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05.11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시68.공경
첨부파일 :


!ynIP;(6440, 파님) 얼굴 face

파님(명남)은 파나(hn:P; , 6437)에서 유래했으며, '얼굴 face'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100회 이상 나온다.

(a)  이 독특한 단어 파님은 항상 복수형으로 등장하는데 아마 얼굴이 수많은 부분들의 결합체라는 사실에서 연유한 듯하다.

파님은 ① 사람의 얼굴(창 31:2), "그의 외모"(창 4:5), 한 인간 전체를 뜻하는 대용어(신 7:10)로 사용되었다. ② 관찰자에게로 향해진 면, 예를 들어 '지면'(창 2:6), ③ 이 단어는 관계를 표현하기 위하여 여러 전치사들과 함께 사용된다. 예를 들면, ~의 면전에서 before the face of, ~앞에서 before, ~속으로 into, ~의 정면에서 in front of, ~의 반대편에 opposite 등이다.(참조: E. Tiedtke)

사람의 얼굴은 그 사람을 식별하게 해주고 그 사람의 마음 가짐과 감정을 반영해 준다. 따라서 파님은 자아 또는 자아 감정의 대용어가 될 수 있다. 성경에서 얼굴은(신체의 여타 부분들과 함께) 사람의 생리 기능을 담당하는 외적 기관으로 묘사될 뿐만 아니라 어떤 형태의 행동 방식과 관계되는 것으로 기술되었으며 따라서 어떤 인격성에 의해 특정 지어진다. 얼굴이 상대방의 감정, 기분, 성격을 묘하게도 밝혀주는 것으로 생각되었다는 사실은 극히 당연하다.

"굳은" 얼굴은 반항(렘 5:3), 뻔뻔스러움(잠 7:13), 무자비함(신 28:50)의 표시이다.  "빛나는" 얼굴은 기쁨의 증거이다(욥 29:24). "부끄러워하는" 얼굴은 패배, 좌절, 굴욕을 가리킨다(삼하 19:5). "불꽃같은" 얼굴은 공포에 질린 얼굴이다(사 13:8). "나쁜" 얼굴은 근심 걱정으로 찌든 얼굴이다(창 40:7). "낙담한" 얼굴은 매우 강렬한 분노와 불쾌감에서 연유한다(창 4:5). 누군가의 얼굴을 "부드럽게" 만든다는 것은 그를 달래거나 또는 그의 호의를 구한다는 뜻이다(하나님께 대해, 왕상 13:6, 왕하 13:4). KJV는 이 마지막 문구를 "~가 여호와께 구했다/탄원했다" X sought/entreated the Lord라고 의역하였다(한글개역: "여호와께 간구하매").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은 문자적으로 "~가 여호와의 얼굴을 부드럽게 만들었다"로 된다. 마찬가지로 이 관용구는 사람에 대해서도 사용된다(잠 19:6).

"얼굴을 숨기다"라는 문구는 혐오감을 나타낸다는 의미이며(사 53:3) "얼굴을 돌리다"라는 것은 거부한다는 뜻이다(시 132:10). 역으로 타인의 "얼굴을 들어 올리다"는 호의, 존중, 수락을 나타내 보인다는 뜻이거나(삼상 25:35, 한글개역, "청을 허락하노라") 또는 편파성 편애를 드러낸다는 뜻이다(레 19:15, 한글개역, "편을 들지", "두호하지"). 얼굴을 숙인다는 빈번한 표현은 공손하게 인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파님은 동물의 얼굴들에 해당하는 말로 역시 때때로 사용되었다(겔 1:10).(V. P. Hamilton)

(b)  파님은 특히 하나님의 얼굴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① 위에서 언급한 인간의 얼굴에 관한 관용구들과 문구들의 대부분이 하나님께도 적용되었다. 하나님의 얼굴은 은혜와 신의의 표시로서 "환히 빛난다"(시 4:6). 그의 얼굴이 분노로 "침울해진다"(렘 3:12). 하나님은 그의 얼굴을 "숨기기도" 하신다(시 13:1).

하나님이 얼굴을 드시거나 그의 얼굴을 이스라엘에 비추시면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평강(즉,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이 그의 얼굴을 감추거나 돌리실 때 은혜를 거두어가심을 시사한다(참조: 시 13:2, 시 104:29). 하나님과의 교제의 행운을 가져오거나 하나님의 진노 하에 머무름을 가져오거나 하는 하나님의 작용과 반작용은, 그러한 신인 동형론적 묘사로 표현되고 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은 가장 예외적 가능성으로 언급되어 있다(창 32:30,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 창 16:13, 출 24:9 이하, 신 4:12, 삿 6:22 이하도 역시 참조하라).(참조: E. Tiedtke)

"하나님의 얼굴을 뵙다"라는 구절이 5회 발견되는데 아마 종교 예배를 위해 성소를 찾아간다는 뜻의 전문 용어일 것이다. 다섯 구절은 출 23:15, 출 34:20, 신 31:11, 시 42:2, 사 1:12이다. 이 보기들의 각 경우에서 동사 라아('보다' to see)는 니팔형으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나타나다" to appear로 번역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다는 개념을 "앞에 나타나다" appearing before라는 개념으로 유화시킨 것이다. 한 용례에서(삼상 1:22) 니팔형이 자음 본문에 의해 명시되어 있다. 여기를 니팔 부정사형 레라오트 파나이(하나님 "앞에 나타나다" to appear before God)로 생각할 수 있으며 또 그것이 당연하기도 하지만 칼 부정사형인 리로트 파나이의 가능성은 출 33:20에 비추어 볼 때 상상할 수 없다. 이에 대한 몇몇 예외가 있는데 예를 들면 야곱(창 32:30)과 모세(출 33:11)의 경우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면하여" face to face 보았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을 보거나 또는 그 음성을 듣기만해도 그는 죽게 된다(출 19:21).

하나님 얼굴을 보는 경험이 얼마나 위험스러운지 항상 강조하고 있다. 죄많은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을 본다면 그는 죽어야 하는 것이다(출 33:20, 참조: 사 6:5).

이러한 이유로 모세(출 3:6)와 엘리야(왕상 19:13) 그리고 스랍조차도(사 6:2) 하나님 면전에서 그들의 얼굴을 가렸다. 하나님을 본 후에도 살아있는 사람은 놀람과 감사(창 32:30, 신 5:24), 두려움(삿 6:22, 삿 6:23, 삿 13:22, 사 6:5)으로 압도당하게 된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출현하셨으며 그만이 아버지를 보았다(요 1:18, 요 6:46, 요일 4:12).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통로가 되는 말씀일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기도 하다.(참조: V. P. Hamilton)

출 33장에서 세가지 세가지 다른 전승들 - 여호와는 인도자로 한 천사를 보내신다. 성막을 통한 여호와와의 유대 - 여호와의 얼굴(파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신다 - 는 시내산으로부터 떠난 후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다는 기본적 사상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전승의 셋째번 것에서 파님(출 33:14 이하)은 여호와의 이스라엘에게 현현으로 특이하게 인성화된 것 같다. 이것은 해석상에 다양한 시도를 낳았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나의 파님"을 "나 자신"으로, 즉 여호와의 인격적 임재에 대한 강조적 표현으로 이해한다. 또 혹자들은 이 구절이 제사장은 제사 때에 가면을 사용했다는 그네들의 주장을 정당화시켜 준다고 말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성소에서 제사를 드릴 때에 여호와의 얼굴이 임재하셨음, 즉 하나님의 얼굴이 인간을 향하셨음을 의미한다고 이 구절을 해석한다. 이 구절에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해석이 제시될 수 없다.

② 하나님의 얼굴이 성전과 관련하여 언급되어 질 때, 이 용어는 제사와 관련된 것이다. 성경의 범위를 넘어선 이 단어의 용법이 여기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스라엘 주변의 열방은 신의 얼굴을 성전 우상의 얼굴로 만들어 이를 보고 예배하였다. 이스라엘의 예배에서 사용되어진 우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 용어는 예배자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였다고 했을 때 비유적 의미로만 사용될 수 있었다(시 24:6, 시 42:2[마소라 42:3], 슥 8:21[마소라와 70인역본], 말 1:9[마소라]).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임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보심을 의미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서 특히 그것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것은 기도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감을 의미한다. 끝으로 제사를 아주 떠나서는 이 단어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간구하는 일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시편 기자는 시 105:4에서 "계속적으로" 이렇게 할 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촉구하고 있다. 진설병(출 25:30)의 문자적 의미는 "얼굴의 떡"("임재의 떡" RSV)인 것이다. 이런 떡덩이들이 이교도 제사에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들의 제사에서는 이 떡들이 신의 음식 역할을 했던 것이다(참조: 렘 7:18). 이스라엘이 이 관습을 이어받았을 때 떡 Bread(아토스)은 하나님의 얼굴 앞에 음식으로가 아닌 예물로 유향과 함께 특별히 마련된 식탁 위에 놓여졌다. 좀 더 자세히 알기 위하여 출 35:13, 출 39:3, 민 4:11, 삼상 21:6, 왕상 7:48, 대상 9:32, 대상 23:29, 대상 28:16, 대하 2:4, 대하 4:19, 대하 13:11, 대하 29:18, 느 10:33, 마 12:4, 막 2:26, 눅 6:4, 히 9:2, 요세푸스의 저서(Ant., 3, 6, 6; 3, 10, 7)를 보라.

③ 랍비 유대주의에서 사람의 최고의 소망은, 죽음에 임한 시각에와 메시야의 날 후에 다가올 세상에서, 혹은 어떤이의 의견에 따르면, 메시야의 시절 동안에라도, 셰키나의 얼굴 또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빛의 반사를 받아 의인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날 것이지만(단 12:3) 불신앙인들은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형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자카이의 아들 요난(R. Johanan b. Zakkai)이 죽음의 침상에서 두려워 한 것을 대조해 보라(SBI 208; ML 478).

=================


b/f(2896, 토브) 좋은, 선한, 즐거운, 선, 이익, 번영, 복지

토브(형용사)는 토브(b/f , 2895)에서 유래했으며, 형용사로는 '좋은, 선한, 즐거운, 유쾌한', 명사로는 '좋은 것, 선, 이익, 번영, 복지'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560여회 나온다.

