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5.07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약1.경건의비밀, 은혜, 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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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1장   [337.내모든시함무거운짐을][336.환난과핍박중에도][342.너시험을당해][216.성자의귀한몸][393.오신실하신주][361.기도하는이시간]

===인사

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믿음과 지혜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낮은 형제, 부한 자

9.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10.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시험에 견디어 낸 자

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말씀을 들음과 행함

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3.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25.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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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약1:23-27.. .((.하시드-חסיד ....헤트-싸멬-요드-달렛, 여기에 바브(중)-타브.를 더하여 쓰기도 함..경건한자는 하시딤)) ...헤세드<은혜, 인자>의 싸멕-달렛 사이에 요드가 들어간 상태임//은혜..(( 헤세드.חֶסֶד ))... 싸멬-요드, 쌰멬은 "상세히 살펴 측정함"/요드는 "합당하게 목표 이루대로 친히 사역하심" --Q화 함에 장애가 되는 제반의 천연적 성분들(습관/습성-편리/주장-고정관념/거짓말--문화/사상/이념/관념) 제거-처리 위해, 먼저 생명-빛 말씀의 침투와 동시에 일어남.."  @@백성(히브리어 ‘암’(עָם)..'임'으로도 발음.)..아인-멤 사이에 멤(진리)가 더 들어가면 "결합=연결된 하나...아밈.עמים"을 의미...들어온바 Q 생명진리말씀이 주입-점유-확장-충만해짐 인해 Q 인해 주어진 것이 아닌것들의 근원 파악.제거하심으로써 Q에 이르기까지 변화시킨바 "하나님이 지극히 높이신자.JC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받으신 분...<룸-רוּם>" ---바로 그분  JC처럼 사는 이들이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음((이것이야말로 결코 실패하실수 없으신바!! [이를 위해 이 땅에 친히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JC를 그 자신의 하나님-구주로 영접하여 그분이 보내신바 그리스도의 영, 그 기름부음따라 하나로 살아가는, 참되게 믿는이들마다 그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에 이른 거듭난자 만드심 통해  이루시기를 갈망하신바, 육체를 가진자로서 진정한 엘로힘 판박이 된 하나님의 아들들 얻기를 원하셨을을 명심하자...] 이것이 진실로 Q이 바라시는 수준임 = 영어표현으로는  luxurys로 쓰는바<세상이 말하는 바 사치>아닌 극치라고 번역할 수 있지만, 너무 낮은 용어임 =..꼭 표현해 본다면!! "영생복락-극치무상의 상호내재-상호거처 샬롬/안식, 완전한 누림"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 룸...바브 대신에 요드가 쓰이기도 하고, 바브에도 점이 상,또는 중간에 찍히기도 함...이들을 가리켜, Q의 경건에 참예한 자들이라 칭함... === 이를 위해서는 생각자리에 바록 (영-혼-몸에 이르기까지 거듭난 존재로서, 내 존재의 몸이로되 내가 아니라 주님이 진정한 주인 되심을 적용함이 중요....꼬리 물고 사라지지않는 상념이 있다면 ... 주께서 그 근원 밝혀 주시도록 요청==> 주님으로부터 온 것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면!!, 그 상염에 대해 분명히 꾸짖고, 하나이신 주님께 몰려드림과 동시에 예수님 이를으로 꾸짖고 떠나보내라(....완전히 사라져 없어짐을 확인케 되리니...결코 포기하지말라) ...[삭개오의] 공허함의 근본원인은 채워져야 할바, Q이 아니라, Q 아닌것들에 빠져서 생각과 마음을 헤집어 놓을 때 야기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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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1 Amplified Bible

===Testing Your Faith

1 [a]James, a bond-servant of God and of the Lord Jesus Christ,  To the twelve [Hebrew] tribes [scattered abroad among the Gentiles] in the dispersion: Greetings (rejoice)!

2 Consider it nothing but joy, my [b]brothers and sisters, whenever you fall into various trials. 

3 Be assured that the testing of your faith [through experience] produces endurance [leading to spiritual maturity, and inner peace]. 

4 And let endurance have its perfect result and do a thorough work, so that you may be perfect and completely developed [in your faith], lacking in nothing.

5 If any of you lacks wisdom [to guide him through a decision or circumstance], he is to ask of [our benevolent] God, who gives to everyone generously and without rebuke or blame, and it will be given to him. 

6 But he must ask [for wisdom] in faith, without doubting [God’s willingness to help], for the one who doubts is like a billowing surge of the sea that is blown about and tossed by the wind. 

7 For such a person ought not to think or expect that he will receive anything [at all] from the Lord, 

8 being a double-minded man, unstable and restless in all his ways [in everything he thinks, feels, or decides].

9 Let the brother in humble circumstances glory in his high position [as a born-again believer, called to the true riches and to be an heir of God]; 

10 and the rich man is to glory in being humbled [by trials revealing human frailty, knowing true riches are found in the grace of God], for like the flower of the grass he will pass away. 

11 For the sun rises with a scorching wind and withers the grass; its flower falls off and [c]its beauty fades away; so too will the rich man, in the midst of his pursuits, fade away.

12 Blessed [happy, spiritually prosperous, favored by God] is the man who is steadfast under trial and perseveres when tempted; for when he has passed the test and been approved, he will receive the [victor’s] crown of life which the Lord has promised to those who love Him. 

13 Let no one say when he is tempted, “I am being tempted by God” [for temptation does not originate from God, but from our own flaws]; for God cannot be tempted by [what is] evil, and He Himself tempts no one. 

14 But each one is tempted when he is dragged away, enticed and baited [to commit sin] by his own [worldly] desire (lust, passion). 

15 Then when the illicit desire has conceived, it gives birth to sin; and when sin has run its course, it gives birth to death. 

16 Do not be misled, my beloved brothers and sisters. 

17 Every good thing given and every perfect gift is from above; it comes down from the Father of lights [the Creator and Sustainer of the heavens], in whom there is no variation [no rising or setting] or shadow [d]cast by His turning [for He is perfect and never changes]. 

18 It was of His own will that He gave us birth [as His children] by the word of truth, so that we would be a kind of first fruits of His creatures [a prime example of what He created to be set apart to Himself—sanctified, made holy for His divine purposes].

19 Understand this, my beloved brothers and sisters. Let everyone be quick to hear [be a careful, thoughtful listener], slow to speak [a speaker of carefully chosen words and], slow to anger [patient, reflective, forgiving]; 

20 for the [resentful, deep-seated] anger of man does not produce the righteousness of God [that standard of behavior which He requires from us]. 

21 So get rid of all uncleanness and [e]all that remains of wickedness, and with a humble spirit receive the word [of God] which is implanted [actually rooted in your heart], which is able to save your souls. 

22 But prove yourselves doers of the word [actively and continually obeying God’s precepts], and not merely listeners [who hear the word but fail to internalize its meaning], deluding yourselves [by unsound reasoning contrary to the truth]. 

