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07.05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빌4:4-7.앙망.기쁨.평강누림
첨부파일 :

빌립보서 4 : 1-19 [개역개정]

*1.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2.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3.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

*4.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

[빌4:6,7....:6.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알-티드아구 키 임-비테펠라 /우베타하누님 임-토다 타보나 /미쉐알로테이켐 레콜-다바르 리페네이 엘로헤이누))  .......7.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쉘롬 엘로힘 하나알레 알-콜-세켈 이네초르 에트-레바브켐 /웨에트-마흐쉐보테이켐 바마쉬이흐 야후슈아)) ]


6.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알-티드아구 키 임-비테펠라 /우베타하누님 임-토다 타보나 /미쉐알로테이켐 레콜-다바르 리페네이 엘로헤이누))==6.(분배말씀으로 산출된 생명가지의 참제자마다, <늘, 범사에, 마음중심으로!! =조금도 그 어떤것도-추호도-근심/염려하거나-전전긍긍하지말라>온전히 감사드릴지라--Q성령께서 십자가로 결합-구별된 한몸 이뤄 전존재 적셔주시며 그 말씀해내신바 호흡-숨결-그영은!!, 상천하지에 임재충만하시며, 상호 붙좇음/붙어감/붙듦의 하나로서 끝까지-온전히!! 살아가며 붙들고  계시기때문이라!!) -->십자가로 결합-구별된 한몸, 성령Q 앙망하며 붙들라-붙어 가라-안기라.   ( : 조성해가시는 분 (함께) 늘 계심은..<구주 빼어닮은 판박이 엘로힘-생명가지의 참제자, 참증인-진복자 만드시려 함이니..>) (:: 뜻하신바 Q의 진리말씀 <베레시트 그대로> 열어주신 말씀 그대로의 <그 평강>의 실존을 살아가라)  ("베레시트"그대로, 시종일관 끝까지, 십자가 통해 부으시는 부활생명의 그영, 그 기름부음의 움직임따라 살아가며 <그 절대적 참믿음으로 발휘하며> 확장하라)  (<생명가지 산출한> 분배말씀의 진리 거처-담지자됨이니, 그 실존 삶 누림 주심에 감사하라)  (<십자가 말씀으로 적셔주시는, 생명싸개> Q,그분 살아내는 존재로 살게 하시나니)   (진리의 기름부음이신 Q, 그 목양의 말씀의 십자가<껴안고 앙망-주이름 부름-머무름 통해> 참생명-관계적 인격 온전히 살아내며, 조성해가심 따르라)   (시종일관 끝까지 온전히 조성의 말씀 온전히 이룰지니, 그 말씀은 <상호 결합-구별된 한몸 끝까지 유지-이룸의> 명정하신 말씀이로다)  (열어주신바, 공급말씀을 그대로 살아가며 확장하라)   (Q의 말씀으로 낳으신바 그 실제를 살아가며 확장하라, 오직 십자가 붙들며/붙좇아/붙어가라)

 

7.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쉘롬 엘로힘 하나알레 알-콜-세켈 이네초르 에트-레바브켐 /웨에트-마흐쉐보테이켐 바마쉬이흐 야후슈아))==7. (샬롬이란, 십자가 붙듦으로!!, 기름부으심의 말씀, 그 안에 두신 과정거친 참생명-관계적 인격!!, 그 공급이 열려지고 넘치게 누리는 거처됨이니)  (Q의 양육/목양의 그 말씀을, 그대로 호흡하며 살아가는바, Q-사람(담지자)의 결합..이것이 엘로힘..) <곧 엘로힘 산출이니, 엘로힘=샬롬, 샬롬=엘로힘이라..> (Q호흡해내신 그대로, 그 호흡으로 낳아 확장하신바, 분배말씀의 생명가지-참제자 실존을 살아가라)   (분배말씀은, 또한 조성하심의 말씀이니,.. 곧 기름부음의 육화!! 이땅에서 실지로 살아내도록 조성하고 계심이라)  (사역하시는 Q께서 친히, 생명이신 그분 자신을 확장하사 연합한 한몸의 하나 이루시며, 조성 사역 이루고 계심이니) (Q의 모든속성/진리/형상으로, 한마음 한뜻으로-동심합치 이뤄 살아감으로써 그리하고 계심이라..)  (진리-생명의 기름부음으로 그 상호거처 삼으신 자마다 부활생명-인격을 막힘 없이 온전히 살아낼 수 있게 하심이니)  (그분은, 말씀하신 그대로, 진리의 기름부음이신 부활생명의 그영이시며)  (친히 사역하시며 호흡해내심 그대로 영접하는자마다 기름부음의 생명가지 만드시는분이시라) ..곧 구주 예수님!!,그안에 거하라

---

*8.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

*10.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14.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15.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16.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17.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18.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19.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20.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21.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22.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니라

*23.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AMP]=========

4 Rejoice in the Lord always [delight, take pleasure in Him]; again I will say, rejoice! 주안에서 기뻐하라((깨어있는 모든 시간마다, 무의식속에서라도, 매사/만사에 주님을 마음에 떠올리고, 주예수님이름을 중심으로 부르라!!.. 마음을 완전한 승리자. 해결사, 전지전능의 구주 그분의 임재로 가득 채우라!!... 주예수님이름 부르는 바로 그 순간 이미 부르는 모든이 한사람한사람마다 맞이하고 만나주시며 당신영광의 모든 것 기울여 기름부으시며, 믿는이의 완전한 지고지선의 진복누림위해 하나되어 내주하여 계신 참생명/능력이신 주님=완전한 해결사/전지전능의 구주를 맛보고-누리며-체득하며-참여함의 신비안으로 들어가라 오직 살아계신 주님께 대한 산 믿음을 발휘하라!!! 주안에 있는 절대기쁨-절대긍정과 차별없는 절대사랑으로 대하시는 바로 그분의 기쁨을 취하라...찬양하라!!!)

5 Let your gentle spirit [관용=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무궁하신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따라 바로 그렇게 살라!!...your graciousness은혜로움, unselfishness타인섬김, mercy자비, tolerance참음, and patience견딤] be known to all people. The Lord is near.((호흡보다, 의식보다 더 가까이 모든 차원을 초월하여 믿는이를 감싸며, 믿는이의 존재속에 모든능력근원으로서 완전히 녹아들어 계신 분, 또한 다시 오실 주님이심을 인정하며 항기쉬기범감을 연습하고 실생활안에서 적용하며 누리라!!)) 

6 Do not be anxious or worried about anything, but in everything [every circumstance and situation] by prayer and petition with thanksgiving, continue to make your [specific] requests known to God.((매사/만사에 염려/근심에 네맘을 무장해제상태로 방치하지 말라, 내 주인은 모든 차원을 창조하신 창조주, 생명의 말씀(영원하신 말씀- 즉각적인 말씀)-영원한 반석/방패/산성/이미 이긴 승리자/왕중왕 주예수님이시니.. 오히려 [내안에 사는 분은 내가 아니라, 부활하신 생명의 HS, 주 JC 자신이시며 나는 주님 그분을 사랑하기에 자원-헌신-순종으로 섬기는 사랑의 둘로스!!...주님 따르리라] JC이름으로 대적하고 친히 깨닫고 알게 해 주시는, 모든 것 다 아시고 돌파하시는 주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와 간구로 말씀드리라!!...기도/간구를 멈출 시점조차 일러주실것!!))  

7 And the peace of God [that peace which reassures the heart, that peace] which transcends all understanding, [that peace which] stands guard over your hearts and your minds in Christ Jesus [is yours].((사람의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형언불가능한 바, 하나님이 들으셨고 친히 해결하시며 일러주실 것을 영으로 확신함으로 오는 주의 평강 알게 됨[직관적 앎/친밀함을 열어주신다!!...에셰르!!..언약실제를 참되게/생생하게 누림!!... 바라크(경배, 예배)통해 /예비된 베라카 맛봄...오, 지고지선의 진복으로 자신의 모든 영광을 경외하는 이에게 주사 누리며 알메 하시는 아버지여!!]..매사/만사에 모든 생각과 마음을 굳센 믿음-하나됨의 평강으로 채워 기쁨으로 충족케 하시며 만사를 온전/완전케 이루시며, 모든 생각과 마음을 그분의 임재와 영광을 친밀하게 알게 하심으로 지켜주시리라..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내안에거하라, 나도 너희안에 거하리라 : 상호거함/누림/만족-상호기업/상호소유....발휘되는 견고한 마음의 심지!!...나는 주를 선택하고 의지하리, 오직 주님만!!..집을 나간자여 돌아오라!!))

---------------

8 Finally, [b]believers, whatever is true, whatever is honorable and worthy of respect, whatever is right and confirmed by God’s word, whatever is pure and wholesome, whatever is lovely and brings peace, whatever is admirable and of good repute; if there is any excellence, if there is anything worthy of praise, think continually on these things [center your mind on them, and implant them in your heart]. 영원히 있는 말씀이시요 즉각적인 말씀이신 하나님-구주JC께서 [하나님의 말씀따라 살며, HS의 인도하심과 기름부음으로] 이 땅의 삶을 살아내신 것처럼 바로 JC께서 내주하시는 HS으로 오셨으니 그분과 일치됨으로 살아감을 실행하라...그리할 때 이 땅에 사신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참되고, 경건하며, 옳고, 정결하며, 사랑받고 칭찬얻으셨던]을 참되게 재현하는 작은 그리스도를 살아내게 될 것!!

9 The things which you have learned and received and heard and seen in me, practice these things [in daily life], and the God [who is the source] of peace and well-being will be with you.

---------------

God’s Provisions

10 I rejoiced greatly in the Lord, that now at last you have renewed your concern for me; indeed, you were concerned about me before, but you had no opportunity to show it. 

