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y:(3027, 야드) 손 hand 야드(명여)는 기본어근이며, '손 hand'을 의미하며, 여러 가지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600회 이상 나온다. 야드의 기본적인 의미는 '사람의 의지의 기능들을 수행하기 위해 사용된 팔의 끝부분'이다. 이 용어는 문자적으로 좋든 나쁘든(창 4:11), 일반적인 일의 기능을 행하는 사람의 손에 대해 사용된다(창 5:29). 동해보복법("손에는 손")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받은 신체 부위에 해당하는 신체부위를 파괴하는 형벌이다(참조: Harris, R. L., Man-God's Eternal Creation, Moody, 1971, pp. 117-18). "손"이란 말이 관용적으로 사용되는 방법이 여러 가지라는 사실은 신학적으로 의미심장하다. 이런 관용어들은 손의 용도가 넓다는 데서 나온 것이다. "어떤 사람의 손 안으로(혹은 아래에)"라는 어구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책임, 돌봄 그리고 지배를 포함하는 권한을 나타낸다. 사람은 이런 권한의 보호하에 있을 수 있다. 아마르나 서신에 나오는 가나안인들의 어휘 바-디-우(ba-di-u)는 '그의 손안에' in his hand를 의미한다. 인간은 다른 창조물을 "그의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창 9:2). 하갈에 대한 사라의 권한(창 16:6, 창 16:9), 보디발의 집에 대한 요셉의 권한(창 39:3-8), 이스라엘에 대한 모세와 아론의 권한(민 33:1), 그리고 아람에 대한 다윗의 권한(대상 18:3), 이 모든 것은 이 어구로 표현된다. 여호와는 우리의 생명에 대한 권한을 갖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그의 돌보심, 주권, 그리고 심판에 맡겨둔다(시 31:5, 시 31:15, H6, 16, 삼하 24:14). 더구나 이 관용어는 어떤 사람이 '자기 손안으로 인도될 때 그에 대한 승리'를 묘사한다. 반대로, 구원은 '어떤 사람의 손 밖으로 인도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종종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원수들을 '이스라엘의 손 안으로 인도할' 것이며(창 49:8, 수 6:2) 이스라엘을 '원수들의 손 밖으로 인도하리라'고(출 3:8) 약속하였다. 도피성은 피의 보수자의 '손에서부터' 무고한 살해자의 '구출'을 제공해 주었다(민 35:15). 손은 '능력' power이나 '힘' strength을 상징한다(신 8:17). 신 32:36은 "그들의 손이 가버렸다"고 말함으로써, 이스라엘의 힘의 상실을 묘사하였다. 모세의 손은 애굽에 대항한 재앙에서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 맹렬하게 사용되었다(출 10:12-15). 이 은유의 가장 두드러진 용법은 이 은유가 하나님의 능력을 전달한 것이다. 야드는 하나님의 전능 하심의 상징이다(대하 20:6, 시 89:21). 대상 29:12은 여호와의 손에 능력과 힘이 있다고 선언한다(참조: 시 89:13, H 14). 그의 손은 '짧지'(혹은 '약하지')(사 59:1) 않고 강하다. 하나님의 손은 천지 창조, 통치(사 48:13)를,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손은 구원과 해방을, 이스라엘의 적들에게는 파멸과 멸망을 나타낸다(출 7:4, 출 9:3, 삼상 7:13). 그의 능력에 대한 두드러진 증거는 그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신 것이었다(출 13:3-16, 민 33:3). 모든 세상은 이 사건을 통해서 여호와의 능력을 목격했다(수 4:24). 하나님의 손은 진리와 정의를 행하시며(시 111:7), 의인들을 지지하고 인도한다(시 37:24, 시 139:10). 하나님의 손은 그의 의로운 형벌(삼하 5:6, 삼하 5:11), 그의 자애적 돌봄(스 7:6, 욥 5:18, 시 145:16, 사 49:16), 그의 보호(사 51:16)를 표현한다. 그는 언제나 우리를 위해서 손을 들어올린다(시 10:12). 그 당연한 결과로서의 개념은 어떤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에 관한 것이다. '손이 미치다'나 '손이 있다'는 어떤 일을 하거나 얻을 수 있는 능력을 나타낸다(레 14:21-32). 야드는 '소유'라는 의미를 전달한다. '소유'는 손의 일반적인 기능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손에'라는 어구는 종종 이런 의미를 함축하곤 한다. 이스마엘 사람들은 요셉을 그들의 소유물로 취했다: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그를 사니라"(창 39:1). 여호와께서는 자기가 다윗 왕국을 그의 아들의 손에서 취하시겠다고 선언하였다(왕상 11:12, 왕상 11:31-35). 야드는 '복종'이란 의미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복종은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의 수하에 두다'라는 문구로 표현된다. 대상 29:24에서 "...여러 아들이 솔로몬 왕에게 복종하니"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여러 아들이 그들 자신을 솔로몬 왕의 수하에 두니'이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에게 반역하지 말고 그에게 '복종하라'고 권면하였다. 야드는 기호와 상징 언어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손을 펴거나 들어 올리는 것은 서너 가지의 행위와 관련되어 사용되었다. 첫째, 기도, 겸손한 탄원을 나타낸다(시 28:2, 대하 6:12 이하). 둘째, 주기적으로 공식적인 축복을 수반했다(레 9:22). 셋째, 맹세할 때 손을 들어 올린다. 아브람이 전쟁 전리품을 취하지 않겠다고 맹세할 때, 그는 소돔 왕에게 자기 손을 들어 올렸다. 맹세를 나타내는 또 다른 방법은 아브람의 종이 아브람의 명령에 충실할 것을 맹세하면서 행한 것처럼, 다른 사람의 넓적다리 아래에 손을 넣는 것이었다(창 24:2, 창 24:9). 성경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서원은 하나님께서 신인동형론적으로 행하신 것들이다. 성경에서 이것을 수반하는 징표로서 가장 기억할만한 맹세는 아브람에게서 한 민족을 세워 이 민족, 즉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계를 축복하시겠다고 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영원한 언약적 약속이다(창 12:1-3, 참조: 출 6:8, 민 14:30). 하나님은 또한 자기 백성의 피를 보수하시겠다고 맹세했다(신 32:40). '손을 대는 것'은 4가지의 기본적인 의미를 지닌다. 첫째, 이 어구는 죽이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창 37:22, 창 37:27). 둘째, 이 단어는 축복의 의식적인 의례에서 사용되었다(참조: 창 48:17). 셋째, 특별한 직무나 일을 위임할 때는 대개 손을 대는 것이 수반되었다(참조: 모세가 여호수아를 취임 시킨 사건과 행 13:1-3). 넷째, 대속이라는 중요한 신학적 개념은 언제나 희생 짐승에 손을 대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속죄일에, 대제사장은 염소에 손을 댐으로써, 민족의 죄를 염소("대속물")에게 전이 시켰다. 각 사람들은 이런 표현을 사용하여 자기들의 죄가 희생 짐승에게 전이되어 그 짐승들이 그 죄를 짊어졌다고 묘사하였다(출 29:10-19, 레 1:4). 마침내 이런 비유적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일에서 성취되었다(골 2:14). 손을 채운다는 것은 직분을 맡기는 것을 나타낸다(출 29:9-35, 출 16:32, 민 3:3). 성직 수임은 '손을 채우다'라는 관용어로 묘사되었다. 출 29:9에서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위임하여 거룩하게 할찌니라"는 문자적으로 '아론의 손과 그 아들들의 손을 채우게 하라'이다. 일부 학자들은 손을 채운다는 말은 손이 가득 차 있어 다른 일을 할 여지가 없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학자들은 이 어구가 주로 제사장들의 성직 수임 때에 사용되었으므로, 희생 제물의 몫을 취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했다. '손을 뻗친다'는 것은 두 가지 개념을 전하는데 하나는 어떤 대상을 "공격하는 것"을 나타낸다(수 8:19, 수 8:26). 다른 하나는 여호와에 대한 시편 기자의 열망을 묘사한다(시 143:6). 손으로 머리를 싸는 것은 슬픔을 나타낸다(렘 2:37). 손뼉을 치는 것은(그 감정에 따라) '불쾌, 격렬한 흥분'(민 24:10), '기쁨'(시 47:1, 겔 25:6), '악의에 찬 기쁨'(겔 6:11)을 나타낸다. 손을 얹는 것은 능력의 전달(왕하 13:16)이나 죄의 전가(레 1:4, 레 8:22 등)를 나타낸다. '어떤 사람이 손을 어떤 일에 두다'라는 어구는 그 사람이 관여하고 있는 "일"과 활동을 나타낸다(신 2:7, 신 30:9). '손을 강화하는 것'은 어떤 사람을 돕는 것을 의미한다(참조: 다윗을 돕는 요나단, 삼상 23:16). 강퍅한 반역은 "높은 손"이란 어구로 묘사된다(민 15:30). 반대로, 이와 똑같은 표현이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출해내신 하나님의 강한 구출을 나타내었다(출 14:8). '손을 흔드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와 파괴를 상징했다(사 10:32, 사 19:16). 마찬가지로 모욕도 이런 상징으로 묘사되었다(습 2:15). 손을 씻는 행위는, 정결하게 하는 것과 관련된 계명들을 지키기 위해 행해졌을 뿐 아니라 결백의 확증 및 깨끗한 양심을 나타내기 위해 시행되었다(신 21:6, 시 26:6, 참조: 욥 17:9, 시 24:4, 마 27:24). 의식적 정화는 '손을 씻는 것'으로 묘사되었다(레 5:11), 이것은 그 사람을 의식적으로 의롭게 만들어준다(삼하 22:21). 손의 기호(출 13:9, 출 13:16, 신 6:8, 신 11:18)는 자기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계명들을 끊임없이 기억하기 위한 하나의 생생하고도 영구적인 수단이었다. '손을 여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 주는 것이었다(신 15:8, 신 15:11). 반면에 '손을 닫는 것'은 주지 않는 것이었다(신 15:7). 하나님은 모든 생물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서 그의 손을 여신다(신 145:16). '자기 손을 늦추는'(자기 손을 움츠리는) 사람은 '포기하는' 사람이다(수 10:6), 게으론 자는 "자기 손을 그릇에 묻는다"(잠 19:24). 침묵은 손으로 입을 막는 것이다(잠 30:32). 흥미 있는 것은 '손'이 '법령' ordinance(스 3:10)이나, 아마도 언약을 세우기 위해 혹은 종교적 기념으로 사용된 '기념물' monument(참조: 하솔에 있는 의식적 석비)을 의미하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삼상 15:12, 사 56:5). 율법이 삶의 중심임을 이스라엘인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해, 율법은 상징적으로 그들의 손에 두어졌다(신 6:8). 법령과 하나님의 말씀을 제공하는 수단은 '~의 손으로' by the hand of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아마도 손을 결합한다는 것 때문에, 야드가 부어 만든 바다의 바퀴들의 '축' axles(왕상 7:32-33)과 성막이나 성전의 판지를 고정하기 위한 '지주' stays(장부 tenons)라는 의미로 사용되게 된 것 같다(출 26:17-19, 왕상 7:35-36). 옆에 늘어뜨린 손으로 말미암아 야드가 '측면' side, '해안' coast, 혹은 '경계' border라는 뜻으로 사용되게 된 것 같다(출 2:5, 민 2:17, 민 34:3). 손을 펼치는 것은 '공간' space을 의미했으며(창 34:21), '손'은 또한 '부분' part이나 '시간' time을 의미했다(창 43:34, 창 47:24).(참조: R. H. Alexander; BDB; DNTT). -------------------- @ymiy:(3225, 야민) 오른손, 오른편 야민(명여)은 '오른손 right hand, 오른쪽(편) right side'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40회 나온다. 야민은 문자적으로 셈올(왼쪽 the left, 이 단어는 '북쪽'을 뜻하는 말로 사용됨)과 반대되는 것으로서 인간의 오른손에 대해 사용된다. 이에 관한 좋은 예는 창 48:13-14에 있다. 여기에서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들을 축복할 때, "우수를 펴서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좌수를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어긋맞겨 얹었"다. 요셉은 이를 기뻐하지 않고 야곱의 손을 바꾸려고 했다. 