'선한'은 실제적인 혹은 경제적인 이익을 언급하는 것으로 잘 나온다. 좋은 열매(창 2:9)와 바로의 꿈에 나타난 이삭(창 41:5, 창 41:36)은 먹기에 좋은 것이었다.

요셉의 노예상태가 "좋은" 것은 양식과 민족의 생존 같은 실재적인 이익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선하지 못한" 모세의 재판에는 실제의 행정적인 불이익도 포함되었다: "모세의 장인이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하는 것이 선하지 못하도다"(출 18:17).

토브로 전달된 다른 실제적인 선은 아합에게 거부한 승리의 약속(대하 18:7); 환대와 우정(창 26:29); 유익한 충고(삼하 17:7, 삼하 17:14); 일반적인 경제번영(왕상 10:7); 농업 번영(호 10:1, ASV); 그리고 하나님의 의지(암 9:4) 등이다.

그러나 국가의 풍기를 문란케한(느 5:9) 강포한 삶(잠 16:29)과 행동은 "선하지 못하다"고 일컬어 진다.

노동의 "선"은 일에서 얻은 실제적인 이득을 가리키는 것 같다: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전 3:13, 참조: RSV '기쁨' pleasure).

"선"은 여러 가지 광범위한 추상적인 관점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선한 이름은 명성이나 평판의 관점에서 볼 때, 후손보다 더 낫다: "내가 내 집에서, 내 성안에서 자녀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며 영영한 이름을 주어 끊치지 않게 할 것이며"(사 56:5). 다윗이 제후인 아기스에게 충성한 것은 "선한 것"으로 묘사된다: "아기스가 다윗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내 목전에 하나님의 사자 같이 선한 것을 내가 아나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은 말하기를 그가 우리와 함께 전장에 올라가지 못하리라 하니"(삼상 29:9, RSV '흠이 없는' blameless).

엘리후는 진리나 타당성과 관련 지어볼 때 무엇이 선한 것인지를 결정하라고 동료들에게 요구했다: "우리가 스스로 옳은 것은 택하고 무엇이 선한가 우리끼리 알아 보자"(욥 34:4).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있어, 노를 더디 내는 것은 이상적인 용사의 폭력적인 힘보다 더 바람직하였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

마찬가지로,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아이는 고집 센 왕보다 "더 나았다"(전 4:13).

이 단어는 심미적이거나 감각적인 선함도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비친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이나 매력(창 6:2), 리브가의 아리따움(창 24:16), 그리고 밧세바의 아름다움(삼하 11:2)을 묘사한다. 이 단어가 사람을 묘사할 때, 영어의 관용구는 '잘생긴' handsome이란 말을 사용한다(삼상 16:12).

감각적인 기쁨이나 좋은 것은 "단"이라고 묘사하는 데에서(렘 6:20), 그리고 다메섹의 물이 요단의 흙탕물보다 더 "낫다"는 나아만의 판단(왕하 5:12)에서 나타난다.

다른 것보다 더 나은 것으로서의 한 포도를 묘사하는 데에는 감각적인 매력도 포함되어 있다: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이제 행한 일이 너희의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삿 8:2).

'선한'은 자주 '행복한' happy을 나타낸다. 이것은 왕이 결혼하는 때를 묘사한다: "내 마음에서 좋은 말이 넘쳐 왕에 대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필객의 붓과 같도다"(시 45:1). 행복한 축제일은 "좋은 날"로 묘사되기도 한다: "왕의 조명이 이르는 각 도, 각 읍에서 유다인이 즐기고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고 그 날로 경절을 삼으니 본토 백성이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유다인 되는 자가 많더라"(에 8:17, RSV '휴일' holiday; 참조: 삼상 25:8).

"좋은 마음"은 행복을 나타낸다(대하 7:10, 잠 15:15).

행복은 술에 의해 야기되기도 하는 것 같다(전 9:7).

토브를 포함하는 관용어로는 선호나 뜻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는 "[어떤 사람의] 눈에 선한"이란 용법이 있다. 이런 용법의 예들로는 도망친 노예가 어떤 곳을 거처로 택함(신 23:16, RSV "그를 기쁘게 하는 곳), 그리고 슬로브핫의 딸들이 남편으로 택함(민 36:6)이 있다. 하나님의 뜻은 이런 식으로 표현될 것이다(삼상 3:18). 이것은 타락하고 죄에 가득찬 욕망을 묘사한다(창 19:8, 삿 19:24). 이런 경우에, 이 관용어는 도덕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토브는 우수한 질이나 상재적인 가치에 대한 개념도 포함한다. 이런 식으로 이 단어는 하윌라의 "정"금(창 2:12)과 고급 향유(아 1:3, RSV "바르는 기름" anointing oils)를 묘사한다.

우수한 장인은 모세가 "준수하다" (즉 고귀하다)고 묘사되는 경우(출 2:2)처럼, 인간의 성품의 특성이나 고귀성과 마찬가지로 이런 식으로 지칭된다(사 41:7).

토브의 중요한 용법은 도덕적인 선을 가리킨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시 34:14, H15)라는 명령은 분명히 "선"을 도덕적인 악과 대조 시킨다. 하나님께서 다루기 어려운 자기 백성을 가르치실 "선한 길"은 도덕적인 삶을 가리킨다(왕상 8:36). '선한'과 '옳은'을 뜻하는 야샤르는 종종 도덕적인 선을 뜻하는 유사한 말로 나온다(대하 14:1, 대하 31:20).

토브는 하나님에 대해 사용되었다.

어떤 용법들에는 앞에서 논의된 둘 이상의 의미의 영역들이 뒤섞여 있다. 옛 언약의 "좋은 땅"은 실제적이며, 경제적이며 미학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신 1:25, 수 23:13).

마찬가지로, "선한 분"으로서의 하나님 개념도 "선한"이란 단어의 모든 가능한 의미들을 충분히 함축하고 있다.

하나님은 선하시며(시 106:1, 대상 16:34), 좋으신 주님이시다(시 52:9).

구약성경에서 선의 개념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신앙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하나님의 개념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적인 것으로서의 선의 개념은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선은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은사이며, 그렇기 때문에 선은 인간의 힘의 통제권 밖에 존재한다(창 3:5).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단지 '선'이 아니라 선하신 성품을 가지신 분이시라는 사상이 철두철미하게 전제되어 있다. 이러한 인식이 구약성경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과 개인의 관계가 성숙해지는 과정에서 더욱 발전하였다.

하나님만이 오로지 선하신 분이시다라는 사실은 구약성경에서 그가 선택한 백성을 구원하신 것, 율법을 주신 것(신 30:15, 잠 28:10), 그리고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출 18:9, 신 10:29이하)과 같은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명백해졌다. 이스라엘인들은 하나님의 창조 활동(창 l:1-8)에서건, 그의 말씀에서건(사 39:8), 그의 영에서건(시 l43:10), 심지어 그가 반대자들에게 말하기 위해 나타나셨을 때 조차도(창 50:20) 그에게서 유래되는 모든 것은 선하다라는 사실을 알고부터 하나님을 오로지 선하신 분으로 찬양하는 새로운 계기로 발전하였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한 그의 사역에서 선(참조: 출 l8:9)을 행하시는 바 그 목적은 구원이며, 율법을 통해 인간에게 방향을 제시해 주는데 있다. 선은 이미 행해져 왔으며, 또한 준비되어 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약속했던 선은 메시야적, 종말론적 구원에서 실제로 성취될 것이다(레 32:39 - 42; 사 52:7). 한편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통하여 선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선을 행하는 자는 선하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도움,없이 가능할 것인가는 논쟁이 되고 있다. 전도자는 하나님의 도움,없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전 7:20).

랍비 유대주의는 하나님의 선함이 구원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했다. 선한 것과 성취 가능한 것은 율법에 계시되어 있다. 하나님의 법을 실행할 때 비로소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있고 또 선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인 선은 오로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동료 인간들 사이의 인격적 관계에서만 실행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앞의 논의에 비춰볼 때, 각 개별 용법은 앞의 의미들 중 어느 것이 가능한지를 고찰하기 위해 분명하게 검토되어야 한다.

수많은 문학적인 표현들은 특별한 취급을 필요로 한다. "선과 악"은 보편성에 대한 관용어로 이용된다(민 24:13, 삼하 13:22). 어떤 이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이런 보편성을 뜻하는 관용어에 지나지 않는다고 시사하였다(창 2:9). 그러나 창세기 앞부분의 문맥은 전체적으로 이 어구의 도덕적 의미에 기초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선한 것"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곧 동의나 수용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도덕적 판단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왕하 20:19, 참조: 삼상 20:7).

"선한 눈"은 관대함을 나타낸다(잠 22:9, RSV '관대한 눈' bountiful eye ).

전도서에서, "선을 보다" to see good는 좋은 것이나 삶의 기쁨을 경험하다로 번역된다(전 5:18, RSV '기쁨을 발견하다' find enjoyment; 전 6:6, RSV '선을 향유하지 못하다' enjoy no good).(참조: A. BOWLING; E. BEYREUTHER). 