11 Not that I speak from [any personal] need, for I have learned to be content [and self-sufficient through Christ, satisfied to the point where I am not disturbed or uneasy] regardless of my circumstances. 

12 I know how to get along and live humbly [in difficult times], and I also know how to enjoy abundance and live in prosperity. In any and every circumstance I have learned the secret [of facing life], whether well-fed or going hungry, whether having an abundance or being in need. 

13 I can do all things [which He has called me to do] through Him who strengthens and empowers me [to fulfill His purpose—I am self-sufficient in Christ’s sufficiency; I am ready for anything and equal to anything through Him who infuses me with inner strength and confident peace.] 

14 Nevertheless, it was right of you to share [with me] in my difficulties.

-----------

15 And you Philippians know that in the early days of preaching the gospel, after I left Macedonia, no church shared with me in the matter of [c]giving and receiving except you alone; 

16 for even in Thessalonica you sent a gift more than once for my needs. 

17 Not that I seek the gift itself, but I do seek the profit which increases to your [heavenly] account [the blessing which is accumulating for you]. 

18 But I have received everything in full and more; I am amply supplied, having received from Epaphroditus the gifts you sent me. They are the fragrant aroma of an offering, an acceptable sacrifice which God welcomes and in which He delights. 

19 And my God will liberally supply (fill until full) your every need according to His riches in glory in Christ Jesus. 

20 To our God and Father be the glory [d]forever and ever. Amen.

-------------------

21 Remember me to every [e]saint in Christ Jesus. The [f]brothers who are with me greet you. 

22 All [g]God’s people wish to be remembered to you, especially those of Caesar’s household.

-------------------

23 The grace of the Lord Jesus Christ be with your spirit.

==============

*4.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Rejoice in the Lord always; again I will say, rejoice!......Rejoice in the Lord always. Again I will say, rejoice! 

*5.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Let your gentle spirit be known to all men. The Lord is near........Let your gentleness be known to all men. The Lord is at hand. 

*6.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Be anxious for nothing, but in everything by prayer and supplication with thanksgiving let your requests be made known to God..........Be anxious for nothing, but in everything by prayer and supplication, with thanksgiving, let your requests be made known to God; 

*7.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And the peace of God, which surpasses all comprehension, will guard your hearts and your minds in Christ Jesus...........and the peace of God, which surpasses all understanding, will guard your hearts and minds through Christ Jesus. 

=====================

여러가지 권고들(빌 4:1-9)

사도는 본장을 여러 가지 그리스도인의 의무들에 대한 권고로써 시작한다.

Ⅰ. 우리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 고백에 대하여 견고히 서라는 권고(1절). 

그것은 앞 장의 마지막에서부터 서두가 시작되었던 것이었다. 그러기에 본장 1절에 "그러므로 견고히 서라"는 말로 시작되었다. 즉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고" 그리고 거기에서 와서 거기로 우리를 데려갈 구원자를 우리가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그러므로 굳게 서라"는 말씀이다. 

믿음에 의거 한 영생에 대한 희망과 기대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행로에 있어서 한결같게 그리고 끊임없이 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사랑에 넘치는 호칭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본문에 보면 그들을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라 하였고 다시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이런 식으로 그는 그들로 인하여 갖는 기쁨과 그들에게 대한 사랑의 심정을 표현한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표현은 그들로 그의 교훈에 대하여 마음을 열게 하는데 대하여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비록 그가 위대한 사도였다 할지라도 그는 그들을 자기의 형제들로서 간주했다.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같은 형상을 따라 같은 영에 의해서 새롭게 되었으므로 형제인 것이다. 마치 한 집의 자녀들이 비록 키와 나이와 얼굴이 다르다 할지라도 같은 부모의 자식들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1) 같은 형제이므로 그는 그들을 사랑했고 사랑하되 극진히 사랑했다. 

그러므로 그는 "참으로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다시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말한다. 

사역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향하여 따뜻한 온정을 품어야 한다. 형제의 관계가 형성되었다면 그것에는 언제나 형제애가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2) 그는 그들을 사랑했고, 그를 사모했다. 그리고 그들은 보기를 원했고 그들로부터 소식 듣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들의 안녕을 갈망하되 진지하게 그것을 바랐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사모한다"(1:8)고 하였다.

(3) 그는 그들을 사랑했고 그리고 그들 때문에 기뻐하였다. 

그들은 그의 기쁨이었다. 그들의 영적 건강과 부요함보다 더 큰 기쁨은 그에게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므로 말씀되기를 "너의 자녀 중에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다"(요이 4;요삼4)고 하였다.

(4) 그는 그들은 사랑했고 그들을 영광으로 여겼다. 

그들은 그의 기쁨은 물론 그의 면류관이었다. 교만한 야심적인 사람일지라도 바울이 그들의 신앙과 순종의 신실함에 대한 증거들로 기뻐했던 것보다 자기들이 명예로 인하여 더 기뻐하진 못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울을 위대하게 한 요소였던 것이다.

2. 권고의 내용을 고찰하여 보자. 교훈의 내용은 "주 안에 견고히 서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동시에 그들은 그의 안에서 견고히 서야 하며 그리고 그와 동행함에 있어야 꾸준해야 하며 최후까지 변함이 없어야 한다. 또는 "주 안에 견고히 서라"는 말씀은 그의 강함과 그리고 그의 은혜 안에 견고히 서라는 말로도 볼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며, 그리고 자신에 대한 어떠한 자부심도 부인하는 것이다. 우리는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하게 되어야 한다"(엡 6:10). 그의 말의 뜻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견고히 서되 너희가 지금까지 해 온 바가 같이 최후까지 굳게 서라.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답게 마지막까지 굳게 서라. 또한 내가 너희의 안녕과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부끄러울 것이 없이 굳게 서라"고 한다.

Ⅱ. 그는 그들에게 일치와 상부 상조를 한다(2,3절). 그러므로 그는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도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어떤 특정 인물들에게 주어진 교훈이다. 때때로 일반성을 띤 복음의 교훈들이 특수한 사람들과 사건들에 적용시킬 필요가 있다. 본문에 의거한다면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서로 의견이 대립되었든지 혹은 그들의 교회에 대한 입장은 달랐던 것처럼 여겨진다. 그것이 사회적인 이유에서이건(그들이 소송 관계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면들이 보인다) 혹은 신앙적 이유에서든 그들은 서로 입장을 달리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권하노니 그들이 나를 본받아 주 안에서 살기를 바란다. 서로 훼방을 하고 충돌을 일으키지 말고 서로 같은 마음을 갖기를 바라노라. 또한 화평을 유지하고 사랑 안에서 살기를 바란다. 서로 훼방을 하고 충돌을 일으키지 말고 서로 같은 마음을 가지며 교회의 다른 사람들과도 같은 마음을 가져 그들과 적대적인 행동을 하지 않기를 바라노라." 그리고 나서 그는 상부 상조를 권고한다(3절). 이 권고를 그는 특정한 사람들에게 한다. 

그러므로 본문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네게 구한다"(3절)고 하였다. 그가 참으로 멍에를 같이 한자라고 부른 이 사람이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다. 어떤 이는 에바브로디도라고 생각한다. 또 어떤 이들은 "그와 멍에를 같이 한 자"는 알려지지 않은 뛰어나게 훌륭한 부인, 아마도 바울의 아내가 아니겠느냐고도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가 자기와 "멍에를 같이 한 자"에게 "그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도우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사도와 멍에를 같이 한 자가 누구였든간에 그는 바울의 동료들과 멍에를 같이 하는 자였을 것임이 틀림 없다. 복음을 위하여 바울과 함께 수고했던 여인들이 있었던 것같이 보인다. 그들은 공적인 사역을 한 것이 아니고(사도는 그것을 명백히 금하였기 때문이다. 딤전 2:12 에 보면 "내가 여자의 가르치는 것을 허락치 않는다"고 하였다) 사역자들을 대접하고 병자들을 방문하고 무지한 자들을 지도하고 잘못된 자들을 권고하는 일을 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같이 복음의 사역을 위한 사역자들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 

이제 사도는 "너는 그들을 도우라"고 말한다. 남을 돕는 일은 기회가 있을 때 자신에 대한 도움으로 돌아온다. 즉 다음과 같은 뜻의 말이다. "그들을 도우라. 즉 그들과 연합하여 그들의 손을 강하게 하고 곤경에 서 있는 그들을 격려하라"는 말이다.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도 도우라고 하였다. 바울은 그의 모든 동역자들에게 친절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도움의 유익함을 알았으므로 그들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면 큰 위로가 될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였다. 

그는 자기 동역자들에 대하여 "그 이름이 생명책에 있는" 자들이라 하였다. 이 말은 그들이 영원부터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들이라는 뜻이든지 아니면 그들이 영생의 특권이 부여되는 단체나 협의회에 그들의 이름이 등록되고 기록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그 도시의 주민들이나 혹은 자유민들의 명부를 작성한 사실을 빗대어 말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와 같은 뜻의 말씀들 곧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눅 10:20).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르지 아니하리라"(계 3:5).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계 21:27)과 같은 말씀들을 성경에서 또한 찾아 볼 수 있다. 생명책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리고 그 책에는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도 기억하자. 우리는 그 책을 조사할 수도 없고 누구의 이름이 거기에 기록되었는지를 알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을 위해 수고하며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영혼의 이 일을 위해 신실한 자들은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으리라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

Ⅲ. 그는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것을 권한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절)고 본문에서 사도는 말한다. 우리의 모든 기쁨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 귀결되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여호와를 기뻐하라(시 37:4)고 하였고 내 속에 생각이 많을 때에(근심되고 괴로운 생각들)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시 94:19). "우리가 그를 묵상함을 가상이 여기신다"(시 104:34)고 노래하였던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되 그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며 또한 특권임을 기억하자. 항상이란 말은 어떤 조건에 처해 있든지 늘 기뻐하라는 말로 심지어 우리가 그를 인하여 고난받든가 혹은 그에 의해서 채찍을 맞을 때에도 기뻐하는 말이다. 우리가 그를 섬김으로 고난에 직면하게 된다고 해서 하나님이나 혹은 그의 법도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최악의 상태에 처해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 안에서 오히려 우리는 기쁨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사도는 전에도(3:1)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하였었다. 그리고 본문에서 그는 그것을 다시 말한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절).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을 그리스도인은 거듭 이 의무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만일 선한 사람들이 마음에 이 기쁨의 축제를 유지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들 자신의 잘못이다.

