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태복음 9장 === *1.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Getting into a boat, Jesus crossed over the sea and came to His own city. *2.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And they brought to Him a paralytic lying on a bed Seeing their faith, Jesus said to the paralytic, "Take courage, son; your sins are forgiven." *3.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And some of the scribes said to themselves, "This fellow blasphemes." *4.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And Jesus knowing their thoughts said, "Why are you thinking evil in your hearts? *5.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Which is easier, to say, 'Your sins are forgiven,' or to say, 'Get up, and walk'? *6.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But so that you may know that the Son of Man has authority on earth to forgive sins"--then He said to the paralytic, "Get up, pick up your bed and go home." *7.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And he got up and went home. *8.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But when the crowds saw this, they were awestruck, and glorified God, who had given such authority to men. *9.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As Jesus went on from there, He saw a man called Matthew, sitting in the tax collector's booth; and He said to him, "Follow Me!" And he got up and followed Him. *10.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Then it happened that as Jesus was reclining at the table in the house, behold, many tax collectors and sinners came and were dining with Jesus and His disciples. *11.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When the Pharisees saw this, they said to His disciples, "Why is your Teacher eating with the tax collectors and sinners?" *12.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But when Jesus heard this, He said, "It is not those who are healthy who need a physician, but those who are sick. *13.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But go and learn what this means: 'I DESIRE COMPASSION, AND NOT SACRIFICE,' for I did not come to call the righteous, but sinners." *14.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Then the disciples of John came to Him, asking, "Why do we and the Pharisees fast, but Your disciples do not fast?" *15.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And Jesus said to them, "The attendants of the bridegroom cannot mourn as long as the bridegroom is with them, can they? But the days will come when the bridegroom is taken away from them, and then they will fast. *16.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But no one puts a patch of unshrunk cloth on an old garment; for the patch pulls away from the garment, and a worse tear results. *17.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Nor do people put new wine into old wineskins; otherwise the wineskins burst, and the wine pours out and the wineskins are ruined; but they put new wine into fresh wineskins, and both are preserved." *18.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While He was saying these things to them, a synagogue official came and bowed down before Him, and said, "My daughter has just died; but come and lay Your hand on her, and she will live." *19.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Jesus got up and began to follow him, and so did His disciples. *20.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And a woman who had been suffering from a hemorrhage for twelve years, came up behind Him and touched the fringe of His cloak; *21.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for she was saying to herself, "If I only touch His garment, I will get well." *22.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But Jesus turning and seeing her said, "Daughter, take courage; your faith has made you well." At once the woman was made well. *23.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When Jesus came into the official's house, and saw the flute-players and the crowd in noisy disorder, *24.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He said, "Leave; for the girl has not died, but is asleep." And they began laughing at Him. *25.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But when the crowd had been sent out, He entered and took her by the hand, and the girl got up. *26.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This news spread throughout all that land. *27.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As Jesus went on from there, two blind men followed Him, crying out, "Have mercy on us, Son of David!" *28.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When He entered the house, the blind men came up to Him, and Jesus said to them, "Do you believe that I am able to do this?" They said to Him, "Yes, Lord." *29.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Then He touched their eyes, saying, "It shall be done to you according to your faith." *30.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And their eyes were opened. And Jesus sternly warned them: "See that no one knows about this!" *31.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 But they went out and spread the news about Him throughout all that land. *32.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As they were going out, a mute, demon-possessed man was brought to Him. *33..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After the demon was cast out, the mute man spoke; and the crowds were amazed, and were saying, "Nothing like this has ever been seen in Israel." *34.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But the Pharisees were saying, "He casts out the demons by the ruler of the demons." ======================== *35.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Jesus was going through all the cities and villages, teaching in their synagogues and proclaiming the gospel of the kingdom, and healing every kind of disease and every kind of sickness. *36.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Seeing the people, He felt compassion for them, because they were distressed and dispirited like sheep without a shepherd. *37.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Then He said to His disciples, "The harvest is plentiful, but the workers are few. *38.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Therefore beseech the Lord of the harvest to send out workers into His harvest." ----------------------- [[AMP]] 35 Jesus went throughout all the cities and villages [in Galilee], teaching in their synagogues and proclaiming the good news (gospel) of the kingdom, and healing every kind of disease and every kind of sickness [His words and His works reflecting His Messiahship]. 36 When He saw the crowds, He was moved with compassion and pity for them, because they were dispirited and distressed, like sheep without a shepherd. 