히는 방법이 있는데, 특히나 엉덩이 부위의 자극을 늘리고 싶은 경우, 지금부터 알려드리는 방법이 도움이 될 수 있다. 바로 '스모 스쿼트' 자세..... 허벅지 안쪽부터 엉덩이 안쪽을 아주 제대로 자극 해 줄 수 있는 스쿼트 동작이다..... <<기본적으로 스쿼트 방법과 같지만 다리를 기본 스쿼트 보다 넓게 벌리는 것이 특징.>> - 어깨너비 1.5배 정도로 두 다리를 넓게 벌린다. - 발 끝이 바깥쪽을 향할 수 있도록 한다. - 그 상태에서 바깥쪽으로 무릎이 향하도록 벌려 주면서 무릎 직각에 가깝게 굽히면서 자리에 앉는다. - 자세를 2-3초 정도 유지했다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난다. ※ 무릎을 바깥쪽을 향하면서 앉을 때, 무릎이 안쪽으로 모이면 안되며 ※ 일어설 때, 엉덩이를 치켜 올리 듯 들어주면 엉덩이에 더욱 자극이 된다. 스쿼트는 단순히 허벅지와 엉덩이를 날씬하고 탄력있게 만들어주는 것 외에, 제대로 스쿼트를 하게 되면 원활하게 하체의 근육량이 늘어나게 되는데, 다른 근력 운동에 비해 하체의 근육은 면적이 굉장히 넓기 때문에 그만큼 에너지 소비량도 크다... 다른 근육 부위 대비 약 50~70kcal 정도를 추가적으로 태우는 효과가 있으며, 만약 허벅지 근육량이 4.5kg 정도 늘어나게 되면 추가적으로 500~700kcal를 태워줄 수 있을만큼 스쿼트는 운동 효과 역시 굉장히 우수한 운동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고블렛스쿼트(양어깨 넓이) 케틀벨 든 채로 양팔꿈치가 무릎에 닿을 때까지 스쿼트..눈은 전방 응시 둔근, 복근, 허리곧추세움에 신경쓸 것
**스모/케틀벨데드리프트(약간 더 벌림) --케틀벨을 땅에 내려 놓고 발목사이보다 둔 후 고관절을 많이 구부리는데(힙 힌지를 확실히 하는데 목표) 목표를 두고 무릎은 거의 굽히지 말고 무릎이 발끝을 넘어가지않게 주의....데드리프트 시행... 턱은 30~45도 정도 이내에서만 약간 들고 둔근과 햄스트링신장에 중점 둘 것.. 어깨를 귀에서 떨어뜨려 멀리 둔채 들이 마신후 숨 내쉬면서 들어 올린다.. **데드리프트때 주의할 것은 힙힌지만 한다는 느낌으로...이때 무릎은 거의 구부리지 않는다는 느낌...힙힌지 최대시점때 복근팽창감...힙힌지 시작점으로 원위치시 되었을 때에 둔근수축감 느끼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가 됨///허벅지에 봉을 닿게 하고 상체를 편 상태에서 힙힌지를 시작한다면 봉이 다리정강이앞면을 스쳐지나가서 정강이 중간지점에서 도달하면 봉을 멈추고 유지하는데, 이때 눈은 턱을 약간 뒤로 당긴채 2미터 앞 정도를 응시..이때 숨들이쉬기가 끝난다<경추-흉추 정렬이 일어나도록 복근팽창 느낌을 꼭 느껴라!!>...이어 힙힌지를 푸는 과정인데.. 봉을 끌어올리는 것은 오히려 상체를 세워서 시작점으로 원위치시키는 것에 따라간다는 느낌으로 시행하는데, 상체를 천천히 세워서 무릎굴곡과 힙힌지를 완전히 풀고서 원위치한 후에 마지막에 엉덩이 둔근을 수축시켜주면서(이때, 요추의 정렬이 온전케 됨) 숨 내쉬기를 끝낸다 http://v.media.daum.net/v/20161122075545380?s=tv_news 1분튼튼건강
@@인간의 죄성과 하나님의 심판< 롬1:19-32>
1.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된 방법들(19,20) 하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서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다(<행 14:17>). [1] 그들이 이미 알고 있던 것: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19절). 다시 말해서 그들 속에도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알만한 것'이라는 말은 그렇지 않은 것이 많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하나님은 감지될 수는 있으나 파악될 수는 없는 존재이다. 유한한 이해력으로는 무한한 존재를 완전히 알 수는 없다. 그럴지라도 우리에게는 그 무한한 존재를 알만한 것이 있다. [2] 이러한 지식들의 출처.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개념들은 자연의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마음에 새겨두신 것이다. [3] 이러한 지식들이 창조된 만물에 의해 확증되었다(20절).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1)그들은 무엇을 알았는가?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알았다.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은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이다. 그럴지라도 그것들은 그의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이는 것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은밀히 행하시지만 그가 행하신 것은 밖으로 나타내며 그 속에서 그의 능력과 신성을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적어도 우상을 숭배하지 않아도 될 만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갖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불의로 막은 그 진리였다. 2)그들이 그 진리를 어떻게 알았는가? 그들은 그 진리를 '그 만드신 만물'에 의해 알게 되었다. 그것은 스스로 만들어질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제 일 원인이나 지적인 행위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제 일 원인이란 능력이 많으시고 영원하신 하나님 이외에 다른 어떤 존재일수 없다. 