왜냐하면 이 때 이미 오른손에 어떤 의미가 부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야곱은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오른 손을 치우기를 거절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즉 므낫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창 48:19). 축복의 오른손을 통해서 전해지는 은총과 힘의 개념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베냐민 "(내) 오른손의 아들"은 분명히 야곱의 막내 아들로서의 특별한 은총과 위치를 보여주는 이름이라는 사실은 주목되어야 한다. 이 이름은 또한 일찍이 셈족의 한 부족의 마리 석판에서 사용되었다. 이 경우에 이 이름은 다른 의미, 즉 "남쪽의 아들들"이란 의미를 지닌 것 같다. 하나의 또 다른 문자적인 용법도 언급되어야 한다. 욘 4:11은 여호와께서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니느웨 사람들에 대해 언약적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난다. 신학적으로 고찰할 때 더 중요시되어야 할 용법은 특히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나타내 주는 "주의 오른손"이란 비유적 표현이다. 최초의, 그리고 가장 분명한 언명들 중의 하나는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고 애굽 군사들이 파멸 당한 후에 불렀던 모세의 승리의 노래에서 발견된다. 출 15:6에서 그는 "여호와여 주의 오른 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라고 외친다. 그리고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출 15:12)와 결부시켜 생각할 때 훨씬 더 분명해진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은 원수로부터 자기 백성을 구출해내시는 도구인 그의 오른손으로 묘사된다. 게다가 이것은 수많은 찬양 시편의 주제가 된다. 예를 들면 시 98:1, "그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도다"가 그렇다. 시 20:7, 시 21:9도 참조하라. 더구나 곤궁할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소망과 의지(confidence)가 되는 것은 주의 오른손이다. 사 41:10 하반절은 힘과 도움을 오른손의 도구적인 사용에 분명하게 결합시키고 있다.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참조: 사 41:13, 시 18:35, H36). 사 45:1에서 바사의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는다"고 언급된다. 우리는 이것을 고레스의 오른손이 여호와에 의해 굳세어졌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성경은 또한 하나님의 오른손의 능력이 백성들을 굳세게 하여 가나안 그리고 특히 시온의 거룩한 산을 정복할 수 있게 했다고 고백한다(시 78:54). 하나님의 "우편에"라는 장소는 경건한 사람들이 영원한 즐거움과 기쁨을 맛보는 장소로서 시 16:11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또한 이 말은 종말론적으로 메시야의 보좌에 대해 사용되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네 우편에 앉으라"(시 110:1). 이 일은 행 2:33-35에서 베드로가 지적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승천에서 성취되기 시작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하여, 그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고"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선언하실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앞에 언급된 시 16:11에 그 의의를 더해주는 것이다. 예수께서 배반당하시던 날 밤에 대제사장에 대한 응답으로, 예수님은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을 ...보리라"(마 26:64)고 말씀하셨다. 그는 시 110:1을 인용하여, 테스 두나메오스(권능의 of power)를 첨가 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전능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참조: 행 7:55에 나오는 높임받은 그리스도에 대한 스데반의 환상). 야민은 출 14:22, 출 14:29의 "그들의 좌우의 벽"에서 위치를 가리켜 사용되었으며, 신 2:27, "나를 네 땅으로 통과하게 하라...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라"에서 방향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이런 방향을 나타내는 용법은 또한 비유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으로부터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이탈할 가능성을 표현해 주고 있다(신 17:11, 신 17:20, 수 1:7, 수 23:6 등). 야민은 또한 몸의 다른 부분들, 예를 들면 어깨, 넓적다리에 대해서도 사용된다. 마지막으로 야민은 '남쪽' south으로 번역된다. 왜냐하면 동쪽을 마주하고 섰을 때, 오른손은 남쪽에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시 89:12의 차폰 웨야민(남북을 주께서 창조하셨으니)을 참조하라. 남 아랍에 있는 에멘 왕국도 역시 '남쪽'이라는 의미를 나타내주고 있다. 우가릿어 ymn은 메시야에 관한 종말론적 개념으로 사용된 경우 외에는 이 단어의 정확한 동족어라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은 재미있다. 애굽인들의 방위는 상류를 바라보는 것을 필요로 했다(이리하여 '오른편 = 서쪽'; UT 19: no. 411)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참조: P. R. GILCHRIST). ----------------------- ['/rz](2220, 제로아) 팔, 어깨, 힘 제로아(명남, 여)는 어원이 불분명하며, '팔 arm, 어깨 shoulder, 힘 strength'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90회 나온다. (a) 제로아는 문자적으로 '팔'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삿 15:14, 삿 16:12, 삼하 1:10, 사 9:20, 사 17:5, 신 33:20, 슥 11:17, 아 8:6, 사 44:12, 겔 4:7 등). 제로아는 힘의 자리로서 팔이다(시 18:34 = 삼하 22:35, 욥 26:2 등). 사람의 힘을 상징하는 육의 팔은 하나님의 힘에 비하면 무력하다(대하 32:8). (b) 제로아는 힘의 상징인 팔에 대해 사용되었다. ① 인간 팔(힘)(삼상 2:31, 겔 22:6, 겔 31:17, 잠 31:17, 대하 32:8, 렘 17:5, 시 44:3, 욥 22:8, 욥 22:9, 시 83:8, 욥 35:9, 겔 17:9). ② 하나님의 힘(시 71:18, 사 40:10, 사 33:2, 사 53:1, 사 59:16, 사 63:5). 「참고 - 팔은 하나님의 힘을 의미하는 신인동형론적 묘사로 자주 사용되었다. 이에 대한 가장 생생한 용례는 사 30:30에 나오는데, 여기에서 번쩍이는 일격이 '그의 팔의 내리 꽂는 강타'로 묘사되어 있다. 하나님은 창조하실 때와(렘 32:17)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해내실 때(출 6:6, 출 15:16, 신 4:34, 시 77:15, 사 63:12) 그의 '펼치신 팔'의 힘을 드러내셨다. 이와 비슷한 방식에서 여호와의 그 팔, 혹은 힘은 마지막 날에 또 다른 구원을 가져올 것이다(시 98:1, 사 40:10, 사 51:9 이하, 사 52:10, 사 63:5, 겔 20:33 이하). 한편, 이스라엘은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보전하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팔 아래 있다(신 33:27, 시 89:13 [H14], 사 33:2). 이와 똑같은 팔이 두 경우(대하 6:32, 사 40:11)에 개인을 위하여 사용되었다. 사 53:1에서 '여호와의 팔'은 여호와께서 그의 종을 통하여 성취하신 구속을 나타내는 말씀의 환유로 사용된다(W. C. Kaiser)」. (c) 제로아의 복수형은 군사력과 정치 세력에 대해 사용되었다(단 11:15, 단 11:22, 단 11:31). (d) 제로아는 희생 짐승의 '어깨'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것은 제사장의 몫이다(민 6:19, 신 18:3).(참조: BDB; TWOT). -------------------- hc;[;(6213, 아사) 일하다, 행하다, 만들다, 형성하다, 이루다 아사(동사)는 기본 어근이며, '일하다, 행하다, 만들다, 형성하다, 이루다'를 뜻하며, 그 기본 의미는 '행하다, 만들다'이다. 이 단어는 많은 표현에서 항상 동일한 기본 개념을 지닌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630회 나오며, 칼형, 니팔형, 푸알형으로 사용되었다. (a) 아사는 창세기의 창조 기사에서 매우 자주 나타나며, 이는 중요하고도 매우 흥미롭다. 바라(ar:B: , 1254)는 칼형에서 (1) 관련된 대상의 개시, (2)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 (3) 창조된 대상의 완전한 새로움, (4) 무에서 창조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아사는 의미의 영역이 훨씬 넓으며, 어떤 특수한 어감을 거의 지니지 않은 채 대상의 형성을 주로 나타낸다. 아사는 자주 바라와 상호 교대로 사용되어 단순히 창조 과정에서 관련된 대상들을 조성하거나 만드는 행동을 나타내는 반면에 바라는 그 물체에 대한 창시를 강조한다(참조: 창 1:1). 창 1:7에서 하나님께서 '창공(궁창)이 있으라'고 명령하셨으면 창공은 만들어질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창공을 만드셨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것은 창공이 있으라는 명령이 창공이 실존하기에 불충분함으로 보충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진 이후 그것이 실현되기까지 하나님의 창조 능력이 계속적으로 발휘되었음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성령의 역사를 감지할 수 있다. 아사는 하나님께 사용되면 흔히 역사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활동을 강조한다. 이러한 문맥들은 구약성경 신학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 가운데 하나, 즉 하나님은 초월적이실 뿐만 아니라 역사 안에 내재하셔서 그의 주권적인 목적을 이루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모세는 애굽에서의 하나님의 크신 행사들을 회상하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을 백성들에게 상기시킬 수 있었다(신 29:1). 하나님께서 여러 민족들에게 행사신 일은 하나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심을 증거해 준다(수 23:3). 솔로몬은 봉헌 기도에서 하나님께서 "행동하실" 것을 간청한다(왕상 8:39). 아사는 종종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대해 사용되어(수 24:17, 시 98:1, 사 25:1) 구약성경이 하나님의 내재하심에 관하여 크게 강조함을 다시 증명한다. 아사는 구약성경의 그 밖의 곳에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여러 측면들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시 86:9, 시 95:5, 시 96:5). (b) 아사는 윤리적인 의무의 개념으로 종종 사용된다. 언약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행하라'는 명령을 자주 받는다(출 23:22, 레 19:37, 신 6:18, 등). 이 개념이 나타나는 무수한 문장은 하나님께 윤리적으로 응답하는 것의 중요성을 입증해 준다. 여기에서 응답은 단순한 정신적인 추상적 개념을 넘어선 것이며, 논증할 수 있는 행동에서 분명이 증거되는 순종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아사는 선악간에 행하는 것(창 3:14, 창 20:10, 왕하 12:3, 왕하 14:13, 왕하 8:18, 왕하 8:27, 신 16:12, 신 30:8, 민 15:39 등)에 대해 사용되었다. 