23 For if anyone only listens to the word [f]without obeying it, he is like a man who looks very carefully at his natural face in a mirror; 

24 for once he has looked at himself and gone away, he immediately forgets [g]what he looked like. 

25 But he who looks carefully into the perfect law, the law of liberty, and faithfully abides by it, not having become a [careless] listener who forgets but [h]an active doer [who obeys], he will be blessed and favored by God in what he does [in his life of obedience].

26 If anyone thinks himself to be religious [scrupulously observant of the rituals of his faith], and does not control his tongue but deludes his own heart, this person’s religion is worthless (futile, barren). 

27 Pure and unblemished religion [as it is expressed in outward acts] in the sight of our God and Father is this: to visit and look after the fatherless and the widows in their distress, and to keep oneself uncontaminated by the [secular] world.

===Footnotes

James 1:1 James, the leader of the Jerusalem church, was the half brother of Jesus. He became a believer after the resurrection of Jesus and was later martyred for his faith.

James 1:2 Lit brethren.

James 1:11 Lit the beauty of its face perishes.

James 1:17 Lit of turning.

James 1:21 Lit surplus of.

James 1:23 Lit and is not a doer.

James 1:24 Lit what sort he was. 

James 1:25 Lit a doer of 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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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서론)

이 서신의 저자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요한의 형제)는 아니다. 여기 암시된 바와 같이 기독교가 디아스포라, 곧 흩어진 유대인들에게 많이 전파되기 전에 그는 이미 헤롯에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행 12장).  이 서신의 저자는 또다른 야고보로서 그는 열두제자 중 일인이요, 알패오의 아들, 그리스도께는 친 사촌이었고(마 10:3). 야고보는 “기둥”이라고 불렸다(갈 2:9). 이 서신의 가치는 의문의 여지가 없이 확실한 것이다. 야고보서는 공동 서신이라고 불린다. 

왜냐하면(몇몇 사람이 주장하듯이)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교회를 대상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일종의 회람 서신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들은 야고보서를 이그나투스와 바나바 폴리캅의 서신처럼 여기고 있는 바, 일반적으로 널리 두루 받아들여지지는 않았기에, 본 서신처럼 정경이 되지 못한 그룹을 구별하느라고 일반 또는 공인(公認) 서신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유세비우스는 이 서신이 “다른 공인된 서신들과 함께 교회에서 널리 읽혀졌음을” 우리에게 전해 준다. 

야고보서는 그의 경건 때문에  “의인”이라고 불려진다. 야고보는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권고한 믿음의 삶을 그대로 자신이 행한 모범적 인물이었다. 

야고보는 의와 절제와 봉사로 사람들의 최대의 존경의 대상이 되었고 그러므로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예루살렘 멸망의 원인 중의 하나로 “성 야고보를 예루살렘에서 죽였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하였다. 

이 사실을 서문에 기록하는 것은 이처럼 거룩하고 뛰어난 사람에 의해 씌어진 이 서신에 좀 더 관심들을 갖기를 바라서인 것이다. 

야고보서가 씌어진 연대는 불확실하다. 

한편, 야고보서를 쓴 의도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믿음과 예절에 있어서 타락해 가는 것을 꾸짖고 모든 경건의 실행을 파괴하는, 방종한 교훈들이 널리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또한 서신의 저자의 특별한 집필 의도는 유대인들에게 다가오는 심판의 임박성과 엄청남을 절실히 느끼도록 하고 또 모든 그리스도인들로 그들이 직면하는 박해와 환난 가운데서도 각자의 의무를 충실히 해 나갈 수 있도록 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 씌어진 진리들은 중요하며 언제까지나 지속될 필요가 있는 것이며 여기에 진술된 실행을 위한 규례들은 우리 시대는 물론이려니와 앞으로 오는 시대에도 준수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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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표제

신약의 다른 편지들과 마찬가지로 이 편지도 한 통의 편지였기 때문에 원래는 표제가 없었을 것이다. 

야고보서를 포함하고 있는 초기의 사본들 가운데 하나인 시내 사본(Codex Sinaiti- cus)에 의하면 이 편지의 서두에는 아무런 표제가 붙여지지 않았고 다만 맨 끝에 “야고보의 편지서”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후기의 사본들은 이 편지서가 어떤 특정한 회중이나 개인에게 보내진 것이라기 보다는 교회 전반에게 보내진 것이라는 의미에서 일반 편지서 또는 공동 서신이라고 일컫고 있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야고보서는 일반적으로 “일반 편지서” 또는 “공동 서신”이라고 일컬어지는 7통의 편지서들 가운데 가장 먼저 기록된 것이라고 한다. 

이 7통의 편지서들(야고보서,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을 “일반 편지서” 또는 “공동 서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들이 일반적인 교회 즉 모든 신자들을 대상으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볼 때, 그 칭호를 요한이서와 요한삼서에 적용시키기에는 전혀 부적합한 것이다. 그 2통의 편지는 개인들에게 부쳐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초기의 사본들에서 이 7통의 편지서들은 한데 묶여서 사도행전 다음에, 그리고 바울의 편지서들 앞에 놓여졌다. 

오늘날의 우리말 성경과 기타 언어로 된 성경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일반 편지서들의 순서는 주요 사본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순서 그대로이다.

 2. 저자

야고보서의 저자는 신원에 대하여 분명한 결론을 내릴만한 충분한 증거가 야고보서 자체에는 없다. 

신약 성경에는 야고보라는 이름으로 일컬어진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 이름은 유대인들 사이에 매우 흔히 있는 이름이었는데, 그것은 히브리식 이름 야곱의 헬라식 형태이기 때문이다. 이 이름이 자주 사용된 사실은 열두 사도들의 명단에서도 증명되고 있다(마 10:2, 3; 막 3:16-19; 눅 6:14-16). 

이들 중의 하나가 세베대의 아들이요, 요한의 형인 야고보였고, 둘째번 야고보는 알패오의 아들이었다.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또 하나의 성경상 인물은 열 두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의 아버지였다. 그런데 그 제자의 이름은 유다였고, 신약에서 그를 일컬어 “야고보의 유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야고보의”라는 말은 흠정역에서 번역한 것처럼 “야고보의 형제”(눅 6:16)가 아니라 “야고보의 아들”이었다.

야고보서의 저자는 성경에 알려진 여러 야고보들과는 전혀 다른 야고보라기 보다는 성경 기록 가운데 이미 야고보라는 이름으로 언급된 몇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일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야고보서 1장 1절의 서론에서 느낄 수 있는 음조는 이 편지서의 기자는 이것의 수신인들에게 잘 알려진 사람으로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가 공인된 권위를 가지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복음서의 기록에 의하면 열 두 제자들이 모두 주님과 밀접히 교제하고 있었으나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제자보다 더 뛰어난 제자였다. 그런데 야고보서의 저자가 바로 그 뛰어난 야고보라고 생각하는 저술가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가능성마저도 그가 죽은 연대가 이르다는 점(A.D. 44)과, 이 편지서가 기록되던 당시에 교회내에는 두드러진 야고보가 둘 또는 그 이상이 아니라 오직 한 사람 뿐이었음을 암시하는 야고보서 1장 1절의 부가적인 사실로 인하여 매우 희박해진 것 같다.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두번째 제자는 알패오의 아들이었다. 그는 네번이나 그의 아버지의 이름과 함께 나타남으로써 그 신원이 분명해졌다(마 10:3; 막 3:18; 눅 6:15; 행 1:13). 