Ⅳ. 본문에서 우리는 공정함과 온화함 그리고 형제에 대해 온화한 마음을 품을 것을 권고 받는다. 

본문은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5절). 

사소한 문제로 극단으로 치닫지 말라. 악의와 고집을 피하라. 서로에 대하여 자비하게 판단하라. ‘토 에피에이케스’는 다른 사람에게 대하여 좋은 성품을 지니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절제는 로마서 14장에도 설명되고 있다. 

어떤 이들은 관용이란 말을 고난을 참는 태도 또는 세상적인 쾌락에 대한 절제를 뜻하는 말로 이해한다. 이렇게 볼 때 이 말은 다음 구절 즉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말씀과 일치한다. 

주님 오실 때가 가까워온다는 사실과 우리가 최종적으로 그의 앞에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로 동료를 상해하는 행위를 자제하게 하며 당면한 고난을 우리로 참게 하며 그리고 이 세상적인 즐거움에 대한 사랑을 절제하게 한다. 그가 우리 원수에게 원한을 갚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인내를 상 주실 것임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Ⅴ. 본문은 또한 어지럽히고 당혹시키는 근심에 대하여 경고한다(6절). 

‘메덴 메림나테’-즉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와 같은 내용이 마태복음 6장 25절에서 "목숨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즉 생명의 궁핍과 곤란 때문에 지나치게 염려하거나 마음이 동요되지 말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안에 사는 자로서 합당하지 않은 염려로  마음이 동요됨을 결코 허락지 말라는 말이다. 세상적인 염려나 망설임-설렘을 포함한 모든 염려를 주께 맡겨버리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며 이익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우리의 의무를  참되게 근면하게 수행하려는 염려는 마땅한 것이다. 이러한 염려는 앞을 내다 볼 줄 아는 현명함과 통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 외의 염려-망설임-설레임은 마음을 어지럽히고 분산시킬 뿐이다. 

그러므로  합당한 참된 믿음-산 믿음을 발휘하여 그분의 품안으로 들어가 안식하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주께서 권고하시느니라(찾아와 돌보시며 가르치며 친히 보살펴 주신다!!) " 하나님의 자녀에게 합당하지 않은 염려는  전지전능하신 아빠 아버지,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또한  혹시 그를 섬기는 데 네 자신이 참되게 올인하고 있지 못함을 나타내는 것 아닌지 돌아 보라, 회개하라!!, 마음을 새롭게 하라!!".

Ⅵ. 당황케 하는 염려에 대한 특효가 있는 해독제로써 그는 우리에게 끊임없는 기도를 추천한다.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6절). 다음의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우리는 정해진 기도의 시간을 지킬 뿐만 아니라 특별히 긴급한 일에 부딪칠 때마다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모든 일을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였다. 

어떤 일이 영혼을 괴롭힐 때 우리는 기도로 우리의 마음을 편하게 해야 한다. 우리의 경영하는 일들이 걷잡을 수 없게 되고 근심스럽게 될 때 우리는 지시와 도우심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우리의 기도와 간구에 감사가 필연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도록 간구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자비로 받아 주시는 은혜도 지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미 받은 것에 대하여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이 감사는 우리의 구함의 동기가 선함을 입증해 준다. 그리고 감사는 더 큰 축복을 주는 유리한 계기 노릇을 하는 것이다.

3.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요구의 제시이며 또는 우리의 소원을 그에게 알리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우리의 부족된 것이나 요구들을 우리에게 들으셔야 할 무슨 이유가 있는 것보다 더 잘 우리의 부족함을 알고 알리기를 바라시며 우리가 그에 베푸는 자비의 가치를 인정하고 또 그를 의뢰하고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기를 원하신다.

4. 우리의 기도의 결과. "우리의 마음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임할 것이다(7절). 

"하나님의 평강"이란 즉 우리와 하나님과 화해, 그의 은총에의 우리의 참여, 그리고 하늘 축복에 대한 희망과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 등을 의미하는 말이다. 

또한 "모든 지각에 뛰어나는"이란 말은 필설로 표현할 수 있는 이상의 좋은 것이란 뜻의 말씀이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했던"(고전 2:9) 평강이란 뜻의 말씀이다. 

이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다." 그것이 우리를 어려움을 당하여 죄짓는 데서 그리고 그 아래 떨어지는 데서 지키실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감정의 불안을 없애 주며 내적 만족을 부여할 것이며 우리를 평온하고 침착하게 해 줄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심지(心支)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실 것이다"(사 26:3)고 하였다.

------------------

Ⅶ. 우리가 좋은 이름을 얻고 또 유지할 것이 권고된다. 

즉 하나님과 선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를 권고되고 있다. [[하나님의 참생명의 표현인 바, 성-의-진-선(사-희-화)-미덕 :  존재의 모든 시선을 주께 돌려 주와 하나되어 따라가는 참 기독자의삶을 살 때 자연스레 발출될 것!!]]

그러므로 본문에 "무엇에든지 참되며 그리고 경건하라"(8절)고 하였다....이 말은 우리의 말과 약속이 진실한 것과 우리의 행동이 예절 바르고 말과 일치할 것과 우리의 생활 여건과 어울리는 삶을 사는 것을 뜻한다. 

또 무엇에든지 "옳으며 정결하라"고 하였다. 즉 우리의 모든 인간과의 관계가 공의의 법도에서 벗어남이 없어야 한다. 

또 무슨 일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그리고 칭찬할 만하며"라고 하였다. 즉 ,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이신  예수그리스도를 항상 마음에 모시고 생각하며 따름으로써  그분을 빼어달는 것이 가능한데, 모든 사람들에게 귀히 여김받을 만하다는 말이다. 

또한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라고 하였다. 즉 "덕스러운 것이나 권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 있다면"이란 뜻의 말이다. 다음의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사도는 혹시 이방인들에게서라도  덕스러운 것이나 권고할 만한  어떤 참된 것이  발견된다면 (철저한 검증을 거친 뒤!!) 그리스도인들로 그것을 배우게 하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어떤 덕이 있으면 이것들을 생각하라. 즉 그들 가운데 참으로 고상한 것들이 있다고 생각되면 ((주안에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비추어 그 근원과 근본동기까지 철저히 검증하여 보고!!)) 그것들을 본받아 어떤 선한 일에 있어서도 너희가 그들보다 부족함이 없게 하라." 우리는 악한 자들에게서,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갖지 못한 자들에게서, 무슨 좋은 점이 있다면 그것을 배우기를 수치스럽게 여기서는 안 된다.

2. 덕은 칭송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모든 덕스러운 길을 가야 하며, 그 안에 거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받든 안 받든 간에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것이다(롬 2:29). 

이 모든 사실들에 대하여 그는 자신을 그들에게 모본으로써 제시한다(9절). 그러므로 그는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하였다. 이 말씀을 통하여 바울의 교훈과 생애는 서로 모순되지 않고 일치하는 것이었음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그에게서 들은 대로 그가 또한 생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기에 그는 그의 교훈뿐만 아니라 자신까지도 그들이 본받을 것을 제시하였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을 그들이 우리에게서 발견하게 될 때 우리의 말은 강한 호소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활이야말로 "평강의 하나님을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하는 길이요." 그에 대한 우리의 의무에 보다 충실한 생활인 것이다. "우리가 그와 함께 할 때 주님께서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

--------------------------

빌립보 교회에 대한 바울의 감사(빌 4:10-19)

이 구절들에서 사도는 자기의 의식(衣食)을 위하여 선물을 보낸 빌립보 교인들의 친절에 대해서 감사한다. 로마에서 그가 죄수로 있을 때 그들은 그의 부족한 것을 공급해 주었다.

Ⅰ. 그는 그들이 이전에 그에게 베푼 친절에 감사하며 특별히 그 사실을 언급한다(15,16절). 바울은 감사의 정신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의 벗들이 그를 위하여 행한 것이 그가 그들에게 준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는 그들이 베푼 친절에 대해 마치 그것이 관대한 자선인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울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에 훨씬 미달되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그들 재산의 반을 그에게 보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그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고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영혼을 위하여 그에게 큰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그에게 작은 선물을 보냈을 때 호의를 갖고 그것을 받았으며 또한 기록으로 남겨져 모든 세대를 걸쳐 교회 안에서 읽혀질 이 서신에서 조차 그는 감사함으로 그 사실을 기록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이 서신이 읽혀지게 될 곳에서는 어디서나 그들이 바울에게 행한 이 일이 기억될 것이요. 또 이로써 그들의 행적이 칭송받게 된 것이다. 

타인에게 베푼 사랑은 반드시 보답을 받는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상기시키기를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케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느니라"(15절)고 했다. 그들은 그가 함께 있을 때 그를 편안하게 부양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마게도니아를 떠났을 때 그들은 그에 대한 자기들의 호의의 징표로 그에게 선물을 보냈다. 그리고 이것은 전혀 다른 교회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그들 이외에 아무도 그에게서 그들이 영적인 것을 부여받은 것을 생각하고 그들을 소유의 일부를 떼어 그의 부족함을 채우려 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자선을 행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살피고 그에게 준하여 하려고 한다. 그러나 빌립보의 교회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빌립보 교회만이 은혜를 갚을 줄 알았다는 사실은 그들의 영예를 더욱 높여 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그가 마게도니아에서 떠난 뒤) 그들은 "한 번, 두 번 그의 쓸 것을 보내었었다"(16절). 다음의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그들이 보낸 것은 사소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의 필수품만을 보냈다. 그것은 그가 겨우 쓸 수 있을 정도의 것에 불과하였다. 아마 그것은 그들이 능력껏 보낸 것일 것이다. 또한 바울도 그들이 충분히 좋은 것들을 보내 줄 것을 바라지도 않았다.