아사는 죄, 잘못에 대해 사용될 때 '저지르다, 범하다'라는 의미를 지니며(호 6:9), '~에 대하여 행동하다'(슥 1:6), 그리고 충고를 따른다는 의미에서 '따르다'(삼하 17:23)를 뜻한다. (c) 아사는 어떤 것을 만들다(출 20:4, 신 9:12, 창 3:21), 전쟁하다(창 14:2, 수 11:8, 신 20:12, 신 20:20), 친절하게 대하다(삿 1:24), 신실함을 보여주다(창 32:10), 제물을 드리다(출 10:25), 어리석게 행동하다(신 22:21), 희생제물을 드리다(출 10:25), 유월절을 지키다(출 12:48), 복수하다(삿 11:3), 식물이 열매를 맺다(창 1:11), 음식을 준비하다(창 18:7 이하), 직무를 행하다(왕하 17:32), 화해하다(사 27:5), 제사장들을 세우다(왕상 12:31, 왕상 13:33), 사용하다(삼상 8:16), 보내다(전 6:12) 등을 의미하거나 그런 의미를 구성한다. (참조: T. E. Mccomiskey; BDB; KB). -------------------------------- [v'y:(3467, 야샤) 구원하다, 구출하다, 구조하다 야샤(동사)는 기본어근이며, '구원하다, 구출하다, 구조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00회 나오며, 니팔형과 히필형으로만 사용되었다. 야샤와 그 파생어들은 약 350회 나온다. 아랍어 어근의 의미는 '넓게 만들다'나 '충분하게 하다'이다. 이 어근은 '제한되다'나 '고통을 야기시키다'를 의미하는 차라르(좁은 narrow)와 대조된다. 넓은 것은 고통으로부터의 자유와 자기 자신의 목표물을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고통에서 벗어나서 안전을 얻기 위해서는 구출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구출은 압제 당하는 사람들의 편 이외의 어떤 곳에서부터 행해져야 한다. 구약성경에서, 국가적인 것이든 개인적인 것이든, 고통의 종류에는 원수들, 전염병이나 기근 같은 자연 재해들도 포함되어 있다. 구원을 가져오시는 분은 "구세주"로 알려졌다. 그렇지만 이 말은 신학적 의미와는 무관하게, 일상생활에서 사용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모세는 우물에서, 르우엘의 딸들이 목동들에 의해 쫓겨나는 것에서부터 구해주었다(출 2:17). 그러나 일반적으로 구약성경에서 이 말은 종교적인 의미를 강하게 지닌다. 왜냐하면 구원을 행하신 이는 여호와이셨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그는 "우리 구원의 하나님"으로 알려졌다(시 68:19이하, H20이하). 비록 구원이 인간 대리자를 통해서 행해지기도 했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대리자에게 권한을 주셨다는, 오직 그 이유 때문이었다. 신약성경에서 구원의 개념은 주로 죄의 용서, 죄의 권능으로부터의 구원, 그리고 사탄의 패배를 의미한다. 비록 구약성경이 이런 방향으로 향하기 시작하긴 했지만 구원에 관한 대부분의 언급들은 여호와께서 실재적인 원수와 실재적인 재해로부터 구출해주신다는 것에 대한 것이다. (a) 구원의 종류: 여러 번, 다른 나라들의 압제를 당한 이스라엘은 자유를 얻고 계속 유지해 나가기 위해 싸우러 나가야 했다. 이 전쟁들에서, 이 민족은 도움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로 돌아섰다. 그들은 전쟁의 결과가 여호와께 속한다고 믿었다(삼상 17:47). 그래서 그들은 감히 승리의 결과를 확신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구원 행위의 초점은 애굽의 속박에서 이스라엘이 구원 받는 것이었다(출 14:30). 그리하여 그들은 여호와의 구원을 받은 백성으로 알려지게 되었다(신 33:29). 이런 구원 행위는 미래 세대들에게 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들에게도 여호와의 주권을 나타내주는 증거가 되었다(참조: 시 106:8, 삼상 4:6이하). 후에 이스라엘인들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것을 기대했을 때, 모세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너희와 함께 행하시며 너희를 위하여 너희 대적을 치고 너희를 구원하시는 자"라고 말했다(신 20:4).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 약속을 성취하셨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소유하도록 백성들을 인도하였다. 후에 이스라엘이 주변 국가들 중의 한 국가에 의해 압제 당했을 때, 하나님은 사사를 통해서 그들을 구출하셨다(삿 2:16). 일반적인 형태는 하나님께서 사사에게 자기의 영을 부여하여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쳐부수게 하는 것이었다. 후에, 왕정 하에서 이스라엘은 여호와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도움을 받은 의로운 왕에 의해 원수들을 쳐부쉈다(삼상 9:16, 시 20:6, H7). 진실한 믿음을 가진 지도자는 요나단의 말,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삼상 14:6)라는 정신으로 감히 전진해 나갔다. 하나님에게서 오는 구원은 왕의 영광이었으며 백성들에 대한 그의 권세를 확고하게 세워주었다(시 21:5, H6). 이 민족의 힘이 강해지고 명성을 떨칠 때, 왕과 백성들이, 구원은 강한 군사들에 의해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시 44:1-8, H2-9). 비록 하나님께서 구원을 행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인간 대리자를 사용하시긴 하지만, 장애물 정복은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 자신의 특별한 도우심이 있어야 할만큼 매우 극적인 것이었다(참조: 잠 21:31). 여기에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면서도 그의 백성들의 특성을 세우는, 하나님의 행동과 인간의 반응 사이의 창조적인 긴장이 있다. 때로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이 일을 행하시므로, 모든 사람들은 여호와의 강한 행동을 기다리고 바라보는 일을 해야 한다(대하 20:17, 참조: 호 1:7).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라고 하는 이런 역사적인 형태를 세움으로써, 하나님의 영으로 기름부음 받은 왕의 역할을 성취하실 미래의 구세주 개념이 생겨났다(참조: 렘 23:5이하). 구원은 공격적일 뿐만 아니라, 방어적이기도 하다. 적대적인 것이 다가올 때, 사람들은 안전한 피난처로 물러서기도 한다. 하나님은 자주 그의 백성들을 위한 이런 피난처로 간주되곤 한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시 62:7, H8). 구원을 경험한 사람은 내적 근심으로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 그가 적대 세력을 견뎌내야 할 것은 사실이나 하나님은 그의 대적들이 그를 파멸시키지 못할 것을 보증하실 것이다. 구원의 보호적 성격은 다른 개념들로 나타난다. 즉 "구원의 방패"(시 18:35, H36), "구원의 투구"(사 59:17, 엡 6:17), "구원의 옷"(사 61:10). 이처럼 구원은 단순히 전장에서의 순간적인 승리가 아니다. 이것은 또한 수많은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생명을 유지시키는데 필요한 안전과 방위 수단이기도 하다. 구약성경이 마지막 때의 하나님의 도성을 기대할 때, 구약성경은 그 도성의 벽이 '구원'이라고 불리워질 것으로 예상한다(사 60:18). 이 도시는 오직 의인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며, 이 도시는 구원을 수반하는 모든 안전을 제공해준다(사 26:1). (b) 영적인 의미: "구원하다"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주시고 개인의 성품을 변화시키심으로써 구원하신다는 점에서, 신학적인 의미를 발전시켰다. 예를 들면, "내가 그들을 그 범죄한 모든 처소에서 구원하여"(겔 37:23). 다윗은 이점을 깨닫고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시 51:14, H16, 참조: 시 79:9)라고 기도하였다. 렘 17:14에서 "구원하다" save는 "치유하다" heal와 병행된다. 즉 구원은 정서적이며 신체적인 안녕을 가져오는 역동적인 힘이 된다. (c) 구원과 의: 여호와의 모든 구원 행위는 의에 의거하고 있으며, 이것은 "의"와 "구원"이 종종 병행되어 나오곤 한다는 사실에 나타나있다(예: 사 51:8). 비록 모든 구원 행위에 심판이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심판을 받는 사람들은 죄인이며 따라서 이런 재판을 받아 마땅하다(참조: 시 76:8, H9이하). 다른 한편,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시며, 그리고 인간의 원초적인 불순종으로부터의 구원의 수단을 인간에게 제공해주심으로써, 자기 자신의 형상으로 만든 피조물인 인간에게 신실하시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구세주를 통하여, 구원자로서의 그의 책임을 이행하신다. 이리하여 여호와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으로 알려진다(사 45:21). (d) 계시된 하나님의 특성: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은 그의 우주적인 통치를 드러낸다(참조: 사 33:22). 그의 왕국이 온 세상 위에 펼쳐질 것이므로 그는 그가 원하는 누구에게든지 구원을 가져다 주신다. 더구나 구원행위는 종종 바다와 해룡으로 의인화되곤 하는 악의 권세의 목적을 파괴한다(시 74:12이하). 따라서 모든 승리는 그의 모든 백성들을 위한 마지막 구원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에게 그를 예배할 근거를 마련해준다. 즉 구원해줄 수 있는 신만이 예배를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 따라서 자주 대두되는 우상숭배에 대한 논쟁은 다른 신들에게 그들의 압제 받는 추종자들을 구원해보라고 도전하는 것이다(사 46:7, 삿 6:31). 그들이 응수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 신들이 헛되며 여호와 외에는 구세주가 없다고 고백하게 만든다는 점을 입증해준다(사 43:11, 호 13:4). 확실한 것은 구원행동이 단순한 역사와 우연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호와는 구원행동을 하시기 전에 그가 행하려고 했던 것을 계시하신다(사 43:12). 뿐만 아니라, 그는 그 일을 행하셨다는 점에서 볼 때, 자기의 말에 신실하시다. 나중에 이 행동은 해석되고 선포되었다. 게다가 구원 행동은 각 세대들이 여호와와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것이며, 그 행위에 대한 선포는 이 관계를 수립하고 계속 유지시키도록 신앙을 불러일으킨다(참조: 사 52:7). 더구나 구원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신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된다. 구원은 그의 사랑에서부터 흘러나온다(참조: 신 7:7 이하). 신실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어려울 때, 구원을 받기 위해 그에게로 돌아선다(시 6:4, H5, 시 109:26). 이처럼 구원은 행동으로 표시된 하나님의 사랑이다. 구원은 또한 그의 백성 사이에 계시는, 그리고 그의 지도자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임재에 대한 증거이기도 하다. 일을 위임 받은 많은 사람들은 특별한 방식으로 그의 임재를 약속 받았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렘 1:8, 렘 1:19, 참조: 마 28:20)고 약속하셨다. 예레미야는 후에 감옥에 갇혔으며 여러 번 그의 생명이 위협을 받았으나 그의 적대자들은 결코 그를 파멸시키지 못했다. 모세도 이 약속으로 인하여 성공하였다(출 3:12). 이처럼 그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임재하심으로써, 그들은 적과 고통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e) 백성들의 준비와 반응: 회개와 믿음: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기 위해 스스로 준비해야 한다. 고통 중에 있을 때, 인간은 기도로 하나님을 구해야 한다(예: 삿 3:9, 시 69:1, H2). 즉 그는 자기의 위급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심정으로 낮아져야 한다(참조: 욥 22:29, 시 34:18, H19).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에는 죄를 내버리는 것이 포함된다. 왜냐하면 죄는 하나님께서 곤궁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주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이다(사 59:1 이하). 인간이 일단 진심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섰다면, 그는 구원을 기다림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그의 확신을 표현해야 한다(사 30:15). 하나님은 행동하실 시기를 선택하신다. 인간은 소망 가운데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은 자기가 구원을 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때를 선택할 것이므로, 백성들이 믿음으로 어려운 상황을 견뎌내 주기를 바라신다. 