========[[시68]]=========

*1.하나님이 일어나시니 원수들은 흩어지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은 주 앞에서 도망하리이다

*2.연기가 불려 가듯이 그들을 몰아내소서 불 앞에서 밀이 녹음 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

*3.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

*4.하나님께 노래하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하늘을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이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이시니 그의 앞에서 뛰놀지어다

*5.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6.하나님이 고독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 갇힌 자들은 이끌어 내사 형통하게 하시느니라 오직 거역하는 자들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7.하나님이여 주의 백성 앞에서 앞서 나가사 광야에서 행진하셨을 때에 (셀라)

*8.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하나님 앞에서 떨어지며 저 시내 산도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진동하였나이다

*9.하나님이여 주께서 흡족한 비를 보내사 주의 기업이 곤핍할 때에 주께서 그것을 견고하게 하셨고

*10.주의 회중을 그 가운데에 살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

*11.주께서 말씀을 주시니 소식을 공포하는 여자들은 큰 무리라

*12.여러 군대의 왕들이 도망하고 도망하니 집에 있던 여자들도 탈취물을 나누도다

*13.너희가 양 우리에 누울 때에는 그 날개를 은으로 입히고 그 깃을 황금으로 입힌 비둘기 같도다

*14.전능하신 이가 왕들을 그 중에서 흩으실 때에는 살몬에 눈이 날림 같도다

*15.바산의 산은 하나님의 산임이여 바산의 산은 높은 산이로다

*16.너희 높은 산들아 어찌하여 하나님이 계시려 하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냐 진실로 여호와께서 이 산에 영원히 계시리로다

*17.하나님의 병거는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 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

*18.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들을 취하시고 선물들을 사람들에게서 받으시며 반역자들로부터도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로다

*19.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20.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하나님이시라 사망에서 벗어남은 주 여호와로 말미암거니와

*21.그의 원수들의 머리 곧 죄를 짓고 다니는 자의 정수리는 하나님이 쳐서 깨뜨리시리로다

*22.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들을 바산에서 돌아오게 하며 바다 깊은 곳에서 도로 나오게 하고

*23.네가 그들을 심히 치고 그들의 피에 네 발을 잠그게 하며 네 집의 개의 혀로 네 원수들에게서 제 분깃을 얻게 하리라 하시도다

*24.하나님이여 그들이 주께서 행차하심을 보았으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 성소로 행차하시는 것이라

*25.소고 치는 처녀들 중에서 노래 부르는 자들은 앞서고 악기를 연주하는 자들은 뒤따르나이다

*26.이스라엘의 근원에서 나온 너희여 대회 중에 하나님 곧 주를 송축할지어다

*27.거기에는 그들을 주관하는 작은 베냐민과 유다의 고관과 그들의 무리와 스불론의 고관과 납달리의 고관이 있도다

*28.네 하나님이 너의 힘을 명령하셨도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견고하게 하소서

*29.예루살렘에 있는 주의 전을 위하여 왕들이 주께 예물을 드리리이다

*30.갈밭의 들짐승과 수소의 무리와 만민의 송아지를 꾸짖으시고 은 조각을 발 아래에 밟으소서 그가 전쟁을 즐기는 백성을 흩으셨도다

*31.고관들은 애굽에서 나오고 구스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신속히 들리로다

*32.땅의 왕국들아 하나님께 노래하고 주께 찬송할지어다 (셀라)

*33.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내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34.너희는 하나님께 능력을 돌릴지어다 그의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있고 그의 능력이 구름 속에 있도다

*35.하나님이여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나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나니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

===========

대적들의 분산을 비는 기도(시 68:1-6)

Ⅰ. 다윗은 하나님께서 영광 중에 나타나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1. 그것은 그의 대적들을 부끄럽게 하기 때문이다(1-2절). “하나님은, 그들에게 형을 언도하시는 재판장으로서, 싸움터를 빼앗고 그들을 처형하는 대장으로서, 일어나사 원수를 흩으시며,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땅을 지킬 수 없고 더욱이 주를 대적할 능력이 없는 자들로서, 주 앞에 도망하게 하소서. 하나님은 해가 힘있게 솟아오를 때처럼 일어나소서. 그러면 암흑의 자식들은, 황혼이 떠오르는 해 앞에서 도망하듯이 흩어질 것입니다. 마치 연기가 해를 가리울 것처럼 올라가나 곧 바람에 의해 걷혀버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는 것처럼, 그들을 쫓아내소서. 불 앞에 밀랍이 녹듯이, 그들로 하여금 빨리 녹아버리게 하소서.” 이처럼 다윗은 모세의 기도를 해설하고 있으며, 되풀이해 그 자신과 그의 시대에 적용시킬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해 설명함으로써 성경의 기도를 우리가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지시하고 있다. 아니, 이 시편은 구속주가 그의 나라의 대적들을 쳐 승리하는 것을 내다보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인도한 언약의 천사였기 때문이다. 다음 사실들을 주목하자.

(1) 하나님의 원수요, 그를 미워해, 사람들 가운데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와 여자의 후손들을 대적하는 옛 뱀과 연합한 자들이 있으며, 과거에도 있었고 또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2) 하나님과 원수 되는 자들은 사악한 자들이며, 사악한 자들의 자손들일 수밖에 없다.

(3) 우리가 이러한 우리의 원수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원수들에 대적해,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적의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들의 모든 시도를 물리칠 기도를 해야 한다.

(4) 하나님께서 일어나시기만 한다면, 회개할 줄 모르고 돌이키지 않는 그의 모든 원수들, 즉 회개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려 하지 않는 원수들은 분명히 흩어지고 그리고 쫓김을 당할 것이며, 그의 존전에서 멸망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하나님께 대해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서 형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심판의 날은 “경건치 않은 사람들의”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멸망의 날”이 될 것이다(벧후 3:7). 따라서 그들은 그때에 주께서 나타나실 그 타오르는 불 앞에서 밀처럼 녹을 것이다(살후 1:8).

2. 그의 백성들의 위로와 기쁨을 위한 것이다(3절). “지금 슬픔 속에 있는 의인은 기뻐하여, 그의 은혜로운 임재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게 하소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기쁨입니다. 그들이 언제나 하나님 앞에 올 때에 기뻐하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지극히 즐거워하게 하소서. 그들로 기쁨을 갖고 즐거워하게 하소서.”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들은 지극한 즐거움을 갖고 기뻐할 이유가 있다. 우리는 이러한 기쁨을 모든 성도들에게서 바라야 한다. 왜냐하면 기쁨은 그들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빛은 의로운 자들을 위해 있다.”

Ⅱ. 그는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신 것에 대해 찬송하고 있으며, 우리에게 그를 찬송하도록, 곧 그의 이름을 찬양하고 그를 격찬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1. 그를 위대하신 하나님, 무한히 위대하신 하나님으로서 격찬하도록 요청하고 있다(4절). 그는 “그의 이름 여호와에 의해서, 하늘을 타고 다니시는도다”(한글 개역과 다소 다름─역주). 그는 천체의 모든 운동의 원천이시며, 병거를 타는 자가 병거를 운전하듯, 천체들을 지시하고 조종하시고, 하늘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최고의 명령권을 지니고 계신다. 그는 그의 백성을 돕기 위해 매우 빠르게, 매우 강하게, 그리고 대항하는 자들이 못 미치도록 매우 높게 하늘을 타신다(신 33:26). 그는 하늘을 그의 이름 “여호와”, 곧 스스로 존재하며 스스로 충족하는 자, 모든 존재와 능력과 운동과 완전함의 근원인 자의 이름으로 다스리신다. 이것이 영원한 그의 이름이다.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을 격찬할 때는, 우리가 “그 앞에서 뛰놀아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기쁨은 우리가 그를 경배할 때 지녀야 하는 경외감과 경건한 두려움에 매우 잘 일치한다.

2. 은혜로우신 하나님, 인자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서 그를 격찬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그는 위대하시나 그 어느 것도, 아니 가장 비천한 것도 멸시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위대하신 능력의 하나님이시므로, 그는 환난당하는 자들을 위로하시는 데 그의 능력을 사용하신다(5-6절). 고아와 과부, 그리고 고독한 자는 그가 그들에게 모든 것을 충족케 하심을 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얼마나 그의 영광이 되고 있는가를 살펴보라. 하늘을 “타고 광야에 행하시며”, 그 이름이 “여호와”이신 그가 곧 왕들의 왕, 군주들의 군주로서, 그리고 나라와 민족의 모든 일에 대한 최고의 지휘자로서 숭앙되어 왔어야 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그는 실로 그러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고아의 아버지”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신다. “하나님은 높으실지라도 천한 자를 존중하신다.” 이와 같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자들은 행복하다. “하늘을 타시는” 자는 모실 만한 가치가 있는 아버지이시다. “자기들의 하나님이 여호와인 백성들은” 세 배나 행복하다.

(1) 가족들이 가장을 여의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돌보시며, 친히 그들의 가장이 되신다. 그리고 과부와 고아들은 그들이 상실한 친족관계를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며, 그것은 무한히 더 낫다. 그는 “고아의 아버지”로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복 주시고 가르치시며, 그들에게 공급해 주시고 분배해 주신다. 그는 “그들을 살려두실” 것이며(렘 49:11), 그에게서 그들은 “긍휼을 얻을” 것이다(호 14:3). 그들은 그를 아버지라고 부를 자유, 그리고 그들의 후견인으로서 그에 대한 그들의 관계를 탄원할 자유를 갖고 있다(146:9, 10:14, 18). 그는 과부들의 재판장 또는 보호자로서 그들에게 권고해 주시고, 그들의 슬픔을 바로잡아 주시며, 그들을 인정하시고 신원해 주신다(잠 22:23). 그는 그들의 모든 호소에 귀를 열어놓으시며, 그들의 모든 궁핍함에 대해 손을 펼쳐놓으신다. 그는 “그 거룩한 처소”에서 그렇게 하시는데, 그 처소는 하늘에 있는 그의 영광의 처소나(거기에서 그는 심판의 보좌를 예비하셨고, 고아나 과부는 자유로이 아뢰며, 그 보호를 받고 있다. 9:4, 7), 땅 위에 있는 그의 은혜의 처소로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과부와 고아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신원하는가에 대한 지시다. 그들로 하여금 그의 거룩한 처소로, 그의 말씀과 성찬식으로 나아가게 하라. 거기에서 그들은 그를 발견할 수 있으며, 그에게서 위안을 발견할 수 있다.

(2) 가족이 형성될 때, 그는 바로 그 설립자이시다. “하나님은 고독한 자로 가족 중에 처하게 하시며”, 외로운 자들을 안락한 친척관계로 들어가게 하시고, 정착하지 못한 자들을 정착하게 하신다(113:9). 그는 “밖에서” 위안을 “구할” 수밖에 없는 “자들을 집에 거하게 하시어”─하몬드 박사는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빈곤한 자들에게 생계를 마련할 길을 열어주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속한 일이듯이, 또한 사람이 베풀어야 할 자선의 훌륭한 길이다.