37 Then He said to His disciples, “The harvest is [indeed] plentiful, but the workers are few. 38 So pray to the Lord of the harvest to send out workers into His harvest.” [[NLT]] 35 Jesus traveled through all the towns and villages of that area, teaching in the synagogues and announcing the Good News about the Kingdom. And he healed every kind of disease and illness. 36 When he saw the crowds, he had compassion on them because they were confused and helpless, like sheep without a shepherd. 37 He said to his disciples, “The harvest is great, but the workers are few. 38 So pray to the Lord who is in charge of the harvest; ask him to send more workers into his fields.” [NKJV] 35 Then Jesus went about all the cities and villages, teaching in their synagogues, preaching the gospel of the kingdom, and healing every sickness and every disease [i]among the people. 36 But when He saw the multitudes, He was moved with compassion for them, because they were [j]weary and scattered, like sheep having no shepherd. 37 Then He said to His disciples, “The harvest truly is plentiful, but the laborers are few. 38 Therefore pray the Lord of the harvest to send out laborers into His harvest.” ========================== 그리스도의 전도 활동(마 9:35-38)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Ⅰ. 앞에 있는 그리스도의 설교와 이적의 기사에 대한 결론(35절).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가르치시며 고치시니라." 이것은 우리가 앞서 보았던 것과 동일하다(4:23). 그리스도 설교(마 5-7장)와 그의 치유(8, 9장)에 대한 보다 특별한 본보기에는 조교사(ushers)가 있으며, 여기에서 그것은 미려하게 이 본보기의 끝에 quod erat demonstrandum - 즉 입증된 항목으로 반복되고 있다. 마치 복음서 기자가 "이제 나는 특별한 전제에 의하여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시고 고치신 것을 입증하게 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너희는 그의 설교의 주제와 도한 그의 교훈을 확증하기 위하여 행해진 그의 치유에 대한 몇 가지 실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너희가 믿도록 하기 위하여 쓰여졌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이것은 전자와 같이 갈릴리에서의 두 번째 답사 보고였다"고 하였다. 그는 이전에 설교하였던 자들을 방문하였다. 바리새인들은 그를 트집잡고 반대하였지만 그는 그의 일을 계속하였다. 그는 "천국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지금 중재자의지배하에 설립된 은혜와 영광의 나라에 대해 말씀하셨다. 이것은 실로 복음, 즉 "기쁜 소식"이며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설교에서 무엇과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살펴보자. 1. 개별적인 성읍들과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크고 부유한 도시를 방문하였을 뿐만 아니라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마을들도 방문하셨다. 거기에서 그는 전파하였고 그곳에서 치유하셨다.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자들의 영혼은 고귀한 신분을 가진 자들의 영혼만큼 그리스도에게는 값진 것이며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부한 자나 가난한 자," 도시인들이나 시골뜨기는 그 안에서 함께 만난다. "마을 주민에 대한 그의 의로운 행동"은 "열거" 되어야만 한다(삿 5:11). 2. 공중적인 예배와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셨는데, 이는 (1) 부패가 있기는 하였지만 경건한 회합자들에게 증거를 얻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어떤 이들과 같이 함께 모이는 집회를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2) 들으려는 기대를 가지고 사람들이 함께 모인 곳에서 설교하려는 기회를 가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복음적 교회가 설립되거나 기독자 집회가 모이는 곳에서 사도들이 자주 "유대인의 회당에서" 설교하였다. 그것을 최고로 삼는 것은 현명한 지혜이다. Ⅱ. 다음 장에 나오는 제자 파송의 기사에 대한 서언이나 서론. ---JC의 제자들은 시대를 초월하여 모두 목자요 추수일꾼들이다!! 그는 "무리"(36)를 보셨다. 그는 "자기를 따르던" 무리뿐만 아니라 지나갈 때 모여든 많은 사람들을 주시하셨다. 그는 마을과 성읍에 어떤 영혼의 거처나 많은 주민이 있는가를 주목하셨다. 각 회당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문의 입구에는 어떤 집회 장소가 있는가를 주목하셨다. 많은 인구가 있었으므로 국가는 지금 크게 성장하였다. 또한 그것은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였다. 이것을 볼 때에, 1. 그리스도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으며,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셨다(36절). "그는 그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 그가 눈먼 자나 절름발이, 병자를 불쌍히 여기신 것은 현세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영적인 이유에서였다. 그는 그들을 무지하고 경솔하며 소망이 없기 때문에 망하려 하는 자로 보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귀중한 영혼에 대한 애정 있는 친구이시라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그의 자비심은 특별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를 하늘에서 지상으로 또한 거기에서 십자가로 이끌어온 것은 영혼에 대한 긍휼(연민)이었다. 비참은 자비의 대상이다. 죄스러운 비참이나 자기 파괴적인 영혼은 최고의 비참이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비참한 처지들을 불쌍히 여기신다. 그와 같이 우리도 행해야만 한다. 기독자의 최고 연민은 영혼에 대한 연민이다. 그것은 최고로 그리스도와 닮는 것이다. 이 긍휼을 일으킨 동기는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1) "그들은 고생하였다." 그들은 빈곤하고 고통스러웠으며 피곤하였다. 그들은 "곁길로 나아갔다." 또한 서로가 흩어졌다. 또한 "연락의 막대기가 잘라졌다"(슥 11:14). 그들은 자기들의 영혼을 위해 도움을 원하였으며, 어떤 좋은 것도 그들 곁에 남아있지 않았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공연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장로들의 유전으로 무거운 짐을 지움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오류를 범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의무를 지키지 않았으며, 신적 법률의 범위와 영적인 본질을 잘 알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고생하였다." "생명의 떡" 대신에 찌끼와 재로 먹여진 영혼들에게 무슨 영적 건강과 생명, 활기가 있을 수 있겠는가? 고귀한 영혼이 진리의 말씀으로 양육되지 못했으므로, 의무가 이해해야 되고 시험에 저항하며, 고통을 견뎌야 할 때 "약해진다." (2) "그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유리하였다." 그 표현은 열왕기 상 22장 17절에서 인용된 것이며,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일에서 그들보다 앞장 설 신실한 인도자가 없는 자들의 슬픈 상태를 나타낸다. 양처럼 길을 잘 일어버리는 동물도 없으며, 또한 길을 잃어버릴 때는 다시 집을 찾아오는 일이 드물며 거의 소망이 없다. 죄지은 영혼은 "잃어버린 양과 같다." 그들은 그들을 데려다 줄 목자가 필요하였다. 유대인 교사들은 "목자"로 행세하였으나 그리스도는 그들이 "목자"를 가지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누구보다도 처참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올바르게 인도하는 목자가 아니라 곁길로 나가게 하는 목자였으며, 잘 양육하는 목자가 아니라 양떼를 쫓아내는 목자였다. 이러한 목자는 예레미야 23장 1절과 에스겔 34장 2절 등에 묘사되어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러한 백성들의 경우는 매우 가엾으며 또한 그들은 전혀 목자들을 가지고 있지 않고 누구보다도 처참한 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와 영혼들의 일들이 아닌 자기 자신들의 일을 구하였다. 2.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권면하셨다. 그의 긍휼은 이 백성을 위한 수단을 강구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사도들을 내보내기 전에 그는 자신이 기도에 많은 시간을 보낸 것이 나타나 있다(눅 6:12, 13).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긍휼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기도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난 후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돌이켜 그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다. (1) 그 상황은 어떠하였는가?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라." 사람들은 좋은 설교를 원하였으나 좋은 설교자는 거의 없었다. 해야 할 일이 많고 해야 할 선행이 많았지만 그것을 행할 손이 적었다. ① "추수할 것"이 매우 "많다"는 것은 격려였다.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 무리가 있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을 필요로 하는 자. 그것을 원하는 자들이 그것을 받으려고 나갔던 일이 드물었다는 사실은 이상하다. 잘못 가르침을 받았던 자는 더 가르침을 받으려고 원하였다. 사람들의 기대는 부풀어졌으며, 잘 약속된 것 같은 감정의 움직임이 있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랑 안에서 좋은 설교로 양육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축복된 일이라는 사실이다. 그 때 골짜기(들판)은 곡식으로 덮혀져 있으며 그것을 잘 거두어들이려는 소망이 있다. 그것은 절호의 기회로서 그것을 잘 이용하기 위해서는 이중적인 배려와 근면을 요구한다. 추수날은 바쁜 날이 되어야만 한다. ② "일꾼"이 적은 것은 가엾은 일이었다. 추수꾼이 없으므로 곡식은 떨어지고 못쓰게 되며 땅 위에서 썩게 될 것이다. 할 일 없이 떠돌아다니는 유랑자들은 많지만 "일꾼"은 매우 "적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좋은 일꾼이 없기 때문에 선행이 멈춰지고 천천히 진행되는 것은 교회에 불행한 일이라는 사실이다. 그렇게 될 때 이미 있는 "일꾼"은 매우 분주해야 할 필요가 있다. (2) 이 경우에 그들의 할 일은 무엇이었는가?