사람들이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그는 적극적으로 의를 추구하며 사랑을 표현하신다(사 56:1, 호 10:12, 호 12:6). 찬양의 노래. 실제적이든, 예기적이든,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인간의 즉각적인 반응은 찬양의 노래에 있다. 홍해 구원에 바로 뒤이어 바다의 노래가 작곡되어 불리워졌다(출 15:1-8). 장차 오실 메시야에 의한 구원에 관한 이사야의 기술 다음에는 사 12장에 노래가 나오며, 세편의 종의 노래는 노래하는 것으로 끝난다. 사 42:10이하, 사 49:13이하, 사 54:1이하. 노래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는 기쁨을 나타내준다. 기쁨은 자주 하나님의 승리에 대한 인간의 내적 반응으로 언급되곤 한다(예: 시 13:5, H6). 더구나 여호와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해야 한다고 느낀다: "내가 주의 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시 40:10, H11).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은 생을 의미와 기쁨으로 가득채운다. (e) 미래의 구원: 이스라엘이 포로지에서 돌아온다는 사실은 구원의 언어로 예기되었다. 여호와는 "내가 너를 원방에서 구원하리라"(렘 30:10, 슥 8:7)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백성들을 자기의 양떼로 생각하시므로, 그는 "내가 내 양떼를 구원하여 그들로 다시는 노략거리가 되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선언한다(겔 34:22). 여호와 외에는 구원이 없으므로, 그는 초대를 확장하여, "땅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사 45:22, 참조: 시 67:2, H3)고 말씀하신다. 선지자들은 구원이 만방에 효력을 미쳐 영원히 지속될 날을 고대한다. 이사야는 이 구원이 고통 당하는 종을 통해서 올 것으로 예상한다. 이 종이 고난을 참는데 까지 순종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내가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구원을 베풀어서 땅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 49:6)고 약속하신다. 바꿔 말하면, 구약성경에서의 구원 행동들은 모든 백성들을 구원의 가능한 축복아래에 포함시킬 마지막 구원 행동을 위해 이룩된 것이다(사 52:10). (참조: J. E. HARTLEY; BDB). --------------------- h[;Wvy](3444, 예슈아) 구원, 구출 예슈아(명여)는 야샤([v'y: , 3467: 구원하다, 해방시키다)에서 유래했으며, '구원, 구조 salvation, 구출 deliverance'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78회 나온다. (a) '복리, 번영'(욥 30:15). (b) '구조, 도움'(삼하 10:11, 대상 19:12). (c) 하나님에 의한 '구원'(창 49:18, 사 33:2, 사 52:7, 사 52:10, 사 59:11, 욜 2:10, 시 53:6 등). (d) '승리'(삼상 14:45, 대하 20:17, 사 26:18, 출 15:2, 합 3:8, 시 20:5, 시 44:4 등). (참조: BDB; Gesenius). -------------------- hq;d;x](6666, 체다카) 의로움, 공의, 의로운 행위 체다카(명여)는 '의로움, 공의, 의로운 행위'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50회 이상 나온다(창 15:6, 삼하 8;15, 시 88:12, 시 103: 6 등). -------------------- qd 체데크(명남)는 '올바름, 공의, 공정, 의로움'을 의미한다....거룩하신 주님의 성품 그자체(지고지선의 토브/선대하심=주님의 사랑과 주님생명 누림에 필요충분한 그 모든 조건)......허물과 죄는 이 누림의 평강/화평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바 거치는 것, 성자구주예수님의 십자가보혈의 대속을 믿는 믿음으로 주께 나아와 고백할 때 이 거치는 것들은 영원히 소멸되며 꺼리는 모든 죄 또한 고백할 때마다 씻겨짐...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20회 나온다(레 19:15, 레 19:36, 신 33:19, 욥 6:29, 시 35:27, 시 37:6 등). ------------------------ rv;yme(4339, 메샤르) 매끄러움, 공평, 정직함, 공정함, 평탄함 메샤르(명남)는 야샤르(rv'y: , 3474)에서 유래했으며, '매끄러움, 평탄함, 공평, 정직함, 공정함'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9회 나온다. (a) 메샤르는 '평탄함, 매끄러움'에 대해 사용되었다. ① 사 26:7에서 의인의 길은 평탄하여 어려움이 없다. ② 잠 23:31에서 '매끄러움'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아 7:9에서 같은 의미를 지닌다: "네 입은 좋은 포도주 같을 것이니라 이 포도주는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미끄럽게 흘러 내려서 자는 자의 입으로 움직이게 하느니라". (b) 메샤르는 윤리적 의미로, '정직함, 공평함, 공정함'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지혜의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잠 8:6, 잠 1:3, 잠 2:9), 통치나 재판(시 9:8, 시 58:1, 시 75:2, 시 96:10, 시 98:9, 시 99:4), 말(사 33:15, 잠 23:16), 여호와의 약속(사 45:19)에 있어서 메쉬아트를 언급한다. 하나님은 '공평'을 기뻐하신다(대상 29:17). 단 11:6에서 라아소트 메샤림은 '공평한 협정을 맺다'를 의미한다. (c) 메샤르는 부사적으로 '마땅히, 당연히, 정당히, 정확히'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사 17:2, 아 1:4).(참조: BDB; TWOT). -------------------- [d'y:(3045, 야다) 알다, 이해하다 야다(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알다 know, 이해하다 understand'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944회 나오며, 모든 어간에서 사물이나 사람 또는 상황등을 감각 기관으로 얻은 약간씩 차이 나는 여러 가지 지식을 나타낸다. 이미 알려진 것은 감각으로 나타나야 하며 그 자체는 그렇게 알려지게 되어있다. 그래서 우리는 듣는 것(듣다)과 보는 것(보다)에 관한 동사가 아는 것에 관한 동사와 병행되어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예: 출 16:6 이하, 신 33:9, 삼상 14:38, 사 41:20). 야다는 인간(창 18:19, 신 34:10)과 그의 길(사 48:8, 시 1:6, 시 37:18)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에 사용되었으며, 여기에서 지식은 심지어 탄생 이전에 시작된다(렘 1:5). 하나님은 또한 들새도 아신다(시 50:11). 야다는 또한 인간의 지식과 짐승의 지식에도 사용되었다(시 1:3). 야다는 구약성경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야다는 '알아채다, 인지하다, 경험하다, 관찰하다'를 의미한다(예: 창 3:7, 창 41:31, 삿 16:20, 전 8:5, 사 47:8, 호 5:3). (b) 야다는 '구별하다' distinguish를 의미한다. '선악을 아는 것'(창 3:5, 창 3:22)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이다. 좋고 흉한 것을 구별하는 것은 필요하다(삼상 19:36). 어린 아이는 왼손과 오른손을 구별하지 못하며(욘 4:11) 또 선과 악도 구별하지 못한다(사 7:15). 후자의 구절의 문맥과 사 8:4에 나오는 이와 비슷한 언명은 이 언급이, 어린 아이는 유익한 것과 해로운 것을 구별할 줄 모른다는 것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시사해 주는 것 같다. 좋고 흉한 것, 좌우와 같은 것에 대해 관찰하는 것은 결국 그것들을 구별하는 것이 된다. (c) 야다는 '배워서 알다' know by learning라는 의미를 지닌다(잠 30:3). (d) 이 분사는 사냥(창 25:27), 학문(사 29:11-13), 애곡(암 5:16), 바다를 항해하는 일(대하 8:18),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는 일(삼상 16:16)에 능함을 묘사하는 어구에 나온다. (e) 야다는 어떤 사람을 '아는 것'을 표현한다. 어떤 사람을 아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창 29:5, 출 1:8, 삼하 3:25). 푸알 분사형은 '친척'(왕하 10:11 등)과 '아는 사람'(욥 19:14, 룻 2:1 등)을 지칭한다. (f) 야다는 '관계하다, 관심을 가지다'(시 1:6, 시 37:18, 시 119:79), '~와 관계를 맺고 싶다'(예: 신 33:9). 신학적인 문맥에서 자주 이 단어가 적절한 지식을 얻지 못해서 결국 관심의 결여를 초래하고 마는 것에 대한 문제로 나온다(예: 렘 8:7, 시 95:10). (g) 야다는 '성적 관계를 가지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를 알았다"고 하는 유명한 완곡 어법과 그 병행구들(창 4:1, 창 19:8, 민 31:17, 민 31:35, 삿 11:39, 삿 21:11, 왕상 1:4, 삼상 1:19)에서 남녀 쌍방의 성적인 관계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남색(창 19:5, 삿 19:22)이나 강간(삿 19:25)과 같은 성적 도착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h) 야다는 '다른 사람과 인격적이며 친숙한 관계를 맺다'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름으로, 대면하여 모세를 아신다(출 33:17, 신 34:10).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이나(렘 1:5) 어떤 민족을(암 3:2) 아실 때 하나님께서 그를 선정하시거나 선택하신다(참조: 민 16:5 70인역본). 선택으로 이해되는 이 지식은 은혜롭고 자애로운 것이지만 이것은 인격적인 응답을 요구한다. (i) 야다는 일반적인 문제에 대한 지식 외에도, 다른 신들을 아는 것이든(신 13:3, 신 13:7, 신 13:14) 여호와를 아는 것이든(삼상 2:12, 삼상 3:7) 간에,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렘 10:25) 선지자들에 의하면,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렘 4:22). 애굽의 재앙은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애굽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 보내졌다(출 10:2 등). 그는 그가 하나님이심을 이스라엘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사 60:16) 그들을 파멸시키시고(겔 6:7) 회복시키실 것이다. 특히 선지자 에스겔은 위협할 때,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는 어구를 사용한다(겔 6:7, 겔 6:10, 겔 6:13, 겔 6:14, 겔 7:4, 겔 7:9, 겔 7:27 등). (j) 요약하면 희랍인들이 초연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또한 사물의 형이상학적 본질에 사변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반해, 구약성경은 지식을 끊임없이 인격적인 만남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구약성경이 하나님과 창조에 관해서 언급한 것을 보고서, 우리가 이 언급들을 존재론적 추론으로 여겨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계시에 응답하는 믿음의 선포로 간주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역사적 과거와 약속된 미래 즉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존재하고 있는 이 지상의 영역 속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 속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를 찾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예배와 행동 가운데서 하나님의 목적과 요구를 식별할 수 있었던 것이다.