이 야고보가 “작은 야고보”(막 15:40)와 동일한 인물인지에 관하여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만약 그렇다면 그의 아버지의 이름이 알패오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마리아였으며 그는 또한 요셉이라는 한 형제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마 27:56; 막 15:47; 16:1; 눅 24:10). 그러나 다른 곳에서 이 마리아는 글로바의 아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요 19:25). 알패오라는 이름에 상당하는 아람어 “칼파이”(Chalpai)와 연관시켜 알패오와 “글로바”(Cleophas, 눅 24:18)를 동일시 하려는 시도들이 있어 왔으나 그 두 이름이 참으로 동일인인지는 여전히 의심쩍은 문제로 남아 있다. 따라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작은 야고보가 동일인이 아니라고 결론짓는 편이 최상책으로 보인다.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이와같은 인물들 이외에 복음서의 기자들은 또 하나의 야고보, 곧 제일 먼저 열거된 것으로 봐서 예수의 네 형제들 중의 맨 맏형으로 생각되는 야고보를 언급하고 있다(마 13:55; 막 6:3). 작은 야고보와 마찬가지로 그에게는 요셉이라는 형제가 있었고, 그의 어머니(계모, 마 12:46)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그러나 이 두 야고보들이 동일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는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예수님의 어머니를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마 27:56)라고 표현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는 갈라디아서 1장 19절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거기서 바울은 자기가 회개한 후에 처음으로 예루살렘에 갔을 때, 모든 사도들 가운데서 오직 베드로와 “주의 형제 야고보”만을 만났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신약의 다른 곳에서 야고보라고 불리운 교회 지도자 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의 이름에는 신원을 밝혀줄 아무런 호칭이나 자격이 붙어있지 않다. 그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가 죽은 후에 사도행전에서 비로소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가 죽은 뒤로는 별다른 신원의 묘사없이 그냥 야고보로 알려질 만큼 두각을 나타내고 있던 지도자는 오직 한 사람 뿐이었음이 분명하다. 

이 야고보에 대하여 그 후에 계속된 성경 기록에 의하면 그는 하나의 두드러진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베드로가 헤롯의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 그는 자신의 출옥 경위를 야고보에게 보고하라고 사람들에게 지시하였다(행 12:17).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열린 교회 총회를 사회하였고 결의사항을 선포하였다(행 15:13, 19). 

바울은 자기의 사업에 관한 것을 야고보에게 보고하였다(행 21:18). 

야고보는 사람들에게 교회들을 방문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갈 2:9). 

이 야고보가 또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아마도 그의 장래의 책임에 관한 특별한 교훈을 주시기 위하여 특별한 현시로 그에게 나타나신 바 있는(고전 15:7) 바로 그 야고보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초기 교회의 “기둥”같은 인물 세 사람을 열거하면서 야고보를 제일 먼저 들고 있다(갈 2:9). 

이 모든 점들을 고려해 볼 때, 이 야고보가 당시의 전반적인 교회를 향하여 자기를 소개하면서 단순히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약 1:1)라고 말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이제 남은 문제는 이 야고보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인가, 아니면 주님의 형제 야고보인가 하는 것이다. 

이 야고보를 알패오의 아들로 보는 편을 지지하는 사실로서 열 두 제자 가운데(행 1:13, 14),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이 나타났다가는 잠시 후에 심지어는 죽음에 대한 언급도 없이 기록에서 사라지는 반면에 같은 이름의 또 다른 한 사람은 아무런 소개의 말도 없이 탁월한 존재로 나타나는(행 12:17) 것은 이상하게 보인다는 점이다. 한편으로 이 야고보를 주님의 형제로 보게 하는 증거들도 상당히 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1장에서 주님의 형제 야고보를 언급한 직후에 갈라디아서 2장에서 교회의 지도자인 야고보를 다시 언급한 것은(비록 그것이 입증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그 두 야고보가 동일인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나아가서 주님의 형제 야고보의 죽음에 관한 요세푸스의 이야기는 그가 교회 내에서 하나의 지도자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적어도 2세기로부터 내려오는 그리스도교 전통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던 야고보를 주님의 형제 야고보와 동일시하고 있다.

초기의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은 이 편지서의 저자에 관하여 서로 상치되고 모순된 견해들과 엇갈린 개인적 결론을 제시하였다. 

그들의 오류는 주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를 “요셉의 아들” 야고보와 동일시한 그릇된 관점과 갈라디아 1:19의 야고보와 갈라디아 2:9의 야고보는 동일인이라는, 근거가 확실하지 않는 결론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요세푸스는 말하기를 “그리스도라 일컬어진 예수의 형제” 야고보의 죽음은 베스도가 죽은 후에, 그리고 그의 후계자인 알비누스가 부임하기(A.D. 62)전에 있었으며, 야고보는 돌에 맞아 죽었다고 하였다. 이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비록 유세비우스는 이것을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의인” 야고보에게 적용시키고 있고, 또 요세푸스의 알려진 문헌에는 아무데서도 발견되지 않는 다른 인용구를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아무래도 “요셉의 아들” 야고보의 죽음에 대한 실제적인 기록으로 보인다.

유세비우스는 또 말하기를 거룩한 책들은 그리스도와 사도들로부터 예루살렘의 감독직을 맨 먼저 받은 야고보가 바로 “그리스도의 형제”임을 보여 준다고 하면서 성경을 그 사실에 대한 권위있는 증명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는 바울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의인” 야고보와 “주의 형제” 야고보를 동일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인용한 본문이 진술하는 것 이상으로 짐작한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곳에서 유세비우스는 야고보를 구주의 형제들이라고 주장된 사람들 중의 하나로 언급하고 그가 또한 70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는 야고보를 “주의 형제”, “요셉의 자녀” 그리고 “의인”등과 동일시하고 있다. 

그는 야고보가 예루살렘의 포로(A.D. 70) 직전에 순교를 당했다고 진술하고 글로바의 아들 시므온, 즉 어떤 사람들은 구주의 사촌이라고 말하는 시므온이 야고보를 계승하여 예루살렘의 감독의 지위에 올랐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요세푸스가 말하는 야고보의 사망 연대와 모순을 빚고 있다. 