2.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들의 능력에 따라 사역자들을 공급하게 하시며 사역자들은 또한 이들을 통하여 필요한 것을 공급하게 하시며 사역자들은 또한 이들을 통하여 필요한 것을 공급받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라는 사실이다. 

사도는 본문에서 "너희가 한 번, 두 번 보내었다"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한 번 자선을 베푼 것으로 자기의 할 바를 다 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또 다시 자선을 베풀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는 사실을 대단히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빌립보 교인들은 한번 뿐 아니라. 두 번씩 그에게 쓸 것을 공급하였다. 그들이 그가 궁핍한 때에 종종 그를 안심하게 하고 새 힘을 부여해 주었다. 그는 감사해서 뿐만 아니라.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 그들의 이전에 베푼 친절에 대하여 본문에서 언급하였다.

Ⅱ. 그는 최근에 그들의 그에 대한 무성의에 대하여 이해하는 입장을 취한다. 

얼마동안 그들은 그를 문안하지도 않았고, 또는 그에게 선물을 보내지도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제 다시 너희가 나를 염려하던 것이 싹이 났다"(10절)고 그는 말한다. 이것은 마치 겨울 내내 정말로 죽은 것 같았던 나무에서 봄에 싹이 나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이제 바울은 그의 위대한 스승이신 주님의 모본을 따라 그들의 태만에 대하여 그들을 나무라는 대신에 그는 그들을 관대하게 용납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10절)고 말하고 있다. 

정말 그들이 마음은 있었는데 기회가 없어서 그에게 안부를 전하지 못했을까? 아마 그들은 그에게 사자를 파견할 수도 있었을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사도는 그들을 좋게 생각하여 만일 정당한 기회가 주어졌다면 그들이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바울의 태도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친구들에게 행하는 것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 사람들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친구가 그들에게 부주의했다고 하여도 그것을 이해하기 보다는 분을 품는 것이 상례가 아니던가?  그러나 바울은 사실 그들의 부주의가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었음에도 그것을 넓게 관용하였던 것이다.

Ⅲ. 그는 그들의 현재의 관대함에 대하여 칭찬한다. 그러므로 그는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 하였도다"(14절)라고 말한다. 

곤경에 처한 선한 사역자를 원조하고 돕는 것을 선한 일이다. 본문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동정이 어떤 것인지를 보게 된다. 그것은 곤경에 처한 우리의 친구에게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을 돕는 것이다. 

그들은 사도가 고난 가운데서도 위로를 받게 하기 위하여 "그의 고난에 참여하였다." 야고보 선생은 "덥게 하라, 베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약 2:16)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지 아니하였다. 

사도는 그들의 자기에 대한 관심으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였다(10절). 왜냐하면 그것은 그에 대한 그들의 사랑을 증명해 주었고 또한 그들 가운데서 그의 사역의 성공을 증명해 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호의의 열매가 사도를 향하여 풍성할 때 그의 사역의 열매 또한 그들 가운데 풍성했던 것이 입증되는 것이다.

Ⅳ. 그는 그들이 그에게 선물을 보낸 사실에 대하여 너무 많이 언급한 점들 그들 가운데 누가 혹 악용하지나 않을까 하여 이러한 계기가 될 동기를 제거해 버린다(11절). 그러므로 그는 그들의 호의를 그가 언급한 것이 불만과 불신으로부터 혹은 세상에 대한 욕심과 사랑(12절)에서 나오지 않았음을 기술한다.

1. 그의 말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불만이나 불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궁핍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11절)고 말한다. 즉 그가 이 말을 한 것은 그가 궁핍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또는 궁핍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는 비록 궁핍하게 지내왔으나 그는 그가 가진 적은 것으로 만족하였고  그리고 그 적은 것이 그를 만족케 했다. 또한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궁핍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고 그 하나님이 그에게 매일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리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 문제 대하여서도 염려하지 않았다. 이같이 그는 궁핍 때문에 그들에게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 이유를 그는 "내가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기 때문이다"(11절)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본문에서 바울이 자기가 배울 것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의 이러한 것에의 배움은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문하에서 배운 것이었다. 그는 자족하기를 배웠다. 그는 자주 매임을 받았고 궁핍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가운데서 그는 자족하기를 배웠다. 즉 자기 마음을 상황에 따라 적응시키고 그 환경을 최선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그는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한 줄도 안다"(12절)고 말할 수 있었다. 

어떤 삶의 정황에도 자신을 적응시키고 변화무쌍한 인생의 행로 속에서도 환경 같은 마음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은 특별한 은총의 결과라고 하겠다.

(1) 우리는 고난의 여건 속에서도 자신을 적응시킬 수 있어야 한다. 

즉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배고픔에 처할 줄도 알며 궁핍을 극복할 줄도 알아 그것으로 인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며 그로 인해 하나님 안에서 주어지는 위로를 상실하지도 않으며 그의 섭리를 불시하지도 않으며 우리의 필요한 것을 채우기 위하여 편법을 쓰지도 않을 수 있어야 한다.

(2) 또한 우리는 풍부한 데 처할 줄도 알아야 한다. 

즉 바르게 풍부하게 되는 법도 알고 배부르게 되는 법도 알아 이것 때문에 교만하거나 자만하거나 사치스러워지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앞의 것 만큼 힘든 과제다. 왜냐하면 배부름과 부요의 유혹도 상해와 궁핍의 유혹보다 결코 못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는 그것을 배울 것인가? 

이에 대하여 사도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3절)고 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힘을 필요로 한다. 이 힘만이 우리로 순수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들 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의무까지도 행할 수 있게 한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족하도록 우리를 가르치는 그의 힘을 필요로 한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 안다"는 본문은 얼핏보면 사도가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의 힘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같이 보인다. 그는 그러나 그의 의도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본문에서 모든 영광을 그리스도에게 돌린다. 그의 의도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비천에 처할 줄 알고 풍부에 처할 줄 안다고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에 근거해서인가?  내가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은 내 자신의 힘으로는 아니며 다만,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은 내 자신의 힘으로는 아니며 다만, 내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만이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 안에서와 그의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기를" 바라야 할 것이며(엡 6:10),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할 수 있기를"(딤후 2:1) 바라야 하겠고 또한 우리는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 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하게 되기를"(엡 3:16) 바라야 하겠다. 

‘엔 토 엔뒤나문티 메 크티스토’-즉 능력 주시는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만 말씀으로써 현재 분사로 표시되어 있다. 그 뜻은 그의 능력 주심이 한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이요 또한 지속적으로 역사함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말은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가 나를 현재도 강건하게 하시며 그리고 계속해서 나를 강건하게 하신다. 그의 끊임없고 늘 새로 주어지는 힘에 의해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나의 모든 영적 힘에 있어서 전적으로 그를 의지한다."

2. 그의 말은 세상적인 부에 대한 욕심이나 사랑에서부터 온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다(17절). 즉 내가 너희의 호의를 기쁨으로 받은 그것이 나의 즐거움을 더하기 때문이 아니라 너희의 유익을 더하기 때문이라." 

그는 자신을 위하여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었고 그들을 위하여서는 그리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나는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한다(17절). 즉 너희가 너희의 세상 재물들을 그렇게 선용함으로 너희가 기쁨으로 이 일을 말할 수 있기를 바라서이다. 

내가 이를 말하는 것은 너희에게 보다 많은 것을 끌어 내려는 계획으로 함이 아니고 너희로 이러한 유익한 일을 계속하도록 격려함으로 이후 영화로운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하다(18절). 풍족하니 그 이상 무엇을 바랄 것이 있겠는가?  나는 단순히 너희의 선물을 받아내기 위해 선물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모든 것을 가졌고 또 풍부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그들은 그에게 작은 성의를 표시하였으나 그러나 그는 더 많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는 현재의 여유있는 삶을 원하지도 않고 미래에 쓸 것이 준비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러기에 그는 "내게도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았노라"(18절)고 말한다. 

선한 자에게는 이 세상에서도 살기에 충분한 만큼 주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들은 세상에서 겨우 사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세상에서 넉넉한 것이 공급될 것이다. 탐욕적인 속인은 너무 많은 것을 갖고도 여전히 그 이상의 것을 갖기를 원한다. 그러나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비록 그가 적게 가졌다 할지라도 풍성한 것으로 여기고 산다.

Ⅴ. 사도는 하나님이 그에 대한 그들의 친절을 열납하셨고 그리고 보답하신다는 것을 확신있게 말한다.

1. 하나님께서 그것을 받으셨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을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다"(18절)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선물이 그들의 죄에 대한 대속의 제물이 되었다는 말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아무도 죄를 대속하지 못하며 그리스도만이 그리할 수 있으시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은 감사의 제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바울이 그의 궁핍에 대한 공급으로 기꺼이 받은 것 이상으로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받으셨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이 받은 은혜의 결과였기 때문이었다. "이 말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다"(히 13:16).

2. 하나님께서 이에 대하여 보상하실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19절)고 말하였다. 