(참조: E. D. Schmitz; Bultmann). -------------------- hl;G:(1540, 갈라) 덮개를 벗기다, 폭로하다, 옮기다, 유형(포로)의 몸이 되다 갈라(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덮개를 벗기다, 폭로하다 uncover, 옮기다, 이동하다, 제거하다 remove, 유형(포로, 추방)의 몸이 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80회 이상 나오며, 칼, 니팔, 피엘, 푸알, 히필, 호프알, 히트파엘형으로 사용되었다. (a) 갈라는 '덮개를 벗기다, 폭로하다'라는 의미에 따라 사용되었다. 칼형에서 이 동사는 자주 감각 기관, 즉 귀(삼상 9:15 등)와 눈(민 24:4)을 목적어로 하여 사용된다. '귀를 열다' uncover the ear라는 관용어구는 단순히 '보이다' show, '드러내다' reveal를 의미하며 사람이나 하나님을 그 주어로 취한다. 사람을 그 주어로 취할 때, 이 단어는 요나단에 대한 사울(삼상 20:2), 다윗에 대한 요나단(삼상 20:12-13), 사울에 대한 측근들(삼상 22:8), 사울에 대한 제사장들(삼상 22:17), 친족에 대한 보아스(룻 4:4)와 관련하여 나온다. 하나님을 주어로 취할 경우는 다음과 같다: 사무엘에게(삼상 9:15), 다윗에게(삼하 7:27 = 대상 17:25), 일반 사람들에게(엘리후의 연설에서 - 욥 33:16, 욥 36:10). 이 단어가 하나님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사용되었으므로, 이 단어를 하나님의 계시를 뜻하는 전문 용어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자기 자신을 직접적으로 계시하시며(참조: 사 22:14), 때로 다윗에게 선지자 나단을 통해서 자기의 계시를 전달하셨다. 그는 일반 사람들에게 꿈이나 환상(욥 33:16), 견디기 어려운 체험(욥 36:10)으로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다. 아모스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행하신 계시에 관한 이 전형적인 언명에서, 갈라를 목적어 소드(비밀 secret)와 함께 사용하였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 3:7)(이 동사는 또한 잠 20:19에서도 소드를 목적어로 취한다).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자기를 계시하였을 때, 발람의 눈이 "드러났다", 즉 '열려졌다'고 한다(민 24:4, 민 24:6). 이런 식으로 발람은 그렇지 않았을 경우에는 볼 수 없었을 어떤 것을 보았던 것 같다. 이런 개인적인 폭로 외에, 갈라의 칼형은 널리 알려진 소식에 대해 사용된다. 하만과 모르드개가 음모를 꾸미고 논쟁하던 중에, 하만이 기록한 것(에 3:14)과 모르드개가 기록한 것(에 8:13)을 선포하는 왕의 조서가 그 지방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표되었다. 칼의 수동 분사형은 렘 32:11, 렘 32:14에서 봉인된 것과 반대되는 '개봉된' 문서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니팔형에서 이 행동은 수동적, 혹은 재귀적인 방식으로 주체 그 자체에게 일어난다. 예를 들어 수동적인 의미에서 이 단어는 '드러나다' be uncovered를 의미한다: 즉 맨살(개역 한글판에는 출 20:27에서는 '하체', 사 47:3에서는 '살'), 치마(렘 13:22), 그리고 기초(삼하 22:16 = 시 18:16, 여기에서 이 단어는 라아의 니팔형 '보이다' be visible와 병행되어 나옴)가 드러나다. 따라서 이 단어는 '알려지다' be known(사 23:1)와 '계시되다' be revealed를 의미한다 -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하신 말씀에 대해(단 10:1). 재귀적인 의미에서, 이 단어는 '자신을 드러내다' expose oneself(삼하 6:20에 다윗에 대해 3회) 혹은 블레셋인들에게 나타난 요나단(삼상 14:8), 욥에게 나타난 사망의 문(욥 38:17)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자기 자신을 보이다 혹은 드러내다' show/ reveal oneself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야곱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현현에 대해서 사용되었다(창 35:7, 참조: 창 38장). 이 단어는 또한 사무엘의 유년기 기사에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즉 엘리의 조상들(삼상 2:27)에게, 사무엘(삼상 3:21, 참조: 삼상 3:7)에게 나타내신 그의 계시에 대해 사용되었다. 관용구 "귀를 열다"와 아모스의 전형적인 언명에서처럼, 여기에서도 이 단어는 한 선지자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계시를 의미한다. 수동적인 의미를 지닌 니팔 분사형은 신 29:28에서, 이 책에서 이스라엘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공공연한 위협과 약속들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사 40:5에 의하면, 여호와의 영광 -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림으로 말미암은, 땅에 대한 그의 승리 - 은 모든 사람들에게 계시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사 56:1에서도 똑같은 의미를 지닌다. 이 단어는 사 53:1에서, 고난 받는 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인류에게 계시되는 것에 대해서 사용되었다. 이와 같이 동사 갈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뜻하는 전문 용어가 아니지만, 자주 이런 의미를 전달한다. 마찬가지로 피엘형에서도 이 단어는 항상, 그 외의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감추어져 있던 어떤 것을 '드러내다' uncover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이 단어는 눈을 '열다' open - 천사(민 22:31)나 율법의 기이한 것들을 보다(시 119:18), 여호와께 불평하는 예레미야에 대해(렘 11:20, 렘 20:12), 이스라엘에게 평화와 진리를 나타내시며(렘 33:6) 그들에게 그의 의를 보여주신(시 98:2) 여호와에 대해 '알게 하다' make known, '드러나게 하다' make revealed, '명백히 하다' manifest; 탈주자들에 대해(사 16:3), 비밀에 대해(잠 11:13, 잠 25:9), '폭로하다' betray; 에서의 비밀한 곳(렘 49:10), 어둠의 비밀(욥 12:22), 지대(미 1:6), 죄(욥 20:27, 애 2:14, 애 4:22), 그리고 발(룻 3:4, 룻 3:7); 흑암의 신비(욥 12:22)에 대해 '폭로하다' uncover, '드러내다' expose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어간에서 이 단어는 금지된 성적 행위를 나타내기 위해 가장 자주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레위기 18장과 20장에서 금지된 상황에서의 성교, 일반적으로 근친상간을 의미하는 '수치를 드러내다' uncover the shame라는 표현으로 24회 나온다(신 22:30, 신 27:20). 이 단어는 또한 덮여있는 것을 벗겨내거나 제거하는 것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즉 여자의 치마(사 47:3, 나 3:5), 유다를 보호해주는 덮개(사 22:8), 그리고 해수의 외피(욥 41:13)에 대해 사용되었다. 게다가 많은 구절들에서 이 단어는 '부끄럽다' shame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단어는 레위기 18장, 20장 외에도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수치를 드러내었다"고 불평하는 선지자의 불평에서도 나오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대한 충성을 던져버렸음을 나타내는 하나의 은유이다. 이에 대하여, 여호와 혹은 그녀의 전에 사랑하던 자가 "벗은 몸을 드러낼" 것이다 - 믿음 없는 민족을 "수치스럽게" 할 것이다(호 2:10, 겔 16:36), 니느웨에 대한 위협(나 3:5)과 바벨론에 대한 위협(사 47:3)을 참조하라. (b) 갈라는 '옮기다, 이동하다, 제거하다, 유형(포로, 추방)의 몸이 되다'라는 의미를 따라 사용되었다. 자동사 갈라의 기본적인 의미는 에스겔 선지자가 "이사하라"는 명령을 받은 겔 12:3과 해산하는 비느하스의 아내의 애곡,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에 나온다. 이와 비슷한 의미가 이사야의 애곡, "땅의 기쁨이 소멸되었으며"(사 24:11)와 악한 자의 운명에 대해 소발이 말한 묘사, "그 가산의 증가가 떠날 것이며"(한글개역 - "그 가산이 패하여", 욥 20:28)에서 발견된다. 이 단어는 또한 잠 27:25과 호 10:5에서 '떠나다' depart라는 단순한 의미를 지닌다. 나머지 20개의 구절들에서, 이 단어는 칼형으로, '사로잡혀 가다'라는 보다 구체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 외에 이 단어는 '포로(추방)의 몸이 되다'라는 의미를 지닌 히필형으로 39회 나오며, 칼형의 의미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 수동 호팔형으로 7회 나온다. 이 동사는 아모스(암 1:5, 암 5:5, 암 5:27, 암 6:7, 암 7:11, 암 7:17)와 예레미야(렘 13:19, 렘 20:4, 렘 22:12, 렘 27:20, 참조: 애 1:3, 사 5:13)에 의한 심판의 예고에서 주로 두드러진다. 여러 구절들에서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포로의 신세로 이끄는 주체로 지칭된다(렘 29:4, 렘 29:7, 렘 29:14, 겔 39:28, 암 5:27, 애 4:22, 대상 5:41 - 대행 하는 사람[느부갓네살]이 명백하게 언급되는 유일한 곳, 참조: 왕하 17:11에서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유다)이나 이들의 영광이 이 동사의 주체이다. 이스라엘을 그 땅에서 끌어내어 포로 신세로 만든 여호와의 심판은 그들의 역사 초기에 선물로서 그들에게 그 땅을 주시겠다고 하신 그의 약속을 이행하는 것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작용한다. 마찬가지로 그가 조상들에게 이 땅을 주시겠다고 거듭 되풀이하신 약속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시겠다고 거듭 되풀이하신 약속과 날카롭게 대조된다. 왕하 17:11에서,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쫓겨나는 것은 그들이 그 땅에 들어왔을 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쫓아내신 가나안 인들의 운명과 명백히 유사하다. 이 동사가 결코 신명기에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이 책에서 이 땅에서부터 쫓아낸다는 위협은 "(그)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다"(신 4:26, 신 11:17), 그리고 푸츠(히필형 '흩어버리다' scatter)와 같은 다른 표현들로 표현된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만약 신명기에 포함되어 있는 모세의 것으로 추정되는 연설이 실제로는 후기의 것이라면, 주전 9세기에 땅으로부터의 추방을 뜻하던 일반적인 용어 갈라가 주전 7세기의 선지자들에게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인 것 같다.(참조: B. K. Waltke). -------------------- arey:(3373, 야레) 경외하는 (자), 두려워하는 (자) 야례(형용사)는 야레(arey: , 3372: 두려워하다, 경외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두려워하는, 경외하는'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46회 나오며, 명사적 의미와 형용사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두려워하는 자, 경외하는 자'라는 표현이 자주 나타난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자'는 실제적인 의나 경건을 자기의 두려움을 이행할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로서 욥은 악을 피한다: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 1:1). 시 128:1에서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는 여호와의 길로 나아간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메시지에 응답함으로써 자기의 특별한 경건을 입증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악한 자와 대조된다(전 8:13). 하나님의 선하심(시 31:19), 필요한 것의 조달(시 34:9), 보호(시 33:18, 시 33:19), 보호하시는 자비(시 103:11)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는 약속(시 145:19)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제공된다. 