그는 또한 시므온이 글로바의 아들이고, 유다는 육신적 혈통으로 그리스도의 형제라는 언급을 하고 있다. 그는 시므온이 글로바의 아들이었고 글로바는 주(主)의 삼촌이었다는 그의 결론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헤게시푸스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는 다시 헤게시푸스가 말한 바 있는 시므온이 야고보의 삼촌이었다는 말을 인용한다. 그는 야고보의 생애와 죽음에 관하여 헤게시푸스가 기록한 그 유명한 이야기로부터 인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문맥에 비춰볼 때 이 이야기는 그 기자가 함부로 고쳐 쓰고 매우 과장해서 기록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유세비우스는 클레멘트의 글을 인용하면서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두 사람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의인”이라고 일컬어진 한 야고보는 마전장이의 몽둥이에 맞아 죽었고 다른 야고보는 참수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클레멘트는 그렇게 말하지 아니하지만, 유세비우스는 첫번 야고보를 주님의 형제와 동일인으로 보고 있다. 같은 귀절에서 그는 클레멘트의 말을 인용하여 “베드로와 야고보(세베대의 아들)와 요한은 구주의 승천 후에는 영광스런 자리를 차지하고자 다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일찍이 구주로부터 존귀를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인 야고보는 예루살렘의 감독으로 선택함을 받았다”라고 진술하고 있다.

외경서인 히브리인 복음서 (Gospel According to the Hebrews)는 의인 야고보가 맹세하기를 주께서 그 잔을 마신 때로부터 그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신 것을 보기까지는 떡을 먹지 않겠다고 하였다는 진술을 함으로써 그를 주의 만찬 석상에 참여한 열 두 제자들 가운데에 분명하게 포함시키고 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에게 나타나신 사실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떡을 취하셔서 축사하시고 떼셔서 의인 야고보에게 주시면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의 형제여, 당신의 떡을 잡수시오. 왜냐하면 사람의 아들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났기 때문이오’라고 하셨다”. 

여기서 “나의 형제”라는 귀절을 사용한 것은 이 야고보가 주님의 형제였음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비성서적인 자료들 중의 어느 하나도 이 편지서의 저자의 신원을 밝혀주는 일에 크게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편지서의 저자를 주님의 형제와 동일시함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는 것은 그 저자가 헬라어 문장력에 있어서 상당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그의 어휘가 풍부할 뿐만 아니라 그의 문체는 의식적으로 신랄한 공격형-대중의 인기를 끄는 윤리적 연설-으로 알려진 헬라식 문체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주님의 형제 야고보에 관하여 알려진 것으로는 그가 그와 같은 작품을 쓸만한 배경을 가졌으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할 수가 없다. 그는 갈릴리의 한 목수의 아들이었고, 문화적인 배경에 있어서 철저히 유대적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 문제에 있어서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제시된 모든 논증들이 잘 알려진 것에 근거하기보다는 알려지지 않은 것에 더 많이 근거하여 주장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야고보서의 저자는 미결의 문제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필경 그 저자는 신약의 다른 곳에서 언급되어 있는 야고보라는 이름의 주요 인물 세 사람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3. 역사적 배경

이 편지서에 나타나 있는 많은 지리적인 암시들은 그것의 기록 장소가 팔레스타인일 것으로 짐작케 한다.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 기자가 기름과 포도주와 무화과 나무가 풍성한 나라에 살았다는 것, 그는 바다로부터 멀지 않는 곳에 있었다는 것, 그 근처에는 소금과 쓴 샘물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땅은 가뭄을 탔고, 그리하여 비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는 것 등이다.

이 편지서의 연대를 결정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없다. 진술한 바와같이 이 책이 기록된 것은 교회내에서 오직 한 사람의 두드러진 야고보가 있게 된 때, 따라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가 죽임을 당한 A.D. 44년 이후였을 것으로 보인다. 내적인 증거는 그 연대가 이른 것을 말해준다.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대집단에 대해서나 이방인들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회당이 아직 교회였고,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널리 퍼져 있었다(행 2:9-11; 4:36; 9:2, 10, 14, 19, 26; 11:19, 20).  

이 편지서의 전반적인 취지는 그리스도는 모든 참된 유대교의 완성이라는 것이다.

 4. 주제

이 편지서는 진정한 산 믿음이 한 제자의 생애에서 어떤 결과 또는 행위를 산출하는지를 보여주는, 실제적인 그리스도교의 모습을 제시하는 책이다. 

편지서 전체를 통하여 강조된 사항은 참된 종교의 양상과 효과와 결과를 거짓 종교의 그것들과 대조시킨 것이다. 

이 설교식의 편지서는 아름답고도 핵심을 찌르는 많은 예증들로써 가득 차 있다. 

문체는 단순하고 직접적이며 어떤 분명한 계획에 의하여 정리되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서로 명백하게 구분되는 사상들이 떼를 지어 제시되어 있다. 

야고보는 그의 마음 속에 떠오르는 대로 여러가지 주제들을 취급하면서 그의 충만한 정서가 넘쳐 흐르도록 자유롭게 기록하고 있다. 

야고보서에 산상 설교의 내용을 넌지시 가리키는 많은 귀절들이 있는데 그것의 부분적인 목록을 만들어 대조하면 다음과 같다.

또한 이 편지서에는 바울의 기록들과 평행을 이루는 귀절들(약 1:22; 롬 2:13)과 베드로의 기록들과 평행을 이루는 귀절들이(약 4:7; 벧전 5:8, 9) 많이 있다.

 5. 개요

Ⅰ. 인사 1:1

Ⅱ. 시험과 유혹 1:2-18

     1. 인내와 지혜의 필요성 1:2-8

     2. 세상적인 고난을 당할 때나 존귀를 누릴 때에도 참음 1:9-12

     3. 시험과 유혹의 근원 1:13-18

Ⅲ. 참된 종교의 증거들 1:19-27

     1. 말하기 보다는 오히려 듣기 1:19-22

     2. 듣기도 하고 행하기 1:23-27

Ⅳ. 초기 교회에 있던 공통적인 위험들에 대한 경고 2:1-5:6

     1. 사람을 외모로 취함에 대하여 2:1-13

     2. 단순한 믿음의 공언에 대하여 2:14-26

     (1) 행함이 없는 믿음은 무가치함 2:14-20

      (2) 행함을 낳는 진정한 믿음의 실례들 2:21-26

     3. 혀가 짓는 죄에 대하여 3:1-18

      (1) 특히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혀를 잘 조정할 것 3:1, 2

      (2) 혀를 잘 사용한 경우와 잘못 사용한 경우의 예증들 3:3-12

      (3) 혀의 사용을 포함한 적절한 행위에 대한 권면 3:13-18

     4. 형제들 사이의 다툼과 싸움에 대하여 4:1-17

      (1) 다툼의 근원과 자기 추구 4:1-4

      (2) 하나님께 굴복하라는 권면 4:5-10

      (3) 비방을 하지 말라는 권면 4:11, 12

      (4) 허탄한 자랑을 하지 말라는 권면 4:13-17

     5. 부정한 이득과 재물의 오용에 대하여 5:1-6

Ⅴ. 마지막 권면 5:7-20

     1.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인내가 필요함 5:7-11

     2. 적절한 행위가 언제나 필요함 5:12, 13

     3. 병든 자들을 돕는 일에 기도가 유효함 5:14-18

     4.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일하라는 권면 5:1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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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1장 (개요)

인사와 머리말을 쓴 후에(1) 그리스도인들에게 시련 아래서 그들이 어떻게 자신을 이끌어 나가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었다. 