(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시대의 우울한 국면과 귀중한 영혼의 비참한 상태는 기도를 일으키고 재촉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먼저 자신이 성실하고도 충성된 일꾼이면서 동시에 일꾼의 증가를 구하라!! 절망적인 상태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더욱 기도해야만 하며 불평하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또한 우리는 교회의 현재 위급한 사태에 대해 기도해야만 하다. 이스라엘이 해야할 것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을 알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때를 잘 이해해야만 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다음과 같다. ① 하나님은 "추수하는 주인"이시다. "내 아버지는 그 농부이다"(요 15:1). 그것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이다"(사 5:7). "추수가 거두워지는 것"은 그를 위함이며 그에게 드려지는 것이며 그의 봉사와 영예를 위한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다"(고전 3:9). 그의 "타작 마당이며 그의 마당의 곡식"(사 21:10)이다. 그는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추수"에 관한 모든 일을 명령하신다. "일꾼"은 그때에, 그곳에 오래 일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최고로 모든 것을 확실히 명하실 하나님이 관장하시는 "추수일"이 잘되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②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추수"에서 "일꾼들"이며 또한 일꾼들이 되어야 한다. 교역은 "일"이며, 따라서 소중하게 간직되어야 한다. 그것은 필요할 일인 "추수의 일"이며, 모든 일이 적절하게, 또한 철저하게 열심히 해야 되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들은 "기쁨으로 거둔다." 복음 설교자의 기쁨은 "추수의 기쁨"과 흡사하다(사 9:2, 3). 또한 "거두는 자는 임금을 받는다." 하나님의 들에서 거두는 "일꾼들의 품삯은" 그들의 것과 같이(약 5:4)"주지 않고 숨겨지지" 않는다. ③ "일꾼을 내보내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그리스도를 사역자로 삼으신다(엡 4:11). 그 임무나 그의 일의 자격, 그가 주시는 소명은 그가 임명하신다. 그들은 임무나 자격이나 소명이 없이 활동하는 "일꾼"으로 간주되거나 인정되지 않을 것이다. "보냄을 받지 않았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④ 그리스도와 영혼을 사랑하는 모든 자는 특히 "추수할 것이 많을 때"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여 보다 익숙하고 신실하며 근면한 "추수할 일꾼"을 더 보내어 주시도록 해야 한다. 또한 그가 죄인들의 회심과 성도들의 교회에서 인정하시려는 자를 일으키시도록, 또한 그들에게 일하려는 마음과 그것에로 부르시며 그것에 성공하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또한 그들에게 "영혼을 구하는 지혜를 주시도록," 그가 "일꾼을 내어 보내시도록"기도해야 한다. 이것은 그들 자신의 연약함과 사람의 사악함 때문에, 또한 "추수"에서 밖으로 내 몰려고 하는 사람들 때문에 나가기를 꺼려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안에서와 밖에서의 모든 모순이 정복되고 극복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추수"하기 위해 내보내기 바로 전에 이것을 기도할 것을 제자들에게 당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어떤 자비를 베푸시려고 하는 것은 좋은 징조이다. 그때에 그는 은혜의 보좌에서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데 흥미를 가진 자들을 분발시킨다(시 10:17). 더욱이 살펴볼 것은 그리스도는 이것을 "일꾼"으로 고용되었던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내 주시도록" 기도해야만 한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진 사명은 대개 성공적이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택한 그릇이다. 왜냐하면 "보라. 그는 기도하고 있기" 때문이다.(행 9:11, 15). 우리는 둘째로 그가 다른 사람을 보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일반 사람들뿐만 아니라 JC의 제자 자신들도 JC의 제자들의 증가를 위해 기도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사리사욕에 사로잡힌 자기 자신의 일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홀로 있기를 원하지만(적은 수일수록 더 좋다) "그리스도의 일을 구하는" 자는 그것에 의해 그들 자신이 무색해지지만 더 많은 일이 행해지도록 더 많은 일군을 원하는 것이다. --------------- didavskw(1321, 디다스코) 가르치다 teach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a) 동사 디다스코(Homer 이래)는 '가르치다'와 '배우다'를 뜻하는 어근 다(스)(da[s])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이 단어에는 '받아들이기 위하여 반복해서 손을 뻗히다'를 뜻하는 어근을 포함하고 있으며, 따라서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것을 받아들이게 하다'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 단어는 호머 시대 이래로 '가르치다, 알다, 교육하다, 증명하다, 지시하다'를 의미하며, 중간태로는 '스스로 배우다, 생각해 내다, 숙달하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교사와 생도, 스승과 제자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데 전형적으로 사용된 말이다. 생도나 제자는 비단 지식, 사상, 사실만이 아니라 예술적 기교와 전문적인 기술도 배우는데 이 때 학습자는 스승과 제자의 반복적인 학습 활동을 거쳐서 이 모든 것들을 체계있게 철저하게 습득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단어는 생도의 가능한 한 최고의 발전을 그 목표로 삼는 이론적이고 실제적인 지식 전수라는 넓은 의미에서의 가르침과 학습을 의미한다. (b) 파피루스(papyrus)와 오스트라카(ostraka)에서 입증된 일반적인 어법에서 디다스케인은 지적이고 권위적인 요소가 매우 강하다. "가르치다, ~을 알리다' 등의 의미 외에 디다스코는 '논증하다, 입증(증명)하다, 보여 주다'라는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따라서 이 단어는 공식적인 계약(아나그노시스 테스 호몰로기아스)의 기록에 관하여, 명확한 어떤 것을 '양도했다 yielded'라는 말이 될 수도 있다(Mitteis-Wilcken, Ⅱ, 2, 96, Col. Ⅱ, 5[A.D. 4세기]). 다른 경우에 이 단어는 '타당한 증거가 제시되어야 한다'라는 요구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다. (c) 헤로도투스(Herodotus)는 합창단 지휘자의 직무를 묘사하는데 디다스코를 사용하였다. 이 경우에 '지휘하다'나 '연주하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시의 경연들이 있었던 시기(B.C. 5세기에서 4세기)에 지휘자들은 대개 공연되는 작품들의 작가였기 때문에, 디다스케인은 비극(Aeschylus에 관한 Aristoph. Ra., 1026; 참조: Hdt., Ⅵ, 21)이나 희극(Plat. Prot., 327d)은 물론 주신찬가(dithyramb)의 작곡(HDT., I, 23)을 포함하는 '시적인 활동'을 의미할 수도 있다. (d) 헬라어 문헌에서 이 단어가 종교적인 의미로 사용된 경우는 드물며, 특히 주전 1세기까지는 이런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 이 단어는 안드로스(Andros)의 이시스 찬가(Isis-hymn)와 키메(Kyme)의 이시스 찬가(Isis-hymn)에서 등장하는데, 이 두 찬가는 여신을 우주와 그 개개 분야에서의 의미있는 질서를 위하여 전능으로 관여하고, 따라서 인간의 문화와 종교적 발전을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자로 묘사하면서 이 단어를 사용했다. 필로(Philo)는 매우 자주 이 단어를 고전 헬라어 어법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다. 그는 예를 들어 모세를 헬라적 의미에서의 교사로, 즉 에픽테투스(Epictetus)의 작품에 나오는 철학자와 같이 다른 사람의 마음과 접촉하는 사람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따라서, 디다스코는 학생의 능력 계발과 지식 및 기술을 전달하는 것이 그의 관심인 '교사의 행위'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단어가 신들의 행위를 묘사한 경우는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 모든 가르침의 목표는 생도의 능력을 계발시키기 위하여 지식과 기술을 전수하는 것이며, 생도의 의지를 어떤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압력을 가하는 것이 아니다. 2. 70인역본의 용법. (a) 동사 디다스코는 약 100회 나오며, 그 중 57회의 경우에 히브리어 라마드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따라서 이 라마드가 지배적이다. 보통 디다스코는 신명기와 역사서들과 시편들(시 18:34은 제외)에서 라마드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다른 한편 디다스코는 욥기의 14회 중에서 욥 21:22에서만, 그리고 잠언의 7회 중에서 잠 5:13과 잠 30:3에만 라마드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70인역본에서 디다스코가 신 4:5; 사 40:14; 사 48:17을 제외하면 라마드만을 나타내는 단어이기 때문에 더욱 인상적이다. 이것은 디다스코가 헬라어를 말하는 유대인들에게 더욱 더 전문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70인역본에서 라마드와 마찬가지로 디다스코를 종교적 영역에 한정하지 않는다. 두 경우 모두에 있어서 이 용어는 무기들의 사용법에 대한 지시나(삼하 22:35 등) 노래를 연습시키는데 대해(신 31:19, 신 31:22 등) 사용되었다. 그러나 디다스코의 특별한 목적은 그것의 선포와 요구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다. 따라서 시 93:10에서 디다스코는 하나님에 대해서 그가 사람들에게 그노시스를 가르치신다고 언급되어 있으며, 욥 22:2에서 하나님은 지식을 가르치는 자로 언급되었다. 디다스코는 특별히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신 4:1)와 말(레마타, 신 4:10) 또는 넓게 노모스(1Esr. 9:48)에 대해 사용될 때,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이끌 때(시 142:10; 참조: 시 50:13)에 명확한 하나님의 뜻의 선언에 대하여 사용된다. 가르침을 베푼 자가 하나님 자신이시든지(신 4:10), 가정의 가장이든지(신 11:19), 혹은 의인이든지(시 50:13) 간에 차이가 없다. 이 용어는 항상 지적인 것은 물론 의지적인 면도 지닌다는 것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70인역본의 디다스코는 항상 단지 사람의 어떤 특정한 부분이 아닌 전 인간에 대해 권리를 주장한다. 이것은 이 말이 하나님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뜻과 길에 대해 사용되는 곳에서 가장 분명하다. 렘 12:16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가르쳐 바알로 맹세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그 나라들의 범죄이다. 