3. 의로우신 하나님으로서 격찬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1) 하나님은 억눌린 자들을 풀어주시기 때문이다. 그는 “수금된 자를 이끌어내사 형통케 하시느니라.” 그리고 부당하게 감금되고 예속되어 있는 자들을 자유롭게 놓아주신다. 하나님께서 자유케 해주시려는 자들은 어떤 사슬도 묶어둘 수 없다.

(2) 압제하는 자들에게 응보를 내리시기 때문이다. “거역하는 자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속이고 해함으로써 얻은 것에서 위로를 얻지 못한다. 하나님께 거역함으로 인해서, 모든 즐거움의 원천이 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박탈당한 자들에게는 아무리 기름진 옥토라도 메마른 땅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에서 광야로 이끌려나왔으나 거기에서 그들은 애굽 사람들보다 더 풍성히 공급받았는데, 그 애굽 땅은 때로 나일강의 물이 끊어졌을 때 메마른 땅이 되어버렸다.

==============

긍휼을 회고함(시 68:7-14)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근래에 그와 그의 백성들을 위해 행하신 큰 일들에 대해 감사드리고 난 후, 하나님께서 옛날 그들의 열조를 위해 행하신 것에 대해 찬미할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새로운 긍휼은 우리로 하여금 이전에 받은 긍휼을 회상케 하며, 그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소생시켜야 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Ⅰ. 하나님께서 친히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해 내셨다. 그가 그들을 사슬에서 풀어내신 후, 메마른 땅에 내버려두시지 않고 그들 앞에서 앞서 나가사 “광야에 행진하셨다”(7절). 그것은 여행이 아니라 행진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병정들로서, 군기를 든 군대로서 나아갔기 때문이다. 애굽 사람들은 저들이 광야에 갇힐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스스로 속았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선두로 하고 있었으므로 광야를 행진했고, 거기서 잃어버림을 당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광야로 이끌어내신다면, 그는 분명 거기에서 그들의 앞장을 서실 것이며, 그들을 거기에서 이끌어내실 것임을 확신하자.

Ⅱ. 그는 시내 산에서 그들에게 그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나타내셨다(8절).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보거나 그의 음성을 들은 백성들은 결코 없다(신 4:32-33). 그들처럼 상세히 해설되고 이처럼 시행된 뛰어난 율법을 가진 백성들은 결코 없다. 그때 “땅이 진동하였고”, 아마도 이웃나라들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거기에는 물론 우레가, 하늘에서 떨어뜨린 것처럼 보인 뇌우를 동반하고 있는 우레가 있었다. 반면 하나님의 교훈은 “빗방울처럼 떨어졌다(신 32:2). “시내 산”, 그 거대한 산, 그 긴 산마루가 있는 산도 “하나님 앞에서 진동하였다”(삿 5:4-5; 신 33:2; 합 3:3 참조). 하나님의 엄위의 두려운 광경은 그들을 두려움과 무서움으로 위압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를 믿고 의지하도록 격려했다. 그들의 행복한 정착을 가로막는 어떤 어려움의 산이 있었을지라도, 시내 산도 옮기실 수 있었던 그가 제거하실 수 있었고, 이기실 수 있었다.

Ⅲ. 그가 그들을 위해 광야와 가나안에서 매우 편안한 삶을 마련해 주셨다(9-10절). “주께서 흡족한 비를 보내셨고,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

1. 이것은 광야에서 그들의 장막에 만나를 공급해 주셨던 사실을 언급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메추라기처럼 광야에서 만나가 그들에게 비같이 내렸던 것이다(78:24, 27). 그리고 그것은 관대한 또는 아낌없이 주는 비라고 불리기에 마땅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룩한 하사품에 대한 놀라운 실증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진영(여기서는 “하나님의 산업”이라 부르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가 그들을 택하시어 그 자신에게 특유한 보배가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이 “곤핍할 때”에, 그리고 곧 멸하게 되었을 때에 견고케 했다. 이것은 그들의 믿음을 견고케 했고, 또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에 대한 없어지지 아니할 증거가 되었다. 심지어 광야에서도 하나님은 자기 회중이었던 이스라엘을 위해 편안한 거처를 마련하셨다.

2. 또는 이것은 가나안, 즉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한다”고 일컬어지고 있는(신 11:11)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에서 그들에게 적절한 때에 필요한 것을 주신 사실에 대한 언급으로도 볼 수 있다. 그 풍성한 땅이 거기에 거하는 자들의 죄악으로 인해 불모지로 변했을 때, 하나님은 심판 속에서도 긍휼을 기억하시어 그들에게 흡족한 비를 내리시고 다시 새롭게 하셨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회중이 거기에 거했으며, 거기에는 가난한 자도 배불리 먹을 만큼 양식이 충분히 있었다. 이는 이스라엘을 위해 마련된 하나님의 영적 양식을 가리키고 있다. 은혜의 성령과 은혜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의 산업을 견고케 하신 흡족한 비며, 그 비에서 그들의 열매가 나온다(사 45:8). 그리스도 자신이 바로 이 비이시다(72:6). “저는 땅을 적시는 소낙비같이 임하리라.”

Ⅳ. 그는 빈번히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대적들을 이기게 하셨다. 군대들, 군대들의 왕들은 그들이 제일 처음 가나안에 왔을 때부터, 그리고 사사들 시대에도, 계속해 다윗 시대까지 그들을 대적했으나 그들은 그 대적들을 물리쳤다(11-12, 14절). 여기에서 다음을 관찰하자.

1. 하나님은 그들의 총사령관이었다. “주께서” 그들 군대의 대장으로서 “말씀을 주셨다.” 그는 그들을 위해 재판장들을 세우셨고, 그들에게 명령하시고 지시하셨으며, 그들에게 성공을 확신시켜 주셨다. “하나님은 자기의 성결로 말씀하셨으니”, 곧 “길르앗은 나의 것”이라고 하셨다.

2.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주는 하나님의 사자 선지자들이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의 말씀을 주셨고(주의 말씀이 그들에게 임했다), 그때에 “선포하는 자들이 큰 무리였다.” 곧 예언자들과 “여예언자들”이 큰 무리를 이루었다(“선포하는 자들”은 여성으로 나와 있다. 한글 개역과는 다소 다름─역주). 하나님께서 보내시고자 하는 소식이 있을 때, 그에게는 사신들이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한글 개역과는 다소 다름─역주). 또는 아마도 승리를 얻었을 때, 보통 그렇게 한 것처럼 여자들도 개가에 합세한 사실을 언급한 것일지도 모른다(출 15:20; 삼상 18:7). 그때 그들은 하나님이 이루신 일에 대해 개가를 부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했다.

3. 그들의 대적들은 패해 부끄러움을 당했다. “여러 군대의 왕들이 도망하도다.” 아주 큰 두려움과 말할 수 없는 긴박함을 안고 도망했다. 싸우지도 않고서 도망했으며, 일격을 가하지도 않고 후퇴했다. 그들은 신속히 도망했고, 도망한 후 다시는 군세를 회복하지 못했다.

4. 그들은 싸움터의 탈취물로 부요케 되었다. “집에 거한 여자도 탈취물을 나누도다.” 남자들뿐만 아니라, 집에 머물렀던, 탈취물을 나누기 위해 분배물 곁에 머물렀던 용사들뿐만 아니라(삼상 30:24) 집에 거한 여자도 분깃을 가졌는데, 이는 탈취한 물건이 많음을 시사하고 있다.

5.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셨던 이 위대한 일들은 그들에게 성별되었고, 그들의 교화에 기여했다(14절). “전능하신 자가 그녀를 위해(교회를 위해) 열왕을 그중에서 흩으실 때에는 살몬에 눈이 날림 같도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의해 정결케 되고 깨끗하게 되었도다. “무리가 적군을 향해 나아갔을 때, 그들은 모든 악한 것들로부터 그들 자신을 지켰다”, 그리하여 그 무리는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고, 이스라엘은 그 승리에 의해 정결함을 견고케 했다. 이스라엘의 승리에 대한 이 이야기는 구속주가 자기 소유인 자들을 위해 사망과 지옥 위에 높이 들리심으로써 얻은 그 승리에 적용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해, 우리의 영적 대적들은 도망하게 되었고, 그들의 힘이 꺾였으며, 그들은 영원히 하나님의 백성들을 해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승리는 제일 먼저 여자(공포하는 여자)에 의해 제자들에게 통지되었고(마 28:7), 그들에 의해 다시 온 세상에 전파되었다. 한편, 집에 거하는 믿는 자들은 비록 그것을 위해 어떤 일도 기여한 바 없었지만, 그 혜택을 즐기고 있으며, 그 탈취물을 나누고 있다.

Ⅴ. 천하고 멸시받는 처지에서 그들은 장엄하고 번영하는 상태로 승진했다. 그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지냈고, 후에 때로 힘센 이웃들에 의해 압제당했을 때, 그들은 천시당하는 깨어진 그릇처럼, 또는 즐겨 쓰이지 않는 검고 더럽고 퇴색한 그릇처럼 “토기”, 곧 쓰레기 “속에 누워”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드디어 그들을 그 속에서 “건지셨고”(81:7), 다윗의 시대에 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번영하는 나라들 중의 하나가 될 가망성이 있었으며, “그 깃을 황금으로 입힌 비둘기같이”(13절) 그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눈에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되었다. “따라서”─하몬드 박사는 말하고 있다─“그리스도의 나라 아래에서는 나무와 돌을 숭배하면서 피조물들 가운데 가장 낮고 비천한 상태에 이르고 가장 타락한 정욕 속에 빠졌던 이방의 우상 숭배자들도, 그 혐오스러운 상태에서 떠나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리스도의 모든 덕, 곧 세상에서 가장 큰 내적 아름다움을 실천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그것은 또한 교회가 고난당하는 상태에서 건져지는 것과 신자들이 낙심 후에 위로를 얻는 것에 적용될 수 있다.

===========


시온의 영광(시 68:15-21)

다윗은 하나님께서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것에 대해 그를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 찬미한 후에(8절), 여기에서 그를 특별히 시온의 하나님으로서 찬미하고 있다. 9장 11절과 비교해 보라. “너희는 시온에서 거하신 여호와를 찬송하라.” 이러한 이유에서 시온은 “하나님의 산”이라 불리고 있다.