작품을 보면 그것을 만든 사람에 대해 알 수 있다. 모든 부분이 연합하여 전체의 선과 아름다움을 이루는 모습은 가히 창조주와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증거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와 같이 어둠 속에서 빛이 비쳤다. 그리고 그 빛은 '창세로부터' 비춰진 것이었다. 우리는 이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창조의 위대한 작품인 사람을 예로 든다. 그 진리를 알게 된 연대는 창세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은 태초부터 있어 온 아주 오래된 선한 길이다. 진리는 오류가 일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2. 사람들의 심각한 우상숭배(21-25) 만일 우리가 유대인들마저 그토록 쉽사리 우상숭배에 빠져든 것을 기억한다면 이러한 자연적인 인식들이 이방인들의 우상숭배를 막는데 아무런 효험도 없었다는 사실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감각의 수렁에 빠져든 타락한 인간의 상태는 그처럼 비참하다. [1] 그들의 우상숭배의 내적 원인(21,22절). 그러므로 이제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어떤 핑계를 댈 수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지식의 빛과 수단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였다(21절).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오직 그만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많은 신들을 세웠기 때문에 하나님을 그렇게 영화롭게 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그를 영적으로 예배한다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형상으로 바꾸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은 사실상 그를 전혀 영화롭지 않게 하는 것이다. 감사치도 아니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느끼지 못함이 우리가 그를 떠나는 죄의 주된 원인이다.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그들은 일반적인 진리를 많이 알고 있으나(19절) 그 진리를 개별적인 상황에 적용하는 사려분별을 갖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이내 허망하고 미련한 수많은 공상들에 빠졌다. 진리를 버리자 오류가 증가하였다.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마음이 어리석음과 실제적인 악함이 지적 기능과 능력을 흐리게 하고 어둡게 한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둔하게 되어(22절). 어떤 신에 대한 개념을 조작함에 있어 가장 화려한 상상을 했던 사람들은 가장 심각하고 터무니없는 자만에 빠졌다. 이와 같이 세상이 자기 지혜에 빠져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 지혜로 인한 자만이 많은 어리석음을 빚어내는 원인이다. 스스로 지혜 있다고 자만하는 유식한 아덴 사람들 가운데서 바울의 설교는 어디를 가나 매우 비웃음을 사고 조롱당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평범한 진리에 결코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 이상의 것을 안다고 생각하였고 그래서 아주 심각한 오류에 빠지고 말았다. [2] 그들의 우상숭배의 외적 행위들(23-25절). 1)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과 바꾸었다(23절).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푸신 가장 큰 영광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람의 형상으로 만드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행하는 가장 큰 치욕이다. 바울은 이 사실을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었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우상이 거짓 것이라고 불리어지는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영이심에도 불구하고 마치 몸을 가지신 것처럼 믿기 때문이다. 2)피조물에게도 신적 경외를 행함.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25절). 그들은 피조물에게 경배를 드림으로써 사실상 하나님을 부인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이든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창조주를 가까이 할 수 없는 최고의 신으로 생각하였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들이 피조물을 경배하였다는 것 자체가 죄였다. 그러나 그들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였다는 이 사실이 그 죄를 더욱 악화시킨 것이다. 이것은 이방세계에서는 널리 행해지고 있는 악이었다. 