그는 하늘 나라의 국고에서 이 계산서에 대하여 지불될 것처럼 말한다. 그리고 그들이 그에게 보여 준 호의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상하도록 맡긴다. "너희의 하나님으로 뿐만 아니라 나의 하나님으로서 그가 그것에 대해 보상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나에게 행하여질 것은 자신에게 행하여진 것으로 여기시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의 가난한 중에도 나의 쓸 것을 공급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의 부함을 따라 너희의 쓸 것을 공급하실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서 가능하여진다. 그를 통하여 우리는 선한 것을 행할 수 있는 은혜를 받으며 그리고 그를 통해 또한 우리는 그것에 대한 보상을 기대해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무슨 빚에 대하여 당연한 보상을 받을 것으로 기대한다는 것이 아니고, 오직 은혜로 보상되기를 바랄 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일을 하면 할수록 더욱 우리는 그에게 빚을 지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생활 속에서 우리가 해 드린 이상으로 보답을 받기 때문이다.

===========

ejpieikhv"(1933, 에피에이케스) [관용하는]온순한, 온화한, 순한, 온유한, 친절한, 참을성 있는, 관용하는....[[하나되어 계신 모든평강의 하나님께 온당한, 주안에서, 주앞에서 섬김/다스림의 근저]]오래참음/견딤-용서/용납-소통/이해/공감-친절/자비긍휼은혜/중보/축복-기도하고, 기다려줌/기대함

1. 고전 헬라어 문헌 

형용사 에피에이케스와 명사 에피에이케이아는 에이코스(알맞는, 어울리는, 적절한, 온당한)에서 유래하였거나 아니면 에이코(굴복하다, 양보하다)에서 유래하였을 것이며,호머 시대 이래로 '온당한 알맞는 생활방식'이라는 의미로, 투키디데스 이래로 '관용, 인내, 온유'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에피에이케스 및 그 어군의 단어들은 본래 제멋대로 방자한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균형 잡히고, 지성적이며 잘 어울리는 외모를 표현하는 데에 사용되는 말이었다. 후에 그것은 법률의 적용에 있어서 어떠한 희생이 있더라도 자기 자신의 공민권을 포함한 모든 공민권이 단호히 확립되어야 한다는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정의의 엄격성을 그 법률적 표현 및 제권리와 함께 융통성 있게 할 용의가 있는, 인정 있고 사려 깊은 태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게 되었다.

이 에피에이케스 단어군과 프라위스(prau?", 4239) 단어군의 개념, 이 개념은 모두 억제되지 않는 분노, 가혹함, 야수성 그리고 이기심과 반대된다. 이 개념은 고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 즉 모욕을 받고도 화를 내지 않는 현인, 재판에 임하여 인정 많은 재판관,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자비로운 왕 등이 지닌 성격의 특징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이 단어들은 이상적 통치자에 관한 묘사나 고위직에 있는 사람에 대한 찬사 속에 자주 등장한다.

헬라 및 헬라 철학에서 이 개념은 높은 가치를 지닌 사회적 미덕이자 이상을 표현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개념을 정열과 무감정의 양극단 사이에 있는 복된 중용의 덕이라고 생각하였다(F.Hauck/S.Schulz).

2. 70인역본의 용법 

70인역본에서 명사 에피에이케이아는 l0회 등장하며, 에피에이케스 및 그 형용사형은 6회 등장한다. 이 단어들은 세상 통치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자비심(삼상 12:22; 시 86:5; 지혜서 12:18)과 왕의 행동(마카베오이서 9:27), 선지자(왕하 6:3) 및 경건한 자(지혜서 2:19)의 행동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신약성경에서 에피에이케스는 5회 나오며, 에피에이케이아는 2회 나온다. 

약 3:17에서 에피에이케스는 위로부터 난 지혜의 목록에 나타난다: 

에피에이케스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함께 살 때 지켜야 할 규칙을 표현한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빌 4:5),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딛 3:2). 

딤전 3:3에서는 특히 감독들의 자질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감독은…오직 관용하며". 

벧전 2:18에서 에피에이케스는 종들의 주인에게 적용되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고후 1O:1에서 바울은 프라위테스와 에피에이케이아를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동안 사람에게 보여주셨던 태도의 특징으로 언급하면서, 그것을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교회에 제시한다: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에피에이케이아는 기독교인에게 요구되는 태도를 표현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 행 24:4에서 에피에이케이아는 총독 벨릭스 앞에서 유대인 변사 더둘로가 바울을 고소하는 연설을 할 때 사용되었다: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참조: F.Hauck/S.Schulz; W.Bauder).

→ prau?", 4239 프라위스.  → prau?th", 4240 프라위테스. 

------------------------------------

빌 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딤전 3:3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딛 3:2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약 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벧전 2: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관서 =관용(마음열어 너그러이 받아줌/품어줌) + 용서(마음을 같이 하여 처지를 이해하고 빚진 것을 사해줌 +받아줌)--------

@@용서 : 하나님이 그러하심처럼 타인이 내게 저지른 잘못을 끝까지 따져서 그대로 갚지 않고 풀어줌...(여기에는 상대방의 자각-회개/잘못했음의 인정이 전제됨....즉, 조건적인 받아줌.....사람사이의 잘못이라 해고 하나님뿐만 아니라 피해를 입힌 자로 그사람에게 나아가 직접 용서를 구하고 합당하게 보상하는 것이 화해의 선결요건으로서 반드시 필요함.... 이 의무/빚을 사면해 주는 것이 용서임.....믿는 이는 주안에서 주께 아뢰고 믿음으로 미리 용서하는 것이 또한 본인의 자유함과 상대방의 구원을 위해 중요!!). 

@@관용 : 하나님이 그러하심처럼 마음을 열어 모든이들의 연약함을(비록 관점과 생각이 달라도) 헤아려 이해해 주고 주의 사랑으로 너그러이 수용/용납함(제한없이 이해하고 받아 주고 주께 맡겨 일임함...받아주는 당사자는 상대방의 문제점을 진리안에서 분명히 자각하고 있어야 함.. 상대방은 아직은 다 이해하지 못하고 받지 못하더라도 나를 받아주시고 사해주신 주를 바라봄으로써 기다려줌.. )

---------

prau?th"(4240, 프라위테스) [[온유]], 친절, 겸손, 동정심.

1. 일반 헬라어의 용법 

프라위테스는 프라위스(prau?", 4239)에서 파생되어 투키디데스(Thucydides) 시대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온유, 온화, 친절'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프라위테스는 70인역본에서 11회 나오며, 히브리어 아나와 안와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에 3:13에서 아하수에로 왕은 자기가 온유하게 처신하기로 작정했다고 한다. 에 5:1에서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온유하게 변화시켰다고 한다. 시 45:4에서 왕과 관련하여 나온다: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시 90:10; 시132:1에는 '고생'이란 의미로 나타난다. 집회서 1:17; 4:8; 10:28에서 '유순, 온유, 겸손'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프라위테스는 신약성경에서 7회 나온다. 신약성경이 프라위테스를 주장할 때, 그것은 순전히 인간의 의지에 따라 좌우되는 태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구원의 징표이다. 즉 그것은 '부름'(엡 4:2)과 선택(골 3:12)의 표식이며 성령의 역사(갈 5:23)이다. 그것은 헬라적 의미에서의 미덕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주어진 생활과 행위의 가능성이다. 그것은 인간의 한 기질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연결되고 그의 형상과 일치될 때에 생겨나는 것이다.

고후 1O:1에서 바울은 프라위테스와 에피에이케이아(ejpieivkeia, 1932)를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동안 사람에게 보여주셨던 태도의 특징으로 언급하면서, 그것을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교회에 제시한다: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프라위테스는 또한 죄를 범한 기독교인을 처리하는 일에 있어서 가져야할 태도에 관해서 언급된다(고전 4:21; 갈 6:1; 딤후 2:25).

약 1:20에서 프라위테스는 올게(ojrghv, 3709:성내는 것)와 대조되어 있으며, 선생에 대하여 분노를 터뜨리는 것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려는 온유하고 겸손한 자세를 가리킨다. 온유는 신적 지혜로 영감된 참된 의인의 표식이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약 3:13). 여기서 온유는 의인의 전 행위에서 나타나며, "독한 시기와 다툼"과 반대된다(약 3:14; 참조: 집회서 3:17; 벧전 3:4).

벧전 3:15에서 당국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의 이유에 대하여 물었을 때 친절하게 온유 겸손히 응해야 한다고 한다. 비록 그들의 부당한 대우가  분개와 반항하도록 자극할지라도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적대와 박해의 상황과 관련하여 언급한 것이다.(참조: F.Hauck/S.Schulz; W.Bauder).→ prau?", 4239b 프라위스 

------------------

prau?"(4239, 프라위스) [[온유한]], 친절한, 겸손한, 동정심(인정) 많은.

1. 고전 헬라어 문헌 

프라위스는 호머 시대로부터 사용된 단어로서 어원상으로는 고트어의 프뤼온(사랑하다), 프리온드스(친구) 등과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온화한, 온유한, 즐거운'을 의미한다.

프라위스 단어군에서 나온 단어들은

(a)   사물에 관해서는 '진정시키는, 온화한' (예: 진정제, 온화한 말),

(b)   동물에 관해서는 '길들인' 또는 '유순한'(길들인 유순한 짐승), 짐승을 길들이거나 짐승이 화나거나 흥분할 때 달래거나 진정(안정)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c)   사람에 관해서는 분노, 난폭, 매정, 잔인하지 않고 '온화한, 친절한, 온유한', 그리고 '즐거운',

(d)   행동이나 감정 혹은 징계와 같은 것들의 '친밀한, 친절한, 관대한'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들은 적에게서는 인정 사정 없는 가혹한 행위가 예상되는 것과 반대로 친구에게서 예상되는 어떤 성질을 가리킨다.