디다스코의 사용은 여기에서 우리가 이스라엘을 그들의 하나님에게서 떼어 놓으려는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시도에 관계되어 있다는 것과 이 시도가 성공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디다스코와 관련된 절대적인 요구 때문에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이 그 뜻에 복종하고 맞추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그 뜻을 보이시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가 되기에 특히 알맞은 것이다. 이 점에서 세속적인 사용과 70인역본의 사용 간의 차이가 생겨난다. 절대적인 요구의 사상은 세속 헬라어에는 발견되지 않으며 세속 헬라어에서 디다스코의 목적은 재능과 잠재력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한편 70인역본(구약)에서 그 관심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의 전 인간과 그의 교육에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세속의 디다스코의 의미와 구약에서의 의미 사이에 어떤 궁극적인 단절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가르침의 목적이 어디에서나 어떻게든 목표로서 관찰된다는 공통적인 연결점이 존재한다. 구약에서 구원이 올 것이라는 예언적 선포가 결코 디다스코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 목적은 언제나 비록 수용되거나 발전되어야 하지만 이미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어떤 것이다. (b) 구약의 후반부와 랍비 유대주의의 토양에서 우리는 유대인들 가운데서 이 단어의 역사에 나타나는 경향을 따르는 고정된 용법을 발견하게 된다. 독립적으로 사용될 때, 디다스코 또는 그에 상응하는 림메드는 계시된 하나님의 뜻의 총체인 율법을 설명함으로 가르치는 방식을 의미하며, 가르침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개인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와 다른 한편으로는 이웃과의 관계를 정돈하기 위해 주어진다. 이 용법은 이미 대하 17:7 이하에서 발견된다. 그 구절에서 이 단어는 몇 명의 뛰어난 사람들로 하여금 백성들을 가르치게 한 여호사밧에 대해 사용된다.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책'을 가지고 순회하였다는 것도 아울러 언급되어 있다. 기자는 그것이 종교적인 교육을 목적으로 율법을 가르치는 일이었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이것은 림메드(가르치는 것)가 그에게 있어서 명백한(unambiguous) 용어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랍비들에게서 림메드는 때때로 세속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따라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생업( trade)을 가르쳐야 하며, 만약 그가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아들에게 도둑질을 가르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bQid., 30b)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림메드는 이제 토라를 개인의 삶을 위한 구체적인 지도로 해석한다는 의미를 지닌 전문화된 용어이다. 이제 때때로 토라 등이 목적어로 덧붙여질 수 있으나 목적어 없이 사용되는 것도 일반적이며 매우 명확하다(unambiguous). 민 3:1 이하의 랍비들의 해석에서, 아론의 아들들은 역시 모세의 아들들이기도 한데 그 이유는 아론이 그들을 낳았고 모세는 그들을 가르쳤기 때문이며, 랍비들에게는 한 사람에게 토라를 성공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그 사람 자신과 하나님 모두에게 그의 탄생에 못지 않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bSanh., 19b). 율법에 대한 실제의 교육은 해석적인 견해를 포함하기 때문에 그것이 보다 더 정확하게 규정되지 않았을 때에도 림메드는 종종 "학문적인 해결에 도달하다", "확립된 학문적인 견해를 표명한다"를 의미할 수 있다(Sanh., 11, 2 등); 서기관의 권위자가 율법적인 질문에 사려깊은 판단을 제시하고, 그것을 가르친다(Ber., 2, 5 이하 등). 그러므로 림메드라는 단어는 유대인들의 귀에 명확한 의미를 전달한다. 이것은 더 나아가 율법 교육(디다케)을 의미하는 파생어 탈무드에 의해 예증되고, 마찬가지로 "성경이 가르침을 준다"라는 등의 문구(S. Nu., 70 on 9:13, p.67, 1, Horovitz)와 "그것이 말하는 것 안에 (성경의) 가르침이 있다"라는 문구(Ab., 5, 1; Sota, 5, 4 등)에 의해서도 예증된다. 이것은 형식적인 면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 제재는 개별적인 연구를 필요로 할 것이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디다스코는 신약성경에서 약 95회 나오며, 그 3분의 2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첫 부분에 나타난다. 반면에 바울 서신에는 10회만 나온다. 따라서 우리는 이 용어가 소아시아와 헬라의 이방인들의 모임에서보다는 첫 번째 제자들의 무리 중에서와 원시 교회에서 두드러지게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단어는 의미에 있어서 "가르치다, 교육하다 to teach, to instruct"라는 명확한 의미를 지닌다. 뉘앙스에 대해서는 논의할 필요가 거의 없다. 왜냐하면 그런 뉘앙스는 여러 문맥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 28:15에서 그 문맥은 종교적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며, 70인역본에서의 이 단어의 역사와 일치하여 단순히 지시(derection)가 있었고 그 지시를 준수한다는 것을 언급할 뿐이다. 한편 신약성경에서 디다스코의 내부 구조를 연구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다. (a) 공관복음서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 ① 복음서의 일치된 증거에 의하면 디다스케인은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직무 중의 하나였다. 예를 들면 마 4:23의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행하신 사역에 대한 포괄적인 언급에서 우리는 첫 번째로 그가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는 기록을 읽게 되며, 그 다음에는 바실레이아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시고 병자들을 고쳤다는 기사만이 나온다. 마 9:35; 마 11:1을 참조하라. 회당(마 9:35; 마 12:9 이하; 마 13:54과 병행구절; 막 1:21; 눅 4:15; 요 18:20 등)이나 T Sukka,4, 5에 언급된 교육 회관이 딸려 있는 특별한 회당이 있는 예루살렘의 성전(막 12:35; 눅 21:37; 마 26:55과 병행구절, 그리고 요 7:14 이하; 요 8:20도 참조하라)이 줄곧 가르치시는 장소로 언급되는데, 이것은 대부분의 회당이 교육적인 목적을 위해 시설들을 제공하기 때문이다(jMeg., 73d, 23). 어쨌든 질서있는 교육이 성전에서 행해졌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에 관하여 전하는 것 중 많은 부분이 가르치는 요소라는 것에 확실히 일치한다. ②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방식은 그 시대의 유대인 교사들이 가르치는 방식과 같은 것이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외형에 관하여 말한 것을 듣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거의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복음서가 기록된 시기의 교회의 일부는 이미 그들이 관찰한 관습을 염두에 두고 있으며, 다른 일부는 그 형식에는 관심이 없고 가장 중요한 내용에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우리는 적어도 나사렛의 회당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눅 4:16 이하).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셔서 성경의 일부분(사 61:1 이하)을 선택하여 읽으신 후 그 시대의 다른 해설자들처럼 앉아서 풀이하셨는데 이것은 통상적인 유대교와 랍비들의 관습이었다(참조: 눅 5:3; 막 9:35; 마 5:2; SB Ⅱ 150 등). 따라서 단어 없이도 그 내용이 충분히 명료하게 드러나는 눅 4:16 이하에서는 생략되기도 하였지만, 마 13:53 이하와 병행구절에서는 나사렛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간결한 언급에서 순전히 디다스코만이 사용되었다(마 13:54; 막 6:2). 가르치기 위해 앉는 이와 같은 습관은 산상수훈이 시작되는 마 5:1과 누가 최고인가 하고 다투는 열 두 제자들을 훈계하시는 막 9:35에, 그리고 게네사렛 호수에서의 설교가 시작되는 눅 5:3에 언급된다. 이것이 당연히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관계된 유대 전통 역시 림메드 형식으로 말한다는 것이다(bAZ, 17a). ③ 만약 예수님의 가르치시는 외적인 방식이 후기 유대교의 골격 내에 존재한다면, 그 내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사렛에서(눅 4:16 이하) 그는 이사야의 말씀을 근거 또는 출발점으로 사용하셨다. 다른 경우들에서는 토라의 해석(마 5:21 이하; 마 15:3 이하; 마 22:37 이하와 병행구절; 참조: 마 22:23 이하)을 사용하셨다. 다른 한편 그는 그의 가르침을 율법을 해석하는 것에 한정하지 않으셨다. 첫째, 그는 율법에 대해 단지 율법 그 자체를 존중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신다. 다음으로, 그는 구원을 확보하려고 추구한 생명 없는 율법주의적 결의론과 같은 것을 가르치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 및 그의 이웃과의 관계에서 삶을 정리하기 위한 것이었다(마 22:37 이하와 병행구절; 참조: 마 19:16 이하와 병행구절).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가르친 것은 간단히 말하자면, 그것은 하나님, 그의 왕국, 그리고 그의 뜻 등 당대 유대교가 문제 삼았던 모든 주제들이었다. 그는 자신이 말한 바를 모두 동료 인간과 더불어 사는 인간 생활의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하였고, 논의되고 있는 주제 속에 온 몸으로 참여하셨다. 따라서 그의 가르침은 항상 의지에 호소하여 하나님의 뜻을 위하든지 아니면 그의 뜻을 거부하든지 실제적인 결단을 요구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그의 섭리, 그의 은총 또는 그의 진노에 관하여 단지 이론적으로만 가르침을 베푼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진노를 보여 준다(예: 눅 15:1 이하). 그는 또한 하나님의 왕국에 대해서 머리 속으로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나라가 임박하였음을 선포하고(막 1:15) 회개와 행동의 변화를 촉구하셨다(막 7:15; 마 5:21 이하). 이것이 예수님께서 랍비나 선지자들의 방법으로 말씀하셨으나 그들과 다른 급진적 방법이었다. 예수님은 그가 성경과 특히 율법(노모스)에서 하나님의 뜻의 계시를 본다는 사실에서 랍비와 바리새인들의 집단과 공통적인 근거를 발견하며, 그래서 그가 단 한 글자라도 버리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마 5:17 이하). 이 구절에서 "율법과 선지자들은 구약성경 구성의 본질적 부분이다. 율법은 구원의 필요를 깨닫게 하는 것이고 선지자들은 그 구원의 미래 성취를 지적하는 것이다"(Tholuck). '이룬다'는 것은 실행과 말씀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 성취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실행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 가르침과 실행은 십자가에서 최종적으로 절정에 달하였다. 그것은 율법이 '예언적으로' 가리키는 바로 그 사역이며, 또한 율법이 존속하는 길은 율법이 이 가르침에 순응하여 따르고 완전히 변화되어지는 길 뿐이다"(R. Banks). 