Ⅰ. 다윗은 시온을 바산의 산과 그밖의 높고 비옥한 산에 비교하고 있으며, 시온을 그것들보다 더 좋아하고 있다(15-16절). 시온은 그것들과 비교할 때 작고 낮으며, 그것들처럼 가축들과 목초로 덮여 있지 않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산, 하나님이 거하시려 하는”, 그리고 그의 특별한 임재의 표적을 나타내시기 위해 택하신 산(132:13-14)이라는 점에서, 다른 어느 산들보다 탁월하다. 이 세상에서 높고 크게 되는 것보다 하나님께 거룩하게 되는 것이 훨씬 더 영예롭다.

“너희 높은 산들아, 어찌하여 시기하여 보느뇨? 어찌하여 초라한 시온을 모욕하며 너희의 높음을 자랑하느뇨? 이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산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크기에서 그것을 능가하고 최상의 산이라 할지라도 이 위에 왕의 깃발이 올려졌으므로 너희는 모두 여기에 항복해야 한다.” 시온은 복음의 교회 모형이었으므로, 특별히 영예로웠다. 따라서 교회는 시온 산이라 불리고 있으며(히 12:22), 이것은 “여호와께서 이 산에 영영히 거하시리로다” 하는 그의 말 속에 암시되어 있다. 복음의 시온에서 그 사실은 완성된다. 구속주의 나라에 비교될 만한 나라가 이 세상에는 없으며, 복음헌장에 의해 형성된 성읍에 비교될 만한 성읍이 없다. 왜냐하면 거기에 하나님이 거하고 계시며, 또 영원히 거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Ⅱ. 다윗은 시온을 시내 산과 비교하고 있다. 시내 산에 대해 그는 이미 언급했다(8절). 이제는 비록 시내 산의 경우처럼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는 않더라도, 실지로 시온에는 쉐키나, 곧 거룩한 임재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17절). 천사들은 “하나님의 병거”다. 하나님은 그것을 대적들과 싸우는 병거로 사용하시며, 그의 친구들에 대해 엘리야에게 하셨던 것처럼(그리고 나사로도 천사들에 의해 받들려 올라갔다고 일컬어지고 있다) 운반하는 병거로, 그리고 그의 영광과 전능을 보이시는 중에서는 의식용의 병거로 사용하신다. 그 병거는 매우 무수하다. 그 수는 “만만”이다. 하늘의 예루살렘에는 “천만 천사”가 있다(히 12:22). 다윗이 싸운 대적들은 병거를 갖고 있었다(삼하 8:4).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님의 병거에 비하면 수효로나 힘으로 어떠한가? 다윗이 하나님의 병거를 자기의 편으로 하고 있는 한, 그는 “병거와 말”을 의지하는 자들을(20:7)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하나님은 무수한 천사들을 동반하고 시내 산에 나타나셨고, 그 천사들에 의해 율법이 전해졌다(행 7:53). “여호와께서 일만 성도 가운데서 강림하신다”(신 33:2). 그리고 여전히 하나님은 시온에다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또 실제로 무수한 천군을 거느리고 임재해 계신다. 이것이 하나님이 그들 사이에 “거하는” 것으로 말해지고, 그 그룹들로써 상징되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은 그 구절의 끝 문장을, “시내 산은 성소에 있다”로 읽고 있다. 즉, 성소가 시내 산 대신 이스라엘에 있었고, 거기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신탁을 받았다. 우리 주 예수는 이 병거들을 지휘하신다. 맏아들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실 때, 거기에는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 하는 지시가 들어 있다(히 1:6). 그들은 매사에 그에게 수종 들었다. 그리고 그는 이제 그들 가운데 계시며,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고 있다”(벧전 3:22). 그리고 천사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엄숙한 모임에 함께 참여한다는 사실이 신약에 암시되어 있다(고전 11:1). 여자들은 “천사들을 인하여” 그 머리 위에 베일을 쓰는 것이 마땅하다(엡 3:10 참조).

Ⅲ. 시온 산의 자랑은 바로 하나님께서 “거룩한 산에 세우신”(2:6) 왕, “시온의 딸에게 임한”(마 21:5) 왕이었다. 그 왕의 승천을 시편 저자는 특별히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말은 분명히 그렇게 적용되어 있다(엡 4:8).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셨도다”(18절. 47:5-6과 비교). 그리스도가 높은 곳으로 오르신 것이 여기에 과거의 일로 언급될 만큼 확실했고, 그의 영예에 관한 것으로서 언급될 만큼 위대했다. 이 말은 높이 들리신 그의 전체 상태를 포함하고 있으나, 특별히 그가 하늘로 승천하시어 아버지의 우편에 계심으로써 그의 승천은 물론 우리의 유익이 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 그는 그때에 지옥의 문을 이기셨다. 그는 “사로잡힘을 사로잡았다”(한글 개역과는 다름─역주). 즉, 그는 위대한 정복자들이 하듯, 당당하게 자기의 포로들을 이끄시고, 그들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셨다”(골 2:15). 그는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자들, 만일 그가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를 영원히 사로잡고 있을 자들을 사로잡으신다. 아니, 그는 죄와 사단의 권세를 완전히 꺾으셨으므로, “사로잡힘 그 자체를 사로잡으셨다.” 그가 사망의 사망이셨던 것과 같이, 그는 또한 사로잡음의 사로잡음이시다(호 13:14).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적인 원수들에게 완전히 승리하신 그 승리를 시사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정복자 이상의” 존재들이 된다. 즉 승리자가 된다(롬 8:37).

2. 그때에 그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놓으셨다. “주께서 선물을 인간을 위해서 받으셨도다.” 즉 그가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로 바울 사도는 풀이하고 있다(엡 4:8). 왜냐하면 그는 주시기 위해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의 머리 위에 성령의 기름부음이 쏟아져 그의 옷자락까지 내려올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가 받으신 것을 주셨다. 영생을 주는 권세를 얻었으므로, 그는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요 17:2). “주께서 선물을 인간을 위해서 받으셨지”, 천사들을 위해 받은 것은 아니다. 타락한 천사들이 성도가 될 수 없었고, 또한 서 있는 천사들이 복음의 사역자가 될 수도 없었다(히 2:5). 또 그 선물은 유대인들만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위한 것이다.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이 선물의 혜택을 얻을 수 있었다. 사도 바울은 이 선물(은사)이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혹은 목사와 교사”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엡 4:11). 즉 복음 사역자의 제도와 그에 대한 사람의 자격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하늘의 선물과 그리스도 승천의 결실로 존중되어야 한다. “주께서 선물을 인간에게서 받으셨도다”(난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즉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될 수 있도록, 기꺼이 그 자신에게 인성(人性)을 입히셨다. 중보자이신 그 안에 “모든 충만함이 거하며, 그의 충만함에서 우리가 받을 수 있다.” 우리를 위해 이 선물들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친절과 사랑을 찬미하기 위해 시편 기자는 다음 일들에 주목한다.

(1) 우리가 그것들을 박탈당했던 사실을 주목하고 있다. 그는 “패역자”, 패역했던 자를 위해 그것들을 받으셨다. 인간의 모든 자손들은 타락한 상태에서는 패역했었다. 이는 아마도 특히,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 되었던 이방인들을 의미하는 것일지 모른다(골 1:21). 그들을 위해 이 선물을 받으며, 그들에게 그것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이 무기를 내려놓을 수 있도록, 그들의 적의가 죽을 수 있도록, 그리고 그들이 다시 충성할 수 있도록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패역자들이 복종해 사함을 받을 뿐만 아니라, 발탁되기까지 하는 뛰어난 그리스도의 은혜를 찬미하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아래에서 위탁되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우리의 법으로 말하면 권리 박탈이 취소된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패역한 세상에 오셨으나, 그 세상을 정죄하기 위함 아니라, 그분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2) 그 속에 우리를 위해 마련되어 있는 은총을 주목하고 있다. “주께서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 하심이로다.” 그가 패역한 세상에 교회를 세워, 옛날에는 성소에서 그러하셨던 것과 같이 그의 말씀과 법령에 거하려 하심이며, 그가 그의 보좌를 세우려 하심이고, 그리스도께서 패역했던 개개인의 마음속에 거하려 하심이었다. 그리스도 사업의 은혜로운 의도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장막”을 세워, 그가 그들과 함께 거하시고, 그들은 그를 찬미하는 살아 있는 성전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겔 37:27).

Ⅳ. 시온 왕의 영광은, 그의 기뻐하는 모든 백성들에게 그가 구세주와 은인이 되신다는 것과 그에게 계속 패역함을 고집하는 모든 자들에게 사르는 불이 되신다는 것이다(19-21절). 우리는 여기에서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는 것과 같이, 우리 앞에 제시된 선과 악,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알 수 있다.

1.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삼은 자들, 그리하여 자신을 그에게 맡기고 그의 백성이 되기로 한 자들은 그의 은혜의 짐을 질 것이며, 그들에게 그는 구원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공인하고, 그러한 그를 구한다면 다음의 일들이 약속된다.

(1) 그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선을 행하시고, 우리에게 찬미할 기회를 마련해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받으신 선물을 언급한 후에(18절), 그가 그 다음 말에서,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를 추가한 것은 마땅한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것과 편안히 사는 것, 그리고 날마다 은혜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중보 덕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사하시는 선물은 매우 많고 매우 무거우므로, 그는 진정 그것으로 “우리에게 짐을 지우신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부으신다”(말 3:10). 그 선물은 지속적이며, 그는 우리에게 선을 베푸시는 일에 지칠 줄 모르므로, 그는 매일 요구되는 일용품들을 날마다 우리에게 지우신다.