이 파라위스 단어군과 에피에이케스(ejpieikhv", 1933) 단어군의 개념, 이 개념은 모두 억제되지 않는 분노, 가혹함, 야수성 그리고 이기심과 반대된다. 이 개념은 고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 즉 모욕을 받고도 화를 내지 않는 현인, 재판에 임하여 인정 많은 재판관,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자비로운 왕 등이 지닌 성격의 특징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이 단어들은 이상적 통치자에 관한 묘사나 고위직에 있는 사람에 대한 찬사 속에 자주 등장한다.

헬라 및 헬라 철학에서 이 개념은 높은 가치를 지닌 사회적 미덕이자 이상을 표현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개념을 정열과 무감정의 양극단 사이에 있는 복된 중용의 덕이라고 생각하였다 (F.Hauck/S.Schulz).

2. 70인역본의 용법 

프라위스는 70인역본에서 모두 l9회 사용되었으며, 그 중 3회는 히브리어 아니(억압받는, 가난한, 괴로움 당하는, 비천한, 낮은, 겸손한)의 역어와 아나우(가난한, 겸손한, 온유한)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에는 아니가 21회, 아나우가 65회 나오는데, 프토코스, 페네스, 타페이노스, 그리고 프라위스 어군 등으로 번역하였다는 사실은 이 히브리 단어들이 광범위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어서 나누어 번역할 특별한 신학적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가난한 자란 토지 재산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그들은 부당하게 억압당하고, 권리를 빼앗기고, 하나님께서 물려주신 풍성한 유업을 수탈당했다. 그들의 가난은 상속권 박탈과 불법적인 손에 의한 것이지 그 사람 자신의 잘못에 의하여 비롯된 것이 아님이 이 단어(아니)가 재산이 아니라 폭력과 대조되는 뜻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나타난다. 그래서 그들은 불법적인 착취의 희생물인 경우가 많았다(욥 24:4; 참조: 사 32:7; 시 37:14). 일반적으로 아니는 무방비 상태인 사람, 권리가 없는 사람, 억눌린 사람, 속임을 당하고 착취당하고 비천한 사람을 의미한다(참조:시편 9편과 10편).

그렇지만 여호와께서는 아니의 편이시다. 여호와, 이스라엘의 심판자께서 그들을 보호하시며, 그들은 오직 이 사실을 신뢰하며, 이에 소망을 두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권리 없는 자들의 하나님인 까닭에, 동료 인간들에게서는 자비를 얻지 못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위로하시며 구원하신다(시 l49:4; 시34:2; 욥 36:15; 참조: 사 29:19). 마침내는 지금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것을 뒤엎으실 것이다(사 26:6). 그들은 땅을 차지하고 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한다(시37:11). 여호와는 그들을 붙으시고(시 147:6). 공의로 지도하고 그 도를 가르치신다(시 25:9).

민 12:3에 보면,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였다". 온유는 지도자의 중요한 자격 중 하나이다. 집회서 3:8에서 "훌륭하게 되면 될수록 더욱 더 겸손하라 주의 은총을 받으리라" 하였고, 집회서 10:14 에서 "주님께서는 군주들을 그 권좌에서 몰아내시고 그 자리에 온유한 사람들을 앉히신다". 욜 3:11에서는 프라위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없다. 선지자는 성전(聖戰)을 위해 부르고 있다. 평화의 도구가 전쟁의 무기로 바뀌워져야 하고 온유한 자가 용사들이 되어야 한다. 온유한자가 땅을 차지하고 다스린다.

앞에 살펴본 바와 같이 아니 및 특히 아나우는 사회적으로 억압당하고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이라는 의미로부터 깊은 곤궁과 곤란속에서 겸손하게 여호와의 도움만을 바라보는 사람 또는 그렇게 함으로써 도움을 얻은 사람들을 지칭하고 있다(습 3:12; 참조: 습 2:3; 사 41:17; 49:13; 66:2).

쿰란 문서에서 이 단어들은 일반적으로 공동체의 구성원을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쿰란에 있던 가난한 자들의 공동체는 사유재산의 포기를 질서의 한 규칙으로 정했으며, 종말론적인 구원을 기대하는, 조직이 잘된 공동체 생활을 이룩하였다(ptwcov", 4434 프토코스).

슥 9:9에서 아니/프라위스는 메시야에게 주어진 영광의 칭호로 사용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사회적으로 보잘것 없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동물을 타셨을 때 그 길은 가난한 자와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에게로 향하셨다(역사의 초기에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은 나귀를 타고 다녔지만(삿 5:10; 삿 10:4; 삿 12:14; 삼하 16:2), 후에는 말이 권력가진 자들에게 걸맞는 탈것이 되었다(그러나 슥 9:10에 나오는 병마에 대한 저주를 주목하라, 사 2:7; 사 31:1을 참조). 나귀는 평화를 위해 오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탈것이었다(J.G.Baldwin).

아니의 의미는 슥 9:9을 비롯한 수많은 구절에서 변화되어 있다. 즉 70인역본은 이 단어를 프라위스로 번역함으로써 보다 수동적인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단어를 능동적이며 윤리적 의미를 가진 헬라어 단어로 바꾸어 놓았다. 문자 그대로 결핍을 의미하는 단어가 온유나 겸손 따위의 찬양할만한 미덕으로 변화되었다. 그것은 그 이상 그 단어의 비밀을 헬라어가 보다 분명하게 나타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프라위스는 신약성경에서 마태복음에 3회, 베드로전서에 한번 나온다.

(a)   프라위스는 마 5:5에 나오는 세번째 축복, 즉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는 축복 선언에 나타난다. 일반 헬라어의 용법에 따르면, 프라위스 곧 온유한 자는 본능과 충동, 격동 등 감정을 제어할 수 있는 훈련된 인격자이다. 이 단어의 통상적 용법은 인간에 대한 태도, 특히 자신을 평가 절하하고 부당하게 대우하며 해롭게 하는 자들에 대한 마음의 성향 및 행동을 묘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온유의 그리스도교적 개념은 이러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훨씬 더 깊은 것이다.

신약성경 히브리 역본에서 마 5:3에 "가난한 자"와 여기에 "온유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다같이 아니이다. 이것은 "온유한 자"는 "가난한 자"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아니는 '가난한, 억압받는, 괴로움 당하는, 비천한, 낮은, 겸손한'을 뜻하는데, 제 1복에서는 자신의 문제인 "가난한"이란 의미가 더 강조되어 있고, 여기서는 타자(他者)와 관계에서 자신의 문제인 '억압받는, 괴로움을 당하는, 겸손한'이란 의미가 더 강조되어 있다. 따라서 온유는 나 자신에 대한 자세인 동시에 타자, 곧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관계에서 나의 자세의 표현이다.

그리고 동사 클레로노메오(klhronomevw, 2816)는 70인역본의 신 4:1; 신 16:20 및 시 68:36에서 이스라엘의 땅을 소유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 구절에서 의미하는 것은 새로운 약속의 땅을 소유하는 것, 또는 상속받는 것이다. 신명기 기자에게 복종과 의로움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조건인 것처럼, 축복선언에 나오는 가르침에 겸손히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새로운 땅으로 들어가는 조건이다. 이 구절은 시 37:11의 그것과 같은 주제를 말하고 있다. 이 시편의 주제는 축복 선언 전체의 주제와 매우 유사하며, 다위비드 힐은 쿰란 종단은 이 시편을 그들의 메시야적 공동체의 확립을 통하여 성취될 과정에 관한 예언으로 채택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한다(4 QpPs 37; 참조: Op.cit , 112).

이 축복선언은 지금 억눌리고 멸시 당하며, 마치 가나안 정복 이전의 이스라엘처럼, 자기 것이라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 장래에 하나님의 땅의 통치의 상속인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동시에 그것은 예수님 자신에 관한 암시적 언급이기도 하다.

벧전 3:4에서 프라위스는 기독교 사랑의 구체적 표현인 미덕의 목록에 나온다.

(b)   프라위스는 마 11:29; 마 21:5에서 예수님과 관련하여 나타난다. 온유는 그리스도의 통치의 표시이다. 정치적 메시야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통치를 가져오기 위하여 힘을 사용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따라서 그는 사람들이 메시야 왕으로 예측하지 않는 형태로 자기를 모든 기대에서 어긋나게 처신하셨다. 즉 투구와 갑옷을 입고 군마를 타고 무장하여 무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지상에서의 주님의 사역은 힘이나 전쟁이라는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구원을 가져오는 왕의 사역이었다(슥 9:9). 하지만 마 11:29 은 그 배후에 셈적 사고를 가지고 있으므로(참조:사 42:2 이하; 사 53:1 이하;슥 9:9 ), 이 구절에 프라위스는 히브리적 의미에서의 아니를 암시하고 있으며, 따라서 메시야의 인간적인 빈궁함을 강조한다. 루터는 메시야를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방도도 없고 궁극적으로는 갖가지 불의에 수난을 당했던 '거지-왕'(Begger-King)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로 통치하고 통치 방법은 온유이다. (참조: F.Hauck/S.Schulz; W.Bauder). 

========

tapeinov"(5011, 타페이노스) 낮은, 비천한 Iowly, 겸손한 humble.

1. 고전 헬라어 문헌 

기본어 타페이노스는 핀다르(Pindar, B.C 55세기)의 작품에서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 단어는 본래는 '낮게 놓는 것'이라는 의미였으며,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비유적 의미가 발전되었다.

(a)  이 단어는 '낮은, 천한, 하찮은, 중요하지 않은, 약한, 가난한'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도시, 나라, 국가, 정치가, 군사력, 별, 강, 상품, 영향력, 인간의 정신과 용기 등에 대해 사용되었다.

(b)  이 단어는 정신적이거나 윤리적인 상태에 관해서 사용될 때는 '천한, 비굴한, 노예의'를 의미한다. 보통 아첨이나 굴종에 대해 경멸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가문이 좋지 않은 태생, 가난한 낮은 신분,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것, 사회적 신분에 기인한 신복의 아부성 등에 대해 사용되었다.