따라서 가르침의 주제에 관한 예수님과 랍비들 사이의 격차는 내용 자체에서가 아니라 그 분 자신의 인격에서, 즉 그의 아들로서의 자기 인식이라는 사실에서 발견된다. 이것이 그의 가르침이 설명의 형식으로든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든지 간에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이유이다(마 7:28; 마 13:53과 병행구절 등).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9; 막 1:22). 이것은 또한 예수님께서 율법의 절대화를 거부했을지라도 그의 가르침에 관하여 디다스코의 독립적 사용에 결정적 의미를 부여해주는 요점이기도 하다. 이 거부는 단순히 이탈이나 탈선에 대한 거부로 본다. 예수님은 그 탈선에 반대하여 그에게서 기인하는 디다스케인에서 림메드의 참된 노선을 되찾으신다. 그는 모순도 이론의 반영도 허락하지 않는 방식으로 전 인간을 향하여 하나님의 요구를 다시 제시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떠한 중간적인 권위에도 구속 받지 않고 요구받는 사람의 인식과도 완전히 관계없는 절대적인 요구이다. 그 목적지가 하나님의 뜻에 의한 인간의 교육과 개혁인 이 요구(참조: 마 5:48)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실체가 된다. 랍비들이 율법을 기록된 가르침의 토대와 주제로서 그리고 인간이 애써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는 길로 생각할지라도 주님께서는 이런 이유로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롬 10:4). 이것이, 그 전통 속에서 초기 기독교가 예수님의 그의 백성 가운데서 가르치시는 활동을 언급할 때, 초기 기독교가 독립적으로 가르침에 대해 말한 역사 언어학적 이유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이 그의 말씀 속에서 계시되고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계시될 때, 모든 말씀으로 그의 청중들을 하나님의 뜻에 직접 직면하도록 하시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은 독립적으로 가르치시는 가르침인 것이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사역에 대해 언급하는데, 림메드와 같은 식으로 독립적으로 사용된 디다스케인이 헬라인들 귀에는 이상하게 들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유대적 사고 세계 밖에 있는 독자들을 위해서 기록한 누가복음 조차도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디다스케인을 독립적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을 주목하여야 한다. 이것은 그가 이 단어를 사용한 예수님과 관련하여 이 단어와 예수님의 인격과의 관계 때문에 이 단어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하였다는 가정하에서만 설명될 수 있다. 새로운 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계신 것이지 특별한 방식으로 가르치고 계신 것이 아니다. ④ 공관복음서의 새로운 특징은 지적인 면을 강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적인 면을 강조하는 것은 헬라 저술가들(고전, 고전 이후, 헬레니즘, 그리고 심지어 유대 헬레니즘 저술가들) 사이에서는 어디서든지 보편화 되었으며 랍비 주석에서는 헬레니즘의 분해하는 힘을 검토하기 위한 노력으로 발전하였다. 그래서 어떤 집단들에서는 율법을 연구하는 것이 율법을 행하는 것보다 더 높게 평가되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절대적인 주장은 구약 개념의 보다 참된 성취를 나타낸다. (b) 요한의 기록에서의 디다스코 ① 요한의 기록에서 이 단어는 요한복음에 10회(요 6:59; 요 7:14, 요 7:28, 요 7:35; 요 8:2; 요 8:20, 요 8:28; 요 9:34; 요 14:26; 요 18:20), 요한일서에 3회(요일 2:27), 요한계시록에 2회(계 2:14, 계 2:20) 나온다. 이 구절들 중 몇몇은 최소한 간단하게나마 단독으로 다룰 만한 가치가 있다. 즉 보다 더 강조적으로 하나님과 성령에 의한 가르침에 대해 말한 구절들에 대해서이다. 나머지는 그들 중에서 예수님의 가르치신 특정한 내용에 관계없이, 본질적으로 이미 예수님의 디다스코에 관해 말한 내용의 범주에 들어간다(요 6:59; 요 7:14; 요 7:28; 요 7:35; 요 8:20; 요 18:20). 디다스코가 고침받고 예수님의 증인이 된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에게 사용된 요 9:34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참으로 그것은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을 예수님의 적대자들에 관하여 사용된다. 구약에서의 림메드/ 디다스케인의 사용을 얼마간 모델과 전제로 취하여 발람과 이세벨의 가르침에 대하여 말한 요한계시록의 두 구절들(계 2:14, 계2:20)도 예외에 들어간다. ② 요 8:28; 요 14:26; 요일 2:27에서 디다스코의 용법의 특징은 첫 번째로 이 단어가 직접적인 영감이나 계시의 임재를 암시한다는 것이다. 요 8:28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에 관한 그의 진술에 대해 말씀하신다: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요 14:26에서 예수님께서는 보혜사 성령과 약속들에 대한 가망을 제자들에게 제공하신다: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일 2:27에서 기자는 아무도 그의 독자들을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받는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름부음(크리스마)은 의심할 여지없이 성령을 말하며, 그래서 이 구절은 요 14:26과 연결된다. 어쨌든 그것은 다른 세계로부터의 디다케(didachv, 1322: 가르침)의 부여를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가 헛되이 공관복음서 저자들에게서 찾는 디다스코의 용법이다. 그러므로 이런 용법은 복음서의 다른 곳의 용법에 의하여 설명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이 헬라적 용법인가 아니면 헬라적 개념에서 기원한 용법인가 하는 의문이 일어난다. 그러나 지금까지 세상 밖으로부터 빌렸다는 가정을 정당화하는 병행절은 제시되지 않았다. 요 8:28의 문맥에는 매우 두드러진 권위적인 요소가 있다: "아버지께서 가르치셨다". 그것은 우리가 확인한 대로 가르친 사람이 가르침 받는 사람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전적인 주장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림메드를 지적한다. 그러므로 요 8:28의 디다스코를 림메드나 공관복음에 사용된 디다스코에 비추어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다. 만약 유대인들의 귀에 디다스케인이 다른 사람의 뜻이 어떤 사람에 의해 성공적이고 완전하게 구현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면, 디다스케인은 다른 곳에서 요한이 진술한 문구, 호 펨프사스 메 파테르(나를 보내신 자 아버지)와 같은 사상, 즉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뜻의 일치라는 사상을 표현한다. 만약 여기서 예수님의 사역에서 하나님의 관여에 대해 펨페인보다 오히려 디다스케인이 사용되었다면, 이것은 이 언급이 아들로서의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일 2:27에서는 공동체에 대한 절대적 또는 전체주의적 주장을 제기하는, 근본적으로 격퇴되어야만 하는 거짓 교사들에 관하여 단언하고 있다. 예수님과 유대가 끊어지지 않는 한 그러할 것이다. 디다스코가 선택된 이유들 중 하나는 분명한 목표들이 간과될 수 없는 것과 전 인간의 헌신을 요구하는 이 양 측면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의 기름부음은 상기한 거짓 교사들에 대항하는 안전 장치가 된다. 이것을 이들 구절들에서 뿐만 아니라 디다스코가 나타나는 요한의 기록의 모든 구절에도 적용된다. 그렇지만 요한의 기록에서(계 2:14; 계 2:20 제외) 그 단어가 계속적으로 '계시하다' reveal라는 의미에 접근해 있다면 이것은 어떤 특별한 용법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단지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서의 디다스코의 주제(요 9:34도 포함하여)가 항상 예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공관복음의 용법과 요한의 기록들을 구별한다. 그러나 요한의 기록들에서, 그것은 그들 자신들에서 아무 두드러진 의미를 지니지 못한 말조차도 예수님께서 중심에 위치하심으로 인해 내용에 있어서 어떻게 영향받는지를 보여준다. 계 2:14; 계 2:20에서 두 번 나오는 디다스코는 각각 버가모와 두아디라 교회에서 벌어진 거짓 교사들의 행위를 가리킨다. 눅 11:1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소서"라고 요청한다. 이 요청은 공관복음의 용법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여기서 디다스코도 예수님의 명령에 전적으로 무조건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상을 표현해 준다.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그 장면은 그 장면이 첫번째로 지닌 것처럼 보였던 삽화적인 성격을 잃게 된다. 누가복음에서 이 익명의 제자들의 요청은 마 16:13 이하와 병행구절; 요 6:60 이하의 예수님의 메시야이심에 대한 고백과 나란히 교회의 역사에서 중심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c) 초기 기독교의 가르침.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에 제시된 자료는 세 가지로 분류된다. 첫 번째는 림메드의 의미를 따라 디다스케인을 사용한 구절들이며, 두 번째는 예수님에 대하여 디다스케인을 사용한 구절들이며, 세 번째는 교회의 기능으로서의 가르침에 대해 이야기한 구절들이다. 특히 그 단어가 주로 독립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에서 볼 때, 그 세 그룹들 사이에 뚜렷한 차이가 있을 가능성은 없다. ① 이미 예수님의 생애 동안에, 그리고 그의 명령으로 제자들은 가르치기를 시작하였다(막 6:30). 이렇게 그들은 예수님의 요구를 선포하는 것을 자신들의 일로 삼았다. 마 28:19; 마 28:20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 직무를 계속하는 것을 그의 백성의 필생의 사업으로 만드셨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가르침은 세례(침례)를 주거나 제자를 삼는 것을 전제 조건으로 하며, 그 가르침의 내용은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으로서, 예수님에 관한 선포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의 디다케(가르침)이다. 사도행전 4장에서 보면 사도들은 부활을 선포하면서(행 4:2),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르쳤다(행 4:18). 만약 여기에 구약성경의 해석이 포함된다면, 이것은 회개에의 부름에서 절정에 이르게 된다. 외적인 형식에서는 그들도 유대 관습을 따른다(참조: 행 5:25). 주석과 권면은 가르침의 근간이 되며, 심지어 때로 율법에 있는 교훈의 요점에 국한한다(롬 2:21; 행 15:1). 이런 점에서 새로운 시작은 예수님 안에서 율법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행해져야 한다(히 5:12). ② 따라서 기독교 가르침의 일차적인 목적은 성경에서부터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야임을 증명하는데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가르침은 "예수에 관한 것을 … 가르침"(행 18:25), 또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침"(행 28:31)이다. 여기에 가르침의 내용의 한계가 있다. 행 18:25에서 디다스케인은 회당에서 행해지는데 회당은 당연히 그 교수법을 결정한다(성경의 증거를 들어서 가르침). 