그 다음 몇 가지의 은혜와 의무들이 권고된다. 

야고보가 본문에서 지시한 바와 같이 시련과 박해를 견딘 사람들에게는 축복이 주어질 것이 선언되고 또 영광스러운 상급이 약속된다(2-12). 

그러나 고통을 가져오는 죄와 약함과 실수는 인간들에게 책임이 있으며 결코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 

하나님은 죄의 주재자가 되실 수 없으며 모든 선함의 주재자이시다(13-18). 

모든 격정과 분노와 악한 욕망은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주요한 연구 과제가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하여 듣고 그러므로 알게 된 것은 반드시 실천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 말씀 이외 순수한 믿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설명되고 있다(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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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말(약 1:1)

본문은 본서의 서문이다.  서문은 세 가지 주요한 부분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Ⅰ. 저자의 명칭.  저자는 자신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1절)라고 명칭으로 알려지기를 바랐다.  

비록 그는 자기가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으뜸가는 사역자였지만 그는 스스로를 가리켜 종이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 교회 안에서는 가장 최고의 직분을 가진 사람이거나 또는 아무리 큰 공을 세운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종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만 사역자로서 행동해야 하고 주인 행세를 하여서는 안 된다.  

더 나아가서 그는 복음 전도자들 간에 "주님의 형제"라고 불리웠으나 그 자신은 육을 따라 그리스도의 형제임을 자랑하고자 하지 않고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을 더 영광되게 알았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명칭을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해야 한다.  야고보가 자기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고백하였다는 것은 우리가 섬길 때 아버지와 함께 아들도 섬겨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우리가 아들의 종으로서 일하지 않는 한, 아버지께 대한 섬김도 용납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기를" 바라신다(요 5:23).  즉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께 용납 받고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도움을 받으며 그리스도께 순종하고 또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하기를 바라신다.

Ⅱ. 야고보는 이 서신을 받는 사람들의 정황을 본문에서 언급하였다.  즉 그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라고 하였다.  

어떤 주석자는 본문의 흩어진 자들을 스데반의 이후에 흩어진 유대인들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행 8:1).  

그러나 그때의 흩어진 범위는 유대와 사마리아에 한정된 것이다.  

다른 주석자들은 본문의 흩어진 유대인들을 앗수르와 바벨론과 애굽 및 여러 나라들 가운데로 흩어진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들이 이들 나라로 가게 된 것은 전쟁으로 인한 것이었다.  열두 지파 중 열 지파의 대다수의 사람들을 포로로 잡혀가서 그 나라에 동화되어 사라졌다.  

그러나 아직도 각 지파 가운데 몇 사람들이 남아서 "열두 지파"라고 전통적인 명예로운 존칭으로 일컬어진 것이다.  

여하간 서신을 받은 사람들은 흩어진 유대인들이었다.

1. 하나님이 그들을 흩어진 것은 자비의 섭리가 있으셔서였다.  

구약에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하나님은 그의 섭리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각 나라로 흩으시고 그들을 통해 각 나라에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퍼뜨리고자 하였다.

2. 또한 그들이 흩어진 것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유대 나라는 여러 조각으로 분리되었고 그 백성들은 자기의 나라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들의 나라는 그들에게 견딜 수 없는 고난을 주었다.  그 백성들 가운데 선한 사람일지라도 모두가 당하는 재난에 동참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3. 본문의 흩어진 유대인들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박해를 받았고 그러므로 다른 나라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사람들이 유대인들보다 더 그리스도교인에게 친절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의 선택하신 백성이라 할지라도 때때로 각지로 흩어지게 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들이 다시 모이는 날은 마지막 날까지 보류되고 있다.  

그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흩어진 자녀들을 모두가 그들의 우두머리 되시는 그리스도께로 함께 모일 것이다.  

그 동안은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각지로 흩으시며 한편 또 그들을 돌볼 자를 그들에게 보내신다.  

본문에 보면 한 사도가 흩어진 유대인을 위하여 편지를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편지는 그의 성전에서 쫓겨나 이제는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신 것이라고 낙심하는 그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보내시는 것이었다.  

본문의 정황을 에스겔 선지자의 말씀을 통해 살펴보자.  에스겔은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고 열방에 흩었으나 그들이 이른 열방에서 내가 얼마동안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겔 11:16)고 말씀했다.  이같이 하나님께서는 추방당한 자기의 백성들을 특별히 돌보신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너 모압이여 내가 나의 쫓겨난 자들로 너와 함께 있게 하리라"고 하였던 것이다(사 16:3, 4).  

하나님의 백성들도 흩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외적으로 누리는 특권을 너무 귀하게 여기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는 외적인 재난을 당한다고 낙심하거나 하나님께 거부당하였다고 생각하여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흩어진 그의 백성들을 기억하시고 위로를 주시기 때문이다.

Ⅲ. 야고보는 본문에서 흩어진 유대인들에게까지 존경을 표하였다.  본문에 보면 그는 그들에게 "문안하였다." 

즉 그들에게 인사를 보내고 그들의 평안과 구원을 기원하였다.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그들이 고난당하고 있다고 해서 낮게 평가하여서는 안 된다.  

사도는 흩어진 유대인들이 위로를 받는 것이 그의 진정한 소망이었다. 그는 그들이 잘되고 평안하며 어떤 곤경 속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언제 어디서나 기뻐할 이유가 충분하였다.  왜냐하면 모든 것에 넉넉하신 주님이 이 모든 수고에 대하여 풍성한 것으로 갚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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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인내의 필요성(약 1:2-12)

이제 우리는 야고보서의 본론을 다루게 되었다.  위의 구절에서 우리는 다음의 내용들을 고찰하도록 하자.

Ⅰ. 본문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고난이 주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말씀되고 있다.

1. 시련과 고통은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있을 수 있음을 본문은 말해 준다.  

즉 가장 사려가 깊고 소망에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주어질 수 있는 것임을 말해 준다.  

가장 큰 기쁨을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들일지라도 가장 고통스러운 고난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선한 백성들이 흩어짐을 당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닌 것처럼 또한 그들이 어려움을 당한다고 해서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여서도 안 된다.

2. 이러한 외적인 고난과 고통은 그들에 대한 일종의 시험/시련이다.(연단/단련 -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까지 <특히 믿음의 창시자이신>그리스도, 그분의 인격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닮아감 이루시려 함!!)  