야레의 흥미있는 용법은 시 22편에서 발견된다. 여기에서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라는 어구는 한편으로는 '야곱의 자손' 및 '이스라엘의 자손'과 병행되며(시 22:23), 다른 한편으로는 "대회"(시 22:25)와 병행된다. 이 병행구들, 특히 그 중에서도 마지막 병행구는 이 용어가 예배 드리기 위해 모인 예배 회중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이 용법의 가능한 두 개의 다른 실례들도 발견된다(시 115:11, 시 115:13, 시 118:4). 야레는 또한 두려움의 감정이나 악에 대한 예상을 나타낸다(출 9:20, 신 20:8, 삿 7:3). (참조: A. BOWLING; BDB). ------------------------------------- ha;r]yI(3374, 이르아) 공포, 두려움, 경외 이르아(명여)는 야레(arey: , 3373: 두려워하다, 경외하다)에서 유래했으며, '공포, 두려움, 경외'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45회 나온다. (a) 이르아는 '공포, 두려움'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공포나 두려움의 감정을 나타낸다(시 55:6, 겔 30:13, 사 7:25). 뱃사람들이 요나의 일로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였다(욘 1:10, 욘 1:16). 이 공포는 하나님에 의해 사람의 마음에 있게 된다: "오늘부터 내가 천하 만민으로 너를 무서워하며 너를 두려워하게 하리니 그들이 네 명성을 듣고 떨며 너로 인하여 근심하리라 하셨느니라"(신 2:25). 하나님이 두려움의 대상이 될 때 경외나 존경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시 2:11). (b) 이르아는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 경외'에 대해 사용되었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나 존경의 태도는 참 지혜의 토대이다(욥 28:28, 시 110:10, 잠 9:10, 잠 15:33). 게다가 이 문구는 잠언의 주제가 된다. 이 문구는 잠 1:7에서 사용되며, 잠 9:10과 다른 12구절들에서 거듭 사용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요(잠 8:13), 삶의 토대요(잠 14:27), 생명에 이르게 하며(잠 19:23), 그리고 장수하게 한다(잠 10:27). 수많은 구절들은 하나님에 대한 이 두려움을 경건이나 의로운 생활과 결부시킨다. 이 두려움은 신실한 삶을 야기시킨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영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렘 32:40).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나그네들을 돌보는데에 이르게 된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창 20:11). 공의로 다스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바위가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삼하 23:3). 전능하신 분에 대한 두려움은 친구의 친절을 억제하지 않는다: "피곤한 자 곧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를 그 벗이 불쌍히 여길 것이어늘"(욥 6:14). 동료 유대인들에 대한 경제적 폐해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이었다(느 5:9). 여호와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들을 악에서 돌아서게 한다: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잠 16:6). (참조: A. BOWLING; BDB; TDOT). ----------------- dysij;(2623, 하시드) 친절한, 경건한(자) godly 하시드(형용사)는 하사드(ds'j; , 2616)에서 유래했으며, '친절한, 충실한, 경건한'을 의미하며, 실명사로 '경건한 자' 즉 '성도'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32회 나온다. (a) 하사드는 '경건한 자, 성도'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시드라고 불리어진 것은, 그들이 헤셋(헤세드..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특징지어졌기 때문이거나(그럴듯하게 그렇게 보임) 아니면 그들이 하나님의 헤셋의 대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b) 하시드는 시 16:10에서 단 한번 장차 올 거룩하신 분(JC)을 가리킨다: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참조: R. L. HARRIS; BDB). --------------------------- eujsevbeia(2150, 유세베이아) 경건, godliness 신앙심 깊음, 하나님을 두려워함(경외함)....하나님과 한영됨을 실행함/하나님 경외함/하나님을 살아냄 1. 고전 헬라어 문헌 유세베스 어군의 단어들(유세베스, 유세베이아, 유세베오)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a) 이 단어군는 일반적으로 신들과 관련되어 있으며, 신들에게 대한 적절한 태도로서 '경건 piety'이란 의미를 지닌다. (b) 신들과 신전들은 별도로 하고, 존경의 대상은 '죽은 자, 친척, 통치자, 재판관, 맹세, 율법, 선한 자' 등이 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신의 보호를 받고 있기 때문에 이 세 단어들은 끊임없이 신들과 관계를 가지게 된다. (c) 플라톤은 선을 행함으로 신들을 섬기는 것을 경건으로 여기며,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경건을 제의적인 예배와 동일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거기서도 자주 지식이나 내적 헌신의 태도를 요구하였다. (d) 헬레니즘 시대에 특히 유세베이아의 주요 의미는 예배였지만 여전히 친족, 배우자 혹은 황제에 대한 존경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철학자들은 신들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을 참된 경건으로 보았다. 플루타르크에게 있어서 미신과 구별되는 참 경건은 신들이 보기에 선한 것을 기대한다는 것이다. 예배는 신과 동일시 될 수 있는 위대하고 고상한 것에 대한 존경을 의미한다. 이 때에 경건은 무조건적인 인격적 위탁이 아니라, 순수하고 숭고한 신성의 세계에 대한 경외, 제의적인 예배 그리고 질서에 대한 존경으로서의 덕인 것이다. 따라서 유세베이아는 유세베스(eujsebhv", 2152)에서 유래했으며, '경건, 신앙심 깊음, 하나님을 두려워함' 이란 의미를 지니며, 앞에서 보인 의미를 함축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유세베이아는 70인역에서 58회 나오며, 정경에서 야레(두려워하다)와 야레 예호와(여호와를 두려워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단어는 정경에서 '경외함'(잠 1:7; 사 33:6), "여호와를 경외함"(사 11:2)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유세베이아는 신약성경에서 15회, 사도행전, 목회서신, 베드로후서에만 나온다. (a) 행 3:12에서 베드로는 "경건"을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라고 주장한다: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 3:12; 행 3:16). (b) 목회서신에서 유세베이아는 기독교인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경건한 삶 또는 그 방식을 나타낸다. 딤전 3:16에 보면,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삶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이며, 그 비밀은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이다. 이제 신약성경의 경건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로 이해한다. 결과적으로 그 논리적 귀결로서 경건은 일련의 기독교적 미덕의 하나가 되었다(딤전 6:11). 유세베이아는 거짓 가르침과 관련되어 있는 생활 방식과는 대조적으로, 건전한 가르침과 조화되는 경건이다(딤전 6:3; 딛 1:1). 이것은 거짓 교사들이 그것으로 인해 책망받았던 바, 곧 명백히 잘못된 개념으로서의 공로에 의한 의와는 다른 것이다(딤전 4:7 이하; 딤전 6:5 이하; 딤후 3:5 ). 거짓 교사들은 일종의 유세베이아를 취하지만 그들의 삶이 경건으로 구성되지 않으며, 그들은 이득을 얻기 위해 경건을 이용한다(딤후 3:5; 딤전 6:5-딤전 6:6). 그래서 그들은 참된 경건의 유익을 놓쳐버리고 만다. 그리스도인의 유세베이아는 도덕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경건은 그리스도 사건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딤전 3:16). 그리스도인의 유세베이아는 외면적인 예배가 아니며 단순한 하나님 개념도, 미덕도, 이상도 아니다. 창조를 악한 것으로 여기며, 창조 질서를 소멸시키는 영지주의적 금욕주의와는 대조적으로, 신앙에서 생겨난 참 유세베이아는 하나님을 창조주이자 구세주로 존경하는 일상적인 행동을 포괄한다. 비록 이로 인하여 경건과 관련되어 있는 바로 그 하나님의 질서로 인하여 박해가 예상된다 하더라도 참 유세베이아는 유지되어야 한다. 유세베이아라는 용어는 저자가 유세베이아를 나타내는 생활 방식이, 이를 중히 여기는 비그리스도인들로부터 좋은 평을 들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같다. 이런 점에서 유세베이아는 내생에 뿐만 아니라 이생에서도 유익한 것이다(딤전 4:8). (c) 벧후 3:11 이하에서 유세베이아는 꾸준히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기독교인의 삶의 방식으로 간주되며, 여기서 복수형은 경건한 행동을 전부 포괄한다. 벧후 1:3에 단수형이 나오며, 경건 생활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은사는 우리가 좀더 경건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내려 주신다. 이것은 하나님과 거룩한 것들로 더욱 더 나아가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벧후 1:6 - 벧후 1:7에서 자제는 약속에 대한 끊임없는 기다림에 이르게 되고, 이 기다림은 경건에, 그리고 이 경건은 차례로 형제 우애와 사랑에 이르게 된다. (참조: W.Gunther; J.H.Thayer; W.Foerster). -------------- dseje(2617, 헤세드) 친절, 인자, 자비, 자애 1. 헤세드(명남)는 하사드(ds'j; , 2616)에서 유래했으며, '친절, 인자, 자비, 자애'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40회 나온다. 2. 헤세드(명남)는 하사드(ds'j; , 2616)에서 유래했으며, '책망, 비난, 수치, 치욕'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회 나온다(레 20:17, 잠 14:34). -------------------- hn:Wma?(530, 에무나) ...성실, 신실, 충실, 확고부동, 견고함 에무나(명여)는 아만(@m'a; , 539: 지지하다, 신실하다)에서 유래했으며, 견고함, 확고부동, 신실함, 충실, 성실'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50회 나온다. 70인역본에서는 이 용어를 알레데이아(진실, 신뢰, 정직, 진리)와 피스토스(신뢰, 신실성, 신빙성, 안식 신뢰, 신앙)로 번역했으며 KJV는 '신실'faithfulness, '진리'truth, '직무이행'setffice, '신실함'faithfulness, '신실한'faithful 등으로 번역한다. (a) 에무나는 '견고함, 확고함'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안정하다 stady)"(출 17:12). (b) 에무나는 '신실성'을 의미한다. 기본적으로 이 단어는 하나님 자신에게 사용되어(신 32:4) 그의 완전한 신실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 단어는 자주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에 열거되곤 한다(삼상 26:23, 시 36:5[H 6], 시 40:10[H 11], 애 3:23). 이 단어는 하나님의 행사(시 33:4); 그리고 그의 말씀(시 119:86, 시 143:1)을 나타낸다. 애무나는 또한 하나님에게서 생명을 보증받는 사람들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신실함을 기대 하신다(잠 12:22, 대하 19:9). 실로, 이런 신실성이나 믿음의 생활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운 사람들의 특징이다(합 2:4).