(2) 그는 결국 우리에게 구원의 하나님, 영원한 구원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며, 그는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 곧 영혼의 구원을 “보이실” 것이다(50:23).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득으로서 주신 선물들을 빼앗아가지 않으실 것이며,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그는 우리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우리 하나님으로서 우리에 대한 그의 언약관계의 광대한 범위에 응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 구원을 완성시킬 능력을 갖고 계시는가? 분명히 그렇다. 사망에서 피함이 주 여호와께로 말미암았기 때문이다. 사망과 음부의 열쇠가 우리 주 예수의 손에 있다(계 1:18). 그는 부활을 통해 친히 죽음으로부터의 도피구를 마련하셨으므로, 자기 백성이 죽을 때 그들에 대한 죽음의 성질을 변경시키시며, 그들이 다시 일어날 때 그들로 하여금 죽음을 완전히 승리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을 사망의 지배에서 구할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을 갖고 계신다. 왜냐하면 “멸망당할 마지막 원수는 사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처럼 영원히 사망에서 피할 것이며, 두 번째 사망의 해를 당하게 되지 않을 그러한 출구를 발견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실로 현세적인 사망에서 건져지는 긍휼이 있으며, 그 긍휼은 그들의 구원의 하나님이신 그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고후 1:10).

2. 그 왕에게 계속 적의을 품고 있는 자들은 필연코 멸망할 것이다(21절). “그 원수의 머리는 하나님이 쳐서 깨치시리로다.” 사단, 곧 그 옛 뱀의 머리를(그에 관한 첫번째 약속으로서 “여자의 후손은 그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예고되어 있다. 창 3:15) 깨뜨릴 것이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 왕과 사람들 가운데 있는 그의 나라를 대적하는 열방의 모든 권세자들의 머리를(110:6, “주께서 여러 나라의 머리를 파하실 것이다.”) 깨뜨릴 것이며, 누구든 “그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는 자들의 머리를 깨뜨릴 것이다. 그는 그들을 자기의 원수로 여길 것이며, 그들은 그 앞에 끌려와 “죽임을 당할” 것이다(눅 19:27). 그는 “자기의 죄과를 항상 행하는 자의 정수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계속 죄를 짓고, 돌이키기를 싫어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자기의 원수로 간주하시며, 따라서 그들은 그 죄과에 따라 처치될 것이다. 머리를 “정수리”라고 부른 것은 아마도 압살롬을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숱이 많은 그의 머리는 바로 그의 굴레가 되었다. 또는 머리를 길러 더 무섭게 보이려 했던 가장 격렬하고 야비한 그의 대적들을 시사하고 있거나, 머리를 멋지게 했던 가장 훌륭하고 우아한 그의 대적들을 시사하고 있다. 죄를 범하는 자들의 머리 위에 정의가 내리고자 하면, 그 치명상을 벗어날 자는 아무도 없다

===========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시 68:22-31)

이 구절들 속에서 우리는 다음 세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Ⅰ.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리라는 은혜로운 약속, 그리고 그와 그들의 원수들에 대한 승리다(22-23절). “주께서 그의 은혜로운 목적과 약속으로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백성을 위해 그들의 구원의 하나님으로서 큰 일을 하리라 하시도다’”(20절). 하나님은 믿음으로써 그를 자기들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을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이다. 다음과 같은 것들이 약속되어 있다.

1. 그는 이전에 행하셨던 것처럼, 그들을 위험에서 안전케 하실 것이다. “내가 저희를 바다 깊은 데서 도로 나오게 하리라.” 그가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역에서 이끌어내시어 편하고 자유로운 광야로 인도하실 때처럼, 그들을 나오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내가 저희를 바산에서 돌아오게 하리라.” 즉, 그들이 광야에서 궁핍하게 되어 유리할 때, 그가 그들을 풍성한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내시어 정착하게 하셨던 것처럼, 그가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바산 땅은 요단 저편에 있으므로 거기에서 그들이 시혼과 옥과 함께 싸웠고, 또 거기에서 나와 그 다음 옮겨간 곳이 가나안이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해 과거에 그의 능력과 선하심을 나타내셨던 사실은 앞으로도 그렇게 행하시리라 함을 그들로 하여금 믿고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도록 격려한다. 그가 “다시 손을 펴사 그 남은 백성을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사 11:11). 그리고 우리는 아마도 “우리 열조가 우리에게 들려준 모든 이적”들이 반복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2. 그는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원수들을 이기게 하실 것이다(23절). 네가 지나갈 때, “그 피에 네 발을 잠기게 하며”, 물처럼 피를 많이 흘리게 하고, “네 개의 혀로 네 원수에게서 제 분깃을 얻게 하리라.” 개들이 아합의 피를 핥았다. 그리고 적그리스도의 세대가 멸망할 때 피가 “말굴레까지” 닿은 것을 우리는 읽을 수 있다(계 14:20). 하나님께서 다윗의 군대를 축복하시어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이기게 하신 것이 여기에 예언되어 있으나, 이는 그리스도가 부활하시어(그리고 그들이 그로 인해 부활해) 그 자신과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해 사망과 음부를 이기신 것의 모형으로서 말함이며, 또한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 대적들의 멸망 모형으로서 말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피를 개들에게 주어 마시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개들이 그 피를 마시는 것이 온당하기 때문이다.

Ⅱ.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의 말씀과 그의 행적 속에서 놀라운 은총을 발견하고 기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셨는가? 그는 그가 “바산에서 돌아오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는가? 그렇다면, 이에 대한 답례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가?

1. 우리는 그의 동작을 주목한다(24절). “하나님이여, 저희가 주의 행차하심을 보았나이다. 주의 백성이 보았나이다. 다른 사람들은 주의 역사와 주의 손길을 주시하지 않을 때, 그들은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 성소에서 행차하시는 것을 보았나이다.” 여기에서 다음을 살펴보자.

(1) 적극적인 믿음은 얼마나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고 있는가? 그는 하나님이시며 왕이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는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시다. 이처럼 그를 자기들의 하나님으로 삼는 자들은 그의 모든 행차하심 가운데서 자기들의 하나님으로서, 자기들의 왕으로서,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들의 기도에 응답하시어 행하시는 그를 볼 수 있다.

(2) 하나님의 가장 현저한 행차하심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성소 안에, 그의 말씀과 규례에, 또한 특별히 복음의 교회에 있는 그의 백성들 가운데 있다. 이러한 것들 안에 그리고 이러한 것들에 의해 하나님의 여러 가지 지혜가 알려진다. “성소에”서의 그의 행차하심은 아침과 저녁의 교차를 훨씬 능가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영원한 권능과 신성을 더 분명히 선포하고 있다.

(3) 이러한 행차하심에 관련된 우리의 의무는 무엇인가? 우리가 그것을 주목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손가락이다. 분명 하나님은 실제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

2. 우리는 가장 열렬하고 엄숙한 태도로 그에게 영광 돌려야 한다. 그가 “성소에 행차하시는 것”을 볼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성전 봉사에 직접적으로 종사하는 자들로 그를 찬송하게 하자(25절). 레위 사람들 중 노래하는 자들과 악기를 다루는 자들, 즉 그가 “성소에서 행차하시는 것”을 가장 가까이에서 목도한 자들은 그를 찬송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놀라운 승리의 날이었으므로, 그 협주를 완성시키기 위해 “소고치는 동녀”가 있었다. 하몬드 박사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셨을 때도 사도들은 그것을 찬양하고 온 세상에 알렸다. 그리고 증인이었던 여자들까지도 그것을 선포하는 데 열렬하게 합세했다.”

(2) 엄숙한 신앙적 모임에 참여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자. “하나님을 송축할지어다.” 성전에서뿐만 아니라 회당이나 선지자들의 학교 또는 “이스라엘의 근원에서 나온” 자들, 곧 야곱의 후손인 자들의 회중이 있는 곳은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을 송축할지어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송축하는 일에 협력하게 하라. 우리가 공동으로 나누어 갖는 공적 긍휼에는 모두가 연합해 감사해야 한다. “이처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엄숙하게 메시야의 이름을 찬미하고, 그 목적을 위해 자주 회중에 함께 모일 의무를 지니게 된다”고 하몬드는 말한다.

(3) 그리고 어떤 면에서 가장 뛰어나고 특출한 자 중에 속한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미함에 다른 사람들을 앞장서게 하자(27절). 그 회중에는 “저희 주관자, 작은 베냐민(베냐민은 사울 시대의 왕족 지파였다)과 유다(유다는 다윗 시대의 왕족 지파였다)의 방백”과 “그들의 모사들”, 곧 그 우두머리와 지도자들이 있었다.

다윗의 즉위 초기에는 유다와 베냐민 사이에 오랜 전쟁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들 모두 공동의 대적을 쳐서 성공한 것에 대해 함께 찬미하고 있다. 그런데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는 왜 특별히 언급되어 있는가? 아마도 북방에 위치한 그 지파들이 아람과 그들을 괴롭히는 이웃나라들의 침입을 가장 받기 쉬웠으므로, 특별히 이 승리에 대해 감사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몬드 박사는 이들이 두 박학한 지파였다는 또 다른 이유를 내놓고 있다. “납달리는 아름다운 소리를 발했고”(창 49:21), “스불론에는 대장군의 지팡이를 잡은” 자들이 있었다(삿 5:14). 이들, 특히 그들의 방백들은 하나님을 찬미하는 데 합세하게 될 것이다. 권위와 권력과 명성에서 다른 사람들보다도 뛰어난 자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도 앞장서고, 그에게 행해져야 하는 어떤 봉사를 향상시키기 위해 부지런히 그들의 영향력과 신용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예에 매우 도움이 된다. 이런 까닭에 하몬드 박사는, 메시야 왕국이 마침내 이 세상의 모든 주권자들과 박식한 자들의 굴복을 받으리라는 주석을 달고 있다.

3. 우리는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이 완성되는 문제에 대해서도 그를 찾고 의지해야 한다(28절). 이 대목의 전반부에서, 시편 저자는 이렇게 이스라엘에 대해 말하고 있다. “네 하나님이 네 힘을 명하셨도다. 즉, 너를 위해 어떤 일이 행해지든, 어떤 힘이 너를 돕든, 그것은 하나님, 곧 그의 능력과 은혜, 그리고 그가 명하신 말씀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이 지휘하시는 힘을 얻고 있는 한 너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으며, 그가 지휘하시는 힘이 없다면, 자랑할 이유가 없다.”