사탄은 고난과 십자가를 인간에게 매워 줌으로 그들로 하여금 죄를 짓고 가지의 의무를 태만히 하게 만들려고 애쓰며 또는 그들로 의무를 감당할 수 없게 만들려고 애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힘입어 이 시련을 극복하면 그 시련은 오히려 우리의 믿음의 덕을 증강시켜 주는 것이다.

3. 이러한 시험들을 대단히 많고 다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야고보가 본문에서 말한 대로 "여러 가지의 시험"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당하는 시험은 대단히 많고 또 그 종류가 다양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갑옷으로 무장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빈틈없이 무장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시험은 사방에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4. 선한 사람은 시험의 기회를 스스로 만들거나 또한 죄를 지으므로 스스로 자초하여 시험에 빠져들지 아니한다.(오직, 주 임재 앞에서 믿음으로 말씀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기를 힘써 추구하기에, 절제-경건-신중-온유-관용-온전한 인내 이루기를 추구함)  

그러므로 이 때 믿는 이에게 주어진 시험은 그에게 ((최상의 유익을 주시려고, 더 높은 단계 , 살아 생동하는 참 믿음을 더 상승케 하시려고 허락하신 바!!))그냥 닥쳐 온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선한 사람은 시험을 더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Ⅱ. 본문은 우리에게 시련과 고난의 상황에서도 지녀야 할 믿음의 덕과 지켜야 할 의무를 알려 준다.  

만일 우리가 고난 중에도 우리의 할 바를 다하여 믿음이 자라날 수 있다면 고난 당하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하겠는가!

1. 그리스도인의 시련 중에 지녀야 하는 덕 가운데 하나는 기쁨이다.  

본문은 우리에게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2절)고 하였다.((자격을 인정해 주심이다!!))  

우리는 시험을 당하여서 슬픔에 빠지거나 마음이 동요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태도는 우리를 시험에 패배하게 만든다.  

다만 우리는 고난을 당하면 우리의 영혼을 깨닫고자 노력하고 가장 최선의 방법으로 고난에 대처함으로 좀 더 큰 유익을 얻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철학도 인간들로 하여금 고난의 때에 평정을 유지하도록 가르칠 수는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들에게 [애매한] 고난을 당할 때 기뻐하도록 가르친다.  

왜냐하면 이러한 시련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난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의 대장되시는 그리스도와 같은 태도를 지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하는 시련들을 우리의 양자됨의 표지가 된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은 인간들 가운데 세워진 주의 나라의 유익을 위하여 섬기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빛내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당하는 시험은 현재의 우리의 믿음을 더욱 빛나게 할 것이며 마지막날에 우리의 면류관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무를 행하는 중에 온갖 시험과 어려움이 닥치면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적인 진리는 신약에서 처음 말씀된 것이 아니고 이미 욥의 시대에도 말씀된 것이다.  

거기 이르기를 "하나님에게 매를 맞는 자가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만약 우리가 시험을 당하므로 믿음이 더욱 온전해질 수 있다면 우리가 환난 가운데 기뻐해야 하는 이유는 더욱 커지는 것이다.

2. 믿음은 하나의 덕으로 어떤 사람은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에게는 명백히 필요한 것이다.  

본문에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3절)라 했고, 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6절)라고도 했다.  

시련의 때에는 기독교의 위대한 진리에 대한 건강한 믿음과 그 진리에 굳게 매달림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환난으로 시련 당한 믿음은 하나님의 권능과 말씀과 약속에 대한 믿음과 주 예수께 대한 신실성과 견고함에서 생겨지는 것이다.

3. 인내하여만 한다.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3절).  

한 가지 덕에 대한 시련은 또다른 덕을 만들어내고, 그리스도인의 덕들의 많은 고난을 당하면 당할수록 그 덕들은 점점 더 강하여 진다.  

"환난의 인내를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  이제 그리스도인의 인내를 올바르게 단련시키기 위하여 우리는 다음의 일을 행하여야 한다.

(1) 인내심이 작용하도록 해라.  

인내는 마비된 것이 아니고 활동적인 것이다.  세상사람들의 금욕적인 냉담과 그리스도인의 인내는 매우 다르다.  

금욕적인 냉담으로 인간은 자기가 당하는 환난에 대하여 다소 감각이 무디어지지만 그리스도인의 인내는 인간들로 하여금 그 환난을 극복하고 승리하게 만들어 준다.  시련의 때에 우리들 속에 인내가 작용하고 사람의 열정이 작용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우리가 무엇을 말하고 행하든지 간에 인내가 말하고(주 임재 앞에서, 코람데오의 의식으로, 인내함으로 말하며) 인내가 행하도록(인내함으로써 겸손과 신중함으로) 하여야 한다.  

사람의 열정이 인내의 작용과 그 산출해 낼 고귀한 결과를 결코 방해하거나 빼앗지 못하도록 조심해야 한다.  

사람의 열정이란 근심으로 번민할 때에 더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소스라치게 놀라며 경악할 만,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도록 작동하는 법이다.

(2) 우리는 인내로 하여금 그 사명을 다하도록 해 주어야 한다.  

어떠한 제한을 두거나 인내를 약화시키는 일을 해서는 결코 안 되고, 다만 인내로 하여금 그의 모든 목적을 수행하도록 해 주어야 한다.  

만약 한 가지 환난의 뒤를 이어서 또다른 환난이 잇달아 오고, 이러한 환난이 계속된다고 할지라도 인내는 그의 임무를 완전히 이룰 때까지 지속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모든 것을 이루고, 그가 명하시는 동안 내내 계속하여 겸손한 복종의 눈으로 그를 지켜보며 그 분부하신 것으로 마음에 근심하지 않고 오히려 즐거워할 때, 비로소 인내는 그의 사명을 완전히 수행해 냈다고 할 수 있다.

(3) 인내가 그 사명을 온전히 이루었을 때 그리스도인은 완전해지며 더 이상 바랄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인내는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과 투쟁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여 주며 마지막날까지 견디도록 도와줌으로써 그 사명을 다하게 되고, 마침내 영광의 면류관을 얻게 해 줄 것이다.  물론, 믿는 우리들은 보통 먼저 다른 많은 덕들로 풍성하여진 후에야 비로소 인내의 중요성을 깨닫고, 인내 이룸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히 10:36).  그러나 인내로써 그 완전한 사명을 수행케 하면 우리도 완전해지고 부족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질 것이다.

4. 기도는 고난 중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권고된 의무로써 이에 대하여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 우리가 특별히 위하여 기도할 것은 지혜로써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하나님께 구하라"(5절)고 말한다.  

환난이 옮겨지기를 위해서 기도하기 보다 오히려, [연단과 단련 받음 통해 합당한, 영광의 소망 이룸을 위한] 지혜를 바로 사용하기 위하여 기도하여야 한다.  