최고의 신을 알고 인정할 뿐 아니라 자기들의 다신론과 우상숭배를 불합리하고 터무니없는 것으로 확신하는 지혜있는 이방인들도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행했다. 여기서(18절) 사도가 말한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이란 말이 다른 무엇보다도 이 사실을 충분히 설명해 준다고 하겠다. 이방인들의 우상숭배가 하나님께 행한 치욕이라고 언급한 바울은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이라고 칭송하며 하나님께 경외에 찬 찬미를 드린다. 누군가가 하나님과 그의 이름을 멸시하는 것을 듣거나 볼 때 우리는 그를 높이고 영광스러우신 분으로 말해야 한다. 3.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24,26-32) 이것은 현세적인 심판이 아니라 그들을 아주 야만적이고 괴상한 정욕에 내버려두는 영적인 심판이다. '하나님께서 저희를…내어 버려두셨으니'라는 말이 여기서 세 번 거듭되고 있다(24,26,28절). 영적인 심판이야말로 모든 심판 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 하나님은 의로운 심판의 한 방법으로 그들을 포기하셨다. 즉 하나님은 그들을 상관하지 않고 내버려 두셨다. 은혜는 하나님 자신의 것이므로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은혜를 주실 수도 있고 거절하실 수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저희 마음의 정욕대로 내버려두신 것이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이 죄의 장본인은 아니시다. 왜냐하면 비록 이 내어버림으로 인해서 아주 심각한 악이 발생한다 해도 그 악의 책임은 죄인의 악한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환자가 의사의 처방대로 하지 않고 제 마음대로 자기에게 해로운 일을 한다면 의사는 그 책임을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환자에게서 발생되는 치명적인 증상은 의사의 탓으로 돌려져서는 안되고 질병 자체와 환자의 어리석음 탓으로 돌려져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상태로 내버려졌는가? [1] 더러움과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졌다(24,26,27절).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24절). 모든 잘못이 여기에 있다. 하나님을 치욕스럽게 만든 자들이 자신들을 치욕스럽게 하는 일에 내버려졌다. 사람이 자신의 정욕대로 하도록 내버려지는 것보다 더 무서운 노예상태에 빠질 수는 없다. 그들의 더러움과 부끄러운 욕심에서 나오는 행위들은 비정상적인 정욕들이다. 그런데, 많은 이방인들은 물론 그들 가운데 지혜 있다고 하는 자들마저도 그런 일들에 악명이 높았다. 아마 사도는 여기서 특별히 그들의 우상숭배를 통해 저질러진 혐오스러운 일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추악한 신들에게 드려지는 추악한 예배이다. 인간의 본성에 어떠한 악이 있는가를 보라! 그리고 하나님이 진정으로 우리의 약한 본성을 억제하는 은혜를 얼마나 베푼지 생각해보라!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이 이런 악을 억제하지 않았다면 단지 천사보다 조금 낮게 지어진 인간이 자신을 마귀보다 더 형편없이 낮게 만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것을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게 받았다'고 말한다. [2] 상실한 마음으로 이 가증스러운 일들을 하도록 내버려졌다(28절). 1)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그들의 맹목적인 지식은 그들의 완악한 의지와 감정에 의해 야기되었다. 그들은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의 지식안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들이 많이 있었으나 그들은 그 지식 안에 하나님을 두지 않았다. 그렇게하게 되면 그들의 정욕이 방해를 받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알려 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은 서로 다르다. 이교도들도 하나님을 알지만 그를 인정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2)하나님은 이와 같은 그들의 완강한 태도에 대한 보응으로, 그들을 여기서 '상실한 마음'이라고 불리는 아주 무서운 죄에 빠져있도록 내버려두셨다. 죄가 어디까지 발전되며 마침내 죄인을 어떤 구렁텅이에 빠뜨리는가를 보라! 이 상실한 마음이란 감각이 없고(<엡 4:19>) 무분별하며 마비된 양심을 말한다. 이와 같이 완악한 굳은 마음은 마땅히 그에 상응하는 엄한 형벌을 받는다. 그러므로써 그들로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하신다. 바울은 여기서 이방인들이 짓는 합당치 못한 일들의 죄목들을 덧붙인다. 상실한 마음이 악을 좇을 때만큼 본성의 빛에 어긋나는 악은 없다. 그 당시의 역사적 기록들을 보면 여기에 언급된 죄들은 로마 전체에 걸쳐 만연해 있던 죄들이다. 자그만치 스물 세 가지 종류의 죄와 죄인들이 여기에서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29-31절). 그 당시야말로 로마가 개혁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로마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될 때였다. 먼저 첫 번째 돌판에 새겨진 계명들을 거스리는 죄들이 있다.