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사람으로 하여금 참되고 신실한 길을 취하게 한다(시 119:30). 이로부터 우리는 신자에게 위임되어 그의 의무(신실한 책임, 대상 9:22, 대하 31:15, 등)나 직무가 된 의무 개념도 볼 수 있다(참조: J. B. Scott). (c) 에무나는 체데크(공의 righteousness, 참조, 사 11:5), 헤세드(hesed: 인자 loving kindness, 참조: NASB, 시 98:3), 미쉬파트(공의 justice, 참조: 렘 5:1)의 동의어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헤세드(사랑)로 가장 잘 묘사된다. 그러나 동의어인 에무나도 매우 적합한 단어이다. 호세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하나의 결혼으로 묘사했으며,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성'을 말하고 있다: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 2:19-20) 이 구절에서 '의, 심판(공의), 은총, 자비, 진실함'이란 단어들은, 에무나의 동의어들이 하나님의 '신실성'과 '사랑'을 표현하는 언약적 용어들이라는 결론을 확증해준다. 언약과 약속들에 대한 보증은 하나님의 성품에 의해 확립되는 것이다: 그는 '신실'하시다. 사람의 행동(잠 12:22)과 말(잠 12:17)은 하나님과 더불어 자신의 은총 받은 상태를 반영시켜야 한다. 결혼 관계에 있어서 '신실성'은 임의적인 것이 아니다. 부부관계가 안정되기 위하여 두 당사자는 서로 '신실'하게 대해야 할 것이다. 이사야와 예레미야는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지' 못했음을 다음과 같이 책망한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렘 5:1; 참조, 사 59:4, 렘 7:28, 렘 9:3). (d) 신실성은 메시야 시대에 이루어질 것이다(사 11:5). 이 선지자적 기대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는 것은, 그의 동시대인들이 그에게서 하나님의 자비(참조: 헤세드)와 진리(참조: 에무나)를 목격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요한이 이 두개의 용어를 병행시킨 사실은 의의가 깊다. 이 두 용어는 구약성경에서도 함께 발견된다. (참조: NEDOT). ------------------ rk'z:(2142, 자카르) 기억하다, 상기하다 remember 자카르(동사)는 기본어근이며, '기억하다, 상기하다 remember'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1) '기억' 이나 '주의 집중'과 같은 완전한 내적 활동, (2) 적절한 외적 행동을 수반하는 내적 정신 활동, (3) '언급하다'는 의미를 들을 수 있게 말하는 것 까지를 나타낸다. 여기서 '언급한다'는 것은 기억이나 생각의 연장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30회 나오며, 칼, 니팔, 히필형으로만 사용되었다. 1. 칼형에서 이 단어는 '기억하다, 상기하다, 생각하(해내)다'를 의미한다. 칼형의 대부분의 실례들은 내적 정신 활동을 언급하는데, 이에 동반하는 외적 행동을 언급할 경우도 있고 언급하지 않을 경우도 있다. 내적 정신 활동의 예로서 예루살렘에 대한 유대인의 회상(시 137:1)과 그들이 노예였음에 대한 그들의 기억(신 5:15)이 있다. '기억하는 것'은 '잊어버리는 것'과 대조된다(시 74:22-23). '명상하다' mediate 혹은 '생각하다' think about의 의미는 욥이 사악한 자의 행복에 대하여 생각할 때(욥 21:6-7)와 시편기자가 하나님을 묵상할 때(시 63:6 [H7]) 사용된다. 하나님께서 '기억하소서'라고 도전 받을 때 그 말은 오히려 '주의를 기울이다'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어떠한 것이라도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시 89:47). 위에 언급한 의미 중에서 어느 것이 개개의 구절에 가장 적합한지를 결정하기가 어려울 때가 많다. 많은 구절들에서 이 단어는 적절한 행동을 취하는 부가적 의미가 위에서 언급한 의미에 첨가된다. 그의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기억'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출 2:24) 보전하시는(레 26:44-45) 결과를 가져온다. 반대로, 죄를 기억하는 것은 은총의 보류에 상당하는 것이다(호 7:1-2). 히스기야의 과거의 성실함을 기억하셔서 치료해 주셨고(왕하 20:3), 노아를 기억하셔서 물을 감하게 하셨다(창 8:1). 하나님에게 있어서 악을 기억하지 않는 것은 바로 용서하시고 장래의 심판을 거두는 것이다(시 79:8-9). 또한, 인간에게 있어서 기억하는 행위는 행동을 결과한다. '기억함'이란 회개(겔 6:9) 혹은 계명의 준수(민 15:40) 특히 안식일을 지키는 것(출 20:8)으로 나타난다. 땅의 모든 끝의 '기억'은 바로 '회개'이다(시 22:27 [H28]). 정치적인 관계에서 협정을 기억하지 않는 것은 그것을 어기는 것이다(암 1:9). 몇몇 이러한 실례들은 명백한 원인과 결과의 뚜렷한 예들이다. 그러나 또 다른 경우에 '기억하는 것'과 수반되는 행동 사이의 관계가 너무나 밀접하여 그들은 실제로 기자의 마음과 일체가 된다(성경의 히브리어에서 '듣다'와 '순종하다' 사이의 밀접한 관계). 몇몇 경우에 칼형은 청취 가능한 담화를 언급한다. 나 2:6에서는 생각해서 언급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어떤 강한 자들의 낭독은 호머에 나오는 영웅들의 낭독에 필적할 수 있는 것 같다. 과부는 다윗에게 그녀의 남은 아들의 보호에 대한 맹세나 들을 수 있는 기원을 다윗에게 요구했다(삼하 14:11). 바다 생물의 배에서 요나가 '기억하다'는 기도에서 들을 수 있게 '호소하다'라는 의미로 받아 들일 수 있을 것이다(욘 2:8). 만약 이 단어에 '이야기하다, 기원하다'와 같은 의미를 허용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그러한 역사에 대한 공개적인 낭독일 수 있을 것이다(대상 16:12). 하나님의 위대하신 행동을 회상하는 시편들은 그러한 낭독의 실례를 제공해 준다(시 104편, 시 105편, 시 106편).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언제나 기억이 강조되었으며, 기억을 언급하는 것에 불과하다. 2. 니팔형에서 이 단어는 '기억되다, 상기되다'를 의미한다. 니팔형은 칼형과 히필형의 수동태로 나온다. 이것은 '기억을 얻다'를 나타낸다(욥 24:20). '기억함을 얻는 것'은 구원 받을 것이라는 적당한 행동을 수반할 수 있을 것이다(민 10:9). 기생은 마치 기억함을 얻을 뿐만 아니라 '주목 받기' 위하여, 혹은 '그녀에게 주의를 기울이게 하기 위하여' 노래를 불렀다(사 23:16). 이 단어는 니팔형으로 호 2:19, 슥 13:2, 욥 28:18, 겔 21:29, 겔 3:20, 겔 18:24, 겔 33:13, 겔 18:22, 렘 11:19, 에 9:28 등에도 나타난다. 3. 히필형에서 (a) 이 단어는 '기억이 나게 하다'를 의미한다. 사 43:26, "너는 나로 기억이 나게 하고 서로 변론하자 너는 네 일을 말하여 의를 나타내라". (b) 이 단어는 '기억되게 하다, 기억하고 있다, 기억을 간직하다'를 의미한다(삼하 18:18, 시 45:17, 출 20:24). (c) 이 단어는 '언급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창 40:14에서 술관원장이 바로에게 자기에 대해 말해 주기를 바라는 요셉의 바람을 표현한다: "당신이 득의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고하여 이 집에서 나를 건져내소서".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출 23:13, 수 23:7)을 금하는데 여기서 '언급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사 49:1에서 문맥상의 병행어인 '부르셨고'는 남이 들을 수 있게 말하는 것이 '내 이름을 말씀하셨고'와 관련된다는 것을 나타낸다. 삼상 4:18에서 언약궤에 대하여 다른 사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말하였기 때문에 엘리가 죽음을 초래하였다: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자빠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 많고 비둔한 연고라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된지 사십년이었더라". 사 12:4에서 '언급'이나 '선포'를 의미한다. 시 20:7에서 정확한 의미는 분명하지 않지만 '공개적인 언급'을 가리키는 것 같다: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대상 16:4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는 언급을 의미한다. (d) 이 단어는 히필 분사형에서 '기록'이나 기록자의 직무에 대해 사용되었다(삼하 8:16, 삼하 20:24, 왕상 4:3, 왕하 18:18, 왕하 18:37 = 사 36:3, 사 36:23, 대상 18:15, 대하 34:8). (e) 이 단어는 '기념(물)로 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 66:3에서 분향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 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참조: BDB; T. E. Mccomiskey). ----------------- ha;r;(7200, 라아) 보다, 바라보다, 조사하다 라아(동사)는 기본 어근이며, '보다, 바라보다, 조사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300회 이상 나온다(창 1:4, 창 1:12, 창 16:13, 창 17:1, 창 19:28, 창 21:16 등). --------------------- fp;v;(8199, 샤파트) 재판하다, 다스리다, 통치하다 샤파트(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재판하다, 판결하다 judge, 다스리다, 통치하다 govern'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00회 나오며, 칼, 니팔, 포엘형으로 사용되었다. 샤파트의 기본적인 의미는 통치 과정을 수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현대 정부와 달리 고대의 정부는 입법, 행정, 사법적 기능(그리고 부서들)이 반드시 분립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재판하다'라는 일반적인 번역은 우리를 잘못 인도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샤파트의 역어로 사용되는 '재판하다' judge라는 말은 정부의 사법적 기능만을 수행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정부-시민적, 종교적, 혹은 그밖에 다른-와 관련하여 '통치하다' to govern 혹은 '다스리다' to rule로 일정하게 번역되기를 원치 않는다면, 현대 세계에서 그러한 넓은 의미를 지닌 어떤 단어를 번역하기 위해 보다 더 특수화된 단어를 찾아야만 한다. NIV는 이 단어의 분사형을 '지도자' leader로 번역한다. 샤파트의 의미는, 비록 고대인들이 법률-시민 생활에 관한 법, 종교적인 법, 가정법 등등-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하더라도 그들은 현대인들과 달리 법에 의하여 다스림 받는다기보다는 사람에 의해서 다스림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층 더 복잡해진다. 인간에게는 법, 주권, 통치를 중심으로 하는 것은 깊이 뿌리 박혀 있었다. '초기 모든 동방의 국가에서 재판의 집행권은 오늘날 사막의 아랍인들처럼 존경할만한 연장자들에게 있었다... 그러한 연장자들은 필요한 여가를 가졌을 것이며 그들이 내린 결정은 존중되었을 것이고, 상급 지위로 인한 폭넓은 교제를 통하여 보다 충분한 경험과 원숙한 숙고로 결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통치의 수행을 나타내는 이 기본적인 단어의 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다. (a) 지도자로 행동하는 것, 이것은 이스라엘의 회중(민 18:22-28), 개개의 사사들(신 1:16, 삿 16:31, 삼상 7:16, 삼상 7:17), 왕(삿 8:20), 메시야(시 72:4), 심지어 하나님 자신(시 96:13)에 의해서 행하실 수 있다. 하나님만이 참으로 궁극적인 주권을 행사하실 수 있다. 그는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이시기 때문이다(창 18:25). 그러나 모세가 소송 사건들(형사 사건, 가정 사건, 종교적 사건 등등)을 판결할 때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권위로 행동하는 것이며(출 18:13, 출 18:15), 이는 구약의 신권 정치(theocracy)에서 다른 통치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사실이다(신 1:17). (b) 두드러진 것으로 샤파트는 민사, 가정사, 종교적 송사를 재판하는 것과 같이 논쟁을 일으키는 소송 사건을 판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경우에 재판관의 임무는 특별히 미쉬파트(분별, 공의)와 체데크/체다카(의)로 재판하는 것이며(시 72:2-4), 고발한 사건에서 의인들을 의롭다 하고 악인을 정죄하는 것(신 25:1)이다. (c) 단순히 법보다는 오히려 사람에 의하여 통치가 이루어지는 환경으로 인하여, 관원(쇼페트[재판하는 자])은 사법권은 물론 행정권도 가졌다. 