후반부에서 시편 저자는 자기의 경험에 힘입어, 하나님께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견고히 하소서. 주여, 주께서 명하신 것을 견고히 하시고 주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행하시며, 주께서 매우 영광스럽게 시작하신 그 선한 일을 행복하게 끝나도록 하소서.” 하나님은 그가 이루신 것을 견고케 하신다. 하나님은 그가 참된 은혜를 주신 곳에 더 많은 은혜를 주신다. 어떤 사람들은 이 전체의 구절을 신자가 메시야께 아뢰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다윗은 앞에서처럼(45:6, 8) 메시야를 “하나님”이라 부르고 있다. “네 하나님이(하나님 아버지께서) 네 힘을 명하셨도다. 주의 우편에 있는 자(80:17)로서 너를 스스로 힘있게 하셨고, 우리를 위해 네게 힘을 저장해 두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하나님 아들이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견고히 하리로다. 우리 안의 선한 사업을 끝마침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수행하리로다.”

Ⅲ. 밖에 있는 자들로 하여금 안으로 들어와 교회에 연합하도록 하는 강력한 초대와 권유가 있다(29-31절). 이것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많은 개종자들이 유대교에 접근함으로써 부분적으로 실행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방나라들이 그리스도를 믿어 개종하고,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후사가 되며, 같은 지체가 될 때, 비로소 완전히 성취되기로 되어 있었다(엡 3:6).

1. 어떤 사람들은 두려움으로 인해 복종할 것이다(30절). “투창 병사들의 무리(한글 개역 “갈대밭의 들짐승”─역주), 즉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대항하는 자들, 그의 다스림을 순순히 받지 않으려는 자들, 그의 이름을 전하고 고백하는 자들을 핍박하는 자들, 소의 무리처럼 맹렬히 분노해, 만민의 송아지처럼 우둔하고 방자한 자들(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반대하고 이 세상에서 그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온갖 힘을 기울였던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묘사다), 주여, 그들을 꾸짖으시고, 그들의 교만을 꺾으시며, 그들의 악의를 완화시키시고, 그들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소서. 그리하여 마침내 양심의 죄책감과 섭리의 여러 가지 방해에 져서 그들 각자가 결국, 어떻게 해서든지 교회와 화평하게 되기를 원하는 자로서, 주로 하여금 저의 은조각을 발 아래 밟게 하소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고 고백하면서 은을 되돌려주었을 때, 가룟유다 까지도 은조각과 함께 굴복한 것이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3장 9절을 보라. 많은 사람들은 꾸짖음을 받음으로써 다행히도 멸망에서 구원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꾸짖음에도 불구하고 굴복하지 않으려는 자들에 관해서, 시편 저자는 그들이 흩어지기를 기도하고 있는데 그의 말은 결과적으로 하나의 예언이 되고 있다. “저가 전쟁을 즐기는 백성을 흩으셨도다.” 그 백성은 그리스도께 대항하는 것을 즐거워하므로 결코 그와 화해하려 하지 않는 자들이다.

이것은 그 거룩한 후손과 싸우기를 즐겼고, 스스로를 굴복시키려 하지 않았으므로 결국 곳곳으로 흩어지게 되었던,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다. 다윗은 무사였지만 결코 자신을 위해 싸워서 피 흘리는 것을 즐기지 않고, 하나님께 호소하기를 좋아했다. 따라서 그렇게 행했으므로 가장 공정한 화평의 결말에 따르려 하지 않았던 자들에 관해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흩어지게 하시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고 있다. 전쟁을 즐기고 분쟁에서 즐거움을 찾는 자들은 기독교 정신은 물론 인간성의 모든 신성한 원리를 상실한다. 그러한 자들은 조만간 그들 자신이 그런 일을 실컷 당하리라는 각오를 하게 된다(사 33:1; 계 13:10).

2. 또 어떤 사람들은 자진해 복종할 것이다(29, 31절). “예루살렘에 있는 주의 전을 위하여(다윗은 이에 대해 믿음으로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전은 그의 시대 때에 건축되지 않았고, 단지 재료들과 모형만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왕들이 주께 예물을 드리리이다.” 왕에게 합당한 훌륭한 예물이 바쳐질 것이다. 영예와 대권의 격식을 크게 누리고 있는 왕들까지도 큰 비용을 들여 그리스도의 은총을 구할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봉사 안에, 그와의 교제 안에, 그리고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온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그 은총의 아름다움과 혜택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왕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예물, 곧 그들 자신을 산 제물로서 그에게 드리고, 직접 선행을 하도록 청하기에 충분하다.

다윗은 두 나라, 곧 애굽과 구스를 언급하고 있는데, 그 나라는 그들의 신하와 간청자들도 거의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던 나라다(31절). “방백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고, 그에게 복종하는 사신들로서─애굽에서 나오고, 용납하심을 얻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후에 즉시 복을 주어 가라사대 나의 백성 애굽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사 19:25). 심지어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 손을 뻗쳤던 구스도(대하 14:9) 이제는 기도로, 예물로, 그리고 하나님을 붙들기 위해 즉시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신속히 들어야” 했다. “적과 빨리 화해하라.” 모든 민족들 중에서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모여와서, 그에게 인정을 받을 것이다.

==============

하나님의 주권을 찬송함(시 68:32-35)

시편 저자는 이방인들의 개종을 기도하고 예언한 후, 여기에서는 그들이 교회에 접근함은 그들의 기쁨과 찬송의 내용이 되리라는 것을 시사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와서 믿음이 깊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이스라엘을 찬송하도록 청하고 있다(32절). “땅의 열방들은 주께 찬송할지어다.” 열방 모두가 그렇게 해야 하며, 그들이 모두 여호와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때, 그들은 그렇게 할 것이다.

하나님은 여러 면에서 찬미의 대상이 되기에 합당한 자로서 그들에게 제시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이렇다.

Ⅰ. 그의 절대적 최고의 주권 때문이다(33절). “주는 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다”(4절과 비교). 그는 처음부터, 아니 모든 세대의 전부터 자기의 보좌를 예비하셨다. 그는 하늘의 흐름 위에 앉아 계시어, 천체의 모든 운동을 안내하신다. 그리고 그는 그의 영광의 거주지인 가장 높은 하늘에서부터 이 낮은 세상에 그의 권능과 선하심의 영향력을 행사하신다.

Ⅱ. 그의 두렵고 무서운 위엄 때문이다. “주께서 그 소리를 발하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여호와의 소리”라 불리며, “힘있고 위엄차다”고 일컬어지고 있는 뇌성을(29:3-4) 언급한 것이거나, 또는 특별히,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에 말씀하실 때의 우레를 언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Ⅲ. 그의 강한 능력 때문이다. “너희가 하나님께 능력을 돌릴지어다”(34절). 그가 불가항력적인 능력의 하나님이시므로, 그와 다투는 것은 어리석으며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임을 인정하라. 그가 그의 충성된 종들을 보호하시고, 그의 완악한 적대자들을 멸하시기에 충분한 능력을 가지셨음을 인정하라. 그리고 그의 전능하심을 나타내는 모든 사례에 대해 그에게 영광 돌리라. “나라와 권세가 주께 있으므로, 영광이 주께 있나이다.” 우리는 그의 능력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은혜의 왕국 속에서 인정해야 한다. “그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있도다.” 그는 교회를 보호하시고 다스리는 가운데에서 그의 최고의 배려를 나타내고 계신다. 그것이 그의 백성들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고 있는 그의 능력의 위엄이다.

2. 섭리의 왕국 속에서 인정해야 한다. “그 능력이 하늘에 있도다.” 그 하늘에서 그의 능력의 우레와 “그의 능력의 적은 비와 큰비”가 나온다. 비록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하늘에 두고 있으실지라도 그는 그의 이스라엘을 그 날개 아래 모으기 위해 자신을 낮추신다(신 33:26).

Ⅳ. 그의 성소의 영광과 거기에서 역사되는 이적들 때문이다(35절). “하나님이여,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나이다.” 하나님은 그의 성소에서 그를 섬기고, 그의 신탁을 받고, 그 신탁대로 그가 작용하시는 것을 관찰하며, 그리고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모든 사람들에 의해 경외감과 거룩한 두려움으로써 숭앙되어야 한다. 그는 성소에서 그것을 드러내신다. 성소란 그에게로 가까이 오는 자들에게서 하나님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리라고 크게 선포하는 곳이다. 위에 있는 거룩한 그의 성소, 하늘에서 그는 자기 자신을 보이시고 계시며, 또 앞으로도 보이실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보다 죄인들을 더욱 두렵게 하는 (하나님의) 속성은 없다.

Ⅴ. 그의 백성들에게 부여하신 은혜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힘과 능을 주신다.” 그러나 허탄하고 거짓된 열방의 신들은 그 숭배자들에게 그런 것을 줄 수 없다. 그 신들이 그들 자신도 도울 수 없을 때, 어떻게 자기를 숭배하는 자들을 도울 수 있겠는가? 대적을 치는 이스라엘의 모든 힘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그들은 “그들이 능력 없음”을 인정했다(대하 20:12). 그리고 우리의 영적인 일과 싸움에 대한 모든 능력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온다. 우리가 모든 일들을 행할 수 있도록 강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대한 영광을 받으셔야 하며(115:1),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행할 수 있게 해주시고, 우리 안에 그의 손의 일을 용납해 주심에 대한 우리의 겸손한 감사를 받으셔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는 자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면, 그들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하고 말해야 한다. 모든 것이 그에게서 오는 것이라면, 모든 것을 그에게 돌려드리자.

==============

timhv(5092, 티메) 값, 가치, 영예, 존경.....존경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티메(Homer 이래)는 티오(tivw: 평가하다, 존중하다, 존경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다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a)  법적으로 '평가, 보상, 형벌, 배상',

(b)  높거나 유명 인사에 대해, '가치(중요성), 영예, 명예, 존경',

(c)  '영예(영광)의 직(분), 공직',

(d)  '위엄, 존엄함'(Dignity), 신에 대해 사용.

(e)  '사례금, 보수금',

(f)  '상품(금), 영예의 표상, 훈장',

(g)  물건의 가치에 대해, '평가, 가치, 값, 구매 가격',

(h)  '변제',

(i)  매우 중요한 것은 종교적 용법이다. 티메는

① 하나님에 대한 '예배',

② 사람들에 관심을 가지는 신들에 대한 '숭배'를 의미한다.