큰 시련 속에서 지혜를 구하지 않고 스스로의 판단과 자신의 정신과 기질의 지배를 받으면서 자기 일을 혼자서만 떠맡아 해결해 보려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시련의 때에 지혜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 곧 선물이며 그 지혜는 우리가 하나님께 진정으로 간절히 구하여 얻어야만 하는 것이다.

(2) 이러한 지혜를 얻는 방법은 그것을 얻기 위하여 탄원하고 요구하는 것이다.  

어찌보면 진정 그대가 보기에는 스스로 어리석은 자로 여겨질지라도 은혜의 보좌 앞에서 [주님을 얻기 위해서라면] 빈털털이가 되는 것조차 달갑게 여기며 감수하기를 각오한다면, 그들은 지혜로운 자가 되는 가장 올바른 길에서 있는 셈이 된다.  

이 말은 [생명과 경건에 이르게 할 참된] 지혜를 그 어떠한 인간에게도 하릴없이 요구하지 말고 하나님께 [직접 간절히 목숨 걸고!! 사랑스러운 거룩함의 영광중에 계신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함으로써, 그분이 친히 마련하신 <단독자, 기독자의> 데스티니를 이루시도록]요구하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지혜를 요청하는 자를 만드신 분, 자애로운 아버지이고 그에게 이해력과 이성의 사고의 능력을 주신 분으로서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물들은 그분에게 속하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지혜가 필요함을 하나님께 고하고 날마다 그에게 지혜를 구하여야 한다.

(3) ((친히 낳으신 그분의 자녀로서))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5절)이란 말씀에서 지혜를 구하는데 대한 큰 용기를 얻을 수 있음을 굳게 믿고 구힌 바를 얻는다.  그렇다, 지혜를 구하기만 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5절)고 분명하게 약속되어 있는 것이다.  

자신의 연약함과 어리석음을 깨닫고 하나님 아버지께 지혜를 구하려 할 때 우리의 마음을 [자신의 지난 과오때문에 거절하실지 모른다거나 그분의 침묵에 대한 염려에 사로잡힌 나머지, 거절하실지 모른다-거절하셨다고 짐짓 추정/지레짐작하여 구하기를 포기함으로써]낙심케 하여 변절시키는 모든 요소에 대하여 대답해 주는 그 무엇이 이 말씀 속에 들어 있다.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지혜의 필요성에 의하여 우리가 보내어진 그분 즉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실 지혜를 가지고 계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을 구하는 자들에게 주시기를 즐겨하시는 성품의 소유자이시다.  

이 경우, 하나님의 은총은 어떤 사람들에게만 제한되어 그 밖의 사람들 또는 변변치 못하게 간구하는 영혼은 제외된다는 등의 두려움을 가질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주신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대단히 많은 양의 지혜를 필요로 한다고 간구하면, 결코 그보다 작은 양의 지혜가 주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이에 대하여 확언하기를 하나님은 후히 주시는 분이라고 하였다.  

또한 우리는 아무 때나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자기 자신이 어리석음에 대하여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저자는 이에 대해서도 말하기를 하나님은 꾸짖지 아니하시는 분이라고 한다.  

우리가 언제든지 간에 지혜를 구하고 싶거든 얼마든지 자주 구하라.  그러면 아무 책망도 받지 않고 지혜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 말씀들이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적중하는 말일지 몰라도 내가 지혜를 구할 때에는 다른 사람들에서처럼 지혜가 주어질 것 같지 않아 두렵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는 말씀이 얼마나 각별하고 분명한 약속인가를 생각토록 [<하나님이 살아계심에 대해조자 믿어지지 않는다면...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에 대한 믿음조차 내게는 없습니다...도와주세요, 살려주십시요>라고, 솔직하고 정직하게 연약-무력함을 아뢰고...주님 자신을, 주님의 지혜를 구해 보라!!]일깨워 주어야 한다.  

주님의 지혜가 그 요청한 자에게 주어지게 되리라는 약속이 분명히 있더라도, 고집스런 어리석은 불신자들은 [구하기를 거절함으로써!!!]그들의 어리석음 속에빠져서 스스로 파멸에 이르기까지, 결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4) 우리가 지혜를 구할 때 고려해야 할 한 가지는 믿음으로 꾸준히 [주실 그 때까지, 목숨걸고!!] 구해야 하는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6절).  우리가 그런 조건을 지킬 때(!!!) 그 약속은 확실히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지혜는 하나님께 친히 구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며 이 지혜를 얻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순수한 지혜를 만드실 수 있는 분이며, 또한 자신의 말씀을 의지하여 지혜를 구하는 자들에게 그의 약속을 충실하게 지켜 주시는 분이심을 믿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고쳐 주심을 바라고 나온 사람들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신 조건은 바로 이것이다.  "내가 이것을 할 수 있으리라고 네가 믿느냐?" 

믿음에는 조금도 의심으로 인한 동요가 있어서는 안 되며 불신앙이나 또는 순전히 인간적인 생각에서 손해나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불안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5. 단 하나로 집약된 의도와 그 성실성, 그리고 믿음의 굳셈은 환난 중에 요구되는 또 하나의 의무를 이룬다.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6절) 

보라, 때로 믿음으로 들어 올려졌다가는 그 다음 순간에 불신으로 인하여 다시 내팽개쳐지고 또 때로 영광과 존귀케 됨과 불멸을 얻고자 하는 의도에서 하늘나라를 향하여 올라갔다가는 그 다음 순간에 육신의 안일과 이 세상의 향락을 찾아 다시 아래로 곤두박질하는 식의 태도가 바다의 물결에 아주 적합하고 어울리도록 비교되어지고 있다.  

바다의 물결이란 바람이 상하로 불어대거나 좌우 사방으로 불어댐에 따라 높이 치솟았다가는 떨어지고 또 불어났다가는 다시 가라앉아 버리곤 하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있는 영적이고 영원한 관심거리에 대하여 집요하고 풍성한 관심을 가지며 그 목적을 꾸준히 하나님께 집중시키고 있는 사람은 환난으로 인하여 오히려 더 지혜로워지고 열렬한 헌신의 생활을 계속할 것이며 또한 모든 시련과 반대를 넘어서고 초월하여 그보다 우위에 있게 될 것이다. ((돌파하시는 하나님, 나를 지으신 아버지가 친히 일하신다, 무엇이 그분의 돌파하시는 권능을 막으랴, 누가 주와 같으랴...다만 그분께 합당한 거룩한 그릇됨을 견지하고 전적으로 주를 의뢰하라..주님이 일하심에 있어서 유일한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은 나의 불신앙과 죄뿐임을 알고 세심하게 살펴 보아 참되게 철저히 회개하고 십자가로 넘겨드리라. 이제 주를 앙망하며 기다리고, 이끄시는 그분과 하나되어 사랑겨워 행보하도록 하라....그분의 <나를 향한, 나를 위해 예비하신>데스티니를 가 친히 이루시도록 신뢰하며 열어주심따라 나아가라!!)) 