행 28:31에서 디다스케인은 특별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와 함께 언급되는데, 디다스케인은 바울의 로마에서의 선교에 대해 포괄적으로 정의하기 위해, 즉 그 선교의 두가지 측면을 묘사하기 위해 그 어구와 함께 언급된다. 그들은 사실을 전하지만 사람들이 이 가르침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성경을 거부할 수 밖에 없는 그런 방식으로 전한다. 물론 적대자들은 이것을 모세 및 율법과 반대되는 가르침이라고 보았다(행 21:21; 행 21:28). 바울이 행 18:11에서 가르친 하나님의 말씀도 일반적인 구원 메시지가 아니라, 구약성경에 근거하고, 구약성경의 관점에서 구원 메시지라고 하는 똑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참조: K. H. Rengstorf). ③ 바울은 로마서, 고린도전서, 그리고 갈라디아서에서 디다스코를 겨우 5회 사용하였는데(롬 2:21; 롬 12:7; 고전 4:17; 고전 11:14; 갈 1:12), 이 사실은, 바울이 회심 이후에 이 단어에 대해서 갖게 된 연상의 비중을 고려해 볼 때 놀라운 일이 아니다. 회심 이전의 그의 삶 전체는, 그가 "가르침을 받은" 파라도세이스 파트리카이(장로들의 유전, 갈 1:14)의 지배를 받았다. 롬 2:21에서 그가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라고 유대인에게 물었을 때, 그는 디다스코를 전적으로 전통적인 히브리어 림마드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롬 12:7에는 교회 안에서의 디다스칼로스(교사)의 직책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는데, 교사의 직무는 신앙의 원리들을 해설해주는 것이다(고전 4:17, 여기에서 바울은, 디모데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행사"-이것은 아마도 그의 신앙 원리를 의미하는 듯하다-를 사도 교회에 상기시키고 그것들을 가르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갈 1:12에서 디다스코는 '전통을 전수하다'라는 뜻을 지닌다. 고전 11:14에 기록되어 있는 바울의 어법은 주목할만한 것으로서, 여기에서 그는 본성의 가르침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고 방식은 아마도 스토아 철학의 배경에서 유래했을 것이다(참조: Epictetus, Dissertationes, 1, 16, 10). ④ 살후 2:15에서는 데살로니가전서와 구전 전승으로 본다: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 그러므로 여기에서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더 이상 "어떤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메시지를 듣다"라는 뜻을 나타내지 않고, 오히려 "전승된 가르침을 받아서 지키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랍비들의 교수 방법을 상기시킨다. 디다스코는 또한 엡 4:21에서 수동태로 나오고 있는데, 여기에서 엔 아우토 에디다크데테("너희가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다")라는 구절은 그 앞에 나오는 만다네인 크리스톤(그리스도를 배우다)이라는 구절과 마찬가지로 이 말을 듣고 배우는 사람들의 회심을 언급한다. 골 1:28과 골 3;16에서 사용된 디다스코의 의미를 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바는 아마도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필요한 실제적인 권면일 것같다. 이 두 성구에서 디다스코를 한정하고 있는 엔 파세 소피아(모든 지혜 안에서)라는 구절은 가르침의 내용보다는 가르침의 방법과 관련된 것이다. ⑤ 목회 서신들에는, 가르치는 것이 디모데의 권리이자 의무라고 언급되어 있다(딤전 4:11; 딤전 6:2). 딤후 2:2에서 가르치는 것은 일정한 요건을 갖춘 사람들이 맡는 과업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한편 딤전 2:12은 여자가 가르치는 일에서 제외되고 있다. 이 모든 구절에서 가르침 받은 것은 "선한" 또는 "건전한" 교리(디다스칼리아)로 상정되어 전승되어 보존된다(즉 가르침을 받는다). 가르치는 일이 이제 특수한 몇몇 사람들에게만 국한되고, 골 1:28에 기록된 바와 같이 더 이상 모든 기독교인에게 맡겨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딛 1:11의 디다스코는 이득을 취하기 위하여 유대교적 신화와 사람들의 계명을 가르치는 이단자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목회서신에서 피스토스 호 로고스("그 말은 미쁘다")라는 성구에서 강조된 바와 같이(참조: 딤전 1:15; 딤전 3:1; 딤전 4:9; 딤후 2:11; 딛 3:8), "가르치다"라는 말은 어느 정도 고정된 전승을 전수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 단어의 강조점은 그 전승을 전수한다는 데에 있다. ⑥ 히브리서에서 이 단어의 용법은 목회 서신의 용법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히 5:12에서 기자는, 비록 독자들이 이미 전부터 교사들일지라도, 그들은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즉, 히 6:1 이하에 나타나 있는 그리스도교의 기본적인 교리들)를 새로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들어 독자들을 책망한다. 히 8:11에서 이 단어는 렘 31:31 이하에서 인용한 문장 속에 나오는데, 여기에서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것은 또한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의 뜻에 관한 지식이다-이 가르침의 주제인 듯하다. (참조: K. Wegenast; K. H. Rengstorf). -------------------- dm'l;(3925, 라마드) 배우다, 가르치다, 훈련(시행)하다 라마드(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배우다 learn, 가르치다 teach, 훈련(연습, 실행)하다 exercise'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86회 나오며, 칼, 피엘, 푸알형으로 사용되었다. 라마드는 구약성경에서 가르치는 것을 뜻하는 열 두개 단어 중에 하나로서 교육시킨다는 의미 뿐만 아니라 훈련시킨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훈련시킨다는 것은 '소모는 막대기'를 의미하는 파생어 말메드(dm;l]m' , 4451)에서 나타난다. 호 10:11에서 에브라임은 멍에와 몰이 막대기로 길들여지는 어린 소처럼 가르침을 받는다. 라마드의 주요 용법은 시 119편에서 예증된다. 여기에서 후렴구가 반복된다: "주의 율례(혹은 법도)를 내게 가르치소서"(시 119:12, 시 119:26, 시 119:64, 시 119:66, 시 119:68, 시 119:108, 시 119:124, 시 119:135, 시 119:171). 여호사밧 왕의 요청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유다 성읍에 가서 율법책을 가르쳤다(대하 17:7, 대하 17:9). 헬라어는 '배우다'(만다노)와 '가르치다'(디다스코)에 대해 두 개의 다른 단어를 사용하여 각기 그 자체의 내용과 목표 그리고 방법을 가진다는 것을 나타내는 반면에 히브리어는 모든 배움과 가르침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에서 발견되기 때문에 두 단어에 대해 동일 어근을 사용한다(신 4:10, 신 14:23, 신 17:19, 신 31:12, 신 31:13). 이것을 배운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와 율법에 순응하는 것이다. 그래서 라마드는 '가르치고, 배우고, 시행한다'는 세 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다른 실례에서 사람은 전쟁의 방법에서(대상 5:18), 때때로 노래의 사용에 의하여 훈련을 받았다(시 60, 표제 H1, 삿 3:2, 아 3:8). 미가는 사람들이 더 이상 전쟁 기술을 익힐 필요가 없는 시대를 상상한다(미 4:3, 사 2:4). 그러나 어느 누구도 주님을 가르치거나 상담자로 역할하지 못했다(사 40:14). 오히려 어떤 것을 알게 된 자들은 모든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그것을 배웠다.(W. C. Kaiser).(참조: BDB; TWOT). ---------------- [마28:18-20] *18.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 eujaggevlion(2098, 유앙겔리온) 기쁜 소식 good news, 복음 gospel.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유앙겔리온은 유앙겔로스(eujavggelo")에서 유래했다. 유앙겔로스는 사자를 뜻하며, 승리의 소식이나 기쁨을 일으키는 정치적 또는 개인적 소식을 가져오는 자이다. 헬라 시대에 이 단어는 신탁을 전하는 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유앙겔리온은 형용사와 명사로 사용되며, 다음 의미를 지닌다. (a) 유앙겔리온은 '기쁜 소식'을 의미하며, 또한 '기쁜 소식에 대한 보상'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승리의 소식'이나 전달문을 나타내는 전문 용어가 되었다. 이러한 전달문은 주로 승리의 전달문이지만 기쁨을 가져오는 정치적이며 개인적인 전달문에 대해서도 사용된다. 이러한 전달문들은 신들의 선물로 간주된다. 전달문을 받았을 때, 감사함으로 또한 신들로 하여금 그 선물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 신들께 희생제를 드린다. 이러한 희생제의 배후에는 정령(精靈) 신앙자 자신의 종교적 제의의 불신이 존재한다. 이 전달문에 대하여 신들게 빨리 감사를 드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 전달문이 말하는 행운을 잃을지도 모른다(J. Schniewind, Euangelion, 1931, 182). (b) 유앙겔리온은 '신탁의 말'(미래의 어떤 사건에 대한 약속)을 의미하며, 이러한 유앙겔리온에 대해 감사를 드렸다. (c) 유앙겔리온은 황제 숭배에서 중요하다. 황제 숭배의 지역에서 신적 통치자의 탄생 소식, 통치 시대의 도래, 또는 즉위, 그리고 또한 그의 말들, 포고령, 행동들은 행복과 평화에 대한 세상을 기다리며 오랫동안 소망하여온 바의 성취를 가져오는 기쁜 소식들이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유앙겔리온은 70인역본에서 3회 나오며, 히브리어 베소라(기별, 소식)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기별이나 소식'(삼하 4:10; 삼하 18:4; 삼하 18:25)을 의미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유앙겔리온은 신약성경에서 76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유앙겔리온은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에 관해 사용하셨다. ① 막 1:15; 막 8:35; 막 10:29; 막 13:10; 막 14:9; 막 16:15; 마 4:23; 마 9:35; 마 24:14; 마 26:13(막 1:1; 막 1:14)에서 예수님에게서 유래한다. 예수님께서 사 35장과 사 61장에 나오는 메시야에 대한 기대의 말씀들이 자신의 말씀과 행동들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셨다는 것은 가능한 설명이다(참조: 마 11:5 이하=눅 7:22). ② 실제로 결정적인 문제는 예수님께서 친히 유앙겔리온이라는 말을 사용하셨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단어가 예수님의 메시지의 본질적 요소를 적절히 표현한 말인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미 자신의 말씀과 행동에서 기쁜 소식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나라(막 1:14)의 도래를 인식하셨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막 13:16). 이 기쁨의 메시지는 이미 그것을 전하는 전달자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니, 곧 이 전달자는 예수님 자신이셨던 것이다(참조 비교: 눅 11:20; 마 5:1 이하).