③ 티마이는 신들을 예배하는 제물이나 축제, 혹은 그들을 위한 헌금에 대해 사용되었다. 신들은 자신이 통제하는 권능의 영역 때문에 제물과 찬양의 노래들을 통해 영예를 받는다. 신들은 그들의 편에서 인간들에게 그들의 세상의 영예와 행운의 지위를 줌으로서 그들을 영예롭게 한다.

「헬라 사상에서 티메는 사람이 그의 직책, 지위, 부 등 또한 지위 자체, 즉 위엄과 특권이 있는 직책으로 인해 지역 사회에서 누리는 당연한 평가를 말한다. 노예들에게는 티메가 없다.

스토아 학파는(참조: Epictetus) 그들이 참 자아에 관여하지 아니하고 다만 신체와 눈에 보이는 소유물들에만 관여하는 체함으로서 모욕과 불명예를 면하려 했다. 그들은 왕의 지위와 같은 지위에서 유래한 명예를 헌신짝처럼 여겼다. 그렇지만, 그들은 노예를 천대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2. 70인역본의 용법. 

티메는 70인역본에서 약 70회 이상 나오며, 11개의 히브리어 단어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티메는 영예나 영광(시 29:1; 욥 34:19; 출 28:2; 욥 40:10), 지불금(값)(욥 31:29), 봉사에 대한 사례금(집회서 38:1), '값'(창 44:2; 민 20:19), '보상(금)'(창 20:16), '속전'(시 49:8), 장자의 대속을 위한 '지불금'(출 34:20), '귀중품, 보화'(겔 22:25), 세금(마카베오일서 10:29), 왕의 '위엄'(단 5:20)을 의미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티메는 신약성경에서 42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티메는 존경을 의미한다.

① 롬 12:10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은 '존경'을 서로 먼저하라고 권한다.

딤전 6:1에서 바울은 종들은 하나님의 이름과 기독교의 가르침이 훼방을 받지 않도록 그들의 주인을 존경하라고 말한다.

벧전 3:7에서 남자들은 아내들에게 그들에게 당연히 돌려야 할 영예를 주어야 한다고 한다: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살전 4:4에서 티메는 아내가 받아야 하는 '존경'이며, 이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받을 권리이다.

롬 13:7에서는 '국가에 대해 존경을 표하는 것'을 나타낸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② 티메는 '존귀, 위엄, 영예, 인정'을 의미한다.

요 4:44에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전에 선언하신 말씀을 언급한다. 선지자는 '인정'을 받지 못한다.

벧후 1:17과 히 2:7; 히 2:9; 히 3:3의 기독론적 진술에서 티메는 독사(영광)와 함께 나타난다. 히 2:7 이하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은 그가 영광과 존귀(시 8:5 이하)로 관 쓰심, 곧 위엄스러운 제사장 수임 및 그에게 부여한 막강한 통치 지위를 얻기 위한 전제 조건이었다.

히 3:3에서 그리스도의 영광과 존귀함과 모세의 그것들과 비교되어 있다: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는 구 언약의 대표자보다 훨씬 더 우월하다. 확실히 모세의 위치는 매우 영예로운 것이었다. 그는 이스라엘 집을 지도하는 일을 맡았으며, 하나님의 종으로서 충성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충성하셨다. 아들은 원칙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모세와는 다른 차원의 관계에 서 있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에 계시기 때문에(참조: 히 1:2-3), 집 지은 자 곧 이스라엘의 창조자이시다. 하나님의 집에서 충성하는 것과 하나님의 집을 맡은 것은 차이가 있다. 말씀과 행위를 통한 모세의 충성된 섬김은 장래에 말할 것, 곧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를 말씀하시는 것(참조: 히 1:2)에 대한 지시(증거)이다.

히 5:4에서 티메는 '직분의 존귀'나 '지위 자체'를 나타낸다: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벧전 2:7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티메를 받는다. 그들은 그 기초가 그리스도이신 신령한 집으로 세워진 산돌들로서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예하는 존귀한 자들이다. 이것은 종말론적인 언급이 아니라 오히려 "산돌"(참조: 벧전 2:3)과 "산돌들"(벧전 2:5)의 현재의 관계를 묘사한다. 여기서 티메를 값비싼 소유(보배)로 번역하는 것은 문맥상 적합하지 않다.

벧전 1:7에서 자신의 믿음을 고난을 통하여 입증하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을 것이다.

고전 12:23; 고전 12:24에 의하면 신자들이 주목할만한 아무런 재능도 갖지 못해도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그들은 나머지 신자들과 동등하게 존귀하다.

딤후 2:20; 딤후 2:21에서 어떤 그릇은 귀하게 쓰임을 받고, 어떤 그릇은 천하게 쓰임을 받는다. 신자들은 모든 선한 일에서 하나님께 봉사할 수 있는 영예로운 부름을 받는 그릇이 되기 위하여 불의에서 자신을 깨끗이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비유는 티메가 인격의 '존귀'는 물론 사물의 '가치'도 의미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롬 9:21에 보면 유사하게 토기장이는 동일한 진흙으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것과 같이 하나님은 그의 창조적 능력의 주권적 행사로 인류 역사에서 어떤 자들을 진노의 그릇으로, 또 다른 자들을 긍휼의 그릇으로 만드는 그의 목적을 집행할 자유를 가지고 계신다. 에이스 티멘 스큐오스("귀히 쓸 그릇")는 문자적으로 '귀한 그릇' 또는 '영예로운 그릇'이며, 그것이 정해진 용법은 영예를 가져오는 그릇이다.

롬 2:7; 롬 2:10에서 독사와 티메와 아프달시아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여 선을 행하면 마지막 심판 때에 받을 상이다.

(b)  티메는 '사례금, 보수금'을 의미한다.

딤전 5:17에서 티메는 '사례금'을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c)  골 2:23은 난해한 구절이다. 바울은 여기서 분명히 그노시스 이단의 표어들을, 그 내용을 정확히 규정함 없이 채택하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티메는 선택과 신격화를 의미하는 용어이다. 바울은 이러한 사상의 티메를 거부하는 것이다. 여기서 티메는 '영예나 존귀'(honour)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가능성은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다른 가능성은 티메를 '가치'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다.

(d)  티메는 '가치, 값'을 의미한다.

계 21:26에서 티메는 독사와 함께 세상 상품에 대해 사용되었다: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 이 구절은 사 60:11의 기록을 채택한 것이다. 이 도시에 관한 여러가지 묘사들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 내용이 서로 배척하는 점이 있을지라도 이 도시의 비교할 수 없는 탁월을 묘사하는데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고 본다.

행 4:34에서 밭과 집을 판 '값'을 나타낸다.

행 5:2; 행 5:3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기의 판매 대금을 전액 공동체에 바친다고 하면서 그 중 얼마를 자기의 몫으로 감추었다.

행 9:19에 의하면 '티메'는 에베소에서 불에 태운 책 '값'에 대해 사용되었다.

행 7:16은 아브라함이 돈으로 산 무덤에 대해 언급한다.

고전 6:20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산 바되었다. 고전 7:23에서도 같은 내용이다.

(e)  티메는 의례적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딤전 1:17의 송영에서 '영예나 존귀'라는 의미로 나온다: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딤전 6:16의 계급에서도 마찬가지다.

계 4:9; 계 4:11; 계 5:12; 계 5:13; 계 7:12에서 더욱 발전적 송영문을 보여준다.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J. Schneider). 

----------------

timavw(5091, 티마오) 가격을 정하다 set a price on, 존경하다 honour.....공경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티마오(Homer 이래)는 티메(timhv, 5092)에서 유래했으며, 다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a)  '범죄를 사정하다, 정당한 형벌을 정하다, 선고하다',

(b)  '평가하다, 존경하다, 경의를 표하다'. 수동태로 '존경할만하다고 여김을 받는다',

(c)  '선물하다, 상(또는 보수, 보상)을 주다, 구별하여 상을 수여하다',

(d)  '평가하다, 과세하다, 가치나 값을 정하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티마오는 70인역본에서 약 48회 나오며, 6개의 히브리어 단어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티마오는 부모에게(출 20:12; 집회서 3:3-16), 노인에게(레 19:32), 왕과 권세자에게(욥 34:19) 영예를 표하는 것, 랍비들은 율법 교사들, 그리고 또한 가난한 자와(참조: 잠 14:31; 집회서 10:23) 유대인 노예들을 포함하여 자기 이웃을 존경하는 것을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티마오는 신약성경에서 20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티마오는 '존경하다'를 의미한다.

막 7:6에서 예수님은 입술로만 하나님을 존경하는 것을 비판하신다.

막 7:10에서 예수님은 부모를 존경(공경)하라고 강조하신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자녀들은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엡 6:2).

딤전 5:5에서 과부를 경대하는 일은 존경은 물론 재정적 지원도 포함한다.

벧전 2:17에 의하면 신자들은 모든 사람을 존경하되, 특히 통치자들을 존경해야 한다.

행 28:10에서 멜리데에서 보볼리오의 부친과 그의 사람들을 고쳐준 것에 대해, 존경과 그리고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많은 선물을 받았다.

요 5:23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대한 존경과 동일한 존경을 요구하시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종말론적인 심판자로 임명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를 공경하실 뿐만 아니라(요 8:49), 그를 섬기는 자들은 아버지에 의해 귀중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b)  티마오는 '값을 정하다'를 의미한다.

마 27:9의 토기장이의 밭을 매입하는 기사는 슥 11:12-13의 예언의 성취이다: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 된 자 곧 이스라엘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J. Schneider). 

--------------

[딤전5: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The elders who rule well are to be considered worthy of double honor, especially those who work hard at preaching and teaching. 

[엡6: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HONOR YOUR FATHER AND MOTHER (which is the first commandment with a promise),



이전글 : 신약시대선지자.제자추수일꾼
다음글 : 시78.대대로계승*전파*기억*준수*누림_증거*율법*계명*규례*법도_전지전능무한생명YHWH[영예능력기적행사]_순종하는다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