(c)  이 단어는 어려운 상황이나 비천한 상태, 또는 탄원자들과 같이 스스로 비하하는 상태를 표현한다.

(d)  이 단어는 '겸손한, 순종하는, 유순한'을 의미하며, 이러한 행위는 훌륭한 군대나 가족에 적용될 수 있다. 이런 복종은 단순한 가장(假裝)이나 비굴하게 굴종하는 자기 포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e)  이 단어는 종교적 문맥에서는 앞의 윤리적인 의미에서와 같이 '비천한' 을 의미하지 않고 '겸손한, 순종하는'을 의미하며, '신들의 옳은 법에 자신의 행위를 일치 시키는것' 등을 의미한다. 이 모든 용법에 있어서 이 단어의 본래의  실질적 의미, 즉 위에 있는 것, 높은 것에 대하여 '아래 있는, 낮은'이라는 의미의 흔적이 전부 남아있다.

2. 70인역본의 용법 

타페이노스는 70인역본에서 약 70회 나오며, 12개 히브리어형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나타난다.

(a)  이 단어는 '낮은, 평평한, 아래의'를 의미한다(수 11:16; 삿 1:15; 시 123:6이하; 시 137:6; 레 13:3-26; 레 14:37).

(b)  이 단어는 '굴복한, 작은, 빈약한, 하찮은, 비열한, 천한'을 의미한다(집회서 25:23; 29:4; 레 27:8; 겔 29:14 이하; 단 3:37; 삿 6:15).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작거나, 보잘 것 없는 자를 택하신다(삿 6:15; 삼상 18:23). 하나님은 타페이노이(복수)의 하나님이시다(유딧 9:11). 타페이노이는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자이다(습 2:3). 하나님께서는 자기 이름을 구하는 자들을 이스라엘 중에 남겨 두신다(습 5:12).

(c)  이 단어는 '굴복당한, 억압받는, 압제받는'을 의미한다. 외부 세력이나(유딧 16:11; 마카베오일서 14:14) 부한 자들에 의해(암 2:7; 사 58:4) 이런 압제를 받는다.

(d)  그러나 하나님은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억압받는 자들을 높이신다(시 18:27; 54:18). 낮은 자들을 하감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속성이다(시 138:6).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멸시치 않으신다(시 1O2:l7). 메시야는 온유한 자들을 위해 공의를 세우시고 억압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심판을 선언하신다(사 11:4). 여호와께서는 시온을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 피난처를 삼으셨다(사 14:32; 참조: 25:4). 사 49:13에서도 이와 유사한 말씀을 하신다. 평강에 대한 언약은 낮은 자에 대하여는 불변적이다(사 54:10,11). 하나님은 겸손하고 심령에 통회하는 자를 돌보신다(사 66:2).

3. 신약성경의 용법 

타페이노스는 신약성경에서 8회 나오며, '비천한, 겸손한'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a)  눅 1:52은 눅 3:5에 대한 결론이며,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역사에 대해 언급한다: " 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b)  이 약속과 교훈과 경고의 근거는 예수님의 삶의 방식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삶의 방식은 마 11:28이하에 나오는 초대의 말씀에서 해석되어 있는 것과 같다. 주님은 "온유하고(프라위스) 마음이 겸손하다(타페이노스 테 카르디아)". 이 두 개의 표현은 대등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순종하셨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셨으며, 하나님께 헌신하셨다는 사실을, 동시에 주님은 사람에게도 겸손하셔서 그들의 종이자 조력자로 되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눅 22:27; 막 10:45; 마 20:28). 이것이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이 주님을 따를 때 그들에게 종말론적 안식을 주신 까닭이다. 이것은 율법교사의 윤리적 모범을 따르라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는 집회서 51:23-30과는 대조적이다.(참조: A. Schlater).

(c)  고후 10:1에서 바울은 그가 적대자들을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이라고 호소할 때 이는 적대자들의 모욕적인 말을 인용하고 있다. 사도의 이 호소 배후에는 그가 고린도 교인들과 '마주 대하여 있을 때'에는 "겸비"(비열하거나 빈약한 것을 뜻할 수 있음)하지만 떠나 있을 때에는 그 방법에 있어서 담대하다는 비난이 스며 있다. 그의 대적자들은 평소의 방법대로 진리를 비진리 - 바울의 관용을 연약함으로 해석함 - 로 왜곡했다(참조: F.G.Carver).

(d)  겸손에 대한 바울의 권면도 역시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명백한 실제 모습에 근거한다. 롬 12:16(참조: 1절)은 자만과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는 것을 경고한다. 이 구절은 토이스 타페이노이스를 중성으로 보느냐 남성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너희 자신을 비천한 일에 바쳐라'(RSV의 난외 주)로 번역할 수도 있고, '낮은 자와 함께 행하라'라고 번역할 수 있다. 필립스(Phillps)는 '거만히 굴지 말고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에게 진정한 관심을 가져라'고 의역하였다.

(e)  야고보서와 베드로전서에 나오는 권면들을 겸손에 대한 구약성경과 바울서신의 의미에 아무 것도 새로운 뜻을 추가하지 않는다. 약 1:9 이하는 부자와 대조하여 사회적으로 낮고 가난한 자를 언급한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낮은 형제"는 가난에 찌든 형제이지만 단순히 가난한 자를 가리키지 않는다. 가난한 그리스도인은 비참한 빈곤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다. 그는 그가 겪는 궁핍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을 물질적인 부족에서 들어 올리는 참 기쁨의 근원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높임은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갖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보실 때 인간의 가치 있는 인식이라 하시기에 적합한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그리스도께 속했음을 알고 인생의 영적인 가치의 중요성을 헤아리게 된다면 그는 만족하며 기뻐하는 자가 되는데 많은 물질적 편의가 필요치 않을 것이다(빌 4:10이하).

한편 부한 형제가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면 이 절들은 물질적인 부요를 의지하는 개종자들에 대해 경고하는 동시에 다음 사실을 주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부한 형제가 누릴 진정한 기쁨의 근원은 그가 낮아진다는데 있다. 이러한 겸비의 과정은 부한 자가 그리스도를 따를 때 겪는 가치의 재정립이다(A.F.Harper의 야고보서 주석 참조).

(f)  약 4:6b와 그 병행구절 벧전 5:50는 잠 3:34(LXX)을 인용하는데, 그것은 겸손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약속하고 있다. 이 두 구절은 모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끌어낸다. "주 앞에서 낮추라"(약 4:10과 그 병행구절인 벧전 5:6; 참조 : 창 16:9; 집회서 2:17). 이 두 서신들이 서로 문학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증거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러한 유사성은 '기독교의 일상적인 권면'(참조:M.Dibelius)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g)  교회의 "겸손" 개념은 점차로 종말론적 기대와 그의 일치하는 삶의 태도를 가리키는 말로부터 참회와 금식에로의 경향과 그 구체적인 행동을 묘사하는 말로 변화되었다. 이런 현상은 특히 클레멘스일서와 헤르마스(Hermas) 문서에서 두드러지게 볼 수 있다.

(참조: H.H.Esser; W.Grundmann). → tapeinovw, 5013 타페이노오 

----------------

tapeinofrosuvnh(5012, 타페이노프로쉬네) 마음의  낮음 lowliness of mind, 겸손 humility.

tapeinovfrwn 타페이노프론  겸손한 마음을 가진

1. 일반 헬라어 및 70인역본 

명사 타페이노프로쉬네는 형용사 타페이노프론에서 유래했으며, 이 명사와 형용사는 1세기와 2세기의 세속적 헬라어 문학작품에 나타나며(Josephus, Plutark, Epictetus), '비열하게 생각하는 것, 나쁘게 생각하는 것, 잘못 마음먹는 것, 마음이 약한 것, 비굴한 마음을 가지는 것' 등, 품위를 떨어뜨리는 의미로 언제나 사용되었다. 그러나 70인역본과 신약성경은 긍정적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70인역본에서 잠 29:23에 형용사 타페이노프론이 단 한번 사용되었는데 좋은 의미로 심령이 '겸손한' 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2. 신약성경의 용법 

신약성경에서 형용사 타페이노프론이 1회, 명사 타페이노프로쉬네가 7회 사용되었으며, '마음을 낮추는 것, 다른 사람의 가치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 겸손'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a)  형용사 타페이노프론은 벧전 3:8에 한번만 나온다: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b)  행 20:19에서 사도로서의 자신의 일에 대한 바울의 생각을,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이라는 말로써 충실히 전해주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분쟁(행 20:20)과 부도덕(행 20:2lc 이하)에서 드러난 자신의 실패를 통하여 그를 겸손하게 하심 속에서, 그리고 분쟁과 마음의 두려움(참조: 고후 7:5 이하; 사 49:13)으로 낮추어진 자들을 안위하심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인식한다. 사역을 하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어려움들 속에서 바울은 오실 주님이 우리의 낮은 몸을 변화시켜 주님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만드시리라는 소망을 의지하였다.(참조: 빌 3:21).

(c)  겸손에 대한 바울의 권면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모범에 근거한다. 엡 4:2(1절 참조)과 골 3:12(l절 참조)은 교회를 하나되게 하고 결속시키도록 섬길 용의를 가지라고 분부한다. 전자에서 "겸손"으로 행하라고 권한다. 후자에서는 "겸손…으로 옷입으라"고 권한다.

겸손은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그리고 그로 하여금 자신을 비워 종이 되게 한 겸손한 마음이다. 그러므로 겸손은 연합을 이루는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모든 불화의 뒤에는 교만이 숨어있는 반면에, 조화를 이루는 가장 귀중한 한 가지 비결은 바로 겸손이다. 이 사실을 경험을 통하여 증명하기란 어렵지 않다. 우리가 쉽게 본능적으로 좋아하여 사이 좋게 지낼 수 있는 사람들이란, 우리가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존경을 우리에게 돌리는 사람들이다. 반면에 우리가 쉽게 본능적으로 싫어하게 되는 사람들이란 바로 우리를 하찮은 존재로 취급하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허영은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의 주된 요소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존경하려고 억지로 무리하게 애쓰는 대신에(이것은 교만이다), 본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본질적인 가치를 인정하면서 그들의 인격을 존중해 준다면 이것이야말로 겸손이다. 이런 겸손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에서 한층 더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J.R.W.Sott).