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이 전달문을 전하는 자와 원작자로만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이 전달문의 주제, 곧 이 전달문이 말하는 주인공으로 나타나시는 것이다. 따라서 초대 기독교회가 예수님의 강림과 관련된 구원의 메시지를 묘사하기 위하여 유앙겔리온이라는 술어를 취한 것은 매우 일관성이 있는 것이다. (b) 바울이 신약성경에서 유앙겔리온이란 용어를 확립시켰다는 것은 근거가 있는 말이다. 바울에 있어서 유앙겔리온은 그의 신학의 중심 개념이 되었다. 이것은 익숙한 기쁜 소식을 의미하였으니, 곧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성육신과 죽으심과 부활에서 세계의 구원을 위하여 역사하셨다는 것이다(롬 1:1 이하; 고전 15:1 이하). 이 사건이 이미 구약성경에서 약속되어 있는 한, 구약은 이 복음에 속한다(에팡겔리아). 약속은 유앙겔리온과 언어적으로나 개념적으로 밀접하게 관련되며 또한 율법과 복음의 알력이 이 술어에 관련되어 바울의 기록들에 나타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유앙겔리온은 바울에 의하여 사용된 바와 같이 전하여지는 내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선포의 행위, 과정, 그리고 실행까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전도의 내용과 전도의 과정은 하나이다. 이들이 서로 밀접하게 나열되는 때(고전 9:14; 고전 9:18)를 제외하고는 사고에 있어서 분리되지 않는다(롬 1:1). 왜냐하면 선포라는 바로 그 행동에 있어서 그 내용은 실제가 되며 또한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구원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복음은 단순하게 구원의 역사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구원의 역사이다(G. Friedrich, TDNT). 선포의 행위는 동사 유앙겔리조마이(eujaggelivzw, 2097)에 의해서만(참조: 고전 1:17) 나타내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행위를 나타내는 명사로 사용되는 유앙겔리온에 의하여서도 나타내어진다. 따라서 고후 8:18에서 유앙겔리온은 복음 전도를 의미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복음", 또는 "그리스도의 복음",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이라는 구절에 나오는 소유격(예: 롬 1:1; 롬 15:16; 고전 9:12; 고후 2:12)은 목적어와 주어로 취급되어야 한다. 곧 그리스도 또는 하나님께서는 모두 복음의 내용이요 창시자라는 것이다. 이곳에서 뚜렷한 구별을 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때때로 바울은 한면을, 또 어떤 때는 다른 면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복음이 선포될 때마다(고후 11:7, 갈 1:11의 유앙겔리제스다이; 갈 2:2, 살전 2:9의 케뤼쎄인; 고전 9:14의 카탕겔레인; 살전 2:2의 랄레인), 이 복음은 능력으로 충만해진다. 복음은 믿음을 창조하고(롬 1:16 이하; 빌 1:27), 구원과 생명(롬 1:16), 또한 심판까지도 가져온다(롬 2:16). 복음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며(참조: 롬 1:17), 소망의 성취를 가져오며(골 1:5; 골 1:23), 사람들의 생활에 개입하며 교회를 창조한다. 이 복음은 사람의 발명품이 아니라(갈 1:11)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의 사자(使者), 사도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므로 사도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후 10-13장; 갈 2:7 이하, 이곳에서 전달문의 선포라는 뜻의 유앙겔리온은 분명히 아포스톨레의 목적과 내용으로 규정되고 있다. 곧 유대인과 또한 이방인을 향한 바울과 베드로의 사도적 임무를 말하는 것이다). 전령과 성벽 위의 파숫군이 하나님의 강림을 선포한다고 하는 사 40:9; 사 52:7; 나 1:15와 똑같이 전달자는 복음을 선포한다(롬 10:15). 바울은 특히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다(롬 1:1; 참조: 갈 1:16). 그러므로 "복음의 참예자"로서(고전 9:23) 그는 "자신의 복음"을 말할 수 있었다(롬 16:25; 고후 4:3). 이 말로써 그는 예루살렘에서 전파되었고(갈 1:6-9; 고후 10:13-16) 이제는 유대 율법의 경계를 부수고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이 되었고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하나의 복음을 나타내었다(갈 1:16; 갈 2:7; 갈 2:8; 롬 1:15). 한편 바울의 반대자들은 "다른 복음"을 전하였다(갈 1:6-10; 고후 11:4). 그들은 바울에게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사도권과 복음의 전파는 함께 속한 것이므로 바울과 그의 사도권에 대한 모든 공격은 거꾸로 복음에 대한 공격이었던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강요되는 것처럼-(참조: 고전 9:16)-주님을 전하는 것이다(참조: 고후 10:18; 고후 4:5; 갈 1:10). (c) 공관복음서들에서도 마찬가지로 유앙겔리온은 교회에서 전파되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 사건에 대한 좋은 소식에 주어지는 명칭이다. 그러나 이것이 자세하게 표현될 때에, 각각의 복음서 기자들은 다양한 강조들을 한다. 이것들은 그들 각자의 신학적 입장에 영향을 받는다. ① 마가복음 기자는 바울의 유앙겔리온 용법과 매우 유사하게 사용하는 입장을 취하며 막 1:1과 막 1:14를 제외하고는 항상 유앙겔리온을 독립적으로 사용한다. 그가 유앙겔리온을 편집적인 구절에서 사용한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학자들은 그가 유앙겔리온을(아마 바울에게서 취하며) 공관복음서 형태로 도입한 사람이었다고 추론한다. 바울과 마찬가지로 마가복음 기자는 예수님을 복음의 내용이며 창시자로 본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예수님께서는 존재하시고 역사하신다. 곧 복음을 위하여 행해지는 것은 예수님을 위하여서도 행해진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막 8:35; 막 10:29). 이 복음의 내용은 개인적인 사건들을 수반한 예수님의 역사이다(참조: 막 14:5). 마가복음 기자는 이 사건들을 단순하게 역사적인 관심으로 기록하지 않고 복음이 무엇인가를 표현하기 위하여 예수님에 대한 기사를 사용한다. 복음은 영광스러운 신적 구속자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감추어진 영광을 소유한 고난받는 인자를 통한 구원의 메시지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를 향한 길에서 그를 따르는 자들을 제외하고는 나타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기자는 유앙겔리온을 자신이 기록한 책 전체에 대한 일종의 책명처럼 사용한다(막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이 의미는 이 이야기들이 단순히 예수님에 대한 보고문이 아니라 교서라는 뜻이다. 이 이야기들은 예수님을 살아계신 주님으로 선포하며, 또한 예수님께서 친히 마가복음의 독자들에게 말씀하시며 믿음을 주시고 강건하게 하시는 좋은 소식인 것이다(막 1:15). ② 마가복음의 유앙겔리온의 이 용법과 대조되어 마태복음 기자는 "천국 복음"(마 4:23; 마 9:35), 또는 "이 복음"(마 26:13; 참조: 마 24:14)과 같이 수식함이 없이는 전혀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강조점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면(前面)에서 이제 예수님에 대한 개념이 복음의 전달자요, 선포자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 복음의 내용은 이제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가르침 가운데 주로 나타나게 된다(마 4:23; 마 9:35; 마 24:14; 그러나 마 26:13에서 "복음"은 수난 기사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가 이 복음을 전하는 한, 예수님 자신도 복음의 내용이 되신다(참조: 특별히 마 24:14; 마 26:13). ③ 사도행전에서 유앙겔리온이란 술어는 행 15:7과 행 20:24에서만 발견된다. 아마도 이것은 누가복음 기자의 특별한 구상과 관계된 것일 것이다. 곧 예수님의 시대는 교회 시대와 구별되어야 하고 또한 예수님의 전도와 사도의 전도가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에 따른 그의 구상일 것이다. 따라서 누가복음 기자는 사도의 전도를 유앙겔리온으로 묘사할 수 있었다(행 15:7; 행 20:24). 그러나 예수님의 전도는 유앙겔리온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특히 이러한 관계에 있어서의 교훈적인 것은 막 10:29의 유앙겔리온이 눅 18:29에서는 바실레이아로 대치되는 것이다. 유앙겔리온 또는 유앙겔리조마이를 사용하는 신약성경의 다른 기록들은 대체로 위에서 말한 바울의 개요를 따르고 있다. 이 단어들은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이 능력의 복음의 특별한 국면들을 분명히 하는 경향이 있다. 이 복음은 전도자요, 사도요, 교사인 바울에게 위탁되었다(딤후 1:11).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딤후 2:8)에 대한 복음의 메시지는 일회적인 과거 사건으로 제한되지 않고 현재에 능력으로 충만된 말씀으로 경험되며 그러므로 또한 이 복음은 인간의 사슬에 얽매일 수 없다(딤후 2:9). 이 복음은 거듭남과 새 생명을 낳으며(벧전 1:23-25) 평화를 가져오며(엡 2:17; 엡 6:15) 가까이 있던 자와 멀리 있던 자들, 곧 이방인과 유대인들을 함께 이끌며(엡 3:1-9), 구원을 주며(엡 1:13),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다"(딤후 1:10).(참조: U. Becker; G. Friedrich; Walter Bauer; J. H. Thayer). --------------------- khruvssw(2784, 케륏소) 고지하다, 알리다, (크게 소리로) 선포하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a) 동사 케륏소(Homer 이래)는 '사자가 되다, 사자의(로서) 직무를 수행하다'를 의미한다. 보통 이 단어는 전이된 의미로, 그의 직무 수행에서 사자의 활동을 묘사한다. 사자에 요구된 중요한 특성은 그가 좋은 소리를 가져야 하는 것이므로, 이 단어는 항상 '큰 소리로 외치다, 선포하다, 선언하다, 알리다(고지하다)'라는 기본 의미를 지닌다. 이 동사는 '부르다, 소환하다, 호소하다, 간청하다'를 의미하기도 한다. 사자가 선언한 것과 일치하여 케륏소는 '제시하다, 금하다, 지시(명령)하다, 요구하다'를 의미한다. 상업적으로는 '팔다, 경매하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의 일반적 의미는 '알리다'이나 구체적으로 '포고하다 to herald'를 의미하기도 한다. (b) 필로는 종종 케륏소를 사자의 '외침' 또는 '공포나 포고', 또는 특히 (비유적으로)포상이나 승리에 대한 '공표'를 뜻하는 말로 사용했다. 2. 70인역본의 용법 케륏소는 70인역본에서 약 3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카라의 역어로, 욘 3:7에서는 히브리어 자아크(외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또한 호 5:8; 욜 2:1; 습 3;14; 슥 9:9에서는 '고함소리'를 뜻하는 히브리어 루아의 히필형의 역어로 나오는데 처음 두 경우에는 '진군해 오는 적군 앞에서 경고의 소리를 내다'를 의미한다. 그렇지만 여기서 임박하게 다가오는 것은 여호와의 날이다. 반면 나머지 두 경우에는 승전고나 승리의 외침을 뜻하며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으니 기뻐하라고 외친다. 출 36:6과 대하 36:22에서 케륏소는 모세가 전 진영에 대해 외친 선포와 바사 왕 고레스가 전 왕국에 내린 선포(히브리어 콜: 음성 voice)에 대해 사용되었다. 