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30절). 여기에서 마귀의 본성이 드러나며 죄가 죄로써 명백히 나타난다. 모든 죄가 그 속에 하나님에 대한 증오를 품고 있다. '교만한 자'와 '자랑하는 자'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보좌 앞에 드려야 할 면류관을 자기들의 머리에 쓴다. 다음으로는 두 번째 돌판에 새겨진 계명들을 거스리는 죄들이 있다. 전반적으로 여기에는 불의에 대한 비난이 있는데, 이 죄과가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은 모든 죄가 불의이기 때문이다. '부모를 거역하는' 것과 '무정한' 것은 다섯째 계명을 거스리는 죄이다. 불순종하는 자녀들은 당연히 무정한 부모들에 의해서 그리고 부정한 부모들은 불순종하는 자녀들에 의해서 형벌을 받는다. '악의'(악을 위하여 악을 행하는 마음), '시기, 살인, 분쟁, 악독, 무자비' 등은 여섯째 계명을 거스리는 죄들이다. 이 모두가 우리의 형제에 대한 미움 즉 마음의 살인을 밖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추악'(간음)은 일곱째 계명을, '불의, 탐욕'은 여덟째 계명을 거스리는 죄들이다. '사기, 수근수근하는 자, 비방하는 자, 배약하는 자, 악을 도모하는 자, 우매한 자'들은 아홉째 계명을 거스리는 자들로서, 그들은 악을 행하는데는 지혜로우나 선을 행하는 일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들은 죄를 꾸미는 일에는 아주 영리하나 하나님을 생각하는 일에는 우매하다(그것도 거의 백치에 가깝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본래부터 그 속에 이모든 죄들의 씨앗과 알을 품고 있다. 마지막에 가서 사도는 그들의 죄가 더욱 악화된 상태를 언급한다(32절). 그들은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율법을 알고 또한 형벌도 알았다..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알고도. 그들의 양심이 이 사실을 그들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알면서도 죄를 지을 때 그 죄는 더욱 심각해진다. 자기들만 행할 뿐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하느니라. 다른 사람들이 죄 짓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것은 순전히 죄 그 자체를 위하여 죄를 사랑하는 처사이다. 그것은 마귀의 왕국을 위하여 마귀와 동맹하는 짓이다. 다른 사람들의 죄를 옳다고 하고 그 죄에 협력할 때 우리의 죄는 더욱 무거워진다. 이제 이 모든 점을 고려해 볼 때 이방인들이 자기들의 행동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학 2:8]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 내 것이 어디 있나? ◉남의 것을 가지고 내 것인 양 우격다짐으로 살지말라는 말씀... -사람이 남의 것을 내 것인 양 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세상에 내 것이 어디 있나요? 쓰다가 다 남겨두고 갈 것인데! ’ 수많은 모든 것이 다 자기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기 것이라고 우겨대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채우려고 하는 사람을 과연 진실한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요...? -세상에 올 때부터 아무것도 없이 심지어 먹을 것 하나도 없이 기껏해야 손가락이나 빨던 처지에 이제와서 좀 움직인다고 강도 같이 남의 것을 내 것이라고 우겨대고 도적질하니 어찌 망령되다(어리석고 이치에 맞지 않고 터무니 없이 우습다)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기에, 주님은 [학 2:8]에 말씀하십니다.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런데도 여전히 눈치를 보면서 긁어 모으는 것을 보면 도적질임에 분명하지 않나요...? ◉불평하고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인의 것을 잠시 빌려 쓰면서 양에 차지 않는다고 원망과 불평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욥 41:11]에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 그러니 오로지 감사만 있을 뿐이지요.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약 4:14]에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 잠간 빌려 쓰고 있으면서 없다고, 없어졌다고 안달하지 말고 족한줄 알고 주인에게 맡기고 평안하기를 바랍니다. -[히 13:5]에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결코 나몰라라 하면서 외면하지 않고 <주께서 볼 때 필요한 만큼>항상 채워 주겠으니 족한 줄 알라는 말씀입니다.
>>###황무지 개간(개척, 변혁 ---생명산출자)---돌을 골라내고 흙덩이를 부수고 이랑을 내어서 공기와 물이 땅속으로 잘 스며드는 생육환경 만들어주고, 씨를 뿌리고 덮어준 후 날마다 찾아와서 흙속의 씨앗이 죽어 움트고 그 결과 식물 속생명이 피어나 잘 자라는데 방해가 되는 잡초 등의 요소를 제거하는 등 돌봄의 수고를 함......이것이 사람의 마땅한 바임//이렇게 한 후 이제 남은 것은 주님의 풍성케 하심을 기도하며 기대앙망하는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