벧전 5:5에는 겸손을 옷 입는다는 은유가 나온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여". 여기서 권면하는 것은 실제로 겸손한 마음으로 겸손을 실천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섬기며, 그들로부터 명령을 받고 그들의 요구에 맞게 행동함에 있어서 겸손을 나타내라는 것이다. 겸손히 섬기는 일을 옷 입는 것처럼 하라는 것이다.

빌 2:3에서는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한다. 이것은 겸손으로 가장한 비열한 굴종에 대한 호소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이 모르는 단점을 가지고 있으며, 또 내가 가지지 못한 장점을 다른 사람이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진정한 자아 평가를 할 것을 요망한 것이다(John A.Knight).

(d)  골 2:18에서 그는 일부러 겸손한 척하고, 천사를 숭배하며, 금욕주의를 따르는 적대자들에게 경고를 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는 매번 타페이노프로쉬네를 사용하고 있다.

 

(참조: H.H.Esser; W.Grundmann). 

-----------------

merimnavw(3309, 메림나오) 염려하다 care, 걱정하다 be anxious....스스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예상/상상해보며 미리 걱정/근심/괴로워 하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메림나오(Sophodes이래)는 메림나(mevrimna, 3308)에서 유래했으며, 영어의 'to care'와 같은 의미로 여러가지 의미를 지닌다. 이 단어는

(a)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을 돌보다' (자녀에 대해) '보호하다'.

(b)  어떤 것을 '염려하다'나 '주의 깊은 관심을 가지다'. (우 메림난)은 (어떤 것을) '모른다'라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어떤 것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미래의 동향과 관련된다.

(c)  따라서 어떤 것에 '집중하거나 열중하다, ~을 얻으려고 노력하다, 분투하다'를 의미하며, '야심'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d)  '어떤 것에 대한 걱정스러운 기대, 어떤 것을 직면하거나 당할 수 있는 일에 대하여 염려(걱정)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e)  '심사숙고하다, 탐문하다'.

(f)  '근심, 슬픔'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메림나오는 70인역본에서 9회 나오며, 6개의 히브리어를 번역한다. 메림나오는 '걱정(염려)하다'(삼하 7:10; 대상 17:9), '괴로워하다' (예: 죄 때문에: 시38:18)를 의미한다. 출 5:9에서 '관심을 가지다, ~에 관하여 생각하다'를 나타낸다.

잠 14:23에서는 '노력하는 것'을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메림나오는 신약성경에서 19회 나오며, 마태복음(7회), 누가복음(5회), 바울서신(고린도전서에서 5회, 빌립보서에서 2회) 사용되었다.

구약성경과 마찬가지로 신약성경도 염려를 주로 일상생활에서 직면하는 빈곤과 굶주림 및 기타 걱정거리들에 대한 인간의 자연적 반응으로서 생각한다. 인간은 무거운 짐이 가해지면 자신은 무기력하게 직면할 수 밖에 없는 그러한 운명에 처한 것으로 상상한다. 염려로써 인간은 자기가 당면한 것으로부터 최선을 다하여 자신을 보호하려고 노력한다.

(a)  마 6:25이하에서 메림나오는 미래에 관련된 '자기 염려'를 나타낸다. 문제는 걱정이나 염려가 무엇을 뜻하는가를 보여준다. 근심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그 이유는 생명은 음식보다 더 중하며(참조: 마 6:25), 미래는 우리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걱정함으로 그 키를 한 자도 더할 수 없다(마 6:27). 신장과 같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도 인간이 염려함으로 보장될 수 없을찐대 인간의 생명 그 자체는 더욱 그러하기 때문이다.

마 6:34에서 메림나오는 동일한 의미를 나타낸다. 이 말은 지혜 전승의 말에서 나온 것이며 유대인과 이방인에게도 이와 유사한 말이 있다(참조: Camms.ad). 내일의 염려를 오늘의 염려에 더하여 보태는 이러한 제자는 남용적인 방법으로 행동하고 있으며 오랫동안 그 사실을 인식해 온 세속적 지혜에 의해서도 부합되지 않는 부끄러운 일이다. 따라서 염려는 어리석은 일이며 하나님이 없는 자의 짓이다. 왜냐하면 걱정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에 의심을 표명하기 때문이다.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일시적으로 들에 피는 꽃도 아름다운 것으로 입히시는 하나님은 자기의 피조물인 인간을 위해서는 "더 많은 것을" 행하실 것이다(참조: 마 6:26; 마 6:30).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자녀들의 필요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이다(참조: 마 6:32). 이러한 사실을 잊어버리거나 믿음이 연약하여 근심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자는 이방인과 같이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참조: 마 6:32).

(b)  눅 10:41에서 메림나노는 어떤 일에 관하여 '염려하다'를 의미한다: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마리아와 마르다에 대한 누가복음의 설명(눅 10:38-눅 10:42)은 산상 설교에서와 똑같은 대조적 자세들을 보여주고 있다. 필요한 것들을 얻기 위하여 사람이 걱정하는 "많은 것"은 필요한 "한 가지" 일과 대조가 된다. 이러한 것은 생의 목적과 관계된 문제인 것이다. 마리아는 그러한 문제가 예수님의 교훈에서 대답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걱정은 하나님의 나라를 열심히 갈구하는 것과 대조가 된다. 한편 여기서 '마음을 쓴다'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c)  고전 7:32-고전 7:34에서 바울은 다른 사람들을 염려할 때 따르게 되는 위험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교회의 지체들에 걱정이 없기를 원했기 때문에 종말론적 입장의 견지에서 결혼하지 않은 자들에게 미래에 결혼하지 말 것을 권고하며(참조: 고전 7:29, 고전 7:31) 결혼한 자들에게는 호스 메(마치 … 않은 것처럼)라는 개념의 자유 속에서 주님을 위해 살도록 권유하고 있다(참조: 고전 7:29). 여기서 염려는 또한 어떤 것에 '열중(또는 몰두)하다', 어떤 것을 얻으려고 '노력하다'라는 의미로 확장된다.

마 6:31에서도 이런 '열중(또는 몰두)'이나 어떤 것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을 나타낸다.

(d)  빌 4:6에서 멜림나오는 '어떤 일을 직면하여 걱정'하는 것을 나타낸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근심, 걱정에서 해방되어야 할 이유는, 주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에(참조: 빌 4:5) 또한 감사로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원하는 바를 아뢸 수 있는 교회의 특권에 있다.

(e)  마 10:19에서 메림나오는 '숙고하다, 준비하다'를 의미한다: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병행구, 눅 12:11).

(f)  고전 12:25에서 '돌본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하나의 몸처럼 형성시키시어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던 것이다.

빌 2:20에서 디모데는 빌립보의 교회에 그들의 사정을 [생각하여] 돌볼 유일한 자로 언급되고 있다: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참조: J.H.Thayer; Walter Bauer; Bultmann; J.Goetzmann). 

---------------------------

마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 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마 6: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마 10:19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눅 10:41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눅 12:11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눅 12: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눅 12:25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눅 12:26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고전 7:32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되

고전 7:33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고전 7:34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

고전 12: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 보게 하셨으니]

빌 2:20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이라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

ajnevcw(430, 아네코) 용납하다....마음을 열어서 받다,  (적극적으로, 기쁨으로) 받아들이다.  허용하다. 참다/견디다.  참고 견뎌내다. 묵인하다. 참아/묵인해 주다 [(-을 바라거나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에 기꺼이) 용납하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아네코(Homer 이래)는 아나(ajnav, 303)와 에코(e[cw, 2192: 가지다, 쥐다)에서 유래했으며,

(a)  '들어올리다, 지지하다',

(b)  '버티다, 견디다, 참다',

(c)  '너그럽게 보아주다, 관대히 다루다, 묵인(시)하다'.

(d)  '자제하다'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아네코는 70인역본에서 16회 나오며, 어떤 행동이나 감정을 참거나 억제한다는 개념을 가진 히브리어 단어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창 45:1에서 사람에 관하여, 사 1:13; 사 42:14에서 하나님에 관하여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멸망에 대하여(사 64:11), 혹은 자비(사 42:14)로 말미암아 자제하신다. 

사 63:15에서 이 의미는 '관대히 다루다'라는 의미에 흡수되어 버린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아네코는 신약성경에서 1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마 17:17에서 아네코는 인격적 대상에 대한 예수님의 분노의 질문에서 '참는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다"(병행구절, 막 9:19; 눅 9:41). 

예수님께서 이 질문을 하신 것은 제자들이 간질병으로 고생하는 아이를 고치지 못한데서 비롯되었다. 예수님은 특별한 방법으로 제자들과 함께하셨고 삼년 동안 그들과 같이 행동하셨다. 그러나 여기에, 그 시대의 특징이었던 옛부터 있어온 불신앙이 다시금 예기치 않게 나타났으며, 이것 때문에 그들은 아이를 고치지 못했다.  예수님은 자기의 제자들로부터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할 권리가 있었다.

(b)  아네코는 비인격적 대상들에 대하여 '참거나 견디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① 고전 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② 살후 1:4,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c)  아네코는 교훈 및 권면에 관하여 특별히 '받는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전글 : 마5.소금이요빛
다음글 : 시18.에트_자아_ 보혈로 하나됨의 효력.하나됨의 믿음소망사랑-동행-의뢰/거함/누림..빌4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