슥 9:9과 습 3:14을 특별한 성구로 제쳐둔다면 그 단어가 단지 선포자의 세가지 고전적인 기능에 대해서만 사용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① 제의적 축제의 선포(출 32:5; 왕하 10:20; 대하 30:5; 단 3:4, 바벨론의 반포자가 예배에 참예하도록 선포한 제의적 요청에 대해; 절기나 금식에 대한 선포(대하 20:3; 욜 1:14; 욜 2:15; 욘 3:5, 욘 3:7, 니느웨의 백성과 그 성의 왕의 금식에 대한 선포). ② 전장에서의 군대 장관의 명령이나 반드시 선포되어야 할 방백의 칙령에 대해(출 36:6; 대하 24:9; 외경 구절인 에스드라상 2:2, 유대인들이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해야 한다는 고레스의 칙령; 에스드라상 9:3, 유대인들에 대한 에스라의 명령; 마카베오일서 5:49[51], 유다의 에브론 공격 명령). ③ 심판 선포(호 5:8; 욜 3:9 욘 3:2, 욘 3:4)나 여호와의 심판날 선포(욜 2:1) 또는 사 61:1은 효력있는 종말론적 사건(눅 4:21에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성취)을 통해 포로들에게 주어질 해방의 선포에 대해 언급한다. 잠 1:21; 잠 8:1과 잠 9:3은 그 자체의 특별한 범주에 속한다. 이 구절들은 지혜가 큰 소리로 외친다고 언급하고 있으므로 어느 정도 이 단어의 스토아 학파의 용법과 유사하다. 케륏소는 아주 드물게, 예를 들면 미가 3:5에서의 거짓 선지자들, 욘 1:2; 욘 3:2에서의 요나, 그리고 렘 20:8에서의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들의 일을 묘사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케륏소는 신약성경에서 61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케륏소는 '사자가 되다', 일반적으로 '선포하다, 공포하다'를 의미한다. ① 세례(침례) 요한은 마 3:1이하에서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한다: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막 1:4(병행구, 눅 3:3)에서 요한은 회계의 세례(침례)를 선포한다: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세례(침례) 요한은 광야에서 메시야 시대를 예고한다. 그의 사역은 두가지, 즉 세례(침례)를 베푸는 것과 천국의 임박한 도래를 선포(전파)하는 것이다. 그의 천국의 선포는 예언적인 것으로서, 그 임박한 성취가 확실한 약속의 그리스도를 지시하는 것이며, 그의 세례(침례)는 하나님의 통치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인치어 준비시키고 메시야의 죄사함을 예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절들은 사 40:3에 대한 언급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그가 선지자들 중 최후의 선지자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② 막 1:38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명이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마 4:17에서 그는 천국의 도래를 선포한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마 10:7에서도 같은 표현이 나온다. 이표현은 마 3:1의 요한 선포와 동일하다. 그러나 그들 사이의 분명한 차이점은, 요한은 자신의 뒤에 올 사람을 기다렸던 데 비해 예수님은 기다릴 사람이 없었다는 점에 있다(참조: 마 3:11).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선포와 사역에서 그것이 이미 현재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세례(침례) 요한은 메시지를 단순히 전하였으나 예수님은 성취시키는 선지자로서 그렇게 하셨다. 그러므로 그의 선포 자체는 사건이다(참조: 눅 4:18이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적인 힘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이 선포한 것을 성취시킨다. 예수님은 두루 다니시면서 "천국 복음"(마 4:23; 마 9:35), "하나님의 복음"(막 1:14)을 선포하셨다. 벧전 3:19에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서 선포하셨다: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라는 문구는 문자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서'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그의 몸이 무덤에서 부활하기 전에 살아난 인간 영혼으로서 악한 영들이 최후의 심판날을 기다리며 투옥된 곳으로 가실 수 있었다(참조: 벧후 2:4, 벧후 2:5; 유 1:6). 그리고 그들에게 그의 사망에 대한 승리와 인간들의 악행의 결과에 대한 승리를 선포하실 수 있었다. 그는 이렇게 하심으로 그들로 그들의 심판이 최종적으로 확정된 것을 알게 하신 것이다(참조: 골 2:14; 골 2:15). 베드로는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하셨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리스도는 죄악에 대한 그의 승리를 선포하셨다. 그것이 악령들에게는 흉한 소식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옥에 있는 영들을 육체를 떠난 인간들의 영혼들로 해석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것을 타락한 천사들로 이해하는 것이(참조: 창 6:1 - 창 6:4; 벧후 2:4; 벧후 2:5) 성경의 표현 방법과도 일치하고 노아 시대의 언급과도 일치한다. 프뉴마타("영들")는 수식어 없이 사용되었는데 성경 다른 곳에서 육체를 떠난 인간 영혼들을 이렇게 묘사한 적이 없다. 예를 들어 히 12:23에 보면 "의인들의 영혼들"이라 하여 프뉴마타에 수식어가 있다. 그러므로 본문에는 초자연적 존재들, 악한 천사들과 선한 천사들을 가리킨다(참조: 히 1:14; 눅 10:20). 젤윈(E.G.Selwyn)의 말을 인용하면 프뉴마타란 말은 절대적으로 초자연적 존재들을 가리킨다. 유대 전통에서도 그렇게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그들의 질서를 파괴하여 투옥의 형벌을 받았다. 이런 범죄의 시기는 항상 홍수 직전으로 보고 있다. 이런 사상이 베드로후서 2장에서도 언급되어 유 1:6, 유 1:7절에도 나온다. 이러한 사실들은 여기서 위의 해석을 강력하게 지지한다(A.M.Stibbs, Peter). 예수님은 눅 4:18; 눅 4:19에서 회당에서 사 61:1이하의 말씀을 읽음으로서, 자기의 선포자로서 사명을 넌지시 알리신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③ 고침 받은 자들은 그들에게 일어난 이적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오더라"(막 1:45). 막 5:20에서 그들에게 일어난 치유 이적을 공포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그렇게 하는 것을 금하였는데도 더욱 공포하였다(막 7:36). 기적과 선포 - 선포가 하나님의 행동적인 말씀이고 하나님의 통치가 현재적 실재라면, 표적과 기사들은 말씀에 수반되어 말씀을 확증하는 것이다(막 16:20; 히 2:3 - 히 2:4). 신자들에게 있어서 기적들이 메시지의 실재를 입증해 준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표적들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표적들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강요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 자신은 표적들을 낮게 평가한다(참조: 마 4:3이하; 막 5:43). 막 1:32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치유를 하신 후 복음을 전하러 다른 마을로 가신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가 오신 이유이기 때문이다(막 1:38). 중요한 것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의 능력 있는 행위는 하나님 나라가 정말로 도래하였음을 나타내는 표적일 뿐이다(마 11:5). ④ 유대인들은 롬 2:21에서 율법을 선포한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회당에서는 모세를 선포했다: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행 15:21). ⑤ 제자들은 회개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치도록 보냄을 받는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들은 것을 선포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마 10:27). 막 6:12에서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선포하였다. 그들은 "만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복음을 선포했다(막 16:15; 막 15:20). 행 8:5에서 빌립은 사마리아 성에 가서 그리스도를 선포하였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행 8:5). 온 세상이 복음이 선포될 때 종말이 올 것이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b) 케륏소는 현재 분사로 사용되어 선포(하는) 자(또는 전파자)를 나타낸다, 롬 10:15; 고전 1:23; 고전 15:11; 고전 15:12; 고후 1:19; 고후 4:5; 고후 11:4; 갈 2:2; 빌 1:15; 골 1:23; 살전 2:9; 딤전 3:16. (c) 계 5:2에서 케륏소는 특히 '큰 소리로 외치다'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천사는 세상 사람들에게 일곱 인으로 봉인된 책을 열 자격이 있는 자가 누구냐는 질문을 한다. (d) 선포나 전파의 내용. ① 하나님의 이름, 롬 9:17. ② 하나님의 복음, 막 1:14; 롬 10:15; 살전 2:9. ③ 하나님의 나라, 눅 9:60; 행 20:25; 행 28:31. ④ 주의 은혜의 해, 눅 4:19. ⑤ 그리스도, 막 1:7; 행 8:5; 고후 1:19; 빌 1:15. ⑥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되심, 행 9:20. ⑦ 말씀, 롬 10:8; 딤후 4:2. ⑧ 그리스도의 부활, 고전 15:12. ⑨ 예수님의 주되심, 고후 4:5. ⑩ 회개의 세례(침례), 막 1:4; 행 10:37. (참조: Walter Bauer; C.Brown; G.Friedrich). ----------------- qerapeuvw(2323, 데라퓨오) 섬기다, 치료하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데라퓨오(Homer 이래)는 데라폰(qeravpwn, 2324: 시중드는 사람)에서 유래했다. (a) 이 단어는 '봉사하다, (상관의) 시중들다'. 이 의미에서, (b) 신들을 숭배하는 것, 즉 제의적 예배에서 '봉사하다, 섬기다', (예를 들면 의사로서) '돌보다, 다루다'를 의미했다. 여기에서 마침내, (c) 일반적으로 의학적 방법으로서 '치료하다, 고치다'를 의미하게 되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데라퓨오는 70인역본에서 24회 나오며, 히브리어 야샵(3427: 앉다, 에 2:19; 에 6:10), 할라(2470: 달래다, 호의를 구하다, 잠 19:6), 바카쉬(1245: 찾다, 구하다, 잠 29:26)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필로는 육체의 치료와 영혼의 치료를 표현하는데 이 단어를 사용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데라퓨오는 신약성경에서 43회 나오며, (a) 마태복음에 16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각각 14회, 5회, 마가복음에 5회, 요한일서에 1회, 요한계시록에 2회 사용되었다. 복음서의 기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데라퓨오가 예수님의 전승에서 현대적 의미의 치료 과정에 대해서 사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단어의 신약성경의 용법은 헬라 구어 세계에서 언어 발달의 마지막 단계와 연관되며, 여기서 데라퓨오는 '봉사하다' serve, 또한-의사의 봉사라는 견지에서-'아픈 사람을 받들다, 봉사하다', '의료적 처치를 해주다'를 의미할 수 있다. 여기에서부터 약간 진전하여 '잘되게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