이게 야고보 사도는 의심하는 영혼과 약한 믿음을 고쳐 주기 위하여 그것들의 나쁜 결과를 제시한다.

(1) 야고보는 이쯤에서 기도의 성취에 대한 말은 끝내고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7절).  

불신하며 자주 변덕 부리며 안정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총을 [무의식적으로 상대화 하고 폄하함으로써] 마땅히 그가 존귀히 여겨야 할 것으로 생각지 않기 쉽다.  따라서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것을 기대할 수도 없다.  

신적이며 하늘에서부터 오는 지혜를 구함에 있어서 우리가 그 지혜를 이 세상의 루비나 그 밖의 가장 귀중한 것들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갖지 못하면 그 간구는 결코 성취되지 않을 것이다.

(2) 의심하는 믿음과 영혼은 우리들의 대화에 나쁜 영향을 준다.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8절).  

우리의 믿음과 영혼이 이차적인 것에 대한 원인으로 인하여 심한 변화를 일으킨다면 우리의 언행은 대단히 불안정할 것이다.  

이러한 언행으로 인하여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멸시를 당하게 되며 또한 그런 태도로써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에게도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한 분 하나님만을 믿을 때 한 분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게 되므로 이러한 상태 속에 우리는 조용히 그리고 끈기 있게 남아 있어야 한다.  

물과 같이 불안정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결코 드러나 보이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Ⅲ. 그리스도인의 거룩하고 겸손한 성격의 좀 더 성숙한 것과 아직 미성숙한 것의 두 가지가 묘사되어 있고, 가난한 자와 부한 자는 그들의 기쁨과 위안을 어떠한 기반 위에서 얻어야 할 것인가를 알게 된다(9-11절).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것을 살펴 보자.

1.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라도 존귀한 형제들로서 존경을 받게 될 것이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9절) 가난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친교를 파괴하는 것은 아니다.

2, 훌륭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도 풍부하게 살 것이다.  

은혜와 풍요함이 전적으로 서로 상반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은과 금이 풍성하였다.

3. 그러므로 가난하든 부하든 간에 우리는 즐거워해야 한다.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지 못하도록 만들 수 있는 조건이란 아무 것도 없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잘못일 뿐이다.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믿음이 부유한 자로서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서 존귀케 되면 그는 기뻐하게 될 것이다.  

부유한 자는 낮고 겸손한 마음의 자세를 가질 때 그 겸손한 섭리로 인하여 기뻐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런 태도는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귀하고 가치 있는 일이다.  의를 위하여 가난해지는 자들이 있는 곳에서 그들의 빈곤은 오히려 그들의 존귀케 됨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치욕을 받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누구든지 낮은 자리에 처하고 은혜로서 낮아진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하늘나라에서 받게 될 존귀함을 바라보면서 기뻐하게 될 것이다.

4. 부유한 사람들이 자기들이 가진 부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겸손해지고 낮아지는 까닭을 살펴보면 그들 자신과 그들의 재산이란 모두 지나가 버리는 헛된 것이라는 것을 참되게 깨달아 알고 있으며, 바로 그렇게 대하기 때문이다.  마치 풀의 꽃이 쇠잔함과 같이 부한 자와 그가 지닌 재산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11절) 이제 다음을 주의해 보자.  

세상적인 제물은 시들어 버리는 것이다.  부는 너무나 불확실한 것이며(박스터가 말한 바와 같이) 또한 아주 사소한 것이어서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거나 우리 마음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꽃이 뜨거운 태양열에 시들어 버리는 것처럼 부한 자도 그의 부유함 속에서 행하는 일이 이와 같이 쇠잔할 것이다.  

이 세상을 위한 부자의 계획과 의도와 경영이 바로 11절에서 말하는 "그 행하는 일"로써, 이 속에서 그는 시들어 버릴 것이다.  

이같은 이유로 인하여 부한 자는 자기를 부유하게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 때문에가 아니고 그를 겸손하도록 만드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기뻐해야 하고 또한 그로 하여금 썩어질 쾌락에서 행복을 구하게 해 주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행복을 구하도록 가르쳐 주는 시련과 고난을 기뻐해야 한다.

Ⅳ. 12절의 말씀과 같이 괴로움과 시련을 견디는 사람들은 여기서 설명한 바와 같이 시험과 축복을 받을 것이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12절).  다음을 주의해 보자.  

--고난/고통을 잘 견뎌내면서 갈고 닦어서 보석이 되게하라, 상처 또한 별이 되어야 마땅하며, 그로 인래 사람을 치유하며 살리는 생명 약재가 되게 하라.-- 

1. 축복을 받는 자는 고난만을 받는 자가 아니라 그의 의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당면하는 모든 어려움 가운데도 인내와 견실함으로 견디어 내는 사람인 것이다.

2. 만약 환난이 우리 자신의 잘못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면 결코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축복은 환란으로부터 생겨지게 되며, 우리는 그 환란 속에서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환란이 선한 인간의 행복을 빼앗아 가는 것이 결코 아니고, 오히려 그 행복을 증진시켜 주는 것이다.

3. 고통과 유혹은 영원한 축복을 향하는 것이다.  

시험을 당했을 때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되는 것은, 그가 옳다고 인정함을 받은 때인 것이다(12절).  

그리고 그의 덕이 진실한 것과(마치 금속이 불로 제련되어 순수하게 됨으로써 가치가 인정되듯이) 그 고귀한 가치가 인정될 때, 그리고 그의 온전함이 분명히 밝혀질 때 비로소 위대하신 심판자로부터 모든 것을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시련 중에서 가져야 할 최대의 목표이고, 이 목표의 성취가 결국 그리스도인의 축복이며 따라서 이것으로 인하여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된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시련당한 그리스도인은 면류관을 쓴 사람이 될 것이며 그가 쓰게 될 그 면류관은 생명의 면류관이다.  

그 면류관은 그에게 희열이 될 것이며, 영원히 계속 될 것이다.  우리는 잠시 동안 고통을 당하나 면류관은 영원히 쓰게 될 것이다.

4. 생명의 면류관 속에 포함된 이 축복은 의의 고난자들에게 약속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약속에 확고하게 의존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천지가 다 지나갈 때에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에게 주어질 미래의 보상은 빛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은혜로운 약속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임을 주시하자.

5. 우리가 시험이 이기고 견디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원리로부터여야 하며 그렇지 아니하다면 우리는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셨다"는 약속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다.  

바울은 어떤 사람이 종교심에서 자기의 몸을 불사르도록 내어 줄지라도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하며, 그에게 주시는 대상이 못하는 것은 긍휼과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신실한 사랑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고전 13:3).

6. 생명의 면류관은 위대하고 남보다 뛰어난 성자들에게만 약속된 것이 아니라 그 다음이 하나님의 사랑의 지배를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약속된 것이다.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모든 영혼이 이 세상에서 받을 시련이란 사랑이 완전히 성취된 윗 세계에서 충분히 보상될 시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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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진행과 결과(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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