관원은 또한 사법적인 판결을 집행하거나 집행하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다윗은 사울과 논쟁할 때 하나님께서 재판관으로 서실 것을 호소하면서 이렇게 선언한다: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판결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신원하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판단하시기를 원하나이다"(삼상 24:15). 따라서 여러 역본에서 건지다, 신원하다, 정죄하다, 벌하다와 같은 단어들과 사법적, 행정적 의미를 지닌 관련 단어들이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d) 모든 참된 권위는 하나님의 것이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마지막 대심판에서 세상의 재판장이 되실 것이므로 그는 탁월한 쇼페트이시며(시 96:13, 시 50:6, 시 75:8), 한편으로 섭리를 통하여 그는 언제나 우주의 최고 쇼페트가 되신다(시 94:2, 참조: 시 103:19). 이상의 모든 용례는 칼형이다. 니팔형은 때때로 이 어간의 상호 관계를 나타내는 의미에서 통치 과정이라는 의미가 확대되어 소송 사건이라는 의미를 전달하는 경우를 보여준다. 그러한 경우 에트(...와 함께)가 이 동사의 목적어 앞에 온다. 예컨대 "내가 너를 심판하리라"(내가 너와 함께 심판에 들어가리라, 렘 2:35, 참조: 겔 17:20, 겔 20:35, 겔 20:36, 겔 38:22, 매 경우에 하나님이 행위자이시며 화자이시다). 변론하다, 항변하다라는 법적인 의미에서 '변호하다' plead가 종종 나온다. 즉 "내가 여호와 앞에서 너희와 담론하리라"(삼상 12:7), "변론하다"(삼상 43:26, BDB, 'have a controversy'), '심판을 베푸시다'(사 66:16, RSV 'execut judgment'). 포엘 분사는 "정죄하는 자"(시 109:31, 한글개역, "판단하려 하는 자"), "고소자"(욥 9:15, 한글개역, "심판하실 그"), "너에게 불리한 재판"(습 3:15, 한글개역, "너의 형벌")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위협적인 재판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샤파트는 그 파생 명사 미쉬파트와 더불어 어떠한 영역과 어떠한 형태이든지 통치(정부)의 기능을 지칭하는 가장 일반적인 용어이다. 이 단어는 보다 희귀한 딘과 분명히 다르다. 즉 딘은 보다 시적인 용어인 반면에 샤파트는 주로 보다 형식적이고 전문적인 용어로 쓰인다. (참조: R. D. Culver; BDB 등). ------------------ a/B(935, 보) 들어오(가)다, 가다, 오다 보(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들어오(가)다, 가다, 오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560회 나오며, 칼형, 히필형, 호팔형으로 사용되었다. 보(a/B , 935)는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공간상의 움직임을 나타낸다. '들어가다'라는 의미는 창 7:7에 나오는데, 여기에는 노아와 그의 가족이 방주로 "들어갔다"고 언급되어 있다. 이 동사의 사역형 어간은 '들어가게 하다', 혹은 '데리고 들어오다(창 6:19, 한글개역 - "이끌어 들여")', 혹은 '이끌어 오다, 가져오다'(창 2:19, 이 단어의 최초의 용례)를 의미한다. 이 동사는 창 10:19의 '네가 소돔까지 갈 때'(KJV; "소돔을 지나" - 한글개역) 어구에서 더욱 독립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 동사는 '오다'라는 의미와 '돌아오다'라는 의미 둘 다로 사용될 수 있다.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은 가나안 땅으로 "왔다"(한글개역 - 땅에 "들어 갔다", 창 12:5). 한편 신 28:6에는 하나님께서 (아침에 일하러) '나가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는' 경건한 자들을 축복하셨다고 언급되어 있다. 때때로 이 단어는 해가 '지는 것'을 나타낸다(창 15:13). 이 단어는 '조상에게 돌아간다'(창 15:15)는 의미에서 죽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른 특수한 용례는 '아내에게 들어가는 것' 혹은 '동거'(창 6:4)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또한 시간의 흐름에 대해 사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선지자들은 '다가오는' 심판의 날에 대해 말한다(삼상 2:31). 마지막으로 이 동사는 거짓 선지자가 그 말대로 이적과 같은 그런 사건을 '이루는' 것에 대해 사용되기도 하였다(신 13:2). 하나님이 '오신다'는 말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로, 하나님은 천사(삿 6:11)나 다른 육신을 입은 존재(참조, 창 18:14)를 통해 '오신다', 그는 꿈(창 20:3)이나 다른 실제적인 현현(출 20:20)을 통하여 인간에서 '나타나시어' 말씀하신다. 예를 들어 출애굽 동안에 하나님은 백성들 앞에 가는 구름과 불 속에서 '나타나셨다'(출 19:9).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자들이 그에게 합당하게 예배 드리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리고 언제든지 그들에게 '오신다'고 약속하신다(출 20:24). 블레셋인들은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에 들어왔을 때 하나님께서 그곳에 '오셨다'고 느꼈다(삼상 4:7). 공식적인 예배와 관련된 용법은 시 24:7에 나온다. 여기에는 영광의 왕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시온의 문이 열리리라고 언급되어 있다. 또한 여호와께서 겔 43:2에 묘사되어 있는 새 성전으로 '돌아 오실'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오심'에 대한 일단의 예언적 묘사가 있다. 이 주제는 하나님께서 전쟁에서 자기 백성들을 도우시려고 '오심'에 대한 찬송(참조, 신 33:2)에서 기원한 것 같다. 시편(예: 시 50:3)과 예언서(예: 사 30:27)에는 여호와께서 심판과 축복으로 '오신다'고 언급되어 있다 - 고대 근동 신화에서 차용한 시적인 어투이다(참조, 겔 1:4). 보(a/B , 935)는 또한 메시야의 '오심'을 언급하는데 사용된다. 슥 9:9에는 메시야 왕께서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고 묘사되어 있다. 어떤 구절은 특별히 어려운 문제를 제기하는데, 실로가 오시기까지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예언하는 창 49:10이 그러하다. 또 다른 난해한 구절은 겔 21:27이다: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르면 그에게 주리라". 동사 보를 사용한 매우 유명한 예언은 인자의 '도래'에 관한 것이다(단 7:13). 끝으로 마지막 날의 '도래'(암 8:2)와 여호와의 날의 '도래'(사 13:6)가 있다(넬슨의 구약해설). 보(a/B , 935)는 공동체와 함께 기도하고 희생제사를 드리려고 성소에 오는 사람에 대해 사용되었다(신 12:5, 신 31:11, 삼하 7:18, 사 30:29, 렘 7:2, 렘 7:10, 시 5:7, H8, 시 42:2, H3). 제사장들이 이 거룩한 영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특별한 규정을 이행해야 했는데 반해(출 28:29이하, 출 29:30 등), 그곳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은 의로운 행동을 나타내야 한다(시 15편, 시 24편). 이방인들도 기도하러 올 수 있었으나(왕상 8:41), 환관은 제의 공동체에서 제외되었다(신 23:1, H2). 백성들이 성소에 올 때, 그들은 제사장들에게도 갔다(신 17:9). 그들은 또한 여호와께 물으러 선지자에게 갔다(예: 왕상 14:3, 왕상 14:5, 왕하 4:42, 겔 14:4, 겔 14:7).(참조: E. A. Martens). ===="주여,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요 인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시지 인간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십니다. 만물의 창조자시요, 인간의 상상이 빚어낸 창조물이 아니오라 당신이야말로 하늘과 땅과 바다와 천상계와 지하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을 지으신 분입니다" ====[[시98]]====== *1.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팔라..)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야민..)과 거룩한 팔로(제로아..)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야샤..) *2.여호와께서 그의 구원을(예수아..) 알게(야다..) 하시며 그의 공의를(체다카..) 뭇 나라의 목전에서 명백히 나타내셨도다(갈라..) *3.그가 이스라엘의 집에 베푸신 인자와(헤세드..) 성실을(에무나..) 기억하셨으므로(자카르..) 땅 끝까지 이르는 모든 것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라아..) *4.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소리 내어 즐겁게 노래하며 찬송할지어다 *5.수금으로 여호와를 노래하라 수금과 음성으로 노래할지어다 *6.나팔과 호각 소리로 왕이신 여호와 앞에 즐겁게 소리칠지어다 *7.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주하는 자는 다 외칠지어다 *8.여호와 앞에서 큰 물은 박수할지어다 산악이 함께 즐겁게 노래할지어다 *9.그가 땅을 심판하러(샤파트..) 임하실(보..) 것임이로다 그가 의로(체데크..) 세계를 판단하시며(샤파트..) 공평으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 [행4] *29.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주의 말씀을 그 입술에 두신 바된)종들로 하여금 (성령따라)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And now, Lord, take note of their threats, and grant that Your bond-servants may speak Your word with all confidence, *30. 손[[주의 손, 주의 오른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친히 행하시는 바)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while You extend Your hand to heal, and signs and wonders take place through the name of Your holy servant Jesus." *31.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And when they had prayed, the place where they had gathered together was shaken, and they were all filled with the Holy Spirit and began to speak the word of God with boldness. -------------- shmei'on(4592, 세메이온) 표시, 표적.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세메이온은 세마(sh'ma: 표시, 예고)에서 유래했으며, 세마와 함께 '징조, 표시'를 의미하며, 다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a) 이 단어는 사람이 특정한 사람이나 사물을 인식하는 '표적' sign, 확신 시키는, 확증하는, 증명하는 '특징', '표' mark 혹은 '표', '증거' token를 의미한다. 호머의 작품에서 이 단어는 병의 징후, 짐승의 냄새, 배의 깃발, 희생제물로 바칠 짐승임을 보증해주는 표시, 통치자의 왕관, 반지의 인장, 방패에 있는 문장, 양 떼에 찍은 소인 등을 나타낸다. (b) 이 단어는 다가올 사건을 알리는 '징조' foretoken, 혹은 '전조' omen을 의미한다. (c) 세메이온에 놀라움의 성격이 있을 때 이 단어는 "기적의 표적"(miraculous sign)의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이 단어는 사물의 자연적 진행과는 모순되는, 신 혹은 기적을 행하는 자가 행한 '기적'(miracle)을 뜻하기도 한다. 이 단어는 주전 2세기의 저술(Polyb. 3, 112, 18)에서 처음으로 나오는 어구 세메이가 카이 테라타(표적들과 기사들)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